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전도여행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의 고소를 받아 가이사랴 감옥에 갇혔다가 다시 로마감옥으로 이송되었는데
이때에는 로마인의 신분으로 유대인들의 고수를 받아 감옥에 갇힌 것이기 때문에
사슬에 묶임과 고문이 없고 감옥에서도 면회가 자유로운
강금이라기보다 가택연금수준의 상태였습니다.
당시 로마당국은 피지배국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여 민심을 안정시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였데
사도바울의 경우 고소한 유대인들을 섭섭하게 하여 민란의 단초가 될까 염려도 되고
그렇다고 해서 로마시민을 식민지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함부로 처형할수도 없으므로
풀어주는 것도 아니고 가두어두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둘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복음을 전할수 없도록 사도바울의 이동의 자유만 박탈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없는 사람을 한없이 가두어 둘수는 없는것 아니겠습니까
로마법에는 고소인이 1년반동안 나타나지 않아 재판이 지연되면 죄수를 풀어주게 되어있었습니다.
1년반이 되어서 죄수를 처형하기 위해 고소인이 부랴부랴 달려와 재판에 응하면 죄수는 처형당하여 죽게 되는 것이고
1년반이 되어서도 고소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죄수는 석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이 무렵게 기록되어졌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빌 1:20) 유대인이 와서 재판에 응하면 죽고 유대인이 오지 않으면 삽니다.
사도바울은 죽느냐 사느냐~하는 그 시점에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앞에서도 기뻐하라~라며 빌립보서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죽지 않고 풀려날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빌 1:25)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 8:20)
주님은 사도바울에게 그가 로마를 거쳐 스페인에 까지 가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롬 15:22~25)
그런데 어찌 사도바울이 로마감옥에서 죽을수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사도바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잡으러 오지 않았고 사도바울은 로마감옥에서 1차 석방되어 풀러났습니다.
로마감옥에서 1차석방된 사도바울은 디모데와 로마교회 성도들과 함께 스페인으로 향하였습니다. (히 13:22~23)
그리고 스페인에서 다시 그레데섬을 갔다가 그레데교회를 디도에게 맡겨두고
골로새와 에베소를 방문한후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고
마게도냐로 건너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를 거쳐 니가볼리에서 다시 디도를 만나 겨울을 난후 다시 디도와 함께 달마디아를 거쳐 로마로 들어갔는데
이후 얼마지 않아서 폭군 네로황제의 기독교박해 때에 잡혀서 2차 투옥되게 되었습니다.
로마인의 신분으로 유대인의 고소를 받아 감금되었던 1차 투옥때와 달리
로마황제의 명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여 갇힌 것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사슬에 매여(딤후 1:16) 옷이 벗겨지고(딤후 4:13) 매질을 당하며 지하감옥에 갇혀 다른 사람들과의 면회가 완전히 차단된 상태로(딤후 1:17) 갇히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그가 주님앞으로 가야할 시간이 되었슴을 알았습니다. (딤후 4:6)
그는 힘들게 편지를 써서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간신히 편지를 전달하였습니다.
그것이 디모데후서~입니다.
사도바울의 전체 행적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하여 각 성경의 배경을 부분적으로 조금조금씩 올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마친 다음 사도바울의 행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정리를 하는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모두 14권의 편지를 기록하였습니다. (히브리서는 확실한 사도바울의 기록~입니다.)
그 14권의 편지중 가장 마지막 기록한 편지가 바로 디모데후서~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의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또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사도바울의 14권의 편지는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다시 오심의 모형~입니다.
아니~ 그건 너무 어거지가 아닌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철저히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의 삶이 주님의 모형이 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어찌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주신 그의 말이 주님의 말씀이 안될수 있겠습니까?
디모데후서의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의 주님의 모습, 주님의 말씀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디모데후서의 말씀은 죽음이 임박한 사도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남기는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디모데후서의 말씀은 곧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1~2절은 바울서신의 전형적인 인사글~입니다.
편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 편지를 받을 사람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매 편지마다 거의 틀에 박힌 듯한 인사글을 쓰면서도
그때그때 수신자가 누구인지, 자신이 어떠한 상황가운데 있는지, 또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에 따라서
살짝살짝 다르게 쓴 말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의 서두에서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기가막힌 역설(pradox) 아닙니까?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말하는 생명의 약속~
그리고 이제 임종을 맞이한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찾듯
그는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그냥 의미없는 글자읽듯이 무미건조하게 읽지 마십시오.
배우가 시나리오 대본을 받아 읽듯이 읽으십시오.
디모데후서는 평생을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살아왔던 노선교사가 임종을 눈앞에 두고
사랑하는 아들을 불러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3】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 어떤 하나님입니까?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어떤 의미입니까?
전통을 말하는가요? (골 2:8)
우리집은 4대째~ 기독교야~ 족보를 자랑하는 것인가요? (딤전 1:4)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 내 문제도 해결해주실줄 믿습니다~ 신화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딤전 4:7)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떠올리시나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보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또 우리는 약속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을 알고 다시 오실 주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선진들에게 생명의 약속 (딤후 1:1)을 하셨고
그들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히 11:1)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 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눈물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별할때 눈물을 흘립니다.
