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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 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유럽 북부 발트 해를 끼고 위치한 발트 3국은 숨은 보석과 같은 곳이다.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이렿게 이름도 생소하고 유럽 다른 도시에 비해 찾아 가기도 힘들지만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문화 유산이 가득한 발트의 도시들은 훌륭한 볼거리와 소중한 추억을 선사했다
룬달레 (라트비아)
룬달레 성
룬달레 성은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를 모델로 해 지어졌다. 실제로 룬달레 성은 베르사유 궁전보다는 다소 작은 규모였지만 그 아름다움은 전혀 뒤지지 않았다. 궁전은 에른스트 요한 폰 뷔렌(Ernst Johann von Buhren) 공작의 여름 궁전으로 이탈리아 태생의 천재 건축가 카를로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Carlo Bartolomeo Rastrelli)에 의해 지어졌다. 라스트렐리는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인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Hermitage Palace)과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을 설계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입구에서부터 궁전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10여 분이 소요되는데, 이 길은 잘 가꿔진 정원이 함께 했다. 성의 정문에는 에른스트 요한 폰 뷔렌 공작의 상징인 2마리의 사자상이 문주 위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룬달레 성의 외부는 바로크 양식, 내부는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가지 건축 양식이 사용된 이유는 뷔렌 공작이 궁전을 지으라고 지시했을 때에는 바로크 양식이 유행했고, 뷔렌 공작이 힘을 잃어 유배를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땐 유행이 로코코 양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란다.
이 성은 안타깝게도 건축 이래로 주인이 계속 바뀌었다. 사실 이 지역은 1700년대 후반까지 ‘라트비아’가 아닌 ‘쿠를란드 공국’의 소유지였다. 당시 군주였던 뷔렌 공작은 그때 러시아를 지배했던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의 총애를 받으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는 막강한 힘으로 지역을 섭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1700년대 중반, 그의 지시에 따라 룬달레 성이 건축됐다. (위 사진은 "장미의 방"이다 마치 장미를 붙여 놓은 둣한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며져 았다)
12대 공작(에른스트 요한 폰 뷔렌 공작의 아들 피터 요한네스 본 뷔렌)의 초상화와 당구장
신발에 비닐 덧신을 씌우고, 2층으로 올라가 첫 번째 녹색의 방,황금의 방, 하얀 방, 장미의 방 순으로 관광한다. 당시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엿 볼 수 있는데 이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외국 손님을 영접하는 황금의 방이다, 총 138개의 방이 있는데, 그 중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황금의 방은 화려함의 정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들어서는 순간, 온통 황금빛 장식과 눈부신 샹들리에가 보는 우리의 눈을 사로 잡는다. 누구라도 탄성을 자아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위 사진은 대관식을 위해 만들어진 "황금의 방")
라트비아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919년, 궁은 전쟁으로 인해 심하게 손상됐다. 그리고 다음 해 성의 일부는 학교로 이용되기도 했다. 1933년이 되자 라트비아 국립역사박물관은 룬달레성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후에도 성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성은 다른 용도로 쓰이며 그 가치를 잃어간 것이다. 그랬던 성이 다시금 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1972년이 되어서야 박물관이 들어섰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됐다. 아직도 성의 몇 곳은 수리 중이었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초상화와 벽화는 복원된 상태라고 한다.
룬달레 성안의 궁전을 둘러 보고 룬달레 궁전 입구에서 관리인과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을 생각하며 한 컷 찰칵 !
트라카이 (리투아니아)
트라카이 성
아름다운 갈베 호수 안에 있는 트라카이 성. 공작이 나라를 지배하던 시절의 요새로, 각국의 침입은 물론 내부의 적으로부터 공작을 보호하기 위한 성이었다. 원래 두 개였던 섬에 하나의 성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생활용구와 역사 박물관으로 중세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보석, 전쟁용품 등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적을 공격했다는 둥그런 돌을 보니, 옛날에는 어느 나라든 성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했던 공통된 무기였던 것 같다. 호수와 숲의 멋진 경치를 보러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갈베 호수 가운데 있는 트라카이 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목재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트라카이 성은 갈베 호수의 푸른빛과 하늘, 나무의 초록빛, 그리고 성의 붉은 빛이 조화를 잘 이뤄 매우 아름다운 성으로 마치 호수위에 그림 처럼 떠 있는 트라카이 성.... 다시 한번 가 보고싶은 곳이다.
