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성집 호는 농고 본관은 곡강으로 조선조 고종4년(1867년) 흥해군 곡성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재주가 뛰어났고 그릇이 커 어려움을 많이 당하여도 구차하지 않았고 나이가 많이 들면서 더 학업에 열중하였으며 특히 손자병법과 오기의 병서 탐독하기를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어찌 문필만을 일삼아 평생토록 선비노릇이나 하고 지내리요 복파 장군이나 마원 같은 포부로 살리라"하였다. 천문과 지리, 음양, 도략 들을 탐구하면서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중 고종 갑오년(1894)사변과 을미년(1895)에 이르러 왜구들의 침략이 잦아지자 병신년에는 나라의 치욕을 씻으려고 기병하여 안동의 진에 참여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의분을 참지 못하고 나라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도찰사를 지낸 영천 정한직이 고종황제의 밀소에 의해 거의한 산남의진의 흥해지역 활동책임자로 참가하였다.1907년 죽장 입암전투에서 정용기 대장을 비롯한 의병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공은 병환으로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패전한 장소에 이르러 통곡하였다. 정환직 대장이 남은 군사를 거두어 아들의 원수를 갚고자 왜적 섬멸에 최선을 다했으나, 상황이 불리하여 영천 길가에서 정대장은 해를 입고 말았다. 공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통분을 참지 못하고 "어찌 이 목숨이 살아 있는 한 나라가 망하는 꼴을 앉아서 보겠는가." 하고는 도보로 의진을 향했다. 부장 이세기, 정순기 등이 남은 군사들을 규합하여 보현산 속에 주둔하고 있다가 공이 출진했다는 말을 듣고 산남의진 3대 대장으로 추대했다. 의병을 이끌고 흥해, 청하, 영해, 청송, 영천, 의성 등지로 전진하면서 왜적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끝내 장기에서 왜병에게 체포, 청하 헌병대로 압송되어 대구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공은 대구에서 10년형을 언도 받고 경성감옥으로 옮겨갈 때 왜놈괴수가 말하기를, "내 비록 나라를 위해 거사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천명일 뿐이니 다만 내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하고는 감옥살이 8년째 되던 해에 스스로 단식한지 10여 일 만에 세상을 떠나니 때는 1916년 8월 9일, 나이 50세였다. 한 많은 일생을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하였으니 우리 모두의 슬픔이며, 나라의 거룩한 넋이 되었다.1968년 3월 1일 조국광복 유공자로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
김상구 |
1855년 6월 17일 산광면에서 태어나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체결되자 고종황제는 측근의 정한직에게 의병투쟁을 종용하였다. 이에 정한직은 아들 정용기를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 보내 의병조직을 하고 조정에서 적극 협력할 것을 약조하였다. 정용기가 고향으로 내려와 영남일대, 지사들을 규합하여 신남의진을 결성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청하일대를 중심으로 의병모집활동을 하였으며, 그 때 아들 하사도 함께 종군하여 서기로 진중일기를 전담하였다. 1908년 정환직이 순국한 후 산남의진이 무너지자 동지 수십 명과 함께 제기할 것을 계획하고 기호지방으로 가다가 충복 단양에서 왜적을 맞아 접전하던 중 1908년, 4월 7일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김윤진 |
1882년 10월 28일에 태어나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체결되자 항일의병이 일어났다. 이에 공은 국운을 회복하고자 산남의진에 자진 입대 하여 항일투쟁에 투신한 후 1907년 4월 정용기 정학진 최세한의 휘하에 소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를 전후한 시기에 흥해,기계,신령,의성,영덕, 입암 전투에서 수십 명의 왜적을 사살하였다. 한편 우재룡,박광,이한구와 함께 왜놈 관사를 방화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으며, 또한 전투중에 적에게 체포된 정학진 장군의 구출작전을 주도하여 왜적을 사실하는 전과를 올렸다. 7월에 동지 백영근과 함께 체포되어 압송되는 중에 왜병 2명을 제압하고 간신히 도망쳐 은신하였다. 그러나 탈출에 실패한 백영근은 압송되어 7년형의 옥고를 치루었다. 1964년 세상을 떠나니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이종흡 |
