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자량론 제1권
[불보리의 자량]
이제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합장하여 머리 숙여 공경하오니
나는 마땅히 가르침대로
불보리(佛菩提)의 자량(資粮)을 말할 것이다.
‘부처님[佛]’이란 일체의 알아야 할 것 중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뜻이니,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알기 때문이며, 또한 지혜가 없는 잠(睡眠) 속에서 깨닫기 때문이다.
‘깨달음[覺]’이란 깨어나는[覺寤] 것을 그 의미로 삼으니 지혜 없는 잠을 여의기 때문이다.
또 모든 석범(釋梵)들은 이 깨달음을 깨닫지 못했다. 오직 그 명성(名聲)이 삼계(三界)에 널리 퍼졌다 함은 능히 깨달은 바이기 때문이니,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라야 이 깨달음을 깨닫는다.
일체종편지(一切種遍智)는 오직 부처님만이 알 뿐 모든 성문(聲聞)ㆍ독각(獨覺)ㆍ보살이 아는 바가 아니니 함께할 수 없는 법[不共法]을 구족하기 때문이다.
‘모든[諸]’이란 빠짐이 없는 것으로 과거ㆍ미래ㆍ현재 등을 말한다.
‘머리 숙이다[頂]’라는 것은 윗부분[上分]이다.
‘합장(合掌)’이라함은 손을 모으는 것이다.
‘공경[敬]’이라 함은 향하여 예배하는 것이다.
‘나는 말할 것이다[我說]’는 스스로 분별하는 것이다.
‘가르침대로[如敎]’라 함은 저 각각의 경전에서 갖가지로 이미 말한 것이니, 지금도 또한 그 가르침대로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佛]’이란 지혜가 없음을 여읜 것이며,
‘보리(菩提)’란 일체지지(一切智智)이다.
‘자량(資粮)’이란 능히 보리를 충만시키는 법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세간의 병이 가득 참[甁盈]과 가마솥이 가득 참[釜盈] 등과 같으니, 가득 참은 충만하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보리를 충만시키는 법으로써 보리의 자량으로 삼는다.
또 가지는 것[持]으로써 그 의미를 삼는다.
비유하면 세간에서 함께 운행되는 해[日]는 열기를 포섭하고 달[月]은 냉기를 포섭하는 것과 같다. 포섭한다는 것은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보리를 갖는 법으로 보리의 자량을 삼는다.
자량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가진다는 의미이다.
또 장양(長養)으로 그 의미를 삼는다.
비유하면 세간에서 능히 천(千)이나 백(百), 십(十)을 충만케 하기도 하고, 혹은 오직 스스로만 충만케 하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충만케 하기 어렵기도 한 것과 같다.
보리의 자량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보리를 장양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삼는다.
또 원인[因]으로 의미를 삼으니, 마치 집[舍]ㆍ성(城)ㆍ수레[車] 등의 원인 중에서 집의 자량ㆍ성의 자량ㆍ수레의 자량을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인연법 속에서 보리를 낳는 것을 보리의 자량이라고 이름한다.
또 여러 부분[衆分]을 구족하는 것으로 의미를 삼는다.
비유하면 제사(祭祀)의 부분 중에서 구기[杓]ㆍ불[火] 등을 구족하는 것을 제사라고 이름하지 구족하지 않은 것은 제사가 아닌 것과 같으며,
또한 신체의 부분인 머리ㆍ손ㆍ발 등을 구족하는 것을 신체라고 이름하지 구족하지 않은 것은 신체가 아닌 것과 같으며,
보시의 부분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보시하는 자[施者]ㆍ보시하는 물건[施物]ㆍ받는 자[受者]ㆍ회향(廻向) 등을 구족하는 것을 보시의 자량이라고 이름하지 구족하지 않은 것은 보시가 아니다.
계(戒) 등의 자량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여러 부분을 구족하는 의미가 자량의 의미이다.
이와 같이 나는 보리의 자량을 말하였다.
이 능히 충만시키는 것ㆍ가지는 것ㆍ장양하는 것ㆍ보리의 원인인 것ㆍ보리의 부분을 구족하는 것이 모두 그 의미이다.
