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 |
호수 |
인구수 | ||
남자 |
여자 |
계 | ||
일본인 |
551(65.8%) |
1,252명 |
801명 |
2,053명(59,2%) |
한국인 |
278(33.2%) |
787명 |
588명 |
1,375명(39.6%) |
외국인 |
8(1%) |
39명 |
1명 |
40명(1.2%) |
계 |
837(100%) |
2,078명 |
1,390명 |
3,468명(100%) |
1915년 이후 익산은 대표적인 ‘일본인 도시’ 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황무지 같은 전북 일대 땅을 헐값에 사들였고 수리 시설을 하고 농지로 개발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일본인들의 농장은 일제의 농지 수탈의 상징이었다. 1914년 당시 익산에 근거를 두었던 일본인 경영의 농장으로 ‘1백 정보 이상’ 을 소유하였던 대농장은 위의 표의 내용과 같다.
당시 전북 전체에 일본인 농장이 40여 개 있었다. 그중 반이 익산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익산이 일본인 농장 관리의 중심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농 장 |
소 재 지 |
설 립 연 대 |
大橋農場 白南信農場支部 森谷農場 倉田農場 細川農場 今村農場 岡崎商會農場 扇米助 東洋拓植會社 收納所 眞田農場 櫻井農場 不二興業會社 農場 片桐農場 光岡農場 長谷川農場 島谷農場 川崎農場 楠田農場 森島莊次郞 靜川昇 |
익산군 익산면 이리 익산군 익산면 이리 옥구군 서혜면 신기리 익사군 익산면 동산리 익산군 익산면 대장촌 익산군 익산면 대장촌 익산군 익산면 목천포 익산군 익산면 이리 익산군 익산면 이리 익산군 오산면 학곤리 익산군 오산면 광지리 익산군 오산면 오산리 익산군 북일면 보산리 익산군 함열면 와리 익산군 춘포면 사천리 옥구군 개정면 하장리 옥구군 서혜면 사리 옥구군 남이면 삼길리 익산군 익산면 이리 익산군 익산면 목천포 |
1907년 9월 1911년 11월 1906년 6월 1911년 1904년 9월 1906년 3월 1900년 4월 1909년 1904년 2월 1903년 9월 1913년 9월 1904년 6월 1907년 4월 1910년 9월 1908년 11월 1910년 1월 1905년 4월 1904년 3월 1908년 1911년 |
그 중에도 익산 구시장 언덕에 위치했던 대교농장은 익산지역 일본인 농장의 대표적인 존재였다. 대교농장은 일본 깃부현에서 대교은행(大橋銀行)을 경영하고 있던 기업가 오오하시(大橋興市)가 설립한 것이다. 오오하시(大橋興市)가 익산에 농장을 건설하던 1907년 가을은 전북 지역 일대에서 항일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때였다. 오오하시의 대리인으로 익산에 와서 농장 개척의 실무를 맡았던 에다요시(枝吉元信)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익산지역 땅을 계속 사들였다. 그리하여 ‘전북 굴지’ 의 대농장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는 여관업자 다나까 등과 함께 ‘자경단’(自警團) 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자체 경비에 나섰으며 총독부와 교섭하여 일본군 수비대 및 헌병대가 익산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대교농장 사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히야오(百尾覺太郞)는 자경단의 단장이었다. 이처럼 대교농장을 비롯한 일본인 농장들은 무장한 ‘준경찰’ 경비조직을 운영하였다.
한말 침략의 야욕을 품은 일본인들은 전북평야가 곡물 생산의 중심지요, 교통의 요지인 점을 감안하여 군산항을 거쳐서 익산지역으로 몰려왔다. 특히 만경강 유역 평야기재에 눈독을 들였다. 그리하여 황무지를 개척하려고 몰려들었던 것이다.
1911년 2월 15일은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리 번영회 조합이라는 일본이 주도하는 의사 결정기구를 만들게 되는 데 대교농장의 대표 지길원신과 선미조, 전중부차랑 등이 발기하고 고천천대길, 삼조무웅, 전중수 등의 협조를 구하여 거민자 34인의 찬성을 얻어 발족을 하게 된다.
이들은 15개조의 규약을 만들었다. 조합장에는 일본인 지길원신, 부조합장에는 전중수, 간사에는 비미조, 평의원에 전중부차랑, 고천천대길, 삼호제차 등을 뽑고 매월 조합비를 거출하여 제반 사무에 충당하였다.
시가의 계획, 도로개간, 위생교육, 경찰기관 등 기타 관공서의 이전 운동에 공헌하게 되었지만 이러한 발전이 사실은 침략을 위한 야심 있는 전략이라는 점에서 결국 일인의 영구정착을 위한 기초작업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1911년에 3,776명에 불과한 솜리의 인구가 호남선 철도공사가 끝난 12년 후인 1925년에는 13, 403명으로 4배 이상으로 급상승한다. 일본인 증가표를 보면, 1910년 한일 합방이 이루어졌던 해는 5가구 16인이 되던 이리 일본인 거주 인구가 1911년 철도 공사가 착공되자 66가구에 224명이었다.
1912년 이리 군산간에 철도가 개통되자 270가구에 946명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1년만에 무려 204가구 722명의 일본인이 증가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이리 군산간의 철도를 개설한 목적인 이 지역의 사회 경제적인 침탈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그 이후 기하 급수적으로 일본인은 상권을 가지고 이리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3) 종교적 상황
(1) 선교사들의 역할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택했던 선교사들은 성경학교와 사경회를 통해서 독립의식을 물론 민족의식과 자립 신앙정신을 고취시켰다. 선교사들은 선교활동 초기부터 한국 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교인들의 신앙형태는 물론 교역자의 지적인 수준, 교회의 조직에 대해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북지역에서 초기 선교사들은 기층민중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복음은 대중 속에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은 기층 민중 속에서 많이 나타나는 데 이들은 일제치하에서 철처하게 항거하며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 지역에서도 나타난다. 선교사들은 불신앙적 타협에도 불응하였을 뿐만 아니고 끝까지 선한 싸움과 달려갈 길을 달려갔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영향을 가장 많은 받았던 지역중에 하나가 바로 남차문지역이고 남전교회이다. 왜냐하면 전위렴(W. M. Junkin)선교사 하위렴(W. B. Harrison) 선교사 부위렴(W. F. Bull) 선교사등은 남전교회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가졌고 선교사들의 부인들도 역시 남전교회의 조력회 현 여신도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에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개신 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와 미국 감리교회였다. 그 중에서 북장로교회는 중국에 있던 알렌(H. N. Allen)을 의료선교사로 임명하여 1884년에 입국하도록 했다. 미국 북장로교회의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감리교회의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부부는 1885년에 입국하였다. 이것의 직접적인 원인은 고종이 “한국 내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실시해도 좋다” 는 윤허를 내줬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선교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 교육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우리 나라에만 들어온 것이 아니고 중국과 일본에도 들어갔다. 그러나 그 선교의 결과는 미비했다. 중국인들에게는 낯선 서양 종교로서의 인상을 주는데 그쳤다. 일본에서는 지식인층에 파고들었지만 민중 속에 스미어 들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달랐다. 한국인들은 능동적으로 복음을 수용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절실한 필요에 의해 의료와 교육을 병행한 선교를 해할 수 있었다. 1884년 멕클레이(R. S. MacLay)에게 허락한 고종의 선교 윤허는 학교와 병원사업에 국한된 것이었다. 한국 개신교 초기선교는 직접적인 복음선교 보다는 간접적인 방식을 취했다.
네비우스의 선교정책에 보면 자립선교와 자립정치와 자립보급이다. 자립선교는 모든 한국인 신자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성서의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충분한 기초가 되어진 신자로 육성해야 하길 원했던 것이다. 또한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선택한 봉급을 받지 않는 지도자 아래에서 전도와 교회 경영을 한다. 원주민들의 자립적인 지위를 세워감으로써 선교활동을 극대화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립정치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후일에 신사참배를 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도 낳았다.
자립보급이다. 모든 교회 건물은 그 교회의 교인들만에 의해서 장만되고 교회가 조직되자마자 전도인의 봉급을 지급하기 시작한다.
자립선교와 자립정치 자리보급의 원칙은 열심히 선교 활동하게 하여 선교초기에 한국에 수많은 교회를 낳게 하였다. 그 중 최초에 설립된 대표적인 교회가 송지동교회와 남전교회이다.
1884년 한국인에 의해 세워진 자생교회들이 아직 그 전도 영역을 넓게 펼치지 못한 때, 문호개방과 함께 들어온 선교사들의 노력과 활동은 한국교회의 성장에 커다란 지도력을 제공하였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이들 선교사들의 뜨거운 소명의식과 열정적인 전도여행으로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교육활동과 사회사업 등을 통해 한국사회에 남아 있던 봉건적 폐습들을 타파하였고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을 소개하여 한국사회와 문화의 수준을 높이는 데 많은 일들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역사에 남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한국신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한국적 특유의 신학적 사고의 근본 유형을 결정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아직 주체적인 신학작업을 할 수 없었던 초대교회는 선교사들을 통해 신학을 형성하여 갔다. 그것을 종합해 볼 때 아래와 같이 세 가지의 신학적 흐름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첫째는, 영적 부흥주의 신학이다. 그리고 둘째는, 역사적 캘빈주의인 보수주의 신학이다. 셋째는, 역사 참여적 진보주의 신학이다.
위에서 밝힌 이러한 신학적 흐름 가운데 특히 선교사 시대의 중심주류를 이루었던 것은 영적 부흥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이었다. 그것은 물론 당시 한국민족이 처해있던 역사적 상황과 전통적인 종교 관습의 영향에서 비롯된 면도 있을 수 있지만 더욱 큰 요인은 선교사들의 개인의 신앙전기와 신학수업 배경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활약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19세기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부흥운동의 영향에서 선교의 소명을 받은 이들이었다. 선교사들의 부흥주의와 보수주의 신학은 하나의 논리와 체계로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이 놓여 있던 암울한 식민지 상황과 매개되어 한국민족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높은 개인 윤리 규범과 의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군산, 익산, 전주지역에서의 선교사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동학혁명이후 조선인들은 참으로 암울한 현실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시 선교사들의 글을 참고해 보아도 이와 같은 현실을 찾아볼 수 있다. 선교사들의 조선인들에 대한 평가는 미개한 민족 그 자체였다.
때로는 이러한 이유로 선교사들은 한국현실과 신학적 역사성을 고려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서구의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역사의 맥락에서 발생한 근본주의와 정통주의 신학을 교회에 강요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출교를 당하거나 교회 안에서 치리를 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남전교회 초기 당회록을 볼 때 당회원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치리를 당했다는 것은 지금 교회가 당회원을 중심으로 교회 안에서 막강한 지휘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지금 교회가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선교사들은 근본주의적인 신앙관이 확고한 가운데 손수 한 알의 밀알로 썩어져 가는 세상에 신앙의 씨를 뿌렸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실시하여 이 민족 가운데 자주적인 신앙관을 확립하고자 큰 노력을 기울였고 그와 같은 예를 당시의 남전교회의 모습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남전교회에서 맨처음 시무한 전위렴(W. M. Junkin) 선교사는 1904년부터 전주에 가서 선교활동을 펼치게 된다. 그리하여 하위렴(W. B. Harrison) 선교사가 1904년부터 남전교회에서 시무하게 된다. 이 때 박연세가 부친인 박자형과 1906년 봄에 세례를 받았고, 같은 시기에 김인전도 신석에서 살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어떠한 이유로 신석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모르나 교회록에 보면 김인전의 일가(一家) 중 김인전의 중부(仲父)였던 김유배가 1906년 가을에 하위렴(W. B. Harrison)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박연세와 김인전은 당시 신앙의 요람이었던 남차문 교회에서 하위렴 선교사을 통해 민족정신이 함양되었고 조국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새로운 광명의 빛을 조명하고자 기도하였던 것이다.
본 교회 당회록에 보면 하위렴(W. B. Harrison) 선교사는 1907년 10월 5일 온 교우를 모아놓고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리하여 장로 1일과 서리집사 2인을 선출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역할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남전교회의 최초 조직교회의 면모를 갖추는 일이었다. 이것은 자주적 신앙관에 따른 신앙과 자주적 민족관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하위렴(W. B. Harrison) 선교사는 1908년에 본 국에 입국하고 선교사 어아력(A. M. Eazle)씨가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그 후 어아력(A. M. Eazle) 선교사가 1910년에 귀국하였고 부위렴(W. F. Bull) 선교사가 담임교역자가 된다. 부위렴 선교사는 군산 익산에서의 삼일만세운동을 일으키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고 후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등 민족신앙운동을 일깨운 위대한 신앙의 중추 세력이 된다.
부위렴(W. F. Bull) 선교사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미나미는 1936년 8월 조선 총독을 부임한 후 신사참배, 궁성요배, 일본기 게양, 일본어 보급등을 강조하였다. 그는 육군대장 출신으로 군부 파쇼를 이끌어와 이러한 일을 자행하였다. 황국신민서사를 1937년 10월 2일 제정, 공포하였다. 이와 같은 방침에 따라 교회와 노회는 엄중한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미나미(南次良)는 기독교회 특히 장로교회에 대하여 강압적으로 신사참배를 실시하였는데 지역적으로 교세가 막강한 평북노회를 집중 공략하였다. 그 결과 1938년 2월 9일 전국 노회중 평북노회가 가장 먼저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 의식임을 인정한다’ 는 결의를 하게 되었고 노회원들도 신사에 참배하였다. 그리하여 9월에 총회 이전에 이미 23개노회중 17개의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전북노회의 정기노회는 원래 5월 7일에 모이는 것이 규칙인데 경찰의 지시로 그 개최일을 한 달이나 연기하여 6월 7일에 개회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 공작하여 개 교회별로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하였다. 이때 원평교회, 신태인교회, 화호리교회등이 앞서 결의하였다. 또한 전주 시내 다섯 교회가 한꺼번에 전주부 도 제직회로 모여 연합적으로 노회 전에 신사참배 하였다.
일본경찰의 지시대로 6월 7일 정기노회 하루전에 노회의 부의되는 제반 안건을 사전에 조정하기 위한 임원회와 헌의부 연석회의를 전라북도청 경찰부에서 모였고 회의 안건과 임원 개선에 대해 경찰부장의 검열과 사전 승인을 받았다.
다음날 회의 처리시 각본대로 노회는 변론을 생략한 채 그대로 결의코자 하였다. 이에 마로덕(L. O. McCutchen) 선교사가 “회장! 아무에게도 이의를 제기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하고 물으니 회장은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서국태, 위인사, 부위렴(W. F. Bull)선교사가 마로덕(L. O. McCutchen) 목사와 비슷한 질의를 하였으나 회장은 일방적 발언만을 할 뿐 不는 묻지 않고 가결을 선포하였다.
선교사들은 불법적 의사처리를 총회에 항소하겠다고 경고 발언하자 경찰들이 흥분하여 “노회는 이의를 접수하거나 이 사실을 노회록에 기록하지 말라.” 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당일 비가 오지만 노회원들은 일본 경찰에 끌려가 신사참배하고 말았다.
제 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38년 9월 9일에 평양 서문밧예배당에서 개회되었다. 총회 개최에 앞서 각지 경찰서장은 노회 대표들에게 다음 3개의 조건 중 하나를 택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에 불응하는 사람은 검속. 투옥하여 총회 장소에 나갈 수 없게 하였다. 그 세가지는 첫째, 총회에 참석하여 신사참배 찬성에 동의할 것. 둘째, 신사 문제가 상정되면 침묵을 지킬 것. 셋째, 위의 두 조항을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지 말 것 등이었다.
신사참배 문제는 총회 2일째 갑작스럽게 처리되었다. 평소 강경하게 참배를 반대해 온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채정민 목사 등은 사전에 예비 검속되어 총회에 나오지 못하였다. 수백명의 경찰과 사복경관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총대 목사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모두 206명이 넋을 잃고 앉아 있는 가운데 평양노회장 박응률 목사가 동의하고 평서노회 박림현, 안주노회 길인섭 목사의 재청이 있자 ‘가可’를 물으니 10명 미만의 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예’ 라 하였고 ‘부’ 는 묻지도 않고 총회장 홍택기는 일방적으로 ‘가결’ 이라고 선포하였다. 이에 반대하고 일어선 방위량과 한부선 두 선교사가 경관의 폭력적인 제제를 받자 30여 명의 선교사가 모두 퇴장하였고 이어서 항의문을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되고. 둘째, 장로회 헌법과 규칙에 위반되고. 셋째, 강제로 국가에서 종교 자유를 범하게 하는 것은 일본 헌법에 부여한 선교자유의 정신에 위반되고. 넷째, 보통회의법에도 위반한 것임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 소란속에 총회 서기 곽진근 목사가 미리 준비했던 총회장 성명서를 낭독하였으며 12시에는 부회장 김길창의 안내로 23명의 노회장이 총대를 대표하여 평양 신사에 참배하였다.
당시 총회에 참석한 전북노회의 총대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목사 - 김세열, 이창규, 곽진근, 이춘원, 구연직, 김수영, 고성모, 박승준
장로 - 양기철, 최영필, 최영옥, 송화익, 최극재, 백남철, 김득주, 양해근
퇴장한 선교사 - 마로덕(L. O. McCutchen), 서국태, 부위렴(W. F. Bull)
1938년 6우러 8일 제 32회 전북노회의 결의와 1938년 9월 9일 제 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로 47년간 한국의 복음전파를 위하여 한국 교회와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와 맺어진 협력 선교관계는 일단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소속노회에서의 탈퇴한다는 소식을 들은 전북노회는 선교사와 타협하고자 하였으나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선교회의 현재 형편으로는 노회와 총회가 일단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으므로 선교사들로는 종래와 같이 노회원의 임무와 책임을 하나님이 주신 양심과 성경교리에 비추어 담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회의 모든 직책을 사임하며 노회원까지도 탈퇴하는 바입니다.
둘째, 저희 선교사들이 하나님께 대해 지켜야 할 의무와 교회의 신령상 유익을 좇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일할 것이로되 무임 목사로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교회나 노회의 연락과 부흥회, 성경교수, 신자의 심방과 개인전도 및 설교 등을 할 수 있도록 무임목사의 신분으로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희는 위와 같은 결정을 하였으나 교회의 사랑과 평화를 계속 유지하며 서로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유대 되기를 바랍니다.
넷째, 지금까지 저희와 봉사하며 시무하는 남, 여전도사들께는 1938년 10월에서 1939년 3월까지 향후 6개월분의 보조금을 계속 지원하겠습니다.
다섯째, 본 선교회의 원래 계획대로 금년 겨울 사경회와 성경학교를 계속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전북노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첫째, 선교사의 노회 탈퇴와 사임을 그대로 받기로 하고
둘째, 무임목사로는 허락할 수 없는 것으로 결정하였고,
셋째, 성경학교는 전주의 교회에서 1개월간 실시할 것이고, 사경회는 군산 전주 두 곳에서 각각 한 주간씩 실시하기로 하며 기숙사는 서문밧교회 내에 건축하기로 한다.
선교사들은 성경학교와 사경회를 통해서 독립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일제의 어떻한 불신앙적 타협에도 불응하고 끝까지 선한 싸움과 달려갈 길을 달려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영향을 가장 많은 받았던 지역중에 하나가 바로 남차문 지역이고 남전교회이다. 왜냐하면 전위렴선교사 하위렴(W. B. Harrison) 선교사 부위렴(W. F. Bull) 선교사등은 남전교회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가졌고 이들은 당회 때마다 참석하여 교회를 치리하고 운영하였으며 또한 선교사들의 부인들도 역시 남전교회의 조력회 현 여신도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2) 교회의 창립
이 지역에 일찍이 복음이 뿌리내린 것은 선교사 드루(A. D. Drew)의 역할이 컸다. 드루(A. D. Drew)는 전킨(W. M. Junkin)목사와 함께 1895년 3월에 군산에 와서 선교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일제시대에 군산우체국이 있는 곳에 집을 마련하여 정착하였다. 군산에서 호남지역 최초의 세례교인을 배출했지만, 선교부에서는 군산스테이션을 포기하고 나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드루(A. D. Drew) 의사는 끝까지 군산스테이션을 고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의지가 관철되어 1898년에는 군산의 선교부를 임피 궁멀로 이전하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군산이 개항되어 많은 일본인이 몰려들었기에 선교에 불편이 있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해 일본인의 눈에는 가시와 같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박을 이용하여 도서지방의 선교와 의료활동을 펴기 위해서는 궁말이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군산스테이션에는 전킨(W. M. Junkin), 하위렴(W. B. Harrison), 드루(A. D. Drew)와 미쓰 데이빗스(Linnie Davis), 그리고 불(W. F. Bull)목사, 이쓰 앨비(Alby)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한국의 개신교는 만주에 있는 로스(John Ross)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1876년 백흥준, 이응찬, 김진기, 이성하등 4명이 존 맥킨타이어(John McIntyre)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1879년에는 서상륜이 세례를 받았고 1883년에는 황해도에 소래교회가 한국인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세워졌다. 한국 땅에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만주와 일본에서 우리말로 된 성서가 나왔다. 그것이 여러 경로를 통해 국내에 반입되어 그것을 읽는 사람들과 선구적인 전도인들에 의해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한국인 교회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나 근세 이전에 한국에 복음이 전해진 흔적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근세 이전에 한국에 복음이 전해진 그 가능성을 찾아보면 첫째로, 아시아적 기독교운동이 고대세계 속에서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멀리 중국에까지 전파된 때가 있었다. 그것은 서방의 카톨릭 교회가 로마제국의 공인종교가 된 후 기독론을 중심한 성경논쟁에서 이단으로 정죄받고 쫓겨온 동방교회의 아시아 유입이 그 발단이다.
기원 후 490년에 동방교회를 설립한 이후 5세기 말에서 6세기 중엽에는 그 세력이 방대하였다. 그러나 6세기에 들어서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의 기독교 운동을 이적시하고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박해를 피해 동방교회의 기독교 운동은 635년 중국의 당나라까지 뻗어가게 되었다.
