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시선·19 아직도 못한 대답 이용대 6시집 도서출판 海歌 2016,5,20 발행
해가시선ㆍ19
초판인쇄 | 2016. 5. 15. 초판발행 | 2016. 5. 20.
지은이 | 이용대 펴낸이 | 정연휘
펴낸곳 | 도서출판 해가 25918 강원도삼척시오십천로301-30101-1503 전화 033-573-4613 ․ 010-3341-3327 e-mail: haika@hanmail.net
출판등록 | 제99-10-3호 1999. 7. 7. 인쇄처 | 문왕사 033-648-3670
ISBN 978-89-93138-25-2 값 12,000원
ⓒ2016 이용대 저자와의 협의에 의해 인지를 생략합니다.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십시오. 해가시선 ․ 19 이용대제6시집 ▨자서自序▨ 제6시집을 내면서
바위틈에 난 조그마한 풀을 봅니다. 연약하기 그지없는 호흡체입니다. 살 곳인지 아닌지… 얼마나 더 생존할 것인지 계절조차 가늠하지 못하면서 영원히 살 듯 한 매듭 두 매듭 자랍니다. 때 되면 어디서나 하늘을 향하며 나름대로의 꽃을 피웁니다. 예측할 수 없는 외부의 침노에 대놓고 저항할 무기란 아무것도 없으면서 이토록 의젓하게 살 만큼 지냅니다.
팍팍한 흙 위로 먼 길을 가듯 기고 있는 벌레를 봅니다. 자기의 외모를 전혀 알 리 없는 생명체입니다. 이 고비를 넘으면 모래밭이 나타날 것인지 자갈길이 펼쳐질 것인지 모르고 온 몸으로 환경을 밀며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가 봐야 한 팔도 못 가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내가 이들보다 더 나은 것은 무엇이며 더 뛰어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생명체를 유일한 창조물로 인식하며 대등한 목숨으로 존중합니다.
같은 시대에 현존하는 너와 내가 만나서 잠시라도 이렇게 마주 대한다는 것은 기막힌 인연입니다. 모든 것과의 만남이 다만 스쳐가는 운명적 조우라고 여기기엔 너무 아쉽기에 그렇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존재하는 의미와 가치, 그리고 이동하는 동선의 위치를 깨닫는 길이란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내가 소중하듯 이 땅의 모든 것은 단연코 귀히 여김을 받아야합니다. 어느 것도 천한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들과 말하고 교감하려고 입장을 자주 바꿔봅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풀도 나를 오래도록 쳐다보며 벌레도 잠시 멈추고 뒤돌아서서 내게 표정을 보내옵니다.
어찌하다가 풀 한 포기 뽑기를 주저하며 벌레의 앞길을 먼저 비켜주어야만 하는 내가 되었겠습니까. 나도 이들과 다를 바 없을 뿐만 아니라 똑같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부터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른 후 소리를 제하고 핵심을 추려낸 한 줄의 시로도 더 강열하고 파장이 긴 여운을 남기고 싶습니다. 2016. 5. 1. 가곡면 농가에서 가촌 이용대
차례ㆍ아직도 못한 대답 자서自序 제6시집을 내면서 _09
제1부 계절의 순환 속에서 목련 지는 밤 …16 애기 울음 …17 벚꽃에 취하여 …18 야상夜想 …19 5월의 숲 …20 해당화 …21 산딸기 …22 밤꽃 …23 억지 잠 …24 모를 것이 …25 거짓말 …26 아직도 못한 대답 …27 국 한 그릇 …28 단칸집 …29 종소리 …30 파도는 …31 보고 싶은 아내 …32 동병상련 …33 차례ㆍ아직도 못한 대답 34… 겨울 장미 35… 고목, 그 의미 제2부 시선이 머물던 곳에 38… 전철을 타고 가는 강 40… 애우哀雨 41… 박수 받을 때 떠나라 42… 옷을 싸면서 44… 말 한마디 45… 발바닥 46… 바람 속에는 47… 물의 마음 48… 바람개비 49… 이산가족 찾기 재방송 50… 복개천覆蓋川 51… 홀씨, 그 떠도는 52… 지우지 못하는 번호 53… 농기구 54… 악기 55… 수화 56… 약한 것은 없다 57… 익고 싶다 차례ㆍ아직도 못한 대답 연탄 …58 차례아직도 못한 대답
동안거 …59 알츠하이머 …60 바다 …61 일몰에 …62
제3부 돌아온 들에 서서 가곡천 연가 …64 산벚꽃 …65 부엉이 …67 토요일 오후 …68 밭을 갈다 …69 햇고사리 …70 툇마루에 앉아 …71 고추밭 매며 …72 콩밭에 물주며 …73 가곡천의 가로등 …74 콩을 꺾다가 …75 검은콩 …76 들깨 …77 볏짚이 따뜻하다 …78 벼 타작 …79 차례ㆍ아직도 못한 대답 80… 단감 81… 벌초 82… 배추를 뽑으며 83… 가을여정 84… 산농입추 85… 감잎에도 섭리가 86… 장날 88… 상강霜降에 89… 대보름 눈 90… 대보름 밤 91… 가곡천 갈대 92… 겨울 학鶴
제4부 남겨놓은 발자국 94… 옥마산玉馬山 95… 넘어탕실 다리橋에서 96… 구이산九利山 97… 시루봉峰 98… 궁촌 해변에서 99… 남근상 100… 산양정山陽亭 101… 성산포 산대월리里 …102 차례아직도 못한 대답
미인폭포 …103 구사九士터널 …104 태백선 …105 계사동의 대추나무 …106 차례ㆍ아직도 못한 대답 제5부 흔적을 되짚으며 황지중앙장로교회 …108 비상飛上하라 …109 |축하시| 호경빌딩의 하늘정원 …110 |추모시| 무창포의 시인 …111 |추모 시| 민주의 함성 …112 |추모시| 가곡면 충혼비의 님들이여 …114 |시집을 마무리하며| 길 …118 제1부 계절의 순환 속에서 목련 지는 밤 솔포기 아래 머리 내민 송이 같은 발아發芽이다
풀섶에 살짝 낳은 햇닭의 초란이다
마당가에서 갓태어난 송아지의 여린 발톱
살바람도 감당 못해 겨우 견딘 민낯으로 그믐달 뜨자 아-하고 지는 면사포 벗는 순결이다 애기 울음 라일락 핀 뜰 안에서 아기 보채는 소리가 유리창이 깨어지듯 쟁쟁하게 들린다
외치며 자라는 꽃 슬퍼서 우는 게 아니다 가슴팍 넓혀가며 꿈을 여는 음파이다
여닫는 들숨날숨 강풍처럼 몰아가며 검푸른 하늘을 양손에 움켜잡으려는 듯 야무지고 앙팡짐이 줄기차게 이어진다
지나는 노인 눈에 생기 언뜻 돋는다 벚꽃에 취하여 미농지보다 얇은 살결 볼수록 눈부시다
바람조차 버거운 듯 파르르 떨고 있다
천일염 붓에 찍어 가지마다 밤새 묻혀놓고 여명쯤 얼른 피운 순도 백의 수정 꽃
달려들던 벌들이 앉자마자 색맹 되고 애송이 나비 떼도 하얀 독毒에 취함인지 꽃술에 다다르기 전 툭 투둑 떨어진다 야상夜想 초복初伏비 이슥토록 도란도란대는데 빈약한 눈썹 위론 상념만 흩날린다
찾아오는 사람 없고 전화도 안 오는 내 방은 서울에 산다 해도 안개 낀 태백산중
일어나 양말 꿰매 세탁해서 걸은 후 가곡천이 떠올라 커피 한잔 마시는데 낙수소리 멈추지 않고 톡톡 이는 발코니
호수처럼 깊어가는 적적한 장맛 밤이다 5월의 숲 가꾸지 않아도 마을은 지상 청정원이다
청보리밭에 들어서면 막혔던 코가 뚫리고 들새는 바람의 노래를 쉽게 따라 부른다
햇싹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입김으로 솟는데 외갓집 동네 같은 산촌의 5월이다
