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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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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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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
圃
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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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集
卷
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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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간 「학포집」 4권 연보의 탄생 조를 복제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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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 마을 전경(위 : 1950년대, 아래 : 1990년대)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달이산 남쪽 기슭에 있는 양지바른 마을)
또 다음은 성종 25년(서기 1494) 소년 학포가 7세 때 능성현의 백일장에서 장원(壯元) 하였던 일화이다.
백일장이 끝난 뒤에 군수(郡守)가 장원을 한 그를 불러 들였더니 어린 소년이었음에도 몸가짐이 예법(禮法)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웃 수령들과 이곳 군수가 이를 보고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여 말하기를
“내 두루 여러 군을 돌아다니며 보아 왔지만 일찍이 이같이 뛰어나고 사랑스런 아이를 보지 못 하였도다.”
하면서 관아(官衙)에 머물러 있기를 권하였다.
그러자, 소년 학포가 대답하기를
“제가 듣기로 관아는 백성을 다스리고 송사(訟事)를 처결하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드나들며 독서할 곳이 아닙니다. 관가의 명령이 아무리 중대하다 해도 감히 따를 수가 없아옵니다.”
<吾聞官衙 是臨民聽訟之堂 非兒輩出入所則 官家之命 雖至重且大 不敢從>
(오문관아 시림민청송지당 비아배출입소즉 관가지명 수지중차대 불감종)
고 답하면서 곧 절하여 하직하고 나왔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수령들과 고을의 여러 어른들이 경탄함을 마지 아니 하며
“어찌 일곱 살의 아이가 저렇듯 어른스러울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지필묵(紙筆墨)을 넉넉하게 상으로 주었다고 한다.
그 뒤에 이곳 수령이 방백(方伯)7)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그 해 가을에 방백이 도내를 순찰하다가 능성에 이르러 다시 백일장을 열게 하고 소년 학포가 장원이 된 후 방백이 맞이하여 보더니 크게 기특하게 여겨, 그 재주와 기국(器局)8)을 시험해 보려고 ‘천지일월(天地日月)’을 글 제(題)로 하여 시를 지으라 하자, 소년 학포가 즉시 일어나 절을 하고 지필(紙筆)을 청하여 곧 시를 지어 바쳤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天地爲吾量(천지위오량) : 하늘과 땅으로는 나의 국량을 삼고
日月爲吾明(일월위오명) : 해와 달로는 나의 총명을 삼으리
天地與日月(천지여일월) : 하늘과 땅 그리고 해와 달이
都是丈夫事(도시장부사) : 모두가 이 장부의 일이로다.
이 시를 읽어 본 방백이 기특하게 여기며
“비록 여기에 앉아있는 사람(守令)들로 하여금 짓게 하더라도 반드시 여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요.”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도 소년 학포의 도량(度量) 즉 포부와 지혜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는 여러 고을의 수령들과 참석해 있는 모든 선비들로 하여금 화답시(和答詩)를 지어보라고 했지만 모두가 붓을 빼어들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에 방백이 크게 칭찬하여 상을 주고 손수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海鶴之姿(해학지자) : 바다를 나는 백학의 자태요,
秋月之精(추월지정) : 추천(秋天)에 뜬 명월의 정기로다,
他日龍門(타일용문) : 다음날 과거장에서
大闡芳名(대천방명) : 크게 방명을 떨치리라
죽수절제아문(竹樹節制衙門)
(전남 화순군 능주읍 소재지)
이 문을 들어서면 옛 능성현의 동헌 뜰이 있었고, 그 동헌 뜰에서 소년 학포는 백일장에 참가하였다.
(2) 이장(泥場)
서기 1914년 학포집을 세 번째 간행할 때에 학포의 탄생지를 쌍봉 혹은 이장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니까 옛날부터 이장 탄생설이 전해져 내려온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에서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이나 양과동(良苽洞) 현지의 촌로들의 구전(口傳)을 참고한다면 이장은 학포의 탄생지로서 매우 강력한 개연성(蓋然性)9)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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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 마을 전경
(현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
이장동 12마을 중 ‘원이장’(元泥場)이라고 하는 ‘이장 2리’ 마을.
다. 거주지(居住地)
(1) 월곡(月谷)10)
학포집에 의하면 소년 학포는 연산군 7년(서기 1501) 14세 때, 아버지 승지공(承旨公) 이하(以河)를 따라 월곡으로 이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1) 이로써 일단 탄생지가 쌍봉이라 했으니까 쌍봉에서 살다가 월곡으로 이사하였을 것이라고 미루어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로 다음의 ‘라. 수학지(修學地) (1)쌍봉사’조에 학포가 12세 때, 쌍봉사에서 공부할 때의 일화인 월곡의 집터와 부근 두곳의 묘지(墓地)12)를 잡아주었던 이상한 중 즉 지사에게 보답으로 증여했다는 논인 ‘지사야미(地師夜味)’13)가 쌍봉 마을 앞에 있지 않고 월곡 마을 앞에 있다는 것은 학포가 어렸을 적에는 쌍봉에서 살았고 장성해서는 월곡에서 살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학포가 어렸을 때에는 지사에게 물질적으로 보답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고, 경제적 결정권을 가질 수 있는 성인이 된 후에 지사에게 보답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포는 월곡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지사에게 보답하려고 ‘지사배미’를 증여하고 대대로 자손에게 알리기 위하여 족보에까지 기록해 두었다고 본다. 하지만 당시 승려의 신분으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므로 학포의 본가에서 농사를 지어 생산된 소출을 자손들이 잊지 않고 지사에게 보내도록 하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학포는 중종 14년(서기 1519) 32세까지 약 20년 동안을 살았다. 여기에서 살 때 학포는 지지당(知止堂)에게 배우고(16세), 금산김씨 부인과 혼인하였으며(17세), 장남 응기(應箕)14) 출생,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를 방문하여 사우지교(師友之交)15)를 맺고(19세), 장녀 정씨 부인 출생, 정암과 함께 소과(小科)16)에 급제(23세), 부친상(24세), 대과(大科)17)에 급제(29세)한 후 조정에 들어가 홍문관(弘文館正字) 장흥고(長興庫直長) 서빙고(西氷庫奉事) 등에 근무(29세), 둘째 응태(應台) 출생 성균관(成均館典籍) 공조(工曹佐郞) 형조(刑曹佐郞) 사간원(司諫院正言)에서 봉직(30세), 경연 시독관(經筵 試讀官) 및 이조(吏曹佐郞)에서 봉직, 사가독서(賜暇讀書)18)(31세), 셋째 응정(應鼎) 출생 사간원(司諫院正言) 사헌부(司憲府持平)에 봉직하면서 현량과(賢良科)에 뽑힘, 이조(吏曹正郞) 홍문관(弘文館校理, 修撰)에 봉직하면서 경연(經筵)19)에서 시강(侍講)하는 등 조정에서 활동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파직 귀향하였다. 그러다가 능성에 부처(付處)20)된 정암과 도학(道學)을 논하고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나누다가 정암이 사약(賜藥)을 받자 그의 시신(屍身)을 거두어 증리(甑里)에 은장(隱葬)하고 쌍봉에 학포당을 지어 은거하기까지(32세) 살았으며, 이후로도 학포의 본가는 여기에 있었다.
학포의 장자인 응기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이 마을에서 대대로 조상의 터를 지키며 살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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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마을 전경(전남 화순군 도곡면 달아실)
(2) 쌍봉과 증리
학포는 태어나서 14세까지 유아기와 소년기를 쌍봉에서 보낸다.
그리고 32세에 기묘사화를 당하여 한양에서 월곡 본가로 귀향하였다. 그러다가 능주로 귀양온 정암과 만나 ‘도의(道義)로 종유한 20일’21)을 함께 하다가 그가 사약을 마시고 죽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중조산(中條山) 골짜기 증리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다음 해 봄 그의 체백(體魄)을 용인(龍仁)으로 보낸 후 그 해 여름 정암의 체백을 모셨던 자리에 죽수사(竹樹祠)를 세우고 집에서 부리는 종복(從僕) 3가구를 두어 사당을 돌보게 하였으며, 봄․가을로 자제들로 하여금 정암을 향사(享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학포는 정암의 수명일(受命日)22)이 돌아오면 당북(堂北)23)에 주과(酒果)를 차려놓고 통곡하였다.
정암 사후 2년 동안 학포는 증리의 죽수사를 짓는 일을 돌아보기도 하고, 쌍봉의 학포당을 창건하느라 월곡 쌍봉 증리를 오가며 살았을 것으로 본다.
34세에 쌍봉의 학포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 58세에 영면(永眠)하기까지 철저하게 자기를 감춘 은둔의 삶을 살게 된다.
(자세한 설명은 본서의 <1-아-(2) 쌍봉의 학포당에서>를 보기 바람)
라. 수학지(修學地)
(1) 쌍봉사(雙峰寺)
쌍봉 마을을 지나서 동편으로 포장된 도로를 타고 3.3 km 쯤 올라가면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사동 마을이라는 곳에 아늑함으로 다가오는 사찰이 하나 있다.
이곳이 학포가 수학을 했던 쌍봉사이다.
신라 구산 선문(九山禪門)24) 중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개조인 철감선사(澈鑑禪師)가 통일신라 48대 경문왕 8년(서기 868)에 창건하였다는 이 절에는, 소년 학포가 열 두 살 때에 독서하였다고 전해지는 서재(書齋)가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오래 되어 찾을 수 없다.
