河渠書(하거서)
≪夏書≫曰 : 「禹抑洪水十三年, 過家不入門. 陸行載車, 水行載舟, 泥行蹈毳, 山行卽橋. 以別九州, 隨山浚川, 任土作貢. 通九道, 陂九澤, 度九山.」 然河菑衍溢, 害中國也尤甚. 唯是爲務. 故道河自積石歷龍門, 南到華陰, 東下砥柱, 及孟津、雒汭, 至于大邳.
≪하서≫왈 : 「우억홍수십삼년, 과가불입문. 육행재거, 수행재주, 니행도취, 산행즉교. 이별구주, 수산준천, 임토작공. 통구도, 피구택, 도구산.」 연하치연일, 해중국야우심. 유시위무. 고도하자적석력룡문, 남도화음, 동하지주, 급맹진、낙예, 지우대비.
[解釋] ≪夏書≫에서 이르기를, 「禹는 13년 동안이나 홍수를 다스리기에 열중하느라고, 자기 집문 앞을 지나면서도 안으로 들어가지를 못하였다. 육로에서는 수레를 타고 다녔고, 수로에서는 배를 타고 다녔으며, 진흙길에서는 毳를 타고 다녔고, 산길에서는 교자를 타고 다녔다. 이리하여 九州의 구획을 정하고, 산세에 따라 하천을 파서 통하게 하고, 토질에 따라 공물의 다소를 정하였다. 그리고 9주로 통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9주에 있는 모든 물길에 제방을 쌓고, 9주에 있는 산들을 측량하였다.」 그러나 황하는 범람해 수재를 몰고 왔고, 중국에 입힌 피해가 대단히 심하였다. 그래서 우는 황하를 다스리는 일을 가장 큰 임무로 알고 황하의 물줄기를 이끌어 積石山에서 龍門山을 거쳐 남쪽으로 華陰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동쪽으로 砥柱山으로 내려와 孟津과 雒汭에 이르렀다가, 大邳山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於是禹以爲河所從來者高, 水湍悍, 難以行平地, 數爲敗, 乃二渠以引其河. 北載之高地, 過降水, 至于大陸, 播爲九河, 同爲逆河, 入于勃海九川既疏, 九澤既灑, 諸夏艾安, 功施于三代.
어시우이위하소종래자고, 수단한, 난이행평지, 수위패, 내이거이인기하. 북재지고지, 과강수, 지우대륙, 파위구하, 동위역하, 입우발해구천기소, 구택기쇄, 제하애안, 공시우삼대.
[解釋] 이때에 우는 황하가 높은 지대에서 흘러와서, 수세가 급하고 세기 때문에 평지로 흘러들기에는 쉽지 않아서, 여러 차례 범람한 것이라고 여기고, 이에 대비산 일대에서 황하의 물줄기를 두 방향으로 나누어서 수세를 약화시켜 흐르게 하였다. 그래서 북쪽으로는 다시 높은 지대로 흐르게 해, 降水를 지나, 大陸澤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아홉 개의 강줄기로 나누어졌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져 逆河가 되어, 勃海로 흘러들어가게 하였다. 이리하여 9주의 하천들이, 모두 소통되고 9주의 水澤에 제방이 쌓여져, 온 중국이 편안하게 되었고, 그의 공적은 夏, 殷, 周 3대까지에 이어졌다.
自是之後, 滎陽下引河東南爲鴻溝, 以通宋、鄭、陳、蔡、曹、衛, 與濟、汝、淮、泗會. 于楚, 西方則通渠漢水、雲夢之野, 東方則通[鴻]溝江淮之閒.
자시지후, 형양하인하동남위홍구, 이통송、정、진、채、조、위, 여제、여、회、사회. 우초, 서방즉통거한수、운몽지야, 동방즉통[홍]구강회지간.
[解釋] 우가 황하의 물을 다스린 이후로, 사람들은 滎陽에서 황하의 물을 동남쪽으로 이끌어 鴻溝를 만들어서, 宋, 鄭, 陳, 蔡, 曹, 衛 등의 제후국과 통하게 하고, 齊, 汝, 淮, 泗 등의 강물을 합류시켜놓았다. 또 楚에서는, 서쪽으로 漢水와 雲夢의 들판을 개천으로 연결시키고, 동쪽으로 長江과 淮水 사이를 운하로 관통시켰다.
