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기억
-인생표류기
이 윤 선
1. 우선법
이승에서는 산 사람이 우선
저승에서는 죽은 사람이 우선
2. 내가 인간의 몸으로 너에게
마음 약한 신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라
이 못된 것아!
이 검은 털 짐생아!
3. 야, 봄이 터졌다
후딱 나오그래이개구리 기지개 킹께새싹이 밀려나오고꽃이 헤벌나게 피어난데이천상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새들의 합창소리를 들어 보그래이시방 봄이 홍시처럼 터져 부렀다야가고 오지 않을니 청춘 내 청춘 어화둥둥 춤추게아야, 여그 보그래이봄이 풍선처럼 두둥실 떠오른다야눈부신 봄이 환장하게 터져 부렀써야후딱 일어나 문 열고 내다 보그래이천국이 어데 따로 있겄냐시방 여그가 천국이랑께
4.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인연은 고약하게 질겨진다
풀어라
풀어라
풀어라
5. 무당거미
태어나서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곱게 화장을 했다
그리고는 단 한 번도 화장을 지운 적이 없다
무당처럼 원색으로만 치장한 변신술밥을 낚아먹기 위한 전략이다
직녀처럼 베틀에 앉아 정교한 씨실과 날실을 기워 입고현란한 춤사위 펼칠 때햇살도 바람도 빗방울도 몽롱이 취하는 몽한그러나 살고 싶거든 속지마라가녀린 그 줄 위에서 참새의 날개도 꺾을 수 있다는 것을화장이 짙을수록유혹을 낚는 솜씨는 더욱 치명적이다
허공의 덫누구든 걸려들 수 있다화장을 한 번도 지우지 않고 생애를 다해
그 위에 켜켜이 덧칠에 덧칠하는 저것의 야욕
가녀린 듯 약한 척 흐물흐물 추는 춤사위로목숨을 낚고 있는 저 무서운 것
조심하라그러나 그 또한 너의 선택
5. 따스한 마음 한 자락 고맙네
회색빛 하늘이 지상을 덮을 때옷자락사이로 찬 기운이 스며올 때뼈에도 구멍이 숭숭 드나들 때온 생애가 내 것이 아닌 양웅웅 소리로 눈물 날 때반짝, 그대가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네
오랫동안 잃었던 이 따스함은 무엇인가?태초의 어미 뱃속처럼 웅크리고 누워
이 온기를 가만히 느껴보네
내 안의 거친 풍랑이 잠잠해지네
얼마만인가?차갑게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가버린
나를 흐물흐물 풀고 있는 이 따스함
그대가 작은 위로인 듯
큰 위로를 건네는 응원값 여기 있으니그래, 값지게 다시 잘 살아야겠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그대를 만나면정말 그대의 선물이 고맙고 따스했노라고용기와 힘이 되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우연히 그대를 만났을 때귤 한 봉지따끈한 호빵 몇 개뜨거운 군고구마 사 줄 수 있게제발 내가 빈주머니이지 않기를
6. 위로
어둠 속에서 울고 싶을 때그 언덕길에가로등 불빛이 내 가는 길을 비춰주네요
애썼다, 애썼다, 참 많이 애썼다수고했다, 수고했다, 참으로 수고했다
내 노곤한 삶의 발자취 다 알고 있다는 듯자꾸 꺾어지는 무릎 허물어지는 마음일으켜 세워 주네요
환한 세상에서도 길을 잃은 나에게험한 세상 풍랑에 좌초된 나에게칠흑의 밤 가로등 불빛이 내 길을 비춰주네요
애처로운 자야, 사랑하는 자야길 잃지 말아라축복하노니 험한 세상 잘 헤쳐가거라
토닥토닥속삭여 주네요희망을 주네요
7. 죽자고 살아도 죽자고 초죽음인 생 위에서
나는 끝내 어찌해야 하는가?
새장을 탈출한 앵무새가차가운 보도블록에서 죽는 날나도 살아있는 죽음을 신음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형벌을 받았다는프로메테우스처럼감히 범인은 상상할 수도 없는 생의 질고들
죽어 흐르는 칠흑 같은 밤을 허우적거려 봐도아침을 여는 새벽길을 뒤져보아도이 거지같은 생은 나를 절망케 한다
새장을 탈출해 파란 하늘을 날다창문에 머리를 박고 장렬히 죽어버린
앵무새를 동경해 버릴까?
