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회 어린이동산 중편동화공모 당선작] 이혜영
■당선작
잊어버린 책들의 도서관
야, 내 핸드폰 보지 마!
모모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모모는 학원 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싫다. 친구들은 모두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데 혼자만 멀뚱하게 앉아서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너도 엄마한테 핸드폰 사 달라 해!
그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친구가 조그맣게 말했다.
쟤 엄마 없잖아.
모모의 엄마는 모모가 세 살 때 돌아가셨다. 하지만 모모는 그런 얘길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엄마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학원 차 왔다!
아이들이 학원 차를 보고 뛰어갔다. 모모도 얼른 가방을 들고 친구들을 뒤따라갔다.
학원 차에서도 친구들은 게임 얘기에 열을 올렸다.
참! 내일 냥냥전쟁 이벤트 있어서 들어가면 선물 준다는데.
진짜? 내일 꼭 들어가서 선물 받아야겠다!
친구들 얘기에 모모는 생각했다.
나도 아빠한테 내일만 게임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얘기해 봐야겠다.
모모는 아빠한테 부탁하는 게 무섭긴 하지만 냥냥전쟁 이벤트 선물을 꼭 받고싶었다. 요즘 친구들? 만나면 냥냥전쟁 얘기만 한다. 아빠는 모모가 혼자 있을땐 게임을 하지 못하게 했다. 평일엔 아빠가 밤늦게 퇴근하기 때문에 모모는 주말에만 게임을 할 수 있었다.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적은 모모는 친구들보다레벨이 너무 낮았다. 모모는 학교에서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띵동띵동!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온 모모는 아무도 없는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모모는 집에서도 혼자였다. 모모가 3학년이 되면서 같이 살던 할머니가 시골로 내려갔다. 시골에 남아 있던 할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져 어쩔 수 없었다. 모모만 혼자 두는 것이 걱정되어 할머니는 끝까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모야! 할머니랑 시골에 같이 갈래?
모모는 할머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를 남겨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할머니, 나 괜찮아! 이제 3학년이니까 혼자 있을 수 있어요.
모모는 할머니에게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텔레비전을 틀었다. 모모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 깜빡 잠이 들었다.
모모! 양치질은 하고 자는 거야?
아빠 목소리에 깜짝 놀란 모모가 일어났다.
지금 부탁해야 하는데....
아빠 얼굴을 보자마자 냥냥전쟁 이벤트 생각이 났다. 사실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모모는 아빠 눈치를 봤다. 아빠 눈썹이 붙어 있다. 오늘은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모모는 아무 말도 못하고 화장실로 갔다. 아빠는 평소에도 무섭지만, 화가 나면 더 무섭다.
오늘 첫 수업은 도서관 수업이다. 모모는 도서관에서 인기 있는 책은 거의 다읽었다. 핸드폰이 없으니 시간이 남아돌기 때문이다. 시간 때문만은 아니었다.모모는 책 읽는 걸 좋아했다. 모모의 집에는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모모의 엄마가 모모를 위해 사 둔 책이라 했다. 아빠는 엄마 물건은 다 버렸다. 엄마 사진도 한 장밖에 없다. 그 한 장이 남은 것도 모모가 엄마 얼굴은 알아야 한다고 말린 할머니 덕분이다. 그런데 아빠는 엄마가 사 둔 책들은 버리지 않았다. 그 책중에는 재밌는 책이 많아 심심할 때마다 책을 봤다. 친구들은 요즘 유행하는 만화책을 빌리려고 아웅다웅했다. 모모는 안 본 책이 있나 싶어 도서관 안쪽까지 샅샅이 둘러봤다.
어! 이 책은 뭐지?
<미미의 고양이>. 모모와 비슷한 이름이다. 손이 저절로 움직여 책을 꺼냈다. 표지에 귀여운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
이 고양이 어디서 본 것 같아!
오래된 책인지 종?가 누렇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펼쳐진 적 없는 새책 같았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어 모모는 망설임 없이 그 책을 빌렸다. 모모는 학원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갔다. 얼른 집에 가서 오늘 빌린 책을 읽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밑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야옹!
고개를 내려보니 까맣고 작은 고양이가 모모 앞에 있었다. 눈동자까지 온몸이 새까만 작은 고양이였다. 방금 책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모모가 빌린 그 책에서 말이다.