빌니우스(리투아니아)
빌니우스는 리투아니아의 수도이다. 그 중에서 이곳 구시가지는 중세의 각종 양식의 건축물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래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 시가지의 관광은 이곳 새벽의 문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루투 거리로 내려오면서부터 우리는 중세인으로 돌아간다. 점심식사를 하고 종업원들과......
빌니우스 대성당과 종탑
성 스타니슬라우스 성당과 성당 광장의 종탑. 리투아니아의 종교 카톨릭의 중심, 1251년에 목조로 지어졌다가 1387년에 고딕양식으로 다시 건축했으나 16C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 후 1610년에 다시 바로크 양식, 18C엔 네오클래식으로 개축되어 도리아식 원주를 가진 현재의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카톨릭 교회 옆의 종루는 전에 교회의 일부였던 것으로 빌니우스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물이라고 한다. 현재도 이 종은 여전히 울려퍼지고 있으며 종에 의해 연주되는 멜로디가 표준 시각으로 리투아니아 전국에 방송되고 있다고 한다
기적의 표
발트 3국인들의 소원을 이루어낸 620Km 발트의길 시작점을 나타내는 기적의 표가 성당 앞 광장 바닥에 새겨져 있다.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에서 라트비아 리가 그리고 에스토니아 달린 까지 이어진 손에 손 잡고 자유를 외치던 발트의 길. 1989년 8월 23일에 쏘련의 탱크로 부터 무저항으로 시민이 이루어낸 자유와 독립을 위한 세계에서 가장긴 인간사슬, 인간띠로 상징되는 발트의길 이다
대통령 궁
대통령궁은 14세기에 지었으며 1543-1794년 까지는 빌리우스 주교관으로,1795년 부터는 빌리우스 총독관저로, 1812년 나폴레옹이 침공시 한때 이궁에서 살았고,러시아 시대에는 알렉산더 1세가, 그후 프랑스 대사관으로사용 하다가 1997년부터 대통령궁 으로 사용.
구 시청사와 중앙 광장
1432년 고딕양식으로 지은 시청광장의 시쳥사는 여러번의 개보수를 거쳐 1799년 현재의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완성되었지만 아직도 고딕식 장식들이 많이 남아있다. 오늘날 이곳은 미국의 부시대통령과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등 외국의 중요한 인사가 다녀가는 상징적인 장소라고 한다. 현재는 갤러리와 관광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새벽의 문
구 시가지 입구에 위치한 관문으로 과거 빌니우스 시가지의 동쪽 문이며 16세기에 지어졌던 9개의 문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문이다. 새벽의 문위에 있는 성모 마리아 상은 기적을 행하는 성화로 알려져 있어 리마니아의 성지로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곳이다.
성모마리아 교회(새벽의 문 뒷면)
새벽의 문을 들어와서 뒤돌아 보면 문위에 위치한 작은 기도실에는 세계에서 하나뿐인 기적의 성화로 불리는 "검은 얼굴의 마리아 상"이 자리하고 있다.
성 안나 성당
빌니우스에서 가장 예쁜 성당이다. 이 성당은 1501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33개의 서로 다른 모양의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고딕 양식의 건물이 환상적으로 다가왔다. 1828년 러시아 정벌에 나섰던 나폴레옹은 이 성당을 "손바닥에 얹어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성 캐시미르(카지미엘스)성당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 많은 아픔을 간직한 캐시미르 성당은 가장 오래된 바로크 양식의 건물은 당초 성당이었으나, 러시아 지배시는 정교회로 지붕에 왕관까지 씌어졌다
리가(구 시가지) (라트비아)
검은머리 전당
여행자나 무역 상인들이 리가에 머무는 동안 숙소나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던 7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곳이다. 무역도시인 리가에서 풍향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건물을 사용했던 검은머리 길드는 아프리카 남미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해온 미혼상인들이 결성한 무역조합으로써, 이집트 출신의 한 흑인 성인을 수호신으로 여겨 건물마다 그 성인의 얼굴을 장식으로 만들 었다. 이 건물은 상인들이 리가에 머무는 동안 여관이나 연회 장소로 사용 되었다.