비극이 희극처럼 느껴지는답 없음의 답 앞에서나는 생의 길을 잃었다
무엇을 위한 삶이기에
치욕스런 삶을 이토록 치열하게 견디고 있는가?여기까지만 살까?여기까지만 죽을까?
8. 삶이 산 너머 산이었을 때
속수무책견디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억울하게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시시각각 목을 조여 오는 삶의 죄목들똥구녕이 찢어지게 가난하게 태어난 죄청춘을 불살라도 끝내 사랑받지 못한 죄수억의 희생들이 무가치하게 짓밟혀버린 죄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도 모자라
혼까지 불살랐어도 끝내 배신의 고배를 마신 죄내가 이용당한 모든 죄들은신 앞에서만이 죄가 아니다검은 털 검은 짐승들 앞에서는태어난 근원까지도 아무리 몸부림치며
증명을 해도 비웃음과 조롱거리일 뿐내 죄목을 나열하는 단두대 앞어처구니없는 삶의 편린들그 험산준령 산 너머 산 위에나는 피를 흘리며 만신창이가 되어 서 있다비정한 삶이여, 더 이상 보채지 마라안 미안하게도지독하고 모진 삶을 증명할 모든 카드는 다 썼다
이젠 신의 자비만 바랄 수밖에신의 나라에 들어서는 길 밖에
9. 기회를 줘도 너는 왜 못 잡니?
배고파 애간장을 끓이며 우는 멧새에게건물의 쩍쩍 갈라지는 틈의 틈새에
새끼까지 낳아 위태롭게 키우는 작은 미물을 위해
만 번을 울 걸천 번만 울라고천 번을 울 걸백 번만 울라고백 번을 울 걸열 번만 울라고
새로 고친 담벼락에 두 군데나소복이 소복이 쌀을 보시한다
부처님과 예수님께는 드리지 않는
공양미를 큰 맘 먹고 드렸는데도코로나로 죽을 것 같은 위태로운 생계 속에서도
너희만이라도 굶지 말고 한 세상 배불리 먹다 가라
고봉밥보다 더 높은 고봉 쌀 듬뿍 줬는데도이런 호랭이가 물어갈, 환장할 멧새기름투성인 시컴한 바닥만 쪼며 날아다닌다
그 부리로 구한 몇 톨의 먹이를 제 새끼에게 가져다 먹인다
제발, 멧새여
내 아는 노랭이 부자는 먹을 것 앞에선
찬스에 강해 움켜쥐는 힘이 혀를 내둘릴 정도란다
너도 만찬을 코앞에다가 차려줬으니
제발 그 부자맹키로 이 풍요를 화악, 낚아채 가거라
한 세상 코가 파묻히게 배불리 먹다 가거라제발 등잔 밑 좀 살펴봐라
목 터지게 울지만 말고오염된 먹이로 금쪽같은 새끼를 혹여 잃지 말고황폐한 사막 같은 바닥만 뒤지지 말고
네 둥지에서도 훤히 보이는 담벼락을 한 번만 진지하게 응시하라
이 찰나의 풍요를 다른 새들에게 빼앗기지 말고
얼른 주머니에 챙겨라
온종일 헛수고로 부리와 발과 날개가 병들어가는 멧새여
새끼들이 배고파 진종일 목이 터져라 저리 우는데제발 담벼락 위로 한 번만 날아와 보거라
너는 왜 기회를 줘도 못 챙겨가니?
다른 큰 새들이 날아들고 있다안타까운 작은 생명아
10. 낙꽃
앵두꽃지 꽃자리에서 화안하게 피어오만 잡놈들과 어화둥둥 춤사위청춘 자랑질 흐벅지다
천년만년이라도 피어 있을 것처럼 수선을 떤다
우습다
빠르게 늙어버린 시든 꽃잎들왜, 꽃샘바람을 핑계로내 마당으로 날아드는가?