연두색 찔레 순도 가시 없어 좋은 때 숲으로 난 풀길 따라 꿈속인 듯 걷는다 해당화 진달래를 닮기커녕 장미 더욱 아니지만 가뭄에 피워 올린 분홍 꽃송이이다
가곡천 목이 타서 물이끼 마르는 날 쑥대마저 비틀어진 모래밭에 돋아나 산 넘어 뱃고동소리만 귀 기울이는 앳해녀
버리려면 손끝 하나 절대 대지 말라 하며 연한 피부 가시 촘촘 밤마다 돋워놓고 여름에도 오소소 떨고 있는 순정이다 산딸기 오뉴월 뙤약볕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초록 잎 사이에서 달콤하게 익힌 입술 힘주어 한데 모아 앵혈을 만들었다
달려들던 산새가 잉걸불인 줄 알았는지 부리를 대려다가 화들짝 날아오른다
바람에 불붙잖게 윤기로 감싼 선홍鮮紅 열기 소낙비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정염이다 밤꽃 붉게 타던 산딸기가 제풀에 사라진 후 때 아닌 새벽 눈이 사뿐히도 앉았다
기상청도 예상 못한 갑작스런 강설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옥수수가 놀라고 잠을 잊고 울어대던 소쩍새도 잠잠하다
아무 데나 내리지 않는 비릿한 오뉴월 눈
군밤을 좋아했던 처녀 원귀寃鬼 하나가 날 밝기 전 밤나무 숲에서 남은 한恨을 풀고 있다 억지 잠 찌르르 또르르 여치소리에 잠깬 밤 삭지 않고 차오르는 그리움 하나 있다
보고픈 마음일랑 견디면 될지라도 목소리까진 지울 수 없어 쫑긋대는 가을 창가
덧창마저 닫아버리면 들리진 않겠지만 젖는 가슴 어쩌지 못해 억지 잠을 청한다
2014.10.16. 모를 것이 안으려면 산 넘어 달아나 버리다가 떠내 밀면 코 앞까지 다가서는 얼굴이다
그리려면 박무처럼 흐릿한 이마이고 지우려면 더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다
새로 팠던 우물 속에 섞어놓은 이름으로 하루를 천년만큼 쌓아올린 팔 베게
내 모습만 건지려 목을 길게 늘이면 어느 틈에 달려와 내 팔 먼저 잡고 있다 거짓말 올 수는 없다 해도 오겠다는 말 해야 옳지
만나지 못하더라도 만나자는 대답 해야 맞지
오기가 어렵다며 만날 수가 힘들다며 정직하게 말한다고 능사가 아니지 않은가
속사정 어떻다는 것 서로 알고 있는데 때로는 거짓말이라도 네게서 듣고 싶다 아직도 못한 대답 울타리 돌아설 때 불쑥 내밀던 단감 두 개 단번에 베먹으며 달음질쳐 왔었다
흰 눈이 꿈속처럼 운동장 가득 매우는 날 남몰래 책보 속에 넣어주던 곶감 두 줄 깊은 마음 져버리고 그 자리에서 몽땅 없앴다
이 저녁 한 광주리나 감을 따서 담다가 대답주기를 생각 못한 옥玉이 살던 집 바라본다
2014.10.17. 국 한 그릇 초라한 밥상이나 풍요로운 식탁이나 국물만큼 부드럽고 편안한 것이 있을까
같은 솥에 담겨져 편 가르기 전혀 없이 어우러져 끓으면서 우러나는 은근한 맛
다른 반찬 없이도 국 하나면 족한 끼니 뱃가죽이 일어서며 없던 힘도 솟는다 단칸집 후미진 밭둑가의 외양간만한 집이다
비바람에 전기 끊기면 몽당초에 불 붙이고 푹푹 찌는 삼복엔 나무 바닥에서 지샌다
선풍기 난로는커녕 방석도 없는 산촌교회
통나무십자가 아래 바퀴벌레 가다말고 혼자 내는 기도 소리를 가만히 엿듣는다
예전엔 보이지 않던 이름 모를 새들이 새벽부터 찾아와 여기저기서 지저귄다. 밤에도 깊은 숲에서 그들의 소리가 들린다. 가끔 승용차 백미러에 앉아 차 안을 들여다보며 뭐라고 한참 지껄이다가 배설물을 남기는데 이상하게도 미워지지 않는다. 털색도 봉제품 같이 곱고 아름답다. 툇마루와 감나무 가지를 오고가는 길에 방해가 될까봐 피하는 건 나다. 때때로 말을 걸면 가까이 오는 척 하지만 아주 가까이로는 절대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안 보는 듯 보기만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들인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람이 먼저 마음을 고쳐 먹는 것이 편하다. 달빛 희끄무레한 산촌의 밤이다. 오전엔 70m 길이 12 망의 고추 심을 준비를 하였다. 흙뒤집기 기계를 운전하고 나서 골타기 기계로 이랑을 만들었다. 곧바로 검정비닐 씌우는 작업까지 하였더니 몸은 녹초가 되어 버렸다. 이슥한 시각인데도 제방 건너편 밭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의 불빛이 가물가물 새어나오고 있다. 부활절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2014.4.15. 종소리 종소리가 들리면 뒤숭숭하던 꿈이 사라졌다 깊어지는 근심을 샘물로 씻어주었다
퓨전 팝이 휩쓰는 현란한 밤거리를 거닐며 찢어지듯 쿵쿵대야 환호하는 귀가 된 지금
불안증이 깊은데도 엉뚱한 약을 먹으면서 병 낫지 않는다며 헤매고 있는 일상들
녹 쓴 종鐘은 성대聲帶 잃고 까맣게 잊은 기도 시각 기쁘게 가던 새벽길이 희미해져 버렸다 파도는 쉼 없는 자맥질로 비상 못한 갈매기 떼
심해를 떠돌다가 지친 몸 뭍에 기대 깃 빠진 죽지를 부리로 다듬으며 물모래에 비벼보는 살가운 어릿광대
서풍에 편승한 연 같은 몸짓으로 흰 날개 훨훨 펴는 승천을 연모하며 부화를 염원타가 돌아서는 뒷모습이다 보고 싶은 아내 문패 걸어주지 않았지만 알뜰히 마당을 가꿨다
희미한 치마폭의 그림자 없는 사람같이 드러내지 않고 등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다
구름이 가릴 적엔 헤집고 따라오면서 좋은 날 기다리듯 은은히 비치던 그 표정 한마디 신음마저 뱉을 줄도 몰랐다
가는 데마다 달이 되어 비춰주고 있었다 그믐 같은 낮선 길에 돌 뿌리에 걸릴까봐 동병상련 검둥이의 목소리에 하얀 마당에 내려선다 외로우면 가끔씩 울음 짖는 어미 개
혼자 사는 단칸방에서 첫 새끼 보낸 지 근 1년 그녀도 눈 오는 밤은 보고 싶은 모양이다
슬리퍼를 끌며 가 머리를 만져주고 돌아서서 바라보는 고즈넉한 농로 끝엔 날밤을 지새우는 촛불 같은 길 등이 스산한 가곡천까지 보듬듯이 비춘다
손바닥으로 이불 밑의 온기를 재어 보고 뒷문으로 나아가 연탄보일러 뚜껑을 열어 본다 어는 밤 녹여주는 연푸른색 불꽃은 추운 생각의 귀퉁이를 살짝살짝 데운다
뒷산 타고 내려온 눈 머금은 솔바람이 유리창을 서너 번 흔들다 가는 이른 시각 검둥이도 누운 나도 새벽잠 이루지 못하고 있다 겨울장미 꽃이라고 핀 것은 모조리 흙으로 돌아갔는데 떨어지지 않은 영혼 하나가 추운 밤을 지새운다
오는 길 잊었다면 기별이나 할 일이지 외지고 메마른 섶에 붉게 맺힌 기다림
지치고 곤하여 선잠에 잠기다가 스치는 바람결에 얼른 깨어 뜨는 눈
인연은 계절 없음인가 눈 녹이며 피었다 고목, 그 의미 일 년이고 백 년이고 그 자리에서 기다린다 기다림은 한 사랑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
평생을 깨금발 해온 한결같은 가짐으로 가시지 않는 보고픔에 다가가려는 쏠림이다
깨끗함만 드러내려 씻고 갈고 다듬으며 뿌리와 삭인 고통 인내 하나로 버팀이다
상처 없는 것 같아도 아물지 않는 아픔 품고서 티 없게 다림질한 백옥 같은 순정으로 눈과 눈을 이어가며 맞이하고픈 그것 하나
보이지 않으면 잊어진다고 함부로 가지마라 떠난 후엔 물증 없는 죄를 짓게 되기에 제2부 시선이 머물던 곳에 전철을 타고 가는 강 물줄기를 되짚어 보듯 강江 셋이 눈 감은 채 흔들리는 경로석에 석상처럼 앉았다
한강 대동강 낙동강이라 노부인들 이름을 지어준다
이마의 긴 주름은 해마다 솟은 산맥들 미간을 파낸 골짜기는 이어져 흘러온 강의 길