베드로 성당(피터 성당)
1209년에 처음 지어졌고 15세기초에 증축 현재의 모습으로 1941년에 완성. 가톨릭교회, 루터교회, 박물관 등으로 시대에 따라 기능이 여러차례 바뀌었다. 높이는 123.25m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높은 목조건물이었는데 지붕과 탑이 불에 타 훼손되었다가 1970년에 교회를 복구하면서 시가지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72m 높이애 전망대를 만들었다. 첨탑에는 성경에 나오는 수닭(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베드로에게 새벽닭이 울기 전 예수를 3번 부인하리라고 말한 구절)모양이 있다
브레멘 음악대 동물상
그림 형제에 나오는 유명한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 나오는 4동물을 표현하였는데 위로부터 닭, 고양이, 개, 당나귀다. 1201년 독일 브레멘의 대주교 알베르트가 이 지역을 무역의 본거지로 건설하여 리가의 현재가 되었는데 이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독일 브리멘시가 리가시에 기증한 것이다. 코를 만지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해서 나도 고양이 코를 만져 보았다. 맨 위의 닭 코는 점프를 해도 닿지 않는다, 밑으로 내려 올수록 사람들이 많이 만진 코 부위가 닳아 번질 번질 하다
"발트의 길" 발바닥 동판
구 시가지 입구 라이마 광장 바닥에 빌트의 길을 표시하는두 발바닥을 눌러 찍은 동판이 붙어 있다. 서남쪽 리투아니아와 동북쪽 에스토니아로 내달려간 인간 띠의 출발점이다.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의 대광장 표지석엔 '기적'이라고 새겨져 있다. '발트의 길'에 이 보다 잘 어울리는 말도 없다.
"발트의 길" 표지석
'발트의길' 의 인간띠(발트 3국 200만명)가 지나간 장소를 기념하는 조형물.....( 인간 띠 620km의 중간 지점에 해당 된다 ).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에서 라트비아 리가 그리고 에스토니아 달린 까지 이어진 손에 손 잡고 자유를 외치던 발트의 길. 1989년 8월 23일에 쏘련의 탱크로 부터 무저항으로 시민이 이루어 낸 자유와 독립을 위한 세계에서 가장 긴 인간사슬, 인간 띠로 상징되는 발트의 길 이다
자유의 여신상
저 멀리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은 오랜 지배의 역사와 맞서 싸운 라트비아인들의 투쟁의 흔적을 보여 주는 자유와 독립 투쟁의 상징으로 세계 1차 대전 종전후 잠시 독립을 이루었던 1935년에 조성된 42M 높이의 푸른색 석상은 라트비아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밀다(Milda)의 모습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신이 들고 있는 3개의 별은 라트비아의 세 문화권인 쿠제메, 비제메, 라트갈레를 의미한다
삼형제 건물
리가 Maza Pils 거리 17, 19, 21번지에 나란히 서 있는 석조 건물이다 리가의 상징과도 같은 삼형제 건물 15~18세기 까지 오랜 기간 동안 만들어진 집 3채가 어깨를 나란히 맞닿아 세워져 있는데, 리가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물로 중세에서 바로크까지 리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 준다. 오른편 흰 건물이 15세기에 세워진 가장 맏형으로, 왼편으로 갈수록 나이가 한 세기씩 젊어진다. 현재는 라트비아 건축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일행이 삼형제 건물에 닥아가자 거리에 악사는 한국인임을 알아채고 애국가와 아리랑을 연주한다. 우리는 소정의 연주 감상료(?)를......
스웨덴 문
17세기 스웨덴 사람들이 리가시를 점령하고 지은 것 으로 아치 위에는 사자가 양각되어 있는데 사자는 스웨덴의 상징이고 스웨덴이 라트비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스웨덴 문' 이라고 불리게 되었단다
돔 성당 [ Dome Cathedral ]
1211년 성 야곱의 날에 라트비아의 정복자인 게르만족이 알베르트 주교를 책임자로 하여 기초석을 놓았으며 알베르트 주교는 1270년에 공사가 끝난 이 성당의 첫 번째 주교가 되었다. 돔의 뾰족탑은 1547년에 세워졌는데 당시 리가에서 가장 높은 뾰족탑이었고 높이는 140m나 됐다. 1776년의 재건축으로 탑은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고 높이는 90m로 낮아졌다. 이 성당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6,718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인데, 1884년에 독일회사 이에프 워커 앤드 컴퍼니(E.F.Walker &Co)가 처음 설치했으며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오르간이었다. 후에 네덜란드 회사가 재 설치했다고 한다.