당태종은 동방교회의 기독교를 대진경교라 부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경교는 당태종과 고종이 지나고 난 뒤, 숭불정책에 의해 활동이 주춤해진 것 이외에 당대 말까지 거의 200년 동안 많은 역사적 공헌을 하였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비롯해 전국에 경교사원을 지었다. 그리고 경교사원에서 기독교 교리에 대한 경전들을 번역하였다. 그래서 641년에는 경교선교사 알로펜(Alopen)에 의해 예수 메시야 경, 일신론, 일천론경 등을 간행해 대중에게 보급하였다. 그러나 당 왕조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받아들여진 네스토우스파의 기독교 운동은 원래 의도를 상실하고 경교로 탈바꿈하였다. 그리고 동양종교와 통합한 가운데 관료체제의 보조적 이념으로 동화되고 말았다.
서기 635년부터 845년에 이르는 시기까지 중국의 당나라에서 번성한 경교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과의 밀접한 외교 관계와 문화적 교류 속에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하나의 변혁의 원동력으로 기능하지 못하였고 하나의 종교, 문화적 양식으로만 존재하다가 소멸되었다.
둘째로, 동방교회 기독교 운동의 전래 가능성은 원나라가 중국을 통치하게 된 13세기와 14세기 무렵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원나라 시대에는 경교라 부르지 않고 ‘아르카온(Arkaun)' 이라 불렀다. 몽고의 항쟁에도 불구하고 힘의 열세로 고려는 1259년에 항복하게 되었다. 그 후 직접 고려를 섭정하던 원나라 장군 내얀이 투철한 야리가온(Arkaun) 신자였다. 그는 군기에 십자가 표식을 하고 그 부하 병졸들을 전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발견된 고려 유물에는 야리가온(Arkaun)의 흔적을 찾지 못한다.
한국에 경교와 야리카온(Arkaun)의 전래 가능성 이후 최초의 복음의 접촉점은 16,7세기로 서방국가들의 군사, 경제적 뒷받침을 힘입어 아시아 세계에 선교를 나선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이다.
1555년 카톨릭 교회는 반종교개혁을 통해 중세봉건적 교회의 구조를 자체적으로 갱신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한 세계적 보편 교회의 이상을 해외 선교로부터 찾으려 했다. 그리하여 예수회와 그의 선교단체를 통해 중국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동양변화를 직시한 로마교황은 1568년 카르네에로(Carneiro)를 중국주교로 임명하고 본격적인 중국선교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601년 루지에리(Micael Ruggieri)와 마테오 릿치(Matteo Ricci)가 중국에 들어와 거주하다가 포교 허가를 받았다. 이들은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의 관습과 윤리를 따라 생활하였고, 수학과 천문학 등 서구의 과학지식을 전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로마 카톨릭을 ‘천주교(天主敎)’ 라 이름 붙이고 신앙교리들을 유교적 용어를 빌려 설명한 성교실록(聖敎實錄)과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을 저술하여 천주교를 크게 부흥시켰다.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근대 지향적인 일부 실학파들에게 천주교는 큰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실학파에 속한 이벽과 정약용등은 천주학을 비롯한 서양의 과학지식 등에 크게 관심을 쏟았다. 이것은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되어지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그 후 한국에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은 여러 나라의 복음기관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하지만 선교사를 직접 한국에 파견한 최초의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 등의 교파들이 한국에 선교사를 가장 먼저 상륙시켰던 것이다. 1882년 5월 한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지고, 그 해 10월 그리피스(Wm. E. Griffis)에 의해 [Corea, the Hermit Nation}이 간행되었지만 미국의 교단에서는 아직 한국에 대하여 선교적 관심을 깊이 가지지 않았다.
맥클레이(R. S. MacLay)는 처음에 중국 선교사로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옮겨갔다. 그는 일본에서 김옥균을 만나 그의 한국 방문계획을 설명하고 한국에서의 사업계획을 건네주었다. 그것은 국왕에게 빠른 시일 내에 전달되었다. 1884년 7월 4일 한국에서 교육과 의료를 통한 선교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은 맥클레이(R. S. MacLay)는 며칠 동안 서울에 더 머물며 선교사업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러나 미국 감리회측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선교사를 가장 먼저 상륙시켜 터전을 마련토록 한 것은 미국 북 장로회였다. 1884년 9월 미북장로회 의료 선교사 알렌(H. N. Allen)이 한국 주재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해 12월 알렌(H. N. Allen)의사는 갑신정변시 부상당한 보수계 거두 민영익을 서양의술로 완치시켜 왕실의 신망을 얻어내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이수정은 토를 단 한문 신약성서를 요코하마에서 발행하였다. 이어 마가복음과 사도행전 한국어로 번역 완료하였다. 그 후 미국 장로회 복음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미 감리회 복음션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내한하게 되어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인 한국에서의 개신교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전북지역에서의 개신교가 전래된 것은 1892년에 미국 남장로의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소위 7인의 선발대라고 불리워지는 - 최의덕(L.B. Tate), 이눌서(W.D. Reynols), 전위렴(W.M. Junkin), 최의덕의 동생인 최마태(Mattie S. Tate), 데이비스(Linnie Davis), 전위렴의 부인인 리번(M. Leyburn Junkin), 이눌서의 부인인 볼링(P. Bolling Reynols) - 이들이 바로 이 지역에 들어와서 선교활동을 한 것은 아니고 1893년 한국에 주재하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참석하여 장로회 선교공의회를 조직하였고, 여기에서 예양협정(Commity Agreements)가 성립되었는 데 그 결과 남장로교 선교부는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전교회의 설립은 전킨(W. M. Junkin)이 선교부를 군산에서 궁멀로 옮기기 전으로 올라간다. 남전교회 당회록에 보면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남전교회의 초기 교회 설립에 관한 기록은 남전교회 당회록 1권과 남전교회 교회록 1권에 자세히 나와있다.
남전교회 당회록과 남전교회 교회록을 간혹 혼돈하는 경우가 있는 데, 남전교회 당회록은 1899년에 기록이 시작되었다. 당회록에는 남전교회 초기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남전교회 교회록은 1914년에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록에 보면 처음부터 14년도까지의 기록이 한꺼번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남전교회 초기 역사를 연구하는 데는 당회록 1권이 더욱더 명확하다는 것을 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당회록 1권의 내용과 교회록 2권과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더욱더 초기 교회 역사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남전교회 당회록에 보면 최초 당회가 시작되어진 것은 기해년(1899년) 3월 15일이다. 회장은 젼위렴이고 서기는 조사였던 주원선이다. 그리고 제 2회 당회는 회장이 젼위렴이고 서기는 장세경으로 나와있다. 그러나 교회의 시작은 그 이전으로 보아야 한다.
(3) 초기 그리스도인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지만 1899년 임피의 궁멀로 선교기지를 이전하기 이전부터 벌써 군산 선교부 관내에는 네 곳의 예배처소가 있었다. 즉 이미 군산교회 주위에는 통사동(Tongsadong - 군산시 개정면 통사리), 만자산(Manchasan - 군산시 대야면 지경리), 남차문(Namchamun -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 송지동(Songchidong - 김제시 공덕면), 의 네 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미 네 곳에 예배처소가 생겨 정기적으로 교인들이 회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교회들은 전위렴(W. M. Junkin) 선교사가 직접 담당하여 규칙적으로 섬기던 예배 처소였음을 그의 기록을 통해 알 수가 있다. 우리 남전교회의 초창기 믿음의 선배들은 군산선교부가 개설되면서부터 전위렴 선교사를 통해 복음의 말씀을 듣고 결신하였다. 그리하여 전북지방 초대교회의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교회창립 일자에 대한 기록들을 검토해 보면, 서로가 상충되는 면이 없지 않다. 즉, 장로회사기는 남전교회의 창립년도를 1901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본 남전교회의 당회록이나 교회록에는 明治(서기 1897년) 30년 10월 15일(1897년)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많은 교회들이 자체적으로 지켜지는 창립년도와 장로회사기에 기록된 창립연도가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음으로써 겪게 되는 혼선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기술한 내용이나 본 교회의 교회록, 그리고 선교사들의 단편적인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우리 남전교인들은 이미 1897년도 10월 15일 그 이전부터 군산선교부의 관할 아래 군산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으며, 남참부락에는 수시로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처소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남참부락에 최초로 복음을 전해준 사람은 전위렴 선교사이다. 이는 남전교회의 최초의 당회장직을 수행하였고, 그를 통해 복음의 말씀을 처음으로 접한 우리 남전교회의 최초의 교인은 ‘김정현’과 ‘이성일댁’ 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하지만 어떤 경로로 복음을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의 파악은 지금까지의 자료만으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니스벳(E. M. Nisbet) 선교사의 기록이나 군산선교부 선교사들의 뱃길을 통한 복음전도 경로를 참고함으로써 유력한 복음전도 경로를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 니스벳 선교사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자.
“상인 박씨와 최씨가 있었다. 박씨는 비단장수였고 그의 친구인 최씨는 기름장수였다. 그들은 종종 같이 시장에서 시장으로 떠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았다. 어느 날 최씨가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지난 주 솜리장에서(현 이리시)에서 매우 신기한 구경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큰 코와 딱 붙은 바지를 입은 사람이 예수교에 대해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아덴사람들처럼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최씨는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고, 그 사람이 팔고 있는 책 하나를 샀던 것이다. 최씨는 박씨를 볼 때마다 이 새로운 예수교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최씨는 예수교의 가르침이 좋은 가르침이며 자신은 ‘이 교를 신봉하기로 작정했다’ 면서 친구 박씨에게 자기와 함께 그리스도인의 길을 가자고 권했다. 그래서 이 두 마을에 그리스도인의 씨가 심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장터에서 처음 만난 큰 키와 파란 눈, 뾰족한 콧날 등의 낯설은 서양인의 모습이 당시 우리 백성들의 눈에는 괴이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들이 외치는 ‘예수님’ 과 ‘구원’ 에 대한 애기는 신기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그들을 향해 ‘서양 도깨비’ 를 운운하며 놀려댔다. 심지어는 마을 골목길에서 숨어서 꼬마 애들은 돌팔매질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들에 대한 관심이 차츰 호기심과 동정으로 이어져, 마침내 선교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것은 그대로 열매가 되어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남전교회의 당회록에 의하면, 1897년 당시에 남참부락의 사람들이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이곳 남이면 남참리(현 오산면 남전리)에서 50여리나 떨어져 있는 군산 선창가의 전위렴 선교사의 집을 왕래하였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나타나 있으며, 또한, 그때 이미 전위렴 선교사가 본촌에 마련된 예배처소에 간혹 들려서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고 하는 것은 남전교회의 공식기록인 당회록과 교회록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당시의 군산선교거점(전위렴 선교사의 집)은 이 지역 사람들의 예배 처소가 되기도 하였다. 인근에서도 충분히 교우들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왔다. 이들은 자기 집에서 30여 킬로나 되는 거리를 걸어와 군산의 전위렴 선교사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이들은 보통 주일보다 하루 일찍 토요일에 와서 월요일에 되돌아가곤 하였다.
그들이 마을로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주일예배 때에 보고들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이들은 선교사가 자신의 마음에 방문할 수 있도록 초청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장터를 통한 전도는 일일이 골짜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개인방문 전도를 하지 않고도 한 날에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에 선교 초창기에는 매우 효과적이며 유익한 복음 전달장소였던 것이다.
장이 서지 않은 날은 멀리까지 가가호호 방문하여 복음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로써는 장터만큼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전도를 하고 성서를 소개할 기회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외국인 선교사 하위렴(W. B. Harrison)의 눈에 비친 장날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시장제도 또한 복음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한국을 여행하는 외국 사람들은 상점이 별로 없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물건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은 이곳에서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구입하는지 궁금해할지 모른다. 그 여행자들은 ‘장’ 곧 시장(market)이 열리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매 5일 마다 장색공, 상인, 농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아주 먼 곳으로부터 자신의 상품을 가지고 와서 다른 물건과 바꾸거나 이를 다른 사람에게 팔기도 한다. 짚으로 덮인 노점이 세워지고, 돼지, 소, 닭이 소리내며 울고, 사람들이 자기 물건을 먼저 팔려고 고함을 칠 때, 이 장은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무슨 소동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장날의 장면은 백개의 경매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한국의 장날은 설교를 하고, 소책자를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많은 한국인들은 보통 장날에 그리스도에 대해 처음 들었다”.
하위렴(W. B. Harrison) 선교사는 전주에 있는 몇 명의 그리스도인을 설득하여 5일마다 열리는 장날에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도록 장터마다 두 개의 헛간을 짓도록 했다.
말하자면, 많은 장꾼들이 모여든 장터에 그저 외국인 선교사들이 나서기만 해도 금방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주위로 몰려들었고, 신기한 눈으로 코 큰 서양인들을 구경거리로 삼았다. 구태여 소리질러 사람들을 동원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기서 전위렴(W. M. Junkin) 선교사는 남전교회 당회록에 나와있는 것처럼 ‘생명의 진리 말씀’ 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였고, 하나님의 의와 예수그리스도 구세주에 대한 말씀을 우매한 민중들에게 전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그리고 한 쪽에서는 사람들이 집으로 가져가서 읽을 수 있도록, 대중 전도지인 쪽복음서를 팔기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장터전도에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선교사들의 복음을 최초로 접하고, 그들을 도와주면서 복음서를 팔거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 조사들이 선교사들과 동행하였다. 이들은 초창기 선교활동에 크게 기여하였던 기독교의 일꾼들이었다.
1988년 12월 21일 첫 주일 예배를 궁멀에서 드린 군산선교부는 나날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이듬해 1899년 봄에는 95명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을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이들 세례자들 중에는 남전교회의 초대교인이었던 김정현과 이성일댁도 포함되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남전교회 초기 세례교인 대부분이 초신자들의 아내이거나 자녀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의 엄격한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특성이 선교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지적될 수 있은 좋은 예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에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한글로 된 세례문답서를 해독할 수 있을 정도의 한글해독 실력이 요구되었는데 신자인 한국 부녀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한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자였던 고로 이에 선교사 데이비스(Linnie Davis) 양과 엘비(Alby) 양이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야학당을 열었으며 이곳에서 한글을 깨우치게 하여 많은 셰례교인들을 배출하게 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한글보급 운동이 선교부내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개화의 문명이 일찍 이들 속에 싹트었다. 남전교회 당회록에 보면 이 지역에서 최초로 예수를 영접한 사람가운데는 여성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어 이러한 사실을 밑받침해 준다.
그러나 남전 지역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서양 선교사들에만 그들의 신앙을 맡기지 않았다. 그들은 복음을 접한 이후 곧바로 그들만에 기도처소와 예배처소를 준비하였다. 이러한 일은 이미 19세기말에 이룩되었다. 그들은 전도를 게으르지 않았고 복음전도에 앞장섰음을 최초의 당회기록과 또한 교회록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특별히 이 지역민은 그들만의 독특한 분위기 속에 복음을 자생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 여러번에 걸쳐 치리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복음을 생명력을 더욱더 타올랐다. 한편 박영문 열사의 조카인 박양출의 증언에 따르면, 남전리는 동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던 그 일부가 이곳에서 숨어 지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영향하에서의 복음은 캄캄한 민중속에 서광을 비추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서광은 잠시 이 지역은 일본인의 소굴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출애굽의 신앙으로 뭉쳐 일어날 태세에 최초 한국인으로 담임목사인 최대진이 부임하게 된다. 이것은 이 지역의 가장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올만큼 커다란 영향과 변화의 물결을 거세게 일으키기에 분명하였다.
제 3 장 익산 삼일 만세운동(사사만세의거)의 전개과정
1. 천도교 중심의 산발적 시위단계(3월 초순 - 3월 중순)
기미년(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삼일독립만세운동은 아주 급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1919년 3월 2일에 천도교 중앙총부의 인종익이 독립선언서 2000매 중에서 200매를 익산의 이중달에게 전달한다. 이렇게 천도교 조직망을 통하여 독립선언서가 익산군내에 배포되면서 만세시위운동에 관한 준비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처음 익산에서의 삼일만세운동은 집단적으로 어느 한곳에서 일제히 시작되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산, 웅포의 시장은 장날은 1, 6일이었다. 함열, 금마시장의 장날은 2, 7일이었다. 그리고 4일과 9일은 농고시장(지금의 익산북부 시장과) 이리시장(지금의 구시장)이 서는 날이었다. 만세시위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날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소모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천도교의 조직망에 의한 만세시위의 준비는 두드러진다.
이렇게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 거사 일을 천도교의 기념일인 최제우가 고종 1년 대구 감옥에서 순교한 3월 10일 음력 2월 9일로 정하였다. 이는 익산 지역에 천도교 교인들이 많았고 종교적 행사의 방법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게 일군경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거사 날짜는 3월 10일로 정해지면서 장소는 여산, 용안, 함열, 이리 등 한 곳에 집결하기가 어려우니 만큼 천도교 기념식이 끝 난 후 오후 9시를 기하여 각 면(面), 리(理)에서 일제히 산상에 횃불을 들고 그 횃불을 신호로 해서 만세시위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천도교인 고총권이 3월 3일 여산면 노상에서 선언서를 배포하면서 행인들에게 만세 시위운동에 대한 설명과 동참을 호소하는 가운데 현장에서 검속당하였다. 게다가 박영진과 정대원도 여산에서 검속당하면서 일본 군경대의 경계가 삼엄하여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대규모로 전개되는 시위운동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3월 10일 천도교 순도기념식이 끝난 후 군내 여러 곳에서 횃불이 오르면서 예정대로 횃불 시위는 전개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하여 익산군의 초기의 만세운동이 산발적이며 소규모로 시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 마지막으로 천도교인이 주축이 된 만세시위운동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 이후 여산면과 춘포면의 시위운동은 천도교나 예수교등 종교계와는 별도로 전개되어진다. 여산에서는 이정 박사국 이병석 김치옥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은 정영모의 집에 모여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3월 10일에 조선자주독립이라고 쓰여진 기(旗)를 들고 여산면의 헌병분견소의 남쪽 6Km지점까지 진출하여 2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여산에서는 3월 30일에 만세시위운동이 다시 전개되기도 하였다.
금마면에서는 금마 장날인 3월 18일과 28일에 만세시위가 있었다. 왕궁면에서는 장날인 18일을 기해 김광덕, 송종석, 등이 당일 오후 1시경 친지들과 함께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 춘포면에서는 28일에 송종석이라는 청년이 주동이 되어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만세시위를 벌였다. 큰 거리로 행진을 해 나갔는데 결국 일본 무장대들과 출동하여 군중은 해산되고 소진석은 검속당하였다.
함열면에서의 시위는 거리시위가 아닌 산상 횃불 시위였다. 3월 16일부터 산에 불을 놓고 수백이 만세를 부르더니 4월 4일 강경에서 만세부르는 소리를 듣고 각 동이 일제 일어나 산에 횃불을 올리고 수 백명씩 산에서 혹은 부락 안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전도부인이 돌아다니면서 격려하고 천도교인은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배포한 즉 일반인은 더욱 기세를 울려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4월 8일에 용안면 화배리에서 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하였다. 지휘는 박영문 김기동 차팔용 최팔만등이다.
2. 남전교회 삼일 만세운동
1)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루어진 거사준비(3월중순 - 4월초)
4․4 익산독립만세운동은 군산의 만세시위와 그 출발점에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919년 3월 당시, 군산지방의 3․1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당시 서울 세브란스의전 학생이었던 김병수와 당시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의 당시 행적을 추적해보면 남전교회가 주도한 익산 항쟁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3․1독립운동의 군산지방 연락책으로 모교 은사인 박연세를 만나 군산의 만세 시위를 권했던 김병수는, 4월 4일의 익산시위현장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며 특히 거사 당일의 정황을 참작하면 익산항쟁의 주동격인 문용기와는 이미 사전에 알고있던 사이였다.
박연세 역시 본 남전교회 출신으로, 1906년 봄, 그가 스물 네 살이 되던 해에, 당시 본 교회의 시무 당회장인 하위렴(W.B. Harrison)선교사에게 그의 부친인 박자형(朴子亨)과 함께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고향이 다른 문헌의 기록인 ‘김제 백구’ 라고 하는 것과는 달리, 그의 고향이 오산면 남전리(당시 남이면 남참리)이다. 해방 후까지도 그의 친인척이 남참부락(남전리)에 살고 있었고, 또 남전교회가 그의 모교회라는 사실 등은 남참부락이 그의 고향이라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남전교회의 담임목사인 최대진 목사는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장으로써 전라북도 만세운동의 준비상황에 대한 전모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3․1운동이 기독교계가 중심이 된 만세운동이었다는 것과 군산의 만세운동을 준비한 주도자들이 모두 기독교 계통의 인사이었다는 것 그리고 군산, 전주의 시위와 관련한 기관들이, 즉 영명학교, 구암교회, 구암 예수병원 그리고 기전여학교, 신흥학교, 전주 서문밧교회 등이 모두 기독교계의 기관단체이었던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전라북도 지역의 만세운동의 준비상황에 대해서 최대진 목사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건데, 솜리 만세사건의 시작은 이미 2월 26일 김병수가 그의 은사인 박연세를 처음 만나면서부터 시작된 군산 만세사건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사전에 발각되어 불발로 그치고 말았지만 당초 3월 10일로 예정되었던 천도교와 연대하여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던 계획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다.
어쨌든 당시 남전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최대진 목사는 기독교계가 직접적으로 관련된 군산과 전주의 만세운동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던 일련의 독립만세운동을 접하게 되었고 전라북도 지역의 교통의 요충지이며 농수산물을 비롯한 상거래 유통 중심지인 이리(裡里)에서의 만세운동 계획에 대해 당위성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남전교회 설립 소학교인 도남학교를 거쳐 이리의 보통학교나 군산의 영명학교 전주 신흥학교 등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남전교인들은 이미 3월초부터 전개된 군산을 비롯한 각지에서의 독립 만세운동에 대해서 충분히 듣게 되었다.
오산면에 위치한 일본인 농장주들이 득세하는 것을 비롯하여, 남의 나라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날로 富를 축적해 가는 것에 비해, 오히려 상대적으로 곤궁해져 가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상대적인 상실감과 박탈감 그리고 그에 따른 민족적인 울분이 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남전교회 교인들은 빼앗긴 설움에 대한 민족의 울분을 표출하고 있던 당시의 전국 각지의 만세운동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고 있던 바였던 것이다.
