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추는 춤
이 윤 선
1. 빈집이 빈 집을 지키고 있다
큰아들 아파트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안온한 햇살이 주인처럼 혼자 있다 깜짝 놀란다겨울바람을 떼어놓고 잠가 논 베란다 창문으로
슬며시 들어와 침을 흘리며 제 빛에 취해
꾸벅꾸벅 졸다 머쓱하게 빛을 긁적인다햇살이 나를 보고 멋쩍게 웃자가구들도 쭈뼛쭈뼛 따라 웃는다주인이 없는 고층 아파트의 한낮종로가 직장인 아들그 집에게 밥을 떠먹이려고열심히 돈을 벌려 나간 사이소리 소문 없이 침입한 빛부신 불청객, 앙큼한 도둑고양이처럼도둑잠을 잔 눈동자가 흔들린다당황한 빛의 파동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슬금슬금 뒷걸음쳐 빠져나간다빛을 돌돌 말아 달아난다침묵 속에 든 빈집빈 집은 빈집을 잠시 대여해놓고나에게 들켰어도 시침을 뚝 뗀다빛이 도둑질해 간 것은 없으므로따스한 온기를 지불해 주고 갔으므로빈집은 빈 집을 제법 잘 지켰다고 어깨까지 으쓱거린다고맙다고 말해 줬다
2. 파도
듣기 싫은 잔소리
쉬지 않고 퍼붓는다
3. 바위와 얼음
커다란 바위 위로 얼음이 길을 낸다희고 투명한 언어를 부려놓고바위의 묵언에 귀를 대본다비와 바람과 별과 달과 해의 기도문을암각화로 새기고 있다노간주와 소나무가그 지층의 페이지를 읽는 소리도 들린다얼음은 아래로아래로길을 내면서 깨닫는다거대한 바위가고생대를 품은 틈을 여닫는다는 것을마음이 떨려와조용히 손을 모은다
4. 흰젖제비꽃
어머니의 외젖은너무 작아서 자식들 뱃고래 부풀어 올리지 못했어요양에 차지 않은 쭈글쭈글 빈 젖뿐이었어요빈 젖을 문 배 고파 우는 팔 남매는 아귀 같았어요어머니는 그 여린 몸을 망태기로 짊어지고
산으로 들로 젖 벌러 갔어요일용할 퉁퉁 부르튼 손과 발로 돌아오곤 했죠약초 골짜기 누비다 은하수 별들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와 쓰러지셨지요아홉 살 계집아이에게 맡겨진 형제들과
알콜 중독 아버지는 버거운 무게였어요뒤틀어진 살림살이는 늘 가난이 덕지덕지 붙어 목을 옥죄였어요어머니는 외젖을 쥐어뜯으며모진 운명 앞에 통곡하면서 죄 없는 나에게 화풀이하곤 했어요우리 어머니이팝꽃 흐드러지게 핀 날쭈글거린 젖무덤을 덮고 돌아가셨어요다른 자식들에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많지만
나에겐 입이 천 개라도 할 말이 없다셨어요꼭 나에게 용서를 받고 싶다며 눈을 감은 어머니어머니 두 번 다시는 흰젖제비꽃으론 태어나지 마세요자식들 주렁주렁 매달지도 마세요나도 그런 어머니가 불쌍해서그 진저리 쳐진 상처와 희생을 두 번 다시는 못 살아줘요이승으로 다시 되돌아 나오시려거든훨훨 창공을 지배하는 독수리가 되어 날아오세요제발요, 나의 어머니
5. 오수에 든 공원에서
공원 내의 건강지압보도에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발자국 두 짝멧새들 날아와 쨍쨍거린 5월의 더위를 씻는다발자국 속에 발자국이 잠겨 파닥파닥 날개를 적실 때튀어 오르는 물의 파편에서 무지개가
반짝 빛나다 점자처럼 사방에 퍼지고찍힌 글자들에서 생이 꿈틀거린다어수선한 글자를 질경이가 더듬거리며 읽고개미와 멧비둘기도 부지런히 제 발자국을 찍으며
그 물에 고개를 숙인다회색건물들과 키를 견주고 서 있던