자는 중순 본관은 경주, 회경의 증손이며 이수응의 아들로, 조선조 철종 신유년(1896)에 기계면 현내리에서 태어났다.한말 국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걱정하다가 병신년(1896)에 교남 유림이 고종 황제의 밀소를 받아들어 김도화, 남승철, 이준구등과 함께 각 고을과 연계하여 의병을 모집하게 되자 공은 기계면 인비장터에서 경주의진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채구를 소모장으로 공은 참모장으로 추대되어 경주지방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왜병과 싸워 많은 전공을 남기었으나 동해안 전투에서 패전을 거듭한 끝에 의병진이 힘을 잃고 해산되자 후일을 기약하며 고향으로 돌아와 은신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으면서 암암리에 의병활동 단체들과 연락을 취하며 구국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만년에는 두봉산 밑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지도하며 시문을 즐기다가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
이상호 |
자는 기연 호는 월중, 본관은 영천이다. 조선조 고종 병자년에 기북면 오덕2리 오도에서 장사랑 이흥락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떨구게 하는 위엄이 있었으며, 골격과 인물이 빼어나 큰 재목감으로 주목을 받았다. 학문을 닦아 병서를 탐독하며 호연지기를 키워 나갈 즈음,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져 한일합방이 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인근 지방의 동지를 규합하여 영천에서 일어난 정용기 대장과 함께 산남의진을 결성하여 1906년 본진 참모장으로 선임되어 화총 200정과 군량미 200석을 조달하였으며, 흥해, 청하 등지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죽장면 입암 전투에서 정용기 대장이 전사하자 의진을 재정비하여 영덕주방지역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은신치료 하던 중 정환직 대장이 왜놈에게 체포되었다. 단독으로 잔류병을 재규합하여 항전하다가 흥해 시장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08년 2월 필사적으로 탈옥하여 관동지방에 피신하여 의병 제규합을 도모하다가 왜병에게 탄로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상으로 장기간 신음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가하였으나, 가문은 황폐되고 친상은 탈상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1949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나니, 정부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선정, 1980년 8월 15일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
정치익 |
호는 만돈 본관은 오천으로 영양공 정습명의 24대손이다. 조선조 철종 신혜년(1851) 지행면 수성리에서 정유규의 4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용모가 빼어나 큰 재목으로 기대를 모았다. 영천 정문각당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선인들의 충절을 흠모해 오다가 성동 3리에 소재한 광남서원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시다 순국한 황보인 선생을 모시는 사실을 알고부터 광남서원에서 학문을 수행하였다. 한편으로는 효성이 지극하여 23세 되던 해 친환이 위독함에 단지주혈하여 3일간이나 수명을 연장하였다. 당시 시대상황으로는 국운이 기울어져 왜구가 동해안일대를 노략질하자 변방보루를 튼튼히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워 가재를 털어 장기향교에 200냥을 헌금, 장기성을 보수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의분을 참지 못하고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항전하는 장헌문을 도와 병기구입비를 조달하였고, 당시 산남의진을 결성한 정환직대장 진영에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나라를 구하기 위한 충절지심으로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진영과 연락하면서 왜병의 활동상황을 알리는 첩보활동을 해 왔다.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왜군 헌병대로부터 지명수배되어 고향에 거주하지 못하고, 만주에 가서 활동하다가 나이 80에 노환으로 귀향, 세상을 떠나니 광복의 기쁨도 보지 못했다. |
장헌문 |