특히, 당시에 전국 각지의 학교들은 3․1독립만세 사건으로 인해 대부분 휴교하였다.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 등지로 유학을 갔던 학생들은 급히 귀향하여 자신들이 다니던 학교 주변의 만세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운동 조직을 통해, 귀향하여 고향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참여할 것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특히, 본 오산면 오산리 관음 출신이고 관음부락에서 살았던 문용기는 당시 함경도 갑산에서 선교사들의 현지 통역인으로서 선교사들을 도와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문용기는 거국적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급거 귀향하였다.
그는 이미 함경도 갑산(甲山)에서 8년간이나 활동하면서 자금을 모아 만주의 독립군들의 군자금을 비밀리에 지원해주웠다. 그런 그가 거국적으로 물결치던 독립만세운동 때에 고향을 찾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귀향 후 그는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한 모교회이면서 당시 그의 모친 김씨와 아내(최정자 여사)가 다니고 있던 남전교회를 방문함으로써 본격적인 솜리민중항쟁의 거사계획에 착수하게 된다. 즉, 그는 먼저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던 도남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솜리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거사의 계획을 세웠다. 물론 실제적인 계획은 담임목사인 최대진 목사와 함께 협의하여 추진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솜리항쟁을 위한 거사 계획은 최대진 목사(당시 40세)의 민족주의에 기초한 영웅적인 기질과 문용기 열사(당시 41세)의 의협심과 독립의지가 투합하여 이루어 낸 결과인 셈이다. 이들은 먼저 거사시기와 장소를 택하고 그에 따른 거사의 방법 그리고 그 준비를 위해서는 앞서 치러진 만세운동을 면밀하게 분석함으로써 거사준비에 착오가 없도록 하였다.
최대진 목사와 문용기 선생은 다른 지역의 대부분의 만세운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택해서 전개되었던 점을 착안하여, 거사일을 솜리의 장날인 4월 4일(음력 3월 4일)을 택하였다. 특히 당시 솜리(裡里)의 場은 전라북도에서 가장 성황을 이루었던 場으로써 수많은 군중들이 모이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기에 그들이 기대하고 예상했던 만세운동의 효과는 대단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그들은 군산 만세운동과 익산의 만세운동이 거사 전에 발각되었던 점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보안에 철저한 신중을 기했다. 그래서 그들은 만세운동의 주체 주동세력은 남전교회의 교인으로만 국한시켰다. 거사 당일 아침까지도 준비에 참여한 일부 교인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거사계획에 대해 발설하지 않도록 보안에 각별하게 신경을 썼던 것이다. 이같은 그들의 의도는 계획대로 실천되었다.
거사 당일(4월 4일) 아침까지도 그동안 준비에 참가했던 교인들 외에는 그 누구도 독립만세운동에 남전교회의 교인들이 주동으로 참가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어쨌든 철저한 보안 속에서 거사의 준비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우선 최대진 목사와 문용기 열사는 교회의 직분자들 중 일부와 도남학교 학생들 중에 나이가 위인 학생들을 수명을 선별하여 거사준비에 동참시키기도 하였다. 이미 3월초에 김병수로부터 전해 받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더 만들기로 하고 극비리에 당시 영성리에 위치한 남전교회 가까이에 있는 교인들 집인 당시 교회 사택인 정군덕의 집과 김내문, 박다연집에서 며칠동안 계속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아홉 살이었던 정군덕 장로는 “어느 날엔가 잠결에 눈을 떠보니 안방쪽에서 불빛이 새어 나와 웃방 문틈새로 들여다 보니 목사님과 여섯 명쯤 되는 교회 분들이 머리를 맞대고서 뭔가를 그리고 있고 한 쪽에서는 등사기를 밀고 있더라구...보니 그림은 태극기야...한참을 지켜보다 보니까 날이 훤하게 새는 거여...” 그러면서 “알고보니께 고것이 만세운동에 쓸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이였어...” 라고 그때를 회상하였다.
한편 문용기는 보다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군산 영명학교 후배이자 전북지방의 만세운동의 연락책이었던 김병수(세브란스의전 학생)와 만나 이리에서의 거사계획에 대해 숙의하고 그에게 거사당일 직접 행동대원으로 나서서 대열을 선도할 청년들을 포섭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로써 당시 이 지역 출신으로 서울로 유학하였다가 3․1만세운동시에 그곳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각 학교가 휴교하자 귀향하여 집에 있던 청년들을 행동책으로 삼을 수 있었다. 문용기는 자신이 가르치고 있던 학생 중에 반장으로서 매사에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솔선수범하는 박영문(朴泳文)을 신임하여 그에게 비밀리에 일을 추진할 수 있도록 당부하였다. 다른 대원들과의 연통을 위한 연락책임이나 거사를 위한 사소한 준비를 맡기기도 하였다.
문용기 열사의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문용기 열사는 익산 만세 운동 전 주일예배 후에 예배당에서 공식적으로 전교인들을 대상으로 ‘조선독립’ 에 관련된 주제로 연설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하튼, 철저한 보안 속에서 최대진 목사와 문용기 열사는 익산 독립만세 운동의 거사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의 실천을 위해 극비리에 서로 접촉하면서 부단하게 활동하였으며, 계획실천의 전위조직으로 김병수, 박영문을 위시한 청년학생 조직과 내부적으로는 남전교회의 직분을 가진 교인들 일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거사 하루전의 상황(4월 3일, 목요일)
익산민중항쟁의 거사를 하루 앞둔 날, 거사를 준비하고 있던 남전교회의 교인들은 마지막 마무리를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대형 깃발을 만들고, 현수막을 만들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고, 교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각 부락의 책임자들에게 연락을 취하여 ‘내일 오전에 교회로 모일 것’ 과 ‘복장은 흰색 한복차림으로 차려 입을 것’ 등을 전달하면서, 이 부락 저 부락으로 바삐 다녔으리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시간, 최대진 목사는 전주의 서문밧교회(現 서문교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장으로서 제 4회 전북노회를 주관하고 있었다. 선교사 5인, 목사 6인, 장로 21인 모두가 참석한 이 날의 노회는 이미 전날인 4월 2일 오후 4시에 개회되어 회의를 하다가 밤 8시 20분에 정회하였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인 4월 3일 오전 9시에 개회하여 계속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4월 3일 오후 6시가 되어서야 노회장 최대진 목사의 폐회 선언으로 제 4회 전북노회가 끝난 것으로 당시 노회 회의록에 나타나 있다.
결과적으로 최대진 목사는 전주에서 거사 전날인 4월 3일 오후 6시까지도 태연스럽게 전북노회장으로서 노회를 주관하고 있었다. 또, 이 회의에는, 당시 남전교회의 대표인 박성윤 장로도 함께 참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거사 이틀 전부터 거사를 일으키기 전날까지 최대진 목사는 노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교인들은 그들끼리 스스로 거사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 날 전북노회에서 보고된 군산지방 시찰위원장 하위렴 목사의 보고내용을 보면, 남전교회는 1918년에 비해 상당히 발전적이며 고무적인 교회의 상황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이성일 장로의 소천 소식을 전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신덕리교회는교우와졔직이서로화평오며병든사과간난사을서로구졔하오며긔도와셩경공부에게으리지아니오며셥셥온거슨다년간시무시든리셩일쟝로가별셰엿소이다”
특히, 최대진 목사는 노회 예배시에 강론을 통해 ‘신자는 자기를 이용하라’(마5:10~16)제목의 말씀으로써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 을 강조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솜리 거사에 참여하게 될 남전교인들을 염두에 둔 목회자로서의 묵시적인 격려가 아니었나 판단된다.
아무튼, 익산민중항쟁의 거사준비는 이미 준비된 계획에 의해 문용기 열사와 도남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교인들 스스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당시 전국적으로 계속되는 만세운동으로 인하여 일본 경찰이나 헌병들의 감시가 극심했기 때문에, 최대진 목사를 교계의 지도자로서 전북도내 기독교계의 교역자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노회에 참석하고 있음으로써 감시의 눈길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
당시 명망있는 교역자는 항상 그들의 뒤에 일본인 고등계 형사의 미행이 그칠 날이 없었다.
어쨌든 최대진 목사는 거사 전야에 늦도록 전주에 있었던 반면에 남전교회의 교인들은 다음날의 거사를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 밤늦도록 준비에 열성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3) 솜리장터로 향한 몸부림(4월 4일:陰 3월 4일, 금요일)
박명에 트여오는 태양이 옥익꾸뜰의 들판을 밀어내며 솟구치고 있었다. 4월 4일 그날은 솜리의 장날이었다. 장터로 향하는 장꾼들의 부산한 몸놀림은 들녘의 논두렁길을 따라, 신작로길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얀 한복으로 차려입은 교인들은 교회의 안마당으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교인들은 교회 가까이에 있는 부락(남참,북참,영성 등)의 불신앙인들에게도 만세운동에 함께 동참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많은 주민들이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주변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일부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남참이나 북참, 그리고 영성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최대진 목사가 보이질 않았다. 거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길을 나서는 교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아주어야 할 담임목사가 없었던 것이다. 4월 3일 전주에서 노회를 주재한 후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교인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구구한 억측이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렸다. 그러나 거사는 지체되지 아니하고 계속되었다.
왜 최대진 목사님이 당일 현장에 없었는지는 그 연유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 이후 13년간이나 그를 만날 수가 없었고, 1934년이 되어서 남전교회의 초청 부흥강사로 왔을 때에는 이미 그 옛날 늠름하던 장년의 기상은 간 곳이 없고, 반백의 머리에 노년의 기풍만이 그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 최대진 목사는 자신이 거사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최대진 목사가 그 전날 전주에서 돌아오지 못했던, 그 이유는 확연하게 드러나질 않고 있다. 물론, 당시에 최대진 목사가 처해 있는 입장으로 보아서 추측을 한다면, 몇 가지 상황을 가정할 수는 있다.
즉, 당시 서양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일반적으로 주장하고 있던 종교에 있어서의 정치성 배제에 따른 전북노회장으로서의 공적(公的)인 입장표명이 곤란하지 않았겠느냐는 점이다. 노회대표인 목회자로서의 입장과 한국인으로서의 최대진 개인으로서의 양심을 행동으로 옮겨야하는 입장 사이에서의 고뇌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기독교계를 선도하던 일부의 종교지도자들이 삼일운동에 대해 방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지각 있는 교계의 지도자들이 만세운동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배후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사례는 많았던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시 남전교회의 교인들의 대다수가, 최대진 목사의 인격적인 면면을 두고 보았을 때에 적어도 만세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당하게 될 신분상의 불이익에 대한 개인적인 염려로 인해 의도적으로 거사참여를 기피했다고 인정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시위에 참가했던 교인들의 후손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모든 정황을 참작하건데, 최대진 목사의 돌연한 거사 불참은 거사 전날 있은 전북노회의 종료 후 비공식 만찬 모임 때에 노회원들이 당시의 노회장인 최대진 목사의 시위불참을 강력하게 권고했다고 판단되며, 이는 그의 전북 장로교계의 수장으로서의 신분과, 시위에 참여했을 경우에 닥치게 될 기독교계의 불이익을 염려한 노회원들의 강력한 만류로, 그냥 전주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거사는 치러내야 했다. 문용기 열사는 최목사의 돌연한 잠적으로 야기된 불안한 분위기를 서둘러 수습하고, 계속 거사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박영문을 통해서는 도남학교의 학생들을 동원해서 합세하게 하였다. 또한 최대위가 최대진 목사의 자리를 채우도록 하며 나이가 든 학생들은 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나누어주거나 장꾼들을 선동하는 선동조로 활약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교회로 모인 사람들은 모두 150명 가량이 되었다. 이윽고 각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한 뭉치씩 받아서 여자들은 허리춤에 남자들은 바지가랭이 속에 넣어서 댓님으로 묶고는 모두들 솜리장터로 향했다. 당일 정오에 일본 헌병대가 주재하고 있던 대교농장 앞에서 ‘독립선언선포식' 을 하기로 하였다.
남전교회의 교인들은 하얗게 하얗게 논둑길 들녘을 가로질러 동구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때, 그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보았던 한 아낙네는 하얀 뭉게구름 떼가 들녘을 하얗게 뒤덮으며 흐르는 듯, 떠가는 듯 시야에서 사라지던 가슴 뭉클한 감동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뒷날 후일담으로 전해주었다고 한다.
3. 익산 사사만세의거로의 확대
1) 솜리장터의 피맺힌 절규(4월 4일 정오)
솜리시장의 네거리에는 ‘朝鮮獨立萬歲’ 라고 빨갛게 적힌 커다란 깃발이 높은 대나무 장대 위에 매어져, 푸른 하늘을 이고 펄럭거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 문용기를 비롯한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장만준, 정명안, 정심덕, 최대위, 정찬성, 이성춘, 아홉살의 어린 유소년이던 정군덕등이 있었다. 남녀노소의 남전교인들은 장꾼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이미 아침부터 장터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선동조격인 청년 학생들이,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장꾼들에게 “오늘 정오에 시장 사거리에서 만세운동을 한다” 고 알려주면서 참가할 것을 권했다. 그러니, 솜리 시장안 사거리에 운집한 시위군중의 수는 금방 1천여명이 될 정도로 불어났다.
12시 30분경 흰색 두루마기를 걸친 기골이 장대해 보이는 41세의 가장 한 사람이 운집한 군중들의 앞에 섰다. 문용기 열사였다. 의협심으로 불타는 듯한 눈빛과 위풍당당한 자세는, 그 위세만으로도 능히 어떤 상대라도 기진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오등(吾等)은 자(慈)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에 고(告)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서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야 민족자존(民族自尊)의 정권(正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민족의 포효였다. 피가 끓는 절규요, 위대한 선언이었다. 문용기는 독립선언서를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며, 혼신의 힘을 다해 목청을 돋우었다. 군중들은 숨소리조차 낮춘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독립선언서 읽기를 다 마친 문용기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감연히 결전에 임하는 용사의 굳은 신념의 얼굴이었다. 이윽고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군중들을 휩쓸고 지나는가 싶게,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하늘을 찌를 듯한 우렁찬 함성이 솜리 장안을 뒤흔들었다. 손과 손에 들려진 태극기는 세차게 흔들리며 물결치기 시작했다. 10여년 간이나 보이지 않았던 태극기가 온 장안에서 하얗게 흔들리고 있었다. 문용기의 선창에 따라 만세 삼창을 복창하는 시위 군중들의 함성은 피에 끓고 있었다. 입추의 여지가 없는 군중들의 입에서 만세의 함성은 끊일 줄 모르고 계속 터져 나왔다. 자주독립(自主獨立)과 민족자결(民族自決)을 갈구하는 함성은 우리 민족의 환호성이요, 절규하듯 부르짖는 몸부림이었으며, 울부짖음이었다. 이 얼마나 기다려왔던 환희였던가! 10년동안이나 억눌려왔던 민족의 울분을 토해내는 포효는 산천을 뒤흔들고도 남았다.
천부적인 웅변가의 재능을 지녔던 문용기는 군중들을 향해 조국 독립의 당위성과 민족의 대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모두 행진하여 일본군의 본영이 있는 대교농장으로 갈 것을 호소하였을 것이다.
문용기 열사는 남전교회의 교인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를 선도하여 대교농장으로 향했다.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 를 연호(連呼)하면서 장터를 돌자, 시위군중은 삽시간에 수천여명으로 늘어났다. 혹, 시위행진 중에 같은 민족으로서 만세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장사를 계속하고 있던 사람들은 낭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남전교회인들이 몰려가 좌판을 뒤엎거나, 질책함으로써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강권(强勸)하였다. 그래도 반응이 없던 장꾼들에게는 북어묶음 꾸러미나 장작개피로 좌판을 두들기면서 협조할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의 솜리의 민중시위가 상당히 격렬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대목이다.
만세 시위대는 일본인이 우리 나라에 설립한 최대 규모의 농장이면서 일본군 2개 중대가 주둔해 있는 대교농장으로 진출하였다. 시위대는 맨주먹으로 되어진 비폭력적인 만세시위로 압박을 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앞에서 우리 민족의 자존과 숭고한 독립의지를 당당하게 천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2) 솜리장터의 핏물
시위대의 시야에 붉은 색조의 담벼락에 둘러쳐진 너머로 대교농장의 건물이 보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우리의 자유를 위해 맨손으로 일으킨 민중의 만세운동은 일본인들의 눈앞에서 더욱 그 기개가 충천하였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오직, 그 소리만이 온 장안을 뒤흔들고,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시위대의 위세에 눌린 일본 헌병들은 농장 안에 머문 채 문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단지, 모두들 농장의 담벼락을 사대(射臺) 삼아 시위군중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 번 터진 민중의 절규 어린 외침은 그칠 줄을 모르고 더욱 더 높아만 갔다.
그 때, 문득, 탕! 탕! 탕! 일본헌병에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시위 군중의 만세소리에 묻힌 채, 가늘게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는 연이어 서너발의 총성이 더 울리며 장안을 흔들었다. 시위대는 순간, 잠시 주춤하여 술렁거렸으나 별다른 불상사는 없었다. 일본군들이 허공에다 위협사격을 해댄 것이었다. 그러나 시위 군중의 대열이 흩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만세소리만 더욱 높아졌다. 곧이어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 를 연호하면서 일본군들이 포진해있는 대교농장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군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들은 시위군중들을 향해 실탄사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와 함께 혼비백산한 시위대의 대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보이고자 했던 민족의 비폭력을 통한 결연한 독립의지였다. 어쩌면 그같은 불상사는 예견되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총검으로 무장한 적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주둔지를 향해 맨손으로 진출하고자 했을 때에는 이미 일사대결(一死對決)의 결심으로 나섰던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총격을 당하고 땅바닥에 널부러진 사람들의 핏물이 장터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피어린 울부짖음이 온 장터를 떠돌고 곳곳에서 교인들은 다친 사람들을 부축해서 옮기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순간, 그 와중에 일본군은 총검으로 무장한 채로 장안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심지어 곤봉과 갈고리 등으로 무장한 수백명의 소방대원과 농장원들까지 투입하여 비무장의 시위군중들에게 닥치는 대로 폭행을 가했던 것이다. 특히, 그들은 곤봉이나 갈고리로 시위군중들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당시 여섯 명이 적의 실탄과 총검에 희생되었다. 맨주먹의 민중들은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이들은 남전교회의 교인들로 제일 선두에 서서 솜리민중항쟁을 이루어 낸 문용기(文鏞祺) 선생과 도남학교 학생인 박영문(朴泳文)을 비롯하여, 신덕리의 장경춘(張京春) 성도와 오산리에 살았던 박도현(朴道賢) 성도를 포함하여, 이날 시위에서 남전교회의 교인 네 명이 순국하였다. 그리고 裡里 사람인 서공유(徐公有), 이충규(李忠圭)였다.
남전교회 교인들은 대열의 선두에 서서 솜리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기에 인명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십여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일본군에게 체포된 사람만도 39명이나 되었다.
특히 대열의 앞에 나섰던 우리 남전교인들이 많이 다치게 되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남전교인들은 격분하였다. 마침내 맨주먹으로 일본군에 대항하여 격투를 벌였던 것이다. 육박전을 감행하였다. 맨 손으로 덤벼들어, 적의 총검과 곤봉과 갈고리를 빼앗고, 빼앗은 무기를 같이 휘두르며, 한 점의 두려움도 없이 그들에게 완강하게 항거하였다. 그러니 무장한 일본군들도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이다.
이에 대한 당시 일본군 헌병대의 시위상황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익산군 오산면 오산리와 남전리에서 기독교도 약 30여명이 곤봉으로 무장하고, 혹은 그 중에는 권총이나 비수를 휴대하여 헌병을 저격하고 헌병보조원을 구타하는 등의 무력시위를 했으며, 또 일부는 일본수비대를 습격했을 뿐만 아니라 헌병대에 반항하고, 일본인 점포에 난입하여 파괴함으로써, 분풀이를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보고서에는 한 사람을 적시(摘示)하여 “수모자의 1人으로서 검총의 돌격을 받은 자는 절명에 이르기까지 만세를 창하다” 라고 기록하여 보고함으로써 당시에 죽음에 이르면서도 만세를 부른, 즉사시위의 투혼을 발휘한 그 행동에 대해 일본인들이 얼마나 송연(悚然)해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당시의 희생자 가운데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특기할만한 장렬한 죽음이 있다. 즉, 순국열사 문용기 선생에 대한 죽음이다.
물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맨 몸으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만세를 외치면서 적의 총검에 희생된 모든 열사들의 죽음이 헛될 리 없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문용기 열사의 죽음은 역사에 빛날 대한인(大韓人)의 장쾌한 기상을 보여주었기에 더욱 귀감으로 삼을 만한 것이다.
만세시위가 있던 그날 문용기 열사는 대열의 제일 선두에 서서 대열을 이끌었다. 솜리시장 안의 사거리에 이르러 일본군의 총탄세례가 시작되자 대부분의 시위군중들이 몸을 숨기며 피했으나 문 열사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태극기를 더 세차게 흔들면서, 동포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자리를 지킬 것을 독려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더욱 크게 외쳐댔다.
이에 일본 헌병이 일본도(日本刀; 길이 60cm 이상이 되는 긴칼)를 빼어들더니, 문용기 열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태극기를 흔들고 있던 그의 오른팔을, 그 긴 칼-다치(太刀)로 내리쳤다. 순간, 비명소리와 함께 떨어진 그의 오른팔에선 검붉은 피가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문 열사는 골수를 쪼개는 고통을 참아내며 다시 일어섰다. 이를 악물고 왼팔로 태극기를 다시 집어들었고, 또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고통도 잊은 분노의 외침이었으리라. 그 때, 다치(太刀)가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는 열사의 왼팔 마저 잘려나가고 말았다. 열사는 그대로 땅바닥에 뒹굴었다. 그 고통을 어찌 감내하랴. 그의 주위로 선혈이 낭자하여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열사는 마지막 사력을 다해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두 팔이 잘려나간 팔뚝에선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두 눈 부릅떠 다시 소리쳤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부릅뜬 두 눈에선 핏물이 괴고 피를 뿌리며 맨 몸으로 대열의 앞으로 달려나가는 열사의 그 모습을 차마 그대로는 보고 있지 못했으리라.
