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비에른 발은 “30여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노르웨이와 세계를 무대로 국제 노동운동에 참여한 경험”과 “‘국제 운송노동자 연맹’과 ‘노르웨이 지방공무원 노동조합’, 그리고 노르웨이의 다양한 조직들이 참여하는 ‘복지국가운동(Campaign for the Welfare State)'" 등에서 20여 년간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에서 복지국가에 내포하는 다른 사회관계들에 대해 탄탄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저자는 복지국가를 해체하고 시장논리를 확대하려는 자본가 계급과 그의 우호세력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재의 복지국가가 위기와 한계에 봉착할 때까지 주체로 참여해왔던 노동조합 세력들과 사민주의 정당들이 비판의 대상이다. 노동조합의 경우 복지국가를 마치 ‘유적 존재’인 양 인간의 ‘집단상식’에 의거한 안정적이며 상식적인 모델로 파악하고 (계급)타협구조를 당연시하는 ‘탈정치화, 탈이데올로기화’ 된 세력들이고, 사민주의 정당의 경우 전쟁 이후 복지모형을 관리하면서 규제철폐, 민영화, 공공서비스에 대한 신자유주의 세력들에 대한 공격에 동참해 온 세력들이다.
아스비에른 발은 복지국가의 출현과 현재를 설명하는 근본적인 틀로 ‘사회권력관계’를 이용한다. “복지국가는 사회권력관계의 포괄적 이동을 요구했고 또 그런 이동에 기여해 왔다. 당시 중요한 갈등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던 산업자본주의의 지배적 이해관계들, 달리 표현하면 노동과 자본의 갈등이었다. 복지국가가 곧 노동이 자본을 이겼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것은 타협이었다. 서로 대립하는 당사자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모든 타협과 마찬가지로 복지국가는 상충하는 이해관계로 가득하여 당연히 불안정해질 수 있는 잠재력을 늘 안고 있다.” 따라서 북유럽 복지국가를 모델화하여 다른 국가로 수출하려는 시도들의 ‘비역사적이고 파상적인 이해들’을 비판한다.
여기서 아스비에른 발은 자본과 노동의 타협에 있어 주도권을 쥔 세력이 자본가 계급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상당수의 노동조합 조직들이 사회주의를 목표로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관점에서 보면 ‘계급타협’은 사실상 자본가들이 생산을 조직하고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또 생산을 관리할 권한을 갖는다는 것을 받아들다는 의미였다....한마디로 말해 노동을 관리하고 분배할 권한을 자본가들에게 넘겼다는 뜻이다. 자본가들이 갖는 특권과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나아가 아스비에른 발은 복지국가의 출현과 계급타협의 역사적 상황으로 소련, 동유럽과 서유럽의 체제경쟁(냉전)을 언급하고 있다. “복지국가가 탄생하게 된 이유는 정확히 서유럽 자본가들이 사회주의 지지세력이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노동운동이 제시한 요구사항의 많은 부분을 수용했기 때문이다.”그러면서 “하나의 현상으로서 복지국가는 북반구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국한된다. 둘째, 복지국가들 안에서 보다 공평하게 분배되는 번영의 상당부분이 남반구의 착취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복지국가’를 유럽의 역사적, 일시적, 정치경제 지형에서 나온 계급타협의 산물로 정리하고 있다.
아스비에른 발은 책 후반부에서 “노동의 잔혹화”라는 표현을 통해, 복지국가가 단순히 정책과 복지예산의 일체가 아니며, 복지국가의 약화는 노동조합,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자본의 공격에 대해 실제적인 인 대응을 해오지 못한 탈정치화되고 탈이데올로기화한 노동조합과 복지국가의 신자유주의적 해체에 동조해온 사민주의 정당들을 비판하며 대안을 마련하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어 민영화, 관료주의, 위로부터의 통제, 불평등, 빈곤, 투기경제에 대한 대안적인 대응책을 제시하면서 “대안부재, 그 이상으로 대중의 동원을 실현시키고 또 이 정책들의 실천에 필요한 도구들을 이용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의 문제인 것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노동조합이 당면한 최대의 도전은 대안의 가능성을 찾는 것보다 능력을 갖추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노동조합의 투쟁에 새로운 노선을 명확히 밝힐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스비에른 발의 결론은 자본가가 주도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을 공격하고 있는 ‘계급타협의 복지국가’를 해체하고 노동자계급이 전진하는 새로운 세상이다. 그 곳은 북반구가 남반구를 착취하지 않고 공공서비스를 자본가들이 ‘경영’하지 않는 다른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