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렌(Horace N. Allen, 安連)이 1884년 9월 미국 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부임했을 때 기록한 『알렌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I found the patient in a horrible condition all blood and gore and attended by fourteen Corean doctors who made great objection to my heroic measures."
(김원모 완역,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4, 407~408쪽)
이 기록은 1884년 12월 5일 자 일기 가운데 한 구절로, 전날 밤에 환자를 진료한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 기록된 환자가 바로 유명한 역사 인물 민영익(閔泳翊)이다. 1884년 12월 4일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터진다. 갑신정변이 그것이다. 갑신정변은 개화파들이 우정국 축하연을 계기로 수구파인 민씨 척족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찬탈한 사건이다. 삼일천하로 끝난 이날 사건 후에 개화파인 홍영식과 박영효는 청군에 피살되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개화파는 몰락하게 되었다. 위에 기록된 내용은 한의학과 관련된 기록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이 사건의 전후 맥락은 이러하다. 민영익은 개화파가 무너뜨리려 한 민씨 일파의 중심인물로, 이날 우정국 축하연에 참석하여 개화파 자객의 칼을 맞았다. 독일인 고문 묄렌도르프는 쓰러진 민영익을 자신의 집으로 옮겨, 같은 해 9월에 미국 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온 알렌을 불러 치료를 요청했다. 알렌의 치료에 힘입어 몇 개월 후 민영익이 완쾌되었다.
그런데 위의 문장에 등장하는 한의사의 모습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기록이 매우 소략하여 한의사들의 행적에 대해 여러 가지로 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멀뚱멀뚱 서양의학의 신비로움에 탄복하고 서 있었다거나 혹은 허둥대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에 알렌이 들어와서 치료해 주었다는 등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이글의 목적은 기존의 연구를 비판하거나 번역서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위의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있다. 이 문장을 정확하게 해석해야 해당 사안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위의 문장 자체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말하고자 한다.
가장 권위 있는 완역본에서는 위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묄렌도로프 집에 당도해 보니 중상자의 상태가 이미 출혈이 심했고 계속 피를 흘리고 있어서 빈사(瀕死)상태였다. 이곳에 치료하기 위하여 모인 조선인 의사들(漢醫)은 나의 뛰어난 치료 솜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번역서는 번역이 매끄러워 『알렌의 일기』 번역판으로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위 문장의 번역에 있어서만은 문제점이 있다. 특히, "attended by fourteen Corean doctors who made great objection to my heroic measures"에서 fourteen이라는 숫자와 objection이라는 단어에 대한 번역이 치밀하지 못하다.
이것은 역자가 전체적인 맥락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번역은 당시 한의사들에 대한 왜곡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기 때문에 실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이곳에 치료하기 위하여 모인 조선인 의사들(漢醫)은 나의 뛰어난 치료 솜씨를 기다리고 있었다."라는 번역은 바른 번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맨 위의 문장을 번역판을 기준으로 다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은 번역이 될 것이다.
"묄렌도로프 집에 당도해 보니 중상자의 상태는 피범벅이 된 끔찍한 상태였다. 나의 당당한(영웅적인) 치료에 대해 적의敵意를 품고 있는(반대하는) 14인의 조선인 의사들(漢醫)이 옆에서 지켜보았다."
『알렌의 일기』는 당시 조선의 한의사들이 서양인 의사의 치료과정을 최초로 목격한 상황을 기록한 문건이기에 깊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피를 흘리고 있는 환자를 서양식 치료술로 봉합하여 치료하는 것은 한의사들이 할 수 없는 획기적이고 훌륭한 의료 기법이기에 알렌이 서양식 의료기관을 설립하고 서양 의술을 전파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존의 연구 가운데, 한의사들이 민영익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고, 그 사이에 알렌이 왕진 요청을 받아 민영익을 조선의 의술과 구별되는 서양의술로 치료해 민영익의 신뢰를 얻고 왕실과도 친밀해져, 후에 민영익의 도움으로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서양식 의료기관이 설립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연구도 보인다.
이 장면에서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알렌이 조선인 한의사의 수가 14인이라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독한 환자의 진료에도 급급한 상황에서 14인이란 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헤아리고 있었을까? 두 번째로 "나의 당당한(영웅적인) 치료에 대해 적의(敵意)를 품고 있는(반대하는) 14인의 조선인 의사들(漢醫)이 옆에서 지켜보았다."라고 했듯이 한의사들이 알렌의 치료에 대해 전혀 학구적인 자세로 배우려는 입장이 아니라 매우 비판적인 입장에서 응시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 상황을 필자 나름대로 아래에서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먼저 밝혀두고 싶은 것은 이 판단은 필자 개인의 판단이므로 이에 대한 다른 의견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더 좋은 의견이 있었으면 좋겠다.