말도 안 돼. 책에 그려진 고양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고양이가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 눈짓을 하더니 뒤돌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모모의 가슴은 빨리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쿵쾅거렸다. 고양이를 놓칠까 봐 조심하면서 고양이를 따라갔다. 몇 발짝 안 갔는데 고양이는 어떤 건물로 쏙 들어갔다.
어라! 여기 이런 건물이 있었던가.
간판을 보니 무슨 도서관이라 적혀 있었다. 처음 보는 건물이라 들어갈지 말지 고민이 되었지만, 고양이를 놓치기 싫었다. 모모는 용기를 내서 도서관 문을 열었다.
쿵!
모모는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나 깜짝 놀랐다. 문이 닫힌 도서관 안은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오늘 쉬는 날인가? 그냥 나갈까?
고양이가 근처에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고양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양이를 놓친 것이 아쉬웠지만 낯선 곳에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워 얼른 들어왔던 문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방금 들어온 문이 보이지 않았다.
어두워서 안 보이는 걸까?
모모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요와 어둠 속에 혼자 서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무서운 마음이 조금씩 진정이 됐다. 어둠에 익숙해지니 비로소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밖에서 봤을 땐 건물이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는데, 책장이 굉장히 많이 있는 것 같았다. 왠지 이 책장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책장의 책을 만져 보니 오랫동안 아무도 만지지 않은 듯 두꺼운 먼지가 쌓여있었다.
여긴 문 닫은 도서관인가?
그때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났다.
저벅저벅.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란 모모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악!
발자국의 주인공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뒤에서도 비명이 들렸다.
꺅!
모모는 갑자기 누가 나타나 놀라긴 했지만, 한편으론 사람을 만나 다행이라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나가려고 하는데 깜깜해서 문을 못 찾겠어요. 도와주세요.
발자국의 주인공은 모모의 말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어둠에 점점 익숙해질수록 주위가 더 보이기 시작했다. 모모는 용기를 내 발걸음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다가갔다. 앞에 있는 누군가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뚱뚱한 아저씨같이 보였다. 한 발짝 더 다가가니 얼굴이 보였다.
“그악!”
모모는 너무 놀라 다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모모가 본 것은 분명 사람이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갑자기 눈물도 나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사람이 여기에…….”
그림자의 주인공이 말했다.
“누… 누구세요?”
모모는 울음을 삼키며 용기 내 물었다.
“난 이 도서관의 사서야. 여기는 원래 사람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모모는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처럼 울어 버린 자신이 창피하기도 했다. 그만 울려고 했지만 한번 터져 버린 울음은 바로 그쳐지지 않았다.
“그만 울어라. 시끄럽다. 난 나쁜 두더지는 아니야.”
‘두더지? 사람이 아닌 게 맞았어.’
모모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선 마음을 진정하고 울음을 그쳐 보려 노력했다.
“두… 두더지가 어떻게 말을 해요?”
이제 바로 앞으로 다가온 두더지가 말했다.
“넌 어떻게 말하는데?”
두더지는 황당한 얘길 들었?는 얼굴로 말했다.
“난 잊어버린 책들의 도서관 사서 별코두더지야. 넌 누구냐?”
자기소개를 하는 별코두더지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부드러웠다.
“제… 제 이름은 모모예요.”
두더지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이상하게 두더지와 얘기하니 모모의 마음이 편해졌다. 두더지가 말을 할 줄 아는 것도 당연한 것 같았다. 오래전에 왔었던 장소에 다
시 온 듯한 익숙한 느낌도 들었다.
“잊어버린 책들의 도서관이요?”
“그래, 여기는 사람들이 잊어버린 책들이 오는 도서관이야. 그래서 보통 책들이오지, 사람은 오지 않아.”
별코두더지는 자기가 한 말이 재밌다는 듯 혼자 웃었다.
“내가 사서를 맡은 오백 년 동안 사람이 들어온 건 네가 처음이야. 나를 따라오렴.
따뜻한 차를 만들어 줄게.”
