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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티쿤 올람”… 유대인의 믿음, 팬데믹마다 백신 열매 맺었다
코로나 백신 만든 유대인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입력 2021.01.05 03:00
‘의학원리집’을 집필한 중세 최고 랍비 마이모니데스를 비롯해 유대인들은 의학에 헌신해온 긴 역사를 갖고 있다. 하루 최소 9번 손을 씻는 종교적 습관, 음식 정결법 ‘코셔’ 등 위생 관리에도 철저했다. 중세 베네치아에서 페스트로 인구 3분의 1이 사망할 때 유독 유대인 희생자가 적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작자 미상의 18세기 그림 ‘전염병 피해자들을 방문하는 키지 추기경’. 이탈리아 로마 바르베리니 궁전 국립 고전 미술관 소장. /게티이미지코리아
화이자와 모더나의 mRNA(메신저 RNA) 백신 탄생에는 연구원 카탈린 카리코의 외롭고도 힘든 40년 헌신이 있었다. 그는 1976년 헝가리 대학에서 생명과학 강의를 듣다 mRNA 세계에 빠졌다. 분자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템플대에서 mRNA 연구에 몰두했지만 성과가 나오지 않아 쫓겨났다. 다행히 1989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 의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의 연구 이론은 이렇다. 사람의 DNA에는 생명 구성 요소인 단백질을 만드는 방식이 들어 있다. 단백질 설계도 격인 DNA 유전 정보를 단백질을 만드는 리보솜까지 갖고 오는 전령이 mRNA이다.
mRNA는 DNA의 메시지를 풀이해 단백질을 생산하도록 하는 생명체 소프트웨어이다. 그는 이를 활용하면 특정 단백질의 결핍이 원인인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폐에 생기는 유해한 점액을 제거하는 기능성 단백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요청한 연구 자금 지원은 번번이 거부당했다. 대학 측은 mRNA 연구의 현실성이 희박하다고 보고 카리코에게 퇴직이나 직위 강등 중 하나를 택하도록 했다. 더구나 1995년 당시 그는 암 투병 중이었다.
1997년 면역학의 대가인 유대인 드루 와이즈만 교수가 부임했다. 카리코는 와이즈만 교수에게 “저는 어떤 RNA도 만들 수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와이즈만 교수는 카리코 연구의 중요성을 즉시 알아보았다. 자신의 연구 자금을 쪼개 그를 지원했다. 이는 ‘와이즈만-카리코 프로젝트’로 이어져 코로나19 백신 연구로 연결되었다. 어려움도 있었다. mRNA 주사는 심각한 염증 반응을 일으켰다.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연구를 거듭해 2004년 이를 극복했다. 그들은 세포 안으로 mRNA 정보를 집어넣는 기술을 특허 냈다. 화이자 백신은 카리코가 현재 부사장으로 있는 독일 ‘바이오엔테크’ 사와 공동 개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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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백신 개발 주역 대부분이 유대인이다. 화이자 CEO 앨버트 불라와 백신개발팀을 이끈 미카엘 돌스텐이 유대인이다. 스웨덴 출신 돌스텐은 이스라엘 와이즈만 연구소에서 1년 유학하면서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원래 그는 의사였지만, 이스라엘에서 최첨단 면역학을 배운 뒤 신약 개발 쪽으로 돌아섰다. 의사로서 환자를 보살피는 임상도 중요하지만 인류를 위해서는 면역학 연구가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카리코와 와이즈만의 연구를 주목한 사람이 또 있었다. 스탠퍼드대 연구원 데릭 로시는 그들의 연구 논문을 읽고 mRNA에 관심을 가졌다.
2010년 그는 하버드와 MIT 교수들과 함께 변형 mRNA를 이용한 백신을 개발하고자 모더나(Moderna)를 설립했다. 모더나의 최고 의료 책임자 탈 작스 역시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 출신 유대인이다.