자는 무장, 호는 퇴헌, 본관은 아산으로 1870년 5월 9일 장기현 서면 죽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우가 비범하고 그릇이 커 나라의 큰 재목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며, 학문에 열중하여 경사에 통달하였고, 충과 효를 실천에 옮겨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나라를 걱정하여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한 충정을 불태우고 있던 차에 한일합방이 되고 왜병이 동래성에 입성하여 살상과 방화약탈을 자행하자 인근동지 300여 명을 규합, 장기고을 의병진의 중군장으로 추대되었다. 가재를 털어 군수물자를 마련한 후 의병진을 진두지휘, 장기를 기점으로 하여 경주, 죽장, 기계, 흥해, 청하 등지에서 일제주둔 부대를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남기고, 수시로 영천의 산남의진 정한직 대장과 연락하고, 영덕의 의병대장 신태호(돌석) 진영과도 연계하여 3개 진영이 합세, 강릉을 거쳐 서울로 진격키로 계획하였으나, 일제 수비대에게 탄로되어 북상공격계획을 변경한 후 인근 일제 주둔군과 접전을 전개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쟁터에서 많은 병사를 잃고 자신도 총상을 당하여 왜병에게 체포되었다. 1909년 10월 7일 대구 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1918년 12월 출감한 후 귀향하여 구룡포읍으로 주소를 옮긴 후, 다시 옛 동지들을 재규합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1929년 1월 25일 고된 옥고를 치룬 여독으로 세상을 떠나니 정부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선정,1977년 12월 13일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민시식 |
1878년 4월 28일 죽장면에서 태어났다. 1906년 영천에서 의거한 정용기 의병장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영천의 동북지방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100여 명의 포수들과 함께 산남의천에 입대하여 의병모집과 군수물자 조달에 공헌하였으며, 항상 선봉에 나서서 활약하였다. 영천, 청송 전투에서 왜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47년 5월 24일 세상을 떠나니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양제안 |
1860년 4월 9일 영일군 죽장면 두마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벽도, 1896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왜놈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어난 이기찬 의병장 중장군으로 임명되어 금릉에서 부서를 정하였는데, 병력은 수백 명이었다. 의병진을 김산과 성주 두 곳에 설치한 대구를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기밀이 누설되어 김산진영은 경군과 공주관군의 역습으로 물러났다. 공은 이 때 흩어진 군제를 모아 충북 진천으로 이동하여 활동하였다. 1905년 일제의 강요에 1,300만원의 국채를 지게 되자 전국에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는데 공은 대구에서 금연보상운동을 벌렸다. 1910년 을사조약으로 일본헌병경찰 제도가 실시되자, 공은 영주, 풍기에서 광복단에 가입, 군자금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후진에게 배일사상교육에 힘써 항일 투쟁정신을 고취시키다가 1929년 5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공의 항일투쟁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신태주 |
자는 성순, 호는 대산, 본관은 평산으로 철종 갑인년에 죽장면 논곡에서 태어났다. 고종 32년에 왜인이 명성왕후를 시해한 사건이 있은 후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공은 안동 의병장 권세연과 관동창의사 민용호로부터 연락을 받고 흥해에서 기병한 후 의병 300여 명을 인솔, 안동창의소에 합세키 위해 행군하던 중 기계, 죽장을 거쳐 청송을 경유하는 도중에 왜병과 격돌하여 승전하고, 안동의병진과 합세한 후 안동, 봉화, 영양 등지에서 왜병과 싸워 많은 전과를 남기고, 강원도 창의사 서상열의 진과 합세하여 상경하던 중 양천전투에서 대패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공은 패잔병을 재규합하여 귀향한 후 해산하고 두문불출하더니 나라가 망함에 장기간 단식하다가 운명하였다. |
이채구 |
자는 덕오, 호는 정일, 본관은 여강으로 신광면 우각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은 후에 분기하여 김하락 의진에 참군하였으나, 고종황제의 의병해산 조칙이 있어 탄식하며 궁리한 끝에 경주성을 공략하기로 하고 김하락 대장과 협의한 후 의병500명을 인솔,선봉장으로 출진하여 경주성을 공략하니 왜병이 의병진의 기세에 눌려 도망쳤다. 그 후 청송전투에서 승리하고 영덕 전투에서 의병장 김하락이 전사하였으므로 의병진은 해산되고,공은 귀향 후 비학산 아래 은거하면서 종신토록 불세출하였다. |
이기철 |