이 절에는 학포에 관한 일화가 얽힌 특이한 구조의 「삼층 대웅전」25)이 있는 데 이 삼층 대웅전이 서기 1936년 보물 제 163호로 지정되었다가 서기 1984년 4월 3일 신도의 부주의로 소실된 후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다. 그 후 문화재 관리국이 관계 자료를 수집하여 서기 1986년 12월 30일에 원형대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아랫마을 쌍봉에서 살던 학포가 열두 살이 되어 이 쌍봉사의 서재에서 공부를 할 때의 일이다.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어떤 이상한 중이 나타나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마구 사람을 때리며 몰아 붙이니 온 절(寺) 사람들이 두려워 피해 도망갔다. 소년 학포가
‘방망이 하나를 가져 오라. 내가 이 해(害)를 제거하리라’
하고 누각 아래에 섰다가 방망이로 미친 중의 머리통을 치고 세 길이나 되는 누각 위로 뛰어오르니 그 중이 소년 학포의 기상이 범상치 아니함을 지긋이 보고 있다가 소년 학포의 국량이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해 보려고 이번에는 갑자기 절로 뛰어들어가 겁을 주며 소리치자 소년 학포가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고 공수(拱手)26)를 하고 바르게 앉아 말하기를
‘그대는 무슨 중이 길래 감히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하는가?’
하고 태연하게 책을 대하여 전과 같이 글을 읽는 것이었다.
그러자 중은 즉시 뜰 아래로 내려가 절을 하고 사죄하며
“공(公)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분입니다. 소인이 공의 기상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하기에 살며시 시험을 해 보았더니 과연 소인이 듣던 대로입니다. 뒷날 입신 양명(立身揚名)27)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마땅히 이름이 백세에 흐르고 천추(千秋)28)에 혈식(血食)29)을 할 것입니다.”
하더니 곧 앞으로 다가와서 미래(未來)의 일30)을 세밀히 일러주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 후로 소년 학포의 명성이 더욱 드러나고 고을의 어른들도 학포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유도 수재(有道秀才)31)’
라고 일컫고 각 고을의 수령들도 모두 찾아와 보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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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사 전경(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쌍봉사는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사동마을에 있는 작은 절로 송광사의 말사(末寺)이다. 대웅전, 극락전, 요사채, 해탈문 등 달랑 4채의 절 집이 고작이다. 작지만 아름답고, 소박하지만 묵직한 위엄이 절 마당에 가득하다. 무릇 절이란 이래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쌍봉사는 정확한 역사를 알기 어렵다. 곡성 태안사에 있는 혜철스님 부도비에 '신라 신무왕(神武王) 원년(839년)에 쌍봉사에서 여름을 보냈다'는 구절이 있어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후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철감선사가 절을 맡았다. 철감선사 밑에서 공부한 징효대사가 강원 영월의 사자산에서 법흥사를 짓고 사자산문을 일으켰으니 철감선사는 사자산문의 개조이고 쌍봉사는 그 모태가 되는 절이다.
철감선사의 종풍은 널리 펴져 경문왕(景文王)은 그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선사가 입적하자 철감이란 시호를 내리고 부도탑명을 ‘징소’라 내렸다,
누차 중창을 거듭하다가 1597년 정유재란을 만나 왜군에 의해 대부분의 건물과 재산이 소실되었고 1950년 6.25를 만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되었다. 극락전과 대웅전만이 보존되어 오다가 1978년 명부전의 재건 등 옛 영화를 꿈꾸던 중 1984년 3층 목조탑 대웅전이 소실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1986년 대웅전이 복원되고 해탈문, 요사체, 종각이 건립되었고 97년에는 철감선사탑 탐방로 정비와 죽로전 신축공사가 있었다.
쌍봉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독특한 양식의 대웅전이다. 조선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3층 목조탑 양식으로 지어졌다. 우리나라 탑이 대부분 석탑 일색인데 이 탑은 목조탑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과 함께 한반도에 두 개 밖에 없는 희귀한 양식이다. 1936년에 일찌감치 보물로 지정되어 관리됐다. 그런데 아쉽게도 1984년 한 신도의 부주의로 불에 탔다. 지금의 건물은 1986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복원한 것이다. 기단 돌에 검게 그을린 자국이 있다. 대웅전을 돌아 소박한 돌계단을 오르면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은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곳.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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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학포가 12 세 때 독서하였다고 전해지는 서재(書齋)였는데 지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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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사의 「삼층 대웅전」
학포소년이 12세 때 이 절에서 공부할 때 이상한 중이 나타나 소란을 피우자 이 중을 혼내주고 나무랐던 일화에서 세 길(三丈)이나 뛰어 올랐다는 바로 그 누(樓)가 달린 대웅전
(2) 영광군 삼계면 내계리
연산군 8년(서기 1502) 15세이던 소년 학포에게, 잠시 벼슬길에서 물러서 있던 지지당32)이 찾아와 한 번 보고 구면과 같이 하며, 며칠 동안을 머물러 성리(性理)의 학문을 논했는데, 무슨 말이든 금방 알아듣고 물 흐르듯 막히지 않거늘 감탄을 하면서
“우리 동방(東邦)에 도(道)를 전할 책임을 진 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고 마치 높은 제자 대우하듯 하고, 돌아갈 적에 이곳 수령을 찾아보고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이 자네의 나라에 안자(顔子)33)가 있다 했는데 바로 오늘날 그대의 고을에 양수재(梁秀才) 아무개가 있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학포는 연산군 9년(서기 1503) 16세가 되어 이렇게 자기를 눈여겨보아 주었으며, 도덕이 높았던 당년 45세의 호남의 거유(巨儒) 지지당의 문하에 들어가 1년 동안 배우며 당시 6세인 송재 나세찬(松齋羅世纘)34), 11세인 면앙 송순(俛仰宋純)35) 등과 함께 학문을 닦고 도의의 교분을 쌓게 된다.
이로부터 24년의 세월이 흐른 중종 22년(서기 1527) 이제 벼슬길에서 물러나 은둔 8년째요 40세의 도학 명절이 된 학포가 존경하는 옛 스승이 계시는 이 곳 영광(靈光)36)을 방문하여, 도의의 교분을 맺었던 벗들과 공부하며 지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스승이 말년에 지은 이곳 관수정(觀水亭)37)에서 스승의 시(詩)에 차운(次韻)38)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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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수정 전경
( 전남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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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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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포가 차운한 시의 편액(扁額)(관수정 내)
학포의 13대손 재경(在慶)이 학포가 다음과 같이 차운한 「차 송지지당선생 관수정운 2수」를 현판에 각(刻)하여 걸었다.
▣ 次宋知止堂先生觀水亭韻 二首
(송지지당 선생의 관수정 시에 차운하다. 2수)
翠壁盤回水鏡寒 (취벽반회 수경한) : 푸른 암벽 서려 도는 물은 맑아 차가운데
當流亭子爽雕欄 (당류정자 상조란) : 흐름 마주 지은 정자 난간도 시원하다.
風吹細浪魚成隊 (풍취세랑 어성대) : 바람에 물결 일면 고기들 떼 이루고
鷗蹴淸波雪漾灘 (구축청파 설양탄) : 갈매기 물차고 날면 눈 같은 하얀 여울
白白山雲幽更悅 (백백산운 유경열) : 희고 흰 산구름은 그윽하여 즐겁고
雙雙歸鳥暮兼觀 (쌍쌍귀조 모겸관) : 쌍쌍이 나는 새 떼 저물 녘의 볼거리라
仁居智樂公能了 (인거지요 공능료) : 어진 삶 즐긴 지혜 공은 잘도 하셨으니
昏醉榮名摠鼠肝 (혼취영명 총서간) : 영화에 취한 이들 모두가 쥐 간일세.
[주] 1. 인거지요(仁居智樂) : 仁者樂山(인자요산) 智者樂水(지자요수)에서 따온 말. 산과 물을 즐김
2. 서간(鼠肝) : 鼠肝虫臂(서간충비)의 약어. 쥐의 간과 벌레의 팔뚝. 곧 보잘것없는 것이란 뜻
遠遠源川漾玉寒 (원원원천 양옥한) : 멀리서 흘러 온 시내 옥처럼 시원한데
雙雙流注入亭欄 (쌍쌍유주 입정란) : 줄기줄기 흘러와서 난간 밑에 드는구나
秋光颯爽淸波月 (추광삽상 청파월) : 가을빛 상쾌하다 물결 위에 달 그림자
雲影嬋姸白鷺灘 (운영선연 백로탄) : 구름 모습 선연하다 백로 서서 거닌 여울
幽興每因閒處熟 (유흥매인 한처숙) : 언제나 한가한 곳 흥취가 무르익고
澄瀾聊着靜中觀 (징난요착 정중관) : 일렁이다 멎은 물결에 고요를 본다.
名成勇退如公少 (명성용퇴 여공소) : 이름나고 용퇴하는 공 같은 분 또 있는가
嬴得冰操濯肺肝 (영득빙조 탁폐간) : 얼음같이 맑은 지조 폐와 간도 씻은 듯해.
[주] 1. 빙조(氷操) : 얼음처럼 차고 투명한 지조(志操)
☆ 宋知止堂先生觀水亭原韻(송지지당관수정원운)
危構臨流夏亦寒 (위구임류 하역한). 물가의 높은 집은 여름도 서늘하이
老夫無日不憑欄 (노부무일 불빙란). 늙은이는 날마다 난간에 비기었네
旣專谷口雙溪水 (기전곡구 쌍계수). 골짜기의 두 냇물 일찍이 차지하니
奚羨龍門八節灘 (해선용문 팔절탄). 어찌하여 용문의 팔절탄 부러하리
靜影沈光眞可樂 (정영침광 진가락). 물에 잠긴 그림자 참으로 즐거운데
晴糚雨抹最堪觀 (청장우말 최감관). 비 멎은 그 모습이 더 볼만하다.
千姿萬態渾迷眼 (천자만태 혼미안). 갖가지 모습들에 눈앞이 혼미해져
要取淸瀾洗我肝 (요취청란 세아간). 맑은 물 길어서 마음을 씻으려네.