열사의 그 투혼과 의분을 지금에 이르러서도 형언할 길이 없을 것이다. 마침내 일본군들은 그를 좇아 에워싸고는 총검으로 가슴을 찌르고 복부를 찌르고 옆구리를 찌르고, 그리고 총 개머리판으로 열사의 후두부를 강타하니 그대로 쓰러졌다.
문용기 열사는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면서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들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 라고, 힘겨운 소리로 외치고는, 그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장한 최후의 말이었다. 값있는 의혈이었다. 겨례의 사표가 될 행동이 되고도 남는 문용기 선생의 죽음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될 것이다. 결국, 문 열사의 다짐대로 의사(義士)의 붉은 피로, 의로운 음조(陰助)로 대한민국은 마침내 독립을 이루고야 말았던 것이다. ‘자유의 대가는 오직 눈물과 피뿐’ 일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영성에서 머슴살면서 열심히 교회에 출석했던 장경춘 열사 뿐만 아니라 박도현 열사 역시, 당시 남전교회의 교인인 동시에,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날 문용기 열사의 뒤를 따르며 목이 터져라고 만세를 외쳐대면서 시위대열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장 사거리에서 그만 최초로 시작된 적의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우리들 믿음의 선배들은 그랬었다. 남전교회의 믿음의 선진들은 그러한 질곡의 세월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얼을 이어가고자 선구적인 자세로 분투했다. 그리고 끝내는 자신을 사지(死地)로 내몰면서까지 자기 희생을 통한 신앙의 완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4. 익산 사사만세의거 그 후
문 열사가 장엄하게 산화하던 최후의 모습을 지켜본 시위군중들은 의분에 떨며 격분하여, 일부 사람들이 맨 몸으로 무장한 일본군들과 맨 손으로 격투를 감행함으로써 그들의 무기를 탈취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때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시위대는 일본군들과 대적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고 전해진다. 일본인들에게 대항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탈취한 무기로 다시 일본인들과 대적하여 싸웠던 사건은 당시로 볼 때에 매우 중대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이는 3월 3일 당시, 평남 강서교회의 원장(院場)의 장날에 있었던 사례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교회의 교인들이 주동이 된 장날의 시위에서 일본군들은 사격을 가하였고, 이로써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자 시위 군중들은 결사적으로 그들에게 달려들어 총을 탈취하여 도리어 그 일본군들을 세 명이나 타살하였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린 이들은 다시 헌병분견대가 있는 모락장(沙川市)까지 진출하여 헌병분견대를 점령하고 불까지 질렀던 사건이었다.
물론 사건 후, 일본군은 증원부대를 급파하여 모든 남자들을 체포하였다. 교회의 집사와 장로 두 사람이 현장에서 죽고, 주동자 4명은 재빨리 몸을 피해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언도 받고, 나머지 10여명은 15년의 징역형을 언도 받고 복역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참여한 대부분의 3․1운동은 순수한 만세시위 행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우리 남전교회의 독립만세 사건은 위의 평남 강서교회의 예와 유사하게 일제의 무단진압에 대한 하나의 자위권적 대응 형태로 폭력화되어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감연히 무장투쟁으로 나서게 된 사례 중의 일부라고 여겨진다.
또한 당시 남전교회를 담임하면서 이러한 상황을 목격한 부위렴(W. F. Bull) 선교사의 선교보고서 내용 중의 일부를 인용하면,
“군인들이 군중들에게 총을 쏘자 몇 사람이 죽고, 부상당한 사람들도 생겼다. 동시에 소방대원들이 군중 속으로 뛰어들며 닥치는 대로 곤봉과 갈고리(pick-axes)로 사람들의 머리를 내려쳐 많은 부상자를 냈다. 한 일본군인이 시위대의 지도자인 한 젊은이(young-man)를 연행하려고 하자, 그는 ‘나는 죄를 지은 게 없으니 갈 수 없다’고 말하면서 버텼다. 그러자 군인은 ‘만일 네가 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난 여기서 너를 당장 죽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머리를 쳐들고, 가슴을 내밀면서 ‘니가 나를 죽일테면 죽여라. 그러나 내 조국에 대한 만세소리는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인은 칼을 뽑아 그의 가슴을 찌르니 피를 쏟으며, 젊은이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다시 칼을 빼는 군인을 향해 그는 ‘네가 나를 죽인다마는,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네 나라를 벌하여 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 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던 것이다. 이 일로 모두 여섯 명이 죽었는데, 모두가 기독교인이었다.” 라고 적고 있다. 바로 그가 남전교회의 도남학교(小學校) 교사였던 문용기일 것이다.
1) 도남학교 교사 문용기(文鏞棋, 號:관제. 일명:文正寬. 1878~1919)
1878년 5월 19일 전북 익산군 서일면 관음리(現 오산면 오산리 310번지, 관음부락)에서 남평(南平)문씨 시중공파(侍中公派) 17세손으로 문재윤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실제 호적상의 이름은 문용기(文鏞棋)이나 집안에서는 문정관(文正寬)으로 불렸다고 그 후손들은 전한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병환 중의 어머님이 위중하여 백약이 무효임을 알고는 깊이 탄식하며 하늘에 기도하고 변(便)을 먹어 보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서 탕약과 함께 어머님께 드시게 하니 마침내 소생하시어 천수(天壽)를 다하시게 하였다고 한다.
특히, 어려운 가정형편을 돌보기 위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 혼자서 독학하여 漢文을 전수함으로써, 나중에 인근 부락으로 초빙되어 한문사숙(漢文私塾;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때가 스무살 때의 일이다. 그 뒤 24세 때부터 군산 영명학교의 한문교사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동시에 同 학교의 학생으로서 보통과 과정을 이수하였다. 30세가 되던 1908년 기독교계 학교로서, 처음 개교한 목포의 왓킨스중학교(後에, 영흥중학교로 改名)에 입학하였다. 이때 역시 그는 군산 영명학교에서 처럼 한문선생이면서 동시에 학생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문용기는 특히 외국어인 영어 습득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 결과 그의 영어실력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1911년, 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학교의 추천으로 함경도 갑산(甲山)에서 금광을 경영하는 미국인의 통역사로서 8년동안 근무하게 된다. 그는 갑산에서 일하는 동안 돈을 모아서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그의 제자들을 통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또 목포의 왓킨스중학교에 재학시(1908~1911), 당시 YMCA활동을 통해 전국 각지로 다니면서 애국 계몽운동을 역설하고 다니던 이승만(雩南 李承晩)박사와 목포에서 만나게 되었다. 조국에 대해 고뇌하는 비슷한 연배의 청년동지는 의기투합하여 쉽게 가까워졌으며 당시 이승만이 묵었던 여관방에서 조국의 미래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문용기 선생의 대중 연설의 웅변력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포의 한 극장에서 이승만이 주제강연을 하고 문용기 선생은 찬조로 강연을 하였었는데, 그런데 문용기 선생의 ‘우물안의 개구리’ 라는 주제의 강연이 오히려 청중들로부터 더 큰 호응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4․4독립만세운동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유금만(柳金萬, 87세, 1972년 당시 생존)노인의 증언에 따르면 문용기 선생은 웅변가로써 대중을 설득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분으로 생각되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날 장에 나왔던 많은 장꾼들이 문열사의 연설에 이끌려 시위행진에 참가하게 되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웅변력은 가히 출중했었다고 짐작된다.
그는 전라도를 떠나 함경도 갑산에 있을 당시에도 이승만과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젊은이로서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훗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가 해방 후 고국으로 귀국하였을 때, 그는 문용기 선생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선생은 고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이승만 박사는 애통해하면서 그의 뜻을 기리고자 직접 친필 비문을 내려 1949년에 4․4독립만세운동기념비를 당시 문용기 열사가 순국한 자리인 舊시장 화교학교 앞(現, 익산시 주현동 105-19)에 건립하였던 것이다.
한편, 1919년 당시 함경도 갑산에 있던 문용기 선생은 3․1독립만세운동이 거국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즉시 귀향하여 이리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나름대로 수립한 계획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어릴 적 그의 모교회요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함께 다니고 있던 남전교회를 찾았다. 담임목사인 최대진의 배려로 교회 부속학교인 도남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담임 교역자인 최대진 목사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4월 4일 솜리의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일으키고 일본헌병들의 잔인무도한 폭력으로 장렬하게 순국하니 당시 선생의 나이가 41세였다.
일본군은 유가족들이 문 열사의 시신을 인도하려는 것까지 방해하였다. 그러자 아내인 최정자 여사는 야밤에 마을 사람들과 같이 몰려가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의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또, 선열의 미망인인 최 여사는 열사가 순국할 때 입고 있던 피로 얼룩진 흰색 한복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땅 속에 묻힌 항아리에 넣어서 비밀리에 간수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탈색이 되는 기미가 있자 다시 꺼내서 최 여사의 한복치마로 싸고 다시 새가마니로 싸고 겉에는 다시 헌가마니로 싸서 창고의 대들보에 묶어 정성 들여 보관하였다. 이 일을 문 열사의 동생인 문용희씨가 같이 도와주었다고 전하면서 미망인인 최 여사는 열사의 유품인 그 혈의(血衣)를 집안의 가보로 물려줄 생각이었다고 정귀례 여사는 전한다.
그 후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비로소 옷을 꺼내서 마당의 멍석 위에 펼쳐 놓고 통곡을 하시면서 아들(문창원)과 가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번 더 의분과 감동에 떨게 하였던 것이다. 이 혈의(血衣)는 지난 1992년 문 열사의 자부(子婦)인 정귀례 여사가 독립기념사업회에 기증하여 현재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전시․보관 중에 있다.
문 열사의 자부인 정귀례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아버님(문용기 열사)과 어머님(최정자 여사)은 남전리교회를 아주 열심히 다녔지라” 라고 전하였다. 해방 후, 어느날엔가 ‘어머님이 같이 가자고 해서, 남전교회의 예배당에 함께 찾아 온 적이 있다’ 고 하였다. 그때 미망인인 최정자 여사는 예배당 안의 강대상을 양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여기에 서서도 그 분이 연설하셨었는디...” 라고 말씀하시면서 말끝을 흐리더니 끝내 눈물을 보이시더라고 며느리인 정귀례 여사는 전한다.
그 후 1992년 비로소 문 열사의 유해는 마을 뒷산의 공동묘지에서 이장 국립묘지의 독립유공자 유택에 안장되었다. 1977년 정부는 문용기 열사에게 건국공로훈장 건국포장을 추서 하였다.
선교 보고서는 또, 선교사와 성명미상의 13세 소년과의 감동 어린 대화내용도 싣고 있다. 그것은 총탄이 팔을 관통하여 구암병원에 실려 온 13세된 어린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부위렴 선교사가 그 어린 소년에게, “네가 ‘만세’를 외치면 군인들이 총을 쏠 것이라는 것을 몰랐었느냐?” 고 묻자, “알지요, 하지만 그래도 꼭 만세를 불렀습니다” 라고 소년이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년은 팔에 박힌 총알을 빼고 2주일 동안이나 심한 고통을 참아내며 치료받은 후에 선교사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네가 지금까지 겪은 모든 괴로움에 비추어 볼 때 시위의 대열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 고, 그랬더니 소년의 대답은 “아니요,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라고 말했다고, 13세의 어린 소년을 치료한 부위렴 선교사는 그의 선교 보고서에 기록해 놓고 있다. 부위렴 선교사의 선교 보고서나 많은 지역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거사에는 많은 어린 학생들이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그 중에도 도남학교 학생들을 지휘하며 대열의 선두에 섰던 도남학교 반장 박영문 열사의 의기는 대단하였다.
2) 도남학교 반장 박영문(朴永文, 1903~1919)
1903년 전북 익산군 오산면 신지리 397번지에서 아버지 박응춘과 어머니 이양삼의 2남 4녀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당시 그의 부친인 박응춘은 남전교회의 초대 교인으로서, 이미 박영문 열사가 태어나기 이전인 1901년에 부모가 모두 세례를 받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것이다.
신실한 신앙인의 집안에서 성장한 박영문은 어려서부터 예의바른 행실과 총명한 기지(奇智)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으면서, 늘 교회 안에서 생활하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주일학교를 거쳐, 1916년 당시 교회에서 운영하는 부속 도남학교에 입학을 하여 줄곧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에 정진하였다. 특히 급우들간에 신망이 두텁고 책임감이 투철하여서, 매년 급장을 도맡아서 하였다고, 그의 조카였던 박양출 장로는 전한다.
그가 14살 때인 1917년 12월 29일, 그는 담임목사인 최대진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 후, 1919년 3월, 그가 4학년 졸업반이 되었을 때, 어느 날 문득 도남학교를 찾아 온 문용기 열사와 만나게 되면서부터, 그는 줄곧 문 열사를 잘 따랐다. 문 열사가 외모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차린 박영문은 문용기 열사의 잔심부름을 도와주면서 늘 그의 곁에서 있고 싶어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박영문은 어디서든 문 열사를 보기만 하면 얼굴에 생기가 돌 정도의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문용기 열사는 공부시간 중에 가끔 일제의 간악한 행위에 대해서도 애길해 주곤 했다.
그러던 중, 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고, 추진이 되니, 열사 박영문은 더욱 신바람이 났을 것이다. 한참 혈기 왕성한 시절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만세운동을 벌인다고 하니, 그 얼마나 기쁘지 않았겠는가. 박영문은 문 열사의 뜻을 좇아 여기저기 연락을 취하고, 태극기도 만들고, 독립선언서도 만들기도 하였다.
마침내 4월 4일이 되자, 아침 일찍부터 박 열사는 서둘렀다. 물론 그의 부친인 박응춘 집사도 만세운동에 나갈 참이었지만, 문 열사는 거사준비를 위해 먼저 서둘러 나갔다. 그런데 그에겐 앳된 아내가 있었다. 집안에서 일찍 서둘러 조혼을 치르니, 결혼한지 채 6개월이 되지 않은 때였던 것이다. 그러니 박 열사를 만세시위의 현장으로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리라. 사립짝 문을 잡고 서서, 잘 갔다가 오라고 하는 새댁의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뛰어가는 박영문의 뒷모습을, 그의 아내는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간 박영문 열사는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이다.
적의 총검에 희생되면서 일제를 향해 저주했고, 절명하기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부른, 16세의 어린 청소년 박영문 열사는 그렇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그렇게 따랐던 문용기 열사와 함께 말이다.
열사의 부친인 박응춘과 어머니 이양삼을 비롯한 부락사람들이 쓰러진 그를 부여안았을 때까지도 완전히 절명하지는 않았으나, 부축하여 채 열 걸음도 못 가보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고 했다. 시신을 급히 수습하여, 지게로 지고 영성부락의 열사 집으로 모시니, 가슴이 메어져 온 동네 안에 슬픔이 사무쳤다고 한다.
현장에서 체포한 군중들을 통해서 솜리만세운동을 계획한 본거지가 오산면 남전리에 있는 남전교회인 것을 알게되자 독이 오른 일본경찰은 교회의 주동인물은 물론 목사 장로까지 모조리 검거해 들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미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일본경찰로부터 갖은 수모와 욕설, 구타 등의 폭행을 당하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주동자들과 폭력행위에 가담한 교인들은 모두 숨어버린 뒤였다. 日警들은 교회를 찾아와 만세운동을 일으킨 주동자들의 거처를 알기 위하여 탐문활동을 하는 한편 은신처를 찾기 위해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녔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주동인물인 문용기 열사를 비롯한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등은 이미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셨고, 함께 거사를 모의․계획했던 담임 목사 최대진은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주에서 돌아오지 않은 채 그대로 잠적해버린 상태였다.
또한 그 외의 주동자와 폭력시위에 가담한 나머지 남자 교인들은 모두들 몸을 피해 멀리 떨어져 있는 친척집이나 만경강 가의 무성한 갈대숲 속 그리고 강 건너 김제 땅 번드리(들)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은신해 있었다. 특히, 갈대 숲이나 솔밭 속의 검불무데기에 숨은 사람들은 몰래 가족들이 추진해주는 먹을 것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근 서너달씩 은신해 있었다고 한다.
왜경은 사모만이 목사관을 지키고 있는 교회사택 주변을 늘 배회하면서 감시하고 있었다. 시위 가담자의 집 주위에도 헌병 보조원들을 배치하여 부락사람들을 감시하였다. 평상시에도 교회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협박을 하거나 위협적인 언동으로 부락 사람들을 탄압하기 일쑤였다고 그 후손들은 당시의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후의 여파를 전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당시의 상황이 기록된 문헌을 대체로 살펴보면;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시 전북노회 대표가 ‘특별사건’으로 보고한 당시의 내용이다.
“죠션독립만셰 건으로 인야 본 로회디경 에 몃 교회 례회로 모히는 것슬 병졍이 금지으로 교인들이 각 긔 집에셔 례를 보앗오며 교역쟈와 一반 교인즁에 춍살된쟈 三인이오 百여인은 톄포되야 고즁에 잇오며 이 일노 인야 연약 신쟈의 타락 쟈도 잇오며 흉년으로 인야 교인들이 연보는 것과 활에 곤난이 막심다”
“1, 금년에 소요건으로 인야 ㅣ인전도에 크게 고난을 당엿오며, 2.. 교회에 청년들이 만히 드러왓오나 아즉 신령 신앙은 엇지 못엿오며...”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전교회의 교인들은 솜리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도 알 수 있다. 신앙생활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더욱이 목자를 잃은 양의 무리는 지향할 곳을 모르고 유리(流離)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 후유증이 얼마나 극심하였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당시 교회록이나 당회록을 보면, 1919년 1년 동안의 회록내용은 단 한줄로 “1919년 음 3월 4일 독립사건으로 목사시무를 못 보게 됨으로 해약이 됨” 이라고, 적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시찰 회록검사위원(김운식․김성식)들 역시 “검사할 것이 없소!” 라고 기록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1919년에 ‘별세한 세례교인수’ 가 노회총계표에 4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바, 이는 당시 익산독립만세의 현장에서 순국한 교인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 후, 총칼을 앞세운 일본군에게 맨 손으로 저항한 선열들의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장엄하게 순국하신 여섯 분의 순국열사들의 뜻을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하기 위해 기념비석 세 개를 세운 바 있다.
즉, 순국한 오산면 사람-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을 위한 오산면사무소 안에 있는「순국열사충혼비」, 4․4솜리독립만세운동시 순국한 열사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한 구시장 화교학교 앞에 있는 「순국열사 3․1운동기념비」, 그리고 이리 역 앞의 광장에 우뚝 서 있는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동아일보사는 1971년부터 펼쳐온 「3․1운동유적보존운동」의 첫 번째 사업으로 이리역 앞에 3․1운동 유적기념비를 세운 바 있다.
제 4 장 익산 삼일만세운동(익산사사만세의거)의 성격
1. 전북 지역의 3.1 만세 운동과의 관계성
1) 전주 지역의 3.1운동
남전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을 시작한 김인전 목사는 전주 삼일 만세 운동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3.1운동의 사전 준비를 진두 지휘할 때에도 김인전 목사의 지휘하에 서문밧교회 교직자와 서문밧교회 청년들로 한정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것은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제작에 비밀유지를 위해 몇몇 청년을 조심스럽게 선정하여 작업을 진행하였다. 또한 마지막에 연락과 행동의 인선에서 뛰어든 청년과 남녀학생들도 역시 평소 김 목사의 예배 인도에 참석하여 성경공부와 특별강의에서 민족과 나라 사랑의 정신을 강의 받았었던 교회의 청년들이었고, 그의 동생도 참여하였다. 기독교인들과 천도교가 합세한 가운데 전주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13일과 14일 이틀동안 시내 곳곳에서 계속되었다. 이러한 삼일 만세 시위의 배후에는 김인전의 역할이 있었기에 전주에서 삼일만세운동이 끝난 후 김인전 목사는 상해로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2) 군산 지역의 3.1운동
전라북도 지역에서의 3.1 독립만세 시위 운동이 첫 번째로 발기된 고을이 옥구, 군산이다. 당시 영명학교 교사였던 박연세는 남전교회에서 그의 부친 박자형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줄곳 남전(남차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후 박연세는 김제를 거쳐 군산 구암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당시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영명학교 교사였다. 그런데 군산 삼일만세운동은 바로 영명학교 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중심에는 박연세가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박연세와 남전교회에서 운영하던 도남학교 학생들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익산에서의 만세운동의 주역인 문용기는 도남학교 교사였다. 또한 도남학교 반장이었던 박영문은 문용기(문정관)의 연락책이었다. 박영문을 통해 남전교회 담임목사이며 전북독노회장인 최대진과 군산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와는 긴밀한 연락이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측의 전달책으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는 독립선언문 200장을 비밀리에 가지고 2월 26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3월 1일에 군산에 도착하였다. 모교인 군산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에게 전달하니 그는 동료 교사로서 평소 애국의 뜻을 같이하던 이두열, 송정헌 등과 대책을 협의하고 독립선언문 500매를 일차로 복사하여 기독교계에 비밀리에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교사 고석주와 개복동 교회 교인 김성은, 유희준, 구암기독병원 사무원 양기준, 유한중 등이 합세하였다. 또한 3월 2일에는 양명학교 교사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송정헌과 학생들이 협력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또한 거사일에 쓰일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3,500매를 김영후, 송기옥 등이 비밀리에 기숙사에서 등쇄하였다. 그들은 군산 독립만세운동 대시위운동 거사의 날을 군산 장날인 3월 6일로 정하였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그 계획이 탄로 나서 3월 4일 경찰 수십 명이 영명학교를 급습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박연세와 이두열 두 교사를 수갑 채워 군산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 정경을 보고 분개한 영명학교 학생들은 김윤실 교사의 지도로 군산경찰서로 달려가서 두 교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벌였으나 무위로 그쳤다. 그러나 다음날인 3월 5일 이른 새벽에 경찰이 재차 수색하자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 구암기독병원 직원들과 구암교인, 멜볼딘 여학교 학생들이 감연히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시위대는 6일 예정의 거사일을 앞당겨 5일에 군산 시내로 돌입하게 되었고, 군산교회 교인들과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독립만세” 를 외쳐 부르며 일대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렇게 하여 큰 규모의 삼일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군산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 시위운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고 3월 23일, 28일, 30일, 31일, 4월 5일에도 일어났다. 여기에는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가담하였다.
