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려조
김정순
몇 해 전 어느 날이다. 딸이 예쁜 암컷 파인애플코뉴어 앵무새 한 마리를 나의 반려조로 데리고 왔다,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인 파인애플코뉴어의 배는 노란색과 붉은색 털이 어우러지고 목덜미는 흰색과 노랑, 붉은 색깔의 털이 있다. 머리에는 연두색과 붉은색, 초록색이 조금씩 섞여 있고 날개와 등의 깃털은 초록색으로 덮여 있어서 전체적으로 화사한 느낌을 주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코뉴어 앵무새의 수명은 보통 15년이라고 하지만 좋은 주인과 함께한다면 최대 30년까지 살 수 있다고 한다.
50대 중반에 갱년기를 혹독하게 겪었다. 뼈 마디마디가 아프고 몸이 부었다. 맥이 없어서 몸이 계속 가라앉았고,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땀은 마치 물을 부어놓은 것 같았다. 얼굴과 온몸이 뜨거워지고 머리가 불이 붙은 것 같아서 터질 것 같았다. 제일 힘든 것은 머리가 시리고 두통이 와서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 아들과 딸, 사위가 의논하여 앵무새를 사 오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이 아파서 돌보기 힘드니 사 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 나를 아들과 딸이 계속 설득하였다. 엄마는 앵무새를 잘 키울 수 있고 갱년기 우울증에도 좋으니 키워보라고 하였다. 자식들의 성의를 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생각되어 앵무새를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앵무새가 오던 날 가족들은 모두 기뻐하며 반겼다. 남편은 신기한 듯이 앵무새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만져보기도 하고 ‘아가’ 하면서 불러 보기도 하였다. 나는 금방 앵무새가 좋아졌다. 갱년기로 너무 힘들어서 키울 자신이 없었는데, 아들, 딸 의견을 따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앵무새의 이름은 개나리의 나리를 따서 나리라고 지었다. 애교가 많은 나리가 집에 온 지 일 년이 되었다. 내가 출근을 하면 몇 시간을 혼자 있을 나리를 위해 클래식 명상음악을 틀어주곤 하였다. 그래도 나리가 너무 외로워 보였다. 머리가 좋은 앵무새들은 혼자 있고 외로우면 우울증에 걸리고 자신의 털을 뽑거나 한군데를 계속 물어서 상처를 내는 등 자해를 많이 한다고 들었다.
외로워하는 나리의 짝을 찾아 주기로 하였다. 아들과 딸이 사는 수원으로 가서 앵무새 카페에 갔다. 그곳에는 많은 종류의 앵무새들이 서로 주인을 기다리는 듯이 사람이 들어오면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코뉴어 앵무새 수컷들이 모여있는 새장에 ‘나리’를 데려다 놓았다. 수컷들이 ‘나리’를 한 번씩 보고는 다른 곳으로 가곤 하였다. ‘여기는 짝이 없나보다’ 할 때 3개월 된 예쁜 수컷 한 마리가 ‘나리’ 옆에 앉아 털을 다듬어 주면서 서로를 탐색했다. 우리는 한참을 바라보며 나리와 잘 어울리는 짝이 될 수 있는지를 보았다. 수컷은 ‘나리’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관심을 보였다.
그 수컷은 아메리칸딜루트 앵무새였다. 고급 종으로 알려진 아메리칸딜루트의 특징은 발과 부리가 은은한 검정색 이며, 배는 노란색과 붉은색이 연하게 어울려 있고 등과 날개는 연두색과 날개깃의 끝은 회색이 감돌아 더 큰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나리의 짝이 된 수컷의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전에 키우다가 하늘나라로 간 꼬미의 이름이 내 머리에서 자꾸 맴돌았다. ‘쪼꼬미’의 이름이 이쁘다며 아이들이 ‘꼬미 꼬미 쪼꼬미’ 하면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아들과 의논하여 우리는 수컷을 ‘꼬미’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꼬미와 나리’가 2년 만에 알을 여섯 개를 낳았다. 모두 부화시키고 싶었지만, 두 개는 무정란이라서 네 개를 부화시켰다. 