[주] 1. 용문(龍門) : 중국 황하의 상류에 있는 산 이름. 八節灘은 그 곳을 통과하는 여울목의 이름. 잉어가 이 곳을 거슬러 오르면 용이 된다는 곳.
2. 청장우말(晴糚雨抹) : 개인 날의 단장한 듯한 산뜻한 경치와 빗속에서 보이는 흐릿한 경치
마. 종유지(從遊地)39)
(1) 경기도 용인(龍仁)
당년 19세가 된 청년 학포는 중종 원년(서기 1506년) 당시 경기도 용인에 있는 정암의 생가를 방문하여, 정암이 도학에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6년 연상(年上)인 그와 사우지교(師友之交)를 맺게 된다고 학포의 연보 19세조에 기록되어 있다.
정암조선생 광조를 용인으로 찾아가 보다. 선생이 개연(慨然)히 도를 구할 뜻이 있어 의리를 연구하고 경제에 마음을 두었으나 지식을 개척해 나가지 못함을 병되게 생각하고 드디어 정암선생을 찾아가 더불어 경지(經旨)를 강구하고 사물을 토론하니 정암도 깊이 그 학식과 재행(才行)을 인정하며 세상에 필요한 큰그릇이라고 했다.
<방정암조선생광조우용인 선생개연 유구도지지 궁연의리 존심경제 이병무이전탁축 방정암선생 여강구경지 토론사물정암 돌후기학식재행 의이수세대기>
(訪靜菴趙先生光祖于龍仁 先生慨然 有求道之志 窮硏義理 存心經濟 而病無以展拓逐 訪靜菴先生 與講究經旨 討論事物靜菴 湥詡其學識才行 擬以需世大器)> - 학포의 연보 19세조
이로써 두 사람이 맞이할 도학적 관계의 운명이 엮어지게 된다.40)
그런데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조정암이 태어난 곳은 구름재(雲峴) 기슭, 즉 ‘땅이 질펄질퍽한 고개’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 구름재의 한자 ‘운현(雲峴)’과 진흙마을 ‘니동(泥洞)’의 합성어가 오늘날의 ‘운니동(雲泥洞)’이다. 지금은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이다.41)
따라서 청년 학포가 정암을 방문하여 종유한 곳은 경기도 용인이 아니라 조정암의 생가가 있었던 한양 땅 운니동이 틀림없음을 이 기회에 바로잡는다.
그리고 중종 5년(서기 1510년) 봄 23세인 학포는 생원시(生員試)42)에 제2로, 정암은 진사시(進士試)43)에 방수(榜首)44)로 각각 합격함으로써 같은 해에 같은 소과(小科)에 급제하여 동년(同年)이 되었다. 문과(文科)45)는 정암이 중종 10년(서기 1515) 34세에, 학포가 중종 11년(서기1516) 29세에 연이어 급제하였다. 이후 일생동안 뜻도 같고 도학도 같은 동지(同志) 동도(同道)이었으며 죽은 뒤에 같은 사우(祠宇)46)에 제향된 동원(同院) 등 세칭 4동(四同)이 된 것이다.
두 분의 관계는 살아서 뿐만이 아니라 죽은 뒤에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에 연령의 차이나 벼슬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양(兩) 가문의 후손들까지도 서로 자기 조상처럼 받들고 존경하는 마음이 지극해서 다른 가문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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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 ‘서원말(마을)’ 전경
정암 조광조를 배향하고 있는 심곡서원이 있는 마을
수지읍에서 동수원(수원시 팔달구)로 통하는 43번 국도의 수원시 경계에 약간 못 미쳐서 ‘상현리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하여 고속도로를 벗어나 들어가면 이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이제 현대식 아파트 숲으로 둘러쌓여 있는데 바로 뒤에 금호건설이 지은 거대한 금호아파트가 있다.
(2) 전북 남원(南原)
기묘사화 후 아직 관작(官爵)이 회복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고 있던 학포는 중종 26년(신묘, 서기 1531년, 44세) 봄에 용성(龍城)47)으로 가서 나이는 4년이나 연하이지만 문과에는 2년이나 먼저 급제하였으며 한양에서 같이 관직생활을 했던 안사제당 처순(安思齊堂 處順, 40세)을 사제당(思齊堂)48)에서 만나 한 달이나 머물면서 경의(經義)49)를 토론하고 군자와 소인에 대한 소장(消長)50)의 이치를 논한다. 그리고 사제당 원운에 차운하는 시 2수를 남기게 된다.
그 후 처순은 사제당에 묻혀 후학을 가르치고 경전(經典)을 뽑아 사제실기(思齊實記) 6권을 엮고 제현(諸賢)과 교유하던 중 중종 28년(서기 1533년) 42세에 기묘사화에 연루된 사림들이 풀려나게 되어 양현고(養賢庫) 주부를 거쳐 봉상시(奉常寺) 판관에 제수(除授)51)되었으나 병을 얻어 43세(중종29년 서기 1534년)에 운명하게 된다.
얼마 후인 다음해에야 부음을 들은 학포는 안사제당의 상방(喪房)을 찾아가 곡하게 된다.
▣ 次安順之處順 思齊堂韻二首
(안순지 처순의 사제당 시에 차운하다. 2수. 사제당 기념관에 이 시의 목각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斯人淸致仰高山 (사인 청치 앙고산) : 이 사람의 맑은 운치 태산처럼 바랐는데
仙鶴飄然不記還 (선학 표연 불기환) : 훌쩍 떠난 선학은 돌아올 걸 잊었누나
笛裏山陽多感慨 (적리 산양 다감개) : 피리 소리 산양 땅에 감개함도 많고 많아
百年雲水屬人閒 (백년 운수 속인한) : 백 년 즐긴 구름과 물만 세상에 남았구려
自愛蔥籠背後山 (자애 총롱 배후산) : 파 바구니 푸른 뒷산 항상 사랑하더니
江流朝海不曾還 (강류 조해 부증환) : 강은 흘러 바다로 가 돌아오지 않는구나
一生芹曝懷君意 (일생 근포 회군의) : 일생 동안 계절마다 임금 생각하던 마음
不但魚樵共做閒 (부단 어초 공주한) : 고기잡고 나무한다 논 것만은 아니었지.
[주] 1. 차(次) : 차운. 즉 남이 지은 시의 제목과 운을 같이 하여 지은 시
2. 선학(仙鶴) : 옛날 선인(仙人) 정령위(丁令威)가 천년만에 학이 되어 다시 요동(遼東)에 돌아왔다는 고사
3. 적리산양(笛裏山陽) : 진(晋)나라의 향수(向秀)가 산양(山陽) 땅 목강(穆康) 여안(呂安)의 옛 집을 지나다가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고 옛날을 생각하며 슬퍼한 고사
4. 芹(미나리 근) 曝(볕 쪼일 포) : 옛 사람이 봄 미나리 맛이 좋아 임금께 바쳤고, 겨울날 햇볕이 따뜻하여 임금께 쪼여 드리고 싶어한 고사. 임금을 생각하는 마음.
6. 조해(朝海) : 조(朝)는 여기서는 ‘조회할 조’ 따라서, 조해(朝海)는 바다로 모인다는 뜻이 됨.
7. 선학표연불기환(仙鶴飄然不記還)이나 강류조해부증환(江流朝海不曾還) 또는 백년운수속인한(百年雲水屬人閒) 등의 시구(詩句)에서 사제당 서거 후 임을 짐작케 한다.
☆ 安處順의 原韻 (안순지가 사제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스스로 지은 시)
草屋初開江上山 (초옥초개 강상산) : 초옥 한 채 강 흐름 볼 수 있는 산 위에 지어 놓고
江干日日釣魚還 (강간일일 조어환) : 날마다 강가에 나가 고기를 낚고 돌아오지
平生擅有玆江勝 (평생천유 자강승) : 평생을 두고 이 강의 아름다움 독차지하니
長謝天公早畀閒 (장사천공 조비한) : 천공이 주신 한가로움을 감사할 밖에
[주] 1. 원운(原韻) : 차운이 아닌 원작자의 시
2. 강간(江干) : 간(干)은 여기서는 (물가 간) 그러므로 강간(江干)은 강물 가, 강가 라는 뜻이 됨.
3. 천공(天公) : 천제(天帝). 하늘을 다스리는 신, 조물주, 상제(上帝)
4. 강(江) 이름은 섬진강의 상류인 남원의 순자강(鶉子江)이다.
5. 이 역문은 전북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사제당 기념관에 소장된 사제당 안처순의 시전(詩瑑)의 번역문을 그대로 적은 것이다.
135*90 |
사제당(思齊堂)
사제당이란 안공(安公)의 호이자 기묘 파귀(罷歸) 후 중종 16년 순자강변에 지은 처순의 서재이며 거실의 편명(扁名)이다. 처순은 이곳에서 제유현(諸儒賢)들과 시를 읊고 경서를 강론하는 한편 후학을 가르치며 사제실록을 집필하였다.
130*85 |
사제당 기념관
지난 광복후 경진년(서기 2000년) 이곳에 사제당 기념관이 건립되어 500년 동안 보장해 온 기묘명현들의 수필(手筆), 송별시(送別詩), 서간문 그 밖의 국가지정 보물 등 수십 점이 진열되어 있는데 학포의 친필시의 목각판 편액이 여기에 있다.