자기 말처럼 상냥하지는 않아도 나쁜 두더지는 아닌 것 같았다. 모모는 별코두더지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어두운 곳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모모는 이제 주변이 제
법 보였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별코두더지 뒤를 따라갔다. 책장이 미로처럼뒤섞여 끝도 없이 이어졌다. 길을 잃어버리면 혼자서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별코두더지를 놓칠까 ?서워 바짝 붙어 갔다. 꼬리를 밟지 않고 뒤쫓아 가느라 다른 것에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여기야.”
벽에는 문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아늑한 거실이 나왔다. 마치 도서관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듯한 느낌이었다.
“와! 여기 우리 집보다 더 좋은 것 같아요.”
그 말에 별코두더지가 웃었다. 두더지는 익숙한 듯 부지런히 움직여 차를 만들었다.
“자, 따뜻한 차를 마시면 마음이 진정될 거야.”
“네, 감사합니다.”
모모는 울어서 그런지 목이 말랐기에 망설임도 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하고 아주 맛있었다.
“정말 맛있어요.”
별코두더지는 인제야 모모를 천천히 둘러보더니 모모가 가지고 있던 책을 발견했다.
“그 책, 네 거니?”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에요.”
“그렇구나. 이제 알겠어.”
“뭘요?”
궁금해서 눈이 동그래진 모모가 별코두더지를 쳐다봤다.
“그 책이 너를 잊어버린 책들의 도서관으로 데려온 것 같아.”
무슨 말인지 모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책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 책은 사람들에게 잊혀 이 도서관으로 올 예정이었는데, 그 책을 들고 있던 네가 함께 이 도서관에 오게 된 것 같구나.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되지만 말이야.”
모모는 다른 사람들은 올 수 없는 비밀의 공간에 자신이 오게 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보통 이런 특별한 일들은 모모에겐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
만 집에 다시 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제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뒤를 돌아보니 문이 보지 않았어요. 밖으로 나가는 문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제가 돌아가지 않으면 아빠가 걱정하
실 거예요.”
모모는 늦게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아빠가 화낼 것 같아 무서웠다. 별코두더지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음… 그건 복잡한 문제인데… 이 도서관은 사람이 나갈 수 있는 문이 없어. 오직 책만 들어왔다 나갈 수 있지. 하지만 사람은 이 도서관에 머물 수 없으니 분명나가는 방법이 있을 거야.”
모모는 문이 없다는 말에 깜짝 놀랐지만, 나갈 방법이 있을 거란 별코두더지의 말에 안심했다.
“그리고 네가 여기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밖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 늦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정말이에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이 있다니 모모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이왕 들어온 김에 실컷 구경하고 가도 되나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모모가 물었다.
“여기는 놀이터가 아니야.”
별코두더지가 화난 얼굴로 말했다.
“큰일이군. 일이 바쁜데 너를 돌려보낼 방법도 찾아야 하고.”
모모는 자기 때문에 별코두더지가 곤란해진 것 같아 미안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모모의 말에 별코두더지가 고민하는 듯 보이더니 물었다.
“너 지도는 볼 줄 아냐?”
별코두더지는 잊어버린 책들의 도서관 지도 보는 법을 모모에게 알려 줬다. 처음 봤을 땐 도서관 안 책장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미로같이 보였다. 하지만 도서관 안에 있는 모든 책장과 책들은 정확하게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지도를 읽는 방법만 익히면 길을 잃을 걱정 없이 어디든 다닐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지도에 반짝이는 점이 나타났다.
“여기 이 점 보이지? 여길 찾아가야 해.”
“네, 보여요. 이 점은 뭔가요?”
“사람들이 다시 기억해 낸 책은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그런 책들은 이렇게 반짝거리면서 빛을 낸단다. 나는 그 책들을 찾아 반납구에 넣어 주는 일을 하고 있어.”
모모는 오랜 세월 혼자 이 일을 하는 별코두더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를 돌려보내는 방법을 찾는 동안 나를 대신해서 이 일을 할 수있겠냐?”
모모는 마치 자신이 이 일을 하기 위해 도서관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두더지님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두더지님 이름이 뭐예요?”
“음, 난 이름이 없는데…….”
당황한 기색의 별코두더지가 말했다.
“그럼, 제 맘대로 불러도 되나요? 저는 두더지님을 별아저씨라고 부를래요.”
