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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세계 최대 마야문명 유적지인 과테말라 티칼의 대표격인 제1호 신전의 웅장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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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아크로폴리스. 이곳은 아직도 개발이 다 안된 상태다. |
고대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3개의 위대한 문명이 찬란하게 꽃피었다. 페루를 중심으로 한 잉카 문명, 멕시코를 중심으로 한 아즈테카 문명, 그리고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한 마야 문명이 바로 그것이다.
B.C.300년 경 현재의 과테말라 북부에서 시작된 마야문명은 건축을 비롯해 수학, 천문학, 의학, 예술 등의 분야에서 급속히 발전했다. 마야 문명이 꽃피었던 지역은 중앙아메리카의 무더운 곳으로 그 문화권은 멕시코 남부의 치아파스 주와 유카탄 반도에서부터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에 이르기가지 광대했다.
마야문명은 한 국가에 의해 이룩된 문화가 아니고 여러 독립국가들이 집합체가 되어 형성해낸 것이다. 각 도시국가들은 공통의 문화와 종교, 문자를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도시들은 저마다 독특한 예술, 건축, 생활특성을 구축해 유지 발전시켰다.
이러한 마야문명은 이들 지역에 유적지로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도 과테말라의 티칼이 현존하는 최대의 마야문명 유적지다. 이런 이유로 지난 1979년 유네스코는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마야문명 취재를 위해 얼마전 과테말라를 방문, 티칼 유적지로 향했다. 과테말라시티에서 육로로 가기에는 지형이 험하고 이따금씩 반정부 게릴라가 도중에 출몰한다고 하여 국내선 비행기를 이용했다. 과테말라의 수도인 과테말라시티에서 비행기를 타고 약 1시간만에 플로렌스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이 있는 플로렌스는 거대한 호수에 둘러싸인 작은 섬 도시이다. 이곳은 과거 스페인 군대와 마야족 군대가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장소이다. 마야족은 플로렌스에서 약 200년간 스페인 군대에 완강한 저항을 하다가 1697년 마침내 함락되고 마야 문명도 숨을 거두게 된다.
플로렌스 공항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헤치고 약 1시간 달린 후 드디어 티칼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안으로 들어서자 싱그러운 열대수림에서 우러나오는 향긋하고 신선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우거진 밀림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니 이름을 알수 없는 갖가지 열대 꽃들이 만발해 있다. 원숭이들의 요상한 울음소리와 수많은 새들의 지저귐은 마치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려 왔다.
티칼 국립공원 안에는 5개의 대신전을 비롯해 크고 작은 피라미드, 궁전, 돌비석 등이 발굴 및 복원되어 있다. 높으가 51m나 되는 거대한 신전과 북아크로폴리스, 그란플라사의 장려한 모습을 보노라니 경이로움이 절로 느껴 졌다. 지금으로부터 천년도 넘는 아득한 옛날 어떻게 이처럼 크고 웅장한 신전과 피라미드를 건축했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기도 한다. 열대우림으로 잠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러한 건축물을 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티칼에서 마야문명이 활발하게 꽃필 때는 반경 160Km까지 그 영향력이 미쳤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티칼은 AD8세기 무렵에는 전성기를 이루어 수많은 건축물들이 도처에 세워졌다. 티칼과 같은 열대우림 속에선 식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기 위해서는 물공급이 중요하다. 당시 토목기술이 발달했던 마야인들은 여러 개의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 티칼 지역에 끊임없이 물을 공급했다고 한다. 티칼 국립공원에는 현재 3000개의 다양한 건축물과 200개의 비석이 발굴되어 있다. 이는 과거 전성기 시절의 약 10분의 1 규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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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정글 속에 있는 마야문명 최대의 유적지 티칼. 드넓은 국립공원에 크고 작은 마야문명의 유적지들이 산재한다. |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모된 신전과 비석에는 동물의 모습을 한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마야인들의 신성한 문자이다. 언어학자들은 비석에 새겨진 신성문자를 해독하여 티칼의 숨겨진 비밀을 벗겨가고 있다. 예를 들면1877년 구스타프 베르누이는 제4호 신전 입구의 대들보에 새겨진 문자를 해독하여 높이가 67m나 되는 이 신전의 건축시기가 741년 이라는 것을 발표한 바 있다.