민영익이 다쳐서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몇몇 조선인들이 묄렌도르프의 집을 찾았다. 그들 중에는 한의사들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민영익을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열네 명씩이나 되는 한의사들이 이러한 사태를 예상하고 민영익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묄렌도르프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묄렌도르프의 명령을 받고 문밖에서 지키고 서 있는 군인들은 이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묄렌도르프는 암살자로부터 민영익을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에 모든 조선인의 출입을 금했던 것이다.
알렌이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빠른 걸음으로 뛰어들어 왔다. 이에 지인들이 항의했고 이를 본 알렌은 이들이 들어와도 좋다는 전갈을 보냈다. 이들에게 자신이 치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앞으로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렌은 민영익이 누워있는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14명 정도만 입실을 허가했고 이래서 알렌은 14인이라는 숫자를 정확하게 기억하게 된 것이다.
이 14인이 모두 조선인 한의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 모두를 한의사로 생각하게 된 데에는 자기의 치료술을 과장하고픈 알렌의 마음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들어온 조선인들은 알렌의 서양의술에 대해 그다지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알렌이 "나의 당당한(영웅적인) 치료에 대해 적의(敵意)를 품고 있는(반대하는) 14인의 조선인 의사들(漢醫)이 옆에서 지켜보았다."라고 적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고찰해볼 문제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이때 알렌을 둘러싸고 서 있었던 14인의 조선인이 과연 알렌의 말대로 한의사들이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들이 한의사들이었다는 것은 순전히 알렌의 개인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 수많은 한의사가 어떻게 기별을 받고 너도나도 뛰어와서 민영익을 기다렸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런 숫자라면 서울 장안에서 활동한 이름 있는 한의사들이 모조리 불려왔다는 것인데 도무지 말이 안 된다. 통신체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던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 규모의 한의사들이 모였다면 이때 이 자리에 있었던 한의사 중 이름이 있었던 인물이 다른 자료에라도 어딘가에 한 번쯤은 언급할 만한데 전혀 그런 기록이 안 보인다. 어떤 연구자의 글에는 "부상당한 민영익을 두고 한의사들은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고, 결국 서양의사 알렌에게 왕진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알렌의 일기』를 살펴보면 이런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는 그 연구자의 개인적인 판단이라고 보인다.
둘째, 알렌 한 사람의 능력으로 한의학이 서양의학에 굴복하게 되어 제중원 설립이 가능해졌는가 하는 점이다. 이 사항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깊은 논의가 있어야 하겠지만, 민영익과 고종이 한의학을 부정하고 서양의학만 추종했다고 볼만한 근거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만약 민영익과 고종이 서양의학만 추종했다면 당시 활동했던 한의사들이 이러한 사실에 위기를 느끼고 제중원의 설립에 반대했을 것임에도 1885년 1월 27일 자 『알렌의 일기』에는 한의사들이 제중원의 설립안에 찬성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민영익)를 비롯하여 모든 조선 친구들, 심지어 조선 한의사들까지도 나의 병원 건설안에 찬동했다."(김원모,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1, 51쪽) 그리고 고종과 민영익은 한의학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친 바가 한 번도 없다.
셋째, 민영익을 살린 것이 오직 알렌의 치료술뿐인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민영익이 복용한 한약 때문에 완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알렌의 한약에 대한 불신은 그의 일기 1월 11일 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민영익은 한약복용을 금지하는 내 처방을 무시하고 그의 친구가 주는 고려인삼을 복용했기 때문에 병세가 악화되었다."(『알렌의 일기』, 47쪽) 이것은 알렌이 한의학에 대해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렌이 보기에 민영익이 치료가 더딘 것은 그가 한약을 복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같은 해 2월 12일 자 『알렌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오늘 나는 놀랍게도 민영익의 상처가 아물었다가 또다시 상처가 부르트고 재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같이 상처가 악화된 주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부인들의 병간호가 주원인인 것 같았다." 이것은 민영익의 치료가 더딘 것이 한약 때문이 아니라 부인들의 잘못된 병간호(알렌이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치료술을 과장하고 치료 효과가 더딘 것의 구실을 찾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때문이라고 알렌 스스로 자인하는 기록이다.
넷째, 조선의 한의사들이 알렌 정도의 봉합술을 구사하지 못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자료가 많이 수집되어 있으므로 앞으로 본격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으로 본다. 한마디만 한다면 고려시대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서부터 봉합술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 『동의보감』,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등 수많은 서적에서 봉합술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알렌의 봉합술이) "전에 종기나 째던 한의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해부학 지식을 이용한 치료법을 시행했던 것, 인체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한 이러한 외과 치료는 당시 사람은 상상도 못했던 의술이었다."라는 글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한의학 외과술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앞으로 한의학의 외과술, 특히 봉합에 대한 문제는 집중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댓글 의학적인 입장에서 쓴 글이기에, 다소 교회사적으로 이해하기 모호한 점이 있지만, 일기 자체가 귀해서 옮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