3월 23일 밤에는 군산보통학교 건물에 방화하여 시위하였다. 3월 28일에는 일본인 상가인 대화정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군산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상권을 장악하고 군산의 경제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어 군산 시민들의 반일감정이 극렬하였기 때문이었다.
3월 5일 군산 시위는 만세운동이 전북 전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북 지역 각지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일제는 군과 경찰 병력을 증파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익산에는 일본군 제 4연대 소속 병력 1개 중대를 주둔시켜 삼엄한 경비를 펼치게 했고 조선인으로 구성된 자체 경비대를 조직하였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익산에서 시위가 늦게 일어난 이유는 이같은 일본군 병력의 철저한 감시 때문이기도 했다.
2. 남전교회의 삼일만세운동(익산사사만세의거)의 성격
다른 지역에서의 삼일만세운동과 비교해 볼 때 익산지역 특히 남전교회의 3․1운동은 그 성격이 다른 지역의 삼일만세운동과 차별이 가능하다.
1) 민족 저항 운동
남전교회 3.1운동은 민족 저항 운동이었다.
남한 지역에 있는 삼일운동의 관련되어진 대표적인 유적지는 수원근교에 발안에 있는 제암리교회이다. 제암리교회에서 삼일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일본헌병은 일방적으로 두렁바위 마을의 기독교 주민 23명을 집단 학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익산 남전교회의 3.1운동은 특히 일제의 정치∙경제∙사회적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의 성격이 강하다고 하겠다. 이는 군산과 함께 익산이 한말 이후 전개된 일제의 경제적 수탈 과정에서 개발된 지역이자 그 피해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다. 1919년 당시 이리의 인구는 일본인들이 더 많이 살았을 정도로 일제의 침략 행위가 강했던 만큼 그에 대한 저항도 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익산은 일본인들에 의해 개간되고 일본인 거류지 변모하면서 일본의 한국 진출과 침략의 실상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도시가 되고 말았다. 결국 이들에게 삶의 기반을 빼앗긴 익산의 토착민들은 만세운동을 통해 저항과 독립의 의지를 표출하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4 만세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한말 의병운동의 맥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2) 농민 저항 운동
농민저항운동적 성격이 강하다.
4월 4일의 만세 시위는 한말 이후 농지 개간을 빌미로 일본인들에게 농지를 수탈 당하고 소작으로 전락한 익산 지역 농민들의 분노와 저항이 표출된 것이다. 이는 만세 시위대가 익산지역의 대표적인 일본인 농장인 대교농장을 목표로 삼았다는데서 잘 드러난다. 지금도 남아 있는 대교농장의 거대한 창고 건물은 일제시대 이 지역 농산물 수탈의 생생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사사만세 시위가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던 것은 만세시위가 장날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당시 이리시장은 호남지역에서도 큰 장이었고 여기에 장을 보러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제 오산 황등 함열 춘포 금마 등지에서 살고 있었던 농민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4․4만세 시위를 주도한 남전교회 교인들을 비롯하여 시위에 참여했던 시위 군중들은 대부분 장을 보기 위해 온 농민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드디어 일제의 교활한 수법으로 농지를 잃고 소작으로 전락한 농민들의 분노가 4․4 만세시위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4 시위는 탐학한 집권 세력에 저항한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맥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기독교 저항 운동
기독교 저항 운동이었다.
기미년은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온 지 불과 20여년이 지났을 때였다. 한국에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지 불과 10여년이 지난 1910년대에 항일 민족운동에서 기독교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해 온 것이 틀림없다. 기독교인들은 진취적 사고방식과 전국적인 조직력, 변함없는 꾸준한 신앙심과 나라 사랑의 정신으로 일관하여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독립협회 운동, 신민회, 조선국민회 등 기독교 민족운동 가운데서 자주 독립을 쟁취하려는 현세적 실천성과 신앙관을 보였을 뿐 아니라 3.1 운동에서도 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 하(下)권에도 보면 삼일만세운동으로 인해 피해 되어진 교회를 기록하고 있다.
환란부분에 보면
“1919년(기미) 삼일운동이 시작된 후 교회 중 직원과 교인과 학생의 참여가 다한데 익산군 남전교회에는 문정관 박영문 장경춘등 삼인은 피해되고 목사 최대진은 출외사직하고 서천군 종지동교회에는 장로 도성열이 수감되고 경관은 기허간 예배를 금지하였으며 옥구 구암리교회에서는 장로 박연세와 교사 이두열, 김수영, 김인묵과 악생 십여인과 군산부 개복동교회에서는 교인 김성은 김지선, 서희 홍종의 전종식등이 피해되었고 전주서움외교회에서는 목사 김인전은 상해에 주하였다가 해지에서 별세하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기록은 3.1만세운동이 끝나고 10여년 뒤 1928년도에 기록된 것으로 1919년에 일어난 전국 삼일 독립만세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특이한 것은 3.1만세운동이 끝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그 때까지도 3.1운동으로 인해 많은 피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는 이 일을 잊지 않고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로 제암리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그 일로 인한 휴유증으로 교회의 시련은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익산 남전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3.1운동으로 인한 피해 상황을 총회 기록으로 보면 기미년의 활화산이 타는 만세시위가 끝날 무렵 1919년 10월 4일에도 열린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제 8회, 평양신학교에서 모임)는 서울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증경총회장 김선두, 양전백 목사를 위시하여 증경서기 함태영, 전도국 사무국자인 길선주 등에게 총회가 편지로 위문하기로 결의한 적이 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3.1운동으로 환난 중에 있는 동포를 위하여 한 주간을 기도주간으로 정하고 전 교회가 기도하기로 하였다.
그 후 1년 후 1920 10월 2일에 열린 제 9회 총회 (서울 안동 예배당에서 모임)에서도 역시 서울 서대문 감옥에 3.1운동 관계로 수감중인 목사와 장로들에게 위문편지를 하기로 결의하고 각 지역마다 옥에 갇혀 고생하고 있는 믿음의 형제와 자매를 위해 기도 운동을 계속할 것을 결정하였다.
3.1 운동 당시 기독교계의 손실 상황
파괴된 예배당(반파, 완파)수 |
80여 동 |
교회 재산상 손해액 |
30,000달러 |
시위 참가로 일단 구급된 교인 |
3,428명(교역자 244명) |
삼일운동관계자료
만세운동시위 집회수(1919년3월-5월) |
1,542회(대규모는 340회) |
시위운동에 동원된 인원 |
2,020,000명 |
만세운동시위지역(전국218개군중) |
212군 |
3.1운동 관계 사망자와 상해자 |
사망자-7,509명, 상해자-45,000여명 |
피검된 자(총인원 190,525명 중) |
기독교인 17.6 % 3,426명 |
체포된 인원의 종교별 구분 |
기독교인 - 3,426여 명 |
천도교인-2,283명 유교인-346여명 불교인 - 220여명 미상-390여명 무종교인 - 9,304여명 | |
3.1운동에서의 기독교인 역할(총인구 1,600만중 기독교인은 그 15%인 240,000여명) |
주동세력이 뚜렷한 지역 311처 중 78-120개 지역 |
기독교인 동원 인원은 전체 동원 인원의 25%-38% |
삼일운동으로 인해 기소된 인원 일람
단체 |
기소자 계 |
기 독 교 인 |
불교 |
유교 |
천도교 |
시천 | ||||||
장로회 |
감리교 |
조합교 |
불명 |
천주교 |
기타 |
계 |
72 |
11 |
1,156 |
2 | ||
인원 |
6,417 |
1,154 |
290 |
3 |
96 |
18 |
1 |
1,562 |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3∙1운동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모의 단계로부터 대중 투쟁 단계에 이르기까지 종교 저항 운동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이 철저하게 종교(천도교∙기독교∙불교) 대표들로 구성되었다는 점과 그 중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각 종교 기관과 조직이 동원되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특히 익산의 4․4 만세의거는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진 삼일만세운동이었다.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 세력이 연대하여 되어진 연합 시위가 아니었다. 3월 10일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한 만세시위를 준비하였지만 사전에 발각이 되었다. 그리하여 4․4 만세 시위는 남전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이 치밀하게 역할을 분담하고, 시위 준비물까지 준비함으로 일본군 헌병대 1개 중대가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던 익산 한복판에서 성공적인 시위를 전개할 수 있었다.
특히 시위 현장에서 문용기를 비롯한 기독교인 4명이 희생됨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십자가’ 를 지는 민족 사랑을 구현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크다 하겠다. 한말 이후 많은 기독교인들이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투쟁함으로 기독교가 국권 회복과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 구원의 종교로 인식되었는데 3․1운동을 통해 그러한 인식이 더욱 확고해졌음은 물론이다.
3. 익산 삼일만세운동(익산 사사만세의거)의 역사적 의의
1) 익산 삼일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
기미년 4월 4일에 천지를 진동시킨 솜리장터의 돌연한 만세소리와 하늘을 휘젓는 태극기의 아우성과 그리고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흰색의 물결은, 억눌렸던 가슴속에서 분출되는 대한독립만세 소리와 함께 천지를 흔들며 진동시켰다. 일본군경은 맨 손으로 독립을 요구하며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냥하여 사격을 가했다. 총검으로 찌르고, 곤봉으로 때리고, 갈고리로 찍어대며, 무자비한 살육을 시도하였다. 대한민국 어느 곳 어느 지역에서도 우리민족은 하나같이 똑같은 소리를 외쳤다. 그리고 앞을 다투어 목숨을 바쳤다.
죽음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앞에서 넘어지면 뒤에서 뛰쳐 일어났다. 일본은 분투하고, 장렬하게 희생한 지사(志士)들을 향해 많은 군경을 동원하여 살육을 자행하였다. 총과 검으로 풀 베듯 사람을 쏘았고 찔렀다.
각국의 여론은 일제히 격앙되어 저들의 만행과 폭력을 세계에 철저하게 밝혔다. 하세가와(長谷川)는 깃발을 거두고 도주해 버렸다. 일본 사회의 언론들마저 과거의 논조(論調)를 고쳐 동화의 불가능을 밝혀 주장하였고, 일본 정부의 실책을 공격하였다. 어떤 者는 자치를 말하기도 하고, 어떤 者는 독립을 허용하자고 했다. 이에 일본정부는 적어도 표면상으론 무단정책을 유화정책으로 바꾸고 말았던 것이다.
4․4 익산독립만세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인 의의는
첫째, 다른 지역의 만세운동에 비해, 사전에 치밀하고도 철저하게 계획되어 그대로 실행된, ‘민족운동’ 의 측면에 있어서 성공적인 시위였다는 것이다.
둘째, 한 농촌교회인 남전교회의 150여명의 신자들과 교회 부속학교인 도남학교 학생들이 주동하여 일으킨 비폭력적 시위사건으로써, 독자적인 운동노선을 택해, 4월 4일 솜리시장의 장날에 시위를 유도(誘導)하였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수천 여명에 가까운 장터의 사람들이 대동 단결하여 일으킨 만세사건이었다.
셋째, 농촌의 개(個)교회에서 주동한 소규모의 시위가 촉발되어 1만여 명의 대규모 시위대로 확대시켰으며, 시위현장에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는데, 그들이 대부분 교인이라는 사실이 다른 지역에서의 3.1운동과는 차별된다.
넷째, 일본군경의 총격과 폭력이 난무함으로써 만세시위가 매우 거세고 격렬했으며, 무차별로 당하던 교인들 중 일부가 나중에 자위권적 대응의 형태로, 맨 손으로 일군경(日軍警)에 대항하였고 그들의 무기를 탈취하고, 그들과 유혈충돌을 일으킴으로써 무장투쟁의 형태로까지 확산되기도 하였다.
또한 유난히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있던 익산땅, 솜리시장에서의 노도와 같은 만세시위는 日人들에게 大韓人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결국, 익산 남전교회의 만세운동을 통해서, 익산을 비롯한 인근의 우리 대한인들이 민족의 자긍심에 있어 비로소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흰옷을 입고 몸 속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익산 구시장으로 향했던 1919년 4월 4일의 남전교회 교인들의 모습이 오늘도 재생되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4․4 만세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 5 장 결 론
익산사사만세의거는 민족적으론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일어선 구국 해방 운동이었다. 교회사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성전(聖戰)운동으로써의 4․4 솜리독립만세운동은 비폭력에 의한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저항정신과 고난의 세대를 극복하고 전진하고자 하는 신앙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민족의 고난의 역사 속에서 경험된 그 의미를 밝혀 하나님의 뜻을 오늘 이 시대에 실천하고자 하는 실천운동이었다. 또한 19세기 지배체제의 모순으로 비롯되어 절망과 질곡에 빠져 있던 민중들이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농민 민중의 혁명을 기도한 동학농민혁명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운동이었다.
한 농촌교회의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열화와 같이 일어난 4․4 솜리민중항쟁의 그 정신은, 당시의 식민시대의 암울한 터널을 지나 오늘의 이 시대를 관통하고 다시 후대에 이어질 삶의 지표이자 유산이며 이 익산벌의 밑거름이 되어야 할 것이다.
3.1운동은 신분과 계급, 지역과 종파, 이념과 세대간의 차이를 넘어 한국 민족이 독립이라는 한 단어 아래 뭉쳤던 우리 역사상의 최대의 사건이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한 민족은 강제 합방후 일제의 무단 통치와 민족말살 정책을 붕괴시켰다. 민족독립 역량을 내외에 과시할 수 있었으며 오늘 날 대한 민국의 정통성의 원천이 된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전의 모든 민족 운동이 삼일독립만세운동 통합된다고 본다.
그 이후의 모든 민족운동이 여기에서 연원 한다는 의미에서 3.1운동을 우리 역사의 하나의 분수령으로 본다. 그리고 익산 4.4만세운동은 그 중심에 우뚝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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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열(문용기 열사의 조카), 자택 방문 대담 증언 채록 : 1998년 1월.
박양출(박영문 열사의 조카), 자택 방문 대담 증언 채록 : 1998년 2월.
최재희(최대위의 딸), 제보내용 채록 : 1998년 2월.
정군덕(만세사건참여자), 대담 증언 채록 : 1998년 2월이후(5회).
정용희(만세사건 참여자 후손), 대담 증언 채록 : 1998년 2월이후(5회이상).
그외 비문 기록
◇ABSTRACT◇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MARCH 1, 1919 INDEPENDENCE MOVEMENT IN IKSAN
- Focused on Namjeon Church -
Chong In
Major in Historical Theology
Dissertation for Doctor of Ministry
Californ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The March 1, 1919 Independence Movement was the biggest event ever in Korean history which served as a vital momentum for Korean people to converge into the cause of national liberation beyond the gaps of social status, classes, regions, religious sects, ideologies and generations. Throughout this movement, the Han (Korean) people could succeed in effectively counterattacking the Japanese colonial policies of military rule and ethnic cleansing, showing off internally as well as externally the national potential for independence, and leading ultimately to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Shanghai, China which gave the birth to the legitimacy of today's Korean government. Besides,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was a turning point in our history in that all sorts of national movements could be incorporated into it and all other national movements thereafter were originated from it.
Since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has been viewed as nationwide mobilization, its scope and object haven't been limited to specific areas. This was the reason that the emphasis of most studies on the movement was placed on its national scale, which, in turn, motivated most studies to be conducted comprehensively. The problems of such comprehensive studies are that, first, sufficient researches couldn't have been done on the movements made regionally and on how they were inherited, developed and sublimated, and, second, some of historically significant facts couldn't be reflected in the studies due to failure of observation from the event- and person-oriented point of view.
One of the representative cases in this sense was 'April 4 Patriotic Uprise in Iksan' initiated mainly by the members of Namjeon Church on Apr. 4, 1919. The movement by Namjeon Church obviously stood out with its historical significance among other independence campaigns raged in different areas.
The aim of this paper is, therefore, to excavate the historical meaning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in Iksan, with spotlight beamed on Namjeon Church especially.
Chapter 1 constitutes the introductory part describing how studies on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have hitherto been conducted and what are their implications.
Chapter 2 deals with the geographic and historical characters of Namjeon area, giving information about how it was situated. First of all, it is described how and when the Christianity was introduced to this area and how much damages by the Japanese persecution there were until before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In this context, the activities of missionaries dispatched from Southern Presbyterian Churches of America and their influences on this area are also stated.
Chapter 3 details the processe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by Namjeon Church. It is historically meaningful to review the activities of Namjeon Church members as revealed during the April 4 Patriotic Uprise in Iksan.
Chapter 4 describes the characters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in Iksan, interpreting from historical viewpoint its unique stand in the relations with movements of other areas.
Chapter 5 calls up the historical significance and importance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in Iksan and introduces the contents of epitaphs to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found scattered around Iksan area, documents and records witnessing the origins of the movement as well as proceedings of the project underway to commemorate the movement. Proposals to the Christian world are also added.
The April 4 Patriotic Uprise in Iksan was a move to liberate and save the country from the Japanese colonial rule. From the viewpoint of Christian history, it was a holy war raged in a series of belief campaigns to construct the God's world based on the spirit of non-violence and resistance pursuing liberty, independence and progress as a means of surviving the generation of difficulties. It was also a campaign to practice the will of the God in this system of the world by emphasizing the significance of what was experienced in the history of national persecutions.
◇ 부록 목차 ◇
부록1. 익산지역 3.1운동 기념비문
1) 순국열사의 추모비문
(1) 순국열사비
(2) 순국열사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충혼비
2) 삼일운동 기념비문
(1) 삼일운동 기념비
부록2. 남전교회가 낳은 우국지사들
부록3. 만세시위와 관련된 중요기록
부록4. 익산 삼일만세운동 기념사업의 추진내용
부록5. 기독교계를 위한 제언
부록 1. 익산지역 3.1운동 기념비문
1)순국열사의 추모비문
(1) 「순국열사비」
4․4솜리독립만세운동의 시위 현장인, 舊 시장의 사거리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 위치(現, 전북 익산시 주현동 105-19, 화교학교 담장 옆)한 기념비.
碑文;
인류 평등의 대의를 밝힌 전 민족적 항쟁의 첫걸음이요, 조국의 독립을 사해에 선포하여 민족불멸의 정의를 내세운 기미 3·1운동은 우리 청사에 빛나고 있도다. 단기 4252년 3월 1일 선열 손병희 선생 등 33인이 우리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한국의 독립국임과 우리 겨레의 자유민임을 세계 만방에 외치자, 경술 실국(失國) 이래 자유를 빼앗기고 국가를 잃은 백성의 비애와 울분은 화산과 같이 터져, 독립만세의 소리 지축을 흔들며 태극기의 물결 하늘을 가리울 때, 우리 이리에서 문용기 선생,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서정만 제의사께서 이에 호응하여 동년 4월 4일 이리시장에서 성거(聖擧) 지휘하시던 중, 포악한 왜적의 총검에 무찔리어 이 땅에서 장렬한 순국의 질을 떠나셨으니, 아아, 거룩하다! 품으신 이 뜻 3천만 민족의 빛이 될지며, 장하도다! 밞으신 이 길 우리 겨례의 거울이 되오리다. 위대한 선열의 흘리신 의혈의 값은 37년 후 오늘에 당당한 대한민국으로 자유의 독립을 다시 찾게 되었도다. 이에 우리는 선지에 이 비를 세워 자손만대의 추모의 표가 되도록 하노라. 檀紀 4282(1949?)年 4月 29日 <裡里府民 一同 立>
- 雩南 李承晩 書.-
(2) 「순국열사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충혼비」
4․4솜리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해 장렬하게 순국한 열사들의 거주지였던 익산군 오산면 면사무소 區內(정문 입구에서 左측)에 있는 충혼비
碑文;
반만년 역사를 갖인 문화민족으로셔 왜적의 폭압으로 민족적 대치욕인 경술합방을 당한지 10개성상 와신상담하다가 기미년 3월 1일 손병희 선생 等 33人이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대한 독립선언을 전세계에 선포하매 문용기 열사는 동년 3월 4일 이리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지휘하시다가 무도 폭학한 왜적의 총검에 장열한 순국을 이루시고 동지 박영문, 장경춘 양 열사도 적탄에 희생하셨다. 그 철혈같은 단심은 삼천만 민족의 거울이 될 것이며 그 일월같은 충의는 천추만세에 빛나리라. 大韓民國 28年 3月 4日 己未 3·1獨立 記念 五山面民 大會. 竪
2)삼일운동 기념비
(1)「三․一운동 기념비」
4․4솜리독립만세운동 당시 최초에 집결하여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던 당시 솜리역 앞의 광장에 세워진 기념탑
碑文;
1919년의 3․1만세는 한일합방에 항거하는 통분한 함성이요. 자유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비상한 절규요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국권을 유지 계승하려는 당당한 주장이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이 한덩어리로 뭉쳐진 거대한 불길의 폭발이었다. 그러므로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번저 하늘이 뻐개지고 땅이 흔들릴 듯한 맹렬한 기세였다. 이러한 정당한 평화적인 궐기에 대하여 왜적의 탄압은 어떠하였든가 잔인하고 악독한 살육과 형벌이었다. 이 해 4월 4일은 우리 솜리에서는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서정만 등 여러 의사가 장터에 모인 수만명의 군중 앞장서서 이 태극기의 물결을 지휘하던 중 무자비한 왜적의 총칼아래 장렬한 순국의 영령이 되고 말았다. 이 숭고한 3․1정신을 이어받아 창간한 동아일보사는 유서 깊은 이곳에 이 기념비를 세워 그 거룩한 정신을 만대의 후세까지 길이 받들어 드높이려 한다. (1971년 8월 15일 동아일보사)
부록 2 남전교회가 낳은 우국지사들
(1) 최대진 목사
최대진 목사는 남전교회에서 아주 열성적으로 사역을 감당해 나갔으며, 특히 교인들에게 ‘출애굽’ 말씀을 통해 민족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자주독립을 위한 민족 역량을 증진시키는 데에 역점을 두었던 것으로 선배 교인들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4.4 익산 독립만세운동을 문용기 열사와 함께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진행시켰던 담임목사로서 만세운동의 형장에 참여할 수 없었던 전북노회장으로서의 공적인 입장과 남전교회의 교인들에 대한 개인적인 죄스러움, 아울러 사건의 주모자로서 일본경찰의 계속되는 추적을 벗어나기 위해 남전교회의 거사이후 그대로 남전교회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1920년 4월, 최대진 목사는 제 6 회 전북노회에 정식으로 사임서를 제출하였다.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는 남전교회의 만세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출외사직(出外辭職)’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태의 심각성을 대략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러한 최대진 목사의 당시 입장과 아주 흡사한 경우가 있었으니, 바로 전주 서문밧 교회의 김인전 목사의 경우다. 김인전 목사 역시, 3월 16일에 있은 전주 만세운동의 적극적인 후원자로서 배후에서 기전여학교와 신흥학교가 주도한 시위가 성공할 수 있도록 협력하였던 것이다. 두 학교의 주동인물이 모두 서문밧 교회의 교인이었다는 점도 유사한 점이다. 결국 김인전 목사는 이 사건으로 인해,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日警의 눈을 피해, 바로 중국의 상해로 망명함으로써, 목회생활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아 독립운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따라서 그는 3월 16일 후에 잠적함으로써 4월 2일 서문밧교회에서 있은 제4회 전북노회 때부터 줄곧 불참하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9월에 있은 제5회 전북노회에서 그에 대한 서문밧교회의 사면청원이 허락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최대진 목사 역시, 솜리사건 후에 주모자로 여겼던 그를 잡으려는 日警의 눈을 피해 그대로 잠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는 1년 뒤인 1920년 4월 6일 제6회 전북노회에 사면을 청원하고, 노회는 이를 수락하였다.