모모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외쳤다.
“하하! 내 코 모양에서 이름을 따왔구나. 좋아! 나도 맘에 들어.”
모모는 ?코두더지가 자기가 붙여 준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어두컴컴한 도서관에는 두더지가 사서로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처음 두더지를 봤을 때의 당혹감은 이미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벌써 네가 여기 들어온 후 시간이 많이 흘렀단다. 이제 쉬어야 할 시간이야. 오늘은 자고 내일부터 시작하자.”
별코두더지가 모모를 위해 잠자리를 만들어 주며 말했다.
“정말요? 해가 없으니 시간이 흐르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모모는 깜짝 놀라 말했다. 하나도 피곤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별코두더지? 마련해 준 잠자리에 눕자마자 모모는 깊은 잠에 빠졌다. 잠든 모모를바라보는 별코두더지는 모모가 이곳에 온 것이 우연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모모가 일어나니 별코두더지가 막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별코두더지는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책을 들고 있었다. 그 책 표지에는 잊어버린 책들의 도서관 사서를 위한 지침서 라고 쓰여 있었다. 그 책은 뭐예요? 궁금해진 모모가 물었다. 이 책 어딘가에 너를 돌려보낼 방법이 있을 거란다. 모모는 그 책을 다 읽으려면 몇 달은 걸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모모의 생?을 읽었는지 별코두더지가 말했다. 반짝이는 책을 찾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갈 거야. 어느새 모모의 눈은 도서관의 어둠에 완벽하게 적응되어 주변이 환하게 보였다.
첫날은 지도에 반짝이는 점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까운 곳을 돌며 지도 보는 법을 익혔다. 다음 날은 용기를 내서 더 멀리 다녀왔다. 별아저씨, 이 도서관은 얼마나 큰가요? 제가 오늘은 꽤 멀리까지 갔었거든요.근데도 끝이 안 보였어요. 하하! 너처럼 호기심 많은 아이는 처음 본다. 사실 너는 내가 처음 만난 어린이지만 말이야. 이 도서관은 끝이 없어. 계펼 커지고 있단다. 별코두더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람들은 점점 책을 잊어 가고 있어. 여기 들어오는 책들이 매일 늘고 있지. 책이 끝도 없이 쌓이고 있어. 사람들에게 책은 조금씩 잊히고 있단다.
그 말을 들은 모모는 조금 쓸쓸해졌다. 전 책들을 잊지 않을 거예요! 별코두더지는 모모의 말을 듣고 미소 지었다. 정말이에요! 저는 책 읽는 걸 좋아해요. 우리 집엔 책이 많거든요. 그리고 아빠가 게임을 못하게 해서 전 시간도 많고요. 헤헤. 모모 아버지는 좋은 분이시구나. 모모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빠는 모모가 책을 읽고 있므 땐 화를 내지 않았다. 거실을 아무리 책으로 어지럽혀도 말이다. 말을 마친 별코두더지는 다시 지침서에 고개를 박았다. 별코두더지는 그동안 꼼짝하지 않고 앉아 지침서를 읽고 있었다. 모모를 집에 돌려보내 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모모는 이상했다. 도서관에 들어온 게 언제인지, 며칠이나 지났는지 느낄 수도 없었다. 모모는 시간이 지날수록 도서관에서의 삶에 익숙해졌다. 이제 여기가 집보다 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공간이 조용하게 모모를 품어 주고 있었다. 여기에선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셋째 날, 처음으로 지도에 반짝이는 점이 나타났다.
별아저씨, 반짝이는 점이 나타났어요. 다녀오겠습니다. 모모는 별코두더지에게 인사를 하고, 지도를 확인한 후 출발했다. 그동안 지도 보는 법을 익혔기에 모모는 어렵지 않게 점을 찾아갔다. 근처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멀리서 희미한 하얀빛이 보였다. 어두운 도서관이기에 작은 빛이라도 밝게 보였다. 찾았다! 책장에서 꺼낸 책은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모모는 처음으로 빛나는 책을 찾아 뿌듯했다. 책을 조심스럽게 챙겨 들고 돌아와 별코두더지에게 전해 줬다. 잘했다. 이제 나를 따라오렴. 별코두더지는 방므 나와 옆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모모도 별코두더지를 따라 들어갔다. 그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다만 벽 가운데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 그 구멍으로 책을 넣었더니 금세 사라져 버렸다. 여기에 책을 넣으면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단다. 모모는 어두운 도서관에 있던 책이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는 자신도 좋아졌다.