슬그머니 기어들어와 천연덕스럽게 눕는가?우습다야기가 차다야
11. 자목련
도끼 자루 썩은 줄 모르고
너에게 취한 것은 나의 탓이다
너의 탓이다
풍요의 봄날결핍의 눈물 가득한 너
눈물방울이 너무 커서 그만 나를 뚝 떼어내손수건이 된 내가 너를 닦아주느라내 도끼자루가 썩었구나
바람 따라 속절없이 가버릴 줄 알면서도너를 안아주느라내 영혼이 텅 비어져 버린 줄 몰랐구나
너는 꽃이면서도 봄의 노래이지 못했으니나를 희생양으로 끌어 들었으니
너의 탓이다그리고 다시 나의 탓이다
12. 자유를 꿈꾸는 꽃이여
내 민들레여,이젠 너를 내 품안에 품어주지 않으련다
먼 어느 날인가네 씨앗을 받아다가 내 마당 귀퉁이에다 심어 놓았었다
네가 해년마다 봄이면 꽃을 피우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까치발까지 들고 서서 머리를 부풀려 바람 따라 날아가려할 때무서운 세상에서 혹여 좌초될까봐기를 쓰고 두 손으로 받아내어내 곁에 다시 심었다
이젠 그러지 않으리라
작은 내 마당에도 세상 풍랑 휘몰아치는 일이 일어나고눈물겨운 일 많아서차마 눈뜨고 못 볼 꼴 많이 일어나서이젠 너까지 끌어안을 힘없어졌다
네가 그리 자유를 미치듯 꿈꾸고 있으니좋다, 그리하라
넓은 세상을 향해네 날개로 훨훨 날아가 잘 살아라
이만하면 지상에서의 내 소명은 다했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몫을
네 힘으로 잘 헤쳐가길 빈다
안녕, 하얀 솜사탕 같은
씨방을 부풀리고 있는 내 민들레여바람의 기류를 타려고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 있는 내 민들레여
훨훨 잘 날아가서 잘 살아 남아라
신의 가호가 있길신이 눈동자처럼 보살펴 주시길신이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지켜 주시길 빈다
13. 가가가가 가가가가 가가가가
까마귀가 아침부터 누굴 가라고 하는지막무가내로 가라고 성화다
탁성으로 아침 공기를 무참히 깨고 있다가가가가 가가가가가게하고 싶으면 너 먼저 가라
너는 가가가 가라고 외치고 있는 순간은 이승 새우리도 숨 쉬고 있는 동안은 이승 사람살려고 와서 아침마다 이 무슨 짓이라니?가가가가 가가가가 가가가가제발 너나 가가가가
14. 도시빌딩들
햇볕을 짤라 먹고들천연덕스럽게들뻔뻔하게들얼굴 두껍게들고개 빳빳이 들고들주인행세를 하고 있다갑질 한번 대단하다
15. 너
나에게 왔던 네 마음이 도망가 버린 걸 알겠더라
안 그런 척 억지로 참고 있는 걸 알겠더라
내 마음도 조용히 걷어 들여야 함을 알겠더라
하나도 하나도 미련이 없어서 좋더라
솔직히 도망가고 있는 네 마음이내 마음과 같았으므로잘 가,우리 서로 잘 안녕
16. 그까짓 시련쯤은 이젠 껌 씹는 일이다
돌아보면생을 살아 나오는 동안나에겐 천국보다구비 구비 지옥이 더 많았다염병,이젠 이까짓 시련쯤은 껌 씹는 일도 아니다
17. 슬픔
나는 허깨비다
연체동물이다
뼈를 작대기로 짚고 일어서서뼈의 집을 짓고뼈의 푸른 이파리를 펄럭이고 싶은데
일어날 수 없는,흐물흐물한 슬픔이 영혼까지 파고들어바삭바삭 깨져있는 상처눈물을 뒤집어쓰고 있다
향기 나는 5월 속에서도절망의 끝에 가 있다
칠흑의 어둠이다의심스럽다희망이란 게 있긴 한가?
18. 봄빛노래
벚꽃 피어나는 언덕을천천히천천히 걸어가요
파란하늘지저귀는 멧새들산들바람 춤추는 언덕길삶의 무게들 훌훌 털며천천히천천히 팔을 벌리고 나 걸어요
감춰놓은 눈물이 마르네요힘겨운 시간이 가벼워져서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요
아프지 말자고 맹세하던 내 안의 나찬란하게 꽃핀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요
때론 눈 을감고 때론 눈을 뜨고천천히천천히 생의 찬가를 불러요시냇물 소리 따라 떠나는 삶의 번뇌들
지금 여기가 천국이네요질긴 목숨 하나로 건너온 슬픈 나를 웃게 하니까요탈피된 내가 산들바람 속에 피어난 꽃이 되고 있어요감사히 감사히나 천천히천천히 행복으로 물들어가요물들어가요
19. 당신은 당신의 지옥 속에 앉아 울부짖고 있고
나는 내 지옥에 앉아 울부짖으며 피눈물을 삼키고 있는데말 한 톨로도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면 안 돼지이글거리는 분노의 뿌리가 당신에게서 시작된 것은 아닐지라도그 위에 얄미운 숟가락 얻으면 안 돼지위로하고 서로 보듬어야 참 인간 아닌가!
