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를 하라1)
*
축제 마지막 날 종명이 죽었다. 우리는 같은 공고를 나와 같은 방위산업체를 갔고 같은 정육점에서 첫경험을 가졌다. 나와 함께 그가 옥상에서 분신하는 것을 본 사람은 상당히 많았던 것 같은데도 경찰은 목격자를 찾는데 시간을 많이 들였다. 원체 미련한 죽음이었다. 사흘장이 끝나고 연락이 왔지만 나는 장지에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나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과제를 했다. 이틀 뒤면 조별 발표가 있었고 제출해야할 과제도 너무 많았다. 공장에 가서 일도 해야 했고 허겁지겁 리포트를 내고 나면 또 금방 시험이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어떻게 하면 L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데 하루의 절반을 쓰고 있었다.
L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커피를 뽑기 위해 도서관에서 나왔을 때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뿌옇게 번진 가로등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람 풍선처럼 휘적거리는 친구의 붉은 몸부림을 연상시켰다. 딱히 누구를 생각하진 않았는데 자판기에서 레쓰비를 뽑으며 나도 모르게 보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대체 누구를? 내가 발음하고서도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지었다. 나는, 장지로 가 그가 땅에 묻히는 것을 똑똑히 지켜봤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의 관을 뜯어봐서 그가 누워있는지 확인한 후에 관 위로 흙을 한 삽 덮어 줬어야했다. 도서관에 앉아 책을 보며 캔커피를 더듬는데 캔커피가 제자리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내 옆자리에 검게 탄 손이 캔커피를 쥐고 고리를 따기 위해 손을 놀리고 있었다. 종명이었다. 종명은 마치 연구라도 하는 것처럼 정좌를 하고 캔커피를 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손이 문드러져서 고리가 잘 따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 제대로 죽은 게 아닌가봐.”
워낙 활달했던 녀석이라 울먹이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캔커피를 대신 따주었다. 손에 찐득한 검댕이 묻었다.
“다음번엔 자판기커피로 뽑아올게.”
종명의 죽음은 축제 때 실수로 내보인 치어걸의 브래지어 색깔보다도 회자되지 못했다. 그는 목격자를 찾는다는 벽보가 떼어지자 금방 잊혀졌다.
*
또 내 해포기가 고장 났다. 나는 말대에 말린 원단을 일일이 손으로 풀었다. 제길 이건 외국 애들도 안하려고 하는 건데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풀어낸 원단이 담긴 구루마를 끌어 형들 앞에 놓아 줬다. 1000kg정도 된다. 허리를 펴는데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월화수에 수업을 몰아듣고 나머지 사흘은 원단검사소에서 알바를 뛴다. 본래 대학 생각이 없었던 내가 2년제라도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L과 만나서 내가 가장 크게 변한 점이기도 했다. L은 거래처의 여덟 살 연상인 여직원이었다. 그녀는 원단 샘플을 택배로 보내달라고 하는 것을 까먹고 있다가 바이어가 와서야 허둥지둥 챙기는 실수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 그녀의 책상까지 샘플을 전달해주었다. 다음에 술을 사겠다는 말을 L은 지켰다. 그녀는 온통 콤플렉스 덩어리라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나보다 학력도, 직장도 좋은 L의 고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결혼하자고 했을 때 L은 내가 대학만 졸업하면 생각해보겠다고 했었다. 고등학교 담임께 추천서를 받아 대학을 알아봤다. 종명에게도 연락해서 함께 대학 등록을 마친 후 L에게 연락을 했는데 L의 핸드폰 번호가 바뀌어있었다. 허탈한 마음에 담배나 사려고 현금인출기에서 만원을 빼내는데 ‘거래내역이 200회를 넘었습니다. 통장정리를 해주세요’하고 글귀가 떴다. 잔고는 없는데 거래내역만 쌓인 걸 보며 나는 그때 하나의 자그만 복수가 떠올랐다. 그렇게 2000회쯤 거래내역을 쌓은 후 통장을 들고 국회의사당에 가는 것이다. 연말이 좋겠다. 그리고 길을 건너 K은행 본점으로 가 은행원들은 은행원대로 바쁘고 현금인출기에도 사람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현대캐피탈의 새침한 아가씨나 한화증권에서 나온 빳빳한 양복쟁이들을 내 뒤로 줄 세우고 은행원을 상대로 쭉 통장정리를 할 것이다. 다 쓴 통장이 몇 개나 나올지 계산하고 있을 때 멀리 검사과 쫍의 원단 롤링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쫍의 검단기 아래에 놓여있는 구루마에는 원단이 거의 없다. 