그리고 1920년 12월, 그는 서울의 묘동교회에서 목회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활발한 대외활동을 시작한다. 즉, YMCA 주최의 강연회에서 강사로 활동한다. 각 교계의 기관지를 통해서 문필활동과 더불어 보다 발전적인 목회활동을 하였다. 특히 1922년엔 경충노회의 부회장으로 피선되어 안정적인 목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4년 최 목사에게 직접적인 귀책사유는 없었지만 묘동교회의 교인들끼리의 내분으로 인해 그는 사임서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1924년 추운 겨울 먼 땅 북간도로 발길을 옮겨 동불사교회(銅佛寺敎會)에서 목회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9년 동안이나 계속된 북간도땅에서의 최대진 목사의 목회활동은 교회의 개척과 노회의 개혁활동으로 집약될 수 있다.
1927년에 동만노회의 노회장으로 피선되어 봉사했으며 후엔 노회의 개혁을 위해 활동하면서 ‘조선예수교 개혁동맹’ 을 결성, 급진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끝내는 포기하고 말았으며, 결국은 자신이 결성한 개혁동맹을 탈퇴하였다. 그리하여 그동안 자신의 황금기를 바쳐 헌신하고 봉사했던 머나먼 땅 북간도를 미련없이 떠나고 말았다.
1933년 7월, 최대진 목사는 다시 전북의 군산으로 돌아왔다. 1934년 7월의 제 28회 1차 임시노회에서 그는 부위렴 목사와 함께 군산동부교회의 위임목사로 임명되어 안정된 목회생활을 해 나갔다. 그러나 1938년에 들어서면서 교인들과 목회자와의 사이에 권징(勸徵)문제로 불화가 야기됨으로써 그 직임을 사임하고 말았다.
그런 최대진 목사는 1939년 8월의 제33회 임시노회에서 전북노회의 전도목사로 임명받고, 위임받은 진안, 무주, 장수 3개 郡의 산악지대를 전전하면서 산골 구석구석의 교회들을 돌보고 다녔다. 그러나 62세의 노구를 이끌고, 산간지방의 교회를 보살피고 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렇게 기골이 장대하고 강직한 성품의 최대진 목사도 병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1940년 11월의 임시노회는 그의 전도목사직 사임요청을 수락하였다.
그는 전주로 옮겨 와 살면서 치료와 요양에 힘을 쏟았으나 고난으로 점철된 38년 동안의 목회자의 사명을 끝내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가 1942년 6월 3일이었다.
(2) 문용기(文鏞棋, 號:관제. 일명:文正寬. 1878~1919)
1878년 5월 19일 전북 익산군 서일면 관음리(現 오산면 오산리 310번지, 관음부락)에서 남평(南平)문씨 시중공파(侍中公派) 17세손으로 문재윤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실제 호적상의 이름은 문용기(文鏞棋)이나 집안에서는 문정관(文正寬)으로 불렸다고 그 후손들은 전한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병환 중의 어머님이 위중하여 백약이 무효임을 알고는 깊이 탄식하며 하늘에 기도하고 변(便)을 먹어보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서 탕약과 함께 어머님께 드시게 하니 마침내 소생하시어 천수(天壽)를 다하시게 하였다고 한다.
특히, 어려운 가정형편을 돌보기 위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 혼자서 독학하여 漢文을 전수함으로써, 나중에 인근 부락으로 초빙되어 한문사숙(漢文私塾;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때가 스무살때의 일이다. 그 뒤 24세 때부터 군산 영명학교의 한문교사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동시에 同 학교의 학생으로서 보통과 과정을 이수하였다. 30세가 되던 1908년 기독교계 학교로서, 처음 개교한 목포의 왓킨스중학교(後에, 영흥중학교로 改名)에 입학하였다. 이때 역시 그는 군산 영명학교에서 처럼 한문선생이면서 동시에 학생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문용기는 특히 외국어인 영어 습득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 결과 그의 영어실력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1911년, 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학교의 추천으로 함경도 갑산(甲山)에서 금광을 경영하는 미국인의 통역사로서 8년동안 근무하게 된다. 그는 갑산에서 일하는 동안 돈을 모아서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그의 제자들을 통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또 목포의 왓킨스중학교에 재학시(1908~1911), 당시 YMCA활동을 통해 전국 각지로 다니면서 애국 계몽운동을 역설하고 다니던 이승만(雩南 李承晩)박사와 목포에서 만나게 되었다. 조국에 대해 고뇌하는 비슷한 연배의 청년동지는 의기투합하여 쉽게 가까워졌으며 당시 이승만이 묵었던 여관방에서 조국의 미래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문용기 선생의 대중 연설의 웅변력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포의 한 극장에서 이승만이 주제강연을 하고 문용기 선생은 찬조로 강연을 하였었는데, 그런데 문용기 선생의 ‘우물안의 개구리’ 라는 주제의 강연이 오히려 청중들로부터 더 큰 호응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4․4독립만세운동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유금만(柳金萬, 87세, 1972년 당시 생존)노인의 증언에 따르면 문용기 선생은 웅변가로써 대중을 설득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분으로 생각되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날 장에 나왔던 많은 장꾼들이 문열사의 연설에 이끌려 시위행진에 참가하게 되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웅변력은 가히 출중했었다고 짐작된다.
그는 전라도를 떠나 함경도 갑산에 있을 당시에도 이승만과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젊은이로서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훗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가 해방 후 고국으로 귀국하였을 때, 그는 문용기 선생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선생은 고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이승만 박사는 애통해하면서 그의 뜻을 기리고자 직접 친필 비문을 내려 1949년에 4․4독립만세운동기념비를 당시 문용기 열사가 순국한 자리인 舊시장 화교학교 앞(現, 익산시 주현동 105-19)에 건립하였던 것이다.
한편, 1919년 당시 함경도 갑산에 있던 문용기 선생은 3․1독립만세운동이 거국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즉시 귀향하여 이리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나름대로 수립한 계획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어릴 적 그의 모 교회요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함께 다니고 있던 남전교회를 찾았다. 담임목사인 최대진의 배려로 교회 부속학교인 도남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담임 교역자인 최대진 목사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4월 4일 솜리의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일으키고 일본헌병들의 잔인무도한 폭력으로 장렬하게 순국하니 당시 선생의 나이가 41세였다.
일본군은 유가족들이 문 열사의 시신을 인도하려는 것까지 방해하였다. 그러자 아내인 최정자 여사는 야밤에 마을사람들과 같이 몰려가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의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또, 선열의 미망인인 최 여사는 열사가 순국할 때 입고 있던 피로 얼룩진 흰색 한복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땅 속에 묻힌 항아리에 넣어서 비밀리에 간수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탈색이 되는 기미가 있자 다시 꺼내서 최 여사의 한복치마로 싸고 다시 새가마니로 싸고 겉에는 다시 헌가마니로 싸서 창고의 대들보에 묶어 정성들여 보관하였다. 이 일을 문 열사의 동생인 문용희씨가 같이 도와주었다고 전하면서 미망인인 최 여사는 열사의 유품인 그 혈의(血衣)를 집안의 가보로 물려줄 생각이었다고 정귀례 여사는 전한다.
그 후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비로소 옷을 꺼내서 마당의 멍석 위에 펼쳐 놓고 통곡을 하시면서 아들(문창원)과 가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다시한번 더 의분과 감동에 떨게 하였던 것이다. 이 혈의(血衣)는 지난 1992년 문 열사의 子婦인 정귀례 여사가 독립기념사업회에 기증하여 현재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전시․보관 중에 있다.
한편, 문용기 열사와 최정자 여사와의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카들 중에서 양자를 입양하여 代를 잇게 하니 그가 문창원(1980년 사망)이었다. 현재 문열사의 子婦이면서 당시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문 열사의 장렬한 최후를 목격한 천도교인 정홍근의 딸인 정귀례 여사(당 83세)는 현재 서울의 아들 집(종로구 청원동 청아A.P.T. 6동 110호 거주)에 기거하고 있으며 슬하에 모두 8명의 자식들을(아들 4명, 딸 4명)을 두었다.
문 열사의 자부인 정귀례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아버님(문용기 열사)과 어머님(최정자 여사)은 남전리교회를 아주 열심히 다녔지라” 라고 전하였다. 해방 후, 어느날엔가 ‘어머님이 같이 가자고 해서, 남전교회의 예배당에 함께 찾아 온 적이 있다’ 고 하였다. 그때 미망인인 최정자 여사는 예배당 안의 강대상을 양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여기에 서서도 그 분이 연설하셨었는디...” 라고 말씀하시면서 말끝을 흐리더니 끝내 눈물을 보이시더라고 며느리인 정귀례 여사는 전한다.
그 후 1992년 비로소 문 열사의 유해는 마을 뒷산의 공동묘지에서 이장 국립묘지의 독립유공자 유택에 안장되었다. 1977년 정부는 문용기 열사에게 건국공로훈장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ㅇ‘문용기’와 ‘문정관’ 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구별하여, 일부 문헌에 보고하고 있는데, 이는 그동안 잘못 인식되어 온 것이다. 두 이름은 한 사람의 이름(異名同人)으로서, 실제 호적상의 이름인 문용기와 집안에서 불리던 문정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그의 후손들의 증언 뿐만이아니라, 1919년 당시 남전교회에서 그를 부르던 이름이 ‘문정관’ 이었었다고 원로장로들의 증언이다. 또한 오산면 사무소에는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순국열사비가 있다. 그런데 조선예수교 장로회 사기 하권의 기록에 보면 환란편에 삼일운동의 피해자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특별히 익산군 남전교회 문정관 박영문 장경춘은 피해되고 목사 최대진은 출외 사직한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문헌상에 나오는 문정관과 문용기가 동일인물임은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ㅇ이리만세운동 당시 문용기 열사가 군산의 ‘영명학교 교사’ 였던 것으로 모든 문헌에 보고되고 있는데, 이는 그 근거가 불확실하다. 1919년 이리 만세운동 당시 유소년으로 참가했던 본 교회의 장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문용기 열사는 남전교회 부속 도남학교의 교사였다는 것이다. 문 열사의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그는 독학으로 한문을 수학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근 동리의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쳤으며, 비로소 1901년인 24세에 군산 영명학교에 한문교사로 들어가면서, 동시에 보통과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것이 당시에는 가능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는 군산 영명학교에서 과정을 끝내고, 1908년 30세 때에 목포의 왓킨스중학교(後, 영흥중학교로 改名)에 제 1 회로 입학하게 된다.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역시 그는 군산 영명학교에서 처럼, 한문선생이면서 동시에 학생의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3년의 과정을 마치고(1911년 6월 15일), 1911년 바로 함경도 갑산의 금광(金鑛)에서 미국인 통역사로서 8년간을 근무하게 된다. 그러면서 부인과 어머니는 계속적으로 남전교회에 출석하였고 문정관도 이곳에 오산지역에 있게 되면 꼭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귀향을 하게 되었으니, 일정상으로나, 당시 군산 영명학교의 상황으로 볼 때 영명학교 교사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즉 군산에서의 시위는 사전에 영명학교 교사나 학생들이 체포․구금되어 있었고 만세 시위로 인하여 영명학교 교사는 물론 학생들까지 日警들로부터 감시받고 있는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면 영명학교 교사였다는 사실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즉 문 열사가 삼일운동 당시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봉직하게 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미 드러난 내용으로도 문 열사가 3월 5일의 군산만세사건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정확하다. 왜냐하면 4월 4일 솜리만세사건과의 간격은 불과 한 달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임시로 학생들을 가르쳤었다는 편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당시 본 교회의 교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문용기 열사는 당시에 남전교회의 예배당 강대상에 서서 교인들을 대상으로하여 강설을 한 적이 있고, 도남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결국 그 남전교회의 교인들과 도남학교의 학생들이 솜리만세사건의 주역이 되었으며, 그 결과 교인 2명과 학생 2명이 희생되고, 많은 교인과 학생들이 다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 박영문 학생은 졸업반이면서 학교 급장으로서 문용기 선생을 철저하게 믿고 따랐다. 문용기 선생의 지시로 거사준비에 심부름꾼 역할을 도맡아 하였다고, 그 후손들은 증언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문용기 열사의 선도하에 남전교회의 교인들이 주도적으로 나선 4․4솜리독립만세운동의 주도적인 인적 구성요인을 보더라도, 당시 문용기 열사와 남전교회 그리고 도남학교가 관련된 의미만은 약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여건과 정황을 고려해 볼 때에, 문용기 열사는 당시에 도남학교 교사였음이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정관이 남전교회 교인이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만 이를 도남학교 교사였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도남학교 내부의 문건이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또 한편으론, 그를 군산 ‘영명학교 교사’ 라고 언급하면서, 담당했던 과목에 대한 문헌 기록들이 가지각색이라는 것이다. 예를들면 ‘한문교사’, ‘수학교사’, ‘의학교사’, ‘영어교사’ 등등으로 보고되어 있어, 이 역시 신뢰성을 잃게 하는 부분이다. 열사의 거사 당시의 영명학교 교사직에 대한 의문을 전화를 통해 정귀례 여사께 문의한 결과 ‘그 부분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는 답변을 들었다.
ㅇ솜리만세운동 당시 문용기 열사의 순국 장면에서 ‘오른팔과 왼팔의 절단’ 에 대한 내용이 각종 문헌에 보고되고 있는데, 여기서 의문이 나는 점은, 열사의 순국 당시에 입고 있던 옷(저고리와 두루마기)을 보면, 옆구리 부분에 칼에 찔려 찢겨진 자국과 가슴과 배 부위로 혈흔은 남아 있으나, 팔 부위의 옷소매에는 어떠한 흠집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옷소매를 상하게 하지 않고, 일본도로써 어떻게 팔을 절단할 수가 있었을까? 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3) 박연세(朴淵世, 1883~1944)
박연세는 1883년 4월 9일 전북 익산군 오산면 남전리 남참부락(당시, 전주군 남이면 남참리)에서 평범하게 농토를 일구어 살아가던 박자형(朴子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유소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극히 미미하여서, 그저 ‘어린시절 인근 부락의 한문서당에서 천자문을 익히면서 지냈다’ 는 정도의 내용만 전해지고 있다. 말하자면, 그가 기독교 복음을 접하기 전까지의 소년시절은 그저 보통의 평범한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 준 계기는 부친인 박자형(朴子亨)의 기독교 입신(入信)이었다.
최초 남차문교회(現, 남전교회)의 책임교역자로서, 1897년 교회설립 당시부터 이 지역 일대에 복음을 전하고 다녔던 전위렴 선교사는, 박자형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은 곧, 그 아들인 박연세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에 두 부자(父子)는 남전교회에서 최초로 결신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 어떻게 결신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의 세례년도(1906년)를 기준으로 추정하여 보면 1900년대의 벽두로 추정(1903년경으로 추정됨)할 수 있다.
전위렴 선교사를 만나게 된 박연세는, 곧 전위렴 선교사가 운영하는 군산 구암의 남학교 즉, 군산 영명학교 前身학교에 선교사의 권유로 편입학하게 된다. 이 때가 그의 나이 22세때인 1904년 3월이었다. 당시 전위렴 선교사는 1902년부터 자신의 사랑채에서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부인 역시 안방에서 여학교를 열어 교수하고 있었다. 군산 멜본딘여학교 前身학교를 열어 교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참에서 군산 구암까지의 거리는 약 50여리나 떨어져 있었다. 당시로써 어떻게 그 먼거리를 다녔는지 알 수가 없다. 一說에 의하면, 부친의 서신을 가지고 군산의 구암으로 가서, 그곳에서 기거하며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주말이면 남참리로 돌아와서, 주일을 성수하였다. 그리고 그후, 1905년 23세의 박연세는 구암의 남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졸업 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說이 갈려있다. 즉, 졸업 후 곧바로 구암 남학교의 교사가 되었다는 說과 김제의 신명학당(信明學堂)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구암의 남학교 교사로 초치되었다는 說이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박연세는 그가 스물 네 살이 되던 해 1906년 봄, 남차문교회에서 그의 부친인 박자형과 함께 하위렴(W.B. Harrison)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후, 1908년이나 1909년쯤 김제 백구로 이사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전교회 교회록에도 보면 부친과 함께 김제로 이사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어쨌든 이같은 사실은, 박연세의 고향이 오산면 남전리라는 주장과 우리 남전교회가 바로 그의 母교회라는 사실 그리고 해방 후까지도 그의 친인척이 남참부락에 살고 있었다. 그가 훗날 군산 구암교회에 다닐 때에도 가끔 남전교회를 찾아 왔을 것이라는 증언은 남전교회와 박연세와의 만세운동에 관한 관련성을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한편, 김제로 이사간 박연세는 신명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 한문과 역사를 가르치던 중, 김해 김씨 문중의 김신애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그는 특히, 부인을 만나게 되면서 처외조부인 김준(金準)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김준은 유강리 김해 김씨 출신으로 직접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대장으로서 일본군과 전투를 한 경력이 있는 의병 운동가였다.
그 후, 박연세는 군산 영명학교의 교사로 초청을 받게 되어지고, 군산으로 이거하여, 구암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김제에 있을 때엔 15리 정도 떨어진 이리의 고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군산의 구암교회에서 박연세는 그가 34세가 되던 1916년 5월에 안수집사로 장립되었다. 1918년 10월 36세의 박연세는 同 교회의 장로로 임직되는 영예를 얻게 된다. 이는 그가 군산의 구암으로 이거한 이래 줄곧 구암교회를 성실히 섬겼다는 것을 입증한다. 또한 그의 신앙과 헌신적인 봉사는 교우들로부터도 폭넓은 지지를 얻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해인 1919년 2월 26일 그의 김제 신명학당 제자이자 동시에 군산 영명학교 제자가 되는 김병수(당시 서울 세브란스의전 학생)가 문득 찾아왔다. 3․1 독립만세운동의 군산거사를 위해 박연세에게 도움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박연세가 이를 수락하니, 이 일로써 박연세는, 그의 삶의 방향이 전격적으로 바뀌게 되는 전기가 되었던 것이다. 즉, 군산의 계획된 거사 전날인 3월 5일, 그는 같이 거사모의에 참여했던 영명학교 동료교사들과 체포되었고, 법정의 신문(訊問)에서 그는 “한국 독립의 시위운동에 가맹하여 3월 6일의 군산 장날에 선언서를 살포하고 만세를 불러 운동을 시작할 계획이었다.”라고 일본인 판사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2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는다. 그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한 후 출감하였다.
그의 감옥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결단을 하게 하는 영적인 가르침의 장소였다. 그는 출옥 후 1922년 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40세에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만학도로서 그의 의지를 펼쳐 보인 셈이다.
1924년말 42세의 박연세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이듬해 1925년 1월 21일에 열린 전북노회에서 비로소 강도사의 자격을 취득함으로서 목회자의 길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의 최초 목회지는 이리 부근의 동련교회와 고현교회였다. 여기서 약 1년 반 동안 봉사하고, 목포의 양동교회로 청빙을 받아 목회지를 옮기게 된다. 그는 1926년 9월 26일 양동교회에 부임한 이후 1942년 11월 11일 일경에 의해 검거 투옥될 때까지 만 16년간 목회에 전념함으로써 목포지방의 교회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큰 교회의 목회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탁월한 설교 때문이었다. 당시 목포에 거주하면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김아각(D. J. Cumming) 목사는 한 주일예배 때에 그의 설교를 듣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언제나 ‘그의 설교가 초라했던 적은 없었다’ 고 술회했다고 한다. 또한 1934년 유서백(J.S. Nibet) 선교사는, 당시 일부 양동교회 교인들과 목회자 사이에서 오해로 비롯된 반대세력과의 심한 갈등에서도 꿋꿋하게 인내함으로써 결국 선한 자의 편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일깨우게 한 박연세의 목회자로서의 인내심에 대해서도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그의 목포 목회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그칠 줄 모르는 개척전도열이다. 그가 처음에 올 때만 해도 양동교회가 유일한 교회였으나 불과 8년여만에 세 군데의 기도처를 개척 설립하였던 것이다. 특히 기도처 중에는 빈민굴에 세워진 기도처가 있었다. 이것은 당시 빈민촌 선교 사역에 등한하던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선각자적인 사역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나중에 중앙교회, 죽동교회, 연동교회등으로 분립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동교회의 규모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이 ‘선교하는 교회는 결코 쇠하지 않는다’ 는 역사적인 진리가 입증되었던 셈이었다.