130*85 |
사제당 기념관 내부
바. 과환(科宦)52)
(1) 등과(登科)53)
왕조(년) |
육갑 |
서기 |
연세 |
과 거 명 |
거소 |
중종 5 중종 11 |
경오 병자 |
1510 1516 |
23 29 |
생원시 합격 문과 급제 |
월곡 한양, 월곡 |
(2) 행직(行職)54)
왕조(년) |
육갑 |
서기 |
연세 |
관 직 명 |
거소 |
중종 11
중종 12
중종 13
중종 14
중종 28 중종 33
중종 39
(인종1,명종1) |
병자
정축
무인
기묘
계사 무술
갑진
을사 |
1516
1517
1518
1519
1533 1538
1544
1545 |
29
30
31
32
46 51
57
58 |
홍문관 정자 장흥고 직장 한성 참군 봉상시 주부 성균관 전적 공조 좌랑 형조 좌랑 사간원 정언 사간원 정언 경연 이조 좌랑 사가독서(호당)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탁(擢) 현량과 이조 정랑 홍문관 교리 수찬 【기묘사화 일어남, 능성으로 돌아 옴】 은서 불취(恩敍 不就) 관작 회복, 경연 강관의 명에 불취 관작 회복, 경연 강관 명 불취 용담 현령 (중종 승하) (인종 승하)퇴임 귀가, 학포 서거 |
한양, 월곡
한양
〃
〃
쌍봉 은거 〃 〃
용담
쌍봉 |
(3) 마지막 봉사
중종은 반정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제왕으로서의 포부를 펴지 못하고 있다가 조정암을 등용하면서 개혁을 부르짖는 그를 통해 공신들로부터 벗어나 명실상부한 제왕으로서의 위엄을 보이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공신들의 반격으로 왕도정치(王道政治)55)를 부르짖는 신진 사림들의 씨를 말리는 기묘사화라는 국가적 위기를 다 넘기고 난 후, 그의 재위 39년(서기 1544) 자기의 죽음을 감지해서 인지 서로가 꿈 많던 청년시절 지근(至近)의 거리에서 경연(經筵)의 강관(講官)으로 또는 사헌부(司憲府)의 헌관(憲官)으로 자기를 보필하여 주다가 기묘사화로 인해 자기 곁을 떠나 초야에 묻혀 지낸 지 25년이 지나서야, 당년 57세로 동갑인 학포에게 - 아무리 불러도 응하지 않던 그에게 이번에는 외직(外職)으로 용담(龍潭)56) 현령을 제수 하였다.
수 차례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던 학포는
“임금의 명을 자꾸 욕되게 할 수는 없다.”
하며 부임하여 나라를 위한 마지막 봉사를 하게 된다.
그 연유는 이러하다. 전년(前年)에 동궁(東宮)에 화변(火變)이 있었는데 부수찬 김인후(金麟厚)57)가 차자(箚子)58)를 올려 기묘 제현의 억울함을 극진히 진술하였고, 이때에 이르러 참찬 송세형(宋世珩)59)이 조강(朝講)에서 기묘 제현들의 관작을 회복해 줄 것을 청하니 이에 용담 현령의 명이 내렸다.
이에 학포는 깜짝 놀라며
“내가 일찍이 경악(經幄)60)의 명이 있었는데도 나가지 않았는데 이제 제수를 받는 것이 옳겠느냐마는 임금의 명을 자꾸 욕되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지위가 높으면 책임이 무겁지만 지위가 낮으면 책임이 가볍다.”
면서 사양하고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부임을 하였으나 다음 해에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버렸다.
학포가 이 고을에 부임하였을 때의 일이다. 이 고을에 교활한 아전(衙前)61)이 있어 사람들이 그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는데 학포가 그에게 수리(首吏)62)를 맡기고, 순순히 이치에 맞게 타이르자 마침내 변화되었고, 고을에 또 맹호가 돌아다니며 사람을 상했는데 학포가 글을 지어 산에 제사를 지내자 범이 경계 밖으로 옮겨가 버렸다.
실제로 중종은 그 해(중종 39년, 서기 1544) 11월에 승하(昇遐)63)하게 된다.
용담현은 현재 전북 진안군 용담면 소재지로서 현재는 수몰 지구가 되었다.
125*88 |
멀리서 본 숲 속의 용담현 동헌
조선시대 수 백년 동안 고을 수령의 집무실로 사용되어 오던 이 동헌 건물은 1970년대에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면서 면사무소로 개조하여 사용하여 오다가 1997년 이 곳이 용담댐에 수몰되면서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158*225 |
용담현 동헌내의 편액들
용담현 동헌에 걸린 편액들은 그곳이 수몰되면서 용담면사무소와 향교에서 나누어 보관하고 있다. 그 편액 중 일부를 위와 같이 용승(湧承)64)이 촬영해 와 광식(光植)65)이 번역하고 그 역문을 다음과 같다.
◈ 군수 명단(郡守名單 : 선생안(先生案)) 서문
∘내가 작년 겨울에 이 고을(용담)의 군수로 부임하여 군수명단을 찾으니 아전이 와서 말하기를 ‘옛날에는 군수 명단이 있어서 여지승람(與地勝覽)66)과 함께 금궤(金櫃)에 넣어 두었는데 잃어 버렸다.’ 한다.
∘현재라도 군수들의 성씨를 기록해 두지 않으면 끝내 잊혀져 전해지지 않으리라. 그래서 나이든 노인에게 물어서 다음과 같이 적어둔다.
∘다만 사람들이 적어둔 내용대로만 기록하므로 잘못되거나 빠진 곳이 많다.
∘양선생(梁先生)부터 시작하고는 빠진 것이 없고 또 「여지승람」에서 고을 사람들을 시켜 이웃 고을에 가서 찾아보게 하였지만 구득을 못하다.
∘그러하므로 산천(山川), 도리(道里), 인물(人物)에 대한 사항을 간략히 적어, 보고자 하는 이에게 보탬이 되게 하다.
∘서기 1609(광해 1)년 4월 현령 이명남(李命男)이 적은 군의 기록에 군수 명단이 있다.
∘군지(郡誌)는 먼저 근무한 자의 성씨를 기록하여 다음에 오는 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는 문헌이 적어서 신라와 고려 이전의 그 유적들은 많지만 국가 사료에서 고증하기 어렵다. 하물며 작은 고을들의 오래된 발자취를 어떻게 고증하리요.
∘용담현이 비록 작지만 지역을 다스리는 데는 무슨 한계가 있으리요. 평안하던 옛 기록들을 1597년의 전쟁67) 때 모두 불에 타버렸다.
∘그런 뒤 기관에서 다시금 작성했지만 그 모양이 볼품 없다.
∘이명남 군수는 옛 기록에 대한 느낌이 있으나 현재에 없음을 애석히 여겨 고을의 노인에게 골고루 가르침을 받고 겨우 적었다. 퇴임한 벼슬아치에게 널리 물어서 들은 바만 겨우 적었다.
∘위로는 고려 말엽까지 이어진 200여 년의 사실이지만 적을 내용은 별로 없고 빠진 것이 더 많았으니 이 문자조차도 근거하지 않은 다면 이 같은 사실을 어떻게 보존할 수 있겠는가!
∘지나간 여름에 현감으로 부임하여 왔다가 내가 마침 군수를 맡게 되다.
∘근무를 마치고 틈틈이 옛 군수 명단을 읽어보니 어떤 곳은 근무자나 백성이 멋대로 직위를 올렸거나 칭찬을 한 곳이 있었다. -이하 없음-
∘군수 명단 양팽손(梁彭孫) 文68)
안세후(安世厚)
윤반로(尹磻老)
송세의(宋世儀)
김 간(金 澗) 文
허 묵(許 黙) 文
김 권(金 權) 文
소세량(蘇世良) 文
사.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連累)되어
(1) 기묘사화의 기인(起因)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연산군 시절에 쫓겨난 도학정치가들의 제자인 신진 사류를 등용하여 파괴된 유교적 정치질서의 회복과 교학(敎學), 즉 대의명분과 오륜(五倫)을 존중하는 성리학 장려에 힘썼다. 이러한 새 기운 속에서 점차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조광조 등 신진 사류였다.
신진 사류의 대표적 존재였던 김종직(金宗直)69)의 문인이며 성리학에 조예가 매우 깊었던 김굉필(金宏弼)70)의 제자인 조광조는, 류숭조(柳崇祖)71)의 도학 정치론에 감화된 당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예학자였다. 이때는 무오․갑자사화 직후라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이라거나 혹은 ‘화태(禍胎)라 하였다. 친구들과도 자주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편,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조광조는 1510년(중종 5) 사마시(司馬試 : 소과 : 진사)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1515년 성균관 유생 2백인과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조지서(造紙署)72) 사지(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증광시(增廣試)73)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면서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조광조는 벼슬로는 성균관전적, 사헌부 감찰, 예조 좌랑 등을 지냈고, 홍문관으로 옮겨 수찬과 부제학을 역임하면서는 왕 앞에 나아가 학문을 강의하는 등 임금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중종 반정 초기에는 이과(李顆)74)의 옥(獄)과 같은 파란도 있었으나, 연산군의 악정에 대한 개혁이 진행되고,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도학을 존숭하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聖賢)을 본받음으로써 지치(至治)를 일으킬 것’, 즉,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 3대(하, 은, 주 시대)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75)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 첫 사업으로서 과거제의 폐단을 혁신할 목적으로 인재를 천거, 시험에 의하여 등용하는 제도인 현량과(賢良科)76)를 설치하고 많은 신진 사류를 등용하여 유교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또, 도교의 제사를 맡아보는 소격서(昭格署)77)를 폐지하여 미신 타파에 힘쓰고, 향약(鄕約)을 실시하여 지방의 상호부조와 미풍양속을 배양하는데 힘쓰는 한편, 교화에 필요한 ‘이륜행실’과 ‘언해여씨향약’ 등의 서적을 인쇄, 반포하였다.