슬플때도 고통스러울때도 눈물을 흘립니다.
기쁘거나 감격스러울때도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어린 아이들은 무서워 떨때에도 눈물을 흘립니다.
외롭고 고독할때도 눈물을 흘립니다.
디모데의 눈물은 무슨 의미일까요?
5절에 이는 네 속에 거짓없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의 눈물은 거짓없는 믿음~ 진심의 눈물 이었습니다.
디도데는 무엇을 거짓없이 진심으로 믿었습니까?
아브라함과 다윗~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오심을 믿었습니다.
보지 못하였지만 실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믿음의 선진들 처럼~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안수는 왜 하죠?
왕을 세울때 안수합니다. 제사장을 세울때 안수합니다.
그리고 기름을 붓죠?
기름은 성령을 기리킵니다.
안수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불과 같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하나님의 은사가 넘치기를 기도했습니다.
거짓없는 믿음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없이 어찌 하나님을 증거할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론이요, 하나님의 것이 아닌 개인의 신념이요, 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하는 그 믿음이 참~이라고 하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불같이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생명의 언약 -->거짓없는 믿음-->성령의 기름부으심-->능력
생명의 약속을 믿는 거짓없는 믿음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더해져 하나님의 능력~을 입으시기를 원합니다.
그럼 능력이 무엇입니까?
뽕나무를 뽑아 바다에 심기우게 하는 것이 능력입니까?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능력입니까?
병이 고쳐지고 불가능한 일들을 척척 해 내는 것이 능력입니까?
예 맞습니다. 능력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말씀하시는 능력은 그런것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1~13절을 기억하십니까?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사도바울이 말씀하시는 능력은 어떤 능력이었습니까?
내가 비천함에 처할줄도 알고 부요함에 처할줄도 아는 일체의 능력을 배웠다~라고 하였습니다.
2012년 1월 아프리카 수단을 방문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위험하다~라고 겁을 내었습니다.
그곳은 먹을 것도 마땅치 않고, 잠자리도 불편한데 어떻게 가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많아서 아무나 못 들어가는 비싼 호텔에서 자고 아무나 못 먹는 것을 먹고 아무나 가질수 없는 것을 가지는 것을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나면 어떻게 될까요?
비천해서 아무것이나 먹고 아무데나 자고 아무데나 갈수 있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두려워서 못 가고 불편해서 못 가고 익숙하지 못하여서 못 가고
그래서 계속 내가 살고 있는 손바닥만한 땅덩어리 그 안에서 어떻든지 남들보다 더 가지고 더 차지하고 살려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이 결코 능력이 아님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무데나 자고 아무거나 먹고 아무데나 갈수 있는 것이 능력입니다.
네~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비천한데 처할줄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 1절에서 기뻐하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선고일을 앞에 두고 쓴 편지입니다.
즉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 1절에서 기뻐하라~라고 하는 것은 죽음앞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믿음에서 넘어뜨리기 위하여서 극심한 고난으로 우리를 흔들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고난받게 될 것입니다. (You must suffer~)
가만 앉아있어도 고난받고 주님의 길로 행해도 고난받게 될 것입니다.
손할례당의 탐심을 주의하십시오. (빌 3:2, 눅 12:15)
하나님의 축복~을 빙자하여 땅에서 부요하고 평안하기를 구하는 미혹하는 말을 주의하십시오.
마지막 날, 사탄이 우리를 믿음에서 넘으뜨리기 위하여 흔드는 그날
손할례당의 믿음으로는 믿음을 지킬수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떠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생명의 언약 -->거짓없는 믿음-->성령의 기름부으심-->능력-->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는 임종을 눈앞에 둔 사도바울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유언의 말씀입니다.
그럼 우리는 유언을 남길때 어떻게 말을 하나요?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나는 그때 이랬어?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말 잘 듣고 형제 우애하고 착하게 살아라~ 는 식으로 말하지 않겠습니까?
디모데후서 1장 1~8절 에서 당부의 말로 마치는 유일한 문장이 8절의 고난을 받으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은 디모데후서 전체의 주제요
죽기직전에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남기는 핵심적인 말씀이요
주님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딤후 4:6)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을 믿는다.
사랑하는 아들아~
니가 믿음의 선진들에게 준 하나님의 언약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너의 그 거짓없는 믿음에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능력을 받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가 되어라.
이것이 딤후 1:1~8 절의 문맥흐름입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9~14절은 1~8절까지의 반복설명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자격도 없고 아무 공로도 없이
오직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값없이 주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롬 3:9~25, 롬 10:2~10)
로마서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한 사도바울의 설명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죠?
그러나 복음에 관한 로마서 10장의 설명을 유의하여 읽으시고 잘 기억하시기를 당부합니다.