수심水深이 깊다 해도 재려면야 재겠지만 저 눈目은 깊이를 모를 비바람 담은 강이다
풍랑을 뚫고 왔을 불면의 굽이굽이 강들이 다다른 바다는 그래서 짜가웁다 바다가 싱겁다면 눈물 없었다는 것일테지
각기 다른 수로水路의 입을 굳게 다문 세 강江이 지도地圖에도 없는 운하를 내며 하차할 역을 향한다 애우哀雨 통한의 눈물이 가을비 되어 내린다
온 뼈가 조각난 듯 끊임없이 우러나는 염분도 철분도 끼일 수 없는 순수로 자진하다 혼절하는 모심母心의 흐느낌인가
아이야 일어나라 아이야 품으로 달려오라
잃어버린 딸 찾아 눈동자 하늘을 헤매고 나뭇가지에 방울로 맺히는 처절한 기도소리
물기 젖는 낙엽이 신음하며 돌아눕는데 비구름조차 바람을 막으며 여인의 어깨를 감싼다
― 공군 부사관 딸을 보낸 김경희 시인을 생각하며 2014.10.20. 박수 받을 때 떠나라 박수 받을 때 떠나기란 시작보다 힘들다 잘 했다며 멋있다는 그 소리에 무너진 사람 많이 있다
왜 그래 좀 더 잘 하지 덩달아 외치면서 기껏해야 요것이냐고 청중이 등 돌린 후 바닥 훤히 드러나듯 비기 전에 떠나야한다
박수란 끓어오름이 오래 가지 못하는 인기다 인기는 종횡 모르고 불다 가는 허풍이다 허풍은 한 곳에만 머물지 않는 함정일 뿐
뜬다는 건 떨어짐을 예고함이 아닌가
박수 받을 때 떠나라 조금이라도 덜 아플테니까 옷을 싸면서 새벽버스 타기위해 주섬주섬 싸고 있다
가는 곳마다 한 몸 되어 붙어 다녔던 옷이다 잠자리 윗묵에서 불침으로 지켜준 겉이다
바짓가랭이 끝 쪽에 올실이 풀려있다 웃옷 깃은 때에 절어 벌써 변색되어 버렸다 와이셔츠 중간 쯤 단추 한 개도 보이지 않는다
꺼칠한 목 둘렀던 빤질빤질한 넥타이 어디서 흘린 국물로 군데군데 얼룩졌다 구겨진 데를 다림질 하려다 헌 보자기로 그냥 묶는다
집 한 채 있는 다리께로 휠체어 밀고 나와 서서 희미해진 시력 돋우며 기다릴 어머니 그리다가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이 한 데 모여 뜨거운 가곡천 이루며 가슴 돌아 흐르는 밤
같이 가야할 사람은 영嶺너머로 혼자 떠나버리고 동짓달 차가운 바람이 가랑잎 날리는 촌이어도 돌아갈 고향집이 언제나 있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새벽차 타려 꼭 싼 보따리 가방 깊이 넣는다
2013.11.8.밤 말 한마디 마주 보며 피는 것은 사람 사이의 웃음꽃
웃음꽃의 씨앗은 따뜻한 말 한마디
둘도 없는 벗이라도 침針되는 소리 하지 말자
위하고 감싸줌에 없던 정이 돋지만 날이 선 혀로 인해 자라는 건 앙갚음 뿐
그냥 하는 한마딜 망정 가시는 골라내자 발바닥 신 속에서 햇빛 한번 제대로 못 보며 살았다
어쩌다 고개 숙여 살펴 보아줄 때도 뒤꿈치에서 발가락까지 다 훑지는 않았다 오장을 모아담은 비궁을 간직한 채 날 새면 땅을 딛고 앞으로만 나갔다
흐렸는지 개였는지 하늘 어딘지 묻지 않고 차갑든지 뜨겁든지 가시에 찔릴 때나 묽은데 딱딱한데 뾰족한 돌을 밟았음도 마음이 시키는 대로 종이 되어 디뎠다
육신을 떠받치고 걷고 뛴 숱한 날들 심장이 멎은 후에야 전체를 드러내 보였다 바람 속에는 솜같이 순하고 모래처럼 부드러워도 모두가 똑같이 물렁물렁한 것은 아니다
근육은 없지만 옆구리를 후려치듯 부는 강풍엔 천년 묵은 주먹 뼈의 경고 있음이 분명하다
센바람에 두 뺨이 침을 맞듯 따가움은 풍속風速가운데 숨겨진 회초리 때문이고 입술이 트게 하는 것도 말문을 막으려함이다
칼바람 속을 엿보면 바로 걷지 않는 걸음에게 사정없이 가하는 맹수의 발톱이 돋아 있다
바람 세찬 날이면 함부로 나서지 않는 채 꼿꼿해진 목덜미를 조심히 풀어본다 물의 마음 부딪치지 않고 가는 물은 땅의 저항을 다스린다
막히면 멈춰 섰다 길을 여는 여유 또한 급하거나 느림을 조절하는 능력이다
눈 감고 발 감추며 미끄러지는 유연함 모를 깎은 부드러움으로 틀을 벗는 수도자다
낮아져 깊은 뜻 머리 숙여 찾는 것도 변함없이 기다리는 바다 있음을 앎이다 바람개비 멈추면 나뭇잎도 깃 없는 새도 아니면서 제자리에서 돌고 있는 기구한 일생이다
누가 보나 안 보나 기다리는 일념으로 사랑의 순간마저 제대로 새기지 못했는데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숨소리 거둬가며 다른 꽃으로 바람이 무심히 떠났을 때
그믐 같은 침묵으로 수혈 않고 버틴 육신은 날 날만 바라다가 뼈만 남은 네 어깨
동그란 그림자를 겹겹으로 그리던 머리를 천근의 무게만큼 무겁게 떨구고 있는 하루가 모질고 질긴 수명보다 두 팔이나 더 길다
* 바람 잔잔한 날 영동고속도로 문막 휴게소의 바람개비를 보다가 이산가족 찾기 재방송 통곡으로 상면하며 가슴 저리게 했던 행사를 30년 지난 이 아침 재방송 하고 있다
내 눈이 붉는 것은 뭉클했던 장면 때문이 아니다
반 지하 셋방 시절 부둥켜 안는 화면 보다가 TV속 당사자인 듯 훌쩍이시던 할머니
집 뒷산 소나무 숲에서 가곡천 소리만 들으실 그 분을 주름 깊은 출연자 가운데 혹시나 하고 찾는다
2013.6.28. 복개천覆蓋川 구부러진 버드나무가 제 잘난 듯 서 있고 바위가 삐죽삐죽 머리 내민 둑방 아래 맑은 물 도란이던 고요한 때가 있었다
보따리 내린 아낙이 양말을 훌렁 벗고 부르튼 발가락을 구석구석 씻으며 구멍 난 머릿수건으로 눈물 닦던 물가로 가제가 눈치 없이 기어오던 모래톱
한 살배기 강아지가 징검다리 헛디뎌 흠뻑 젖은 몸뚱아리를 부르르 터는 흙길 따라 셋방살이 아기 아빠는 쥐꼬리만한 봉급 쪼개어 세발자전거 사 들고 껑충껑충 건너던 곳
시멘트 판이 등짝을 꾹꾹 누르는 뱃속으로 복통일어도 말 못하는 복개천 되버린 개울이 숨구멍마다 구린내를 머리 아프게 뿜지만 겉으로는 평화로운 듯 입막음 된 찻길이다 홑씨, 그 떠도는 같이 살던 형제와 뿔뿔이 헤어진 뒤 갈 곳인지 못 갈 곳인지 아무 상관 않은 채 허공 속 기웃기웃 연기같이 부유한다
하루살이 날개 달고 바람결에 묻어서 처음 보는 거리를 너울너울 건넌다
화궁을 떠난 후엔 돌아갈 둥지 없어지고 발 붙일 데만 찾아서 떠돌던 민들레 씨앗
솜 뿌리 내린 담 밑에서 웅크리고 살지라도 다음 봄을 꿈으로 하루하루 그리며 천애의 고아 되어 모진 겨울을 넘는다 지우지 못하는 번호 전화 울림과 동시에 불효 생각 들게 하는 눈에 익은 숫자가 계속해서 뜨고 있다
수신기호를 누르기가 어렵고도 거북하다 전 같았으면 얼른 받았을 번호인데 그렇다
애비야 잘 있냐며 떨리는 목소리에 음성을 낮게 깔고 ‘예’하고 대답한다
식사는 제때에 해라 꿋꿋하게 지내라 하시며 숨차시는 말끝이 안개처럼 흐리다
얘기를 나누다말고 서둘러 통화를 끝낸다 휴대폰 놓은 두 손엔 일이 잡히지 않는다
폴더를 덮지 못한 채 쳐다 보는 나뭇가지 어머니 전화번호가 목소리 대신 걸려 있다
2013.5.8. 농기구 그믐 같이 잠든 눈 못다 펴진 손바닥
몽돌처럼 닳아지고 문드러진 손가락이다
80년 흙매기에 견딘 호미 있다 해도 허구한 날 움직여 온 이 기구만큼 강할까
보기가 안쓰러워 이불을 덮어드린다
*쇠잔하게 잠이든 86세인 어머니 모습을 보다가 2013.9.17. 악기 작은 아픔에 신음하고 한줌 기쁨에 볼우물 지며 혼자서 이동하는 유일한 악기이다
뛰어난 연주자는커녕 거대한 오케스트라 아니지만 명장이 만들었기에 박동 따라 떠는 떨체
늙거나 병들어도 눈빛 하나 새롭게 하며 여정의 한 토막을 비치다가 살짝 덮는 소우주를 옮겨놓은 자명自鳴의 진동이다
맥박이 멎을 때야 부여받은 소리 거두고 여음마저 고이 지우는 신비로운 울림통
영원한 자리 드는 날 고저음을 돌려준 후 흙과 함께 침묵으로 가는 혈혈단신의 육관악기다 수화手話 말문이 잠겨버린 어린 카나리아 하나가 어둠이 깃들어도 일어설 줄 모른다