20. 매화
꽃이 되기 전 벙근 모습이마치 병아리콩 같기도 하고아가의 옹알이에서 흘러나온 침방울 같기도 하고아이들의 장난감 총알 같기도 하다
햇볕의 촉수가 닿기만 해도함박웃음을 터트리며 터질 것 같은 찰나의 봄
숨죽인 겨울을 이기고 온 훈장들이가슴팍에 주렁주렁 달렸다
가만히 만져보니 봉오리의 볼들이 차다
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녀석들에게선 향기가 난다
내 가슴에도 몇 방울의 희망을 달아본다
나도 너희처럼 시린 봄살이지만활짝 필 오뚝이꽃을 꺼내 달아야겠다
21. 천둥처럼 큰 소리로 외치듯 말하지 말고 속삭이는 바람처럼 조용조용 말해줄래?
먹구름처럼 우울한 목소리로 말하지 말고봄 햇살을 얹은 솜사탕 같은 달콤한 목소리로 말해줄래?퉁명스런 목소리로 관계를 엉망으로 흩트리며 말하지 말고꽃향기 얹은 꾀꼬리 목소리처럼 말해주지 않을래?용기의 용기를 더하고희망의 희망을 더하는사랑스런 소리의 마법은 네 안에 잠자고 있단다노력하면 보석처럼 빛나며 떠올라와네 인격이 되는 환한 기적의 음표들그대여, 다시 한 번 더 조심스럽게 말한다그대가 다듬지 않고 함부로 쏟아내는 목소리에내 귀가 노여움을 탄다는 것을내 마음에 노여움이 스며든다는 것을돌부처도 돌아서게 하는 차가움을 갖게 한다는 것을
이왕이면 서로서로 예쁘게 엉켜 한 세상 노래해주는
지기가 되어주면 좋지 않겠니?촉촉한 봄비로 문을 여는 꽃으로시원한 여름날의 바람으로청명한 가을 하늘로새하얀 함박눈으로 우리 한 세상 예쁘게 살아가면 좋지 않겠니?그대여내상을 입히는 목소리로 다가오지 마라내가 떠나갈 수 있단다서로 얼굴 붉힌 기억만 있으면 얼마나 불행하겠니?마침 세상은 환한 봄이 문을 열고 나오고 있다우리도 하늘하늘 춤추는 무희처럼
환한 웃음꽃으로 어깨동무 하자꾸나
그렇게 살면 좋잖니?
22. 니들의 청춘에도 고통이 있듯
부모인 우리에게도 말 못할 고통이 있단다너희는 너희의 인생에만 몰두하면 되지만부모인 우리의 어깨엔 너무 무겁고 버거운 짐이 얹혀있단다
위로도아래로도비정하고 무정하게 그러지 마라매순간 피눈물 흘리는 것도 모자라그 위에 왜 비수를 얹는다니?천륜도 끊고 사는 세대라더라우리도 인연의 끈을 잘라버릴 수 있단다다만 우리의 목숨보다 더 너희를 사랑한 죄로
견디며 참아주고 있단다푸른 자식들아적당히 하라우리에게도 양날의 칼날이아직까진 퍼렇게 살아있다사랑이 변질될 위태로운 경계의 선외줄에 선 우리무례하고 방자함을 너희의 권리라고 착각하겠지만알아다오우리도 부모이기를 거부할 권리 있다
23. 관계
덕 보려고만 하지
덕 줄라고는 하지 않는다
24. 낙화
벚꽃 휘날리는 시간 속의 그대와 나우리가 가는가꽃이 가는가훨훨 꿈꾸듯 춤추는 이승분분히 휘날리는 꽃잎의 행간에 그대와 나도 여백으로 흐르고 있다나비의 날개 짓으로 작별을 고하는 이별식벚꽃도 가고 그대와 나도 간다풍광으로 남은 산과 사람들의 집들이꿈결 속에 잠길 때바람이 데리고 간 꽃잎은 허공을 버리고 지상을 쓸고 다닌다이승에서 나서 이승으로 떠나온 유와 무로흐르는 꽃잎노래인가눈물인가낙화여!우리여!
