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앙, 저거 귀여워서 어떡해!"
지난 18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에 떠 있는 대형 오리 인형 러버덕(Rubber Duck)을 보던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사진>.
몇몇 여성은 아예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발을 구르기도 했다.
남자 친구와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던 이모(27)씨는 "경기도 평택에서 두 시간 반 걸려 왔다.
실제로 보니 정말 귀엽다. 행복하다"고 했다.
동그란 머리에 통통한 몸, 앙증맞은 부리를 한 러버덕은 네덜란드 설치미술가 플로렌타인 호프만의 작품이다.
욕조에서 가지고 노는 고무 오리 장난감을 높이 19.5m, 무게 1t짜리 대형 풍선으로 만들었다.
작가는 "귀여운 오리를 보고 사랑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계는 평화로워진다"고 했다.
2007년 프랑스에서 첫선을 보인 러버덕은 미국·중국·일본 등 16개국을 순회하며 수억명을 매료시켰다.
14일 한국에 상륙한 러버덕을 찾은 인파는 일주일 만에 70만명을 돌파했다.
미국 워싱턴 DC의 국립동물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물은 판다다.
커다란 털공처럼 생긴 판다 앞에서 "귀엽다"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판다는 전 세계 1600마리밖에 없는 희귀 동물로 중국 외교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판다의 귀여운 외모가 양국에 우애와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7월 방한 때 판다 한 쌍을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다.
멸종 위기 동물 중 유독 돌고래 보호단체가 많고 활동도 활발하다.
한 동물학자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돌고래가 여느 희귀 생물보다 귀엽기 때문"이라고 했다.
러버덕과 판다, 돌고래까지 이들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귀여움'이다. 사람들은 왜 귀여움에 열광할까.
◇귀여움의 원천은 '아기'
동글동글하고 통통하다. 이 세상 모든 귀여운 것들의 공통점이다. '귀여움의 이론'도 바로 이 점을 강조한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이자 '귀여움 이론'의 창시자이기도 한 오스트리아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1903~1989)는
귀여움의 특성을 '아기 도식'(Baby Schema)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람들이 귀엽다고 생각하는 아기의 특징을 생각해보자. 아기는 작은 몸, 큰 머리, 둥근 얼굴, 큰 눈, 작은 코, 통통한 팔다리를
갖고 있다. 어른은 이런 특징을 가진 아기를 보면 본능적으로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느낀다.
이런 본능은 영장류·포유류·조류 등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고 한다.
특히 인간은 아기의 귀여움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는 "인류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자기 자식뿐 아니라 손자·조카·동생 등까지
돌봐야 했기 때문에 아기의 기본 특성만 가져도 귀여움을 느끼도록 진화했다"며 "이런 성향은 개·고양이·판다·펭귄 같은
동물의 새끼에게까지 귀여움을 느끼는 반응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귀여움에 대한 반응은 생명체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전 교수는 "심지어 풍선에 눈·코·입만 그려넣어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아기 모습을 떠올리고 귀여움을 느낀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아기나 동물 새끼는 물론,
귀여운 모양의 무생물까지 사랑할 만큼 인간의 귀여움 본능은 강렬하게 진화했다.
사람이 개나 고양이 등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 동물들은 다 커도 새끼 때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개는 다 자라도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거나 아기 같은 표정을 짓기 때문에 인간이 가장 귀여워하는 짐승이다.
어른 고양이도 새끼 때 모습을 갖고 있어 여전히 귀엽다.
판다는 귀여운 감정을 일으키는 아기의 특성을 모두 갖춘 동물의 결정판이다.
전문가들은 "판다 눈 주변의 검은 털이 마치 큰 눈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른 판다를 보고도 귀여움을 느낀다"며
"판다는 우연히 그런 모습으로 진화한 것뿐인데, 인간이 아기의 모습을 떠올리고 귀여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펭귄이 뒤뚱거리면서 걷는 모습도 아기를 연상시켜 사람들은 귀엽다고 느낀다.
전중환 교수는 "아기를 보호하고 먹이면서 무사히 키워야 자신의 유전자가 후세에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자기 유전자의 절반이 담긴 아기(자식)를 보면 귀여움을 느끼도록 진화했다"고 했다.
반면 인간은 늙어서 질병에 걸린 육체나 상처 입고 절단된 신체, 부패한 시체 등을 본능적으로 혐오한다고 한다.
귀여움을 느끼는 감정 뒤편엔 종족 보존을 위한 유전자의 비정한 선택이 숨어있는 것이다.
◇거대 산업이 된 귀여움
덕분에 귀여움은 상품이 되고 나아가 산업이 된다. 캐릭터 분야가 대표적이다.