於吳, 則通渠三江、五湖. 於齊, 則通菑濟之閒. 於蜀, 蜀守冰鑿離碓, 辟沫水之害, 穿二江成都之中. 此渠皆可行舟, 有餘則用溉浸, 百姓饗其利. 至于所過, 往往引其水益用溉田疇之渠, 以萬億計, 然莫足數也.
어오, 즉통거삼강、오호. 어제, 즉통치제지간. 어촉, 촉수빙착리대, 벽말수지해, 천이강성도지중. 차거개가행주, 유여즉용개침, 백성향기리. 지우소과, 왕왕인기수익용개전주지거, 이만억계, 연막족수야.
[解釋] 吳에서는 三江과 五湖를 개천으로 연결하였고, 齊에서는 淄水와 濟水를 연결하였으며, 蜀에서는 군수 李氷이 離碓를 開鑿해 沫水의 수해로부터 벗어나게 하였으며, 따로 두 강을 성도에다 뚫었다. 이렇게 뚫은 개천에는 모두 배들이 통행할 수 있었고, 여유가 있으면 灌漑로 쓰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 이익을 만끽하였다. 그리고 이 개천들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그 물을 끌어와 농토에 관개하는 도랑을 증가시키니, 그 수는 한없이 불어나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많아졌다.
西門豹引漳水溉鄴, 以富魏之河內. 而韓聞秦之好興事, 欲罷之, 毋令東伐, 乃使水工鄭國閒說秦, 令"鑿涇水自中山西邸瓠口爲渠, 并北山東注洛三百餘里, 欲以溉田." 中作而覺, 秦欲殺鄭國.
서문표인장수개업, 이부위지하내. 이한문진지호흥사, 욕파지, 무령동벌, 내사수공정국간세진, 영"착경수자중산서저호구위거, 병북산동주락삼백여리, 욕이개전." 중작이각, 진욕살정국.
[解釋] 西門豹는 漳水의 물을 끌어와서 鄴 지방의 농토에 관개함으로써, 魏의 河內 지역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韓나라는 秦나라가 각종 사업을 일으키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진나라)로 하여금 일에 지쳐서 동쪽에 위치한 한나라를 침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水利 전문가인 鄭國을 진나라에 간첩으로 보내어 유세하게 하였다. 유세 내용은 "진나라가 涇水를 뚫어 中山의 서쪽으로부터 瓠口에 이르기까지 개천을 만들어, 북쪽의 여러 산들을 따라 동쪽으로 洛河로 흘러가도록 3백여 리를 흐르게 하고, 이로써 농토에 관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 유세가 수용되어 공사가 반쯤 진척되었을 무렵 정국의 간첩 행위가 발각되어, 진나라에서는 정국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다.
鄭國曰 : 「始臣爲閒, 然渠成亦秦之利也.」 秦以爲然, 卒使就渠. 渠就, 用注填閼之水, 溉澤鹵之地四萬餘頃, 收皆畝一鐘. 於是關中爲沃野, 無凶年, 秦以富彊, 卒并諸侯, 因命曰鄭國渠. 漢興三十九年, 孝文時河決酸棗, 東潰金隄, 於是東郡大興卒塞之.
정국왈 : 「시신위간, 연거성역진지리야.」 진이위연, 졸사취거. 거취, 용주전알지수, 개택로지지사만여경, 수개무일종. 어시관중위옥야, 무흉년, 진이부강, 졸병제후, 인명왈정국거. 한흥삼십구년, 효문시하결산조, 동궤금제, 어시동군대흥졸색지.
[解釋] 이때 정국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신이 간첩으로서 그런 공사를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천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역시 진나라에 이로운 일입니다.」고 해, 진나라도 이 말에 찬동해, 결국은 그로 하여금 공사를 끝마치도록 하였다. 개천이 완성되자 진흙이 섞여 있는 경수의 물을 끌어와서 염분이 섞인 關中 지방의 4만여 頃에 달하는 농토에 관개해, 마침내 매 1畝마다 1鍾의 수확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관중 평야가 비옥한 농토로 변해서 흉년을 모르고 지냈으며, 진나라는 이로 말미암아 부강해졌고, 마침내 여러 제후국들을 倂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개천에 鄭國渠라는 이름을 붙였다. 漢나라가 건국된 지 39년이 되던 효문제때, 황하가 酸棗에서 터져 동쪽의 金堤가 무너졌다. 이때 東郡에서는 인부들을 대량으로 징발해서 금제를 틀어막았다.