자는 순일, 호는 양죽당, 본관은 영천으로 청하면 필하리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있은 후 울분을 참지 못하여 병신년 3월에 향림이 모의하여 의병을 모집한 후 진영을 구성했을 때 공은 참모장으로 활동하다가 청하 엿재(육현)에서 왜병과 싸웠고, 그 후 고종 황제의 의병진 해산칙명이 있어 진영을 해산한 후 귀향 은신 중 세상을 한탄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
김진규 |
자는 문숙, 호는 묵제, 본관은 의성으로 순조 갑오년에 청하 소동리에서 태어났다.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은 후 분기 의병하니 진영이 400여 명이었으나 고종황제의 의병진 해산 칙명이 있어 진영을 해산하고, 죽장면 가사리에 은신하다가 계축년에 세상을 떠났다. |
이도상 |
자는 극수, 호는 월오, 본관은 영천으로 청하면 필화리서 출생하여 을미정변 때 창의하여 소모군자감으로 종군하였다. 그 후 고종황제의 칙명에 의하여 의병진을 해산한 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삼일불식하고 서쪽을 향해 통곡하더니 행방이 묘연하였다. |
윤면익 |
자는 자원, 호는 돈산, 본관은 파평이다.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의병으로 종군한 후 고종황제의 의병해산 칙명에도 불구하고 죽장, 영덕, 달산에서 왜병과 항전하다가 순절하였다. |
이하정 |
자는 인가, 호는 월봉, 본관은 청안으로 별감좌수를 지내다가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동지 김송몽, 정천여, 서초천, 김인수 등과 의병을 모집, 훈련중에 고종황제의 칙명에 의하여 의병진영을 해산하고 천석사령에서 은신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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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신 |
본관은 수원, 초휘는 영근, 영촌이며,1882년 죽장면 지동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뛰어났고 포수로서 이름을 날렸다.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고 국운이 기울어지자 애국충정을 불태우고 있던 중 정용기 대장이 산남의진을 규합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에 가담하여 흥해, 청하, 청송, 영주, 영덕 등지에서 왜병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영천 자양 전투에서 맨주먹으로 왜병2명을 때려 살상한 맹장이다. 산남의진이 대패하여 해산된 후에 강도 살인죄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7년형을 살고 난 후,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맞이한 후 세상을 떠났다. |
조규원 |
죽장면 매현리 출생으로, 자는 경문, 호는 죽제, 본관은 한양이다. 학행과 덕망이 있어 광무6년 통정대부를 지냈고 이듬해 광무7년에는 가선대부에 올랐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은 후 산남의진을 기병한 영천 정환직 대장이 수 차례 죽장 매현을 방문하여 의병모집 활동에 대한 자문을 구했고 죽장면 일대 의병규합에 크게 공헌하였다. |
곽한철 |
자는 평노, 본관은 현풍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망우당 곽재우장군의 11세손이다. 조선조 고종 갑자년 청하면 고현리에서 출생, 어려부터 호걸의 기상이 있더니 장년이 되어서 흥해 망천리에 이거하여 살았다. 당시 시대상으로는 조선 말엽 국운은 기울어지고 백성들은 가난에 시달리다가 끝내는 왜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공은 나라 잃은 설움을 한탄하며 큰 일을 할 것을 맹세한 후 재산을 모으기 위해 상업을 시작했다. 이 지방에서 생산되는 한지, 건어물, 임산물 등 갖가지 물품 등을 수집 동해안 일대를 비롯 전국을 상대로 하여 사업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후 송라면 화진리로 옮겨 염전을 개발, 많은 재산을 모은 후 불우한 사람을 도와주고 영재교육을 위해 송라국민학교 교실2칸 건립비를 지원한 것을 비롯 송라면사무소 건축, 보경 도로 확장 보수를 지원하는 등 당시 화폐로 거금 일만원을 희사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암암리에 독립운동 단체에게도 자금을 조달한 우국지사였다. 공은 한평생 동안 자선을 베풀고 항년 86세로 송라면 광천리에서 세상을 떠나니 지방민들이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송라국민학교 정문 앞에 공덕비를 세웠다. |
이화일 |
동해면 도구에서 출생, 호는 화석. 포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한제국 당시 1904년 미국 하와이주에 이민간 후 이승만박사가 조직한 대한독립국민회에 가입하여 막노동으로 받은 월급 중에서 그 일부를 매달 회비로 납부하는 등 독립단체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1907년 귀국 후 수산업을 경영해 많은 재산을 모았다. 해방후 대한국민회 포항시회장, 포항시 경노회장, 반공청년회고문으로 활동하였다. |
