꿈을 꾸는 사람은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2012년 11월 9일부터 11월 12일까지 3박 4일 동안 AM트레킹에서 주관한 팸투어를 따라 중국의 요녕성 단동에 위치한 봉황산과 오룡산 트레킹을 다녀왔습니다.
이 글은 여행의 추억을 오랫동안 남기기 위하여 여행 중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기억이 마르기 전에 더듬어가며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쓴 것입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가이드의 설명과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얻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혹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꼬리글을 남겨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여행이 주는 여유는
삶의 속도를 늦추는 낭비가 아니었다.
새로운 자산을 구축하는, 성장의 기쁨을 누리게 한 기간이었다.
그동안 몰랐던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그리고
그러한 느낌들로 인해 여유롭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를 키워주었다.
여행이라는 추억의 실루엣은 그리움이 된다.
외롭고 고생스럽지만 보람 있고, 즐거웠지만 아쉬운 기억들은
'의미 있는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머릿속에 자리 잡아
그리움을 만들고 있다.
- 이종은의 《너무나 느긋한 휴식 스케줄》중에서 -
<여행1일차>
여행이란, 막상 떠나는 순간보다 떠남을 위해 준비하는 순간이 더 행복하다. 여행 가방을 챙겨 인천행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이번 여행에 동행할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고 인천행 버스에 오른다. 유성에서 출발하는 인천행 시외버스는 인천터미널까지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터미널 지하에 있는 기사식당에서 찌개백반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콜밴을 타고 인천항1국제여객선 터미널로 이동한다.
중국 단동으로 가는 배는 인천 중구 항동의 연안부두에서 출발하는데, 공식 명칭은 인천항제1국제여객터미널이다. 이곳에서 중국의 단동, 대련, 영구, 진황도, 연태, 석도로 출항한다. 참고로 동인천역과 가까운 인천제2국제여객터미널은 중국의 위해, 청도, 천진으로 출항한다.
전국에서 모인 이번 여행의 동행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합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3층으로 올라가 출국수속을 마치고 셔틀버스를 탄다. 단동페리 동방명주호까지는 셔틀버스가 데려다준다.
쉼표 없는 일상은, 대팻밥이나 톱밥처럼 인간을 본래의 삶에서 시나브로 깎여나가듯 부스러기로 만들 것이다.
-어느 여행가-
일상의 탈출구로 여행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훼리는 교통수단이 아니라 훼리 승선 자체가 여행의 시작이다. 국제선에서는 여객선에 승선하면서부터 여객선의 국적을 따르고 여객선 소속의 국가 영토로 취급한다고 한다. 이미 중국에 있는 것이다.
단동페리(Orienal Pearl VI) 동방명주호는 인천과 중국의 단동간 여객 및 화물운송을 하고 있는 10,648톤급(길이120.23, 폭20.00m) 선박으로 탑승정원은 850명이다. 1998년 7월 취항이후 현재까지 주3회 한국의 인천항을 출발하여 중국의 단동(丹東)항을 왕래하고 있다. 인천항에서 오후 6시경 출발해 단동의 뚱강(동항)에 다음날 아침 9시경에 도착한다. 약 16시간이 소요된다. 선내에 노래방은 없고, 술과 담배를 파는 면세점과 과자류를 파는 매점 그리고 화장품과 잡화 등을 파는 코너가 있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시바스리갈, 조니워커블랙, 발렌타인 12년산 1리터가 33$이다.
<사진출처:아침산>
배는 층수가 거꾸로다. 프론트에서 배정받은 선실 열쇠를 받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선실에 가방을 두고 갑판으로 나가 바다를 바라보며 출항을 기다린다. 툭 트인 시야가 가슴까지 시원하다.
<사진출처:아침산>
첫 일정은 기다리던 저녁 식사였다. 훼리호 1층 식당은 한꺼번에 100여 명이 이용할 수 있다. 밥과 육개장에 오이무침, 깍두기 등 음식은 비교적 우리 입맛에 맞는다.
