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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고통과 생명의 현상학
박갑순의 시세계
이숭원(李崇源, 문학평론가)
박갑순의 두 번째 시집 봄바람엔 가시가 없다는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시의 흐름을 보면, 1부에는 주로 어둠과 고통의 세상에서 희망을 추구하는 내용의 시들이 담겨 있다. 2부에는 서민들의 가난하지만 건실한 삶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3부는 자연에 대한 친화적 상상력의 시편이 담겨 있고 4부는 가족의 애환을 중심으로 인생의 단면을 제시한 작품들이 모여 있다. 박갑순 시인은 인생과 사회를 깊이 관찰하고 해부하여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찾아낸다.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넘어서서 인간을 보는 눈으로 자연을 해부하고 자연을 보는 눈으로 인생을 관찰한다. 그의 눈에는 인간의 삶과 자연 정경이 둘이 아니며 서로 의미를 주고받는 우주적 현상이다. 삶의 고통을 달래는 길도 자연에서 발견하며 자연의 예지로 고통을 위로한다. 겉으로는 자연을 묘사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인간과 삶을 표현하고 인간의 일을 통해 자연 현상을 표현한다. 이러한 방법이 그의 시 구성의 독특한 현상학을 이룩한다.
오래된 나무에서 관절 앓는 소리가 난다
몸속 작고 큰 근육 키워
무성한 가지 거느리고 살던 시절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과
열기가 빠져 약해진 햇빛 보살피며
천둥 번개와 맞서는 동안
연골이 닳은 관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근육이 뼈를 놓아 부러진 가지
매끈하던 몸피마저 메말라
산 아래쪽으로 꺾이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척추가 짱짱하고 허벅지가 통통할 땐
가지마다 솔잎 키우고 솔방울을 매달기도 했었는데
꼿꼿하던 허리 휘어지고 관절염 앓는 노송
보조기에 의지해 서 있으려고
아래로 처지기만 하는 관절
허공을 넓히느라 살피지 못한 탓일까
늙어버린 세월을 신음하는 날들이 오래
인공관절 쓰다듬는 나무
노을에 굽은 등 기대고
곧게 펴지지 않는 다리 내려다본다
- 「나무도 관절이 아프다」 전문
이 시는 기둥이 상한 나무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읽힌다. 그런데 시인은 마치 사람이 관절염을 앓는 것처럼 나무를 의인화하여 표현했다. 시를 다 읽으면 나무만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관절염을 앓는 노인을 대상으로 시를 썼다는 느낌을 얻게 된다. 요컨대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대등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오래된 나무에서 관절 앓는 소리가 난다”고 할 때 나무에서 이런 소리가 나는 일은 없다. 이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작동한 표현이다. 마치 어떤 노인이 관절염을 앓으며 앓는 소리를 내는 장면을 연상하여 표현한 것이다. “몸속 작고 큰 근육 키워/무성한 가지 거느리고 살던 시절”은 그 사람의 젊고 건강하던 시절을 표현한 것이고,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과/열기가 빠져 약해진 햇빛 보살피며/천둥 번개와 맞서는 동안”은 인생의 길을 걸으며 겪은 여러 가지 고난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무리한 노동 이후 관절의 고통이 온 것이다. 시인은 이 나무에 대해 “꼿꼿하던 허리 휘어지고 관절염 앓는 노송”이라고 지칭했다. 이것은 사람의 모습이다. “인공관절 쓰다듬는 나무/노을에 굽은 등 기대고/곧게 펴지지 않는 다리를 내려다본다”라는 구절에는 나무이면서 사람인 이중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이렇게 시인은 인간과 자연을 상호 교차하면서 두 대상을 동질적으로 상상하여 묘사하고 있다. 매우 독특한 자연과 인간의 통섭 현상학이다.