나는 스톱을 외쳤지만 은색 검단기의 인출로울러까지 원단이 말려들어가고 말았다. 저걸 또 어떻게 꺼내나 하는 생각에 욕이 막 나오려는걸 겨우 넘겼다. 쫍은 태국에서 온 연수생이지만 똑똑하고 공장에서 검사 량이 가장 많다. 사장님은 공공연하게 한국인들 두서넛보다 쫍 하나가 낫다고 말했다. 나는 검단기 위쪽으로 올라가 말려들어간 무지원단의 끝을 살살 꺼냈다. 그리고 그 끝과 새로 끌고 온 구루마에서 꺼낸 나염지의 첫 부분을 연결했다. 내가 말대를 던지자 쫍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원단을 롤링해서 말대에 감았다. 복잡한 무늬가 그려진 나염지가 무지원단보다 오염부위를 잡기가 훨씬 어려워 롤링속도가 더디고 눈이 아프다. 이 나염지는 유명 해외 브랜드의 비키니가 될 것이다. 고교에 다닐 때의 나는 사람도 없이 비키니만 두고 찍은 사진을 보면서도 수음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자의 중요한 부위만 가릴 옷감을 만지는데도 단 한 번도 음탕한 생각이 들지 않다니 희한한 일이었다. 담배 한 대가 간절했으나 쉬는 시간에는 내 기계를 고쳐야했다. 하긴 형들이 자꾸 담배를 한가치 씩 얻어 펴서 담배도 공장에선 끊었다. 공장 문 앞에 앉아서 담배 한 갑을 주머니에서 꺼내들어 한 대 피고 있으면, 나도 한 대만, 나도 좀, 그러다보면 한 갑이 전부 비어버렸다. 건물 내 금연이란 문구도 없건만 공장에서 흡연자는 사장님 한분밖에 없었다. 내가 밖에 나와 있을 때 사장님이 옆에 서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는 자기 집을 사지 않고 계속 월세로 사는 대신 그냥 통장을 다 털어서 차를 샀다고 말했다. 공장 문 앞에 벤츠 S클래스가 주차되어있었다. S600L이었다. 내가 차를 보고 있자 사장님이 나의 진로에 대해 새로 말을 꺼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한 사람이 태반인데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안정적인 일을 할 수 있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정말 괜찮냐?”
사장님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어느 결에 종명이 곁에 앉아 사장님이 피다버린 장초를 주워들어 불을 붙였다. 종명이 숨을 들이쉬자 몸이 숯처럼 발갛게 피어올랐다.
“응. 난 만족해. 나도 한 모금 줘봐. 너도 이곳으로 왔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후……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도 있고 여긴 월급도 바로 줘. 후…… 점심도 꽤 맛있어. 무엇보다 너네처럼 망할 것 같지도 않아. 여기 사장님이 센스가 있거든.”
S600L을 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말도 건설적으로 나왔다.
“저 차, 말하는 거냐?”
“그래. 집은 안보이지만 차는 보이잖아. 일거리는 잘나가는 기업에 주게 된다던걸. 후…….이 근처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원단검사소가 여기야.”
나는 담배를 비벼 껐다.
“솔직히 내가 말만 대학생이지 몸밖에 없잖아.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안했으니 어쩔 수 없지. 사장님 말이 예전엔 전부 이렇게 일하면서 등록금 벌고 학교 다녔다더라.”
내가 그간 친구의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나를 지탱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모난 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종명의 아버지가 유별나긴 했지만 요새 뉴스를 보면 그리 독특한 케이스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종명에겐 그를 끔찍이 아꼈던 어머니가 계셨다. 그래, 뭐든 상대적 이랬으니 내 고통이 종명의 고통보다 못한 건 아니었다. 내게도 어머니가 계시고 그리고 L, 나는 그녀에게 엄마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종명아 난 절대 낙오자는 안 될 거다.”
종명이 쓸쓸한 눈빛을 하고 사라졌다. 짬이 날 때마다 해포기에 달라붙어서 휜 나사 중간부분을 망치로 두드려 펴고 해포기에 단단히 고정되도록 펜치로 꽉 조여 줬다. 저녁 무렵 쯤 되자 겨우 고치긴 했지만 어차피 며칠 못 갈 것이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철문을 나섰다.
*
학생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학생회관 앞을 지나는데 베레모를 쓴 남자가 테이블을 차려 놓고 책을 팔고 있었다. 내게 책을 내미는 그의 손에서 광채가 났다. 그의 등 뒤 너머로 야외공연장 불빛이 번쩍거리는 것이 보였다. 또 축제라도 벌어진 모양이었다. 무대에 오른 여자의 긴 머리채가 손에 잡힐 듯 굽실굽실 물결치고 사람들은 양손에 야광봉을 치켜들고 파도타기를 하고 있었다. 학교 축제가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보내는 하루일과가 비슷비슷하기 때문인지 날짜계산은 늘 헷갈렸다. 손에 받아든 책 표지는 검었다.