유대인들이 의학에 헌신한 역사는 오래되었다. 중세 랍비 중에는 의사와 무역상이 많았다. 당시 랍비들은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다. 중세 최고 랍비 마이모니데스도 ‘의학 원리집’을 집필한 의사이자 이집트 술탄의 주치의였다.
1492년 스페인 왕국이 유대인을 추방할 당시 스페인 의사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의사가 이렇게 많았던 것은 ‘티쿤 올람(Tikun Olam)’ 사상 때문이었다. 티쿤 올람이란 ‘세계를 고친다’는 뜻이다. 이 사상에 따르면,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되 완벽하게 창조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창조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창조론과 진화론을 아우르는 사상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파트너로 세상을 개선해 완전하게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병든 몸을 고치는 것도 티쿤 올람이라 생각한다. 유대인의 13세 성인식 때 랍비와 하는 문답이 있다. “네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 “티쿤 올람에 기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처인 예루살렘 올드 시티 ‘통곡의 벽’ 인근에서 손을 씻는 정통파 유대인들. /사진가 보르하 가르시아 데 솔라 페르난데스
1347년 베네치아에 페스트가 창궐해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으나 유대인 희생자는 유독 적었다. 그 비결은 철저한 손 씻기와 청결 의식에 있었다. 유대교는 거룩한 장소에 임할 때는 반드시 손을 씻으라고 명한다. 그래야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출 30:20~21).
유대인들은 가정을 가장 중요한 성소로 여긴다.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다. 하느님이 임재하신다고 믿는 식탁에 앉기 전에도 손을 씻어야 한다. 그들은 씻지 않은 손으로 만진 음식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한번 씻을 때 3회 이상 철저히 씻었다. 그들은 하루에 3번 기도할 때도 정결한 컵에 물을 담아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 4번 이상 씻었다. 일종의 정결 의식이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최소 아홉 번 손을 씻는다. 또한 ‘코셔(Kosher)’라는 음식 정결법을 지켜 위생 관리에 철저했다.
현대 면역학을 개척한 두 유대인 거장이 있다. 대식 세포를 발견한 프랑스의 엘리 메치니코프와 매독 치료제를 개발한 독일의 파울 에를리히다. 메치니코프가 이끄는 프랑스 의학계와 에를리히가 이끄는 독일 의학계는 면역계 실체를 두고 오랜 기간 논쟁을 벌였다. 결국 두 진영의 면역 이론이 모두 옳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메치니코프와 에를리히가 공동 수상했다. 이들 덕분에 유대인들의 백신 개발이 잇달아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프랑스에서는 유대인 발데마르 하프킨이 콜레라 백신을 만들었고, 미국에서는 유대인 조나스 솔크가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21세기 들어 바이오 산업을 전략 산업으로 지정해 거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유대인이 면역학에 강한 이유이다.
'코로나 백신'에 공헌한 사람들. 왼쪽부터 드류 와이즈만 전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교수, 카탈린 카리코 ‘바이오엔테크’ 부사장, 알버트 불라 ‘화이자’ CEO, 미카엘 돌스텐 ‘화이자’ 최고 과학 책임자(CSO), 탈 작스 ‘모더나’ 최고 의료책임자(CMO).
코로나19 백신은 크게 세 가지다. 미국과 독일의 ‘mRNA’ 방식, 영국과 러시아의 ‘바이러스 전달체 방식’, 중국의 ‘불활성화’ 방식이 있다. 이 중 mRNA 백신은 바이러스 병원체를 주입하는 게 아니라 바이러스의 일부 단백질을 인체 스스로가 만들어내도록 하는 유전자(mRNA)를 투입하는 방식이다. 우리 몸은 이에 대항하여 항체를 만든다. 바이러스를 증식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전통 방식 백신은 일반적으로 개발에 10년 이상 걸리지만 시험관에서 mRNA만 합성하면 되는 백신은 생산 속도가 놀라우리만큼 빨라 팬데믹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백신 개발 자체가 노벨 의학상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기술이 가져올 미래이다. mRNA 백신 기술을 토대로, 원하는 기능성 단백질을 만들어 암과 유전병을 이겨낼 날도 멀지 않다.