나뭇잎이 바람을 돌리자그늘이 시원해져서 새들의 노래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저 뜨거운 생존지친 마음 슬며시 부려본다발 두 짝이 묵직한 울림을 주는 도시 틈새오수에 든 공원발자국 보시를 마음에 새겨본다
6. 강원도행
첩첩산에 둘러싸이려고 달렸다실핏줄 같은 꼬불거린 길을줄기차게 침투해 들어가
푸르고 붉게 휘돌아 달리고 달려
첩첩을 싸고 첩첩으로 들어간 날틀어진 심사쯤 바람이 훌훌 불어냈다멧돼지와 고라니가 만들어놓은 길
야생의 기운을 느낄 때 그 자리에 터 잡은
족두리꽃 앉은 부처꽃 껄껄 웃으며 반긴다무거운 세속이 가벼이 날아들게대문을 활짝 열어둔 관용의 땅봄물 든 산이 나까지 품고도 푸르다기암괴석 틈 속에서비로소 진짜 고요를 느낀다탈피된 눈과 마음을
사리 한 줌으로 품고 돌아온봄날의 강원도 행
7. 불면증
힘들게 견딘 하루를 담아준 육체가눕자마자 와르르 쏟아버린다더 이상 참아낼 수 없다고 범람하기 시작한다번뇌가 어지럽게 흩어지며 머릿속을 휘젓고 다닌다피곤한 꼬리들이 쫓아 봐도 소용없다미간을 찌푸린 세포 속에서 더욱 시끄럽게 꽹과리를 쳐댄다결국 오늘도 밤은 나를 재울 생각이 없다
8. 5월의 산란
물은 제 결결무늬로 흐르고5월 잉어 떼생명을 풀어내느라 요란하다구름을 담은 물결 갈피는생과 사를 열심히 접었다 펴고흙과 자갈의 무게를 들어 올리는 잉어 떼잔해를 뒤져 사초로 흘러 보내고한바탕 소요로 물의 역사를 다시 쓴다미끌한 점액질끼리 부비는저 5월의 인장붉다
9. 튤립
신발을 고쳐 신고흙을 뚫어환한 마음을 드러낸다생의 밥알들이오목이 담긴 꽃벌이 바람을 피해 들어가볼록해진 배를 드러내고 졸던꽃의 문을 닫고길쭉한 열매를지팡이로 서 있다이 찰나의 열반
10. 돌림노래
웃는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그녀자존심이 대쪽 같아도속으로 삼킨 슬픔이 훤히 보인다나는 그 눈동자 속에서 허우적거린다아무리 힘들어도 문화 해설하는 일만은 멈출 수 없다며쪽잠을 더 쪼개는 그녀의 시대정신그러나 그 역사의 혼백들은 침묵하여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않고손가락에 만 가지 직업을 주무르며 살아도형편은 늘 늪에 빠진다그녀는 병원 야간 일을 그만두고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호텔 청소를 업으로 짊어지고 출근하다
지옥철에서 떠밀려 음식을 포장한다는 인근 동네로 이직했다고 했다그녀는 자꾸 튕겨졌다튕겨지면서도 문화해설사 일을 붙들고 있는58년 개띠 생으로 견딘 초인의 저 힘오늘 그녀가 눈물 젖은 웃음을 물고 말했다ㅡ 목사님도 그 공장에서 일을 하대요일이 고되면 찬송가를 흥얼거리시대요나도 그걸 배워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찬송가를 따라 불러요그렇구나생이 고달픈 사람들은 노래하는구나밑바닥을 견디기 위해서가만가만 자신을 달래면서 부르는 노래약자인 우리의 돌림노래가하늘에 가닿기를간절히간절히 기도해본다
11. 산을 오를 때
거친 숨을 데리고비지땀을 데리고살찐 나를 데리고죽자 살자 산을 오를 때
바위가 말을 걸어온다ㅡ 이 미련한 중생아어여, 이리 와서 좀 쉬어라
12. 겨울 산행에서