이 같은 그의 지치주의 정치의 업적은 다방면에 걸쳐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의 이상적인 왕도정치는 그 구현과정에서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면이 적지 않아 타인의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어 정적이 생기고, 또 철인군주(哲人君主)의 이상과 이론을 왕에게 역설한 것이 도리어 강요의 인상을 주어 왕도 그의 도학적 언동에 대하여 점차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성리학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고려이래 장려된 사장(詞章)78)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남곤(南袞), 이 행(李荇) 등의 사장파(詞章派)79)와 서로 대립하게 되고, 청렴결백과 원리원칙에 입각한 도학적인 그들의 태도는 보수적인 기성세력을 소인시(小人視)함으로써 훈구 재상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당시 반정중신으로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으므로, 조광조 일파에 대한 기성 훈구 세력의 불평불만이 1519년에 있었던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즉, 중종 14년(기묘, 서기 1519) 10월에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개혁세력들은 국정 개혁의 걸림돌인 정국공신(靖國功臣)80)의 훈(勳)을 삭탈할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학포가 정암과 더불어 정국공신을 논하면서
“박원종이 비록 큰 공은 있으나 무식하고 성희안이 유자광과 알고 지내는 관계로 큰 일을 간인(奸人)81)에게 맡겨 가지고 외람 되게 그 자제들 중에는 척촌(尺寸)82)의 공로도 없는 자들까지 등록을 했으니 이것이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그러자 정암이
“이욕(利慾)의 근원을 막고 세도(世道)를 막을 방도를 격려하는 것은 훈록(勳錄)을 깎는 일보다 먼저 할 일이라. 이제 만약 단단히 막아두지 아니하면 반드시 말못할 사태까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면서 여러 차례 왕께 아뢰었고, 이때 학포가 부제학 김구(金絿)․응교 기준(奇遵)․수찬 심달원(沈達源) 등과 더불어 차자(箚子)를 올려 극진히 논의하고 정암도 연해서 아뢰고 강력히 간쟁(諫爭)을 하자 주상께서 허락을 하여 정국공신들의 훈이 삭탈 또는 삭감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나는 사람도 많아지게 되었다.83)
자연히 조정은 정국공신들이 물러난 자리에 도덕정치를 꿈꾸는 신진 사림들로 꽉 들어차 있었고, 조정 중신들은 정암을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정암 또한 군민(君民)84)을 요순시대로 이끌고 학문과 도덕을 일으키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알고 있었으며, 학포와 기준(奇遵)․박세희(朴世熹)․최산두(崔山斗) 등이 매양 경연에 진강(進講)을 할 때면 늦어지도록 강론을 하니, 예컨대 아침 강의가 오후까지 이르고 낮 강의가 밤에까지 이르니 주상이 피곤함을 느끼기까지 했으나 경연관들이 전혀 깨닫지를 못했다. 또한 임금에게까지 도덕적 행동의 모범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신진 사림들이 중종의 눈에는 곱게 보이지 않았고, 이 때쯤에는 그들이 매우 귀찮은 존재로까지 보였을 뿐만 아니라, 중종의 생각으로는 급진 개혁 신진 사림들에게 몰린 정국공신들이 자신을 연산군처럼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하여 마침내 중종은 신진 사림들을 버리고 공신들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에 예조판서 남곤(南袞)이 대지팡이를 짚고 사복(私服)을 입고 달빛을 이용하여 찾아와서 학포에게 하는 말이
“오늘날 조정의 정치하는 일이 막중하고 큰데 내가 혼자서 맡기가 어려운 실정이요. 조정에 벌려 서있는 사람들을 돌아봐도 협찬해 줄만한 사람이 공(公)보다 나은 사람이 없어서 오늘밤에 부득이 공을 찾아온 것이니 공이 나를 버리지 마시오. 그리고 먼데서 벼슬하러온 사람을 힘껏 끌어 당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높고 좋은 관직을 얻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공은 아시지요?”
하였다.
그러자 학포는 정색을 하며 대답하기를
“공이 만약 정치를 할 생각이 있다면 어째서 조광조를 찾아가 보지 않고 이렇게 여기를 오셨오. 정치에 협찬을 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감당을 하며 또 먼데서 온 사람이 비록 벼슬길에 나섰다고는 하지만 높고 좋은 관직은 본시 분수의 밖인데 하필이면 구차하게 남에게 빌붙어서 구한단 말이요?”
하였다.
남곤이 다시 달콤한 말로 백가지로 달랬지만 학포는 끝까지 듣지를 않자 남곤이 억지로 굽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가버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남방의 사람들이 포용성이 있고 순종을 잘한다던데 이제 양군(梁君)을 보니 전혀 고집만 부려 결코 쓸 수 있는 사람이 못된다.”
고 토로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2) 기묘사화의 발생과 진전(進展)
중종 14년(기묘, 서기 1519) 10월 남곤(南袞)․심정․홍경주 등이 신진 사림에게 논박을 당하여 내쫓겨나 있었고, 이 때쯤 와서는 이들 정국공신 세력은 주상의 마음이 점점 유신(儒臣)85)들에게 싫증이 난 상태에 있는 것을 짐작하고 드디어 박경빈(朴敬嬪)86)의 문안 종과 내통하여 조광조가 나라를 전담(專擔)하여 정치를 하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여 왕으로 세우고자 한다는 내용의 유언비어를 궁중에 유포시키고 홍경주는 그의 딸 홍희빈을 시켜 한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씨(趙氏)에게로 돌아갔다는 내용의 충전(蟲篆)87)으로 주상의 마음을 위구(危懼)88)케 한 다음 언서(諺書)89)를 임금의 밀지(密旨)90)라고 속여 거짓 전지(傳旨)91)를 이용하여 쫓겨난 정국공신 세력에게 말하고 비밀리에 계(啓)를 올릴 것을 약속하고, 11월 15일 밤에 심정․홍경주․김전․김극폭․고형산 등과 더불어 몰래 신무문(神武門)92)으로 들어감으로써 조광조 계열의 입직 승지 윤자임(尹自任)․공서린(孔瑞麟)․주수 안정(安珽)․한림 이부(李阜)․응교 기준(奇遵)․부수찬 심달원 등을 금부에 잡아 가두고 또 금부를 시켜 우참찬 이자(李耔)․형조판서 김정(金淨)․대사헌 조광조․부제학 김구(金絿)․대사성 김식(金湜)․도승지 유인숙(柳仁淑)․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동부승지 박훈(朴薰)을 대궐 뜰로 잡아들이게 하였으며, 주상이 금부당상을 비현각(丕顯閣)으로 불러들이니 정광필․안당․김전․남곤․이장곤․홍숙․성운․채세영․권예․심사순이 입시를 하게 되었다.
주상이 성운(成雲)에게 명하여 전지를 쓰게 하니 조신(朝臣)들이 아뢰기를
“광조 등이 서로 붕당(朋黨)93)을 맺고 권세 있는 요직에 도사리고 앉아 윗사람을 속이고 사(私)를 행하며 거리낌없이 후진들을 유인하고 궤모(詭謀)94)하고 과격한 사회 개혁을 이룩하고 있어 국세가 전도(顚倒)되고 조정(朝政)이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어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말없이 분개해 하고 탄식을 하면서도 그들의 기세를 무서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눈을 흘기고 무거운 발길로 다니고 있으니 사세가 이에 이르러 한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청컨대 유사(有司)95)에게 맡겨 그 죄상을 밝히고 바로 잡으소서.”
라고 하니, 주상이
“죄인에게 법률을 시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속히 죄를 정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그러자 정부 육조와 한성부가 같은 말로 아뢰기를
“이제 밝히신 율령을 보니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서로 붕당을 맺었단 말씀은 저들이 불복을 한 것이요. 또 증거도 없습니다. 이것으로 죄를 준다면 크게 성덕(聖德)에 누가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주상이 말하기를
“조광조와 김정은 사사(賜死)96)하고, 김식․김구는 장류(杖流)97)를 하고, 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은 장(杖)을 쳐 죄를 속(贖)98)하게 하고 고신(告身)99)을 모조리 빼앗고 외방(外方)으로 부처(付處)100)케 하라.”
하였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깜짝 놀라며 엎드려 간하고 승정원과 육조도 면대(面對)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윽고 전교하기를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을 장 일 백을 쳐서 원방(遠方)에 안치(安置)101)토록 하라.”
하였다.
중종 14년(기묘, 서기 1519) 12월에 신임 대사헌 이항(李沆)과 대사간 이빈(李蘋) 등이 안당(安瑭)․최숙생․이자(李耔)․신광한(申光漢) 그리고 학포 등 23인의 이름을 한 줄로 써서 아뢰기를
“이들은 모두가 박세희의 동류입니다. 광조와 더불어 서로 붕당이 되었으니 청컨대 함께 죄를 주소서. 또 그 죄를 다스려놓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큰 일이 날 것입니다.”
하였다.
이틀 뒤 황지(黃紙)에다 안당․김안국 그리고 학포 등 17인의 이름을 붙여서 올리니 이들을 원방에 부처하거나 파직하고 혹은 고신(告身)을 모조리 빼앗았는데 학포도 고신을 빼앗겨 사건이 일어난 지 보름 만에 능성의 구거(舊居)102)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의정 정광필 등 3공(公)이 이들 기묘의 당화(黨禍)를 입은 사림들의 죄를 논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임금의 옷깃을 당기며 울면서 간하였다. 이 때에 우의정 안당 등 참의(參議)103) 이상의 많은 관리를 불러 같이 의논하고 신구(伸救)104)하였다. 영상이 대체로 다섯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 하였다.
마침내 정암(靜菴)을 능성(綾城)으로 김정(金淨)을 금산(錦山)으로 기준(奇遵)은 아산(牙山)으로 김식(金湜)을 선산(善山)으로 김구(金絿)는 개녕(開寧)으로 윤자임(尹自任)을 온양(溫陽)으로 박세희(朴世熹)를 상주(尙州)로 박훈(朴薰)을 성주(星州)로 귀양보내고, 나머지는 장형(杖刑)으로 결정하였다.
