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와 아하시아 사신들의 대결
(왕상22:51-왕하1:18 )
믿음의 사람 엘리야는 한 평생 오므리 왕조와 싸웠으며, 특히 오므리의 아들 아합과 혼신의 힘을 다 쏟는 싸움을 치뤄 왔다. 그는 아합에게 기근을 선언한 후 이방 땅에 피신을 가서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았다(왕상 17:24).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후, 엘리야는 아합의 바알 선지자 450명과 갈멜산에서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하는 싸움에서 "기도의 능력"으로 승리하여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인정받는다(왕상 18:21-46; 약 5:17-18). 갈멜산 승리 후 엘리야는 오히려 깊은 좌절감에 빠졌으며 모세의 시내산으로 가서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명감을 새롭게 회복하는 "말씀의 사람"이 된다(왕상 19). 이 후 엘리야는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그를 음모에 빠뜨리고 죽이자, "사회정의의 구현자"로서 아합과 이세벨에게 책임을 물어 오므리 왕국의 멸망을 선언했다(왕상 21:19-24). 이제 엘리야는 그의 마지막 사역에서 병들어 이방신 "바알세불"에게 치료의 신탁을 구하러 사자를 보내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 왕에게 "하나님의 전권대사"로 나타나, 죽음의 신탁을 전하며 오므리 왕조가 끝나도록 하고 있다.
1. 아하시야 왕의 등극과 열왕기 저자의 평가(왕상 22:51-53)
아합이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아람 왕국과 싸우다가 죽은 후(왕상 22:29-40),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의 보좌에 오른다(왕상 22:51). 열왕기자는 먼저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인 아하시야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왕상 22:51-53).
"유다 왕 여호사밧 제 십 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아비의 길과 그 어미의 길과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바알을 섬겨 숭배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동하기를 그 아비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아하시야는 그의 부모가 다스리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사건을 통해 바알의 무능을 많이 목격하였지만 그의 부모의 죄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그의 집안에 뿌리를 내린 우상숭배의 죄는 너무 깊었고, 이제는 죄의 꽃이 온몸에 피어나고 있다.
2. 아하시아의 추락(1-2절)
"아합이 죽은 뒤에 모압이 이스라엘에게 반역하였다"(왕하 1:1).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열왕기상과 열왕기하가 둘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구분은 70인역에 처음 나타난다. 원래 사본의 전승에 따르면, 왕하 1:1은 왕상 22:51-53절에 있는 아하시야의 등극과 그의 연대기에 뒤따라 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엘리야와 아하시야의 대결 이야기도 왕상 17-19장과 21장에 속해 있음이 분명하다.
열왕기 저자는 먼저 아합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을 모압과 연관하여 간략하게 말한다. "아합이 죽은 뒤에 모압이 이스라엘에게 반역하였다"(왕하 1:1). 모압의 반역 이야기는 모압에서 발굴된 유명한 "메사 비문"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비문은 주후1869년 독일 선교사가 찾아낸 것이다. 여기에 쓰여진 모압어는 히브리어와 거의 같은 방언이다. 모압 왕 메샤는 모압의 신 그모스가 모압을 이스라엘에서 구원하였음을 전한다.
"나는 메사, 그모스의 아들…모압 왕, 디본 사람이다. 나의 아버지는 모압을 30년간 통치하였고, 나는 내 아버지를 따라 다스렸다. 나는 카르호에 그모스를 위해 산당을 세웠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모든 왕들로부터 구원하였고, 나의 모든 원수들과 싸워 승리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로 말하자면, 그는 모압을 오랫동안 비하시켰다. 왜냐하면 그모스가 그의 땅에 대해 분노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그를 이어 말하였다. "나는 모압을 낮추리라." 나의 때에 그가(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와 그의 집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스라엘은 영원히 망하였다!(이제) 오므리는 메데바의 땅을 차지 하였었고,(이스라엘은) 그 때로부터, 그리고 그의 아들(아합) 때의 절반동안 약 40년 간 거기에 거하였다. 그러나 그모스가 나의 때에 거기에 [거하였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왕 오므리"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오므리 왕은 그 당대에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큰 인물로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비문은 모압의 관점에서 자신의 해방을 전해준다. 그러나 열왕기 저자는 모압의 반역을 아합 왕조에 대한 주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고 있다. 무엇 보다도 모압의 반역을 1:1에 둠으로써, 아하시야가 등극하자 마자 엄청난 손실을 당하였고 큰 추락을 경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압의 반란과 독립은 아하시야의 첫번째 추락에 불과하였다. 그는 더 큰 추락을 앞두고 있다.