화약탑
18세기에 세워진 성벽의 일부로 화약을 보존하였던 화약탑 (Gun Powder Tower). 처음에는 모래탑(Sand Tower)이라 불린 이 탑은 14세기 초에 지어진 리가의 방어용 요새로 유일하게 남아 있다. 1621년 스웨덴 군대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가 1650년 재건되면서 화약을 보관하기 위해 성벽의 두께를 2.5m로 건축되었다. 9개의 러시아 대포알이 벽에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지금은 전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둥근 탑은 25.5m의 높이에 직경은 14.5m 이다.
탈린 (에스토니아)
덴마크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도시 중 하나로 구 시가지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탈린은 BC800년경에 수렵 어로인들이 거주한 흔적이 발견된 곳이고, BC3000년경에는 동부에서 이주한 빗살 무늬 토기를 사용한 종족이 정착하여 에스토니아인의 조상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넵스키 교회(성당)
러시아 정교회 사원인 알렉산더 넵스키 교회(성당)의 건축은 성 페테르부르크의 미하일 프레오브라즈헨스키에 의해서 건축되었으며, 노브고라드의 왕자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교회 내부는 모자이크와 조각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잘 보존되고 있어 탈린의 대표적인 중세 건축물이다. 교회의 종탑은 11개의 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탈린에서 가장 큰 규모다.
툼페아 언덕
구 시가지 한가운데 위치한 이곳은 고지대 톰페아 언덕으로 1219년 덴마크가 최초로 요새를 건설한 지역으로 탈린의 탄생지다. 이곳은 에스토니아를 지배하던 권력층들이 거주 하던 곳으로 길드 건물과 상인 주거지역이 대부분을 이루는 저지대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툼페아 언덕에서는 발트 해와 탈린 지역 전체가 사방으로 조망되는 곳이다.
툼페아 성 (Toompea Castle)
시청 광장에서 피크(Pikk) 거리를 따라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 ‘최고봉’이란 뜻을 갖고 있는 톰페아 성이 나온다. 13~14세기경에 지어진 이 성은 해안가 석회암 절벽 위에 위치해 있는데, 도시를 감싸며 4km나 뻗어 있는 이 성 곳곳에 붉은색 원뿔 모양의 탑 46개가 세워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툼페아 성벽
성 남서쪽 모서리에 있는 감시탑, 헤르만 타워는 독일어로 '거대한 장병'이라는 뜻으로, 전설 속의 위대한 중세 영웅 ‘헤르만’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키다리 헤르만' 이라 불리는 이 탑은 높이 48m로, 톰페아 성에서 유일하게 건축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니굴리스테 교회
니굴리스테 거리에 있는 교회로 13~15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교회인데 17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한 부분도 있다. 교회의 내부는 콘서트 홀로 사용고 있다. 또한 14세기의 부조나 건축 용구가 전시되어 있으며 첨탑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13세기경 상인들의 헌금을 모아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1944년 러시아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구 시가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이기도 해서 길을 찾는 이정표 역할도 하고 있다.
구 시청사 광장 (라에코아 광장)
광장이 돌로 포장되어 있으며,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다. 이곳에는 1400년 초반에 건축된 고딕양식의 구 시청사가 있고, 광장의 사면을 둘러싸듯 아름다운 15~17세기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1층 상가에는 예쁜 노천 카페와 레스토랑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기념품이나 장식품, 쿠션이나 깔개 등의 인테리어 소품과, 옷 등 탈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상품들을 파는 노점상들이 함께 어울려 있다.
비루 게이트
비루 게이트는 구 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1345~1355년에 만들어진 4km 둘레의 성곽에 설치한 6개에 문 중 하나로 쌍둥이 같은 두 개의 탑이 도로 양쪽에 버티고 있다. 비루 거리(Viru Street)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어 비루 게이트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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