25. 다 그래
자기애 강한 것은 다 똑같아너는 셀카 찍는 것으로 자기애를 드러내고또 너는 명품 옷 입는 것으로 자기애를 표현하고또 너는 끊임없이 배워서 지식의 탑을 네 안에 쌓는 자기애의 성을 만들고또 너는 입을 쉴 새 없이 놀려 지 자랑질로 자기애를 나타낸다
나인들 자기애가 없겠니?
설령 자존감이 바닥을 치며 앉아있다고 해서 자기애가 없겠니?우리 존재의 존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애에 중독되어 있어그것이 너무 지나치다보면 관계와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자기애가 지독한 병이기도 하거든너나 할 것 없이 육체와 정신을 건강하게 하는 자기애를 추구해야해그 화두를 잘 조율해서 서로서로 조화로움 속에서 공생해야 해
서로를 보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해그래야 세상이 아름답게 굴러갈 수 있잖겠니?
악취 나는 행실머리엔 누구나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거든외골수는 본인 스스로 외롭고 고독하게 만들 수 있거든
자기애?좋지건강한 자기애는 좋은 거야
좋은 인품 속에다 통제할 능력만 잘 갖춰진다면우리 모두의 생을 풍요롭게 할 수 있으니까!
26. 소풍밥
뚝딱, 우렁각시처럼 소풍밥을 쌀 줄 아는
그대가 곁에 있어서 좋다
우리 시련의 봄이어도 참 좋다가슴이 아직 추운 겨울이여도 좋다
이렇게 환장하게 꽃핀 세상에그대와 나 나그네로 잠시 앉아 있을 수 있으니 좋다
국민학교 시절 동무마냥일본놈의 <벤또>라는 말을 썼던그 유년의 도시락을 우리 서로 알고 있으니 좋다
도토리 키 재기 같은 아픔이 묻어나던 추억의 소풍밥도시를 살아도 아직 시골밥을 쌀 줄 아는
그대가 곁에 있어서 더욱 좋다
회색도시를 닮지 않아서 더더욱 좋다자동차 소음에도 멧새 노래해 주니이보다 호사가 또 어디 있을까
우린 이 소풍밥을 먹고 오뚝이가 될 수 있으리라
쓰러져도 용감하게 다시 일어날 수 있으리라찬란한 봄이 가슴에 다시 피어나리라슬픔이 물든 볼을 가지고 있어도우린 승리꽃을 활짝 피울 수 있을 테니까모처럼 가슴이 따스한 날그대의 소풍밥이 하늘과 땅과 허공에다
내 시린 봄을 펼쳐놓았다내 시린 눈물이 봄바람에 마르고 있다고맙다, 그대여그대의 앞날에 축복 있으라
27. 지금쯤이면
고향 멧뚱가에삐삐꽃 올라왔을낀데귀신손이라며 무서워하면서도살금살금 다가가 뽑아선가난한 뱃고래 채웠던 그 통통히 알 벤 삐비꽂지금쯤이면 앞 다투어 올라왔을낀데봄이 흥청하게 무르익은 지금쯤이면지금쯤이면뼛속까지 타향이 된 나
오늘은 고향의 삐비꽃 생각에 더 이상 배고프지 않는데
괜스레 배창시가 고프다눈물이 난다
28. 도긴개긴
너도 니 시련이 아프듯이
나도 내 시련이 아프다
29. 편백나무
길쭉한 듯 오목이 푸른 나무생동감 있는 푸름과 생기 가득한 모습
푸른 물 나에게도 옮겨져라 옮겨져라
주문을 외우는 손 촉수 따라들여다 본 곳
더 은밀한 깊이 속으로 손이 뻗어 들어가자훤히 들어나는 검은 블랙홀거기, 죽어있는 이파리들의 희생이 올 오롯이 숨어 있었다
눈을 질근 감았다이것이 어쩌면 생의 이면과 저면이
빛과 그림자로 공존하는 것을
너도 나처럼 이렇게 속이 곪아 터져 문드러져 있는 것을
푸름이 푸름만이 아닌 이 불편한 진실이오히려 편안하다
30. 거미의 빈곤
가을 날상수리 껍데기만 낚아놓고망연자실 어깨까지 축 쳐져있다정신 차려라네 겨울이 코앞에 있다모진 겨울을 어떻게 건너갈래?
응?
31. 재미로 풀의 싸대기를 쳤니?