「보청기」도 나무를 대상으로 했는데 나무가 보청기를 착용할 리가 없다. 그런데 시인은 나무도 나이가 들면 고막이 약해져 귀가 어두워진다고 보았다. 나무가 사용하는 보청기는 묘하게도 ‘새’다. 새들이 나무의 보청기 역할을 하여 “높고 파란 하늘에 양털구름이 꼬리를 물고 가는 소리를/말간 햇살에 연한 잎들이 푸르게 자라는 소리를/바람이 산을 넘다 지쳐 언덕에 앉아 쉬는 소리를/달과 별들이 밤을 지키며 환하게 빛을 내는 소리를” 물고 날아와 들려준다고 했다. 이런 소리만이 아니라 “엽낭게 수백 마리가 일제히 구멍 속으로 몸을 숨기더라는 이야기”와 “자식놈 병구완하려고 깊은 산에서 약초 캐는 노인의 애달픈 한숨”과 “산 아래에선 나비와 잠자리 망초꽃이 삼각관계에 빠졌다는 소문”까지 다 전해 준다고 하니, 새는 보청기의 기능을 넘어서서 세상의 일을 전하는 전령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성능 좋은 보청기 덕분에 나무는 귀가 밝아져서 “넓은 가슴으로 둥지를 받쳐”주며 눈까지 밝아진다고 했다. 참으로 독특한 상상력이다. 그의 현상학 속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하나로 관통하고 있다.
「동물성 구름」도 상상력이 독특하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평화롭게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박갑순 시인은 사납게 돌변하는 동물성의 구름으로 보았다. 마치 사나운 맹수 떼처럼 순한 구름을 쫓아버리고 햇빛의 밝은 빛을 사라지게 하여 어둠의 영역을 장악한다. 그 사나운 구름은 “태풍의 눈을 가진 바람을 따라다니다가/적당한 때를 포착하여 이빨을 드러내는 먹장구름”이다. 거센 비바람을 몰고 와 갈라진 땅을 모질게 무너뜨리고 홍수로 한마을을 고립시키는 수마(水魔)의 전조가 된다. 평소 바람 잔잔한 날에 조용히 지내다가도 속에 감추었던 공격 본능이 드러나면 “사방에 검은 휘장을 치고” “스스로 어둠에 들어앉아 포악한 자신을” 과감히 표출하며 “타고난 천성대로 걷잡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는 존재다. 박갑순 시인이 관찰한 구름은 동화에 나오는 꽃구름이 아니다. 발톱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며 무리를 지어 다니는 야수의 생존 방식을 지닌 구름이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독특한 시각에서 구름을 포착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사람을 동물처럼 묘사한 작품도 있다. 「얼룩말 가장」은 한 집안을 책임진 가장의 모습을 얼룩말로 환치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흰색과 검정색 줄무늬 양말”을 착용한 가장의 모습을 얼룩말로 특징화했다. 노동의 힘겨움에 피로를 느끼면서도 가장의 짐을 지고 일터를 누볐으니 “발굽이 닳도록 뛰다 보니/관절 꺾이는 소리가 났다”고 했다. “가시덤불 우거진 초지를 달리던/엄지발가락은 고통을 찢고 나왔다”고 했다. 노동에 시달리다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가장의 퇴근 모습은 안쓰럽다. 그래도 얼룩말에게는 돌보아야 할 평화로운 가족이 있고 “거친 벌판을 내쳐 달리던 야생의 꿈”도 있다. 그것이 있어서 고단한 노동을 감내할 수 있었다. 아내는 남편이 벗어놓은 옷에 “초원의 푸른 향기 한 컵 넣고” 세탁한다. 아내의 정성을 정겹게 표현한 것이다. 얼룩말 가장은 “뽀송한 햇살 버무려/바람 한 줄기 마신 후/내일로 달려갈 준비를 한다”고 희망적 결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가장과 얼룩말을 병치하여 수미일관하게 시상을 펼침으로써 완성도 높은 작품을 창조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다음 시는 주부의 시각에서 가족들을 책으로 비유하여 독서 경험으로 가족 관계를 표현한 독특한 작품이다.
