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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에서 남쪽으로 낙동강을 굽어보고 있는 안동 영호루(映湖樓)는 밀양의 嶺南樓, 진주 矗石樓, 남원 廣寒樓와 함께 漢水 이남의 4대 누각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映湖樓(영호루) 현판은 현재 시청에 걸린 雄府安東 현판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 인 고려 말 공민왕(1380년) 필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영호루는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고려 초기인 1274년 김방경 장군이 누에 올라 시를 읊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천여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雄府安東)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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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피난 왔던 공민왕은 피난 중에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자주 남문 밖의 영호루를 찾아 누각 아래 강물에 배를 띄우기도 하고 활쏘기도 하였으며 환도 후 1362년 공민왕이 친필로 ‘映湖樓’라고 쓴 금자(金字) 현판을 영호루에 달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누각이 작아 현판을 걸수 없자 당시의 안동판관 신자전(申子展)이 1367년에 규모를 확장하면서 더욱 강물 가까이 옮겨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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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1488년(성종 19년)에 부사 김질(金耋)이 중수하였으며, 1547년(명종 2년) 홍수로 떠내려가자 1552년(명종 7년) 부사 안한준(安漢俊)이 복원하였다. 이때 공민왕의 친필 현판은 경남 김해(金海)까지 떠내려간 것을 되찾았다. 1605년(선조 38년) 두 번째로 물에 떠내려가자 1676년(숙종 2년) 부사 맹주서(孟胄瑞)가 복원하였다. 1775년(영조 51년) 3번째 유실로 1788년(정조 12년) 부사 신익빈(申益彬)이 복원했는데, 불과 4년 후인 1796년(정조 20년)에 4번째로 유실되자 부사 이집두(李集斗)가 복원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홍수가 일어났으나 누각은 유실되지 않고 중수(重修)만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1934년 7월 23일 ‘갑술년 대홍수’로 안동 시내가 모두 물에 잠길 때 영호루 역시 떠내려가고 말았다. 다행히 영호루 현판만은 몇 달 뒤에 경북 선산군(현 구미시) 구미리(龜尾里) 부근 강물 속에서 다시 찾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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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34년 7월23일 강 상류 지방의 폭우로 인해 안동 시내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있었다. 이때의 수해로 영호루는 주춧돌과 돌기둥 몇 개만 남아 있어 1970년 시민들의 성금과 국비, 시비를 모아 옛 영호루의 자리에서 강 건너편인 현 위치(안동시 남선면 정하동 소재)에 철근 콘크리트 한식 누각으로 복원한 것이 현재의 영호루(映湖樓)다.
嶺南游蕩閱年多, 最愛湖山景氣加
영남지방을 여러 해 노닐었지만, 호수와 산의 경치 가장 좋았네.
芳草渡頭分客路, 綠楊堤畔有農家
풀 우거진 나루에 갈림길이 있고, 버들 숲 언덕에 농가가 서 있네.
風恬鏡面橫煙黛, 歲久墻頭長土花
거울 같이 물 위에 먼 경치 비치고, 낡은 담장 위에 토종 꽃이 자라네.
雨歇四郊歌擊壤, 坐看林杪漲寒槎
비 개자 사방 들판에 풍년가 들리는데, 누각에 앉아 숲 위로 외로이 뜬 배 보네.
첫댓글 여기에도 우탁 선조님의 흔적이...............멋지게 올려졌습니다, 아리사랑님~~~~~^^*
ㅎㅎ 논문보다우연히발견했어요 근데 사진이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