티칼 국립공원에는 큰 신전이 모두 5개가 있으며 높이 38m에서 65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모두 인디오들이 거대한 돌을 날라다 다듬어 정성껏 쌓은 건축물이다.
건축물 중 가장 큰 '재규어의 신전'은 높이가 51m이다. 제1호 신전으로 불리는 이곳은 계단이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정상까지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건축시기는 AD700년경으로 전통적인 마야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균형을 이룬 피라미드 형태가 마치 하나의 조각품 같다. 9층 구조로 되어있는 피라미드의 정상에는 3개의 방이 있는데 왕이나 왕비의 시신을 안치하고 제사용 의식을 치른 곳으로 보인다. 과거 마야족의 전성시절에는 신전 밑 중앙 광장에 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제1호 신전 정상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꺼내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 거행되었을 것이다.
마주보고 있는 제 2호 신전은 높이가 38m로 다른 신전에 비해 낮지만 티칼 건축물중 최고의 걸작품이다. 58계단을 밟고 제2호 신전의 꼭대기에 오른 후 내려다 본 주변 풍경은 장관이었다. 제2호 신전이 건축된 시기는 제1호 신전과 비슷한 7세기 무렵으로 여겨진다. '가면의 신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제2호 신전은 전형적인 피라미드 구조이며 4층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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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칼의 제2호 신전. 균형미가 잘 잡힌 티칼 예술의 걸작품이다. |
제1호 신전과 제2호 신전 사이의 넓은 광장을 그란 플라사(Gran Plaza)라고 부른다. 이곳은 티칼 유적지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동서에 두 개의 큰 신전이 있고 북쪽으로는 북 아크로폴리스, 남쪽으로는 중앙 아크로폴리스가 있다. 아크로폴리스는 큰 신전과는 별도로 궁전이나 신전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북 아크로폴리스는 그란 플라사 옆에 위치한다. 티칼의 행정을 돌보던 곳으로 많은 건축물들이 겹겹이 쌓여져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증축되었기 때문이다. 건축물 지하에서 무덤과 더불어 많은 부장품이 발견되기도 하며 현재도 발굴작업을 통해 새로운 것이 알려지고 있다. 티칼의 원시적인 형태의 피라미드와 석벽 등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중앙 아크로폴리스는 사람들이 살던 주거지로, 전체적인 조화가 뛰어난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다. 과거 티칼의 지배층이 살던 곳이 많아 이곳 건축물은 '궁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천장에 역 V자 형의 마야의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도 적지 않다.
티칼의 전성기에는 5만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반 농민들은 단칸방이 있는 초가에서 살았다. 여러 채의 집들이 모인 곳에는 제단이나 신전을 만들었다. 혈통에 따라 엄격한 계급사회를 이룬 마야족은 신관, 군인, 정치가, 상인 등이 귀족계층에 속했고 농민들은 그 아래 계급이었다. 전쟁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노예로 부렸다.
제3호 신전은 높이가 55m로 810년에 세워졌다. 방문 당신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꼭대기로 오를 수는 없었다.. '재규어 신관의 신전'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제2호 신전의 동쪽에 위치한다.
여러 개의 사다리를 타고 간신히 정상에 올랐던 제4호 신전은 높이가 65m로 티칼 유적지중 가장 높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당시 제4호 신전이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기다란 나무 덩굴이 곳곳에 보여 밀림 속의 신전이라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신전 정상에서 바라본 열대 밀림에 잠긴 티칼 유적지 모습은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추억을 안긴다.
티칼에 있는 신전 등을 감상하기 좋은 때는 해 뜰 무렵과 해 질 무렵이다. 저녁놀에 붉게 물든 모습도 훌륭하고 이른 아침 새벽 안개를 뚫고 드러내는 신비스런 자태는 한 폭의 그림같다.