아가 새는 이유식을 석 달 먹였더니 무럭무럭 잘 자라 주었다. 앵무새가 부화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이 혼자 계신 어머님께 친구 하라고 드린다고 분양 해달라 하였다. 여러 명이 새끼 새를 달라고 하여 ‘꼬미와 나리’가 스트레스를 받을까봐 아가새들을 보지 않게 한 후 분양 보냈다. 마치 내 자식들을 보낸 것 같아서 슬펐고 ‘꼬미와 나리’에게 미안했다. 의외 였다. 새끼들을 분양한 후에 나리가 덜 힘들어하고 체력을 회복하여 ‘꼬미’랑 금슬 좋은 한 쌍이 되어 알콩달콩 잘 지내게 되었다. 코뉴어 앵무새는 1년 6개월이면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는다고 한다. 물론 개체별 차이는 있다. ‘꼬미와 나리’가 첫 번째 알을 낳은지 2년이 지난 올해 4월에 또 여섯 개의 알을 낳았는데 한 개는 나의 실수로 깨지고 또 하나는 ‘나리’가 알을 굴리다가 둥지 앞부분의 낮은 곳으로 알이 떨어져서 깨지고 말았다. 그래서 더 크고 앞이 높은 둥지를 다시 구해주었다. 귀중한 알을 굴리고 품어서 한 달이 되어야 부화 되는데 알이 깨졌으니 ‘꼬미와 나리’의 마음이 허탈했을 것 같다. 그래서 ‘꼬미와 나리’에게 더욱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갓 부화한 아가 새들이 밥 달라고 운다. 그 소리는 마치 자식이 우는 것처럼 느껴지고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앵무새는 알을 낳기 시작하면서부터 예민해지며 야생으로 돌아간다. ‘꼬미와 나리’도 그랬다. ‘꼬미’가 어찌나 철통같이 ‘나리’와 아가 새와 알들을 방어를 잘하는지 놀라웠다. ‘나리’는 둥지 안에서 아가 새에게 밥을 주고 꼬미 와 알을 같이 품어주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아름다운 한 쌍이다. ‘꼬미야! 나리야’ 너희는 최고의 부모로구나, 정말 훌륭하다.”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며칠 후면 한 달이 된다. 그때는 첫째 아가 새를 독립시켜서 이유식을 먹여야 한다. 한 달쯤 되면 아가 새는 어미가 주는 먹이로는 영양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한 것도 있다. 사람을 잘 따라야 살 수 있고 자연에서는 수많은 천적 때문에 살 수 없는 앵무새들은 외국에서 수입되어온다. 앵무새들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잘 따르도록 길러야 번식조의 생을 보내지 않는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모자라는 영양분을 사람이 줄 수 있고 ‘꼬미와 나리’가 좀 더 편하게 다른 알들을 품을 수가 있어서 좋은 점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리’가 2년 전 첫 번째 아가 새들을 돌보면서 너무 힘들어하여 ‘꼬미와 나리’ 그리고 내가 공동육아를 하였었다. 아가 새는 벌써 털 색깔이 나오고 제법 많이 커서 꼬물이에서 벗어나 여리여리한 귀여운 아가가 되어 있다.
꼬미와 나리는 우리집에 반려조로 와서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가족들을 기쁘게 해주는 앵무새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 ‘꼬미와 나리’의 부모 역할을 보면서 우리의 부모님도 ‘꼬미와 나리’처럼 지극정성으로 오 남매를 기르셨으리라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진다. ‘꼬미와 나리’의 일상과 아가 새를 기르는 모습은 마치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꼬미와 나리’의 부성애 모성애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앵무새와 사람도 공존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모든 일을 겪으면서 나는 갱년기를 이겨내고 씩씩하게 앵무새들을 돌보고 운동도 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꼬미와 나리’가 건강하고 아가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돌봐주고 기도하며 오래오래 함께하기를 소망해 본다.