열왕기 저자는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2절).
사마리아에 세워진 오므리의 왕궁에는 2층의 다락방이 있었다. 이 방은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위해 만든 지붕 위의 방 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웠을 것이다(왕하 4:10). 이 당시 2층 집에는 탁트인 발코니가 있었으며, 이런 집을 그 당시의 사람들은 “창문집"(bit hillani)으로 불렀다. 사람들은 갈대나 나무 껍질로 창살을 만들었으며, 사생활도 보호하고 좋은 전망도 동시에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옥 구조였다.
아하시야는 전망 좋은 2층 집에서 자신의 권세를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자신의 권세를 스스로 획득한 것은 아니며, 그저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을 뿐이다. 어쨌든 그는 왕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게 2층 난간에서 아래로 추락한다. 그의 추락은 두 번 째 추락이며, 첫 번째 보다 더욱 치명적이었다. 마치 권투선수가 치명타를 입고 더 심각한 펀치를 맞는 것 같다. 그는 이미 1절에서 모압이 이스라엘의 통치와 지배에서 떨어져 나갈 때 깊은 추락을 경험하였다. 40여년 동안 조공을 바치던 나라가 떨어져 나간 것은 나라의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았으며, 다시 한번 더 심각한 개인적 추락을 하게 된다.
아하시야의 병은 심각하였으며, 놀랍게도 모든 예상을 뒤엎고 그는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자신이 나을 수 있는지 신탁을 물으려고 한다. 왕이 병들어 이스라엘 땅 밖에 있는 블레셋의 도시 에그론에서 바알을 찾고 있는 사실만 보아도 엘리야가 얼마나 철저하게 바알 종교를 박멸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왕상 18:40).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엘리야의 사역은 성공적이었다.
아하시야는 여전히 바알 세불(원명)에게 신탁을 구한다는 점이 놀랍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 아합의 비참한 죽음을 보고서도 교훈을 하나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다." 따라서 그는 더욱 심각한 파국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아하시야는 옛날 사무엘 시대에 주님의 언약궤가 블레셋 도시들을 돌아다닌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블레셋 군대에 빼앗겼던 법궤가 에그론에 도착한 후 주님께서 주민들을 치시자 그들은 혹독한 종양으로 고생하게 되었다(삼상 5:10-12). 블레셋 신들은 주님의 법궤 앞에 설 수 없었으며, 그 백성들의 건강과 생명을 지킬 수 없었다(삼상 5). 이제 와서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의 건강 문제를 가지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불을 찾는가?(왕하 1:2)
그렇지만 우리들도 아하시야처럼 병과 고통과 실패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능한 우상들을 찾는다. 우리는 종교적인 열성이나 정성을 통하여 인간존재의 불안과 미지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친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아하시야처럼, 주 하나님만을 찾지 않는다. 그들은 진품을 찾지 않고 모조품만 찾는다. 얼마나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인가? 이번 미국 뉴욕의 무역센터 폭파 직전에 미국사람들의 갤럽조사를 보면, 그들은 국방력과 안정된 경제를 가장 크게 믿는다고 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무기와 돈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우리로 하나님을 찾으라고 권한다.