두께를 가늠할 수 없는 한 사람
매일 꾸준하게 읽는다
이른 아침엔 수상록 같은 남편을
낮에는 웹툰 같은 아들을
밤에는 시 같은 딸을
주말 넉넉하고 여유로운 시간엔
가족이라는 시리즈를 읽는다
그 사람의 내면까지 읽기 위해
행간의 흙과 돌멩이를 피해
더듬더듬 신중하게 읽어나간다
표지가 닳도록 서로를 반복해 읽은 부부
중반부쯤 낱장이 찢어지는 파국을 맞았다
조심스레 넘겨도 찢어지는 이야기를
다시 이어붙이는 데
1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쉽게 읽지 못하고 어렵게 읽은 것은
순전히 잘못된 독서법 탓
나를 읽는 일에도 반성이 필요하다
중간중간 포스트잇을 붙이고
꼬인 문장은 슬기롭게 풀어가며 읽는데
누군가 나를 읽은 소리
두 눈 감고 한참을 기다렸다
-「사람을 읽다」 전문
주부인 화자는 매일 꾸준하게 책을 읽는다. “이른 아침엔 수상록 같은 남편”을 읽는다고 했는데 참으로 적실한 표현이다. 여러 가지 경험과 생각을 가진 남편을 직장으로 내보내는 마당이니 남편이 ‘수상록’처럼 여겨질 것이다. 세상을 가볍게 살아가는 아들은 웹툰 같고, 아직 꿈을 간직한 딸은 시 같고, 주말에는 온 가족이 모여 사연을 주고받으니 가족이라는 연재물을 읽는다고 했다. 가족들을 거기 맞는 적절한 독서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읽으려면 제대로 독파해야 하니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을 피해 가면서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가 독서 회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표지가 닳도록 서로를 반복해 읽”었다고 했다. 삶의 중반부쯤 “낱장이 찢어지는 파국을 맞았다”고 했다. 생활의 접촉이 많을수록 감정의 부딪침이 있고 분쟁도 생겨 삶의 파국이 일어날 것이다. 그때부터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책장을 “조심스레 넘겨도 찢어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감정의 파열을 조심스럽게 이어 붙이는 데 1년이 걸렸다고 했다. 1년의 세월을 소요하여 그래도 이어붙였으니 다행이다.
이렇게 어려운 일이 발생한 데는 서로의 독서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잘못을 반성함과 동시에 자기 내면을 읽는 독서법을 개발해야 한다. “중간중간 포스트잇을 붙이고/꼬인 문장은 슬기롭게 풀어가며 읽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족의 문제를 풀려면 자기 혼자서 정성스럽게 독서를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누군가 나 자신을 제대로 읽어주어야 한다. 어디선가 나를 읽는 소리가 들려 “두 눈을 감고 한참을 기다렸다”고 했다. 자신이 상대에게 제대로 읽혀 정당하게 이해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을 제대로 읽는 일은 상대의 마음과 진실과 삶의 영역을 제대로 알아가려는 일이다.
사람을 알려고 하면 앞의 「나무도 관절이 아프다」와 「얼룩말 가장」의 경우처럼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삶의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과 애환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시인의 인생관이 나타난다. 시인은 인간의 삶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긴 장마에 녹슨 폐지 리어카 손잡이
투박한 손으로 쓰다듬는 바람
잠 설치게 하는 신경통으로 무릎이 쑤시는데도
이가 맞지 않는 대문 열고 밖으로 나간다
골목을 절룩이며 굴러가던 바퀴도
낡은 살대가 신경통을 앓는지
잔자갈에 걸려 턱턱 멈추곤 한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기른 두 아들
장성한 지금까지 비좁은 길 빠져나가지 못한다
비바람이 창문 흔들어 스산하던 날
통증처럼 찾아와 만기 앞둔 적금 넘보던 자식
바람은 눈물 젖은 폐지 찾아 골목을 누빈다
종일 끌려다닌 신경이 앓아눕는 저녁이 오면
바람은 외로움에 떨며 웅크리기만 할 뿐
온 밤 뜬눈으로 새운다
잠결에도 자식들 흉허물 드러날까
복지사의 방문이 불편한 바람
문풍지를 들추던 황소바람 시절 접고
좌골신경 통증으로 힘 빠진 실바람 되어
좁은 방안에 가라앉고 있다
흔들리는 불빛 아래서
장롱 속 손때 묻은 통장 살피는 바람
힘없이 사그라든다
-「바람의 신경통」 전문
이 시가 대상으로 삼는 것은 폐지를 모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할머니다. “긴 장마에 녹슨 폐지 리어카 손잡이를/투박한 손으로” 끌고 다니는 할머니이니 얼마나 고초가 심하겠는가. 시인은 이 할머니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노인은 신경통으로 잠을 설치고 무릎이 쑤시는데도 일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노인이 끄는 리어카는 이가 맞지 않아서 덜컹거리고 자갈에 걸려 멈추기도 한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두 아들을 키워 장성한 상태가 되었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 “통증처럼 찾아와 만기 앞둔 적금을 넘보”는 처지가 되었다.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시인은 이 노인을 골목을 떠다니는 바람으로 비유했다. “종일 끌려다닌 신경이 앓아눕는 저녁이 오면/바람은 외로움에 떨며 웅크리기만 할 뿐/온 밤을 뜬눈으로 새운다”라고 했다. 하루의 노동을 끝낸 후에도 외로움 속에 고통을 감내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식들 흉허물 드러날까” 염려하며 모든 것을 자신의 불찰로 받아들인다. 이제 노인은 노쇠하여 “문풍지를 들추던 황소바람 시절을 접고” “힘 빠진 실바람 되어/좁은 방안에 가라앉고 있다”고 했다. 바람의 시 전체의 중심 비유로 설정하여 일관성 있게 시상을 끌고 가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 “흔들리는 불빛 아래서/장롱 속 손때 묻은 통장 살피는” 노인의 모습이 힘없이 사그라든다고 해서 희망의 암시와 노쇠의 나약함을 동시에 표현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소외 노인의 이야기인데, 바람을 비유의 축으로 설정하여 연민의 가락을 펼치면서도 감정을 절제하여 심도 있게 표현했다.