인생의 나침반
김정순
농사가 시작되는 이때쯤이면 고생만 하시다 가신 아버지 생각이 더 절실하게 나곤 한다. 시골의 작은 초가집에서 남의 땅에 농사를 지어 도지를 내며 우리 오 남매를 키워내신 부모님! 늘 농사일에 힘겨워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더 도와드리려 애썼던 어린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에는 집에서 멍석을 만들며 노래를 부르셨다. 그러면 어머니는 감자 씨를 따거나 뭔가 일을 하시며 가곡 ‘보리밭’을 응답하시듯이 부르시곤 하였다. 일이 없을 때는 우리 오 남매에게 동요를 불러주고 가르쳐 주셨다. 항상 노래와 함께 생활하시는 부모님이 참 좋았다.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책을 읽고 공부를 하셨으며 농사일을 돕고 공부도 해야 해서 힘들어하는 딸을 달래가며 칭찬하시고 곶감도 주시면서 숙제를 반드시 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형편은 늘 어려웠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는 내게 친구분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하라고 하셨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면 공부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밤마다 몰래 울었다. 아침이면 눈이 퉁퉁 부어 있었는데 부모님께서 걱정하실까 싶어 아무 일 없는 듯이 학교에 갔다. 일주일이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부모님은 내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다. 못내 마음에 걸리셨는지 어느 날 오 남매를 모두 불러놓고 “너희 모두 고등학교까지는 보내줄 테니 대학은 본인들이 가고 싶으면 알아서들 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실업계 고등학교의 교납금이 절반이었다. 나는 선택의 여지 없이 실업계 고등학교를 갈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고등학생이 되고 일찍 철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의 선생님들은 지금도 한분 한분 모두 생각날 정도로 선생님과 학생들의 사이가 가족 같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여 상위권에 들기도 하고 군수 장학금 오만 원을 타기도 했다. 장학금 오만 원을 받아 밀린 교납금 36,000원을 내고 나머지 돈을 아버지께 가져다드렸다. 아버지께서는 수고했다고 하시면서 말없이 나가셨다. 한참 후에 쌀가마니를 들고 집으로 들어오셨다. “애비가 못나서 딸이 장학금 타온 돈으로 쌀을 사왔다.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한숨을 쉬셨다. 나는 슬그머니 가서 아버지의 등을 꼭 안아 드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마음에 걸리셨는지 전문대라도 가라고 하셨지만, 쌀 한 톨조차 살 수 없었던 현실이라 대학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일찍 취 직을 해서 두 살 아래인 남동생을 대학교에 보내자고 보모님께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서는 못내 아쉬워하시면서 그렇게 하기로 하셨다.
취직하던 해 첫 월급을 탔다. 아버지께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시라고 큰 건전지가 들어가는 신제품인 ‘셰이크 라디오’를 사드렸다. 아버지는 라디오를 늘 밭에 들고 다니며 내가 사드린 테이프를 듣기도 하시고 라디오를 들으시며 일을 하시면서 행복해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47세 때 노래 부르시는 것을 녹음해드렸는데 지금도 그 테이프로 아버지 목소리를 듣곤 한다. 아버지의 그때 모습이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해 보일 수 없었다. 겨울에는 두꺼운 바지와 점퍼를 사드리면 동네 다니시면서 우리 딸이 사줬노라고 자랑하시곤 하였다.
나는 8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동생의 뒷바라지와 집안 살림을 도와드렸다. 동생이 대학을 마치게 되었고 농협에 입사한 후 결혼하게 되었다. 아들이 취직하고 며느리까지 들어왔으니 아버지께서는 하늘을 날 듯이 기뻐하셨다. 그리고 나에게는 고생만 시킨 맏딸이라면서 항상 미안해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사시고 행복하게 가정을 이끌어가던 아버지께서는 67세 되던 해 급성 위암에 걸리셨고, 같은 날 어머니는 나무에 걸린 고양이를 구해주려다가 떨어져 척추뼈가 골절됐다. 우리 형제들은 하늘이 캄캄하고 억장이 무너졌다. 아버지는 큰 병원으로 가셨지만 담당의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돌보기 힘들었다. 아버지와 다른 병원에 계신 어머니는 소변 대변을 모두 도와 드려야 할 정도로 많이 다치셔서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셨다. 그래서 혼자 사는 막내 이모에게 어머니를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형제들이 자주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그렇게 버티시던 아버지는 병이 진단되고 일 년도 안 되어 하늘나라에 가셨다.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아비가 너를 너무 고생시켰다. 대학을 못 보내준 것이 평생의 한이다. 미안하다”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래서 “아버지, 다른 집 아이들은 식모로도 갔는데 이렇게 부모님과 함께 살고 고등학교까지 보내 주셔서 잘살고 있잖아요.” 아버지, 내년에는 대학교에 꼭 갈터이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하자 아버지 얼굴이 환해지며 내 손을 꼭 잡으시고 눈물을 뚝뚝 흘리시며 꼭 대학교에 가서 공부하라고 당부하셨다. 나 역시 공부에 한이 맺힌 사람이라서 대학교에 꼭 가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 후에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대학교에 만학도로 입학하여 아버지의 마지막 하신 말씀을 생각하며 아버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하여 유아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취직한 사회복지 기관은 어려운 아동 청소년들을 돌보는 센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노력으로 아이들을 돌봤는데 아이들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유아교육을 전공한 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위해 청소년에 대한 공부를 더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청소년교육과에 편입하였다.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았지만 학우들과 함께 열심히 공부하여 무사히 공부를 마쳤다. 어렵고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서 15년 동안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나의 아버지는 내 인생의 나침반이 돼주신 분이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자신에게 부끄럽게 살지 말라던 아버지 말씀 명심하며 또 다른 아이들의 등대가 되어 주면서 보람을 느끼며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온 세월이 좋다. ‘나의 소중한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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