우리나라 의료진과 의료 시스템, 의료 보험은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편이다. 특히 의대는 수재들이 몰리는 곳이다. 그런데 의학 연구나 신약 개발에 헌신하는 의사는 소수다. 우리나라도 의사들이 의학 연구와 신약 개발, 의공학 분야에 뛰어들 수 있는 여건 마련이 절실하다. 꿈과 열정이 있는 젊은 의사들이 관련 창업에 과감히 뛰어들어 의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어내길 바란다. 이는 ‘티쿤 올람’ 사상 못지않은 우리의 홍익인간 이념을 구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왜 유대인을 알아야 하나]
역사에 촘촘히 박힌 그들의 경제 파급력… 단점은 반면교사로
유대인만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민족도 없다. 장단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세계 경제는 유대인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다. 근대 초 네덜란드에서 중상주의의 꽃을 피워 세계 곳곳에 무역 네트워크를 건설한 주역이 유대인이었다. 당시 투자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힘은 그들이 채권 시장을 활성화해 연 15%인 시중 금리를 2~3%대로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세계로 전파될 수 있었던 것도 유대인의 자본력 덕분이었다.
기초 학문과 정밀 과학 분야의 세계 최고 연구 기관으로 손꼽히는 이스라엘 와이즈만 연구소. /퓨처런닷컴
유대인의 단점 또한 명확하다. 팔레스타인 문제, 미국의 금권 정치, 금융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인 소득 불평등과 빈부 격차의 중심에 그들이 있다. 단점은 반면교사로 삼고 그들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제조업을 뛰어넘어 유대인이 주도하는 금융 산업 등 서비스 산업에서 결판을 보아야 한다. 유대인을 알아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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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전문가 홍익희 교수의 고백, 인생 2막의 반전과 역전 그리고 결전
기사입력 2018-01-29 11:12기사수정 2018-01-29 11:12
국내 최고의 유대인 전문가인 홍익희 세종대학교 대우교수(65). 그와의 3시간여 ‘인생 2막’ 인터뷰는 한마디로 선입관의 전복이었다. 수치에 밝은 냉철한 전문가일 것 같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인문학자에 가까웠다. 직선의 경력을 쾌속으로 걸어왔을 것 같지만 굽이굽이 곡선의 지각인생, 갈지(之) 자 이력이었다.
경력과 브랜드를 보고서 지레 짐작한 선입관은 무너졌다.
홍익희 교수의 인생은 반전과 역전 그리고 결전의 파노라마였다.
(사진 이지미 프리랜서 studiojimilee@gmail.com )
첫째 반전,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는 32년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생활을 한 뼛속까지 코트라(KOTRA)맨이다. 중남미, 뉴욕, 유럽 각지에서 해외근무를 했지만 정작 중동 근무를 한 적은 없다.
둘째 역전, 베스트셀러 작가이지만 정작 글쓰기와 관련한 일을 본격적으로 해본 적이 없다. 정년퇴직 후 58세에 본격 글쓰기를 시작한 게 전부다.
셋째 결전, 코트라 무역관장을 거쳐 대학교수로 연착륙한 그의 인생은 겉으로 보기엔 꽃길이다. 정작 본인은 “내 인생의 8할은 열등감과 실패로 가시밭길이었다”고 술회하는 것 아닌가. 노력, 노오력을 넘은 사력으로 역경을 경력으로 전복시켜왔다는 고백이다. 자, 그의 인생 2막의 반전, 역전, 결전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자.
국내 최고의 유대인 전문가로 꼽히시는데요.
코트라 재직 중 정작 중동 지역이나 관련 문화권에서 근무한 적은 없으십니다.
인생 2막에서 유대인이란 주제를 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32년간의 코트라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금융산업을 포함한 서비스산업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내가 서비스산업이 중요하다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을 것 같지 않더군요.