저를 만든 조물주는 눈만 봐도 안다는데 다 있게 했으면서 청각 주지 않음인가
쥐어짜듯 외치지만 울대 터일 줄 모르고 목젖까지 차올랐다 잦아지는 신음소리 파문으로 퍼지고 번져 오장을 관류한다
무릎이 저리도록 이어지는 슬픈 간구 아뢰는 수화手話사이로 젖은 한숨이 흐른다 약한 것은 없다 바람 속에 칼이 있듯 수박에도 뼈가 있다
톡톡 치면 울림으로 익었음을 알려주고 잘 먹었지만 이상하게 배탈 나기도 하는 것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가시를 조심하라는 뜻이다
나무에 힘줄 있듯 수박에도 혈관이 있다
실핏줄로 공급하는 쉴 새 없는 양수 작업 강 하나 반쯤 줄게 마셔버릴 기세이다
말 않고 있다 해서 약한 것이 아니다 미풍도 심심찮게 천둥을 만들기에 그렇다 익고 싶다 단풍이 짙어지니 푸른 잎도 달다 하다
열기 없이 산 전체가 후끈 다는 불판이라 바위마저 덩달아서 단내 물씬 풍긴다
절기가 이쯤이면 익지 않는 것이 있을까
풋살구로 남아 있는 시고 떫은 만남도 저절로 붉어지며 맛 들었으면 좋겠다 연탄 추운 밤 생각하며 조심히 헛간에 들어왔다
캄캄했던 지반 위로 광부 손에 끌려나와 바람거친 야적장서 햇볕 조금 맛본 후에 활 활 활 타오르기를 축제처럼 해야만이 대우 한 번 겨우 받고 버려지는 모진 길
구멍 숭숭 뚫린 채 불구덩이 찾아들어 검은 얼굴 허옇도록 받아들인 순종인데
긴 겨울 주인 위해 날마다 분신제焚身祭 치를 때 기도는 고사하고 보는 이 없는 임종이다 동안거 자르며 깎아내도 다다르기 힘든 나라가 있다
실낱 같은 인연마저 지워야 도달하는 그곳은 바위처럼 돌아앉아 두드리는 관문이다
혈압을 낮춰가며 남은 육욕 씻어 봐도 찌든 허물 가시지 않는 높은 면벽 아래서는 초등생보다 치졸한 민낯만 드러나고 있을 뿐
비와 눈 그 숱한 바람을 벗고 대들어도 꼼짝 않고 버티고 선 냉엄한 깊이와 넓이로 한 치 곁도 주지 않는 난공불락의 철옹성
가고픈 영토의 길을 겨우내 뚫고 있다 알츠하이머 꼬마들 재잘거리며 지나는 둑방 길에 별무리처럼 군데군데 개나리는 피었어도 계절 모르고 창 안에서 허공만 쫓고 있다
날아보려던 하늘은 하얗게 비워지고 상승기류를 타지 못한 채 주저앉는 어미 새
걸음걸이는 자꾸만 바짓가랑이에 얽히는데 살던 집으로 돌아가려는 듯 신발 들고 다시 선다
아들딸의 얼굴은 가물가물한 그림일 뿐 아득한 귓속으로 아우성과 고요가 교차한다
이름조차 분실한 완전한 무국적자 열린 문 앞에 둔 채 지나버리는 난민이다
어린이라고도 여길 수 없이 저능해진 백성을 누가 있어 재활구역에서 해방시켜줄 것인지 바다 거대한 투명그라스의 출렁임을 와서 보라 붓고 부어도 과하지 않은 듯 일체 넘칠 줄 모르고 마시고 또 마셔도 줄어드는 모습커녕 리필이 필요 없는 광활한 와인잔이다
계절을 멀리 벗은 바람공화국을 방문하라 육지의 묵은 소음이 휴전한 첫 밤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어 죽은 듯이 고요해도 출렁이어야만 유지되는 유일한 단독정부다
건국을 찬양하는 광시곡 없어도 좋은 날이다 나라를 식별하는 국기는 게양치 않았어도 단색의 깃발 아래 충만한 축배소리
멸망을 벗어난 영원한 제국의 위용으로 치렁치렁한 쪽색 망또를 언제나 드리우고 대륙쯤 우습게 여기며 비상을 거듭하는 강력한 힘의 꿈틀임 불사신의 나라다 일몰에 한 해의 끝자락을 서서히 거두어들인다
비워진 논과 밭은 하늘만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배어나던 땀방울과 눈물 받아 준 땅을 지키려 듯 묵비하는 새장막이 서서히 내려온다
잔뜩 쌓인 허물을 일몰에 실어 보낸다면 뿌옇게 된 눈빛이 샛별로 나타날까
산머리 걸린 노을에 기도문을 적는다
2015.12.31.16:00 제3부 돌아온 들에 서서 가곡천 연가 높은 산 초록 숲은 길게 두른 차일이다
흙 범벅 된 살갗을 닦아주는 바람 따라 하얀 치아 드러내며 흐르는 개울이다
투명한 여울물에 멱을 감고 앉았으면 청정수에 드러나는 때가 끼인 누런 몸 보는 이 없는데도 쑥스러워져버린다
조석으로 마시다가 고질도 낫는 가곡천 백옥 같은 여인이 아프다는 말 생각나 물속에 잠긴 채로 지그시 눈을 감는다
2014.5.13. 산벚꽃 날 풀린 산 등에다 나비 잇대 새겨 넣은 하얗고 조그마한 문신인줄 알았다
뿌리의 기다림이 목피로 듬뿍 번져 순도 백에 차오른 살아 있는 결정체로 바람만 입은 채 드러낸 햇볕이 그린 무늬다
모세관 훤히 보이는 천초묵 같은 육감의 이파리 돋기 전에 서둘러 벗고 나온 애벚꽃
그늘 없는 민얼굴과 옥색 맨살에 눈 시리다
― 춘일서정春日抒情 땔감을 베려 혼자 가랑잎 깊이 쌓인 뒷산에 올랐습니다. 잡목 무성한 기슭, 어디서 날아와 그 곳에 점지 되었는지 몰래 성장한 산벚꽃 딱 한 그루가 신선한 꽃망울을 막 터뜨렸습니다. 수많은 날 스스로 눈비를 머금고 햇빛을 모으며 자랐을 순 야생종입니다. 아무도 돌봐 주지 않은,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무섭고 험한 산에 밤이면 별만 쳐다보며 살았을 것입니다. 행여 다칠 새라 낫과 톱을 멀찌감치 내려놓고 뒷짐진 채 다가가 꽃을 바라보았습니다. 산골처녀의 맨살결 같은 신선함과 눈부신 색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온 몸을 드러낸 순수함이었습니다. 작고 깨끗한 저 송이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겨우내 기다린 뿌리의 사랑과 인내는 얼마였겠습니까. 그러나 벚나무임을 한 동안 나타내 보인 후 온 몸에 잎이 돋기 시작하면 수줍은 듯 구름 속으로 모습을 곧 감추는 꽃입니다. 짧은 만개 기간을 따라야 하는 숙명인데도 그나마 남이 볼세라 금방 지고 마는 성밉니다. 오늘은 움트기를 재촉하는 훈풍이 거셉니다. 거대한 모습으로 장수하는 제방의 느티나무들 가지에도 연두색 번짐이 확연합니다. 산 중턱에 혼자 이 밤을 맞이할 산벚꽃을 만나려 내일 올라가려 합니다. 주위에 난 잡풀을 베어주며 밑 둥에 돌 태라도 둘러쳐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험한 산을 마다않고 다가가 그 산벚꽃을 보호해 주지 않으면 또 누가 있어 그 곳에 가려하겠습니까. 2014.3.21
부엉이 차가운 바람소리 흔들리는 나뭇가지 만발한 꽃들마저 꿈처럼 혼란하다
태어나기 전까지는 빛 없이도 고요했는데 구르는 가랑잎이 자객처럼 무섭다
먹이보다는 비 오는 날 털 말릴 수 있는 처마 그리워 파닥이는 심장을 얇은 깃으로 닦는다
스산한 어두움에 둥지가 묻히는 시각이면 눈 떠야 하는 습생을 유전으로 거부 못한 채 날아가고픈 횃대를 구명줄처럼 찾는다
동그란 눈 은은한 목소리 숨겨 놓은 발톱과 송곳 같은 부리를 허물처럼 버리고 밤에는 별들 사이에서 포근히 자고 싶다 토요일 오후 인적 없는 농로 따라 찾아오는 이 있으면 좋겠다
심심한 물 다리론 산불감시대원만 오갈 뿐 휴대폰조차 입 꾹 다문 산농의 토요일 낮
장화 속 흙가루를 바위에 앉아 털면서 파운데이션 크림 같은 살구꽃들을 쫓다가 발 시린 듯 홀로 선 가곡천 황새를 바라본다
태백과 동해로 가는 가곡로柯谷路 행길에서 탕실교湯室橋로 접어드는 승용차 한 대 없다
2014.4.5. 밭을 갈다 잡초 어우러진 묵은 밭을 갈고 있다
자갈 섞인 고랑에서 물씬 나는 흙내 속엔 주먹밥처럼 뜯어먹던 누룽지 맛이 풍긴다
큰 바위 아름드리 나무가 지켜주는 푸른 동네
신을 벗고 디뎌야할 자비로운 땅인데도 풀꽃들이 로타리1)에 뿌리 째 뽑혀 나간다.
