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
- 이 윤 선
1. 에스칼레터
가만히 발만 올려놓아도
위로 아래로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것
무겁거나 가벼운 사람도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탈 수 있는 것
생도 배고픔도 배부름도
기름져 질 것 같은 것
평등인 듯 불평등인 것
천국의 계단이었으면 좋겠다
2. 뱃살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요새
지독한 독종
3. 생색 값
부담 값이 더 비싸다
4. 겨울 풍경
숲에 눈이 내리면
모든 나무들은 다 하얀 옷이 입혀진다
삐져나온 속옷도 나름 멋이라면 멋이다
하얀 옷은 꽃이다
겨울꽃이 피어난다
맨몸으로 해탈하는 풍광
하얀 세상이 꿈꾸듯 일어나
찬바람까지도 끌어않고 노래한다
매서운 세상에서 펼쳐지는
눈물시린 평등의 옷
하얀 희망
5. NO 낭만 카페
니캉 내캉 서로의 목소리에 취해
눈동자 속의 호수와 눈물과 반짝이는 별이 뜬
검은 동공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고 싶은데
네 영혼의 깊은 숲 속
산새노래 바람소리 오솔길로 난 전나무 숲의 울창함
흙의 깊은 속살 속에서
태초의 너와 내가 나누고 싶은 고백
세상의 시작과 마지막처럼
조용히 교감하고 싶은데
음악이 커도 너무 크다
젠장!
6. 지인들
난 지금도
에너지가 고갈되어 사막 같은데
좋은 기를 불어 넣어줘도 모자랄 판에
왜 너희들은
왜 괴로운 타령만 나에게 퍼붓냐?
바글바글 달려들어 나를 파 먹냐?
나도 징징거리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7. 새해 덕담
폭설 온 새해 아침
쌩똥 빠지게 집 앞 눈 치워 놨더니
그놈, 허연 머리로
눈 묻은 발 더러운 가래침
우리 집 앞에 탈탈 털고 뱉고 간다
에라이, 심은 대로 거두라
얍!
8. 눈 치우는 풍경
내 신랑과 앞집 할아버지
두 남자가 폭설을 치우고 있다
철물점 벽돌 덮어 논 널빤지를
나란히 잡고 집 앞과 경사진 골목의 눈을 치우고 있다
나란히나란히 사람들의 안전을 치우고 있다
나란히나란히 배려를 치우고 있다
절제된 침묵을 밀고 있는
골목이 긁기는 소리의 파찰음
중심의 중심과 균형 속에서
무게 속 무게가 언덕 아래로
나란히 나란히 밀려 나간다
널빤지 나란히 잡고 공생의 폭설을 치운다
차갑고 매정한 골목 풍경에
모처럼 훈훈함이 재현되고 있는 부신 풍경
9. 택배
새해 첫 배달된
나이 한 살
거부할 수도 없고
반송할 수도 없는 강제된 우편물
잘살아지든 못살아지든
각자의 몫
365일
10. 내 유년의 밥 풍경
나는 하늘의 것들을 미워했다
아름답게 내리는 눈을 미워했다
싸래기쌀도 아니면서 밀가루도 아니면서
우리 가족을 더 배고프게 고문하는 것
나는 하늘의 별들을 미워했다
뽀빠이 과자 속 달콤한 별사탕도 아니면서
배고파 잠 못 드는 밤을 고문했던 것
둥근달을 미워했다
한 입 앙, 보름달 빵을 베어 물면 배부를 것 같은
따끈한 호빵도 아닌 달
나 아닌 그 어디다 몸을 떼어주고 나타난 초승달
한 번도 나에게 저를 떼어준 적 없는 달
아님, 혼자 두둑이 어디선가 배부르게 얻어먹고
트림을 하며 나타난 보름달
솜사탕과 솜이불 닮은 구름
한 번도 달콤하거나 추위를 덮어주지 않던 것
저들만 늘 행복하거나 배불러 웃는 죄목
나는 하늘에 있는 것들을 다 미워했다
사계절의 고통 속 내 찌뿌린 미간
똥구녕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간
내 배고픈 유년은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불평등의 하늘을 지독히 미워했다
11. 희노애락
함박눈 보고
신나게 놀던 강아지
다시 비가 내려
얼음밭길이 된 길을
발을 언짢게 털며 간다
12. 응원가
까치 까꿍까아꿍
까마귀 가가가가
멧새 짝짝짝짝
직박구리 씩씩씩씩
훈민정음 자음 모음가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살자고
상계동 구민들을 응원한다
13. 영역 표시
개 새끼가
검은 비닐봉지에 오줌을 갈긴다
제 것이라고
제 영역이라고
바람이 데려가 버릴 저것을
청소부의 빗자루가 쓸어가 버릴 것을
저 허망한 빈 비닐봉지에
14. 인간 이름에 대하여
인간이 원래는 후덕한 족속이었나 보다
개에게 엄마 아빠라는 족보를 만들어 주는 걸보면
인간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애미 애비였나 보다
친족 핏줄에게나 쓰는 호칭