위의 시는 폐지 줍는 노인을 바람이라는 자연 현상으로 표현했는데, 「노랑부리백로」도 이와 유사하게 할머니의 모습을 노랑부리백로에 비유하여 형상화했다. ‘노랑부리’는 노을이 물든 할머니의 노쇠한 상태를 암시하고, 백로는 할머니의 백발을 상징한다. 썰물 진 바닷가 모래톱에 백로 한 마리가 바람에 다발깃 흩날리며 서 있는데 그 모습을 “흰 빛살 눈이 부시다”고 했다. 늙었지만 고고한 할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할머니의 모습은 애처롭다. 거울 앞에서 푸석한 머리를 빗으며 서쪽 하늘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모습을 다시 백로에 비유한다. 할머니의 가슴에는 “무겁고 축축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할머니는 사람들을 만나면 “바다가 쌓아 놓은 퇴적물을 부리로 뒤적이듯/굴곡진 이야기 콕 물어 끄집어”낸다. 할머니 마음에는 희로애락이 엇갈린다. “속이 쓰린 날엔 빗물처럼 눈물 쏟다가/꽃 피는 날에는 꽃잎처럼 웃다가/한탄과 설움의 숨 고르며/뾰족한 부리로 모래톱을 한없이 뒤적”이는 것이 할머니의 일상이다. 할머니의 기구한 사연은 맵고 서러운 시집살이 이야기로부터 젖먹이 때부터 키워낸 시동생들 이야기, 주정뱅이 남편의 부정한 사연까지 늘어놓으면 끝이 없다. 그러한 세월 덕에 노랑부리백로가 된 것이다. 체념한 듯 날개를 접고 노을을 물고 날아가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할머니의 마음의 바다에는 출렁출렁 흘러가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고생하며 어렵게 세상을 헤쳐온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시편은 2부와 4부에 모여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서민 노동자 군상들의 애환과 곤경이 제시된다. 시인은 그들이 보낸 눈물의 세월을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을 연민으로 끌어안는다. 여기에는 “막바지 공사가 한창인 건설 현장”에서 “먼지 범벅인 안전화 한 짝”을 남기고 참혹하게 추락하여 사망한 베트남 노동자의 비극이 있다. 그는 고국의 아들과 딸에게 한국의 선물을 안겨줄 꿈을 갖고 일했다. 앞의 시 「바람의 신경통」에 나왔던 것처럼 “생계를 짊어진 굽은 등”으로 폐지를 모아 하루를 버티는 쪽방촌 노인의 애달픈 삶도 보인다. 야간근무를 하는 도시 계약직 노동자의 누적된 피로의 삶도 나오고 여섯 남매를 이끌고 풍랑을 헤쳐가는 초보 선장 아버지의 힘겨운 역정과 요양원에서 시들어가는 기억 상실 노인의 가련한 모습도 나온다. 그런가 하면 경작지에서 수확 시기를 놓쳐 파처럼 말라버린 노부부의 모습이 나오고 노동에 시달려 손톱이 갈라지고 뭉툭해진 아버지의 육신이 나온다. 얼룩말처럼 가장의 무게를 지고 일터를 달린 남편의 모습도 나오고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원형 탈모증이 생겼던 아버지의 모습이 호출된다. 기미와 검버섯으로 굳어진 어머니의 “뼈만 불거진 핏기 없는 손”과 “스러질 듯 야윈 몸”이 소환된다. 어찌 그뿐인가. “걸어온 날들이 촘촘히 적힌 이력서를 들고/온종일 딱딱한 길을 걷는” 황폐한 구직자의 발자취도 보인다. 시인은 이러한 소외된 사람들의 슬픔과 눈물을 다 감싸 안으려 한다. 그래서 그 눈물의 유형을 이렇게 많이 열거해 놓았다.