모모는 금세 도서관 일에 적응했다. 복잡하게 얽혀 미로 같은 길도 순식간에 통과했다. 하루에 두세 개씩 빛이 나타나도 금세 책들을 다 찾아왔다.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더니 일을 제법 잘하는구나. 별코두더지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지만, 모모는 이제 안다. 별코두더지가
모모에게 다정하게 말했다는 걸 말이다. 모모는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 지도에 이상한 점이 나타났다. 그 점은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게다가 흰색도 아니었다. 희미하지만 아주 아름다운 색으로 반짝였다. 모모는 그 점을 자세히 보려고 지도에 코를 박았다.
이 점은 도대체 뭐지? 별아저씨한테 물어봐야겠다. 모모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별코두더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모야! 드디어 찾았어. 멀리서 별코두더지가 들뜬 목소리로 소리치며 뛰어오는 게 보였다. 너를 집에 돌려보낼 방법을 찾았어. 진짜요? 다행이다. 모모는 다행이라고 말은 했지만, 다른 생각도 들었다. 여기 생활에 이제 익숙해졌는데 떠난다니 아쉬웠다. 하지만,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다.
어떻게 해야 해요? 모모는 억지로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 방법은 아주 간단했어. 그냥 네가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 된대. 사람은 단지 나가겠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이 도서관을 나갈 수 있다는 거야. 엥, 그게 무슨 말이죠? 전 ?속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걸요! 모모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흠, 아무래도 뭔가 중요한 게 빠진 것 같구나. 내가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 다시 찾아보자. 걱정하지 말거라. 모모보다 더 실망한 표정의 별코두더지가 말했다. 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 맞지? 근데 왜 집에 가지지 않는 거지?
모모는 자기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가는 게 아쉽긴 하지만, 집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하루하루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질수록 모모는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모모는 별코두더지가 찾은 방법이 맞는다면 내가 집에 가는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모모는 어제 찾으러 가려고 했던 그 희미한 점을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마음이 복잡해져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도를 펼쳐 자세히 살펴봤지만, 그 희미한 점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예쁜 색으로 빛나는 점을 다시 보고 싶었는데.... 그때 지도에 까만 점이 나타났다. 너무 새까만 색이라 지도에 구멍이 뚫린 줄 알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별아저씨, 지도에 까만 점이 나타났어요! 까만 점을 발견하고 놀란 모모가 별코두더지에게 뛰어가 외쳤다. 흠, 네가 있는 동안 까만 점이 안 나타났으면 했는데.... 모모야, 이 책을 찾아오렴. 플래시를 줄게. 필요할 거야. 별코두더지는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모모는 평소보다 더 꼼꼼히 지도를 확인하고 까만 점을 찾아 출발했다. 지도에 나타난 까만 점 근처에 도착했는데도 어딘지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빛나는 점은 근처에만 가도 눈에 띄었기에 찾기 쉬웠다. 하지만 어두운 공간에서 까만색은 보이지 않았다. 모모는 별코두더지가 준 플래시가 생각나 꺼내 들었다. 책장 첫 칸부터 꼼꼼히 살펴보다 모모는 깜짝 놀랐다. 책 사이에 텅 빈 곳이 있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그 공간에 손을 대어 보니 책이 만져졌다. 모모는 책을 꺼냈다. 까만 책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모모는 그 책을 조심스럽게 챙겨 별코두더지에게 가져갔다. 별아저씨, 까만 책을 가져왔어요. 찾기 힘들었을 텐데, 잘했구나. 이제 나를 따라오렴. 별코두더지는 방을 나와 한 번도 열지 않았던 반대편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 은 암흑 자체였다. 방 안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벽 한가운데 다? 곳보다 더 어두운 구멍이 보였다. 별코두더지는 조심스럽게 까만 책을 그 구멍으로 넣었다. 모모는 별코두더지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봤다. 모모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돌아 나오는 별코두더지의 얼굴이 슬퍼 보여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모모야, 이 도서관은 책들이 쉬어 가는 정류장이야. 여기 있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책도 있지만, 오랫동안 아무도 찾지 않으면 결국 영원으로 돌아간단다. 별코두더지의 말에 모모의 마음도 슬펐다. 모모의 손에 놓였던 새털 같았던 그책의 무게가 다시 느껴졌다. 모모는 생각했다. 영원으로 돌아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도 아무도 찾지 않으면 영원으로 가게 될까? 내가 없어지면 아빠는 나를 찾아 줄까? <계속>