其後四十有餘年, 今天子元光之中, 而河決於瓠子, 東南注鉅野, 通於淮、泗. 於是天子使汲黯、鄭當時興人徒塞之, 輒復壞. 是時武安侯田蚡爲丞相, 其奉邑食鄃. 鄃居河北, 河決而南則鄃無水菑, 邑收多. 蚡言於上曰 : 「江河之決皆天事, 未易以人力爲彊塞, 塞之未必應天.」 而望氣用數者亦以爲然. 於是天子久之不事復塞也.
기후사십유여년, 금천자원광지중, 이하결어호자, 동남주거야, 통어회、사. 어시천자사급암、정당시흥인도새지, 첩부괴. 시시무안후전분위승상, 기봉읍식유. 유거하북, 하결이남즉유무수치, 읍수다. 분언어상왈 : 「강하지결개천사, 미이이인력위강색, 색지미필응천.」 이망기용수자역이위연. 어시천자구지불사부색야.
[解釋] 그 후 40여 년이 지난 뒤, 지금의 천자 元光 연간에, 황하가 瓠子에서 터져, 동남쪽으로 鉅野로 흘러들어서, 淮水와 泗水로 통하였다. 이때 천자는 汲黯과 鄭當時로 하여금 인부들을 징집해서 그곳을 틀어막게 하였지만, 곧바로 다시 터지고 말았다. 이때 武安侯 田蚡이 승상 자리에 있었는데, 그의 奉邑은 鄃縣이었다. 유현은 황하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황하의 제방이 남쪽으로 터져서 범람하였지만, 수재를 당하지 않고 언제나 풍년을 누렸다. 그래서 전분은 천자에게 아뢰기를, 「강하의 제방이 터지는 것은 모두 하늘의 뜻으로 쉽사리 사람의 힘으로 강제로 틀어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강제로 틀어막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은 아닙니다.」고 하였고, 望氣 점술가도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이에 천자는 오랫동안 제방을 다시 쌓는 공사를 하지 않았다.
是時鄭當時爲大農, 言曰 : 「異時關東漕粟從渭中上, 度六月而罷, 而漕水道九百餘里, 時有難處. 引渭穿渠起長安, 并南山下, 至河三百餘里, 徑, 易漕, 度可令三月罷, 而渠下民田萬餘頃, 又可得以溉田, 此損漕省卒, 而益肥關中之地, 得穀.」
시시정당시위대농, 언왈 : 「이시관동조속종위중상, 도륙월이파, 이조수도구백여리, 시유난처. 인위천거기장안, 병남산하, 지하삼백여리, 경, 이조, 도가령삼월파, 이거하민전만여경, 우가득이개전, 차손조생졸, 이익비관중지지, 득곡.」
[解釋] 이때 鄭當時는 大農으로서 천자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지난날 關東에서 渭水를 따라 수로로 양곡을 長安까지 운반하는 데에 6개월이나 걸렸고, 수로 9백여 리를 배로 운반하는 동안, 때때로 난관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장안으로부터 하천을 뚫어 위수의 물을 끌어들여서 南山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가게 한다면, 황하까지 3백여 리밖에 되지 않고, 물길이 곧아 운송하기에 쉬우므로, 양곡을 운반하는 일은 석 달이면 끝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천이 통과하는 곳에는 백성들의 농토가 1만여 頃이나 있으니, 또한 여기에 농수를 공급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배로 운반하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도 있고, 인력을 감축시킬 수도 있으며, 關中의 농토를 더욱더 비옥하게 만들어서, 곡식을 더 많이 수확하게 될 것입니다.」
天子以爲然, 令齊人水工徐伯表, 悉發卒數萬人穿漕渠, 三歲而通. 通, 以漕, 大便利. 其後漕稍多, 而渠下之民頗得以溉田矣.
천자이위연, 영제인수공서백표, 실발졸수만인천조거, 삼세이통. 통, 이조, 대편리. 기후조초다, 이거하지민파득이개전의.