화재로 한순간에 부모 잃고 정신 놓은 아이의 눈물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날마다 엄마 핸드폰에 문자 보내는 열두 살 딸의 눈물
입양 간 자식이 엄마 찾아왔지만
따뜻한 집밥 한 상 차려줄 수 없는 미혼모의 눈물
시한부 선고받은 남편에게 사실을 숨겨야 하는 아내의 눈물
치매 간병하는 늙은 남편의 암담한 마른 눈물
첫 가족여행에서 사고를 만나 아내와 자식 잃은 가장의 눈물
자식에게 맞으면서도 끝까지 두둔하는 부모의 눈물
이혼한 자식의 아들을 맡아 기르는 허리 굽은 노인의 눈물
학창 시절 사고로 하반신을 쓸 수 없는 남자의 눈물
억울해서 죽음으로 결백 주장하며 떠난 경비원의 눈물
태풍에 무너져내린 하우스에서
흙더미에 묻힌 비닐 붙잡고 흘리는 김 씨의 눈물
망가진 어선의 잔해 쓰다듬으며 흘리는 어부의 눈물
40대 해고 노동자의 막막한 눈물
-「눈물을 채집하다」 부분
이렇게 생의 고난을 세밀히 관찰하고 연민의 눈길로 애정을 표시하면서 시인은 그들의 삶의 끝판에서 그래도 희망을 본다. 그러한 희망의 세계관을 표명한 작품이 「봄바람엔 가시가 없다」이다.
3월의 귓불 간질이는 바람
무채색 겨울 산을 넘어와
싱그런 초록 주사 놓고 있다
꽃자루 보송한 솜털 깨워
따스한 귓속말로 새싹을 불러낸다
살갗 찌르는 가시 앞세우고
꽁꽁 얼어붙은 산과 들을 떠돌다가
도시의 허름한 뒷골목까지
무시무시하게 영역 넓혔던 바람
따가운 가시 피해 지하도로 내려간 노숙인
신문지 한 장 크기로 몸을 말고
밤마다 온몸 찌르는 통증에
잠 못 이루고 뒹굴며 시달렸는데
머리맡을 다녀간 따스한 손길
고통은 꿈같이 사라지고
절룩이는 발자국에 온기가 담긴다
웅크린 어깨 주물러
가지 끝에 새순 꽂아놓고
꽃들의 여린 잎 들춰
빛깔 풀어주고 얌전하게 앉은 바람
맨손으로 만져도 상처가 나지 않는 봄은
바람을 말랑하고 부드럽게 기른다
-「봄바람엔 가시가 없다」 전문
“3월의 귓불 간질이는 바람”이 “무채색 겨울 산을 넘어와” “싱그런 초록 주사 놓고 있”는 장면을 제시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신생의 장면이다. “꽃자루의 보송한 솜털 깨워/따스한 귓속말로 새싹을 불러낸다”고 했다. 이런 세계라면 슬픔이나 고통도 얼마든지 건너뛸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신생의 세계를 일깨우는 바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갗 찌르는 가시를 앞세우고/꽁꽁 얼어붙은 산과 들을 떠돌다가/도시의 허름한 뒷골목까지/무시무시하게 영역 넓혔던 바람”이다. 지하도 차가운 바닥에서 간신히 밤을 지내던 노숙인도 이제 봄바람의 온기에 어깨를 펴게 된다. 겨울의 시련은 물러가고 “웅크린 어깨 주물러/가지 끝에 새순 꽂아놓고/꽃들의 여린 잎 들춰/빛깔을 풀어주고 얌전하게 앉은 바람”이 되었다. 봄은 바람의 손길을 말랑하고 부드럽게 길러 어느 것도 상처가 나지 않게 보살핀다. 이러한 봄바람은 「어머니의 돋보기」에서 “시린 밤마다 구멍 난 양말”을 덧대던 어머니의 도수 높은 돋보기 렌즈를 닦아 주는 바람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그만큼 시인은 애환의 세계에서 슬픔과 아픔을 달래주는 생명의 상징으로 바람을 받아들여 신생의 에너지로 승화한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선량한 택지」와 「틈새시장」에서 자연 현상에서 삶의 의미와 지혜를 발견하는 독특한 표현으로 방법적 사랑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 「선량한 택지」는 집을 짓는 택지를 말한 것이 아니고 ‘갯골생태공원’이라는 생태공원을 택지로 설정하여 비유한 것이다. 생태공원에 자라는 식물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터전을 마련하고 생명의 식구들을 늘리는 작업을 한다. 마치 하늘에 연을 띄우고 자전거와 킥보드를 타듯이 경쾌한 몸짓으로 생물을 키워 아이들을 웃게 하고 이웃과의 공존을 도모한다. 자유롭게 놀잇감과 먹을 것을 준비하여 정을 나눈다. 시인은 이곳을 “분양권 전매가 통하지 않는/선량한 사람들만 모이는 택지”라고 했다. 평온과 안식으로 정착된 갯골생태공원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갯벌이었던 자연의 한 지점에 새로운 생명 공간이 설정된 것을 마치 새로운 택지가 들어서서 가족들이 단란하게 지내는 장면처럼 표현한 것이다.