까만 책을 보내고 나서 모모는 한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매일 지도만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지난번에 봤던 희미한 점이 다시 반짝이는 걸 봤다. 반짝임은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이번엔 모모도 놓치지 않았다. 모모의 손가락이 반짝이는 점의 위치를 얼른 집어냈다. 이제 그 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희미한 점은 생각보다 찾기 ?들었다. 다 왔다고 생각하면 희미한 빛은 조금씩 멀어져 갔다. 한 번씩 지도에서 빛이 사라지기도 했다.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빛이 보였다. 그 빛은 아주 작지만, 무지개색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 있다!>
마침내 모모는 무지갯빛을 내는 책을 찾았다. 모모는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놀라고 말았다.
<모모의 고양이>
<모모, 이건 내 이름이잖아.>
모모는 얼른 책을 책장에서 꺼냈다. 모모가 도서관에서 빌린 <미미의 고양이>와 비슷한 책이었다. 첫 장에 그려진 고양이 그림도 똑같았다. 하지만 이 책은 서점에서 파는 그런 책이 아니었다. 도화지에 손으로 직접 그리고 써 한 장 한 장 엮어 만든 책이었다. 갑자기 모모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첫 장을 넘겼다.
<사랑하는 아들 모모에게. 엄마가>
모모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모모는 지금까지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았던 엄마의 얼굴이 갑자기 생각났다. 이 책을 읽어 주던 엄마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모모야! 이 책은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야. 그래서 모모 주려고 엄마가 직접 만들었어. 모모 이름으로 말이야.>
엄마는 직접 만든 책을 아기인 모모?게 읽어 줬다. 모모를 쓰다듬어 주던 보드라운 손, 다정했던 입맞춤, 뺨에 닿던 엄마의 얼굴. 그 모든 게 한꺼번에 생각났다. 책을 펴는 순간 소중한 기억들이 모모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지금 모모의 머리에, 입술에, 뺨에 엄마가 닿고 있었다.
<엄마! 엄마!>
모모는 엄마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아 소리쳐 불렀다. 모모는 처음으로 엄마를 소리 내어 불렀다.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기억났다. 엄마와의 마지막 약속.
<모모야! 엄마가 많이 아파서 더 이상 모모랑 같이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엄마랑 약속해 줘. 아?와 엄마 몫까지 열심히 살겠다고. 그리고 다시 엄마와 만나는 거야. 알았지? 살면서 힘든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포기하면 안 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와 행복해야 해! 엄마가 없다고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하늘에서 항상 모모를 지켜 줄 거야.>
모모는 엄마와의 약속을 잊고 살았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모모가 아주 어릴 때였긴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소중한 기억을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 엄마의 기억이 떠오르니 갑자기 아빠가 보고 싶어졌다. 엄마가 부탁한 것처럼 아빠와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이제 집으로 가고 싶었다.
엉엉 울고 있는 모모 앞에 별코두더지가 나타났다.
<갑자기 네가 우는 소리가 들려 놀라서 달려왔는데, 이제야 때가 된 것 같아.>
<별아저씨! 저 이제 다 기억이 나요.>
<그래, 아마 그 책이 너를 만나고 싶었나 봐. 한 번 들어온 책은 스스로는 나갈 수가 없으니 너를 여기로 불러들였나 보다.>
모모는 별코두더지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점점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별아저씨!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 아저씨를 잊지 않므 거예요.>
모모는 고양이를 쫓아갔던 그 골목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직 모모의 뺨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모모는 눈물을 훔치고 천천히 일어나 걸어갔다. 그러다 발걸음을 빨리 해 뛰기 시작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띵동띵동>
모모는 평소처럼 빈집에 벨을 눌렀다.