어떤 능력으로 보리의 모든 자량을
빠짐없이 설명할 수 있는지라
유독 모든 부처님만이
따로 가없는 깨달음[無邊覺]을 얻는다.
‘어떤 능력으로[何能]’란 어떤 힘이다. 성문이나 보살은 적은 부분의 각지(覺知)라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보리의 자량을 빠짐없고 남김없이 말하고 싶다면 오직 모든 부처님뿐이다.
‘따로 가없는 깨달음을 얻는다[別得無邊覺]’에서, ‘가없는 깨달음’이란 소위 적은 분량의 깨달음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ㆍ세존은 가없는 응지(應知)의 의미 중에서 각지(覺知)가 걸림이 없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을 가없는 각자(覺者)라고 이름한다.
또 욕락(欲樂) 및 자기의 피로와 괴로움, 단절[斷]과 항상함[常], 있음[有]과 없음[無] 등의 변견(邊見) 속에서 깨달아 집착하지 않고 깨달은 바가 가없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을 가없는 각자라고 이름한다.
【문】
어찌하여 자량은 오직 부처님만이 설할 수 있고 그 밖의 사람은 설할 수 없는가?
【답】
불체(佛體)의 가없는 덕(德)은
깨달음의 자량을 근본으로 삼으니,
이 때문에 깨달음의 자량도
또한 한계가 있지 않다.
‘불체(佛體)’란 곧 부처님의 신체[佛身]이다. 그 불체에 가없는 공덕을 구족하였으므로 ‘불체의 가없는 덕’이라고 말한다.
‘공덕(功德)’이란 이른바 칭찬할 만하다는 뜻이니, 칭찬할 만한 것을 곧 공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 자주자주[數數]라고 한 뜻은 비유하자면 경서(經書)를 자주자주 염송하고 익히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공덕을 짓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또 뇌고(牢固: 견고함)의 의미이니, 비유하면 노끈을 만드는데 둘을 합하여 공(功)으로 삼기도 하고 셋을 합하여 공으로 삼기도 하는 것과 같다.
또 증장(增長)의 의미이니, 비유하면 식리(息利: 이자, 이익, 배당금)에 대하여 둘을 증가시키는 것을 공으로 삼기도 하고 셋을 증가시키는 것을 공으로 삼기도 하는 것과 같다.
또 의지(依止)의 의미이니, 비유하면 모든 사물이 각각 의지로 공을 삼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불체는 계(戒)ㆍ정(定) 등 가없는 차별의 공덕을 의지하기 때문에 ‘불체에는 가없는 공덕이 있다’라고 말한다.
‘깨달음의 자량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저 보리의 자량이 불체(佛體)의 가없는 공덕과 더불어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근본[根]’이란 건립(建立)의 의미이다. 보리란 지혜이며 근본은 곧 자량이다. 저 자량이 일체지지(一切智智)를 능히 건립하므로 자량을 불체의 근본으로 삼는다. 진실로 불체에 가없는 공덕이 있음을 말미암아서 모름지기 가없는 공덕으로서 불체를 이루는 것이니, 이 때문에 자량 또한 무한한 것이다.
비록 적은 분량이라 해도
응당 부처님과 보살에게 경례해야 한다고 설하나니,
이 모든 보살들은
부처님 다음으로 마땅히 공양해야 한다.
저 모든 자량은 한계가 없지만 지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저 자량은 능히 빠짐이 없지 않다고 설하니, 이 때문에
‘비록 적은 분량이라 해도 응당 부처님과 보살에게 경례해야 한다고 설하나니’라고 하는 것이다.
[보살]
【문】
부처님께 예배해야 하는 것은 일체의 중생 중에서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떠한 의미에서 이 가운데 또한 보살을 예배해야 하는가?
【답】
이 모든 보살들은 부처님 다음으로 마땅히 공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발심(初發心) 보살부터 깨달음의 도량[覺場]에 이른 보살까지 모든 보살들을 마땅히 공양해야 한다. 보살에는 일곱 종류가 있다.