그래서 고대로부터 서비스산업을 창안하고 주도했던 유대인 이야기에 당의정을 입히면 공감대를 넓히는 데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32년간 수출전선에서 근무지가 늘어날수록 유대인의 힘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서 금융업뿐 아니라 서비스산업을 창안하고 주도하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게 배경이 되었지요.”
그가 맨 처음 유대인들의 힘을 느낀 것은 1983년에 파견된 콜롬비아의 보고타 무역관에서다. 유대인 대형 바이어들과 거래하고, 유대인 군수품 에이전트와 같이 입찰에 응찰하는 것을 비롯, 금융도시 뉴욕에서 근무하면서 유대인의 실체에 대해 보다 깊이 알게 됐다. 세계 각국에 투자된 외국인 자본의 3분의 2는 미국 자본이고 그 태반이 유대계 자본이더란 것. 한 줌밖에 안 되는 유대인들이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것을 지켜보며 유대인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근무지 곳곳에서 경험한 유대인의 힘의 근원을 천착, ‘유대인 이야기’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유대인 전문가란 브랜드를 구축, 작가-교수로서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시작한다.
책이 작가로서 인생 2막의 터닝포인트가 되었군요.
뼛속까지 무역맨인 분이 전문작가로 전업하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퇴직 후 투자에 크게 실패했어요. 경제적 손실이 컸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 후 모 중견기업의 경영자로 가기로 돼 있었는데 틀어졌어요. 알고 보니 의례적 인사말을 착각, 김칫국을 마신 것이었어요. 정말 깜깜절벽에 출구가 보이지 않더군요. 경제적 손실만이 아니고 미래의 대책마저 보이지 않으니 살아 있지만 산 것 같지 않은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더군요. 현실을 잊기 위해선 무언가에 몰입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글쓰기는 도피처였다고나 할까요. 온종일 글쓰기에 매달렸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습니다. 자는 시간 외에는 글만 치열하게 썼습니다. 이때 탄생한 게 50여 권의 전자책들입니다.”
비록 100여 페이지에 불과한 전자책이지만 거의 이틀에 책 한 권 분량을 쓴 꼴이었다. 퇴직 후 출판사에 원고를 가져갔더니 자그마치 10권 분량이었다. 이때 쓴 ‘유대인 경제사’ 10권을 한 권으로 축약해서 출판한 게 2013년 초에 발간된 ‘유대인 이야기’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썼던 전자책 원고들이 지금은 아이디어의 보물창고가 되고 있다.
글로벌 경제 전문가도 투자에 실패하는군요. 퇴직 후 투자 실패였으면 더 타격이 크셨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하느님의 계획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인생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더라면 강의와 저술을 하는 오늘날의 내가 되지 못했겠지요.(웃음) 외형적 성공은 몰라도 지금처럼 행복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글쓰기는 배부르고 등 따시면 하기 힘들거든요. 절박하고 절실해야 글이 써져요. 돌아보면 내 인생의 8할은 실패와 열등감이에요.”
홍 교수님의 이력에서 인생의 8할이 실패와 열등감이란 이야기는 의외입니다.
“열등감이 과도한 인정욕구로 이어지면서 자충수를 둔 경우가 많았어요. 지그재그 인생을 돌아가게 만들고요. 지각인생이고 뒤처진 삶이었어요. 대학 시절, 3학년 1학기까지 다닌 건축공학을 접고 대학과 전공을 바꿔 재입학한 것도 그렇지요. 외무고시 공부 죽어라 매달려 거의 붙었나 했더니 시위 경력으로 막판에 징집당해 군대를 갔다 오느라 동기들보다 사회 진출이 늦었지요. 코트라 다니면서도 또 사업 한답시고, 가구사업 벌였다가 부도났어요. 당시 채무자에게 전화로 재촉받은 트라우마가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전화를 늘 진동으로 해놓는답니다. 그런데 퇴직 무렵에 또 투자를 해서 재산을 날렸으니….”
