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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창공원 분수대(효창운동장 방향을 바라보며...) |
효창공원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신 곳으로 효창운동장 앞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효창공원의 정문인 창열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분수대가 보이며, 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기 위해서는 정문에서 좌측이나 우측 산책로를 따라서 돌아보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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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창공원 정문(창열문) |
▲ 임정 요인의 묘 |
▲ 원효대사 동상 |
정문에서 우측 산책로를 따라서 조금 가다보면 왼쪽에 임정 요인의 묘역이 있으며, 이 곳에는 좌측부터 조성환선생, 이동녕선생, 차이석선생의 묘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임정요인 묘역에서 조금 올라가면 원효대사 동상(1969년 건립)이 있으며, 공원 중앙 뒷편으로 돌아가면 역시, 1969년에 건립했다는 북한 반공투사 위령탑이 있으나 주위는 철책으로 둘러져 있으며, 출입문는 굳게 닫혀 있습니다. 선열들의 묘역 내에 북한 반공투사 위령탑이 있다는 것이 좀 의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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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 선생의 묘역 |
▲ 삼의사의 묘역(맨 좌측이 안중근의사의 가묘임) |
공원 좌측으로 내려오면 김구 선생의 묘역이 있습니다. 입구에서 계단을 몇 단 올라가면 김구 선생의 묘가 보입니다. 묘역 관리가 잘되어 있으며, 묘는 둥근 봉분으로 앞에는 장명등이, 우측에는 비석이, 묘역 좌우에는 망주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 김구 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다보니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시기에 백범 묘소를 찾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묘소 주변에 철망을 치고 참배를 제한했고, 심지어 아들 김신의 앞길조차 막았다. 정권 말기인 1959년 "묘역 주변에 운동장만은 안된다"던 독립지사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끝끝내 효창운동장을 세운 것도 이승만이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도 이승만의 '기행(奇行)'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백범 등 애국지사들의 무덤을 이장하고 효창공원에 골프연습장을 지으려던 계획이 여론의 반대로 실패하자 박 대통령도 이승만에 질세라 반공투사 위령탑, 어린이놀이터, 노인회관 등을 마구 짓기 시작했다." |
김구 그는 누구인가? |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6)] 김구 그는 누구인가? ![]() 그는 1876년 7월 11일(음력) 황해도 해주읍 백운방 텃골(현재의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아버지 김순영(金淳永)과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난 때는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로 조선이 굳게 닫친 문을 열면서 동시에 일제의 마수가 뻗치기 시작한 시기였다. 어릴 때 이름은 창암(昌巖)이었고 19세 때 창수(昌洙)로 고쳤다. 38세 때(1913년) 다시 구(九)로 바꾸었다.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에서 백정의 ‘백(白)’과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호를 ‘백범’이라고 하였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김구는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워 이야기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학문에 대한 갈증은 김구로 하여금 해외 망명생활의 고달픔 속에서도 꾸준히 일기를 쓰도록 이끌었고 붓글씨로 자신을 가다듬는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 김구는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의법청년회ㆍ서명의숙ㆍ해서교육총회 등을 거쳐 신민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황해도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웠으며 재령의 보강학교 교장 등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에는 이른바 ‘안명근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1914년 7월 가출옥으로 석방되었고 이후 소학교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직후 경의선 열차편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배를 타고 상하이에 도착한 때가 1919년 4월 중순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의 수립을 세계에 알리던 때였다.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8)] 김구 ![]() “1945년 11월 23일 오후 1시 백범 일행을 태우고 상하이의 강만(江灣) 비행장을 떠난 비행기가 황해를 가로질러 고국 땅이 멀리 보이자 백범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주르르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돌부처처럼 앉아 해방의 기쁨과 조국을 찾는 감회 그리고 건국의 곤란을 씹고 삼키었다”는 장준하(張俊河)의 회고처럼 그렇게 김구에게도 건국(建國)의 날은 열렸다. 하지만 곧 맞닥뜨릴 새로운 상대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버거운 싸움을 벌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구에게 건국은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 의해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그는 언론ㆍ종교ㆍ사상의 자유를 꽃피우고 인류문화 건설에 기여할 민족문화를 가꾸어 나감으로써 인류의 행복과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냉전체제의 국제질서는 그의 바람을 비껴갔다. 그의 건국 구상이 일단을 드러낸 것은 광복 직후 중국 충칭(重慶)에서였다. 1945년 9월 3일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의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 방안이 그것이다. 