<사진출처:아침산>
예인선이 선체후미를 밀어 방향을 틀면서 출항이 시작된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어둠을 내려앉은 망망대해를 항해한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로 사용했던 팔미도를 지나 가월도 부근을 지난다. 객실로 이동하여 동행이 준비한 자연산 우럭무침과 모듬회를 안주로 술잔을 돌리며 오랜만의 만나는 반가운 이야기꽃을 피운다. 중국 추억여행 첫날밤은 그렇게 깊어만 간다.
<여행2일차>
여행은 쉬어가는 여유다.
나이가 많건 적건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거창하지 않더라도 알뜰한 꿈을 가지고 키우는 삶은 아름답다. 세월은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삶을 충실하게 산 사람들에게 행복의 열매를 주는 데 그리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시간 아침 6시.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게 눈을 뜬다. 바다가 잔잔하여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일출을 보기위해 배 뒤편 선상으로 나간다.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스쳐 지나간다. 선상에서 맞는 아침은 색다른 느낌이다. 기분이 상쾌하다. 잠시 후 바다 저편에서 붉은 태양이 푸른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구름사이에서 얼굴을 내민다. 바다 빛이 금빛이다.
아침식사가 제공되고 어선들이 자주 보이는 걸보니 점점 중국 땅에 가까워지고 있나 보다. 팔을 뻗으면 손에 닿을 듯한 북한 땅 신의주가 보인다.
밤을 새워 꼬박 16시간의 긴 항해 후에 예인선의 도움을 받아 아침 9시 단동항에 무사히 정박한다.
단동항에 정박한 배는 하선시간이 되자 사람들로 북적인다. 중국에서는 중국 사람들이 먼저 하선하고, 한국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먼저 하선하는데 촬영 팀과 동행한 우리 일행은 편의를 제공받아 먼저 하선한다.
동항(東港)
단동에 있는 한국 사람들은 동항(東港)을 동강이라고 부른다. 정확히 말하면 둥강이 맞는 말이다. 인천 국제여객 터미널에서 출발한 단동페리가 일주일에 3번 둥강항에 입항을 한다.
하선 후 셔틀버스를 타고 연길 또는 흑룡강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저장하는 저탄장을 지나 출입국관리소(항무국)로 이동한다. 단체비자인 관계로 모든 인원이 한 곳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입국수속이 지연된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단동항 터미널로 나오자 압록강여행사의 황부장님(한국교포 여성)과 현지가이드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기후며 주변산세가 모두 한국을 닮아 낯설지가 않다. 중국말을 하는 사람들만 없다면 이곳이 중국인지 한국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터미널에 붉게 날리는 오성 깃발이 여기가 중국 땅임을 말해준다. 마중 나온 가이드가 사진을 촬영할 수 없는 구역이므로 함부로 사진을 촬영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주자창에 대기하고 있던 전용버스에 오른다. 이번 여행의 현지가이드는 조금석씨와 연경성씨다. 조선족이 아니고 북한 황해도 해주 출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북한을 왕래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자기들을 화교라고 부른단다.
여행의 목적은 많이 보는 게 아니라 다르게 보는 것이다.
동북3성
랴오닝성(遼寧省),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을 중국 동북3성이라 한다. 중국내에서 한반도와 가장 긴 국경선을 접하는 지역이다. 동북3성은 중화학공업 요충지로 중국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으나 중국 정부의 개방개혁정책이후 경제발전이 뒤처져 경제적 지위가 크게 약화됐다가 2003년 동북진흥정책 추진으로 다시 도약하고 있다.
지난 2002년 무렵부터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역사왜곡을 동북공정이라 일컫는다. 고구려, 발해, 고조선, 부여뿐만 아니라 중국 동북 3성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동북공정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의도로 최근에는 만리장성의 길이를 기존 발표치보다 2배 이상 늘어난 2만 1196㎞라고 주장하면서 그 동쪽 끝을 고구려와 발해가 지배하던 지린성과 헤이룽장성까지라고 억지주장을 펴기도 했다.
한반도 통일 이후 제기될 수 있는 영토 분쟁과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통제하려는 목적이 깔려있다.