[解釋] 천자는 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제나라의 수리 전문가인 徐伯으로 하여금 측량을 해 물길을 확정하고, 수만 명의 인부를 징발해 배가 다니게 될 하천을 뚫게 해, 3년 만에 개통시켰다. 개통하자 그 수로를 이용해 배로 운반하니 참으로 편리하였다. 그 후 배로 운반하는 분량은 점점 늘어났고, 개천 근방의 백성들은 농토에 관개하기가 아주 좋았다.
其後河東守番系言 : 「漕從山東西, 歲百餘萬石, 更砥柱之限, 敗亡甚多, 而亦煩費. 穿渠引汾溉皮氏、汾陰下, 引河溉汾陰、蒲阪下, 度可得五千頃. 五千頃故盡河壖棄地, 民茭牧其中耳, 今溉田之, 度可得穀二百萬石以上. 穀從渭上, 與關中無異, 而砥柱之東可無復漕.」
기후하동수번계언 : 「조종산동서, 세백여만석, 경지주지한, 패망심다, 이역번비. 천거인분개피씨、분음하, 인하개분음、포판하, 도가득오천경. 오천경고진하연기지, 민교목기중이, 금개전지, 도가득곡이백만석이상. 곡종위상, 여관중무이, 이지주지동가무부조.」
[解釋] 그 후 河東의 태수 番係가 다음과 같이 아뢰기를, 「山東 지구로부터 서쪽으로 장안까지 수로로 운송되는 양곡은 매년 1백여 만 석인데, 지주산 일대의 험난한 흐름을 지나오려면, 양곡의 손실이나 인명의 傷亡이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낭비 또한 클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천을 뚫어 汾水의 물을 끌어다가 皮氏와 汾陰 일대로 흘러가게 하고, 한편 또 황하의 물을 끌어다가 분음과 蒲坂 일대로 흐르게 한다면, 대략 5천 頃의 농토가 생긴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 5천경의 농토는 원래 모두 河邊의 황무지로서 백성들이 거기에서 방목을 할 뿐이었습니다만, 이제 거기에 관개해 경작을 하게 되면, 어림잡아 2백만 석 이상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곡식은 위수를 따라 장안으로 운송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관중으로부터 곡식이 오는 것과 차이가 없을 것이며, 지주산 동쪽으로부터 다시는 곡식을 배로 운송해올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天子以爲然, 發卒數萬人作渠田. 數歲, 河移徙, 渠不利, 則田者不能償種. 久之, 河東渠田廢, 予越人, 令少府以爲稍入. 其後人有上書欲通褒斜道及漕事, 下御史大夫張湯.
천자이위연, 발졸수만인작거전. 수세, 하이사, 거불리, 즉전자불능상종. 구지, 하동거전폐, 여월인, 령소부이위초입. 기후인유상서욕통포사도급조사, 하어사대부장탕.
[解釋] 천자는 이 말에 동의해, 수만 명의 인부를 징발해 하천을 파고 농지를 개간하였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뒤, 황하의 물길이 바뀌어 파놓은 하천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자 그곳에 농지를 개간한 농민들은 종자마저 거두어들이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하동의 하천과 농지는 버려져 있다가 그 뒤 마침 이곳으로 이주해온 越人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주어서 경작하게 함으로써 少府로 하여금 그들로부터 약간의 조세 수입을 얻게 하였다. 그 후 어떤 사람이 천자에게 상소해 褒斜道와 褒水 및 斜水를 잇는 漕運을 개통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 사안은 御史大夫 張湯에게 내려져 처리하게 하였다.