당시 목포교회의 발전을 오랫동안 주시해 온 김아각 선교사는 당시 박연세 목사의 지혜와 열정, 그리고 그의 인내에 모든 찬사를 보내야 한다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그는 상당한 문필력을 가진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러나 그다지 활발한 집필활동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단지, 당시 [조선교회진흥策] 에 대해, 기독신보에 기고한 내용에서 ‘경건미가 부족한 교회현상’ 을 진단하고, ‘교회의 영적 강화’ 를 촉구하면서, ‘성화된 교회운동’ 을 역설하였던 점을 보면, 당시에 그가 가지고 있던 목회관(牧會觀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편, 박연세 목사는 전남노회에서도 지도적인 인물로 활동을 하게 된다. 먼저 그가 양동교회로 전임해 온 그 이듬해인 1927년 제19회 전남노회에서 노회장에 선임되게 된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이후로도 1932년 제24회와 1937년 제29회, 그리고 1938년 제30회 노회장에 피선되어, 4선의 노회장으로 전남노회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특히 그가 주재한 1938년 5월에 개최된 제 30회 노회에서는 일본경찰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시행한 비통한 노회였던 것이다. 물리적인 힘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박 목사의 심경은 참담할 지경이었다. 이런 목회자의 양심의 고통 때문이었을까? 당시 박 목사는 괴로움에 못견뎌하면서 종종 유달산 꼭대기에 있는 일동 바위 밑에 기도처를 마련하고 몇날 며칠씩 산기도를 드리기도 했다고 한다. 또, 그가 심적으로 암울해 하던 그때에 애송하던 찬송가는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면’(353장)이었다고 그의 사위인 김오봉 장로는 전하고 있다.
일본경찰은 박연세 목사를 요시찰 인물로 정해놓고 늘 감시를 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군산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라는 전력이 있었기에 목회자가 된 후에도 日警은 감시를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1942년 7월 7일 첫 주일, 일제는 전국교회에 ‘중일전쟁 5주년 기념주일’ 로 지키도록 한 일이 있었다. 이를테면 천황을 찬양하고 중국대륙에서 싸우고 있는 천황군을 위해 예배드리는 주일행사로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 목사는 천황을 찬양하는 설교가 아닌 ‘약육강식(弱肉强食)’ 이란 주제의 설교를 통해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며 그들이 일으킨 대동아전쟁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또 같은 달 26일엔 일부 교인들이 일본말로 하지 않는 설교에 대해 비판하는 말을 듣자 그는 “당국은 내선일체의 빠른 실현을 위해 일본말 사용을 장려하고 조선예수교 교인들도 공명하고 있지만 일본어 사용은 국가방침이지, 교회에서는 이것에 구애받을 것이 없다” 고 말함으로써, 일제의 시책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중 그는 마침내 천황제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을 선포하게 된다. 1942년 8월 30일 주일 아침 예배시에 설교를 통해 “肉으로는 천황폐하를 제일로 존경할 수 있어도 靈的으로는 예수그리스도가 제일 존경의 대상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일제가 그토록 전전긍긍해 하면서 한국인의 의식 속에 심어주려던 천황의 지존하신 절대적인 위치가 예수의 발 밑으로 내던져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언사를 발설함으로써 日警의 기소를 피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일은 박연세 목사가 일제에 대항하여 계획된 그리고 다분히 의도적인 도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박 목사의 마음이 더욱 아팠던 것은 자신의 그러한 말들을 당국에 고발한 사람들이 다름아닌 그 교회의 장로와 집사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바로 ‘가롯유다’ 의 역을 맡았던 것이다.
일제가 박 목사에게 적용한 죄목은 불경죄, 보안법 위반, 그리고 임시 보안법령 위반이었다. 그는 1942년 11월에 피검되어 목포경찰서에 수감되었고, 다시 목포형무소로 이감되어 미결수로 있다가, 1943년 10월 광주지법 목포지원에서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법정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당신은 천황폐하가 높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높습니까?
저는 육체적으론 천황폐하를 존경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를 제일 존경합니다.
그 후 박 목사는 다시 대구복식법원에 공소하여 징역 10개월로 감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그로서는 대구에서 두 번째의 수감생활이었다. 당시 박연세 목사의 감옥생활을 옆에서 자주 지켜 본 이남규 목사는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밑바닥까지 허물어진 교회, 눈앞에서 유리하는 양떼를 보고도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목자의 부자유함 가슴이 벅차고 잃어버린 국권에 그리워하는 국민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치고, 의지할 데 없이 헤매는 가족의 영상, 그의 애간장이 녹아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박연세 목사는 유난히도 추웠던 그 해의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그렇게도 추운 독감방에서 꽁꽁 얼어붙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44년 2월 15일 목사의 나이 62세였다. 홀로 그윽히 두 손을 모아 무릎꿇고 기도하던 모습으로 순교하였던 것이다. 평온하게 두 눈감은 눈썹 위에는 밤새 하얗게 서리가 서려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여 군산의 만세운동을 주모하고 진실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 천황신에게 도전한 박연세 목사의 민족주의에 근거한 강렬한 신앙의 힘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이었을까?
그의 딸인 박지영 권사는 이를 舊 韓末 박 권사의 외조부이면서 의병대장을 지낸 金 準과 박 목사와 늘 긴밀하게 유대하면서 지냈다는 것으로 그 연유를 연결짓고자 한다.
박연세는 투사라기보다는 모범적인 목회자였다. 즉, 전인(全人) 구원을 지향한 목회자라고 말할 수 있다. 복음선교에 일차적 관심을 가지고 주력하면서도 사회봉사와 애국적 행동을 겸하여 수행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977년 정부는 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ㅇ박연세 목사의 출생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說이 있는데, 1) ‘전북 김제 백구면 유강리’ 라는 說. 2) ‘전북 김제 용진면 신사리’라는 說 3) 이남규씨의 說이 있다. 여기에 본논고를 서술하면서 남전교회 원로 장로들의 증언에 의해 드러난 내용으로 그의 출생지가 김제가 아닌 ‘전북 익산군 오산면 남전리 남참부락(당시, 전주군 남이면 남참리)이라는 새로운 주장이다.
ㅇ박연세 목사의 신앙의 요람지는 남전교회이다.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그의 세례년도는 잘못된 것으로써, 그는 이곳 남전교회에서 1906년 봄, 하위렴 선교사에게 그의 부친인 박자형과 함께 세례를 받은 것으로 세례교인 명부에 기록되어져 있다.
ㅇ박연세 목사의 20대의 행적에 대한 추정에 있어서 이미 알려진 문헌상의 사실과 여러 견해로 나뉘어진 불확실한 내용들을 새로이 드러난 사실은 남전교회에서의 결신과 세례와 함께 추론하여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박연세는 남참부락에서 태어나 부친을 통해 1903년 21세에 결신하고 22세 때인 1904년 3월에 전위렴 선교사를 통해 구암 남학교에 편입학하여 23세인 1905년 졸업하게 된다. 24세가 되는 1906년 봄 부친과 함께 세례를 받고 25세때인 1907년 남전교회에서 당시 남참문 교회에서 서리집사로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1908년이나 1909년에 김제군 백구면 유강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상당기간 1909년에 설립된 신명학당에서 교사로 지냈다. 그 후 그가 34세가 되던 1916년 5월 군산 구암교회의 안수집사로 장립되었다는 구암교회의 기록에 비추어 1916년을 거슬러 적어도 수년전에 구암으로 이거해 온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이때부터 군산 영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그의 신학교 재학시절인 당시(1922~1924) 남전교회의 당회록과 교회록에 박연세의 전도사 시무에 관해 기록된 내용은 없다. 또한 그의 ‘신성학교 설립’ 에 대한 내용은 잘못 와전된 것으로 사료된다. 왜냐하면 이미 남전교회에는 1910년에 도남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고 이 학교가 훗날 1923년 4월 校名만을 ‘신성학교’ 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다만 위의 인용문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박연세가 신학교에 재학중 목회실습을 위한 근거지로 남전교회를 택했고 실습을 위해 귀향했을 때에는 교회의 목회사역을 위해 전도활동도 하였을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던 신성학교에서는 자신의 모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들에게 자신의 성장기에 체험에 대해 어떤 내용이든 교수활동을 하였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정도다.
(4) 김인전(金仁全, 1876~1923)
1993년 8월 상해 임시정부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했던 5인의 유해가 중국정부의 협조로 마침내 우리 땅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다섯 분의 애국지사 중에 성직자 한 분이 끼어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호남초대교회의 인물인 경재(經齋) 김인전 목사로 바로 우리 남전교회에서 신앙고백을 통해 기독교 신앙에 처음 입문한 분이었다.
김인전은 1876년 10월 7일 충남 元한산읍 지촌리(당시, 한산군 북부면 소재)에서 태어났다. 당시 충남의 한산은 전북노회의 지경에 속해 있었고 군산선교부의 관할지역이었다.
김인전은 유년시절 매우 총명하여 6세에 한문사숙에 입학하였다. 14, 15세가 될 때까지 사서삼경을 다독함으로써 신기할 정도로 싯구(詩句)를 짓고 정묘(精妙)한 필법이 뛰어났다. 특히, 14세가 되던 해에는 서전기(書傳朞) 三百數를 혼자서 해석할 정도로 총명하였다고 한다.
1892년 그가 16세가 되던 해 온 집안의 식구들이 고향을 등지고 전라북도 익산군 오산면 신지리(당시, 전주군 남이면 신석리, 신석부락)로 이주해 왔다. 이때 그는 한문습득에 더욱 정진하여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탐독하였다. 한편으로는 신문학을 연구하여 장래의 비약적인 활동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또 인근의 마을에 사는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강한 자는 제어하면서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을 잘 돌보아 줌으로써,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인전의 집안이 금강을 건너서 남쪽의 익산 땅 오산면의 신석부락에 이주해 온 연유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의 조카가 되는 김대전 장로는 ‘난(亂)을 피해 내려온 것으로 안다’ 고 말했다. 그러나 1893년 당시 충남의 ‘한산’지역이 어떠한 亂에 휩싸였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당시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단지 舊 韓末의 의병들의 활동이 간혹 있어, 각지에서 이따금 일본군이 합세한 관군과의 국지전(局地戰)을 벌어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의 집안이 이주한 연유는 아직도 잘 알 수가 없다.
유년시절부터 종교에 대해 관심이 유난히 많았던 그는 한 때 영혼의 갈증을 달래기 위해 불경(佛經)과 단서(丹書)에 심취해 연구하기도 하였으나 별로 만족할만한 위안을 얻지 못했다.
그런 중에 1903년 그가 27세 되던 해에 마침 기독교 신앙에 입신(入信)한 아버지 김규배의 권고로 기독교 복음에 접하게 되었다. 그 진리에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비로소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김인전이 복음을 접하게 된 보다 확실한 내용 즉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입신하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위의 내용에서 그의 나이 27세에 아버지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권고 받고 입신한 정도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ㅇ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하여 추론해 봄으로써 그의 신앙의 요람지가 ‘남전교회’ 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로 먼저 1903년 당시 오산면 일대에는 남참문교회외에는 예배처소가 없었으며, 그의 가족들이 살았던 신석부락은 남전교회의 지경내(거리: 약 1km)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는 없지만 그때의 신석부락은 신작로를 가로질러 건너 북쪽에 있는 마을이었으며, 지금도 본 교회의 제 5 구역으로 관리하고 있는 동리다(만수․화개․신석). 또, 당시 본 교회의 교회록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교인 수만 36명이나 되었으니 전체교인 수는 그보다 훨씬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두 번째 이유로는, 무엇보다도 본 교회의 세례교인 명부에 적힌 기록을 보면 1906년 가을에 하위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세례교인 중에 ‘김유배’ 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 명부에 기록된 ‘김유배’ 의 비고란에는 ‘한산 완포로 이사’ 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즉 이 사람이 충남 한산 완포로 1906년에 이주해 간 기록과 同年 김인전의 가족이 1923년 이주해 간 곳 충남 서천 화양면 와초리에 대한 기록을 비교해 보면 동일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여러번의 행정구역 개편이 실시되어 오면서 조정 편입되었기 때문에 확인한 결과 ‘화양면’은 1906년도에는 ‘한산군’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한산군이 훗날 1914년의 개편 때에 ‘서천군’으로 흡수, 편입되면서 ‘한산면’으로 축소되어 ‘서천군 한산면’으로 조정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이주해 간 곳이 동일하다고 판단된다. ‘김유배’란 사람을 확인한 결과 김인전의 둘째 작은 아버지로 판명되었다. 또한 ‘한산 완포’ 는 김인전이 익산군 오산에서 한산으로 이주해 간 6년 뒤인 1912년에 그가 교회를 설립한 곳(1912년 3월 11일,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이며 훗날 그는 이 교회에서 장로로 피택(1913년 5월)을 받아 시무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연유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김인전의 부친인 김규배의 가족을 포함한 형제들의 가족들까지 1892년에 익산군 오산면의 신석부락으로 이주해 왔다. 또한 이곳에서 다시 고향으로 이주해 갈 때까지 14년간을 오산면 신석리에 살았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의 부친과 형제들을 비롯한 김인전의 기독교 입문이 남전교회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가 이곳 남전교회를 섬긴 햇수는 3년여 동안이었다는 등의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작은아버지인 ‘김유배’ 의 경우엔 그들보다 훨씬 앞서 믿게 되었다. 그래서 본 남전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후에 이주해 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김인전을 비롯한 그의 부친과 형제들이 한산으로 이거해 간 후에 세례를 받았겠지만 현재로선 세례교인 외에는 결신자에 대한 명부가 없어 더 이상의 확인은 곤란하다. 그러나 어쨌든 이상의 사실로도 남전교회는 김인전이 최초로 신앙을 접하게 된 요람이다. 또한 본 교회를 통해서 그가 확신에 찬 삶을 살 수 있게 한 용기를 심어준 터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편 그렇다면 스물 일곱살의 그가 기독교에 입문하여 남전교회를 섬기게 되었을 당시(1903년)에, 스물 한살의 박연세가 결신하여 남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두 사람과의 관계가 그 후로도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등등한 기세아래 풍전등화격이 되어버린 국운(國運)을 생각하며 사려 깊은 두 젊은이가 한 교회안에서 많은 얘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1905년 마침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나라는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때에 그들은 출중한 지혜로 국가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암울한 나라의 장래를 위해 서로가 대한 민족을 위해 노력할 것도 다짐하였다. 더욱이 박연세는 그들이 만난 다음 해인 1904년에 미국인 선교사가 공부를 가르쳐주는 군산 구암학교(영명학교의 전신)에 편입학을 하였다. 그렇다면 김인전은 그때 어떠했을까? 일부 기록문을 보면 그 당시 남전교회의 책임교역자 였던 전위렴 선교사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는 서양의 신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교육받을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러니 추측컨데 당시의 김인전도 전위렴 선교사를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깨어있는 젊은이로서 외국의 선진문물에 대해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구암학교와도 연관성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쨌든 김인전과 박연세 두 사람의 결신 과정에 의해 가정된 내용에 의하면 두 사람의 신앙의 요람인 이 남전교회에서 이루어진 신앙적인 만남은 3년여의 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제치하의 난세에 목회자로서 대한인으로서 보여준 그들의 기개와 용기는 그저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 여기고 싶다.
그렇기 때문일까 김인전은 31세가 되던 1906년 충남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 당시 한산군 화양면에 가족과 함께 이주한 후 곧 자기 집에 한영학교(韓英學校)를 설립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즉시 학생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소요되는 제반 학교운영비는 모두 김인전의 사재를 털어서 부담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부친에게서 받은 재산을 거의 다 쓰고 말았던 것이다. 실로 애국위민의 충정이 아니고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5년간 직접 가르치는 중에 수백명의 학생들이 양성되었다. 물론 김인전의 성품으로보아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킨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김인전은 1910년 학교일은 季父에게 맡기고 돌연 평양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깊이 깨우치고 간구하는 가운데에 있던 열렬했던 신앙심은 널리 인생을 罪에서 구원하고자 함이 최대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종교계에 투신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가 신학교에 입학기전 1년 동안은 부위렴 선교사의 조사로서 활약하여 신덕(信德)과 학문을 共히 쌓을 수 있었다. 당시의 신학교는 5년 과정으로 1년에 3개월을 수업한 후 나머지 기간은 전도나 목회 등의 실습을 하는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 기간 중에 교육가로서 남다른 재능과 경력의 소유자인 그는 새로이 현대식 건물을 짓고 출발한 군산 영명학교에서 학생들을 교수하였으며, 주일이면 산중을 순회하면서 흩어져 사는 교인들을 잘 인도하였다. 특히 이 기간 중에 마귀를 제어하는 깊은 신앙체험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전도에 힘쓴 결과 1912년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당시 한산군 화양면)에 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그 이듬해엔 이 교회의 장로로 피택을 받아 시무하기에 이르렀다.
1914년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전라노회에서 안수를 받음과 동시에 전주 서문밧교회에서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시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1916년 제 6 회 전라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되어 자신의 시무교회 뿐만이 아니라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여 호남교회의 성장에 일익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김인전 목사의 목회관(牧會觀에) 즉 그의 신앙사상이 어떠했는지 그에 관한 자신의 집필된 내용이 없어 확연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전라선교 25주년을 기념하여 쓴(1917년) 그의 축시를 통해 어느 정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김 목사는 당시에 일반적인 복음적 사상을 철두철미하게 고수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던 시대를 마귀의 억압하에 놓여있던 암흑시대로 선교사의 내한을 한국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복음은 영생하는 참 이치요 그들의 복음전파는 한국백성의 영적 해방과 자유를 결과시켰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서술이 아닌 자신의 신앙고백이라고 보아도 틀림없을 줄 안다. 이점은 그가 훗날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지사라는 사실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대 대단히 중요하다. 즉 신앙의 보수는 세상회피나 역사의 포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김인전 목사에게 있어서 신앙과 애국은 하나였지 결코 서구의 근본주의자들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서로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은 김인전 목사의 목회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만주를 누비는 독립운동가로 변신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지만 전주에서의 만세운동은 기독교측에서 기전여학교와 신흥학교가 주축이 되어서 일어났다. 이때 김 목사는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전주에서의 만세운동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배후에서 적극적으로 지도, 협력한 후원자임에는 틀림없다. 당시 전주만세운동의 주모자였던 임영신은 김인전 목사가 자신의 신앙사상과 애국사상을 교육시켜준 스승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어쨌든 만세사건 후에 日警은 김인전 목사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는 더 이상 전주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용단을 내려 중국 상해로 망명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이때 신흥학교의 교장인 선교사 여부솔(F. M. Eversole)의 도움이 있었다. 김 목사는 이미 3월 13일의 만세사건 직후, 국내를 떠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4월 2일의 노회에 그것도 그의 시무 교회인 서문밧교회에서 개최된 노회에 불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독립운동가로 새롭게 변신한 김인전 목사는 중국 상해에서 애국지사들과 합류하여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다. 김인전 목사의 상해에서의 독립운동 활동은 비록 4년여의 짦은 기간의 활동이었으나, 그의 인물됨이나 역할로 보아, 각 방면에 걸쳐 매우 다양하게 활동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대략 그의 활동은 다음과 같다.
상해에 도착한 이듬해인 1920년 그는 임시정부의 의정원(국회에 해당) 의원이 되었고, 남한지역 기독교와의 연락책임자로 선정되면서, 1921년 8월에는 학무차장으로써 학무총장의 권한을 대행하였고, 안창호 등과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서립하여 중국과의 유대강화에도 기여하였다. 한편, 1922년 5월에는 제 4 대 의정원의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에 크게 공헌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정식 주권국가에서는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그가 이처럼 상해임시정부에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폭넓은 학식, 외교술, 언변 등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무엇보다도 계파를 초월한 화합정신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동지들 사이에서 ‘화해의 사도’라고 지칭된 것을 염두에 두면, 그곳에서의 그의 역량과 인품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상해 교민들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인 인성학교의 교장직도 맡기도 했다. 그의 상해활동 중 특기할만한 일은 1922년 10월 1일 김구, 여운형 등과 같이 발기하여 조직한 노병회(勞兵會)에 대한 일이다. 이 노병회는 국제외교활동이 가지는 독립운동방법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무장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군인양성과 전비(戰費) 조성을 위해 조직된 단체였던 것이다. 이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사상 일대의 방향전환을 의미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김 목사는 노병회 3인 기초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취지서, 헌장, 회칙 등을 작성하고, 조직 후, 理事로 활약하였다. 노병회는 1932년 해산될 때까지 1만여 명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여 독립전쟁요원으로 활용할 계획과 또한 100만원 이상의 군자금을 적립하여 동지들을 규합, 독려하며 대대적으로 이 운동을 펼쳐 나갔던 것이다.
계획이 활발하게 진전되고 있던 1923년 5월 12일, 김 목사는 상해의 한 여관에서 동지들과 더불어 또다른 일을 위해 심의하던 중, 과로로 인하여 분혈(噴血)됨으로써 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대로 소천하고 말았다. 상해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니, 그의 나이 48세였다.
김 목사의 부음이 국내에 전해진 것은 이상재 선생을 통해서였다. 당시 이상재 선생은 비보를 접하고, YMCA활동을 같이 하고 있던 동지인 김필수 목사에게 “아, 그가 죽었어.” 라고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고 했다.
김필수 목사는 6월호 청년誌 게재한 글에 다음과 같이 심경을 토로하였다.
知己中 一人을 失하고 우리 종교계의 一文士를 失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一志士가 去이로다.
제 13 회 전북노회에서는 6월 28일 김인전 목사의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김인전 목사의 삶은 가히 극적이었다. 암울했던 시절, 격동과 수난으로 점철된 시대의,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과감하게 분투하다 절명한 그였다. 자신의 삶의 푯대를 정해놓고 자신있게 살다 간 한 사람이었다. 1980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4) 박영문(朴永文, 1903~1919)
1903년 전북 익산군 오산면 신지리 397번지에서 아버지 박응춘과 어머니 이양삼의 2남 4녀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당시 그의 부친인 박응춘은 남전교회의 초대 교인으로서, 이미 박영문 열사가 태어나기 이전인 1901년에 부모가 모두 세례를 받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것이다.
신실한 신앙인의 집안에서 성장한 박영문은 어려서부터 예의바른 행실과 총명한 기지(奇智)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으면서, 늘 교회 안에서 생활하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주일학교를 거쳐, 1916년 당시 교회에서 운영하는 부속 도남학교에 입학을 하여 줄곧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에 정진하였다. 특히 급우들간에 신망이 두텁고 책임감이 투철하여서, 매년 급장을 도맡아서 하였다고, 그의 조카였던 박양출 장로는 전한다.