「틈새시장」도 우리가 알고 있는 틈새시장이 아니다. “인적 뜸한 골목 지키는 허름한 빌라” 외벽 틈에 풀들이 돋아나 생명의 공간을 이룬 것을 “흙 한 줌 보이지 않는 척박한 틈에/개척한 시장”이 열린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시장을 지탱하는 동력은 풀들의 뿌리다. 식물들은 “수직의 벽면에 잎사귀 밀착시키고/벌나비 불러들여 꽃을 피우는” 역할을 한다. 풀들은 저마다 좌판을 내걸고 “틈으로 스며드는 빗물을 먹고/별빛 달빛 우러르며 줄기를 뻗는 동안” 달개비가 대목을 맞아 꽃을 가장 잘 피웠다. “꽃과 향기와 씨앗을 사기 위해/바람과 햇빛이 앞 다투어 몰려온다”고 했다. “가끔 귀한 벌과 나비가 와서/씨를 몽땅 사가기도 하지만/달개비의 수완을 따라갈 수가 없다”고 했다. 달개비는 장사의 왕인 것이다. 시인은 허름한 빌라 외벽 틈에 돋아난 풀들의 세계를 틈새시장이라고 명명하고 “풀들의 굵은 손마디가/시장 골목을 싱싱하게 붙들고 있다”고 했다. 생명의 기운이 어디든 서식만 하면 틈새시장을 이루어 생명의 터전을 이룬다는 자연의 이치를 생활의 국면에서 새롭게 표현했다.
이처럼 박갑순의 시는 생의 고통과 인간의 애환을 깊이 있게 보면서도 절망의 바닥으로 내려가 좌절하지 않고 희망의 바람을 본다. 가을의 낙엽에 머물지 않고 가지에 달린 씨앗의 상징에서 봄날 되살아날 신생의 바람과 풀꽃의 생명력을 본다. 초록의 풀은 정말로 힘이 세다. 이런 까닭에 박갑순 시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양자의 혼융 속에서 독특한 상상 세계를 펼친다. 그는 인간이나 자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양자의 오묘한 균형을 이룬다. 그 결과 사회 안에 펼쳐진 다양한 인간 군상의 불행에 연민의 정서를 느끼면서도 거기 함몰되지 않고 고통에서 희망을 보고 생명의 기운을 발견한다.
틈새만 한 작은 공간에 생명의 장터가 열리는 것을 보고 식물들이 선량한 택지를 형성하여 인간보다 조화롭고 슬기롭게 생명의 터전을 넓혀 가는 광경을 본다. 이러한 그의 사유와 상상력은 다른 시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고통과 생명의 현상학을 창조했다. 그가 개발한 현상학적 공간에서 인간과 자연은 공존을 이루고 아픔을 희망으로 전환한다. 그가 이룩한 서정의 축복이다. 이러한 국면을 개척하여 그의 시집은 찬연한 성취의 자리에 이르렀다. 이 찬연한 빛살이 많은 사람에게 퍼져 기쁨의 장터를 이루면 좋겠다. 더 나아가 앞으로 다가올 우주공동체에 그의 독특한 현상학을 새로운 선물로 헌정하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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