이후 해방정국기의 정세 변화에 조응하며 그의 건국 구상도 구체화해 갔다. 1948년 초 UN총회에서 총선거 실시를 결정하자 “미·소 양군이 철퇴하고 UN이 치안에 임하는 동시에 남북에 현존한 군대 혹은 반군사단체의 무장을 전부 해제하여 민주적 방식에 의하여 수립되는 통일정부가 성립되는 대로 즉시 국방군을 조직하게 하고 국방군이 조직되는 대로 UN이 부담하였던 치안책임을 해제함이 합당하다”(UN 한국위원단에 보낸 김구 주석 의견·1948년 1월)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같은 구상은 4월 30일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공동성명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진전되었다. “외군 철거 후 제 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즉시 수립할 것이다. 이 정부는 첫 과업으로 일반적ㆍ직접적ㆍ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통일적 조선 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기관은 조선헌법을 제정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총선거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과정임이 명백해지자 그는 1948년 5월 6일 공동성명을 통해 “양군 철퇴 후 전국정치회의를 소집하여 통일적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전국 총선거를 거쳐 헌법을 제정하고 정식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 |
우표로 보는 애국지사... |
김구 선생 묘역 아래에는 의열사가 있습니다. 의열사는 애국 선열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임정 요인 세 분과 김구 선생 그리고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을 포함하여 일곱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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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사 옆에는 삼의사의 묘역이 있습니다. 이 곳도 입구에서 계단을 몇 단 오르면 삼의사의 묘역이 보입니다. 삼의사의 묘는 김구 선생에 의해서 효창공원에서 제일 명당자리 배산임수격인 가운데 안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삼의사의 묘에는 묘가 3기가 아닌 4기가 있었으며, 맨 좌측의 묘 앞에는 묘비가 없습니다. 이 묘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로 아직까지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찾으면 안장하기 위해서 미리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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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을 나오면 오른쪽에는 이봉창 의사의 동상이 있습니다. 동상은 1995년 건립되었으며, 이봉창 의사가 일본 천황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지는 모습으로 이봉창 의사의 기개가 엿보입니다. 동상 왼쪽에는 최근에 지은듯한 큰 건물이 있어서 가 보았더니 백범기념관이었습니다. 백범기념관은 선생의 탄신 120주년을 맞아 선생을 흠모하는 각계각층의 정성을 모아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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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반공투사 위령탑 |
▲ 의열사 |
▲ 이봉창 의사 동상 |
▲ 백범 기념관 |
효창공원(孝昌公園)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는 곳으로, 원래 이곳은 조선 제22대 정조의 큰 아들로 5세에 죽은 문효세자의 무덤인 효창원(孝昌園)이 있던 자리이다. 그 후 경내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 숙의 박씨의 소생 영온옹주가 안장되었으나 일제가 1924년 6월에 효창원의 일부를 효창공원으로 개발하고,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에는 문효세자 이하의 무덤을 모두 서삼릉(고양시 소재) 경내로 옮김에 따라 효창원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광복과 더불어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이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義士)의 유해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1946년 효창공원의 중심지에 국민장으로 안장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하였으며, 1948년에는 중국 땅에서 순국한 임시정부 의장과 주석을 지낸 이동녕과 국무원비서장을 지낸 차이석의 유해와 군무부장을 역임하고 귀국 후 서거한 조성환을 공원 동남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1949년 6월에는 김구 선생이 흉탄에 쓰러지자 국민장으로 공원 서북쪽 언덕에 모시어 부근 일대가 선열묘역으로 변하였다. |
효창원의 현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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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삼릉내 효창원 전경(뒤에는 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인 의소세손의 묘소인 의령원입니다.) |
다시 서삼릉에 다녀왔습니다만, 지금의 효창원은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넓었던 본래의 효창원에서 현재의 효창원은 서삼릉내 관리사무소 좌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묘역이 따로 조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의령원 앞에 위치하여 곡장도 없이 썰렁합니다. 효창원과 의령원 앞에는 건물이 한채 있는데, 정자각의 형태는 아니나 정자각을 대신하는 건물 같았으며, 아래 좌측 사진의 건물 오른쪽에 있는 비는 문효세자 효창묘 신도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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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창원과 의령원 입구 전경 |
▲ 효창원 전경 |
효창공원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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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 용산구 효창동, 청파동2가 및 마포구 신공덕동, 공덕동 빨간 깃발은 순서대로 임정 요인의 묘, 원효대사 동상, 북한 반공투사 위령탑. 김구 선생 묘역, 삼의사 묘역, 이봉창 의사 동상. 백범기념관입니다. 동선을 따라서 한 바퀴 돌아 보시면 됩니다.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 1번 출구로 나와서 400여 미터 올라가면 효창운동장이 나옵니다. 효창 운동장 앞에 효창공원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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