“루시드 드림?”
“읽어봐요. 당신의 꿈을 이뤄줄 겁니다.”
책을 쌓아 놓고 파는 남자는 무척 말랐고 풀어진 셔츠사이로 굵은 체인 금목걸이가 반짝거렸다. 바람이 불어 남자의 흰 와이셔츠를 흔들었다. 몸에 팽팽히 달라붙은 옷 속을 가늠해 보니 꽤 근육이 있어 보였는데 뭐랄까 마른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를 닮은 듯했다.
“사람마다 각자 원하는 꿈이 다른데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꿈 밖에 없죠. 비교秘敎에선 이미 행해지고 있는 검증받은 책입니다.”
책을 자리에 놓고 돌아서려는데 그가 팔을 잡았다.
“잠이 안와서 밤마다 자해를 하나보지? 몸이 힘들면 잠이 잘 오긴 해. 별로 안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지 않아?”
그가 내 팔을 꺾어 소매를 걷어내자 팔 안쪽 상처가 드러났다. 순간 겨드랑이가 축축해졌다.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했지만 빠지지 않았다.
“네 꿈은 뭐지? 자주 악몽을 꾸는 사람은 이 책의 절반을 읽은 거나 다름없어.”
나는 재빨리 책을 받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따라 계단이 끝이 없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얼마쯤 내려 온 건지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왠지 뒤통수가 따가워서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손에 든 책을 들여다보니 검은 표지에 내 지문이 찍혀있었다. 교문을 나서려는데 촛불을 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나는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뒤쳐진 사람들 중 한 여자에게 누가 오기라도 했냐고 묻자 그녀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짧은 치마와 하이힐이 꽤 춥고 불편할 것 같았다.
“저 다리, 엄청 부드러울 것 같지?”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종명이 옆에 와 교문 옆에 서있었다.
“그런 것 같아.”
“후, 저렇게 벗고 다니니 우리 염색공장이 망하지.”
“꼭 그것만은 아니잖아.”
종명이 애매하게 웃었다. 책에는 꿈을 컨트롤 하는 방법이 적혀있었다. 나는 종명의 웃음 속에서 지난밤 꿨던 꿈을 기억해냈다. L이 샘에서 목욕을 하며 물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고 노력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알만 굴려 나를 옥죄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니 나는 샘에 심겨져 있는 나무 중 한그루였다. 샘에 나무로 변한 내가 비쳤고 그 줄기 사이에 종명이 얼굴만 나타나선 빙글빙글 웃어댔다. L이 금방 샘을 떠날 것이란 예감에 나는 미칠 것 같은 조갈증을 느끼며 잠에서 깨었다. 성기가 단단하게 서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오줌을 누었다. 책에 따르면 어젯밤 같은 꿈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얼마든지 재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어제와 같은 꿈에 또 마주하면 모두 지워버리고 새 꿈을 꾸고 싶었다. L과 밤마다 주고받던 말처럼 ‘좋은 꿈’으로 말이다.
*
6월의 햇살이 집요하게 내 얼굴을 좇는다. 뺨을 반대쪽으로 돌리고 누웠어도 따갑다. 나는 매번 수업에 늦어 강의실 뒤쪽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곳에 앉게 된다. 햇살이 뜨겁다.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다. 창밖에서 여학생들이 재잘대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꽤 한가로운 날이다. 누군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잠만 자려면 뭐 하러 학교에 왔냐고, 돈이 아깝지 않냐고 했었다. 글쎄 이상하게 잠이 왔다. 대학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것이 집보다 더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샌 심할 정도로 부쩍 잠이 늘은 듯하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선채로 잠이 든 적도 있다. 기말시험을 보는 도중에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시험문제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문장들이 흔들렸다. 끝까지 읽을 수가 없다. 읽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의 절반은 가짜로 읽은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진정한 다수의 의사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를 위하여…’,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 다음이 진짜 문제다. ‘…거북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거북이는 빛을 받지 못해 구루병에 걸렸다.’ 나는 이 지문에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그러다 어디선가 교수님의 말이 들리는 듯했다. 교수님의 목소리는 L의 목소리와 흡사했다. L,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줘.
“PART2 받아쓰기영역입니다. 본 지문은 한번만 들려드립니다. 리피트가 없는 건 인생도 마찬가지잖아요.”