湯問其事, 因言 : 「抵蜀從故道, 故道多阪, 回遠. 今穿褒斜道, 少阪, 近四百里, 而褒水通沔, 斜水通渭, 皆可以行船漕. 漕從南陽上沔入褒, 褒之絕水至斜, 閒百餘里, 以車轉, 從斜下下渭. 如此, 漢中之穀可致, 山東從沔無限, 便於砥柱之漕. 且褒斜材木竹箭之饒, 擬於巴蜀.」
탕문기사, 인언 : 「저촉종고도, 고도다판, 회원. 금천포사도, 소판, 근사백리, 이포수통면, 사수통위, 개가이행선조. 조종남양상면입포, 포지절수지사, 간백여리, 이거전, 종사하하위. 여차, 한중지곡가치, 산동종면무한, 편어지주지조. 차포사재목죽전지요, 의어파촉.」
[解釋] 장탕이 사안에 대해 물었더니, 그 사람은 이렇게 설명하기를, 「蜀郡에 이르려면 故道로 가야 하는데, 고도는 산비탈이 많고 또 멀리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만약 포야도를 뚫게 되면 산비탈도 적고 4백리나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포수와 沔水를 연결하고 또 야수와 위수를 연결해 서로 통하게 하면, 여기에 모두 배를 띄워 水運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면 南陽에서 곡식을 싣고 면수를 거슬러 올라와서 포수로 流入되고, 포수의 끝에서 야수까지 약 1백여 리는 수레로 바꾸어 운반하며, 그 다음은 야수를 거쳐 위수로 유입됩니다. 이렇게 하면 漢中의 곡식을 京師로 직접 운반해올 수도 있고, 산동 지구로부터 면수를 통한 수운도 막힘이 없이 소통되어 지주산 일대를 통과하는 수운에 비해 훨씬 편리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褒斜 유역의 목재나 竹箭 따위의 풍부함도 巴蜀지방에 비할 만큼 많습니다.」
天子以爲然, 拜湯子卬爲漢中守, 發數萬人作褒斜道五百餘里. 道果便近, 而水湍石, 不可漕. 其後莊熊羆言 : 「臨晉民願穿洛以溉重泉以東萬餘頃故鹵地. 誠得水, 可令畝十石.」
천자이위연, 배탕자앙위한중수, 발수만인작포사도오백여리. 도과편근, 이수단석, 불가조. 기후장웅비언 : 「임진민원천락이개중천이동만여경고로지. 성득수, 가령무십석.」
[解釋] 천자는 이 건의에 동의하고 장탕의 아들 張卬을 漢中太守로 임명해 수만 명의 인부를 징발해 5백여 리에 달하는 포야도를 만들게 하였다. 이 수로를 만드니 과연 편리하고도 가까웠지만, 물길은 격류인데다가 돌도 많아서 조운은 불가능하였다. 그 후 莊熊罷가 진언하기를, 「臨晉 지방의 백성들은 洛水를 뚫어 그 물로 重泉 동쪽의, 예전부터 염분이 많이 포함된 땅 만여 頃에 관개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실로 그 물만 끌어서 댈 수 있다면, 1畝당 10石은 수확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於是爲發卒萬餘人穿渠, 自徵引洛水至商顏山下. 岸善崩, 乃鑿井, 深者四十餘丈. 往往爲井, 井下相通行水. 水穨以絕商顏, 東至山嶺十餘里閒. 井渠之生自此始. 穿渠得龍骨, 故名曰龍首渠. 作之十餘歲, 渠頗通, 猶未得其饒.
어시위발졸만여인천거, 자징인락수지상안산하. 안선붕, 내착정, 심자사십여장. 왕왕위정, 정하상통행수. 수퇴이절상안, 동지산령십여리간. 정거지생자차시. 천거득룡골, 고명왈룡수거. 작지십여세, 거파통, 유미득기요.
[解釋] 이에 만여 명의 인부를 징발해 개천을 뚫어서 徵縣으로부터 商顔山 아래까지 낙수의 물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개천의 兩岸이 잘 무너져서, 더 이상 파지 못하고, 마침내 우물을 파게 되었는데, 그 깊은 것은 40여 丈이나 되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우물을 파서 그 우물이 땅 밑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흐름을 이루게 되었다. 개천은 땅속으로 흘러 상안산을 지나가서 동쪽으로 산 고개로부터 10여 리쯤 되는 곳까지 이르렀다. 우물 개천은 바로 이때부터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개천을 뚫다가 용의 뼈를 발견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龍首渠라고 붙였다. 이 도랑을 10여 년 동안 만들어서 제법 일부 지방까지 통하게 하였으나, 풍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自河決瓠子後二十餘歲, 歲因以數不登, 而梁楚之地尤甚. 天子既封禪巡祭山川, 其明年, 旱, 乾封少雨. 天子乃使汲仁、郭昌發卒數萬人塞瓠子決.
자하결호자후이십여세, 세인이수부등, 이량초지지우심. 천자기봉선순제산천, 기명년, 한, 간봉소우. 천자내사급인、곽창발졸수만인색호자결.