씨앗 위해 피운 꽃 숙연한 마음에 젖는다 --------------------------------------- 1) 밭 갈기 하는 기계 이름 햇고사리 구름을 잡으려는 듯 쏙 내미는 세 손가락
햇볕을 건들려고 검지 끝을 세운다
머리는 숨기운 채 밖으로 뻗는 여린 팔 무리를 이뤄가며 봄바람을 마신다
비오면 성큼 자랄 고사리里 동네 신생아다
*햇고사리를 꺾으며 2014.5.11 툇마루에 앉아 감자 철은 지났고 옥수수도 익어 끝물이다
그리움으로 핀 코스모스가 살짝살짝 엿본다
기다리는 얼굴은 어디쯤 머물고 있을까 듣고 싶은 목소리는 언제 귀에 닿을까
수숫대 위론 햇잠자리만 들락이고 있는데 툇마루에 동그마니 앉아 삽짝거리만 살핀다
2015.7.24. 고추밭 매며 고추밭 매면서 고추장을 원망한다
허리 꺾은 각도 만큼 깊어지는 관절통 촘촘한 잎 바람 막아 땀조차 매운맛이다
쇠비름 명아주 마디풀 자욱한 고랑을 달팽이처럼 더듬더듬 끝없이 기어가면 고단한 타령이 되풀이 하며 나온다
땡초만큼이나 따가운 하지 대낮의 김매기
해마다 숨차게 넘었을 아낙네의 고추 망이 구이산1)보다 십리나 더 높고 멀어 보인다 --------------------------------------- 1) 해발 560미터인 동네 앞산 콩밭에 물주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목 타는 소리 가득하다
초록색 일렁이어야할 콩밭의 이랑마다 누우런 떡잎이 물결처럼 번진다
비 소식은 자꾸만 대만Taiwan 근처를 스쳐가고 영동은 삼십일 째 맑음에 32도라 전한다
물 한 모금 마시다 말고 집 주위를 살핀다 작은 잔의 물이지만 혼자 마실 수 없어 그만둔다 검둥이도 제집에 들어 나오지 않는 가뭄이다
개천의 자갈 걷고 겨우 찾아낸 가는 샘 웅덩이 깊게 판 후 목 줄기 같은 호수를 꽂는다
양수기 숨 가쁜 소리에 올라오는 해갈 물 갈증 든 들고양이도 물꼬에서 혀를 축인다 가곡천1)의 가로등 어렸던 두 아들을 눈 속에 넣은 노파의 뒷산에 아내를 묻고 툇마루에 앉은 늙은이의 흰머리 되어 옛집 찾은 낯설은 귀향인의 실팍한 어깨를 보듬어주는 친구는
낮에는 제 홀로 전신주에서 묵상하다가 산노을 사라질 쯤 금새 돋는 은은한 빛
오뉴월 버거운 농사 지개 벗듯 마치고 흙 묻은 발 도랑물에 고단과 함께 행군 후 흐느적 흐느적이며 농로 따라 걸을 즈음 불면의 밤이 또 옴을 넌지시 알리는 친구는
꽃과 함께 말라버린 사랑 잎사귀 하날 망정 문득문득 생각게 하는 깊은 추억의 안내자
바람 불 때나 장맛비 속 새벽이 열리는 순간이라도 마음만은 굳게 지켜 헛딛지는 말라 하고 초저녁이면 가곡천변柯谷川邊에 지킴 등으로 걸린다 --------------------------------------- 1) 柯谷川, 시인이 사는 가곡면 가운데를 휘돌아 흘러 동해로 가는 내 콩을 꺾다가 꺾일 순간을 기다리는 부동자세의 침묵이 차가운 콩밭의 고랑을 덮고 있다
줄기 지키던 잎들을 서풍에 다 날려버린 후 탈수된 대궁과 층층으로 마른 깍지
흙에게서 때와 순응만 일념으로 익혔기에 낫 대하는 각오가 대쪽처럼 꼿꼿하다
제자란 땅에 기꺼이 누울 짧은 기간의 순례자
이랑으로 이탈한 노오란 분신分身들을 황옥黃玉인 양 한 알 두 알 먼저 주워 챙긴다 검은 콩 사랑도 야물게 여물면 새까맣게 되는지
햇빛 매일 마시고 바람으로 속 말리면 비에 젖어도 무르지 않는 사리로 맺히는지
타작마당에서 망설임 없이 깍지 벗는 알몸뚱이
한줌 쥐었다 펴는 손에 흑진주 소복 쌓였다 --------------------------------------- *콩 파종 후 4개월만이면 콩을 꺾는다. 들깨 새까맣고 조그마해 손에 집히지 않는 알들이 말라버린 꽃 속에서 천막에 왕창 떨어진다
거름 한 줌 없었어도 푸른 키 쑥쑥 세웠는데 가을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검갈색
작대기로 털릴 때는 쌓이는 모래 같지만 대대로 물려받은 고소한 향은 그대로다
군불 땔 때 쏘시개 되어 재로 변할 대궁들을 한 단 한 단 짚으로 묶어 정성으로 쌓는다 볏짚이 따뜻하다 가마솥 같은 무더위를 함께 이기며 왔었다
쓰러지면 세워주고 아프면 약 쳐주며 가뭄들 땐 양수기를 미안할 정도로 돌렸다
으스스 추워지며 먹구름 끼는 아침에 저희끼리 잎 부비는 소리 스걱스걱 들릴 때나 헝클어진 머리칼 같은 비바람 부는 밤에는 중병에 걸릴까봐 깊은 잠들지 못했다
햇살이 싸여 여문 순금 이삭 고이 다루며 벼 대궁 한 줌 한 줌 가슴에 안아 눕힌다 말라버린 짚이지만 살처럼 따뜻하다
낱알이 되기 전에 마주하는 짧은 포옹 쏟은 땀보다 진한 눈으로 논 구석을 둘러본다 벼 타작 투명한 가을볕이 쌀 톨에 스며들었다
차돌같이 여문 이삭 땅에 머릴 숙였다
낱알을 품에 안는 자비로운 콤바인드 태풍 불던 악몽쯤 씻은 듯이 지웠기에 추수하는 기쁨이 들판 가득한 낮이다
익어가야 할 때와 떨어질 순간을 알므로 타작이라는 집단의식을 성스럽게 치른다
오랜만에 나락자루가 입을 열고 반긴다
첫 벼 수확을 하며 2014.10.4. 단감 콩잎 위로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린다
산안개 솔밭타고 시루봉峰으로 오른다
가곡천 물이 불어 햇갈대가 휘는데 넘어탕실 다리 아래 또래 찾는 피라미
물기 젖은 단감을 따 손에 들고 보다가 맛있게 먹던 순이 생각에 흐린 눈을 감는다 벌초 덥수룩이 자라난 할아버지 수염을 깎는다
가위를 찾아내고 빗을 씻어 챙겨온 일
면도 위한 맑은 물을 한 대야 떠다놓고 두 팔이 저리도록 거울을 잡아드렸다
매일 깎지 않고는 못 배기던 성미인데 수 십 년이 지나도록 일 년을 기다린다
소주잔을 올린 후 정성껏 다듬어 나간다 배추를 뽑으며 딱딱한 땅을 뚫고 기를 쓰며 내린 뿌리
한 방울 이슬로도 잎맥마다 축여가며 버림받지 않으려 노랗게 속을 익혔다
고라니가 달려들어 정신이 혼미할 때 기울기는 했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김장독 생각하며 뽑히기 위해 자랐다 가을여정餘情 흐르던 도랑물은 벌써 잦아들었고 논배미 여름 얘기도 이미 끝나 버렸다
체중을 감량하듯 잎 떨군 콩 대궁들 들깨는 제 자란 땅에 길게 드러누웠다
살갗을 익히고 있는 황토색 단감들이 배를 한껏 드러내는 토요일 늦은 오후
햇살은 산농마다 가을 물감 가득 뿌리는데 아무도 말 걸지 않아 낮잠든 허수아비
노인의 빈 지게에 고요가 걸려 있다 산농 입추 입추 지나자 다소곳이 묵념하는 벼이삭 논에 이는 바람 속에 이밥 냄새 풍긴다
메뚜기 사라진 지는 수 십 년이 되었고 개구리의 노래로 삼복을 이기면서 가뭄 겹친 더위에도 잎 부비며 커온 자리
모포기에 뿌린 땀은 낱알 함께 여물어 둑길 따라 가꾼 콩도 꼬투리 총총 달렸는데
도랑물로 씻는 발이 산 노을에 젖는다 감잎에도 섭리가 떫은 감 익히려고 체중을 감량함인지 떨어진 비늘들이 땅바닥에 즐비하다
비바람과 숱한 벌레 밤낮으로 막아주고 햇볕 들게 협로를 어깨 젖혀 터준 후 열매를 드러내는 최후의 보호수행이다
새싹을 품고 있는 늦가을의 불씨로 달게 녹을 홍시를 후손으로 생각하며 말라가면서도 웃음 띠듯 고운 물색의 이파리