나는 그녀 말을 받아 적다가 무슨 뜻인지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려 치면 잉크찌꺼기가 뭉쳐있거나 한쪽에 뭉개서 쓴 글씨가 전부였다. 나는 그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엉킨 글씨를 해독해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자리에 일어나서 시험지의 글씨 매듭을 면도칼로 잘라버릴 순 없지 않는가. 나는 매듭을 풀지 않고 잘라 버려 불운했던 알렉산더의 말년을 들어 알고 있다. 글씨타래에 삐져나온 한 가닥이라도 잡으면 수월 할 텐데 아직 시작도 끝도 찾지 못했다. 시험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다. 볼펜을 떨어뜨려 줍다가 보니 다른 학생들이 떨어뜨린 수많은 글씨타래가 보였다. 나는 책상 밑에 굴러다니는 글씨타래를 내 앞으로 끌어 모았다. 힘주어 잡은 볼펜똥 하나가 손안에서 진득하게 뭉개졌다. 손에서 휘발유냄새가 난다.
*
컨테이너가 들어왔다. 여기 검사소는 한 달에 서너 번은 20톤 혹은 40톤짜리 컨테이너를 원단으로 꽉 채워 부산으로 보낸다. 나는 한족 노동자인 경여 아저씨를 도와 컨테이너에 원단을 날랐다. 원단을 지게차에 올린다음 지게차를 몰아 컨테이너에 앞에 세워두고 원단을 컨테이너에 실으면 되는 것이다. 컨테이너를 채울 양이 안 되면 박스에 원단을 담아 포장하는데 그때 박스에 붙이는 씨핑마크를 보면 베트남이랄지 홍콩이나 멀리 LA, 뉴욕, 캐나다같은 이국의 지명들이 적혀 있다. 사장님 말로는 저 컨테이너들과 박스들은 부산항에 도착해서 컨테이너전용선을 타고 해외로 간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왠지 가슴이 아려왔다. 경여 아저씨가 박스에 붙은 씨핑마크에 써져 있는 HONGKONG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는 걸 봤다. 여기서 나가는 컨테이너 대부분이 중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을 따라 그려볼까 하다 그냥 관뒀다.
일을 마치고 컴컴한 컨테이너 속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철문을 닫으려는데 종명이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컨테이너 안에서 녀석의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컨테이너 문을 닫고 씰을 채웠다.
*
학교축제인 줄만 알았던 촛불의식은 실은 종명의 뒤늦은 추모식이었다. 경찰의 밝혀낸 종명의 이력으로 인해 종명은 분신한지 1년 만에 열사가 되었다. 대물림된 가난과 폭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놓지 않다가 염색공장이 망하자 결국 분신을 했던 학우를 기억해달라고 붉은 대자보가 붙어있었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무엇이었나에 대한 답을 꺼내는데 하나같이 극적이었다. 한국에 섬유업은 다 죽었다고, 그게 어디 섬유업뿐만 이겠냐며 큰소리를 냈다. 한미FTA협정이 맺어지면 그것은 더 많은 희생자를 낼 것이라고, 우리 한목소리를 내야한다고 다음 집회 날짜를 잡는 것이다. 나는 대자보에 쓰인 날짜를 보고 시간에 맞춰 재집결 장소에 갔다. 스무 명이 모여 있었다. 학생회 간부들이었다. 거기서 두 시간을 더 기다렸다. 마흔 명이 모였다. 그동안 꽁지머리를 한 남학생이 앞에 나와 추도문을 읽었는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목소리가 떨리는, 감수성이 풍부한 친구였다. 그는 옥상에서 분신을 하는 열사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정점으로 점점 목소리가 커지더니 울음을 터트리고, 구호를 외치고, 마지막엔 노래를 불러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순간 경외심마저 들 정도로 흡입력 있었다. 우리는 거리로 나가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과 합류했다. 내 손엔 어느새 한미FTA결사반대라는 깃발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날 누군가 또 분신을 했다. 온몸이 검게 타들어가며 그는 12차선 도로의 중앙선까지 대굴대굴 굴렀다. 나는 옷을 벗어들고 달려갔다. 사람들이 소화기를 몸에 뿌리자 부들거리는 팔과 다리가 오므라들면서 떨림이 멈췄다. 진압대와 동지들은 모두 흥분해 있었다. 한 녀석이 나를 쳤다. 그 전투경찰은 눈을 감은 채로 마구잡이로 방패를 휘둘렀다. 뒤로 물러서다가 바닥에 버려진 차양모자에 미끄러져 깃발을 놓쳤다. 나는 그대로 쇠파이프와 방패를 피해 골목으로, 골목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달렸다. 그리고 길게 슬레이트가 쳐진 가게 밑에 앉았다.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물을 부어 손을 씻은 후 얼굴에 뿌렸다.