[解釋] 황하가 瓠子에서 터진 지 20여 년이 되었지만, 이로 말미암아 농사는 번번이 풍년이 들지 않았고, 梁 및 楚 지방은 더욱더 심하였다. 이때 천자는 봉선을 거행하고 각지를 순행하면서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냈지만, 그 이듬해에는 한발이 들었다. 흙으로 쌓은 제단이 말라서 비가 내리지 않았다. 천자는 이에 汲仁과 郭昌에게 인부 수만 명을 징발해 호자의 무너진 제방을 다시 쌓아서 물을 막게 하였다.
於是天子已用事萬里沙, 則還自臨決河, 沈白馬玉璧于河, 令群臣從官自將軍已下皆負薪窴決河. 是時東郡燒草, 以故薪柴少, 而下淇園之竹以爲楗.
어시천자이용사만리사, 즉환자림결하, 침백마옥벽우하, 영군신종관자장군이하개부신전결하. 시시동군소초, 이고신시소, 이하기원지죽이위건.
[解釋] 이때 천자는 이미 萬里沙 神祠에서의 제사를 다 끝내고, 곧 돌아와서 친히 황하의 터진 곳에 이르러 白馬와 玉璧을 황하수에 넣고 난 다음,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해 장군 이하는 모두 나무를 운반해 와서 터진 황하를 다시 틀어막게 하였다. 이때 東郡에서는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무가 부족해, 이에 淇園의 대나무를 운반해 내려와서 竹楗을 만들었다.
天子既臨河決, 悼功之不成, 乃作歌曰 : 「瓠子決兮將柰何? 皓皓旰旰兮閭殫爲河! 殫爲河兮地不得寧, 功無已時兮吾山平. 吾山平兮鉅野溢, 魚沸郁兮柏冬日. 延道弛兮離常流, 蛟龍騁兮方遠遊. 歸舊川兮神哉沛, 不封禪兮安知外! 爲我謂河伯兮何不仁, 泛濫不止兮愁吾人? 齧桑浮兮淮、泗滿, 久不反兮水維緩.」
천자기림하결, 도공지불성, 내작가왈 : 「호자결혜장내하? 호호간간혜려탄위하! 탄위하혜지부득녕, 공무이시혜오산평. 오산평혜거야일, 어비욱혜백동일. 연도이혜리상류, 교룡빙혜방원유. 귀구천혜신재패, 불봉선혜안지외! 위아위하백혜하불인, 범람부지혜수오인? 설상부혜회、사만, 구불반혜수유완.」
[解釋] 천자가 황하의 터진 곳에 친히 왕림해 물을 막는 공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비통하게 여겨, 이에 다음과 같은 시가를 지었다. 「호자에서 황하 터지니, 어찌 할꼬 이 일을? 호호탕탕 물바다여, 대부분 다 河水로 변하였구나! 온통 하수로 변하였으니, 이 지방이 편안할 수 없구나. 공사는 끝날 날이 없고, 吾山이 평평해졌구나. 흙 파내어 어산마저 평평해지니, 鉅野澤 범람하는구나. 황하의 바른 흐름이 무너져, 옛 흐름에서 이탈하였구나. 蛟龍은 날뛰며, 멀리 달아났구나. 황하가 옛 흐름으로 돌아오도록, 水神이여 큰 힘을 내소서! 내 봉선을 행하지 않았으면, 關外 황하의 범람을 어찌 알았으리? 내 대신 河伯에게 고해주시오, 어쩌면 그렇게도 어질지 못하느냐고. 한도 없이 범람하게 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구나. 齧桑亭은 물 위에 뜨고, 회수, 사수는 넘치는구나. 오래도록 황하는 옛 흐름으로 돌아오지 않고, 제방은 무너진 채 그대로구나.」
一曰 : 「河湯湯兮激潺湲, 北渡污兮浚流難. 搴長茭兮沈美玉, 河伯許兮薪不屬. 薪不屬兮衛人罪, 燒蕭條兮噫乎何以御水! 穨林竹兮楗石菑, 宣房塞兮萬福來.」
일왈 : 「하탕탕혜격잔원, 북도오혜준류난. 건장교혜침미옥, 하백허혜신불속. 신불속혜위인죄, 소소조혜희호하이어수! 퇴림죽혜건석치, 선방색혜만복래.」
[解釋] 또 한 수는 다음과 같다. 「황하수는 湯湯 급하게도 흐르네. 북쪽으로 가는 물길은 멀어서, 준설해 옛 흐름으로 돌이키기는 어렵도다. 긴 대밧줄을 취해 흙과 돌 나르고, 아름다운 옥을 바쳐 제사를 지내도다. 河伯은 도와주기로 허락하셨는데, 나무의 공급이 이어지질 않는구나. 나무의 공급이 이어지지 않는 것은, 衛人들의 죄로다. 베어서 때어버려 산야마저 쓸쓸하니, 아! 터진 河水는 무엇으로 막을꼬? 대나무를 淇園에서 내려와, 石柱를 세우고 죽건을 만들어 채우도다. 宣房이 막히면, 장차 만복이 찾아오리라.」
於是卒塞瓠子, 筑宮其上, 名曰宣房宮. 而道河北行二渠, 復禹舊跡, 而梁、楚之地復寧, 無水災.