러버덕·미키마우스·곰돌이 푸·미쉐린맨·헬로키티·피카추·둘리·뽀로로·라바 등은 모두 귀여움이 경쟁력이다.
큰 머리와 눈, 짧은 코에 통통한 몸을 갖고 있다. 카카오톡이나 라인 등 모바일 메신저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국내 캐릭터 산업 시장은 8조원대 규모까지 성장했다.
이순종 서울대 미대학장은 "완만한 선, 부드럽고 통통한 느낌은 보는 사람에게 친밀감과 따뜻함을 전해준다"며
"귀여움을 극대화하는 것이 캐릭터 산업의 전략"이라고 했다.
미키마우스를 만든 월트 디즈니는 만화가들 책상 위에 "귀여움을 유지하라(Keep it cute)!"라는 메모를 붙여뒀다고 한다.
'가와이(可愛い·귀엽다, 사랑스럽다는 뜻)' 문화로 대변되는 일본 캐릭터 산업의 대표 주자는 헬로키티다.
1974년 탄생한 이 고양이 모양 캐릭터는 무기·약물·담배를 제외한 지구 위 모든 상품에 쓰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판권 추정치는 20조원에 달한다. 이순종 학장은 "헬로키티는 어린 시절 고양이에게서 느꼈던 포근함을 상기시키면서도
부드러움·통통함 같은 아기만의 귀여움을 갖춘 대표적 캐릭터"라고 했다.
지난 8월 헬로키티 제작사가 "고양이가 아닌 인간 소녀"라고 밝혀 전 세계 팬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일본 만화 캐릭터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2~3등신 신체 비율, 얼굴의 절반가량을 차지할 만큼 비정상적으로
큰 눈 역시 아기의 귀여움을 극대화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 비율을 넘어가면 이질감을 느낀다고 한다.
귀여워서 성공한 대표적 상품이 '딱정벌레 차'로 유명한 독일 폴크스바겐의 비틀이다.
1938년 출시 이후 전 세계적으로 2250만대가 팔려나갔다.
구상 국민대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 교수는 "비틀을 옆에서 보면 커다란 귀가 달린 미키마우스와 비슷해 귀엽게 보인다"며
"자동차의 앞모습은 사람의 얼굴, 바퀴는 발을 떠올리게 하는데 전조등과 바퀴를 크게 만들수록 아기를 연상시켜
귀여운 자동차가 된다"고 했다. 기아 모닝, 도요타 프리우스 같은 소형차 디자인에도 이 원리가 적용됐다.
소비심리학계는 사람들이 일반 숟가락보다 귀여운 숟가락을 사용할 경우 같은 아이스크림이라도 더 많이 먹고,
일반 쿠키보다 동물 모양 쿠키를 선호한다는 실험 결과를 내놓았다.
◇귀여움의 함정
귀여움은 힘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동행동 연구자들은 또래보다 귀여워 보이는 아이가 부모·교사로부터 더 사랑받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심리학자 로널드 마젤라와 앨런 파인골드가 1994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같은 죄를 지었어도 피고인의 얼굴이 동안(童顔)일수록
유죄선고를 받을 확률이 줄어든다고 한다.
귀여움에 대한 선호는 너무 강렬해서 때로 이성적인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중환 교수는 "귀여움이 주는 즐거움은 맛있는 음식이나 마약이 주는 쾌감과 맞먹는다"며
"귀여움은 인간의 판단력을 무장해제시킬 만큼 강력하기 때문에 대중문화가 이를 이용하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디어드리 배릿 하버드대 교수도 저서 '우리는 왜 위험한 자극에 끌리는가(2010)'에서 귀여움을 섹스·식욕·복수심리 등과 함께
인간이 저항하기 어려운 자극으로 분류한다.
그는 인간은 이런 자극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자본이나 국가권력이 이를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배릿 교수는 그래서 "귀여움은 섹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상업 전략"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가와이 문화에 대해서도 "일본 가정에서 출산율 저하로 아기가 줄어들자 귀여움을 찾는 어른의 본능이 만화 캐릭터를 통해
대리 충족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한국의 '귀요미'가 일본의 가와이 문화와 유사한 현상이란 분석도 있다.
'귀여운 이'를 뜻하는 이 신조어는 최근 젊은층에서 귀여운 사람·동물·캐릭터를 통칭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의 애완동물·캐릭터 시장이 급팽창하는 현상은 저출산·고령화, 1인 가구 증가 등의 추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사회가 파편화되고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관심을 기울이고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귀여운 대상물을 찾는 수요도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