흉당(凶黨)105)들이 다시 상계(上啓)하여 학포와 이자를 잡아다가 부처 해야 한다고 아뢰었지만 영상이 강력히 구원(救援)하여 모면하였다.
오래지 않아 신임 대사간 이빈․ 대사헌 이항(李沆)이 합계(合啓)106)하여 조정암 일당에 가율(加律)107)하기를 청하였는데 학포와 안당․김안국․이약빙 등 39인을 병서(竝書)108)하여 아뢰었으며, 또 현량과를 파(罷)하기를 청하였다.
(3) 제현(諸賢) 구출을 위한 노력
중종 14년(기묘, 서기 1519) ‘신무문(神武門)의 변(變)’109) 이틀만인 11월 17일 학포는 상소(上疏)를 올린다. 죄 없이 옥에 갇힌 제현(諸賢)110)을 신구(伸救)하기 위해서이다.
즉 중종 14년 11월 15일 야반(夜半)에 신무문의 변이 일어나자 정암과 제현이 하옥되었을 때 많은 선비들이 정암의 무죄를 주장하였는데, 그 중 유운(柳雲)과 김세필(金世弼)은 신구(伸救)의 계를 올렸고, 이약빙(李若氷), 이사구(李思句), 류운(柳雲), 정응(鄭譍) 그리고 양팽손(梁彭孫) 등 5인은 연명소(聯名疏)를 올렸다. 이름하여 ‘신구제현소(伸救諸賢疏)’이다.
양팽손이 작성하고 5인이 연명한 후 맨 끝에 양팽손이 자기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이 소의 특징은 문장의 전개가 매우 논리적이며 감동적인 점이다.
임금 앞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제현들의 무죄를 주장하는 그의 말은 몹시 절실하였고, 이마를 찧어 피가 흐르는 그의 모습은 의연하기 그지없었다는 것이다.
이 때에 영상 정광필이 눈물을 흘리며 왕의 옷소매를 끌어당겨 성심이 하늘을 감동케 하여 왕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사형이 감형되어 정암은 능성으로 충암은 금산으로 유배를 했다.
다음은 그 신구제현소의 전문(全文)이다.
☞ 伸救諸賢疏 己卯十一月
(여러 현신을 변호하여 구하는 소. 서기 1519년 11월)
伏以人生有體(복이인생유체). 得爲男子(득위남자). 立於天地之間(입어천지지간). 一幸也(일행야).
不淪滯隸圉(불륜체예어). 役走糞土(역주분토). 拔身爲士(발신위사). 二幸也(이행야).
服業文字(복업문자). 粗知義方(조지의방). 不迷所向(불미소향). 三幸也(삼행야).
居不于危亂(거불우위란) 而于治平(이우치평). 沐浴休澤(목욕휴택). 四幸也(사행야).
遭遇 聖明(조우 성명). 登身近列(등신근열). 出入周衛之中(출입주위지중). 五幸也(오행야).
精交意會(정교의회). 脗然相得(문연상득). 瀝竭肺肝(역갈폐간). 蒙人主首肯(몽인주수긍). 六幸也(육행야).
엎드려 아뢰옵니다. 사람이 태어나 몸을 두었음에 남자가 되어 천지의 사이에 서게 된 것이 하나의 다행이요. 종의 신세로 빠져 흙먼지 속에서 일을 하지 않고 몸을 빼쳐 선비가 된 것이 둘째 다행이요. 글공부를 하여 조금이라도 옳은 방향을 알고 갈 바에 서슴치 않게 된 것이 셋째 다행이요. 위태롭고 어지러운 시대에 살지 않고 태평한 시대에 살면서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 넷째 다행이요. 성스럽고 밝은(聖明) 임금을 만나 몸이 근열(近列)에 올라 그 둘레에 출입을 하게 된 것이 다섯째 다행이요. 정신으로 사귀고 뜻이 맞아 완전히 합해져서 폐간을 쏟아 놓아 임금의 수긍을 받게 된 것이 여섯째의 다행입니다.
凡此六幸(범차육행). 固人之所大願欲(고인지소대원욕) 而有其一二者無幾(이유기일이자무기). 况乎兼之者哉(황호겸지자재). 其生也幸(기생야행). 其出也幸(기출야행). 其行也亦幸(기행야역행). 不於是焉(불어시언) 竭忠畢誠(갈충필성). 極議盡知(극의진지). 而遲回隱黙(이지회은묵). 耽寵沽悅(탐총고열). 苟私其身而已(구사기신이이). 孤人主辱知(고인주욕지). 負平生志願(부평생지원). 仁人志士之所不忍爲(인인지사지소불인위). 抑人主之所深病(억인주지소심병). 國家何利焉(국가하리언).
무릇 이 여섯 가지 다행은 실로 사람들이 크게 원하는 바요. 그 중의 한 두 가지를 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은 법인데 하물며 이를 겸한 사람은 그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그 태어남이 다행이요. 그 출세함이 다행이요. 그 행함 또한 다행입니다. 그러한 처지에서 충성을 다하여 아는 바를 모조리 털어놓아, 할 말을 다하지 아니하고 망설이고 입을 다물어 은총이나 탐내고 기쁘게나 해 드리려고 한다면 이는 구차하게 제 몸만 생각하는 것이요. 알아주시는 주상의 뜻을 저버리고 평생의 뜻한 바도 저버린 것이니, 인인(仁人)과 지사(志士)는 차마 그런 짓을 못하는 것이요. 또한 임금도 나쁜 병처럼 싫어하는 바이니, 국가에도 무슨 이로움이 되겠습니까?
昔(석). 比干刳心(비간고심) 子胥賜劒(자서사검). 斯二人者 身遭暴亂(사이인자 신조포란). 忠犯非君(충범비군). 卒就陵夷(졸취능이). 而義士猶且悲之 至今痛惋(이의사유차비지 지금통완). 况夫遭遇 聖理(황부조우 성리). 見知明主 爲依歸矣(견지명주 위의귀의). 一動移之頃(일동이지경). 天威遽震(천위거진). 煩刑吏 極箠毒(번형리 극추독). 將竄囚以困殛之(장찬수이곤극지). 噫(희). 殿下之 高位以寵祿之(전하지 고위이총록지). 崇長以優容之者 果安在哉(숭장이우용지자 과안재재).
옛 날에, 비간(比干)은 심장(心臟)을 갈랐고, 자서(子胥)는 사검(賜劍)이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은 몹시 포악하고 어지러운 임금을 만나, 임금답지 않은 사람에게 충성을 바쳤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자, 의사(義士)들이 오히려 슬퍼하고 지금까지도 원통하게 생각하거든 하물며 성치(聖治)의 때를 만나 밝은 임금에게 알아주심을 받아 믿고 의지를 하다가 한 번 움직이는 찰나에 천위(天威)가 갑자기 진동하여 형리(刑吏)를 시켜 마구 추독(箠毒)을 극도로 하고 장차 귀양보내려고 가두고 하여 곤욕을 주시니, 아아! 전하께서 높은 자리에 앉혀 총애하고 녹을 주고 장자(長者)로 존숭하여 우대해 주시던 뜻이 과연 어디에 있었습니까?
[주] 1. 비간(比干) : 은(殷)의 충신
2. 자서(子胥) : 오(吳)의 오원(伍員)이니 충신
3. 사검(賜劍) : 칼을 주어 스스로 죽게 한 형벌
4. 추독(箠毒) : 매를 때림
燕雀焚而仁鳥增逝(연작분이인조증서). 愚夫戮而智士遠擧(우부육이지사원거). 况忠義之士 結君臣之義(황충의지사 결군신지의). 人主之所嘗親寵眷之(인주지소상친총권지). 親體任之(친체임지). 而又從而親暴戮之(이우종이친포육지). 雖有廓大之才(수유곽대지재). 忠耿之徒(충경지도). 亦安肯盡忠信 而趨闕下(역안긍진충신 이추궐하). 以蹈其危機哉(이도기위기재). 此鮑焦之所以立枯(차포초지소이입고). 屈平之所以沈湘也(굴평지소이침상야).
제비 참새가 불에 타면 인조(仁鳥)는 더욱 가버리는 것이요. 어리석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면 지사(智士)는 멀리 사라지는 것인데, 하물며 충의(忠義)의 선비가 군신의 의리를 맺어 임금이 일찍이 몸소 총애하고 몸소 헤아려 신임했던 사람이거늘, 또 다시 몸소 포악스럽게 도륙을 하신다면 비록 커다란 인재요 충성스런 무리일지라도, 어찌 즐겨 충성을 바쳐 궐하(闕下)에 나아가 위기에 대처하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포초(鮑焦)는 선 채로 말라죽었던 것이요. 굴평(屈平)은 상강(湘江)에 빠졌던 것입니다.
[주] 1. 포초(鮑焦) : 주(周)의 은사(隱士)이니 세상을 비난하고 가난하게 살다가 나무를 안고 죽었음
2. 굴평(屈平) : 평(平)은 자(字). 이름은 원(原). 초(楚)의 문학가로 임금에게 충간(忠諫)이 용납되지 않아 마침내 멱라수(汨羅水) 일명(一名) 상수(湘水)에 투신(投身)하여 죽었음
夫國之有士(부국지유사). 猶人之有元氣(유인지유원기). 氣散而人亡(기산이인망). 士亡而國喪(사망이국상). 建寧之黨禍起 而漢祚非(건영지당화기 이한조비). 元祐之正士銷 而宋室危(원우지정사소 이송실위). 斯固已然之明鑑(사고이연지명감). 而前轍之旣覆者(이전철지기복자). 抑(억) 殿下之所洞照 而驚惕乎平昔者也(전하지소동조 이경척호평석자야).