여기에서 "바알 세붑"(Baal-zebub)이란 용어가 흥미롭다. 고대의 서기관들은 이 신의 이름을 약간 바꾸어 놀려 먹고 있다. 이 신의 원래 이름은 “바알 세불"(Baal-zebul)로서 “왕자 바알", 혹은 “영광스러운 바알"이란 뜻이다. 우가릿에서 바알은 “왕자, 땅의 주"로 알려져 있다. 신약도 원래 이름 바알 세불을 유지하며 악마의 두목을 지칭한다(마 10:25; 12:24, 27). 그러나 "바알 세붑"은 "파리의 주"로서 "똥파리 왕자"라는 뜻이다. 알파벳 하나를 약간 바꾸어(b를 l로), 서기관은 의도적으로 바알을 놀려 먹는다. "하하하하, 왕이 똥파리 왕자를 찾고 있다니..."
3. 왕의 사신과 하나님 사신의 대결(3-8절)
3절은 2절과 강한 대조를 만들어 준다. 아하시야가 왕의 사자를 바알 세불에게 보내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왕에게 보내신다(여기에 등장하는 주의 사자는 주님 자신과 구별하기 힘들다). 이리하여 두 사신이 충돌하고 있다.
엘리야가 던지는 질문,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3절)은 통렬하다. 이 질문은 6절과 16절에서 형태는 약간 변하지만 계속 반복된다(6절에는 "보내느냐?"가 빠지며, 16절에서는 "가다"와 "보내다"가 빠진다).
아하시야는 바알에게 구원의 신탁을 구하기 위해 사자들을 보내지만, 엘리야는 아하시야의 사신을 낚아채어 버린다. 여기에 이 두개의 사명(mission)이 서로 충돌된다. 이것이 본장의 중심 주제이다. 아하시야는 계속해서 자신의 사자를 보낸다(2, 9, 11, 13절). 이와 같이 주님은 자신의 사신을 계속 보내신다(3, 15절). "왕의 사신"과 "하나님의 사신"이 서로 부딪칠 때, 누가 이길까? 왕은 지상의 모든 권세를 갖고 있으며, 선지자는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정말 이 세상에서 선지자가 왕을 꺾을 수 있을까? 본 장에서는 이 두 사신들이 서로 충돌할 때 마다, 아하시야의 사신들은 계속 침몰한다.
주님의 사자는 엘리야에게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는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4절 상). 엘리야는 즉각적으로 순종한다(4절 하). 엘리야는 변함 없이 주님의 사자의 지시를 따르며, 주님께 철저히 복종하고 있다. 아하시야가 바알에게 무슨 신탁을 받든지 간에, 주님은 그가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의 판결을 내리시며, 엘리야로 전하게 하신다. 아하시야가 에그론의 바알에게 무엇을 들었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 4:35).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니 왕이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저희가 고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저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5-6절). 엘리야는 분명하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아하시야는 그의 아버지 아합처럼 사형선고를 미리 받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Brueggemann 2000:284).
이 두 절에서는 "돌아오다"가 강조된다. 아하시야는 묻고, 그의 사자들은 "한 사람"이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말한 것을 전한다. 그들은 이 한 사람을 보고, 그의 말을 들으며 대단히 놀랐다. 이리하여 왕이 그들에게 맡긴 임무를 유기한다. 왕의 사신이 왕의 명령을 끝까지 수행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 이례적이다. 그들은 비록 함흥차사가 되더라도 왕명을 수행해야 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엘리야가 그들을 돌려보낸다. 선지자의 권위가 왕의 대사들 권위 보다 더 위에 있다.
왕은 자신의 사자들을 돌려 보낸 자의 정체에 대해 궁금하였다.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고한 그 사람의 모양이 어떠하더냐.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7-8절).