신문 기사에 의하면 관영 중국중앙(CC)TV는 지난해 말 한 달여에 걸쳐 매주 토요일마다 '창바이산'(長白山·백두산의 중국식 이름)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발해를 세운 주체가 중국 동북지역의 소수민족으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부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713년 당나라 황제 현종이 대조영을 발해의 군왕으로 책봉했다고도 주장했다.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는 내용 일색이어서 논란이 됐다. 중국은 또 지난해 6월 자국 내 소수민족의 민요와 풍습이 포함된 제3차 국가무형문화유산을 발표하면서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의 '아리랑'을 포함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단동(丹東)
단동(丹東)은 중국 요녕성(랴오닝성) 남동부에 위치하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는 국경도시다. 역사에서 배운 옛 이름은 안동이었으나 1965년 ‘아침 해가 뜨는 붉은 도시’란 뜻의 단동으로 개명하였다.
단동은 수많은 역사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다. 당나라 '안동도호부'가 설치되면서 동북아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한국드라마 '대조영'에서 설인귀 장군이 활동한 지역이 바로 안동도호부였던 단동이다. 그 후 단동은 한적한 시골 국경마을이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중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다시 한 번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인구 240만 명인 단동은 고구려 영광의 상징일 뿐 아니라 한민족과 만주족, 한족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여행자들과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에게 가까이에서 북녘 땅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은 고대로부터 한반도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가는 길목이고 드넓은 중국 동북3성의 관문이다. 평양과는 220km, 서울과도 420km의 지척거리다. 황해에 접한 이곳은 대륙과 해양성 기후가 동시에 나타나 같은 위도의 지역에 비해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무엇보다 단동이 주목 받는 이유는 북한에서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신의주 경제개발 특구 때문이다. 신의주 황금평과 나진·선봉을 개발하기 위한 북·중 간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이것이 중국을 향한 북한 개방의 본격 신호탄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아무 생각없이 가서 많은 것을 담아오는 것이다.
역사는 미래를 보는 잣대이다. 역사는 과거이면서도 현재를 나타내주고 있으며 미래를 조명하여 준다.
단동에서 심양 방향으로 55㎞쯤 떨어진 봉성(鳳城)으로 이동한다. 달리는 버스 차창 밖으로 쪽빛 하늘을 수놓은 뭉게구름과 광활한 벌판이 펼쳐진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오직 추수가 끝난 황량한 옥수수밭 뿐이다.
봉성(鳳城)
깎아지른 듯한 절벽위에 세워진 봉황산성. 봉성(鳳城)이라는 지명은 바로 봉황산성의 줄임말이다.
SBS 주말드라마 <연개소문>을 보면 당나라와 고구려가 싸울 때 보장왕이 이곳에 머물면서 고구려군을 독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구려가 망한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연개소문이 죽기 전 그 아들들인 남생과 남건과 남산의 골육상쟁 때문이었다. 아버지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에 올라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한 큰아들 남생이 지방순시를 나가면서 동생인 남건과 남산에게 국정을 잠시 맡겼고, 누군가 형 남생과 이간질을 시켜 마침내 골육상쟁이 벌어진다.
동생에게 패한 형 남생은 보장왕 25년에 5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나선 당나라의 고구려정벌 길잡이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까지 자신이 통치하던 12개의 성을 들고 신라에 항복함으로서 골육상쟁은 극에 달했고, 때를 놓치지 않고 신라는 20만 대군을 일으켜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어떤 이는 이곳이 우리 역사의 영웅 고구려 양만춘 장군이 활약하던 '안시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연구학자들은 요녕성 해성시에 위치한 '영성자산성'을 고구려의 안시성으로 보고 이곳 봉황산성은 고구려의 '오골성'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라고 한다. 수나라가 고구려 침공당시 오골성까지 진격했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1,400년 전에는 이곳이 고구려 땅이었고 천리장성을 쌓은 곳이다. 고구려가 당에게 안 망하였다면 지금 이곳은 우리 땅이다. 그러나 역사에 만일은 없다.