<모모니?>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아빠가 나왔다. 집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아빠가 나와 모모는 깜짝 놀랐다.
<아빠! 오늘은 빨리 오셨네요?>
<오늘 이상한 일이 있었어. 특별한 날이기도 하고 말이야. 모모야, 너한테 할 말이 많은데…….>
<아빠! 나도 아빠한테 할 얘기가 있어요.>
모모는 가방과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아빠는 그 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모모야! 그 책 어디서 났어?>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렸어요. 그런데…….>
모모가 말하려고 했는데 아빠가 먼저 말했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어. 그래서 엄마가 너 주려고 그 책과 똑같이 직접 만든 책이 있단다.>
아빠는 책장에서 책을 찾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여기 둔 것 같은데 어디 갔지? 엄마가 모모 주려고 정성스럽게 만든 책인데…….>
책장을 구석구석 뒤졌는데도 책은 나오지 않았다. 아빠가 포기하려는 순간 모모는 책장 뒤에서 반짝이는 희미한 빛을 봤다.
<별아저씨, 감사해요.>
모모는 아빠 몰래 조용히 혼잣말하고,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책장 뒤에 뭐가 있는 것 같아요.>
아빠가 책장을 앞으로 당기자 책 한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빠는 그 책을 집어 들고 환하게 웃으며 모모에게 건네줬다.
<모모야! 이 책이란다.>
<아빠, 저 이 책 기억나요.>
<네가 정말 어릴 적인데 기억난다니 신기하구나. 모모야, 너에게 할 얘기가 있는데, 아빠 얘기를 들어 줄래?>
모모를 바라보는 아빠쟀 얼굴이 부드러웠다. 화나지 않은 아빠 얼굴은 오랜만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우리만 두고 너무 일찍 가 버려서 화가 났어. 그래서 네가 엄마 얘기만 꺼내면 화내고, 엄마 물건도 다 치워 버렸지. 너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건데,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런데 오늘 회사 가는 길에 갑자기 이 고양이를 발견했단다.>
그러고 보니 집구석에 못 보던 상자가 있었다. 아빠는 그 상자에서 까만 새끼 고양이를 꺼내 모모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 고양이는 반짝반짝 눈동자를 빛내며 모모를 올려다봤다. 모모는 깜짝 놀랐다. 이 고양이는 바로 모모를 잊어버린 책들의 도서관으로 안내해 준 그 고양이였다.
<모모야, 이 고양이 그 책에 나온 고양이랑 똑같이 생기지 않았니? 아빠는 처음에 이 고양이를 보고 너무 놀랐어. 그 책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거든. 그런데 이 고양이가 계속 아빠를 쫓아오면서 우는 거야. 그래서 고양이를 쳐다보니 엄마 생각이 났어. 마치 엄마가 왜 나를 잊고 살려고 하냐고 원망하는 것 같더라.>
아빠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모모는 아빠가 우는 걸 처음 봤다.
<사실 오늘 엄마 생일이야. 그래서 이 고양이가 우리에게 선물처럼 온 것 같아. 우리 이 고양이 키울까?>
<네, 좋아요! 이름은 당연히 미미예요!>
눈물을 닦은 아빠는 모모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이제부터라도 모모에게 엄마 얘기 많이 해 줄게. 세상을 일찍 떠난 엄마가 모모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이 많았는데, 아빠가 하나도 얘기해 주지 않은 것 같아.
우리 앞으론 해마다 엄마 생일도 기억하고 같이 축하해 주자.>
모모는 도서관과 별아저씨에 대해 아빠에게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말하는 순간 기억이 다 사라져 다신 생각나지 않을 것 같았다. 잊어버린 도서관의 책들처럼.......