대나무발이 길게 쳐져있어 흔한 구멍가게인줄 알았는데 희뿌연 유리창 너머로 똬리를 튼 뱀이 보였다. 파충류 가게였다. 뱀은 유목幼木을 칭칭 감고 머리를 제 몸에 괴고 있었다. 마치 한 겨울의 난처럼 고고해보였다. 햇볕을 쬐고 있는 갈색등딱지에 흰 별이 박힌 거북들이 고개를 내밀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문은 잠겨있었다.
근처 여관에 들어가 TV를 켜는데 종명의 사진이 나왔다. 녹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쳐서 부산스럽게 TV옆에 꽂힌 빨간 비디오의 양 틈새를 휴지로 막았다. 막 비디오에 넣으려는데 끝나버렸다. 아나운서가 뭐라고 했던 걸까. TV 채널을 돌리니 오늘 시위 현장의 영상이 나왔다. 아나운서가 인사말처럼 “한편 협상 중단을 요구하며 분신한 아무개 씨는 의식은 있지만, 여전히 생명이 위독한 상태입니다.”하고 말했다. 다시 다른 채널로 돌리니 아무개씨의 죽음이 자막으로 나오고 있다. 지금은 이렇게 이슈화되지만 분명 한 달만 지나면 해결이 됐든 안됐든 뒤떨어진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종명은 1년 전에 죽었다. 사람들에게 그의 분신시효時效는 채 일주일도 안 되었다. 분신은 2007년도에도 2005년에도 2003년에도 쭉 있어왔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당사자들뿐이었다.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논문까지 써진 버지니아 공대생 조승희는 경우가 다르다. 그는 1999년 15명이 살해당한 컬럼바인 고교 난사사건 이후 8년 동안 깨지지 않은 이 살해기록을 32명을 살해해서 갈아치운 것이다. 적어도 이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는 그는 기억될 것이었다. 9.11이후로 어디서 핵폭탄이 터지거나 혜성이 날아와 지구가 반쪽 나지 않는 이상 새로울 것은 없었다.
나는 따뜻한 뭔가가 필요했다. 여관의 티슈 곽에 붙어져있는 다방스티커를 보고 전화를 걸자 짙은 화장에 붉은 손톱을 한 여자가 내가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선불로 화대를 주고 2만원을 더 주면서 뜨거운 것을 끓여달라고 하자 여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가서 장을 봐왔다. 상에 오른 것은 햇반과 김치찌개였다. 나는 싱거운 것 같아서 자꾸 소금을 쳤다. 두 스푼쯤 넣자 짠맛이 나는 것 같았다. 여자는 나처럼 짜게 먹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같이 먹자는 말을 거절했다. 그녀는 옆에 앉아서 내가 밥을 먹는 것을 붉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지켜보았다.
새벽에 잠을 깨어보니 여자는 가고 없었다. 혹시나 싶어 지갑을 살폈지만 없어진 것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박카스나 먹을까 해서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현금 50만원이 가지런히 들어있었다. 그 위엔 메모지가 놓여있었다.
오늘은 죽은 아들의 기일이었습니다. 걔를 위해 안 해본일이 없는데 말이죠.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어요.
나는 밖으로 나갔다가 비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것을 보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밖은 어슴푸레한데도 방은 컨테이너 속처럼 캄캄했다. 잠은 잘 오지 않았고 거추장스러운 속옷까지 전부 벗어내고 나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오후가 다 되어 여관 문을 나서자 아침에 내린 비로 최루탄 냄새는 전부 씻겨 내려가고 없었다. 좋은 날씨였다.
파충류 가게가 열려있었다. 나는 지갑의 불룩한 돈을 빨리 써버리고 싶었다. 거북을 보고 있을 때 어느 결에 베레모를 쓴 남자가 서서 아크릴 수족관에서 거북을 꺼내 들었다.
“보시게요? 별거북입니다. 땅에 사는 육지거북이죠.”
언젠가 L과 나는 땅에 사는 가장 큰 거북이 나오는 영화를 보았다. 갈라파고스코끼리거북은 500kg이나 나가면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사는 육지거북이다. 워낙 유명해서 거북이들이 사는 곳의 이름 역시 스페인말로 거북을 뜻하는 갈라파고스라 지었다했다. 나중에 L에게 육지거북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녀는 기억하지 못했다.
“저기 별거북, 이거 불법 아닌가요?”