“어떤 사람이냐?"는 왕의 질문은 이야기에 전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사신들은 "한 사람인데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 때 왕은 그가 바로 엘리야인 줄 알게 된다. 어떤 이들은 엘리야가 "털보"가 아니라 “털 옷을 입은 사람"으로 보고, 본문에서 엘리야의 옷이 강조되었다고 본다(왕상 19:19; 왕하 2:8, 13-14). 사실 선지자들은 독특한 옷을 입었다(슥 13:4; 마 3:4). 그들의 옷은 금욕적인 모습("sign of austerity"; Jones)을 보여준다. 이 옷은 유목생활에 전형적인 옷으로서, 상류 문화의 사치와 대조를 이룬다. 엘리야의 옷은 왕의 사신들이 입고 다닌 옷들과 큰 대조를 이루었을 것이다. 엘리야는 선지자의 옷을 입고 다녔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넘겨 주었지만, 여기에서는 "털보"로서 엘리야의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 엘리야의 "가죽 띠"는 구약에서 다시 나타나지 않으며 오직 세례 요한만 갖고 있었다(마 3:4).
4. 벼락 맞아 죽은 두 오십부장들과 그 부하들(9-12절)
9-14절로 넘어가면, 싸움의 제 2라운드가 시작된다. 왕은 자신의 사신을 낚아채어 돌려보낸 자가 정말 엘리야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간다. 이리하여 첫 번째 오십부장을 그의 부하와 함께 엘리야에게 보내고 있다.
이 당시 오십부장은 직업 군인으로서 상당히 높은 장교였을 것이다(사 3:3을 보라). 게다가 그들은 왕의 친위대에 소속한 자들이었다. 이 때 엘리야는 "산꼭대기"에 있었다. 이름도 없는 산이다. 왜 엘리야는 늘 이렇게 외로운 산에서 지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영적인 담대함을 키우고 있었을 것이다.
왕이 보낸 첫 오십부장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고 말한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어명이요, 하나님의 사람께서는 내려오시오!"로 번역한다. 원문을 좀 더 직역하자면, "내려와"(come down!)라는 거친 명령이 된다. 이 명령은 대단히 위협적이다. 만약 엘리야가 듣지 않으면, 군사적인 행동을 곧바로 취하겠다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다. 왕이 문인들을 보내지 않고, 군인들을 보낸 것을 보면 분명히 위협을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엘리야는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을 사를지로다"고 대답한다. 앞에서 엘리야는 "한 사람"으로 소개되었으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소개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떤 인간적인 압력에도 굴복할 수 없었다. 그는 왕의 명령을 무시하며, 오히려 자신의 권위를 주장한다. 그는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의 권위가 왕의 권위 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하늘의 불"을 불러 왕의 친위대원 오십명을 불사르겠다며 응수한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을 사를지로다"라는 엘리야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이미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갈멜산에서 모든 제물을 태웠음을 알았으야 했다(왕상 18:37-38).
자신의 친위부대원 중 첫 50명을 제물로 태운 것만 해도 왕으로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출애굽의 바로처럼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보고도 아무런 교훈을 받지 않는다. 이와 같이 죄에는 항상 비이성적 요소가 바닥에 깔려 있다. 죄는 단순한 반역 만은 아니다. 죄는 빈약한 논리의 산물이며 어리석은 짓이다.
여기에서 많은 주석가들은 엘리야의 행동을 잔인하고 비정한 것으로 해석한다. 어느 주석가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 죄 없는 왕의 사절들을 불로 전멸시켰다는 이야기(9-16절)는 도덕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점은 이 사화를 엘리사가 벧엘의 버릇 없는 아이들에게 심한 저주를 했다는 이야기(2:23-24)와 같은 범주로 격하시킨다"(Gray, 21쪽). 이들 주석가들에 따르면, 엘리야의 행동은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품과 너무 다르다. "왜 왕에게가 아니라, 부하들에게 불을 내리는가? 불쌍한 왕의 군사들만 죽게 하는가?"
그러나 먼저 이 이야기의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가나안 신화에서는 바알이 불과 번개의 주인이었다. 아하시야가 바알을 구할 때, 주님은 바알의 강점으로 응답하신다. 불이 갈멜에 떨어진 것 같이, 이제 바알을 찾는 자에게 임한다. 바알은 해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되살아나 땅에 풍요를 주는 자로서, 치료와 회복을 바라는 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불이 갈멜산 제단에서 제물에 떨어졌으나(왕상 18:38), 이제는 왕이 보낸 군사들과 사신들에게 떨어진다(왕하 1:10, 12).