그가 14살때인 1917년 12월 29일, 그는 담임목사인 최대진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 후, 1919년 3월, 그가 4학년 졸업반이 되었을 때, 어느날 문득 도남학교를 찾아 온 문용기 열사와 만나게 되면서부터, 그는 줄곧 문 열사를 잘 따랐다. 문 열사가 외모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차린 박영문은 문용기 열사의 잔심부름을 도와주면서 늘 그의 곁에서 있고 싶어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박영문은 어디서든 문 열사를 보기만 하면 얼굴에 생기가 돌 정도의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문용기 열사는 공부시간 중에 가끔 일제의 간악한 행위에 대해서도 애길해 주곤 했다.
그러던 중, 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고, 추진이 되니, 열사 박영문은 더욱 신바람이 났을 것이다. 한참 혈기 왕성한 시절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만세운동을 벌인다고 하니, 그 얼마나 기쁘지 않았겠는가. 박영문은 문 열사의 뜻을 좇아 여기저기 연락을 취하고, 태극기도 만들고, 독립선언서도 만들고...
마침내 4월 4일이 되자, 아침 일찍부터 박 열사는 서둘렀다. 물론 그의 부친인 박응춘 집사도 만세운동에 나갈 참이었지만, 문 열사는 거사준비를 위해 먼저 서둘러 나갔다. 그런데 그에겐 앳된 아내가 있었다. 집안에서 일찍 서둘러 조혼을 치르니, 결혼한지 채 6개월이 되지 않은 때였던 것이다. 그러니 박 열사를 만세시위의 현장으로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리라. 사립짝문을 잡고 서서, 잘 갔다가 오라고 하는 새댁의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뛰어가는 박영문의 뒷모습을, 그의 아내는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간 박영문 열사는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이다.
적의 총검에 희생되면서 일제를 향해 저주했고, 절명하기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부른, 16세의 어린 청소년 박영문 열사는 그렇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그렇게 따랐던 문용기 열사와 함께 말이다.
열사의 부친인 박응춘과 어머니 이양삼을 비롯한 부락사람들이 쓰러진 그를 부여안았을 때까지도 완전히 절명하지는 않았으나, 부축하여 채 열 걸음도 못가보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고 했다. 시신을 급히 수습하여, 지게로 지고 영성부락의 열사 집으로 모시니, 가슴이 메어져 온 동네 안에 슬픔이 사무쳤다고 한다.
(5) 장경춘(張京春 ? ~1919)
남전교회의 교인이면서 도남학교 학생이었다. 외지에서 혼자 들어와서 살고 있었기에 본 촌에는 일가친척이 없는 홀홀 단신이었다. 당일에 장터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장터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舊 시장 사거리에서 만세를 부르며 대열의 앞에서 나아가다 최초의 적의 총탄에 절명하였다.
(6) 박도현(朴道賢 ? ~1919)
단지, 오산면에 살고 있는 교인이라고만 전해졌을 뿐, 그에 관한 별다른 내용이 알려져 있는 것이 없는 형편이다. 역시 舊 시장 사거리에서 만세를 부르며 대열의 앞에서 나아가다 최초로 발사된 적의 총탄에 절명하였다.
(7) 최대위(崔大偉1900~1975)
최대위는 일명 최월봉으로 불렸으며, 남참부락에서 줄곧 남전교회를 섬겨 온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지금 본 교회를 섬기고 있는 최재희 권사의 부친으로서, 전주신흥학교를 나와, 평양 숭실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921년 2월 1일에 담임교역자인 김중수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진학하여 졸업함으로써 목회자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1919년 당시에 그는 전주 신흥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누군가 솜리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을 전하였을 것이고, 그는 이내 그 계획에 동참하여 거사준비를 위해 함께 일을 해 나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거사 당일, 갑자기 잠적해버린 최대진 목사 대신, 문용기 열사의 권유에 의해 제 일대의 시위대 선도의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그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정확히 나타나 있는 사료가 없어 밝힐 수가 없다. 단지, 그가 이 솜리민중항쟁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목회자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최재희 권사의 제보에 의하면, 당시 집안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이라, 여러가지 ‘하나님의 일’ 을 위해 연보하였다고 하였다. 특히 부친은 사업에도 남다른 수완이 있어서, 전주에서 토건회사를 경영했고, 훗날 김제에서는 사금광산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또한 기독교장로회의 설립자인 김재준 박사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당시 부친께 들었다고 한다.
3) 그 외 인물
김병수(金炳洙, 1898~1951)
군산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진학, 1학년 재학중에 3․1만세운동에 관여하여 활동하였다. 때마침 이 제약과에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이갑성(李甲成, 독립선언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을 만나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고, 그의 지령을 받아, 출신지인 전라북도 군산지역의 연락책을 맡았던 것이다. 그때, 생활이 곤란하였던 그는 세브란스병원의 제약과에 근무하면서 학업에 정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군산의 영명학교 재학시엔, 박연세의 가르침을 통해 민족교육을 받고, 대학에서는 스코필드 박사를 만남으로써, 확고한 민족관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9년 2월 26일, 그는 군산에 도착, 영명학교를 찾아가 은사인 박연세를 만났다. 그는 박연세에게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거사계획을 전하고, 군산에서도 시위를 계획해 줄 것을 권유하였고, 박연세는 흔쾌히 수락하였던 것이다. 2월 28일, 그는 이갑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백여매를 전해받고, 군산으로 내려와, 3월 1일 박연세의 집에서 이두열 김수영 등과 만나 독립선언서 1백여매를 전해줌으로써 군산에서의 만세운동이 전개될 수 있도록 매개 역할을 하였다.
또, 3월 5인엔 학생들이 주동이 된 서울 남대문 정거장 앞에서의 제 2차 독립만세운동을, 학생대표인 강기덕(康基德), 김원벽(金元壁) 등과 함께 수백명의 학생들과 군중을 지휘하면서 주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4월 4일의 익산 솜리의 독립만세운동을 위해, 사전에 남전교회의 최대진 목사와 문용기 등과 연통하여 독립선언서를 전해주었고, 시위 당일, 거사의 현장에서 日警의 구타로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훗날, 이리역 앞 광장에서 개최된 3․1절 기념식장에 나타난 그가, 그때 함께 기념식에 참석한 문용기 열사의 유족들에게 사죄하면서 말했던 내용을, 문 열사의 조카인 문창열(文昌烈)씨가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김병수는 문용기 열사와 함께 만세운동에 나서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으나, 거사현장에 좀 늦게 도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늦어진 이유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그는 목천포(당시, 익산 오산면 목천리)에 거주하고 있었고, 바쁘게 시위 현장인 구시장의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총격으로 현장이 아수라장이 된 상태였다고 했다. 순간, 직감적으로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사람들을 둘러보던 그는, 대교농장 정문 20여미터 앞쪽에 쓰러져 있는 문용기 열사를 발견했다. 그리고 허겁지겁 달려가 그의 얼굴을 받쳐들고 안으니, 이미 절명한 상태라. 바로 코 앞의 일본군인들의 얼굴이 보일리 없었다. 피로 범벅이 된 문 열사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순간, 일본헌병이 오는 것이 보였고, 이내 군인이 내려진 총개머리판에 머리를 맞곤 기억이 없었는데 한참만에 눈을 떠보니 구암 예수병원이었다고 했다.
김병수는 그 후, 체포되어,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후에 이리에서 삼산병원을 개원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이리제일교회 장로로 시무했으며, 그리고 최초로 이리시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83년 정부는 그에게 대통령 표창과 훈장을 추서했다.
이상에서 상기한 인물들 외에도 장만준(張滿俊, 1918년 세례)은 총탄이 귓밥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어야 했다.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또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들에게 곤혹을 당해야 했다.
4월 4일 솜리시장에서의 만세운동은 오산면의 남전교회의 모든 교인과 도남학교 학생 모두가 거사의 주동이 되어서 일으킨 사건으로써, 그 어느 한 사람의 역할이라도, 그 가치를 과소 평가할 수는 없다.
위에서 기술한 사람들은, 솜리항쟁에 결사적으로 참여하여 순국한 선열들을 비롯하여, 거사 당일의 행적이 후손들의 증언에 의해 비교적 객관적인 사실로 뚜렷하게 드러난 분들만 필자는 기록하고자 하였다.
더 많은 항쟁의 사료가 발견된다면 마땅히 게재해야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라, 남아있는 자료나 구전되는 일화가 없어 게재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미진했던 사료 발굴의 의지는 또다른 기회로 넘길 수밖에 없다.
부록 3 만세시위와 관련된 중요기록
四. 환란(患亂)
“1919년(기미) 삼일운동이 시작된 후 교회중 직원과 교인과 학생의 참여가 다한데 익산군 남전교회에는 문정관 박영문 장경춘등 삼인은 피해되고 목사 최대진은 출외사직하고 서천군 종지동교회에는 장로 도성열이 수감되고 경관은 기허간 예배를 금지하였으며 옥구 구암리교회에서는 장로 박연세와 교사 이두열, 김수영, 김인묵과 악생 십여인과 군산부 개복동교회에서는 교인 김성은 김지선, 서희 홍종의 전종식등이 피해되었고 전주서움외교회에서는 목사 김인전은 상해에 주하였다가 해지에서 별세하니라”
“전라북도 이리시의 남전리 교회에서 경영하는 소학교가 있었는데, 이 학교에는 문정관이라는 교사가 있었다. 1919년 4월 초, 이리역전에는 남녀시민 만여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는 많은 군중을 앞에 놓고 독립운동을 선동하고 만세를 불렀다”.
“...4월 4일 정오경, 기독교도가 중심이 된 600여명의 군중들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들 만세운동자들은 장터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라고 붉은 글씨로 쓴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읽었다...(중략)...무차별사격과 총검돌격을 감행하였다...쓰러진 사람들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다. 이 날 시위현장에서 피살된 5명 중의 4명이 기독교도이며, 이들이 이 운동의 주도자들이었다...”
“4월4일의 격렬한 만세운동은 문용기, 박도현, 장경춘 등 예수교 계통의 지사들이 주도하였다”
“인접 오산면의 문용기 등 기독교 계통의 지사들이 감연히 일어나 이리역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기도하였다. 여기에서 서울에 유학 그곳에서 만세운동을 하고 귀향한 중동학교 학생 김종현(김종현) 김철환(김철환), 이시웅(이시웅),박영문 등 청년학생과 일시 전북지역에 내려와 활동하던 서울의전 학생 김병수(김병수) 등이 이들과 합류하였다.
“남전리교회에서 문정관 박영문 장경춘 등이 체포되어 갔다.”
이날 시위로 6명 사망...
헌병대 보고 기독교도 약 30여명이 곤봉으로 무장을 하고...
시위현장에서 피살된 5명 중 4명은 기독교 신도로서 이번 운동의 주도자들이었다. 그리고 부상이 10여명 피검자 약 40여명이었다고 한다.
朝鮮總督府警務局發,(大正 八年, 四月 五日, 高第 一ㅇ一三八 號.)
-獨立運動에 關한 件(* 3․1運動 一次報告)
四. 全羅北道
四日 午後 零時 三十分 裡里市場에서 約 300名의 暴民이 不穩 印刷物을 配布하고 暴行함에 따라 發砲 解散하게 했지만 暴民은 死傷者를 各各 三名을 내고, 主謀者는 逮捕되었다.
“당시의 일본군 헌병대의 보고서에 의하면, 익산군 오산면 오산리와 남전리에서 기독교도 약 30여명이 곤봉으로 무장하고 혹은, 권총이나 비수를 휴대하여 헌병을 저격하고, 헌병보조원을 구타하는 등의 무력시위를 하기도 했으며, 또 일부는 일본 수비대를 습격하고, 헌병대에 반항하거나 일본인 점포에 난입하여 파괴함으로써, 분풀이를 하기도 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4월 4일에는 호남 교통의 요지인 이리에서 격렬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이리에서는 이보다 앞서 3월 26일에도 많은 민중들이 목포행 열차의 승객들과 호응하여 만세를 부른 일이 있었으며 또 적측의 보병 제 4연대의 1개 중대가 이곳에 주둔하고 전주, 군산, 익산 방면과의 왕래를 일일이 감시하였기 때문에 운동이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인접지역인 오산면의 문용기 및 박도현, 장경춘등 예수교 계통의 애국 지사들은 감연히 일어나서 이 교통이 번잡한 이리에서의 만세운동을 기도하였다.
4월 4일 정오경 이리 시장에는 예수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약 3백 명의 집단이 시장에 모였다. 거기에는 서울에 유학하다가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중동학교 학생 김종현 김철환 이시웅 및 박영문등 청소년 학생들과 진작부터 전북지구로 내려와서 활동하던 서울 의전 학생 김병수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적의 헌병 보병부대가 주재하여 도내의 운동을 강압하고 있은 이야말로 적진의 중심부라고도 볼 수 있는 곳에서의 운동이니 만큼 모두 일사대결의 결심을 가지고 참가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1개월이 지난 4월 4일 정오경에 이리 기독교도가 중심이 된 6백여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들 만세운동자들은 장터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라고 붉은 글씨로 쓴 깃발을 세워 놓고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선언서의 낭독이 끝나고 만세를 외친 다음 막 시위운동에 들어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4․4 솜리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관련 자료만을 가지고, 폭녋은 만세운동의 전반을 이해하기란 곤란한 형편이다. 특히 전북노회록에도 솜리장터 만세사건에 대한 언급으로 간략하게 “1, 금년에 소요사건으로 인하야 개인 전도에 크게 고난을 당하였사오며,”, “2, 교회에 청년들이 많이 들어 왔사오나 아직 신령한 신앙은 얻지 못하였사오며,”20) 라는 내용이 있을 뿐, 별다른 내용은 드러나 있질 않다. 물론 그 당시의 만세운동에 대해 대부분의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고 하지만, 어쨌든 민족사적으로 볼 때, 대단한 사건이었을, 이 솜리독립만세사건에 대한 당시의 기독교계의 반응은, 적어도 겉으론 냉담하게 보였던 것이다.
부록 4 익산 삼일만세운동 기념사업의 추진내용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한 것은 1997년 4월 11일(금)이다. 이 교회에 와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교회 역사 편찬에 대한 집필진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교회에서는 먼저 당회록에 기록된 고어체를 현대국어체로 번역하는 일이 시급하여 선행하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정군덕, 최길석 장로가 합세하였고 나는 당회록의 내용을 컴퓨터에 입력하였다. 후에 이 내용을 확인 수정하는 작업은 남전교회 100년사 집필자인 김종삼씨가 하였다. 두 장로와 본인이 당회록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삼일운동이 본 남전교회 교인들이 중심으로 하여져 일으켜졌고 이로 인해서 담임목사인 최대진이 시무 해약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와 김종삼씨는 여기에 대한 모든 자료와 증언을 입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과정속에서 황성근 목사를 알게 되어 익산시 독립운동사를 함께 편찬하였고 그 과정에서 익산 사사만세의거의 관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익산시 독립운동사를 편찬한 것은 1998년 4월 18일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많은 새로운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교회 역사 100사를 편찬 작업을 시작한지 1년이 가까웠을 때 본인은 최소한 삼일절 기념예배를 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익산시 연합회 측에 삼일만세운동을 일으킨 교회에서 기념예배를 드리자고 권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잘 전달이 되지 않았는지 시내 중심 큰 교회 중심으로 3.1절 기념 예배를 드렸다. 본인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거사일인 4월 4일에 기념예배는 물론 기념식과 또한 피해현장인 익산시 구시장 사거리에서 추모예배를 드리고자 행사를 기획하였다. 삼일절이 지나 거의 한달동안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가운데 나는 거의 한달 동안을 잠을 잘 수 없었고 비몽사몽간에 기미년의 그 외침을 들었다. 행사지를 만들고 여러 신문사 기독교 전북방송에 광고를 요청하고 공문서를 쓰고 보냈다.
참으로 외롭고 힘든 투쟁이었다. 그러나 기미년의 피맺힌 외침 피흘렸던 외침과는 비교할 수 없기에 그리고 이것이 애국이라 여겼기에 참고 이기어 나갔다.
주위에서는 염려와 함께 기대도 컸다. 왜냐하면 역사를 들춰내는 거대한 사업이기에 그러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추진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도움과 격려가 있었다.
1998년 최초 4월 4일 기념행사 당일 기념예배 및 기념식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조한용 시장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분들이 참여 하였다. 박종규 오산면 시의원을 비롯한 많은 시의회 의원들도 참여하였다. 후에 행사에 초청된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드리다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되어지지 못한 부분들도 많았지만 적은 예산에도 너무나도 훌륭한 일을 해냈다.
행사 당일 날씨가 너무나 좋았다. 그 중에 충혼무(忠魂舞)는 우리 교회 청년들도 합세하였다. 당시 남전교회에서 사사독립만세의거 기념예배를 드린 것은 처음이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기념예배를 드리고 난 뒤 경찰차의 에스코트를 받아 역전까지 갔다. 정말 거대한 행렬이었다. 후에 생각하면 나는 정말 겁없이 일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기까지는 행사에 대한 책임이 요하는 일이었다.
게중에는 행사에 참여하기로 하고 참여하지 않아, 행사의 진행에 차질이 있을 뻔하기도 하였지만 그때 그때 잘 넘겼다.
기념식 이후 도보로 구시장 현장까지 갔다. 지금도 감사한 일은 저의 모 교회인 서수교인들이 끝까지 참석해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남전교회들은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
추모예배는 눈물겨운 것이었다. 79주년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되어진 추모의 예배를 드린 것이다. 기미년 당시 6명의 순국자중에 본 남전교인이 4명이요 교회가 문이 닫혀질 정도의 큰 피해가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추모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추모예배를 드릴 때에 나의 감회는 컸다. 나의 심정은 교인들에게 있어 기미년의 떨쳐 버리고 싶었던 아픈 상처가 치유되는 것 같았다.
추모예배가 마친 후 사랑의 친교의 시간에 문용기 열사의 후손의 말이 잊어지지 않는다.
“이제야 백부님이(문열사님이) 눈을 감으실 것 같습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와 순교현장을 찾았다.
그러나 순국열사비를 찾을 때마다 느낀 것은 잡초와 쓰레기로 가득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쓰레기와 풀을 방문객과 함께 뽑으며 눈물을 짓기도 하였다. 나는 풀을 두손으로 뽑으며 기념사업을 추진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첫 번째 기념사업후에 사업 평가회 및 기념사업추진회를 결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각계의 의견을 수렴할 수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은 교회가 해야 함을 말하였다. 하나의 성과는 이 후로 잘못된 형태의 기념사업에 대한 추진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누가 선봉에 섰느냐? 문제에 대한 내용은 익산시 독립운동사(1998년 4월)의 내용이 정확하다. 여기에서 확대된 내용은 잘못된 발상이고 확대 해석하여 말하여진 것이다. 여러 증언의 내용과 여러 사건의 진상을 살펴본 바 그 내용은 분명하다.
79주년 행사가 마치고 오산에서는 성역화 사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이들이 남원 덕과면과 제암리 교회를 다녀왔다. 대형 버스에는 면장을 비롯한 본 교회 장로인 박종규 장로가 함께 하였다.
그 후 일년이 지나 80주년 행사는 부활절과 겹치어 조촐하게 교회에서 자체적으로 기념예배를 드리고 국민생활관에서 기념식만을 하는 것으로 치루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사흘전에 본인이 맹장으로 인해 바로 수술을 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행사의 전반을 주관하고 관여하고 있던 나로써는 ‘죽으면 죽으리라’ 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임하였고 수술을 하지 않고도 무사히 마쳤다.
익산 사사만세의거 제 81주년 기념행사는 본 교회 기념사업회 익산 노회 교회와 사업 위원회 오산면 성역화 사업위원회가 중심으로 한 공동 추진위원회의 주관으로 치뤄졌다. 너무나도 성대하게 치뤄졌고 익산에서 삼일 운동에 대한 학술세미나가 처음으로 이뤄졌다. 여기에는 정옥균, 주명준, 이덕주, 김종삼씨가 참여 하였다. 여기에서 거사 경위가 밝혀졌다.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많은 노회원들과 남전교회 당회원의 도움으로 우리 교회가 노회를 거쳐 총회에 유적지교회로 지정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로선 새천년을 시작하는 아주 좋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남전교회는 한국기독교 장로회 제 85차 총회에서 처음으로 유적지로 지정받았던 것이다. 그 후 우리 교회는 기념사업을 하기 위한 활로가 트였고 기초설계를 할 수 있는 시의 지원을 허락 받았다.
앞으로의 기념사업은 ㄱ자(고패) 교회를 건립하여 기념관으로 삼고 기념비와 정신관 기념 시민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부록 5 기독교계를 위한 제언
기독교인들은 애국자이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예언자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전부 애국자였다. 나라가 참으로 어려울 때 부흥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그러나 지금의 신자의 모습은, 자기가 애국자가 되려고 하는 것 조차도 생각지 않는다. 참 신자는 개교회를 위해서 만들어졌고, 개교회에 충성하고, 개교회를 위해 전도 해야하고, 개교회에 헌금을 많이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이것이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앙의 출발은 몸 담고 있는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우리 교계의 모습이다. 그러나 거기에 국한되고 끝나서는 않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한 세상의 빛과 소금은 다르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려면 세상을 예수의 정신으로 걱정하며 세상이 예수의 정신으로 변화되기 위한 기도가 있어야 한다. 정말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으로 치우쳐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사랑과 예수의 정신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애국자가 되어야 한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속에서, 정치도 해야 하고 그리고 공무원 생활도 해야하고 그리고 교사도 해야 하고 그리고 상업도 그리고 농사 등도 지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는 죄와 부정과 불의를 저지르고 교회에 와서 빛과 소금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원하셨던 것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지금 자기 신앙이 깊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내가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애국자가 되어야겠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겠다’ 하며 그것을 위해서 애통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럴까?
애국자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나라를 정말 사랑하는 것이다. 이민가면 전부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애국자가 되었다. 왜 그럴까? 나라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는 교회의 목회 현장에서 애국자를 키워야 한다. 나라 잃고 어려을 때인 3.1 운동때 보였던 그 3.1 정신으로 지금 애국자를 키워야 한다. 교회 잘 다니는 사람은 애국자이다는 말이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강단에서 애국을 외쳐야 한다. 선교의 정책으로 애국과 관련된 교육프로램을 만들어야 한다. 일테면 나라사랑학교를 만들어 2박 3일 동안 청소년들을 교육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예언자 정신을 이어받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는 이 시대의 지도자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