“하하. 제가 여기에 가게를 차린 지가 벌써 20년입니다. 이건 스리랑카산이에요. 그때 인도에서는 별거북이 너무 많아서 사람들이 잡지도 않았죠. 국제보호종 같은 말은 있지도 않았어요. 지금 가게에 있는 것들은 다 제가 길러서 헤츨링을 거둔 거니 아무 걱정 마쇼.”
주인은 익숙한 솜씨로 사육장을 꾸미고 그곳에 별거북 한 마리를 담았다. 사육장을 들고 문밖을 나서는데 햇살이 아찔했다.
노란 택시들이 줄지어 서있었던 듯하다.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택시비는 없었다. 별거북은 55만원이었다. 나는 버스를 탔다. 사육장은 터무니없이 무거웠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어제의 그곳에 변한 것은 없었다. 나를 미끄러지게 했던 차양모자나 신문지, 빈 물병 같은 것이 떨어져 있을 만도 한데 길가까지 깨끗이 정비돼 있었다. 12차선 도로에는 차가 다니고 빌딩들은 거대했다.
나는 어제 그 사람이 분신했던 도로의 중앙을 가늠해봤다. 그리고 주위를 살핀 후에 노란 중앙선 위에 누웠다. 만들어지고 나서 한 번도 식지 않았을 12차선의 뜨거운 아스팔트바닥에 누우니 왠지 지구의 핵에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종명이 보였다.
“있잖아. 아무래도 난 무릴 것 같아. 나만 포기하면 되는데 모두다 없애버릴 수는 없잖아?”
“이게 너만의 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2차선 도로 위로 별거북이 기어갔다.
*
나는 별을 본다. 학명은 인디안 스타 터들이다. 골프공처럼 둥근 등딱지에 연한 빛의 별 문양이 이리저리 박혀있다. 아직 어려서인지 다갈색 빛이 약해 흰 별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반 지하 화장실 변기에 앉아 녀석에게 사료와 비타민제를 뿌려주고 먹이를 삼키길 기다린다. 별의 옆구리 살가죽이 허옇게 물러져있다. 꿈을 꾸는지 고개를 깊숙이 밀어 넣고 눈을 질끈 감고 있다. 쭈그린 다리를 펴는데 물을 내리지 않은 변기냄새가 난다. 언제부터 먹이를 먹지 않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별을 대야에 넣고 쓰레기봉지에 수조안의 산호사와 맹그로브를 털어 넣는다. 거실을 둘러보니 빈 A4박스가 눈에 띈다. 나는 별이 담긴 박스를 들고 뒷산으로 향한다. 산꼭대기에는 기상청이 있어 사람들이 꽤 붐빈다. 사방에 그물을 치고 너무 깎아놔서 산이라고 하기에도 뭣하다. 나는 산 깊숙이 들어가 땅을 판다. 그늘 아래라 흙은 축축한 편이지만 파들어 가는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진다. 뒷산 너머엔 약수터도 있다. 남은 사료를 전부 털어 넣는다. 마지막으로 들여다본 별은 여전히 눈을 감고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 내 별도 비가 오면 젖은 상자를 찢고 나갈 수도 있다. 원래 땅에 사는 거북이니까. 나는 두꺼운 A4박스의 한 면을 뚫어 놓고 뚜껑을 덮은 후 그 위로 흙을 덮었다. 산을 내려오는데 경비원이 뭘 하고 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조잡한 타임캡슐을 묻고 왔다고 말했다.
나는 가끔 내가 별을 묻으러 가는 꿈을 꾼다. 나는 별을 묻기도 하고 내 곁에 서서 나를 살피기도 한다. 산을 내려오면 노란택시가 도로를 한가득 메운 채 대기 중이다. 저 차를 타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든다. 하지만 내가 도착하기 전에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고 택시들은 일제히 쌩하고 달려간다. 나는 버스표지판 근처를 서성거린다.
*
6월의 학교는 무료하다. 나는 매번 학생식당이 거의 끝날 무렵에 저녁 식사를 한다. 버섯감자미소된장국, 나는 버섯과 감자와 유부와 무를 찾는다. 하지만 말갛게 우려진 국물뿐이다. 국을 마시며 버섯과 감자와 유부와 무의 향을 떠올린다. 그것들은 정말 이 안에 잘 버무려져 있을까. 나는 이 음식을 만든 요리사 쪽을 쳐다보다 눈이 마주쳐서 애써 미소를 지어준다. 무척 마른 여자다. 요리사 역시 입술 끝만 살짝 올려 미소를 짓는데 다크서클이 입 주변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식판을 반납하는데 요리사가 내게 책을 건넨다. 그 책이다. 검은 표지를 감싼 요리사의 손을 보는데 스크래치가 난 빨간 손톱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주홍빛 고춧물이 배인 손톱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요리사의 얼굴을 다시 살펴본다.