티칼 국립공원 출구 근처에 있는 박물관에는 마야족의 토기, 가면, 인골등이 전시되어 있다. 1958년 제1호 신전에서 발견된 왕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인골 및 생존시 사용했던 보석류와 장신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특이한 것은 아주 먼 곳에서 운반된 조개껍질이 있다는 사실이다. 천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변하지 않는 것이 인상적이다. 티칼 박물관은 마야문명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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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미를 갖춘 과테말라의 옛 건축물의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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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제1호 신전 내부에서 발견된 유골. 왕의 것으로 보이는 이 유골 주위에서는 200개가 넘는 비취를 비롯, 도기와 조개껍질 등이 발견되었다. 유물들은 현재 티칼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
마야문명의 특징은 세계 고대문명이 나일강, 황하, 갠지스강 등과 같이 큰 강을 끼고 발생된 것과 달리 강이 없는 무더운 열대 밀림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수학, 천문학이 고도로 발달된 점도 특이하다.
옛날 마야족이 밝힌 금성과 달의 정확한 운행주기는 365.2420일이었다.(마야족이 금성과 달의 운행 주기로 역산한 지구의 운행주기는 365.2420일 이었다;이 글의 필자가 이것을 오해했던지 연합포토저널 편집시 발견하지 못한 오류인 것 같다;편집인basket21 주註) 오늘날 정확한 과학조사로 밝혀진 날짜는 365.2422일이니 마야족의 수치계산 능력이 얼마나 정확했던가를 알 수 있다. 문화가 크게 발달된 그리스, 로마시대에서도 사용되지 않았던 영(0) 숫자를 사용했다는 점 역시 놀라운 사실이다. 20은 마야족의 수학에서 기본이 되는 숫자아다. 인간의 손가락과 발가락 숫자를 합한 수와 관련이 있다.
마야족은 나름대로 정밀한 수학체계를 갖고 있었으며 복잡한 문자와 정확한 태양력을 사용했다. 그리고 수많은 거대한 신전과 돌비석, 잘 포장된 도로망 등은 마야문명의 신비스러움을 빛내는 것이다. 울창한 열대 밀림 속에서 티칼 같은 거대한 돌의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열대 수목이 빨리 자라고 건축자재의 운반 등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야족은 이러한 고도의 문화에도 불구하고 농경기술은 열악하여 수레나 가축 등을 이용한 단순한 농경법을 사용하지 못해싿. 오로지 사람의 육체노동만으로 거대한 건축물도 짓고 농경활동도 했다. 이러한 점은 학자들에게도 큰 수수께끼라고 한다.
사라진 마야문명의 최대 유적지인 티칼이 다시 세상에 나타나게 된데는 뛰어난 고고학자들의 노력을 간과할 수 없다. 1839년부터 존 로이드 스티븐스는 대대적인 발굴작업을 벌였으며 1956년부터 1970년까지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 발굴팀이 정확한 조사활동을 해 전체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마야문명은 왜 멸망했는가? 오늘날까지도 이를 확실히 설명하는 자료는 없다. 다만 마야족 신관들의 횡포, 거친 열대환경에의 적응실패, 북쪽 아즈테카 문명과 그들 종족의 침입으로 사라졌다는 이론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마야문명이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춘 후 스페인 정복시대에는 도시와 신전 등의 유적들이 밀림에 싸여 점차 폐허화 되어 갔고 인디오들은 뿔뿔히 흩어져 과거의 영화와는 동떨어진 쓸쓸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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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티칼 국립공원의 유적을 만든 인디오들이 제작한 수공예품들 |
인디오 여인이 집에서 만든 다양한 빛깔의 옷을 시장에 내다 팔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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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과에 있는 한 성당의 모습. 스페인 식민시대에 만들어진 유서깊은 것이다. |
아래 글은 주간조선에 실린 권삼윤씨의 글을 스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