자격도 없고, 공로도 없는 자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으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 (롬 10:11~13)
그런데 말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나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신 하나님이
실제로는 유대인에게는 성경도 주시고 선지자도 보내주시고서는
이방인들에게는 성경도 안 주시고 선지자도 안 보내주시고~
그리고는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차별이 없다~라고 하시면
이것이 공평한 것인가요? 이것이 정말 차별이 없는 것인가요?
들어본적이 없는 이름을 어떻게 부를수 있단 말입니까?
전하는 사람이 없이 어찌 들을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누군가 보내지 않으신다면 어찌 하나님이 공평한 분이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롬 10:14~15)
하나님은 먼저 믿어 구원을 얻은 우리를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버리움을 당한 것은 우상숭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열방의 복이 되라고 자격도 없고 공로도 없는 그들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불러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롬 10:2)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롬 10:10)
하나님이 참 감람나무 가지인 이스라엘도 불순종함으로 잘라 버리셨거늘
접붙인바된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내버려두시겠습니까? (롬 11:16~21)
(요약) 구원은 행위에서 난것이 아니라 은혜로 얻은 것이며
그 값없이 주시는 은혜는 예수그리스도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고 누구든지 에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지 못하고 어찌 예수의 이름을 부를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먼저 믿은 우리를 전하는 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11절) 그러므로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복음의 반포자, 복음의 사도, 복음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복음을 전하는 자~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복음이 없는 곳으로 가겠죠~
그럼 그들은 복음을 순순히 듣고 받아들이겠습니까?
복음이 가야할 곳은 어둡고 악한 영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어찌 사탄이 자기백성들을 순순히 내어놓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치열한 영적전쟁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의 발을 묶어버리기 위하여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로마황제를 격동시켜 그를 사슬에 묶어 옥에 가두고
믿는 자들을 검투사의 칼에, 사자의 밥으로 던져주었습니다.
그와 같이 순종하는 자의 앞에는 검은 구름과 번개와 우뢰와 우박이 떨어지고 불이 쏟아질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두려워 뒤로 물러설 것이요
물가운데서도 불가운데서도 빽빽한 구름가운데서도 주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을 믿는 사람은
그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출 20:18~22)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주님이 마지막 우리에게 당부하신 것과 같이 사도바울은 다시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들아 너는 바른말을 지켜라
너는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켜라
바른 말~ 부탁한 아름다운 것~ 무엇입니까?
예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입니까?
예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입니까?
우리를 복음의 반포자, 복음의 사도, 복음을 가르치는 교사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죽음을 앞둔 사도바울이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부탁하시는 말씀입니다.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16】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17】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18】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마지막 때에도 부겔로와 허모게네~ 처럼 수많은 자들이 주님의 부탁하신 것을 버리고 믿음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때까지 주님의 부탁하신 아름다운 것을 지켜 행하는 자들
곧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고난속으로 들어가는 오네시보로~와 같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구원이 3가지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첫번째는 거듭남의 구원입니다.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난 생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태어난 그 생명이 숨도 쉬지 않고 젖도 빨지 않고 자라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생명입니까? 생명일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죽은 것~입니다.
두번째 자라나는 구원 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루어나가야 할 진행형의 구원이 있습니다.
태어난 생명이 자라지 않으면 죽은 것이 되니까요~
세번째 완성되는 구원 이 있습니다.
오늘 딤후 1:18 에서 사도바울은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오네시보로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는 거듭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옥에 갇혀있는 사도바울을 면회와서 돌보아준 사람입니다.
이때에는 로마황제의 명으로 기독교인을 박해할때입니다.
사도바울을 면회한다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도바울은 그가 구원받았다~라고 하지 않고 마지막 그날에 그가 주님의 긍휼을 입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대구에서 서울을 간다고 합시다.
대구에서 서울 가는 차를 올라탔습니다. 거듭납의 구원 (즉각적인 구원) 입니다.
그런데 서울 가는 차에는 올라탔는데 왜관쯤 가던 차가 길이 막혀서 멈춰 버렸습니다.
서울에 가는 차를 탔다고 서울에 다 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자라남의 구원 (점진적인 구원) 입니다.
서울가는 차에도 탔고 쭉쭉 잘 진행해서 서울 문턱인 수원까지 잘 왔습니다.
그런데 수원에서 차가 퍼져버렸습니다.
서울문턱까지 간 것이 서울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완성되는 구원 입니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들이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막 태어난 생명들이 자라지 못하고 무덤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태어나서 잘 자라던 생명들이 20,30 에 요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 생명도 동일합니다.
마지막 주님오실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눅 18:8)
생명의 약속을 거짓없이 믿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십시오.
주님이 부탁하신 그 아름다운 일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지키십시오.
첫댓글 성경 정독반에서 날마다 말씀을 새롭게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하여 1990년대 초에 발간된 박영선 목사님(서울남포교회)의 "구원 그 즉각성과 점진성" 이란 책을 권합니다. 지금도 나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도서관에서라도 한번 찾아보시면 도움이 많이 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