“지난번에 빌려갔었어요. 책에 대해 메모를 남긴다는 게 깜빡했네요. 잘 읽었어요.”
여관에서 돈을 두고 간 여자다. 밝은 곳에서 보니 거의 내 어머니뻘이다. 살이 급격히 빠져서 그런지 피부가 축 쳐져 있다. 거북의 목처럼 세로로 깊게 패인 목주름이 도드라져 목주름이라기 보단 목 가죽, 목 거죽 정도가 어울릴 것 같다.
“전 괜찮아요. 원하시면 가지셔도 됩니다.”
“루시드 드림, 전 이 책을 외우다시피 했는걸요. 지문까지 찍혀 있는데 제가 가질 수는 없죠. 자 여기, 전 요즘 지쳐있을수록 잘 된대서 절식하고 잠을 자지 않고 있어요.”
“충분히 예민해 보이시는데 그만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새끼 거북이만큼 말라야해요. 시비왕이 힘들지 않게요. 시비왕 설화를 알고 있어요? 시비왕은 석가모니의 전생이에요. 그는 매에게 쫒기는 비둘기를 위해 비둘기 무게만큼 자기 살을 베어 매에게 줬죠. 그런데 저울에 자기 넓적다리 살을 몽땅 도려 올렸지만 비둘기 무게가 안 되는 거예요. 그게 생명의 무게니 가치니 하지만 사실 비둘기가 아니라 거북이였기 때문이죠. 상식적으로 비둘기가 아무리 커봤자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겠어요. 시비왕은 스리랑카산 새끼 별거북인줄 알고 자기 살을 떼서 주겠다고 했지만 별거북은 자꾸 자라 갈라파고스거북이만큼 커다래졌답니다. 그 거북이가 바로 저의 전생이고 업보에요.”
“예? 그게 무슨 업보라는 겁니까? 그리고 이 책이 뭐라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되고말고요. 티베트 도승들이 꿈으로 세계를 내려다보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치는 걸 모르세요? 게다가 거북이가 죄가 없다니 처음 들어보네요. 그 거북이는 평소에 욕심을 부려 너무 많이 처먹었어요. 살을 빼지 않은 죄가 있단 말이죠. 진정한 나를 아는데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아직 원하는 장소에 도착하지 못했어요. 딜드1)는 잘 되지만 와일드2)가 힘들군요. 혹시 꿈 일기를 쓰고 있다면 절 좀 보여주시겠어요?”
1) DILD : Dream Initiated Lucid Dream 꿈을 꾸다가 어느 순간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꿈을 말한다. 대부분의 루시드드림은 DILD에 속한다. 2) WILD: Wake Initiated Lucid Dream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는 상태에서 곧바로 LD 상태로 진입하는 것.
나는 처음부터 꿈 일기를 적지 않았다. 여자가 보여준 꿈 노트는 물에 젖었다 말려졌는지 심하게 구겨져있다. 썩은 양파냄새도 나는 것 같다. 여자가 노트에 꿈을 적어내려 갈수록 꿈이 바짝 말라버린 듯 처음에는 형형색색으로 그려져 있던 꿈들과 그것에 관한 글들도 마지막 장으로 갈수록 단순해지고 짧았다. 말 그대로 별 볼일 없는 노트다. 나는 노트를 여자에게 주고 뒤돌아선다. 뒤쪽에서 여자가 중얼거린다.
“믿지 않는군요. 왜 사람들은 눈으로 봐야만 믿는 건가요? 내 슬픔을, 내 꿈을, 증거를 보여 주겠어요. 하나, 나는 꿈을 꾸고 있다. 둘, 나는 꿈을 꾸고 있다. 셋, 나는 꿈을 꾸고 있다. 넷, 나는 꿈을 꾸고 있다. 다섯, 나는 꿈을 꾸고 있다……”
여자의 음성이 소름끼치도록 음침해서 나는 발바닥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일 수 없다. 분명 뒤쪽에서 중얼거리고 있는데 마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전율을 일으킨다.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공중에 숫자를 세는 여자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홉, 나는 꿈을 꾸고 있다.”
그리고 여자의 목소리마저 사라졌다.
