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후란 시인의 최근작 뜯어보기
「떠나보내는 종소리와 함께」
김후란 시인(1934년 12월 26일생)이 반세기 동안 시를 쓰며 가지는 기조는 "시를 읽자, 먹자, 가슴에 꽃피우자"라고 말해왔다. 김 시인은 팔방미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내내 시작 활동도 활발히 해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중후한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추천 시인 신석초에 의해 ‘점액성의 지성(知性)’으로 불린 그의 데뷔 시는 이후 미와 미소, 사랑과 평화, 생명과 구원 등의 미학을 구축해 왔다.
현재는 문학의 집·서울 이사장으로 문인 활동의 장, 문인들과 시민들의 만남의 장을 마련해 헌신하고 있다. 그녀는 곧잘 “시는 그리움의 소산이다”라는 말을 한다. 뭔가 목마른 게 있을 때 시를 읽고 쓰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시를 읽자, 시를 먹자, 시를 가슴에 꽃 피우자”는 말이다.
김후란 시인과 관련된 서울문화투데이http://www.sctoday.co.kr)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지금부터 그녀의 최근작인 「떠나보내는 종소리와 함께」를 감상하며 “시는 그리움의 소산이다”란 지론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마음 허전한 날은
먼 길을 떠나고 싶다
그토록 좋아했던 종소리에 실어
미련 없이 어제를 보내고 싶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운 사람들이 떠나갔으며
꽃길 같던 추억에도 찌르는 가시가 있었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인가
누구도 앞질러 뛰어갈 수 없는
흐르면서 사라지는 실체인가
해는 또다시 떠오르고
새날은 여전히 강물을 타고 흐르리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댄다
「떠나보내는 종소리와 함께」 전문
첫 연의 어디를 보아도 여타 시인들의 시와 다를 게 없다. 특히 1~2행을 읽으며 ‘여기서 멈출까?’ 했다. 대시인의 시 첫 연의 시작치고는 너무 밋밋하다. 그런데 3~4행에서 역시 ‘다르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그중에서 ‘종소리’에 함의(含意)된 시의 깊이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뭐 ‘새마을 노래’에서 불리는 ‘새벽 종소리’부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종소리라도 좋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3~4행을 읽고 나니 1~2행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먼 길을 떠나고 싶다’라는 말이 가지는 엄청난 진동을 느꼈다. 어차피 詩란 ‘진동’, 혹은 ‘전율’이 아닐까? 그저 “시는 그리움의 소산이다”이란 김후란의 지론이 고정된 채로 석화(石化)된 것이라면 무슨 변화가 있으며 시를 읽는 이의 가슴까지 어떻게 파동을 전할 것인가. ‘그토록 좋아했던 종소리에 실어’ 시인이 시(詩)만 쓴 세월이 반세기라고 하지 않았는가?
/우주 만물은 파동이다. 인간이 관찰하는 순간 입자로 된다. 달은 내가 쳐다본 순간 둥글고 환 한 달로 존재하지만 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달은 없는 것이다. 파동일 뿐이다./
홍문표.<양자역학과 은유의 시학. 2023>에서 인용
/종소리에 실어/미련 없이 어제를 보내고 싶다/
마음이 허전한 날이더라도, 그 마음으로 먼 길을 떠날지라도 그토록 좋아했던 종소리에 실어 미련 없이 어제를 보내고 싶으니 어쩌랴. 뭐니 뭐니해도 이 시구절이 절창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끝이면 김후란 시인이 아니다. 다음 연을 이어서 보자.
지난날을 돌아보면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운 사람들이 떠나갔으며
꽃길 같던 추억에도 찌르는 가시가 있었다
2연도 역시 시작(始作)은 특별할 게 없어 보인다. ‘지난날을 돌아보는 일’. 이 또한 ‘그리움의 소산’이기에 그의 평소 지론을 벗어나지 않는다. 여든 몇 해 동안 살아온 날 동안 그저 ‘많은 일’이란 게 그리 간단치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떠나간’ 혹은 ‘떠나보낸 사람’이 얼마일까? 그 많은 인연이 모두 happy end였을까? 그렇지는 않았기에 ‘꽃 같던 추억’을 ‘찌르는 가시’라고 읊었으리라. 그리운 일이라고 해서 어찌 모두 ‘아름답고 화려한 것’으로만 채워져 있었을 것인가. 흔히 쉬이 말하는 후회막급한 일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 모두를 ‘찌르는 가시’라고 표현해낸 것이리라. ‘가시’를 들어다 놓은 기발함이 독특하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인가
누구도 앞질러 뛰어갈 수 없는
흐르면서 사라지는 실체인가
‘흐르는 강물’ 특히 ‘강물’을 역사로 표현하는 이가 많다. 그래서 이 역시 뭐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곧 ‘흐르면서 사라지는 실체’를 시간이라고 했다. 물론 ‘누구도 앞질러 갈 수 없는’ 불변의 인간 역사로 표현하면서도 ‘흐르면서 사라지는’ 그리고 ‘실체’라고 했다. ‘실체’를 정확히 표현했더라면 아마도 ‘실체(實體)’일 것이다. 그러면 재미가 없다. ‘실체(實諦)’로 해석될 수도 있다. ‘실체(實諦)’는 불교 용어로서 ‘존재의 구극(究極)’이라는 뜻이다. ‘구극적인 상태’, ‘절대성’이라 해석해도 좋다. 즉 ‘진실로 본다’라는 말이다. 시인이 이렇게 ‘실체(實體)’로 표현하려고 했든 ‘실체(實諦)’로 표현하려고 했든 감상하는 이가 ‘실체(實諦)’로 해석했다면 ‘흐르면서 사라지는 실체’가 담고 있는 의미의 크기는 엄청나다. 바로 ‘파동’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해는 또다시 떠오르고
새날은 여전히 강물을 타고 흐르리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댄다
시인의 이미 미수米壽를 코앞에 두고 있다. 더 나아가서 ‘해는 또다시 떠오르고’라고 희망을 말한다. 그리고 ‘새날은 여전히 강물을 타고 흐르리’라고 소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리하여 벌겋게 단 피를 식히려고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댄다”로 마무리하는 것이리라.
지금까지 김후란 시인의 최근작을 대하는 기쁨에 들떠서 이렇게 뜯어보았다. 결국 “시는 그리움의 소산이다”라는 그의 시작에 대한 지론이 계속되는 한 다음 작품이 또 어딘가에 발표될 것을 기대한다. 어차피 우리네 삶의 근간이 ‘그리움’의 소산이란 것을 믿기 때문이다.
첫댓글 정독했습니다
우교수님 특유의 평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다른 시인의 시를 잘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시와 평론을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보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