눈앞에서 술 취한 직박구리를 본다주사로 흔들거린다양지바른 땅에 크게 양팔을 벌린검붉은 산사나무 열매포만감으로 가득한 직박구리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먼 하늘을 향해 목이 흐물흐물 늘어난다산사나무가 걸어둔 열매막걸리 냄새를 풍기는 겨울직박구리는 주인장처럼 앉아서야금야금 숙성되고 있는생의 겨울과 눈과 바람을 즐긴다구름 속에서 흘러나온 햇살에도따뜻하게 농익어
고봉으로 밀려든 졸음을온 몸에 걸고겨울을 불콰하게 취했다
13. 라일락꽃
4월 하늘 아래향기를 풀었다쓴맛이 잎사귀 가득 있어도향기만을 풀어 놓는 맘 곱다생에 지친 이들라일락 향기가 위로임을 알아간다먼 하늘 어디쯤향기들이 날아갔을 괘도눈 감고허공의 너울춤 따라 가 본다
14. 동틀 무렵
이슬이 먼저 와 앉아있는 의자하얀 입자가 분 같다의자도 때론 화장을 곱게 한아침을 맞이하고 싶나 보다햇살이 자신의 몸을 애무해 줄 때의 따스함그 기억을 갖고 싶나 보다온기 하나 없는 저 체온걷거나 뛸 수 없는 붙박이 다리로 선 채속살이 다 보이는 얇디얇은 한 겹 이슬 옷을 입고
바들바들 안으로 떤다
아파트 숲 그림자를 헤집고 걸어 나오고 있는
햇살이 자신에게 건너오길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15. 알락오리
구애를 하는 알락오리의 물갈퀴에윤슬이 따라다니며 빛난다물갈퀴로 켜는 빛의 구애따스한 일렁임 봄을 불러오고고개를 뒤로 힘껏 젖히며 짧게 소리를 내는
맑은 스타카토 노래물춤을 추는저 절정물이랑 모래사장 경계 위로 넘실거리는그 파동으로켜켜이 겹쳐 오르내리는 물결들이 아늑하고심장 둥둥 북소리로 뛰는몽롱한 봄 물결사랑은 저리 뜨거운 것이다
16. 칡덩굴에게
네가 땅을 나눠 가지자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어흙을 슬금슬금 빼앗아 갈 때 알아봤어야 했어나의 아카시꽃을 피우느라 온 힘을 바칠 때자신보다 향기가 좋다고 박수칠 때 알아봤어야 했어더워 땀 닦을 때넓은 잎사귀로 부채질 해준다며내 몸을 타고 올라올 때 검은 속셈을 눈치 채야 했어가시가 이렇게 무서워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을 거라며
너스레를 떨 때 깨달았어야 했어자꾸자꾸 조여 오는 숨 막힘이나를 타고 오르는 너라는 것을 진작 알아챘어야 했어
이젠 때가 너무 늦어 버린 거야내 정수리 위에서 네 웃음 들릴 땐나는 완벽한 포로가 되어 버렸어나의 어리석음이 너를 키웠으니어쩌겠어뿌리를 강탈당하고 줄기와 잎을 빼앗기고내 전 생애를 결박당한 완벽한 패잔병이 된 거야내 목숨을 가지고 놀아서 좋았니?이 양심 없는 것이 세상 그리 살아남아 잘 견뎌봐너도 나처럼 뒤통수 맞을 날 곧 올 꺼야안녕, 나는 죽는다
17. 위로 받고 싶을 때
무엇인가를 만지고 싶은 순간이 있다
살짝 만져보는 수크령의 촉감
그 부드러움이 위로를 줄 때가 있다 금계국 양귀비꽃 개망초를 만지면시원하고 여린 감촉에 위로를 받는다기대고 싶은 순간이 있다큰 나무을 안으면 우직한 위로를 받는다사람과 사람 사이
노력해도 안 되는 불통이 있다
그럴 때면
풀과 꽃과 나무들과 소통하며
위로를 받는다