어시졸색호자, 축궁기상, 명왈선방궁. 이도하북행이거, 복우구적, 이량、초지지복녕, 무수재.
[解釋] 이리하여 마침내 호자에서 황하의 터진 곳에 제방을 쌓아 막고, 그 위에 궁을 지어, 이름을 宣房宮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황하는 북쪽으로 두 강으로 흐르도록 방향이 바뀌어, 夏禹가 다스렸던 황하의 옛 자취로 회복되었고, 梁과 楚 지방도 안녕을 회복해 수재가 없었다.
自是之後, 用事者爭言水利. 朔方、西河、河西、酒泉皆引河及川谷以溉田, 而關中輔渠、靈軹引堵水, 汝南、九江引淮, 東海引鉅定, 泰山下引汶水, 皆穿渠爲溉田, 各萬餘頃. 佗小渠披山通道者, 不可勝言. 然其著者在宣房.
자시지후, 용사자쟁언수리. 삭방、서하、하서、주천개인하급천곡이개전, 이관중보거、영지인도수, 여남、구강인회, 동해인거정, 태산하인문수, 개천거위개전, 각만여경. 타소거피산통도자, 불가승언. 연기저자재선방.
[解釋] 이로부터 관리들은 수리에 관한 일을 다투어 진언하였다. 그리고 朔方, 西河, 河西, 酒泉 지방에서는 다 황하나 계곡에 흐르는 물을 끌어와서 농지에 관개하였다. 관중에서는 輔渠와 靈軹渠를 만들어 여러 하천의 물을 끌어왔고, 汝南과 九江에서는 회수의 물을 끌어왔으며, 東海에서는 鉅定의 물을 끌어왔고, 泰山 아래에서는 汶水의 물을 끌어왔는데, 이 모두가 다 하천을 파서 농토에 관개한 것으로 그 범위는 각각 1만여 頃에 달하였다. 그밖에 작은 하천이나 또는 산세에 따라 연못을 만들어 물을 끌어온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러나 이상의 모든 하천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곳은 宣房이었다.
太史公曰 : 「余南登廬山, 觀禹疏九江, 遂至于會稽太湟, 上姑蘇, 望五湖, 東闚洛汭、大邳, 迎河, 行淮、泗、濟、漯洛渠, 西瞻蜀之岷山及離碓, 北自龍門至于朔方. 曰, 甚哉, 水之爲利害也! 余從負薪塞宣房, 悲瓠子之詩而作河渠書.」
태사공왈 : 「여남등려산, 관우소구강, 수지우회계태황, 상고소, 망오호, 동규락예、대비, 영하, 행회、사、제、탑락거, 서첨촉지민산급리대, 북자룡문지우삭방. 왈, 심재, 수지위리해야! 여종부신새선방, 비호자지시이작하거서.」
[解釋] 태사공은 말하였다. 「나는 남쪽으로는 廬山에 올라 禹가 소통시킨 九江을 보았고, 또 會稽의 太湟에 이르러 姑蘇山에 올라 五胡를 바라보았다. 동쪽으로는 洛汭, 대비, 迎河를 살폈고, 또 淮水, 泗水, 濟水, 漯水, 洛水를 순시하였다. 서쪽으로는 蜀의 岷山과 離碓를 보았고, 북쪽으로는 龍門으로부터 朔方에까지 가보았다. 그러고 나서는 물로부터 오는 이익과 피해란 참으로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천자를 따라 瓠子로 가서 나무를 나르며 宣房을 막고, 천자의 瓠子詩에 감동해 이에 河渠書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