무릇 나라에 선비가 있다는 것은 마치 사람에게 원기(元氣)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어서 기운이 흩어지면 사람은 죽는 것이요. 선비가 없어지면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건녕(建寧)의 당화(黨禍)」가 일어나니 한(漢)나라가 그릇되었고, 「원우(元祐)의 바른 선비」들이 없어짐으로써 송나라의 왕실이 위태로워졌으니, 이것이 진실로 기왕의 밝은 거울이요. 전철(前轍)의 엎어졌던 사실입니다. 이는 전하께서 훤히 알고 계신 바요, 평일에 깨우치시던 바입니다.
[주] 1. 건영(建寧) : 후한(後漢) 영제(靈帝)의 연호. 서기 168~171)
2. 건영(建寧)의 당화(黨禍) : 「당고(黨錮)의 금(禁)」 : 후한 말기, 유교적 교양을 과시한 관료와 궁중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환관이 충돌하여, 환관 세력이 정치적 반대파인 관료 즉 당인(黨人)을 금고에 처한 탄압 사건. 이로 인해 결국 한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됨. 후한 말, 진번(陳蕃)과 두무(竇武)가 영제(靈帝)를 옹립하여 세력을 잡은 후 환관 세력을 일거에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환관 세력에게 역습을 당하여 진번이 살해되고 두무는 자살하였다. 이로 인해 관료파 당인들에 대한 대탄압이 행해져 100여 명이 체포 살해되고 600~700여명의 관료파 당인들이 금고형에 처해졌다. 금고란, 관리의 신분을 빼앗아 서인(庶人) 이하의 신분으로 내리는 것이다.
3. 원우(元祐) : 송나라 철종(哲宗)의 연호. 서기 1086~1093.
4. 원우(元祐)의 바른 선비 : 어린 철종을 도와 재상이 된 사마광(司馬光)이 전(前) 재상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모두 폐지하고 구법(舊法)으로 대체하여 국정을 운영하자 그를 ‘원우(元祐)의 재상’이라 불렀고, 그러다가 몇 달이 안 되어 사마광이 죽자 그를 따르던 자들은 ‘원우의 당적(黨籍)’에 올라 냉대를 받았으나 북송 말부터 명신으로 추존을 받은 사실을 말함.
臣等 俱與數三臣者(신등 구여수삼신자). 同命於(동명어) 殿下養育之中 已逾年紀(전하양육지중 이유연기). 况今 忝侍經幄(황금 첨시경악). 密邇天聽(밀이천청). 天地神祇 亦所共臨(천지신기 역소공림). 死生榮辱 義不可苟(사생영욕 의불가구). 伏惟 殿下垂察焉(복유 전하수찰언).
신 등이 모두 두셋의 신하들로 더불어 전하의 양육 속에 목숨을 함께 해 온 지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하물며 이제는 경연에 입시하여 천청(天聽)을 심히 가까이 모셨으니 천지 신명이 함께 굽어보시는 처지에 사생 영욕(死生榮辱) 간에 옳은 일을 앞에 두고 구차하게(떳떳하지 못하게) 굴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주] 1. 신(臣) : 여기서는 중종 14년(서기 1519) 11월 15일 밤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하옥된 조광조, 김정(金淨), 윤자임(尹自任), 박세희(朴世熹), 박훈(朴薰), 김구(金絿), 김식(金湜), 기준(奇遵) 등 8인을 가리킴
2. 천청(天聽) : 왕의 이목(耳目)
(4) 정암을 위한 의행(義行)
학포는 중종 14년(기묘, 서기 1519) ‘신무문의 변’이 일어난 지 보름만인 12월 초순, 파직되어 능성의 옛집(월곡)으로 서둘러 돌아오게 된다. 연유는 하루라도 빨리 정암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집에 돌아온 학포는 월곡의 집에서 십리 남짓 되는 거리에 있는 적소(謫所)111)에 부처(付處)되었던 정암과 밤낮으로 상종하게 되었다.
하루는 정암이 말하기를
“우리들의 이 화단(禍端)112)은 실로 시운(時運)과 관련이 있는 것이니 나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하였다.
학포는 정암과 더불어 언제나 곤궁한 처지에서라도 도리어 형통함을 잃지 말자고 서로 다짐을 했다.
정암이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다행히도 여기에서 종유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상 싶으오. 서로 절시(切偲)113)하여 초지(初志)를 이루게 되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요.”
<오양인행득 종유어차 태불우이 상여절시 이수초지 서무대과>
(吾兩人幸得 從遊於此 殆不偶爾 相與切偲 以遂初志 庶無大過)
하자 학포가 말하기를
“이제 인정(人情)이 망가뜨려진 판국에 우리가 귀양을 와서까지도 이렇게 만나서 못 다한 학문을 마치게 되었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인가 합니다.”
<고금인정탁상 오제찬축사예 이천사아단취우자 경구평일미졸지업 차천의역능승인자야>
(顧今人情椓喪 吾儕竄逐四裔 而天使我團聚于玆 竟究平日未卒之業 此天意亦能勝人者耶)
하였다.
정암을 곡하고 염습(殮襲)114)하다.
12월 16일 정암에게 사사(賜死)의 명이 내리고, 20일 드디어 금부도사에 의한 집행이 이루어지자 학포가 정암의 손을 잡고 결별하면서 서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다만
“각자 우리 왕에게 해야할 도리를 할 뿐입니다.”
고 하였다.
정암은 전라도 능주로 부처된 지 한 달이 지난 그 날 5언 절구인 20자의 수명시(受命詩)115)를 읊더니 금부도사(禁府都事)116)가 준비해 온 독약 두 사발을 마시고 유교적 도덕국가 건설의 꿈을 접고 한 많은 38세의 삶을 하직한다.
이날은 바람도 매섭고 눈도 많이 내려 사람들이 그 추위를 견딜 수 없을 정도였으나 학포는 홀로 적려(謫廬)117)의 밖에서 종일토록 옷을 적시고 앉아 있다가 한기가 몸에 든 줄도 몰랐다. 이로 인해 이 날 밤에 병이 나서 누차 기절을 하였는데도 몸소 염하고 빈소를 마련하여, 맏아들인 응기(應箕)로 하여금 설전(設奠)118)하도록 하여 슬피 곡을 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가 쉬었다.
당시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역모의 수괴(首魁)119)로 지목되어 사사된 자의 시신을 거둔다는 것은 당장 그 잔당으로 몰려 가문이 멸문의 화를 당하는 불행을 각오하여야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감히 학포는 그 일을 해 낸 것이다. 그가 아니고서는 그 일을 할 수 없었음을 당시 사람들은 알지 못하다가 후세에 와서야 사람들은 알게 된 것이다.
그 날 밤 학포는 은밀히 자제들과 집에서 부리는 노비들로 하여금 한 자가 넘게 내린 눈 덮인 60리 밤길을 도와 시신을 운구하도록 하여 중조산 속 인적이 드문 골짜기인 증리(甑里)에 시신을 안치하고 노비 세 가구를 상주시켜 돌보게 하였다. 후에 사람들이 이곳을 ‘조대감 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기약 없는 이십 여 년의 은둔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학포는 정암이 명(命)120)을 받은 후, 친구인 김구(金絿)에게 편지를 보내어 애절하고 비통한 마음을 토로하였다. 평소 부제학 김구(金絿)․승지 윤자임(尹自任)․학포는 모두 무신(戊申)생으로 뜻이 같고 우의(友誼)가 두터워 사람들이 ‘삼무신(三戊申)’이라고 불렀다.
서기 1520년 봄에 정암의 체백(體魄)121)을 경기도 용인으로 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우차(牛車)122)로 정암의 체백을 본가로 송친(送櫬)123)하는데 학포는 우분(憂憤)124)한 나머지 병을 얻어 장례에 참여하지를 못했다.
학포가 항상 정암을 이야기하려면 꼭 눈물을 흘리며 정암이 유언처럼 남긴 시 ‘애군여애부 우국약우가(愛君如愛父 憂國若憂家)’의 구절을 되뇌었다.
그 해 여름에 정암의 시신을 거두어다가 안치하였던 곳인 화순군 이양면 쌍봉 중조산 아래 증리에 사우(祠宇 : 죽수사)를 짓고 돌아가신 날이 되면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통곡하였고 문인(門人)125)과 자제를 시켜 춘추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 죽수사(竹樹祠)는 이로부터 50년 후인 서기 1570년 연주산하(聯珠山下) 천일대(天日臺)로 이건(移建)하게 된다.
<부록 6. 죽수서원의 창건과 변천 참조>
125*82 |
정암의 유적지 내에 보존된 적중거가(謫中居家)
(전남 화순군 능주읍 소재지)
정암 조광조가 중종 14년(서기 1519) 기묘사화의 수괴로 지목되고 능성으로 부처되어 귀양살이하던 초가삼간. 여기에서 정암은 파직되어 능성현 월곡의 본가로 돌아온 학포를 만나고 그 해 12월 20일 사사된다.
125*82 |
정암이 부처된 적가(謫家) 전경
(전남 화순군 능주읍)
125*82 |
조정암 유적지 경내의 애우당(愛憂堂)에 걸려 있는 절명시(絶命詩) 현판
(전남 화순군 능주읍 남정리)
적가에서 날마다 만나 학문과 도의를 논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운명의 시간(12월 20일)을 맞게 된다. 믿었던 임금으로부터 사약을 받게 되자 정암은 다음과 같이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고 여기에서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憂國若憂家(우국약우가) : 나라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했도다.