무게 완전히 버리고 흙으로 돌아가야 잎으로 다시 돋는 섭리에 순응을 보임이다 장날 마주하는 얼굴마다 눈웃음이 비친다
산촌에서 온 친구 솔잎 냄새 언뜻 나고 어촌에서 들린 사람 미역 냄새 풍긴다
김 서린 방앗간엔 떡쌀 소쿠리 줄 섰는데 처가의 겨우살이 입소문으로 듣는다
궁금했던 사촌 만나 들어선 탁주 집의 통나무에 걸터앉은 당숙 볼 벌써 불콰하다
양미리 한 두름에도 마음 뿌듯한 오일장 돌아오는 버스엔 작별 인사가 해맑다
동해안 삼척시 호산湖山에는 지금도 5일장이 섭니다. 월천에서 임원에서 옥원, 그리고 가곡에서 삼삼오오 장 보러 모여듭니다. 승용차로 혹은 시내버스를 이용합니다. 농해산물을 팔아 필요한 물건을 사려는 사람, 농기구나 농약 또는 씨앗을 사러 오는 사람, 어젯밤 꼼꼼히 새겨두었던 필요한 생필품들을 외우고 오는 사람, 아니면 남들이 살아가는 소식과 장마당이 궁금해서 찾아오는 이도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거나 생활이 좀 구차해도 이날 얼굴만은 생기가 돕니다. 와 봤자 별 것 아닌데도 그렇습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고 또 일가친척의 근황도 귀동냥하여 풍성히 듣고 짧은 해 서산 넘기 전에 버스에 오릅니다. 이 곳 버스는 형편상 산골마다 들리며 운행하는 지독한 완행입니다. 다다르는 마을 마다 잘 있으라는 둥 잘 가라는 둥 큰 소리로 떠드는 말들로 왁자지껄 합니다. 그러나 악의惡意라곤 귀 씻고 들으려 해도 없습니다. 호산장에서 2013.12.15. 상강霜降에 아지랑이 따라 한발한발 사월 능선을 오른 후 푸름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숲으로만 지내다가 서리 잔뜩 머금고 변색으로 내리는 시월이다
기러기가 문자를 자주 남기는 월초부터 열매란 열매 보름달 같이 둥글게만 익어 가고 드러나는 산길은 동아줄처럼 구부려진다
고목조차 늦은 절기를 공손히 받아들이는데 두꺼웠던 구름이 볏짚처럼 가벼운 날
가을에 담긴 홍시 서리에 달아지면 모난 모서리 깎아대던 돌개바람은 멀리 갔는가
하늘 찌르던 산꼭대기마저 순해지는 달이다 대보름 눈 달포나 눈에 묻힌 정월의 촌가村家이다
배고픈 멧돼지가 뒷 담장 파다 가고 숲새들이 처마 밑을 부산하게 들락이며 암 닭은 노파 뒤만 졸졸 따르는 저녁 녁
논둑에는 쥐불놀이 휙휙 그어질 땐데도 아이는 깡통 생각 아침부터 접었다
겨울소리 빨아 당기는 알싸한 눈 습기가 허공 밀고 정적만 꾹꾹꾹 채우는데 집마다 켰던 등을 강설이 일찍 껐다
눈 머금은 대보름달만 혼자 들을 밝힌다
대보름에 2014.2.14. 대보름 밤 늦도록 꼬리 물던 쥐불놀이가 사라졌다
마실 길 오고가는 나들이 패도 뜸하다
왁자지껄 윷 치던 소리 한군 데도 일지 않고 오곡밥조차 먼 얘기 되어 대보름이 무색한 밤
일찌감치 잠에 든 감감한 산동네를 틈틈이 짖는 바둑이만 이슥토록 지키는데
텅텅 빈 창공에 핼쑥해진 얼굴로 가곡천 위를 기웃기웃 지나가는 둥근달
쳐다보는 이 별로 없어 내가 더욱 안쓰럽다
정월 대보름 밤 2015.3.5. 가곡천 갈대 바람 거친 돌밭에서 무성히도 자랐다
강바닥 훑어대는 홍수에 휘말릴 땐 끼리끼리 부둥켜 안고 악을 쓰며 일어섰다
들불나면 삽시간에 재 될 위험 무릅 쓰며 체액을 탈수한 채 꼿꼿하게 서 있다
깡마른 잎 소리에 철새 날아간 빈 거랑
흰 눈만이 마른 어깨를 어루만지듯 덮어 준다 겨울 학鶴 물 얼기 전 피라미마저 일찌감치 사라진 강
굽이진 수변엔 마른 갈대 침묵이고 새파란 물 가운데 홀로 섰는 학이다
무슨 소식 바람인가 가는 목 높이 뽑고 붓같이 꼬리 내려 누굴 그리고 있는지 외다리 발 시릴텐데 꼼짝하지 않는다
혼자란 건 기다림이라는 말 지나는 이에게 이르려듯 땅거미 지는데도 움직일 줄 모른다 제4부 남겨놓은 발자국 옥마산玉馬山 가파른 고갯길에 다소곳이 핀 산꽃이다
저무는 천 년 사직 성주사1)를 서성이던 경순왕과 찾아온 말 한 필이 밤새도록 울던 곳
어마御馬 못 된 짐승이 운명의 굴레 벗어나려 외쳐대던 울부짖음은 산마루에 처절했고 601미터 고봉에 흔적으로 남은 왕의 눈물 방울방울 철쭉으로 우러나고 있는가
정상에 몰아치는 짜가운 서해 바람 무너진 왕조의 한恨을 지우려 애쓰는데
옥마산2) 저 아래 보령이 그림 같고 사방의 고을들은 역사 속에 침묵이다
2013.5.2. --------------------------------------- 1) 聖主寺, 보령에 있는 백제의 옛 큰 절, 지금은 몇 점의 유적과 터만 남아 있다. 2) 보령시 뒤에 있는 해발 601미터의 산 이름 넘어탕실 다리橋1)에서 돌다리에서 외나무로 출렁다리였다 콘크리트로 넘어탕실 물 다리가 바꿔가며 서는 동안 소년의 놀이터였던 바위 소沼는 사라졌다
희부연 달빛은 돌장광2)에 스미고 익어가는 여치소리 바지 깃 잡는 둑길 건너 굴 빠지듯 지나가는 밤차들의 전조등은 호산3)과 태백4)향하며 목례로 교차하는데 콩밭에 사는 개구리가 겁 없이 마실 나서는 곳
가로등 불빛보다 군불 연기 어울리는 탕곡리5)의 인적 없는 다리에서 유년의 별을 헤아린다
2013.9.25. --------------------------------------- 1) 가곡천 다리 중 탕곡리 7반에 있는 다리 이름 2) 돌이 많은 시냇가를 이르는 강원도 사투리 3) 湖山, 삼척시 원덕읍 소재지의 지명 4) 太白, 강원도 서쪽의 태백시 5) 湯谷里, 삼척시 가곡면 소재 시인의 고향 마을 구이산九利山1) 맨 먼저 꽃 피우고 여름엔 샘물 내며 색실로 수놓은 듯 단풍고을을 선사하는 둥글고 웅장한 모습 탕곡리湯谷里의 텃 산이다
눈 쌓인 삼동이라도 봄 꿈꾸게 하는 구이산
낮에는 맑은 햇살 밤에는 달무리로 외기내2)에서 능그터3)까지 자비로 지켜준다
애기가 태어나면 건강장수를 빌었고 정든 이 떠날 땐 어머니같이 슬퍼했다
발 아래 가곡천이 청정수로 굽이도는 친구야 어디서도 구이산을 잊지 말자 --------------------------------------- 1) 삼척시 가곡면 탕곡리의 한가운데 솟은 둥글고 큰 산 2) 탕곡리의 제일 동쪽에 있는 지명 3) 탕곡리의 제일 서쪽 있는 작은 마을 시루봉峰1) 짐승도 숨차 하는 가파르고 험한 고개
장작 지고 내려오던 용감했던 일꾼들이 기억 속 점이 되어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뽕따러 넘던 어린 날이 어제 아침 같은데 칼바람과 맞서오며 우람히 솟은 소나무들
시루떡을 찌려는지 싸락눈이 쌓인다 --------------------------------------- 1) 삼척시 가곡면 탕곡리 500번지 소재 높은 산봉우리 궁촌해변에서 눈 같은 모래밭의 송림을 넘어서면 가슴 훤히 트이는 푸른 광장이 넘실인다
거품 이는 청맥주를 큰 잔 가득 마시는 듯 딱지 앉은 피곤기가 물결에 대번 녹는데 알몸으로 뛰어들고파 서성대는 맨발바닥
해무는 바다 하늘을 하나로 이어놓아 그 가운데로 금 그으며 가는 낮달 같은 고깃배
불러보는 소리마다 파도에 묻혀버려 출렁이는 잔 그대로 둔 채 신을 도로 싣는다