모모와 미미, 그리고 아빠는 조그만 케이크를 가운데 두고 앉아 엄마를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모모는 미미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엄마가 웃고 있는 모습을 언뜻 본 것도 같았다. 모모는 환하게 웃고 있는 아빠를 봤다. 왠지 앞으로 아빠가 자주 웃을 것 같았다. 옆에 앉은 미미도 모모를 보고 웃어 주는 것 같았다. 모모는 왠지 엄마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끝>
심사평 황선미(동화 작가)
지난해 응모작에 비해 읽는 즐거움이 커서 동화 창작 시장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완벽한 하나의 작품을 뽑기에는 여전히 문제가 있었으나 후보에 올려 두고 이야기를 나눌 작품은 여럿이었고, 구조적인 문제가 아쉬운 작품들에서도 글감 자체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몇 군데 문제가 있음에도 가장 동화다운 작품을 우선순위에 두었고 문제 해결 능력, 주제 구현, 문장력, 창의적 시도, 이후 작가로서의 가능성 등에 초점을 맞춰 세 작품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불편한 행운>은 한 시골 마을이 방송에 노출되면서 생기는 명암을 유쾌 발랄한 구어체로 풀어낸 작품이다. 인물이 선명하게 연상될 만큼 입말이 살아 있고 개성도 잘 드러났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마을의 면면을 담아낸 이야기라 현실적으로 읽혔다.
<우리들의 트라이앵글>은 요즘 아이들이 자주 언급하는 성격 유형(MBTI)을 중심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셋이 모이면 반드시 하나는 외롭다는 말처? 이 작품 속 단짝 셋도 균열을 겪는다. 주인공은 그 이유를 두 친구와 다른 자신의 MBTI에서 찾는다. 결국 좋은 관계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점을 섬세하게 도출해 냈다.
<잊어버린 책들의 도서관>은 도입부가 간결하고 호기심을 주는 묘사와 정보가 흥미로웠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책들이 모여 있는 세계에 대한 묘사가 입체적이다. 종이와 책이 더는 중요하지 않은 요즘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있고 상실을 겪어도 다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는 저작 의도도 잘 드러났다. 다만 결말이 다소 상투적이고, 낯선 세계로 안내한 고양이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이 다른 작품에 비해 미덕이 많고, 이후 창작을 기대해도 좋은 작가라는 판단하에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기대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축하를 보낸다.
심사평 채인선(동화 작가)
행복한 가정은 대개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말했다. 작품도 마찬가지다. 잘 쓴 작품에는 이유가 별로 없다. 읽는 이를 감동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 못한 작품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소재는 참신하지만 메시지가 약하거나, ?결성은 있지만 서정성이 부족하고, 이런저런 문학적 장치들이 과해 교통정리를 하고픈 마음이 들게 한다.
당선작으로 뽑은 <잊어버린 책들의 도서관>이 위에 열거한 이유를 모두 뛰어넘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곧 뛰어넘을 것 같은 가능성을 발견할 순 있었다. 먼저 작품의 애잔한 제목에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책에 연관된 사람치고 이런 제목을 쉬이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인공 아이는 우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들어서게 된 공간에서 잊고 있었던 너무나 소중한 책을 발견하고 그와 함께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소중한 현재와 마주한다. 너무나 소중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어두컴컴한 무의식을 돌아다닌 셈이다.
반면, 우수작으로 뽑은 <우리들의 트라이앵글>과 <불편한 행운>은 어두컴컴하지 않다. 모든 것이 잘 드러나 있다. 전자는 세 아이가 공연을 앞두고 삼각형의 세 꼭짓점과 같은 우정을 쌓아 가는 과정이 일기처럼 그려져 있다. 후자는 이미 단단한 우정을 쌓은 두 아이가 자기 동네에서 벌어지는 상점들의 흥망성쇠를 지방색 강한 입담으로 보여 준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그 일이 진행되는 과정이 대낮의 환한 빛 아래 숨김없이 재현된다.
재현은 문학의 첫 번째 소명이다. 그러나 재현에 집중하다 보면 작가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재현의 의미나 목적이다. 왜 우린 이런 일을 재현해야 하지? 다 알고 있는데. 하는 물음에 답을 해 주어야 한다. <우리들의 트라이앵글>과 <불편한 행운>은 술술 잘 읽힌다. 술술 잘 읽히는 작품을 술술 잘 쓰는 것은 저자의 자신감이다. 이 자신감을 믿고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첫댓글 동화는 이렇게 쓰는 거군요. 정말 재밌게 읽었네요.
"사람들이 다시 기억해낸 책은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그런 책들은 이렇게 반짝거리면서 빛을 낸단다." 따스한 울림이 있는 판타지 동화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