白日臨下土(백일임하토) : 맑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니
昭昭照丹衷(소소조단충) :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
(5) 기묘사화의 결과
이 기묘 옥사(獄事) 이후 김전(金銓)은 영의정, 남곤(南袞)은 좌의정, 박유청(朴惟淸)은 우의정이 되었다. 이 사화에 희생된 조신(朝臣)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한다. 이 사화는 서기 1515년 왕비책립 때 조신간의 대립․알력(軋轢)을 먼 원인으로 하고, 조광조의 지치주의 정치에 의하여 대량 등용된 신진사류에 대한 불만과, 도의론(道義論)을 앞세워 사장파(詞章派)를 소인시(小人視)한 배타적인 태도에 대한 증오 그리고 훈구파에 대한 삭훈사건(削勳事件)을 가까운 원인으로 하여 폭발된 것이다. 이 사화는 무오사화(戊午士禍)126)와 같이 훈구파와 신진사류 간의 반목과 배격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정치적 음모가 유효하였던 정쟁이었다는 점과 갑자사화(甲子士禍)127)와 같이 정치적 투쟁목적과 이념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조광조의 왕도정치 실패의 원인을 정치이념의 진보성과 실현수단의 과격성에서 찾고 있으나 당시의 정치체제가 왕도정치의 실현을 뒷받침해줄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조광조의 왕도정치의 이상이 무산된 뒤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앞의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아. 은둔지(隱遁地)
(1) 증리의 서원동(書院洞)
중종 14년(서기 1519) 12월 32세의 학포가 한양의 관직 생활을 접고 능주(綾州)의 옛집으로 돌아와서 쌍봉의 학포당(學圃堂)을 완성할 때까지 2년 동안 월곡과 쌍봉을 오가며 죽수사(竹樹祠)와 학포당(學圃堂)을 짓는 일을 돌아보았을 것으로 본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능주의 적소(謫所)에서 정암을 만나 도의의 교분을 쌓고 경의(經義)를 토론하는 등으로 그를 위로하다가 마침내 사사되자 그의 주검을 거두어 증리로 가서 안치하기까지 20일 동안은 월곡 본가(本家)에서 거처하고, 서기 1519년 12월 20일 이후부터 서기 1545년 8월 18일 학포당(學圃堂)에서 고종(考終)128)하기까지 월곡의 본가는 장남 응기(應箕)를 비롯한 금산 김씨(錦山金氏) 부인이 또 금산 김씨 부인이 돌아가신 후에는 새로 맞이한 청주 한씨(淸州韓氏) 부인이 가정(家庭)을 돌보고, 학포는 쌍봉의 학포당(學圃堂)이 지어지기 이전(以前) 2년 동안은 쌍봉이나 증리(甑里) 서원동(書院洞)에서 은둔(隱遁)해 살았을 것이다.’
하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2) 쌍봉의 학포당
중종 15년(서기 1520년) 정암의 시신을 안치하였던 자리 즉 증리의 서원동에 죽수사를 세워 춘추로 정암을 향사(享祀)129)하던 학포는, 태어나서 14세에 월곡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았던 쌍봉 마을의 시냇가에 앞으로 얼마를 기약할 지도 모르는 자기의 은둔생활의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중종 16년(서기 1521년, 당 34세) 쌍봉 마을 동쪽 시냇가에 작은 초당(草堂)이 세워졌는데 학포는 이 초당에 「학포당(學圃堂)」130)이라는 액호(額號)를 붙인다.
이 학포당은 속세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오직 도학(道學)의 정진과 서화(書畫)에 묻혀 사는 자기 인생 후반 25년 동안의 활동 거점(據點)이었던 것이다. 그 동안 학포는 여기에 은둔하면서 4년 동안의 관직생활 동안 국사(國事)에 전념하느라 다하지 못 하였던 도학(道學)의 실천(實踐)에 전념하였고, 제한된 문우와 교유(交遊)131)하거나 묵향을 벗삼으며 불후의 명작인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所藏) 산수도와 일본 동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132)와 익명(匿名)의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호렵도(胡獵圖)133), 그 외 여러 소장가(所藏家)들에 흩어져 있는 조선 초기의 서화 작품들을 남겼으며, 이곳은 도학 실천의 학습당(學習堂)이요, 문인화(文人畫)의 대가이자 남화(南畫)의 조종(祖宗)으로서 불후의 명작들을 잉태하였던 서화의 산실(産室)이 된다.
당시 기묘 제현들은 철저한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도덕국가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었지만 그 이상을 실현하지도 못하고 훈구 세력에 몰려 죽거나 귀양을 갔고 혹은 낙향하여 산림에 묻혀 지내고 있었고, 훈구 세력들의 감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활동이나 한양에서의 모임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자연히 조정에서 쫓겨 난 기묘 제현들은 아직 귀양에서 풀려나지 못한 벗들을 위로하거나 산림에 묻혀 서로 교유하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시문을 주고받거나 못 이룬 꿈의 실현을 후진을 통해 이루어보고자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조정에서 물러난 기묘 명현들이 다 비슷한 삶을 살았지만 학포의 삶이 다른 기묘 명현들과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대개의 기묘 명현들이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학포는 인근 고을에서 도학 명절(道學名節)인 그를 사사(師事)하고자 몰려오는 문하생들을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너무 조심성이 많은 학포로서는 자기로 인해 그들이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오로지 자제들과 마을 사람만을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 하나는 서화를 즐겨하였다는 점이다. 선비가 시문에 전념하는 것은 예사였지만 그림에 심취하기는 쉽지 않은 시대였는데 그에게는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고 숨어 있던 재능이 발휘될 수 있는 기회가 운명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 기회가 학포당 은둔 시기에 만개하여 조선 초기의 남화의 기틀을 형성하게 하였고, 또한 학포당은 그를 조선 초기의 선비화가로서 우뚝 서게 만든 위대한 보금자리가 되었던 것이다.
정리하면 쌍봉의 학포당은 겉으로 화려하게 나타남이 없이 내연(內燃)된 그의 인생 후반기 25년 간의 치열(熾烈)한 삶을 떠받쳐주고 감싸 안아주는 안식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곳은 자기 수련의 터전이었고, 문하생들의 교육장이었고, 시문과 서화의 산실이었고, 문우들과의 교유의 기지(基地)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학포는 여기에서 자적(自適)134) 하다가 서기 1545년(인종 원년) 중종과 인종이 해를 걸러 승하하자, 정신적 지주가 무너지는 슬픔과 조정에 득실거리는 간신배에 대한 걱정에 식음을 폐하고 애통해 하다가 병을 얻어 그 해 8월 17일 문하생 몇의 문안을 받고, 이튿날인 서기 1545년 8월 18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새 옷을 갈아입더니 얼마 안 되어 베개에 의지하여 고종(考終)하니 고이 잠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122*146 |
쌍봉 마을 동쪽 끝에 있는 학포당 전경
기묘사화로 낙향 은둔한 학포가 모든 것을 잊고 학문과 예술에 파묻혀 살고자 서기 1521년(당 34세) 이 곳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 마을 동쪽 산자락 끝에 서재 겸 거실인 작은 초당을 짓고 액호를 ‘학포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마당 서쪽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학포당 창건 후 둘째 아들인 응태(應台)가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제 이 은행나무의 높이는 35 m이고 둘레 8 m 수령(樹齡) 480여 년으로 군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그 위용은 학포의 기상인 듯 우뚝하고 튼튼한 여덟 줄기는 학포의 여덟 아들을 상징하고 무성한 가지는 자손의 번창을 나타내는 듯 보인다.
150*100 |
학포당 건물
학포당의 옛 건물은 오랜 동안 훼실(毁失)135) 되었다가 1922 년 학포의 14대손 회락(會洛)이 주동이 되어 원형대로 복원 중건하였고, 반세기가 지나자 관리가 부실하여 비가 새고 낡아 보기에 딱한 상태가 되자 학포의 16대손 오류리의 동옥(東鈺)이 자비로 일부 보수하였던 것을, 서기 1986년 2월에는 자손들이 뜻과 자금을 모아 현재의 학포당을 중수(重修)136)하였다.
지금 걸려 있는 학포당 현액(懸額)은 인근의 보성 사람 김치주(金致柱)의 글씨이고, 1977년 학포의 13대손 재열(在烈)이 백일홍 9주를 경내에 심고 기둥에 주련(柱聯)을 걸었는데, 이 주련은 학포가 7세 때 지은 ‘천지일월(天地日月)’의 제목에 따라 지은 시와 전라감사가 지어주었다는 답시(答詩)를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이 썼던 글씨에서 집자(集字)해서 새겨 놓은 것이다.
79*118 |
학포당 유지 추모비(學圃堂 遺址 追慕碑)
이 추모비는 학포당이 훼실되어 버리자 유지(遺址)137)를 잊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고종 39년(서기 1902년) 학포의 13 대손 쌍봉사람 재경(在慶)이 만들어 옛터에 세웠다.
서기 1922년 학포당을 중건한 후에는 이 비를 당의 뒷담 밑으로 옮겨 놓았다. 이 비의 후면에는 ‘후학 최익현술문 십삼대손 재경립 숭정후 오 기유 삼월 안격서(後學 崔益鉉述文 十三代孫 在慶立 崇禎后 五 己酉 三月 安格書)’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익현 술문(崔益鉉述文) : 최익현이 글을 짓다.
․재경 립(在慶立) : 재경이 세우다.
․숭정후(崇禎后) : 중국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안격 서(安格書) : 안격이 글씨를 쓰다.
125*89 |
기념물 지정 표지판(학포당 안내판)
학포당의 위치는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411번지이고, 서기 1986년 2월에 자손들이 자금을 모아 중수하자 그 해 전라남도는 문화재 즉 기념물 제 92 호로 지정하였다.
또, 1995년 4월에는 군의 비용 보조로 외삼문을 짓고 경내를 확장하고 담을 쌓아 경관을 좋게 정리하자 화순군에서 문화재 지정 표지판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