18. 칡뿌리 이야기 우리 마을 사람들 잠용을 잡으러 갔다천 년 넘게 살았다는 그 용을 잡아먹으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고승 말씀 찰떡처럼 믿었다꽹과리 장구 앞세우고 곡괭이 망치 정 어깨에 걸머지고 호기롭고 비장하게 마을 나섰다깔끄막을 오르지 못한 경운기 뒤에서 밀며 아낙들까지 새참과 탁배기 이고 지고 뒤따랐다아이들은 응원부대로 뒤따랐다천 길 낭떠러지에 대자로 뻗어 잠든 용무사히 잡을 수 있길 빌며 제 지내고 청년들 흔들거린 사다리 탔다커다란 바위 캐서 떨어뜨릴 땐 소름 돋은 비명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퍼런 대황강 물속으로 풍덩풍덩 바위가 떨어지고 흙이 미끄러져 흘러가 긴 목마름을 풀었다도깨비와 귀신이 사람 목숨 여럿 잡은 상서로운 그 땅헤집고 파헤치는 소리땅의 굉음만이 아닌 듯싶게 기괴했다수천 년 동안 똬리 틀고 있었다던 잠용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땅 깊숙이 꼬리 뻗고 잠든 용이 호락호락 나올 리는 만무했다몇 해 전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람들도 호기롭게 이 잠용 잡겠다 덤비다 사람 목숨만 잡힌 그 깎아지른 낭떠러지우리 마을 사람들이 타고 오르내렸다덥수룩하게 자란 수염 자락 같은, 아니 큰 나무 몸통 같은 넝쿨들을 사방팔방에서 톱으로 잘라내 사다리와 동아줄을 만들어 끝장을 보겠다는 결연한 눈빛들 붉게 타올랐다잠용은 그런 마을 사람들 비웃기라도 하듯 여간해서 모습 드러내지 않았다포기 모르는 몇몇 마을 사람들끝장내겠다며 소리소리 질렀다뻗어간 자리 가늠할 수 없는 갈래꼬불꼬불 사지를 비비 틀고 있던 용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차돌 박힌 암벽 공격해 들어가니 보드라운 흙 이불 덮고 있는 거대한 용사람들이 감탄과 탄성을 질렀다그러나 끝은 끝이 아니었다꼬리는 또다시 어디론가로 뻗어 도망가고 없었다석양도 더 이상 등불을 밝혀주지 않는 밤에서야 끝난 싸움마을 사람들은 끝을 알 수 없는 꼬리들 만져 보지도 못하고 몸통 어디쯤을 톱으로 자를 수밖에 없었다영물을 건드렸으니 마을에 저주가 내릴 거라며 악담을 퍼붓던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몰려와 나누어 먹었다그러나 불로장생 꿈꾸던 우리 마을 사람들지금 생로병사 앞에 속절없었다 어쩌면 꼬리까지 다 잡아먹지 못해선지도 모른다
19. 줄 연
통제권 밖으로 나가려고 힘겨루기 하는 연
풀려 나가는 힘을 역으로 다스려노련하게 줄을 컨트롤 하는 앞잡이
바람에 연을 띄우는 일
춤추며 허공을 날아다니게 하는 일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며 만져 보라한다
줄에 날이 서 있다
공중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굉장하다
허공의 어디쯤을 용트림하며휩쓸고 다니게 하다
지상으로 잡아 끌어내리는 일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0. 해질녘 풍경
쓸쓸한 듯 고적한 듯
석양의 갈피에 스며드는 어둠
나도 같이 저물어 따라간다
21. 베짱이
긴 더듬이로 앞길을 가늠하게 하시고둥근 눈으론 활짝 열린 세상을 보게 하시고여섯 다리 중에 짧은 다리로 미끄러운 잎사귀 잘 움켜쥐게 하시고긴 다리는 날개 뒤로 뻗어 나가 V자로 단단히 디뎌 고단한 삶을 새기게 하시고헬리콥터 날개로 날며 춤사위도 펼치게 하시고사마귀 닮은 입으론 당차게 풀을 뜯어 풍족하게 하시니날개 아래 감춘 푸른 뱃고래가 기름집니다파리처럼 손발을 비벼야 할 순간에 비비지 못하는 단점 있사오나이렇게 많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