차창으로 바라보는 봉황산은 기암괴석 등 암릉이 많고 아름다운 산세를 자랑한다. 수락산이나 영암의 월출산 느낌이다. 연행사신이었던 연암 박지원은 "전체가 돌로 깎아 세운 듯 평지에 우뚝 솟아 마치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세운 듯하며, 연꽃봉우리가 반쯤 핀 듯 아름답다. 하지만 그 기세에 있어서는 한양의 삼각산이나 도봉산 만도 못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한말까지 조중국경은 이곳 봉황산까지였다. 지금도 봉황산 서쪽 기슭에는 변문(邊門)이라는 지명이 쓰이고 있다. 압록강, 두만강에서 일괄적으로 북쪽 40km(백리)에 유지되던 국경이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과 주은래의 협정결과 두 강의 중심선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 먼저 식당에 들려 현지식으로 허기를 달래고 리포터가 여유국관계자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노점상에서 이곳 특산물인 배를 사서 후식으로 먹고, 본격적인 산행에 앞서 산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 봉황산 산문 입구 식당(점심식사 장소)
@ 봉황산 산문
@ 취재팀과 여유국관계자 인터뷰 장면
◈ 봉황산
봉황산은 요녕성 4대 명산중의 하나로 산세가 험준하며, 암릉 트레킹으로 유명하다. 봉황산은 단동에서 서북쪽으로 50km 떨어진 봉성(鳳城)에 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 사신들이 지나던 곳이다. 최고봉인 잔운봉은 해발 836m로 우리나라 삼각산 백운대 높이와 비슷하다.
이름의 유래는 태평시절인 순임금때에 산에서 봉황이 나타난 이래로 명군이 나타날 때마다 봉황이 나타난다 하여 봉황산이라 하였다는 설과 봉황산은 원래 이름이 '곰산'이었는데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이 산에 올랐을 때 봉황이 나와 절을 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산중턱 관음동에는 신비한 알바위라는 거대한 동굴이 있는데 그 바위 밑을 세 번 들락거리면 아들을 낳는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산행은 해방기념탑에서 출발하여 삼교당과 쌍용배를 거쳐 안내도상 우측 끝 정상 봉우리인 봉화대(烽火臺)에서 좌측 능선으로 나한봉(羅漢峰), 장군봉(將軍峰), 노우배(老牛背), 천하절(天下絶), 노호구(老虎口), 전안봉(箭眼峰), 신마봉(神馬峰)을 거쳐 남천문(南天門)으로 하산한다.
@ 해방기념탑
이곳 삼교당으로 오기 20m 전에서 두갈래 갈림길이 있는데 삼교당은 우측길이다. 삼교당은 도교, 불교, 유교의 신을 모신 곳이다. 좌측과 우측길이 있고 두 길 모두 협소한 동굴을 통과해야 한다. 랜턴을 비추고 약 10여 m를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빠져 나오면 된다.
@ 삼교당
@ 관음각
@ 집선대-신선들이 모였다는 장소
@ 쌍용배-두 마리 용의 등을 닮았다해서 붙여진 이름
봉화대에 오르면 이구아나를 닮은 바위가 눈길을 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청개구리가 달을 바라보는 모습이라고 한다. 같은 것을 보고도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멀리 심양(옛날 봉천)으로 달려가며 울려대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정겹다. 요즈음은 우리나라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다.
@ 봉화대
@ 나한봉 오르는 길
@ 나한봉
@ 토이봉
@ 늙은 소의 등을 닮았다는 노우배-봉황산 트레킹의 하이라이트
@ 노우배에서 바라본 지나온 암릉 길
@ 천도문
@ 늙은 호랑이의 입-노호구
@ 전안봉
@ 연인석
@ 신마봉에서 바라본 천안과 해각
@ 천안-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 해각-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
@ 해각에서 바라본 신마봉
@ 남천문
하산 후 단동으로 이동하여 '신안동각' 식당에서 중국압록강 여행사 대표가 베푸는 풍성한 만찬을 즐긴다.
@ 만찬후식-농구공 보다 큰 찹살 도너츠(속이 비어 있다.)
@ 숙소-장성호텔(3성급호텔인데 5성급 호텔처럼 깨끗하고 고급스럽지만 아침 식사가 부실하다)
첫댓글 처음만나신 황태자님의 여행기 역시 선생님다운 글입니다. 잘 읽었구요 선상 룸메이트에 긴시간 함께하여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역사 공부도 좀 해야겠다는 반성을 하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