어머니, 주연이와 2014.8.4. 남근상 주야로 꿈틀대는 남성의 힘찬 상징으로 대놓고 말하지 않는 조각들이 서 있다
해신당 공원1)길에 불끈 솟은 멋진 명물
뜨거워지면 쉽사리 바닷물로도 못 식히는 불멸의 신성한 사랑 한쪽 모습이다
무관심한 척 하면서도 슬쩍슬쩍 보아가며 별의별 순간을 떠올리며 걷다가 발그레해진 뺨 때문에 혼자 웃는 사람들
음양이 끌어당기는 힘찬 역사의 원천되어 새 생명을 잉태시킨 강한 상像이 솟아 있다 --------------------------------------- 1) 삼척시 신남 바닷가에 있는 공원으로 해신당海神堂과 남근상男根像 조각물이 유명하다. 산양정山陽亭1) 깎아지른 바위 위에 외로이 선 정자 하나
물 마시며 자라났던 건너편 들마을과 뒷산에 공손히 모신 조상 묘를 바라보며 훌쩍 큰 나무들이 겨울 그늘을 지어도 춥다는 말 하지 않고 함박눈 소롯이 맞는다
복사꽃 피어나고 감 익는 남향촌 그리며 계절 없이 쌓인 향수鄕愁 배어나던 눈물이 노송 가지가지에 솔방울로 맺혔는지
타국에 묻혔어도 구름 되어 찾아와 산양정 네 기둥을 쓰다듬다 돌아간다 --------------------------------------- 1) 삼척시 원덕읍 기곡리 남향촌 앞산에 서 있는 정자. 고 민백기 씨(호:民公)가 고향을 그리며 새운 정자로 민 선생은 이민 간 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작고함. 그 부인 황임주 씨가 세웠다는 망부사비望夫詞碑가 정자 옆에 있다.
성산포1) 내 눈은 언제나 바닷물에 젖어 있다
아끼며 묻어놓은 깨알 같은 옛 얘기들 유채 피우는 꽃바람이 옷깃을 파고들면 신양리2) 해변까지 달려가는 생각이다
모래밭에 남겼든 네 개의 발자국은 흔적 없이 날아가 없어져버렸겠지만 궤적에서 지울 수 없는 작고 환한 모습 하나
가곡천3) 갈대가 서걱 이는 달밤에 불현듯 그 얼굴을 그려보고 있는 것은 성산포 모래 언덕에 다시는 못갈 것 같아 그렇다 --------------------------------------- 1) 제주도 남제주에 있는 항포구 일출봉이 유명하다 2) 제주도 성산읍 신양리 3) 시인이 살고 있는 삼척시 가곡 고향의 내川 산대월리里 큰밭大田에 하차하여 좁은 논둑 걸어갈 때 철늦은 뻐꾸기가 따라오듯 울었지
풀이슬에 새 구두가 흠뻑 젖어 갔어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다운 모습 흐뭇했고 홀어머니 뵙는 마음에 상기된 얼굴 예뻐서 두툼한 짐 가방도 무겁지 않던 신혼시절
좁은 창문 활짝 열면 송림 위에 큰달 뜨고 경포의 먼 야경이 땅별처럼 반짝이며 영서 가는 대관령 길이 은하수로 보이던 동네였다
솔밭 산 굽이 돌며 부르던 노래 희미한데 처가였던 집도 헐었다는 명주군 산대월리에 언제부턴가 나의 달月은 보름에도 뜨지 않는다
2014.6.21. --------------------------------------- 1) 강릉시 사천면 산대월리 2) 강릉에서 주문진 가는 사천면 도로변의 작은 마을 미인폭포1) 칠흑 같은 밤에도 재 넘어 영서嶺西 향하며 이지러짐 없이 간직한 천년의 깊은 모정慕情
넘치는 그리움은 폭포수 되어 떨어지는데 떠난 사람 오지 않은 차고 거친 긴 세월
붉게 물든 절벽으로 돋아 번진 이끼는 시들지 않은 단심丹心 보이려 내다 걸은 손수건
흰 머리 가리마 타며 이어지는 물줄기에 치마저고리 낡아가도 돌아서지 않은 여심이다
2015.8.23. --------------------------------------- 1)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에 있는 폭포 구사九士 터널1) 싸리꽃 쑥부쟁이 어우러져 피는 고개 내려가면 삼척행 넘어서면 태백이다
산머루 청다래가 이 골 저 골 익어가고 서리운 솔 안개는 구름으로 승천하는데
영동선 기적이 메아리 도는 구사리의 터널을 오고가는 자동차 꼬리 물 적 마다 아들딸이 그리워 소매 젖는 팔순八旬 모정
비 내리고 눈 날려도 사립문에 서성인다 --------------------------------------- 1) 삼척시 신리와 태백시 통리 간을 연결하는 910m의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험한 신리 재를 어렵게 돌아 넘었다. 태백선 뽀오얀 봄 길 따라 부드럽게 굽이 돌 때나 초록 숲 사이를 숨바꼭질하며 움직일 때
감 대추 익어가는 초가 옆을 스칠 때나 자부룩한 눈발이 골짜기 가득한 날에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태백선 기차소리
역마다 사람보다는 보따리 많이 올라와도 묻은 흙 툭툭 털며 앞으로만 딛는 바퀴들
방학 날 귀향하려 입석표 사고서도 환하게 재회하던 친구는 없어졌지만 겹 절벽 험한 터널을 뚫고 가는 황지1)행
주름투성이 노인 서넛 느긋하게 기대앉은 타인의 간섭이 전혀 없는 열차에 동떨어져 가도 외롭지 않아 잠이 절로 내린다
청량리–태백 간 9:10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2015.7.20 --------------------------------------- 1) 黃池, 태백선 열차가 지나는 태백시의 지명 계사동1)의 대추나무 북풍도 여기 오면 고사리처럼 순해지지만 잔눈이 수시로 능선을 타고 내리는 곳
돌밭을 지키고 선 꼿꼿한 대추나무는 산굽이를 허리에 감고 침묵에 들어 있다
그 숱한 가뭄과 살을 깎는 폭우에서 촘촘하게 맺어 익힌 자손 같은 알들을 순 이슬에 순 햇살로만 곱게 달콤 우려낸 너
변고와 숱한 전쟁 대간마저 뒤덮을 때 무풍지대 산동네는 하얀 속살 간직한 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미지의 선경 계사동
협곡을 해쳐가며 오르는 발길마다 태고의 소매 깃은 바람 되어 감싸는데 수만 년을 치마에 품고 지켜온 비경 십승지는 높다란 대추나무에 또 어떤 비록을 내다걸을까 2016.2.19. --------------------------------------- 1) 영월군 영월읍 연하리 계사동, 정감록에 나오는 전국 십승지十勝地 중의 한 곳이다. 제5부 적을 되짚으며 황지중앙장로교회 태백시 서황지로 2길 17번지는 영생 샘이 흐르고 있는 늘 푸른 성지이다
반백년 풍상 스친 거룩한 마당에선 천국 향한 기도소리 태양보다 뜨겁고 마주 잡은 손 길 손 길 참사랑이 지핀다
제일 늦게 꽃피며 맨 먼저 낙엽 지는 백두대간 고지지만 쉬지 않고 열매 맺어 생동의 말씀 동산 황지중앙장로교회
주님 영광 사계절 무지개처럼 서리는데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의 가슴마다 진정한 고미축사를 세상으로 보낸다
2014.6.16. --------------------------------------- 1) 강원도 태백시 시내에 위치하며 52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 2)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의 축약어 비상飛上하라 ― 신년 시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이지만 그물 없는 꿈을 찾아 바다로 간다