또한 첫 오십부장은 어쩌면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정치적인 명령만 전하려고 한다. 그는 왕과 자기 부하 50명을 믿고 고압적으로 말했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오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교만과 겉치레는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를 일으킨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사신은 "X가 말하니라"는 형식으로 자신을 보낸 자의 메시지를 소개한다. 그때 그는 마치 보낸 자처럼 말한다. 아하시야의 전령은 마치 자신이 아하시야 왕이나 된 것 처럼, 엘리야에게 "내려 오라"고 명령한다(왕하 1:9, 11). 그러나 불 세례를 받는다.
아하시야 왕은 첫 그룹의 경험에서 겸손해지기 보다, 더욱 지나친 요구를 하며 두번째 오십부장을 보낸다. 두번째 오십부장은 엘리야에게 "즉시 내려오라"고 명령한다. "즉시"라는 말은 긴박성을 말해준다. 왕이 다급하게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신이라는 데 있다. 아하시야의 사신들이 왕 때문에 권위와 존경을 받는 것처럼, 엘리야도 그를 보낸 자 때문에 존경과 높임을 요청하는 것이다. 왕은 아무도 하나님을 명할 수 없음을 배울 것이다(사 40:13-14). 첫 두 그룹의 사람들은 선지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른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도 왕의 강요를 받을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태우는 불"이시라는 사실을 그들은 더 깊이 생각해야 했었다(히 12:29; 신 4:24). 주님은 그에게 나아오는 자들이 경외심과 두려움으로 나아오길 요구하신다(히 12:28).
5. 선지자 앞에 무릎 꿇은 오십부장(13-18절)
세 번째 오십부장은 위의 두 오십부장의 운명을 보며, "선지자를 잘 모셔야 한다"는 교훈을 배운다. 그는 앞선 두 오십부장들을 통하여 선지자가 왕 보다 아래에 있지 않음을 알게되었다. 그는 자신이 엘리야에게 명령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님을 알며, 자기와 부하들의 생명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는 왕의 교만과 오만으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부하들과 함께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하시야 왕은 교만하여 자기 생명에 대한 전망을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그러나 세번째 사람은 선지자 앞에 엎드리며 자신과 부하들의 생명에 관심을 갖는다. 그는 "꿇어 엎드린다." 그는 엘리야 앞에 즉각적으로 엎드리며, 간청자가 된다. 이 50부장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 당대의 백부장의 모습과 같다(마 8장). 그는 예수의 권위를 완전히 인정하며, 겸손히 엎드렸다.
또한 이 오십부장은 엘리야에게 "간청한다". 이 동사는 원래 "은혜를 구한다"(hanan)는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엘리야의 은총과 자비를 구하고 있다. 그는 두 번이나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의 생명을 귀히 여겨달라고 부탁한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인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 오십인들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13, 14절).
뿐만 아니라, 그는 "아하시야 왕"의 전갈을 엘리야에게 한 마디도 전하지 않고 있다. 그는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고백한다. 이리하여 그의 부하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에게 복종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자기의 주인인 아하시야 왕을 배반하고 주님에게 복종한다.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리하여 그와 그의 사람들의 생명을 보전한다. 그는 선지자의 목숨이 아니라, 그 자신과 자기 사람의 목숨이 위태함을 정확하게 알았다.
엘리야는 세 번째 오십부장의 간청에 별로 감동을 받은 것 같지 않다.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저를 두려워 말고 함께 내려가라"고 명하신다(15절상). 비로소 주님은 엘리야에게 "내려가라"고 말씀하신다. 이 장에는 "오르다"가 8회(3, 4, 5, 6, 9, 11, 13, 16), "내려가다"가 11회 나타난다. 아마 엘리야는 그동안 왕의 위협을 심하게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의 사자가 그에게 "안전할 것"이라고 확신을 주신다. 이리하여 비로소 엘리야는 "내려간다."