*
나는 시위에 나가 있다. 뭘 하는지 잘 보이지 않아 가로수를 타고 올라가 가지에 올라앉는다. 은행나무에 푸른 은행들이 열려있다. 도로는 차가 아닌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단상 위에서 꽁지머리 남학생이 큰소리로 구호를 부르짖는다. 그때마다 도로의 양쪽에 서있는 거대한 빌딩에서 희거나 붉은 찌라시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머리가 멍하게 울리곤 한다. 낙엽 같다. 나는 떨어지는 그것들을 한 번도 공중에서 잡지 못한다. 바닥에 떨어진 찌라시를 읽으려하면 문자들은 어지럽게 흩어져 버리는데 공중에서 날고 있을 때만큼은 검은 활자들이 눈동자에 똑똑히 박힌다. 그때마다 검은 활자들이 내 머리를 칠 것처럼 커보여서 나는 거북처럼 목을 움츠린다.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난다. 나는 나무에서 뛰어내려 무작정 호루라기 방향을 향해 뛴다. 거대한 갈라파고스 거북이 호루라기를 부르고 있다. 아니 별거북이다. 버스만큼 커다란 거북의 등에 무늬가 아닌 진짜 별이 박혀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거북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있다. 거북의 입에서 호루라기가 떨어지자 거북은 허밍을 한다. 베레모를 쓴 남자가 뛰어들어 거북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며 내게 외친다.
“당신 정말 잊어버린 거야? 책 105p를 펴!”
리얼리티체크(RC) [Reality Check]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 현실에서 깨어있는지를 의심하고, 직접 근거를 찾아 그것을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 당장 코 막고 숨 쉬어보거나 손목시계 혹은 핸드폰의 문자를 확인해라. 시간이 얼토당토않게 흐른다면 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거리를 둘러보니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도로 위에 별거북 한 마리가 죽은 듯 고개를 파묻고 있다. RD의 부작용인 듯 나는 그만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잊은 것 같다. 나는 깨고 싶지 않다. 깨면 어디쯤 가있을지 짐작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이미지를 다시 그리기 위해 깨어나긴 해야 할 것 같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몸 아래쪽이 움직이지 않는다. 오랜 RD로 수면마비 증상이 온 줄 알았지만 고개를 들어 밑을 보니 다리와 팔이 없다.
TV에서는 갈라파고스거북 중 14종에서 2종이 멸종했다는 다큐멘터리가 진행 중이었다. 링겔을 갈던 간호사가 TV를 돌리고 나갔다. 007시리즈였다. 금발머리를 한 로잘먼드 파이크와 반짝이는 갈색피부를 가진 할리 베리를 품에 앉은 제임스본드가 보였다. 나는 화면을 보다가 가끔 눈을 감고 이미지를 다시 그려서 완전한 상으로 맺혔는지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배우의 귀의 위치나 새끼발가락 같은 것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스포츠카와 제트기, 멋진 건물 같은 것도 꼼꼼히 외웠다. 2D와 같은 평면으로 외워선 안 된다. 3차원적으로 외워야 제대로 된 꿈을 꿀 수 있다. 스포츠카를 몰고 여자를 낀 몸동작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나는 눈을 감는다. 하나, 나는 꿈꾼다. 둘, 나는 꿈꾼다. 누군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손을 쥔다. 나는 눈을 뜨지 않는다. 가서 스포츠카를 모는 거다. 마흔 넷, 나는 꿈꾼다.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뜨거운 온천에 막 몸을 담글 때처럼 손끝부터 따끔따끔한 것이 지나간다. 몸 안에 차가운 열熱바람이 부는 것 같다. 울먹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머니, 결국 돌아가셨구나. 괜찮다. RD에서는 언제든 어머니를 뵐 수 있고 L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머니, 어머니의 얼굴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내 꿈에 영원토록 데려가려면 어머니의 이미지를 확실히 외워놓고 가야하는데 흐물흐물한 인상만 그려질 뿐 도무지 윤곽조차 그려지지 않는다. 나는 다급히 눈을 떠서 주위를 확인한다. 눈을 떴는데도 너무 캄캄하다. 머리로 벽을 쳐보니 너무 좁다. 아마도 관인 듯하다. 난 정말 죽어버린 걸까. 연습했던 할리베리를 떠올려본다. 뾰로통한 표정의 할리베리. 그래 섹시한 할리베리를 어머니로 삼아야겠다. 그렇게 마음먹고 할리베리의 얼굴을 보자 요리사의 얼굴로 바뀐다. 그녀는 얼굴에 묘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그녀가 양팔을 벌린다.
1) 2007년 KTF에서 출시한 SHOW라는 브랜드 광고. 메인 카피는 세상이 바꾸는 쇼가 시작됐다! 세상에 없던 세상이 기다리는 쇼를 하라.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에서는 SHOW에 대해 컨셉트의 이미지를 잘 전달해주고 있으며 다양한 상황연출이 돋보이지만 반면 다양한 크리에이티브를 보여주고자 많은 물량을 집행한 것은 거칠고, 소비주의적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