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계 문학관(玉溪 文學館)
조 철 형
고향의 문학지 ‘강릉가는길’ 출판 기념회 장소를 물색하던 중 한국여성수련원 추천이 있어, 시간이 나면 한 번 방문하기로 했다. 우선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강릉시 옥계면 금진 솔밭길에 위치한 여성가족부 산하 수련원이었다. 강릉 바우길의 헌화로 구간, 해변과 솔밭의 경관이 수려하다고 소개되었다.
정동진 증조부 산소를 벌초하거나 금진항 식염수탕을 자주 찾았을 적에, 근처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처마 밑에서 파랑새를 찾은 기분이었다. 푸른 파도의 포말을 타는 갈매기의 모습이 아련했다.
5월 5일이 아버님 기일이라 고향집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그날 저녁 강릉사랑 문인회 전임 회장의 전화가 왔다. 다음날 오전에 한국여성 수련원을 함께 방문하자는 연락이었다. 내가 응당 해야할 일인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안인 포구부터 금진 포구는 가자미가 풍성한 곳이다. 가자미 세꼬시 생각을 하니 군침이 돌았다.
오랜만에 정동진을 지나 금진 솔밭길로 접어드니 전형적인 해변 마을이 정겹다. 적송은 학이 앉았던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확 트인 백사장 너머로 파도가 넘실거린다. 시원한 숲을 이루는 경내로 완전 별장 같은 분위기다. 도로명이 금진 솔밭길, 이름 그대로다. 산책로에 벤치에는 사람들이 솔향을 즐기고 있다.
차에서 내리자 가슴에 서기가 내리는 듯했다. 상서로운 기가 건물 주위에 가득함을 단번에 느낄 수가 있었다. 솔 순이 자라며 하늘을 향해 솔향을 토한다. 해풍에 송홧가루가 날릴 때는 어지간했을 듯싶다.
사무실에 들러 방문 사유를 말했더니 강의실과 숙소, 식당, 북스데이 등을 안내해 주었다. 내 눈을 끄는 곳은 북스데이 코너였다. 솔밭 사이로 보이는 백사장 너머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서재이다. 창 밑에 진열된 서적들이 나를 응시한다.
여기에 강릉가는길 문학관 둥지를 틀어, 저마다 고히 간직한 소설과 수필, 시와 시조, 동시와 동화 등 장르별 작품을 비치한다면, 서로 마주보며 추억의 동심으로 돌아가 동요를 부르고 동시를 낭송할 것이다. 청운의 기백이 넘치는 청춘과 낭만을 노래하면, 주위 소나무에게도 학들이 날아들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독서를 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푸른 나무를 심어주고 싶었다. 솔향과 문향이 어우러진 옥계 문학관! 문득 ‘노인과 바다’의 저자 헤밍웨이가 찾아와 창을 노크하는 듯한 환상에 잠겼다.
시설 관람을 끝내고 원장님을 뵙기를 청했더니 정원에 계시다며 잠시 기다리란다. 한참 후에 고운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와서 장갑을 벗고 손을 씻는다. 잡초를 뽑다 들어오신 원장님이셨다. 토요일 퇴근을 미루고 잔디밭의 민들레를 뽑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런 정성이면 수련원 위상이 앞으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강릉가는길’ 문학지 출판기념회 개최를 위해 방문하여, 서재를 둘러본 소감을 말했더니 강릉의 문인 단체임을 알고 환대했다. 원장님은 강릉사랑문인회와 자매결연을 하여 작품집을 서재에 비치하자는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고, 출판기념일에 자매결연 MOU 체결을 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맑은 영혼이 깃든 서적들이 공간을 채울 것이니 가슴이 벅찼다.
소나무 숲속 산책로는 솔향이 물씬하다. 거기다 갈매기가 날으는 바다가 보이는 서재에서 책을 읽고, 친지에게 손편지를 쓴다면 얼마나 정다운 정경일까? 기쁜 마음에 호흡을 가다듬고 카톡방에 자매결연 소식을 올렸다.
귀가하자마자 서실에 들러, 수련원에서 느낀 감상을 휘호로 썼다. 상서로운 기운이 집 주위에 가득하다는 ‘瑞氣滿堂서기만당’과 지극한 정성은 쉴 새가 없다는 중용의 문구 ‘至誠無息지성무식’ 휘호를 써서 드리기로 했다.
‘강릉가는길 제21집’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날, 자매 결연 MOU 체결식에서 ‘강릉가는길’과 회원들의 작품집이 전달되었고, 참석치 못한 회원들은 그간 출간했던 본인의 작품집을 우송했다.
며칠 후 수련원으로부터 강릉사랑문인회 초대 홍성암 회장님을 비롯 여러 회원님들이 기증한 도서 목록이 왔다. 짧은 시간에 역사를 이룬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내 나름대로 강릉사랑문인들의 서고를 ‘옥계 문학관’이라고 명명하고 싶었다. 한 달 후 다시 방문했을 때, 기증한 문집들이 서가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우리를 반기는 듯하더니 어서 CCTV를 설치해 달란다. 벌써 책 몇 권이 없어졌다면 베스트셀러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오히려 착한 도선생(盜先生)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판이다. 잃어버려 흐뭇해하며 채우려 하니 갑자기 성현이 된듯싶었다.
옛 화랑도가 수련하고, 신선들이 거닐었다는 명주동천(溟洲洞天)이 옥계(玉溪)가 아니던가! 절벽 위의 아름다운 꽃을 수로부인에게 드렸던 헌화로의 전설처럼, 마음의 휘호를 담은 표구 품을 원장님에게 드렸더니, 만추에 한 달간 수련원 갤러리에 강릉사랑문인회원의 무료 시화전 전시회를 뜻밖에 제의한다.
가연(佳緣)이 시작되었는가! 여독을 잊은 채 KTX로 왕복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헤밍웨이를 따라 톨스토이와 괴테도 자기 문집을 들고, 창문을 노크하는 꿈을 꾼다. “여기가 옥계 문학관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