그는 하느님의 계획이란 말을 자주 했다. 돌아보면 당시엔 역경이고 힘들었던 일들이 나중엔 경력이고, 혜택으로 작용하는 일이 많더란 것이다. 상사의 신문칼럼 대필을 하느라 애면글면하는 게 부당하게 느껴졌지만,
그것이 글쓰기의 힘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해외의 경제상황 보고서 격무로 연일 야근을 하면서 몸무게가 10kg 이상 줄 정도였지만, 그것이 오늘날 경제사 집필의 원천 자료가 되고, 사업 실패가 경영자들에 대한 이해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으니 말이다.
가깝게는 책 출판이 예정 시기보다 지체된 것도 불만이었다. 하지만 대기(待機)하는 동안 자료를 보충하며 ‘대기(大器)’로 숙성시킬 수 있었다. 홍 교수가 되새기는 말이 ‘현재에 충실해라’다. “과거의 불완전성, 미래의 불확실성에 불평하고 고민하느니 현재에 몰입한다.” 그가 인생 수업료를 비싸게 치르고 얻은 교훈이다.
(사진 이지미 프리랜서 studiojimilee@gmail.com )
말씀 들으니 참 곡절도 많으셨는데 잘 넘기셨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3초도 안 돼 그는 즉답했다).
제가 청소년기에 비뚤어지지 않은 것은 어머니의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너무너무 사랑했거든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 돈을 어머니께 갖다 드릴 때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참 좋았어요. 만인의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사랑이에요.
저는 그 점에서 운이 좋지요. 늘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집사람도 내가 사업 부도내고 힘들었을 때 만났어요. ‘학벌도, 얼굴도, 돈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을 나 아니면 누가 구제해줄까’ 하는 모성본능을 발동시켰다고 말하더라고요.(웃음) 많은 사람이 경제적인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돌아보면 돈으로 인한 고난이 제일 약하더군요. 생활수준을 낮추거나 참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건강, 사랑을 잃으면 회복 불능입니다.”
그는 인생엔 ‘동심 총량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어려서 애늙은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애어른’으로 중심을 잡다 보니 지금 오히려 ‘철부지 어른애’로 허당기를 발동한다는 것.
남보다 훨씬 세게 좌충우돌하셨군요.
그러면서도 늘 티핑포인트와 터닝포인트를 마련해 헤어나오셨습니다.
“내가 뭐든 한 번 빠지면 깊이 빠져 잘 헤어나오질 못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 역시 장점이 약점이고, 약점이 장점입니다. 무언가에 필이 꽂히면 무섭게 빠지는 것, 좋게 말하면 몰입이고 나쁘게 말하면 중독인데요. 식음을 전폐하고 2박 3일 바둑을 둔 적도 있습니다. 인생 반전은 결국 결단력입니다. 뒤늦게나마 정신 차리고 결심을 무섭게 하고 바람직한 것에 몰입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요.”
그는 ‘인생의 3대 결단’으로
“첫째는 어려운 가정형편인데도 3년 반이나 다닌 대학을 그만두고 재입학 결정을 내린 것,
둘째는 중년기에 바둑을 끊고 그 시간을 독서 등 건설적으로 사용한 것,
셋째는 정년퇴직 후 투자 실패로 힘들었던 시기에 글쓰기에 올인했던 것”을 꼽았다.
아드님만 셋이시지요.
SNS를 보면 아드님이 아버지와 이야기도 나누고 가족을 위해 양갈비 요리도 하는 등 살갑더군요.
“(얼굴이 환해지며)요즘 세대는 우리와 근본부터 달라요. 나는 전쟁 치르듯 치열하게 살았지만, 얘네는 즐겁게 누리고자 하니까요. 공학을 전공했는데 모 방송 주최 랩 오디션에 나가 본선에 진출하기도 하고…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요. 내가 애들에게 오히려 배웁니다.”