첫째는 초발심한 보살이며,
둘째는 바르게 수행하는 보살이며,
셋째는 무생인(無生忍)을 획득한 보살이며,
넷째는 관정(灌頂)한 보살이며,
다섯째는 일생소계(一生所繫) 보살이며,
여섯째는 최후 생애의 보살이며,
일곱째는 깨달음의 도량에 나아가는 보살이다.
이들 보살을 모든 부처님 다음으로 마땅히 공양해야 한다. 몸[身]ㆍ입[口]ㆍ뜻[意] 및 외적인 물건 등으로 그들을 공양해야 한다.
초발심이란 아직 지(地)를 얻지 못한 것이고,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란 7지(七地)까지이고,
무생인을 얻는다는 것은 제8지(第八地)에 머무는 것이며,
관정이란 제10지(第十地)에 머무는 것이다.
일생소계란 바야흐로 도솔타(兜率陀)에 들어가는 것이며,
최후의 생애란 도솔타 처소에 머무는 것이다.
깨달음의 도량에 나아가는 것이란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수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곱 종류의 보살 중에서 초발심 보살에게도 일체 중생은 모두 예경해야 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이들이랴. 왜냐하면 깊은 마음이 너그럽고 크기 때문이며 여래의 교량(敎量)이기 때문이다.
초발심하는 보살은 보리심을 발할 때 시방의 부분에서 감소하는 바가 없고,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서 감소하는 바가 없고, 모든 중생에게서 감소하는 바가 없어서 보편적이고 원만한 자비로써 보리심을 발한다.
아직 제도되지 않은 중생은 내가 마땅히 그를 제도해야 하며,
아직 해탈하지 못한 자는 내가 마땅히 해탈시켜야 하며,
아직 소식(蘇息: 蘇生)하지 않은 자는 내가 마땅히 소식시켜야 하며,
아직 적멸(寂滅)되지 않은 자는 내가 마땅히 적멸시켜야 하며,
성문에 상응하는 자는 내가 마땅히 성문승(聲聞乘) 중에 들어가게 해야 하며,
독각에 상응하는 자는 내가 마땅히 독각승(獨覺乘) 중에 들어가게 해야 하며,
대승에 상응하는 자는 내가 마땅히 대승(大乘) 중에 들어가게 해야 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전부 적멸을 얻게 하고자 할 뿐이지 적은 부분의 중생을 적멸시키고자 하지 않으니,
이 깊은 마음이 너그럽고 크므로 일체의 중생은 모두 마땅히 예경해야 한다.
[여래의 교량(敎量)]
어떠한 것이 여래의 교량(敎量)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가섭(迦葉)이여, 비유하면 신월(新月)엔 문득 예배를 해야 하지만 만월(滿月)에는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가섭이여, 나를 믿는 자는 반드시 모든 보살들에게 예배하여 공경하여야 하지 여래에게만 예배하고 공경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보살로부터 여래가 나오기 때문이다.’
또 성문승 중에서도 또한 말한다.
그 법을 아는 자라면
늙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응당 공양하고 공경하기를
범지(梵志)¹가 불[火]을 섬기듯이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들을 마땅히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해야 한다.
게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부처님의 종자를 이어서 지닌 자는
적은 부분의 행이 수승하니
그러므로 모든 보살을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자애는 허공과 동등하여
널리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니,
그러므로 최승자(最勝子)를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모든 중생의 부류에 대하여
마치 자식 대하듯 크게 자비롭게 하니,
그러므로 이 불자(佛子)를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둘이 없음이 허공과 비슷하니,
그러므로 두려움이 없는 자를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일체의 시기에 아버지처럼
모든 중생을 증장시키니,
그러므로 모든 보살을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마치 땅ㆍ물ㆍ불처럼
중생을 항상 수용하니,
그러므로 즐거움을 베푸는 자[施樂者]를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오직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즐거움의 요인을 버리니,
그러므로 저 일체를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
부처님과 부처님의 후예가
모두 초심(初心)으로부터 나오나니,
그러므로 모든 보살을
부처님 다음 차례로 공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