손학수 |
연일현 북면 상도동에서 출생. 자는 경모, 호는 덕보. 본관은 밀양이다. 인품이 호탕하고 의협심이 강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일찍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함경도 원산, 강원도 강릉 등지를 상거래 지역으로 왕래하였으나 당시 일본인들이 동해안 일대 상권을 장악하게 돠었으므로 일본의 정치·경제력 침략에 대한 반항으로 일본상품 불매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고 일제가 시행한 형산강 제방공사 편입부지 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총독부로부터 토지보상을 받게하는 등 대한 남아답게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
최익수 |
연일현 북면 상도동에서 출생, 자는 수백, 호는 수제, 본관은 경주. 어릴 때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여 큰선비가 되었다. 과거시험을 몇 번 봤지만 실패하였다. 당시 일제치하에서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조직해 놓고 연일군수와 일본헌병대장이 회장으로 취임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끈질긴 간청에 못이겨 돈 오백냥을 헌병대장에게 뇌물을 줘가면서까지 사양하니 일본헌병대장도 당신의 애국심에 감동하였다고 하면서 그 돈을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한편, 상해 임시정부요원 두 사람이 형산강 제방공사 인부로 가장 최부자댁에 침입, 돈 오백원을 강탈해간 사실을 숨겨오다가 일본경찰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고 연일 수리조합장 재직시 일본사람 이사가 수세를 중과하자 의견충돌이 생겨 조합장직을 헌짚신짝처럼 팽개친 애국지사였다. |
이일우 |
호는 죽비, 경주 이씨로 10여년간 한문을 사숙하여 한시에 능했다. 인품이 부드럽고 원만하여 매사에 타협적으로 임했다. 학문과 덕행이 높아 주위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특히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연일 군수로부터 효자상을 받기도 했다. 연일청년 회장을 지냈고 미군정청 포항주둔미군 고문으로 추대 받아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신망을 받았다. 경상북도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지냈고 영국, 미국, 소련의 삼자회담 결정에 따른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신탁통치반대투쟁위원장을 지냈으며 해방 후 대한 광복군연일군조직위원장,연일군국민회장,미군정시 정부입법위원, 포항 중·고등학교 기성회장을 지냈으며 시민의 윤리와 도덕심 고양을 위해 포항 명륜회장을 역임했으며 포항청년회 등 반공단체 총 지도자로서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앞장서 일해온 지도자로 지역발전과 시민의 권익보호에 크게 공헌하였다. |
장상홍 |
자(字)는 보경(輔卿), 호(號)는 일민(逸民), 출신지는 흥해읍 초곡리(사일)이다. 1894년 6월 민인의 돈을 늑탈한 鄕任과 屯監 등 7명의 집을 불태우고 인근 망창산에 민인들을 집결시켜 여론을 수합 邑弊 8건을 기록하여 公兄(諱 晉弘 字 壽翁 號 草溪)으로 하여금 관가에 入稟하고 成帖한 후 군내 8개 면에 분급한 후 스스로 해산한 사건울 주도하였으며, 민비시해와 단발령이 강제로 단행되자 같은 고을 최세윤 정내의 등과 더불어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안동의진 김도화 의병장 의진에 합류 참모로 다음해 1월 16일 상주 함창에 주둔한 일본군 공격 또 의성의 의흥전투 청송의 안덕전투 의성의 비봉산 황학산 전투에 참전후 단오날 기계인비에서 경주의진 결성시 이준구 이종흡 이우정 박승교와 함께 김하락의병장의 참모로 임명되어 다음날 안강을 거쳐 7일에 경주 황성숲에 도착 동문을 공격 경주성에 입성 10일 반격을 받아 3일간 격전 끝에 패전하여 12일에 동문으로 퇴각 달성을 거쳐 기계의 면창에 유숙하고 14일 기계 이종흡의병과 합류하여 신광우각으로 후퇴 이곳에서 이준구의병과 만나 대오를 정비한후 흥해군을 공격 점령 25일 이상태 이종흡과 함께 2개 부대를 지휘하여 청하를 점령 28일 영해로 들어가 장교청에 진영을 정하였다. 6월3일 김하락의 동해안 연합의진은 영덕오십천에서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대혈전 끝에 다음날 김하락 홍병태 등 수많은 의병이 전사하였다. 조정의 선유사들의 활동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향리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1907년 9월 산남의진 제2,3차 거의시 흥해 지역 활동책으로 활약하다가 신진(포항 환호동) 본가 산지기 집에서 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