그는 아들 이야기를 꺼내자 영락없는 아들 바보가 됐다. 아들과 와인 관련 공동칼럼을 쓴 적이 있었단다. 소비자가 앱을 통해 와인 품질을 즉각 분석, 판단할 수 있게 한 와인평가 앱이 출현, 전문가 위주의 와인평가
2.0시대에서 소비자 중심의 와인평가 3.0시대로 넘어간다는 트렌드 기사였다. 기성세대인 홍 교수는 이 기사를 쓰는 데 그쳤지만 신세대 아들은 와인 검색 비비노 앱 창업자인 하이니 자카리아슨(Heine Zachariassen)에게 기사를 번역, 복사해 이메일로 보내 교신까지 하더란다. 그는 현재 아들과 ‘실리콘밸리 이야기’와 ‘유대 금융자본과 비트코인 세력 간의 세계대전’ 두 권을 공동집필하고 있다.
유대인 하면 교육열이 떠오릅니다.
자제분들께 적용한 유대인 교육이 있으십니까.
“웬걸요. 애들 어릴 때 저는 유대인에 대한 관심이 없었지요. 손주들한테는 유아 때부터 적용해보고 싶어요. 특히 베갯머리 교육과 밥상머리 교육은 꼭 해보고 싶어요. 잠자기 전 동화를 읽어주고, 밥상에서 인생의 산 교훈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하는 것이죠. 유대인이나 한국인이나 교육열이 높지만 큰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혼자 잘나길 원하지만, 이들은 철저히 협업을 강조합니다.”
그는 유대인과 한국인 교육의 가장 큰 차이를 두 가지로 요약했다.
달란트 vs 베스트, 학업 vs 인성이 그것이다.
우리는 공부의 목적을 역량강화, 즉 성공력에 둔다. 반면에 유대인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재능개발에 둔다.
또 우리는 경쟁에서 승리, 최고가 될 것을 주문하지만 유대인은 단결력에 둔다.
어려서부터 합숙교육을 통해 협동력을 체화해 유대인끼리 서로 형제처럼 돕는다. 상대의 단점을 보며 시기, 경쟁하기보다는 강점을 보며 협력한다.
이들에게 협상능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협동능력이다.
‘남을 비난하는 자’뿐 아니라 그것을 말리지 않고 들은 사람까지 ‘공공의 적’으로 금기시한다.
또 실력보다 매력, 즉 인성과 협동심을 우선시한다.
인생 2막을 앞둔 분들께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하늘은 일단 들이대는 사람을 좋아한다”입니다. 당장의 일자리를 찾기보다 오랫동안 할 일거리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들이대고 저지르고, 그다음엔 밀어붙여라. ‘하늘은 열정에 반해 마법을 일으키게 한다.’ 힘들 때 내가 스스로에게 한 주문이기도 합니다.”
인터뷰 후, 홍 교수가 자작시를 문자로 보내왔다. 이 시를 읽으며 ‘절대 절대 절대’란 말에 목울대가 울컥해졌다. 지금 2막의 새 신발끈을 묶고 있을 당신, 거센 풍랑에 맞부딪히더라도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 제목은 ‘거센 풍랑을 만나거든’이다.
▲서울고등학교와 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나와 1978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입사했다.
이후 뉴욕, 밀라노 무역관장을 역임하고 2010년 정년퇴직했다. 현재 세종대학교 대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 저서는 ‘유대인 경제사’(전 10권)다. 이외 화폐경제학 시리즈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등 다수의 저작을 통해 세계경제사의 흐름을 천착해왔다.(사진 이지미 프리랜서 studiojimilee@gmail.com )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고
박차고 일어나 맞서라.
일생에 한 번은 독해져라.
처절하리만큼 치열하게 맞붙어라.
길고 긴 힘들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다.
출구 없는 절망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라.
절대 포기하지 마라.
절대. 절대. 절대.
그 거대한 고난을 이겨내면 은혜는
슬며시 다가온다.
고난에 좌절하면 은혜 역시 고개 돌린다.
은혜는 항상 고난을 앞세우고 다가온다.