명심하라
그 풀은 목이 꺾일 수 있단다
32. 점
수억의 사람들 속에 사람들이 있고그 사람들 속에 사람들이 있고그 ....그 사람들 속의 ....사람 중에내가 있다
33. 가엾어라
내 작은 꽃비 한 방울에도 아파하는 내 가엾은 꽃바람 한 점에도 쓰러져버리는 내 가엾은 꽃살포시 날아와 앉은 나비 무게에도휘청거리는 내 가엾은 꽃흐린 날에도 흐려져 울어버리는 내 가엾은 꽃햇빛 찬란한 날에도 화르르 화상을 입어버리는 내 가엾은 꽃존재가 아파서 꽃이면서꽃이 되지 못한 내 가엾은 꽃어느 세상으로 데려가야 아프지 않을까내 가엾은 꽃그냥 바라볼 수 없는 내 가엾은 꽃세상 어디쯤에 데려다놔야꽃의 이름으로 활짝 웃을까내 가엾은 꽃내 가엾은 꽃
34. 도시락 정신
수선 집 야쿠르트 잉크 아줌마들점심값을 아껴 매일 오천 원씩을 모아이백만 원과 또 이백만 원을 더 모았다는 말 듣고정신이 번쩍틈이 많은 나를 반성한다
개똥같은 관계들에게 바친 내 주머니섭섭하고 후회스런 시간은 돌아오지 않겠지만이제라도 저들을 명징하게 배우리라
한 평도 되지 않는 수선 집 귀퉁이에서 웅크리고 먹던
짠한 도시락 풍경 잘 가슴에 담으리라희망 고문도 기적임을 알아 가리라저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먹던 도시락알뜰살뜰한 힘으로 꽃피운 시간작은 돈으로 큰돈을 만든 그 절약정신 앞에번쩍!흐트러진 내 정신 상태를 점검한다도시락의 힘, 잘 배워 따라가야겠다
35. 슬픔이 오고가는 시간
사람이 목숨만 붙어있다고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36. 너는 약자다
어미인 나도 약자다아비인 니 애비도 약자다
우리의 출발점은 약자라는 명제를 가슴에 잘 품어야 한다그러므로 어떤 상처가 와도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스스로 스스로그 상처를 이기는 것이 답임을 가슴팍에 잘 새겨 놓아라
그러면 어떤 상처 앞에서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연단시켜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상처를 이겨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처음은 약자였어도 종국에 가서는 강자가 될 것이다
아들아 힘내자강하고 담대하자
너와 우리는 지독한 약자지만강인한 강자의 삶을 펼쳐낼 수 있다
37. 어른 손가락만한 작은 새가
너무도 부지런히 날개 짓을 하며
아침을 뒤진다
오동나무와 푸른 갈대 대궁을 타고 다니며쉼 없이 노래인지 울음인지 비명인지 모를간헐적인 소리를 낸다유유히 아침 햇살을 받으며떠나가는 시냇물 소리는저 작은 새의 소리에 묻혔다배가 고파서 우는가어미를 잃어 우는가생이 무서워서 우는가저리 소리를 지르는 동안작은 몸이 바스러져 사라질 것 같은간절한 통곡 같은 울음애처로움이 가슴에 담겨져서가던 발걸음 멈추고 떠날 수 없는눈앞의 삶이 불편하다내 모습이다
38. 스텐딩 오더
죄를 죄로 갚지 않기를분노를 분노로 갚지 않기를슬픔을 슬픔으로 갚지 않기를이에는 이로 갚지 않기를눈에는 눈으로 갚지 않기를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기를칼을 칼로 갚지 않기를총을 총으로 갚지 않기를암투를 암투로 갚지 않기를저주를 저주로 갚지 않기를우리의 죄를 대신해 자신의 외아들을
속죄 물로 바치신 하나님의아가페 사랑만이 답이다지옥 같은 세상을 향한 화두악한 스텐딩 오더를신의 선한 스텐딩 오더로!