지난 길 돌아보면 희미한 흔적일 뿐 청명한 푸른 별 소롯이 다시 안고 하나하나 열어야 할 신비한 새날이다
무지개를 그리면 칠색 곱게 아롱지고 돌밭에도 심은 소망 피어나는 웃음꽃
늪 속의 안개 같은 미지의 언덕일지라도 불사조로 비상하라 펼치는 날개마다
해맑은 빛을 받아 새 힘 빚어 돋우며 갑오년甲午年 천마天馬 되어 준령도 뛰어 넘자
*『e-세상과 빛』지의 신년호 초대시 2014 |축|하|시| 호경빌딩 하늘정원 ― 지현경 출판기념회를 축하하며 발산동1) 빌딩 중에 ‘하늘정원’ 하나 있다
동촌2)의 바람결이 철따라 다다르며 논밭 둑에 있던 풀이 여기 와서 자란다
천관산3)의 매화 피면 산수유 향기가 어린다 어릴 적 그리워 소나무도 심었다
관산면4)에서 찾아온 새 잔디 위를 날며 지저귀고 호남향우가가 머무르는 아늑한 꽃밭 호경빌딩 옥상 가득 망향서린 정원으로 맨손으로 고향 떠날 때 뒤돌아보던 눈으로 가꾼다
2013.5.27 2016.5.24 --------------------------------------- 1) 서울 강서구 발산동 2) 지현경 박사의 고향마을 3)4) 전남 장흥군 관산면에 있는 산 이름 |추|모|시| 무창포의 시인 ― 고 홍완기1) 시인의 시비 건립에 붙여 궁말에서 태어나 무창포를 사랑한 나그네
석대도 푸른 바다를 가슴 가득 자아올려 절망 속에서 꽃 피우며 눈물 뿌렸던 고독자
백아白啞2)처럼 술잔 들고 허허롭게 웃는 초인되어 가난에도 시 찾으며 젖은 눈으로 별을 쫓아 밤하늘 외로웁게 솟구치던 은빛 새는
빈자의 모진 슬픔 성큼성큼 뛰어넘은 긍정과 창조의 보령 시인 홍완기
자학의 벽을 뚫어 관조에 들던 붓끝마다 모란뿌리에 심어둔 다홍색 열정을 그려냈고 해변에 시비詩碑로 서서 하늘 붉게 물들인다
충남 보령 무창포에서 2013.6.29. --------------------------------------- 1) 충남 보령출신 작고 시인 2) 홍완기 시인이 수상했던 ‘상화시인상’의 민족시인 이상화李相和 호 |추|모|시| 민주의 함성 1960년 4월 19일 민권을 지키려한 애국 백성의 피 끓는 외침이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구국 위한 소명으로 하늘이 주신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 장열하게 뿌리신 님들이여
소나무같이 청청했던 단 하나의 생명을 나라의 호혼으로 바친 혁명의 투사들이여 아직도 그 절규 산하에 메아리칩니다
된서리 모진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은 대한민국
조상은 장한 님들을 가슴으로 안았고 그 이름 하나 하나 나라의 명부에 새겼으며 민주의 꽃으로 산화된 님들 가신 지 53년 그 넋은 고을마다 무궁화로 피고 있습니다
우리는 님들이 남긴 소망을 잊지 않고 오대양 육대주에 힘차게 웅비합니다
님들이 세우신 민주주의 정신으로 조국은 끝없이 번성하며 이어갈 것이니 183기 호국의 위대한 영령들이시여 겨레와 함께 영원히 어디서나 동행하소서
* 4.19, 기념사업회 회보 및 시집용으로 보낸 시. 2013년 4.19 |추|모|시| 가곡면1) 충혼비의 님들이여 사랑하는 고향과 조상 땅을 지키다가 구천의 고혼 되신 애달픈 님들 앞에 초목도 머리 숙여 묵념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하나같이 보고픈 얼굴인데 간절히 기다려도 올 수 없는 그 모습
구름마저 저절로 멈춰 서는 하늘 아래 청산은 산꽃으로 눈물을 닦습니다
충혼탑 우러르며 30위를 새기는 이 시간 미망의 흰머리를 스쳐가는 바람소리
구슬픈 진혼곡에 흐느끼는 가곡천도 슬퍼마라 울지마라 어깨를 감쌉니다
창천의 태양같이 늘 푸른 바다처럼 님들의 순국 혈흔은 무궁화가 되었습니다
현충일, 가곡면 충혼비 앞에서 낭송 시 2014.6.6. --------------------------------------- 1) 강원도 삼척시 가곡면 제6시집을 마무리 하며_ 길 ▨ 제6시집을 마무리 하며 ▨ 길 나는 사물을 건성으로 본 적이 많았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고향에 들릴 때도 보이는 것들에 대해 별로 관심 깊게 눈여겨 살피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를 스친 것들은 다 어떤 의미가 있었을 터인데 아무렇게나 흘려버렸습니다. 놓치고 말았다는 것. 이것이 타향살이 51년이라는 기간의 유일한 결과입니다.
돌 한 조각, 풀포기 하나, 이름 없는 벌레 한 마리도 유일무이한 것이기에 지극히 귀중함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생각이 깊게 들 때면 발조차 함부로 내디딜 수 없었습니다. 어느 것이나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실로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이들 자리에 끼일 자격조차 없는 것 같아 자주 자숙에 들었습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일시적 충동이나 어줍잖은 교훈, 얄팍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시적 대상과의 교감에 따른 관조적 정서에 치중하려고 생각을 씻고 또 깎았습니다. 낮은 시지만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뇌를 뛰어넘은 평정심과, 숲속과 같은 고요를 얻기 위하여 시심을 오래 다듬었습니다. 때로는 흠뻑 젖도록 뛰어들었고 어느 땐 멀찌감치 물러나 보았습니다. 휩쓸리지 않고 본질과 종심을 외곽에서 바라봄으로서 가까이 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이게 힘겨웠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웃사이드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고 어정쩡한 방관은 아니었습니다. 너무 민감한 상관관계에서 내가 제대로 끼일 자리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영특한 사람들은 앞질러 이미 다른 세계로 들어갔지만 나는 아직 경계선에도 도달하지 못했다고 자인합니다. 그러니 지금도 서툽니다. 서툴기는 하지만 바로 가 보려고 시 정신의 나라를 오늘도 맨손으로 두드리고 있습니다. 2016년 5월 1일 강원도 삼척시 가곡면 탕곡리 500. 태어난 농촌 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