거저 오는 법이 없다. 얄미운 은혜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기자blizzard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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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 떠났다… 1557년 스페인은 파산했다
가진 땅은 없었지만 문맹 적고 셈 빨라…
추방당하고 간 곳마다 경제 부흥시킨 유대인
고대부터 현대까지 그들의 장단점 파헤쳐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입력 2013.01.26 03:05
유대인 이야기
홍익희 지음|행성:B잎새|664쪽|2만8000원
1492년 8월 스페인 세비야. 콜럼버스 선단의 신대륙 항해 준비가 한창이었다. 옆 항구에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배에 오르고 있었다. 유대인들이었다. 이슬람 세력을 쫓아내고 스페인을 통일한 이사벨 여왕은 '가톨릭 개종'과 '국외 추방' 중 양자택일하라고 유대인을 윽박질렀다. 명분은 종교문제였지만 속셈은 유대인 재산 몰수였다.
유대인 17만명이 스페인을 떠났다. 이후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들여온 막대한 자원으로 외형을 넓혀갔지만 속으론 골병들었다. 유대인들이 쥐고 있던 금융·유통망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결국 유대인들이 떠난 지 반세기 만인 1557년 첫 파산 선언(디폴트)을 하는 등 국운이 급격히 기울었다.
'유대인 이야기'는 구약성서 시대부터 현대까지 유대인에 초점을 맞춰 세계경제사의 흐름을 분석한다.
2010년 KOTRA 밀라노 무역관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하기까지 30여년간 세계경제 현장에서 유대인들의 활약을 목격한 저자는 10년이 걸려 책을 완성하면서 "친유대적도 반유대적도 아닌 있는 그대로 그들의 장단점을 보고자 애썼다"고 밝혔다.
책의 주장은 서구 역사에서 부와 패권의 흐름은 유대인의 이동사와 일치한다는 것. 로마제국에 대항했다가 고향에서 쫓겨난 유대인은 유럽 국가들에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존재들이었다. 13세기 영국, 14세기 프랑스, 15세기 스페인,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차례로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그때그때 자신들을 받아주는 곳으로 이주했고, 그 지역 경제를 부흥시켰다. 반대로 그들이 떠난 곳엔 경제 침체의 그늘이 짙어졌다.
현지인들과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내세운 유대인들은 박해받았지만 문맹(文盲)이 절대다수이던 유럽에서 유일하게 대부분이 글을 읽고 셈을 할 줄 아는 민족이기도 했다. 멀쩡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에 환전업·대부업·전당업 등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이를 기회로 활용했다. 추방당할 것에 대비해 늘 재산을 현찰과 보석, 부동산 등으로 분산해 놓는 포트폴리오, 세계 곳곳의 유대인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유통, '돈은 버는 것이 아니라 불리는 것'이라는 경제관념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생존과 경제적 번영을 가능케 했다.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정착한 곳은 벨기에의 앤트워프. 화폐와 금은(金銀)은 소지하지 못하고 황급히 보석만 챙겨온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보석유통업을 일으켰다. 이어 암스테르담으로 옮긴 유대인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세워 향료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고, 인도·동남아·중국·일본·서인도제도의 무역, 아프리카 노예무역도 주도했다. 청교도혁명을 일으킨 크롬웰은 아예 런던의 일정 면적을 유대인들을 위한 자유경제지구로 지정해줬다. '더 시티'의 원조다. 유대인들에게 미국은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의 땅이었다.
바빌론 유수 시절 고대 중국과 비단 교역에 나섰고 소금 정제업, 다이아몬드 가공과 유통 독점, 석유산업에 이어 현대 금융업을 장악하고, 중세시대 '궁정 유대인'처럼 미국의 재무장관과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의장을 줄줄이 배출하는 유대인 파워는 현대로 올수록 더욱 압도적이다. 꼼꼼한 자료 정리를 통해 유대인의 역사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가장 큰 장점. 막연한 두려움이나 선망이 아닌 차가운 머리로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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