39. 아아아
내 영혼이 아프다고
아아아아아아아
인간들이 아파서 쓰라다고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머리 검은 짐승들이 다시 아프다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가 꼬꾸라져 아프다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 탓이다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40. 이 또한 모두 지나가리라
생을 사는 동안재밌게 산 시간은 짧았다
우울하게 산 시간은 더 많았다
설렘에 가득한 시간은 찰나처럼 지나갔으나섭섭한 마음으로 흐르는 시간은 길었다
기쁨에 찬 시간은 짧았으나슬픔에 몸부림친 시간은 서럽도록 길었다
환희에 찬 시간은 짧았으나고통에 신음하던 시간은 길었다
감사가 차고 넘치는 시간은 짧았으나절망감에 하늘이 무너지던 시간은 길었다희노애락 중에비극적인 시간이 더 많았을지라도분노에 찬 시간들이 더 많았을지라도그러나 잘 참고 견디어야 한다이 또한 모두 지나가리라
41. 숲
모진 겨울 앞에 옷을 죄다 벗어버리고맨몸으로 서 있는 나무들 나무들리얼한 척추들이 바람의 매를 맞고 있다분분히 휘날리는 눈물과 비명 속에서여름날이 푸르디푸르렀음을기억하라기억하라응원하는 소나무의 갈채를 받는다한 때는 숲을 다퉜을 나무들은시리디시린 손끝과 손끝으로 서로를 어루만지며생의 쓰디쓴 맨살로희망고문을 견디고 있다
42. 그녀가 나를 제대로 오독했다
나를 증명할 일이 번거롭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냥 내버려 두자
그가 죽을 때까지 나를 오독하다 가게 하는 것이
내가 그녀에게 준 벌이다
43. 인간사
상대에게 아쉬운 것이 없으면
비겁해지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44. 0원짜리
어떻게 뜯어먹는 데는 적극적이면서배려하는 데는 개똥이냐?너란 인간, 노여움을 뛰어 넘어서염증이 난다구역질이 난다
45. 탄식
꽃길에서조차도
복병이 숨어 있구나
46. 지당한 말
바람이 부니까
꽃이 춤추는 거지
47. 민들레도 죽는다
보도블록을 뚫고도시의 틈새를 악착같이 붙어 뿌리를 내렸다석회 너머의 흙 속에다 생애를 박고질기게 모질게 살줄 알았더니
제 열반 세상을 펼치더니
허망하다식당에서 쏟아져 나온 커피와
담배꽁초와 가래침에 죽었다
민들레도 죽는다그들이 민들레를 죽였다죄의식 없이 죽였다
생지옥을 이길 수 없어서 민들레가 죽었다
48. 5자로 휘어진 다리로
짱짱하다는 듯꼬라지가 비슷한 잡것들이서서 서서 서서들양기가 주둥이로 몰린 혓바닥을 숨도 쉬지 않고
험담과 악담을 섞어 수다를 떤다
제 얼굴에 스스로 침 뱉는 줄 모른다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이 없음을 앎직한 나잇살로본질은 사라지고 비틀어진 감정만 남은 이상한 논리로5자로 휘어진 다리몽둥이가 곧 시들어 주저앉을 줄 모르고
골목대장을 하고 서서기세등등한 노욕을 달고천년만년 영원할 것처럼 약자를 잘근잘근 주둥이로 밟고 있다같잖다
49. 첫눈 오는 밤
내 집 앞에서백발의 노인이 펑펑 날리는 눈을노래한다술 취한 목청에서 흘러나오는 밤의 주사탄식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경계가 모호한
가사들이 엉키고 설킨 밤의 파장수위를 이미 넘어버린 데시벨타인의 잠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지옥이승보다 저승이 가까운 저 노인은자신의 캄캄한 밤들을 끝내 풀어내지 못했는가
노인의 남은 생이 제발 환해지길환장이 환장의 꼬리를 물고 환장할 것 같은 길고 긴 밤견딜 수 없는 첫눈 밤을 견뎌주는 연민우리 이웃들의 새벽이 오고 있다소복이 소복이 쌓이는 눈은
그저 고요하다
50. 한파
노원역만 나가도세상의 돈들이 흥청망청 돌아다니는데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손님을 기다려도우리에게 오는 손님들은 빈손아님 진상, 아님 외상질이 모진 겨울을 어떻게 건너갈까
속이 타다 못해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절망을 밀어낼 힘이 없다
함부로 산목숨을 책임지라고 우겨대는
막무가내 시베리아 같은 시짜들과한 뱃속에서 나왔다는 이유가 죄라고 옥죄는 우리 거시기들
어깨에 매달린 자식들버겁다는 말로는 말이 되지 않는 매일 매일의 애 터짐
나에게 시방 이 세상은 세상이 아니라 흑암의 지옥이다
51. 억울한 누명
전생에 죄가 있어서 그런다고?