엘리야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세속적인 권세를 따라 살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우리의 인생을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서라고 하시면 서야 한다. 우리는 "왕께서 말씀하시니" 보다, "주께서 말씀하시길"을 늘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행 4:19-20; 5:27-29).
다시 한 번 엘리야는 왕에게 말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사자를 보내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니 이스라엘에 그 말을 물을만한 하나님이 없음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16절). 그동안 엘리야는 "네가 죽으리라"를 세 번이나 반복하였다(3, 4, 6절). 여기에는 "반드시"가 첨가된다.
이 이야기에서 왜 아하시야 왕이 선지자가 자기에게 직접 와야 한다고 주장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그는 에그론의 바알에게 신탁을 얻기 위해 사신들을 보내었다(왕하 1:2). 그러나 그 사신들은 그가 죽을 것이라는 엘리야의 선언을 전해주었다(왕하 1:4). 그는 엘리야 선지자를 위협하여 하나님의 판결을 바꾸어 보려고 하였을까? 그러나 선지자가 왕 앞에 나타났을 때, 판결은 동일하였다(16절).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자는 결국 무너질 것이다(고후 10:5).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16절)는 엘리야의 말씀은 최종적이다. 왕은 아무런 대답도 반박도 하지 못한다. 왕은 병으로 죽기 보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었다"(17절 상).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는 힘을 가진다. 참 선지자의 말씀은 이루어지고야 만다(17절, "왕이 엘리야의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선포된 말씀과 성취된 말씀은 정확하고, 즉각적으로 일치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불도, 아하시야의 죽음도 다 동일한 패턴을 갖고 있다. 선지자의 권위는 말씀의 효력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효력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딤후 3:15-17; 딤전 4:13-14).
열왕기자는 아하시야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 한다. "왕이 엘리야의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저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제 이년이었더라. 아하시야의 남은 사적은 모두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17-18절). 아하시야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에게는 후계자도 미래도 없었다. 오므리 집안은 그렇게도 "다산의 신 바알"을 열심히 섬겼지만, 후손조차 얻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명상
열왕기하 1장은 아하시야 왕의 병으로 시작하고 그의 죽음으로 마친다(2, 18절). 그렇지만, 이 장의 진정한 주인공은 엘리야이다. 왕은 병들고 죽지만, "엘리야의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는다"(17절). 엘리야는 "털보"(8절)에서 "하나님의 사람"(10, 12절)으로 넘어간다. 그는 이전에 아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왕상18:17)와 "원수"(왕상21:20)라는 칭호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참된 "하나님의 사자"로 확증받는다(17:24 참조). 그는 왕의 사자들을 돌려 보내며, 왕의 군대를 멸망시키고, 왕의 군대에게서 경배를 받는다. 엘리야의 사역에서 "왕"과 "선지자"의 갈등이 깊은 것을 우리는 보았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싸운 왕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도모하는 자들이 아니었고,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를 상징하는 바알주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등장한 엘리야는 하나님의 진정한 전권대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표상이었다. 신약의 저자들은 먼저 엘리야를 세례 요한과 연결시킨다.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해 준 자였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장차 성령과 불로 세상을 심판하리라고 예언하였다(마 3:11; 눅 3:16). 아하시야의 사신들은 사마리아에서 와서 엘리야를 위협하였다(왕하 1:1). 그와 같이 예수의 제자들이 사마리아 동네를 통과할 때, 거절과 위협을 당하였다. 그 때 제자들은 옛 엘리야의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그들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들을 멸하길 구할까요?"라고 물었다(눅 9:53-54). 그러나 주님은 금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신의 사신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는 모든 백성의 존경과 헌신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로 생명을 얻도록 하나님의 불타는 진노를 십자가에서 견디셨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를 조롱하는 자들 조차 용서받고 낙원에 갈 수 있는 길을 여셨다. 그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사형선고가 철회된다(고후 1:9). 이런 점에서 예수는 엘리야 보다 더 나은 선지자이다. 우리는 전권대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진정한 생명과 평화를 누려야 할 것이다.
김정우 교수/본원 원장, 총신대 신대원 구약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