자연스럽게 개와 고양이에게 쓰는 걸 보면
인간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어미 애비였던 게다
인간도 동물이니 영영 틀린 말도 아니다
15. 항해자
태양
우직한
하늘의 파수꾼
16. 유년의 고무신
벗어놓은 검정 고무신에 개가 똥을 싸놓았을 때
개구리가 밤새껏 숨어 잠들었던
발가락에 느껴진 찐득한 점액질은 차라리 덜 공포스러웠다
쥐벼룩 가득한 쥐가 드나들던 것도 참을 만했다
정말 끔찍하고 무서웠던 것은
식구들 많은 집에 오강은 금방 차올라 넘쳐 버리기 일쑤
뱀이 신발 속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걸 본 후
호롱불 없이 밤에 변소 갈 때 신발을 신어야 하는
차라리 이불에 지도를 그려버리고
벌로 매를 맞는 것이 속 편하던 시절
차선책으로 마루 끝에 작대기를 가져다 놓고
신발을 신기전에 막대기로 검사하고 신었다
한 번은 신발을 방에 넣었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던
신발을 사수하는 일은
유년의 딜레마였다
사수해야할 신발 속은 늘 공포전쟁이었다
지금까지도
이 세상을 걸어내야 할 화두로 남았다
17. 나는
삶에게
육체와 정신과 혼까지 희생에게 희생해 주었다
그러나 삶과 너희는 고마워하지 않았다
더욱 모질어지는 착취만을 일삼았다
나에게 엿만 먹인 삶
아나, 너나 엿 처먹어라
18.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 저는 저의 가족에게 십일조를 하겠습니다
감사 헌금과 추수 감사절 헌금과 너무나 많은 명목의 헌금들을
제 가난하고 애처로운 가족들을 부양하는데 쓰겠습니다
가난과 고통에 허덕이며 위태롭게 서 있는
우리 가족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거대한 자본의 정수에 서 있는
진짜의 본분을 잃어버린 대기업화된 교회는
혼자 폭식을 일삼고 가난한 우리 위에 군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절대 하나님의 교회를 부정하진 않습니다
내 서러운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내 가족들을 위해
헌금을 바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제 푼돈정도는 거뜬히 눈 감고 용서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제 주변인들에게
이웃헌금을 자비로 바치겠습니다
이 뜻이 어긋나지 않도록 변질되지 않도록
떨리는 마음으로 소중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 신념을 잘 지켜 나가겠습니다
나의 유일신
나의 하나님이시여
19. 우리 집, 은총
낮과 밤에
내 집 지붕에 빛이 잠시 살다 가더라
낮에는 해가
밤에는 달이
바람과 비와 눈이 사계의 눈물과 응원과 슬픔을 덮어주고 가더라
저 희망들이 나를 응원하고 있었더라
필사적으로 나를 이불처럼 덮어주며 보호해주고 있더라
20. 에잇!
햇볕이 돈 달라더냐?
삶, 이 시시한 살이
에라, 저 농익은 빛살 만나러 가 버리자
21. 교회술
포도주
22. 마지막 통증
사랑하는 아들들아
내 마지막 통증은
병든 내 육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란다
23. 가해자들
용감하다
야심한 밤을
쨍그랑쨍그랑 깬다
달도 베어 버리고 별도 흔들어 떨어뜨리고
사람들의 잠도 잘근잘근 씹어 버리는
저 술 목청이 무서운
잔인한
예의 없는
저 술집 잡년과 그 패거리들
아,
나는 너무도 간절히
내 잠과
삶을 구원받고 싶다
24. 산에서
산에서 더덕을 만났다
향기를 숨기고 숨죽인 군락지
귀신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딱, 네게 걸렸다
자비심 없이 새끼까지 다 캤다
가만히 생각해도 내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자꾸 냉혈 동물이 되어 간다
25. 봄나물 철
나물을 뜯으러 자주 다니다 보니
뱀을 봐도 친구 같다
나를 보고 뱀이 꽁무니 빠지게 도망간다
하, 내가 무섭다니
내가 쟤에게 강자일 수 있다니
안전한 거리에서 뱀이 혀를 낼름거려도
눈 흘기며 토라진 친구 같다
어쩌면 내가 외로운 가 보다
뱀이 편해졌다
서로를 공격할 수 있지만
무기 하나씩 가지고 있지만
묵언으로 서로를 용인하는 봄나물 철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