52. 벤치에 앉아 아침 햇살을 마신다
빛 뿌리들이 내 얼굴에 새싹을 심는다겨울을 걸어 나온 시린 얼굴에서 파란 흙 내음새 난다
메마르고 앙상한 내 황무지가 따스하다촉촉한 바람이 그늘진 슬픔을 데리고 간다잔잔한 아지랑이가 축복처럼 스며들어
꼬불꼬불 춤춰주는 시간얼마만인가이 고요한 햇살을 쐬며 앉아본 기억
걸어 나온 생애가 따뜻해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오래 묵힌 침묵에서 꽃이 핀다
53. 나는 모르는 사람이 좋다
안다는 것알고 있다는 것아는 체 한다는 것은다 한통속이다긍정보다 부정을 입 꼬리에 올리고참새방앗간을 차리는 그 시끄러운 한통속한 번 본 것을 안다고 단정 짓는본질 없는 감정 싸움나기에 좋은 짓 일삼는아는 사람들이 싫을 때가 있다안다는 것은 지루하고 불쾌한 한통속일 때가 많다모르는 사람에게는 첫이라는 설렘이 있다말이 시끄럽지 않게 흘러낼 수 있어서 좋다
인연이라는 허울 좋은 굴레를 굳이 쓰지 않아서 좋다
54. 악, 야심한 밤
치를 떨면서 열심히 살라고내 집 앞에서 술주정들을 고성방가로 푸신다이를 악물고 피 저리게 살라고고양이 창문 앞에 와서 밤새껏 우신다이렇게들 마음공부 지옥공부를 시키시는데정신 안 차리고 허투루 살면 죄받지
천벌 받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면 인간도 아니지혀를 깨물고 팍 죽을 일이지
악
악
55. 제 근황입니다
눈 막고귀 막고입 막고 살았어요봄이 연초록 새싹과 꽃들을 데리고 새와 함께 와서 희망 찬 노래를 했는지도 몰랐고요여름이 강렬한 태양 아래서도 푸른 초록 잎들을 데리고 춤을 추고 놀았는지도 몰랐고요가을의 파란 하늘 아래 화려한 단풍들이 무도회를 열었는지도 정말 몰랐고요겨울의 함박눈들이 펑펑 쏟아져 세상을 하얗게 채색했는지도 몰랐습니다난 코만 열어놓고 숨만 간신히 쉬고 살았어요말도 안 되겠지만 사실이에요나는 세상 밖으로 떠 밀려나 표류하고 있었습니다그곳은 지옥 끝이었어요끝없는 어둠과 절망과 비명이 소름 끼치게
내 심장을 갉아먹고 있는 곳이었어요신도 눈 감는 곳이었습니다나는 울고 있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꼬옥 쥐고 있었어요그곳은 사과나무를 심을 땅이 없었어요그래서 제 몸에다 심었지요내가 거름이 되는 동안 내 형체는 썩어 허물어졌어요생명을 위한 내 희생이 과연 값진 열매가 열릴지는 모르겠어요내 반 목숨이 날아가고서야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입을 열어보니 세상 안이더라고요당신은 잘 계셨나요?제발 그랬길 빕니다
56. 돼지
먹고 논 값을 몸뚱이로 갚아야 해
57. 겨울햇살
하늘이 참 맑다
태양이 우리를 밝게 비춰준다
허공을 걸어온 빛이강물 위에서 은어의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며 춤춘다
겨울 쇠백로 떼 왈츠를 춘다
나뭇가지 위 까치도 노래해준다
평온한 행복감이 스며드는 시간선물 같은 날살랑거리는 바람이 더없이 상쾌하다춥고 지친 내가 녹고 있다따스한 희망의 돛단배가 와서 나를 실고 가는 시간
58. 내 세상으로 날아갈 거야
내 세상으로 날아갈 거야
내 세상으로 날아갈 거야
내 세상으로 날아갈 거야
내 세상으로 날아갈 거야
내 세상으로 날아갈 거야
내 세상으로 날아갈 거야
내 세상으로 날아갈 거야
59. 먼지론
남의 먼지 털려다
니 먼지 털린다
60. 사직서
나는 간다이제 너희들끼리 피터지게 싸우던 말든 마음대로 해라명심하라너희 그렇게 살면 인생이 그만큼 더 모질어지고
더 질겨져 분다는 것을일타다피들아너희를 두고 나는 간다내 안녕을 안녕하기 위해 안녕을 고한다떠나야할 니들이 남아 있으니니들을 남겨놓고 나만 떠난다너희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 나는 간다물처럼바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