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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종양이 사라졌다!
일본 오사카 - 야마모토가즈오(山本一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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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입신일은 1963년 2월입니다.
동기는 없었습니다. 어머님을 따라 모르는 사이에 입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집에는 늘 학회사람으로 꽉 차있었고 어린 마음으로 이런 종교를 하고 있으면 집안이 망한다...라고 생각하여 어른이 되어도 창가학회만은 관계하지 말아야지...라고 결의하곤 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는 오토바이만이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오토바이 경주선수가 되고 싶어 16세 때 가출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일을 하면 돈을 벌수 있다. 그러한 단순한 발상에 의한 가출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고 운송회사에서 더부살이로 일하고 있었는데, 필사적인 마음으로 아버지가 찾아내어 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있었어도 주변 사람들의 근심걱정은 전혀 생각지 않고 저는 매일 오토바이로 싸돌아다니며 머릿속은 온통 스즈까 오토바이 대경주 뿐이었습니다.
그러한 저도 20살때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습니다. 신혼생활의 어느 날 아내가 격식을 차려 말했습니다.
"신심하면 안되겠어요?"
저는 혼절할 뻔 했습니다. "설마 창가학회는 아니겠지!" 라고 순식간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마였습니다.
"미쳤나, 왜 신심 따위를 해야 되는 거야,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 돼! 그것보다 다음 오토바이 경주 때문에 돈이 필요해, 돈이나 마련해줘!"
그 무렵으로 부터 학회의 사람들이 판자 집인 우리 집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어느 날 끈질긴 부탁으로 드디어 저는 학회좌담회에 참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좌담회 진행중에 어느 간부님이 "내일은 야마모토씨의 남편분이 오토바이 경주에 나가신다고 합니다. 우승하실 수 있도록 모 두함께 제목회를 열어서 같이 제목을 보냅시다" 라고 말하더군요.
골치 아프겠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그 자리에서 분위기에 못 이겨 함께 만세삼창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확실히 꼴찌였고 일주일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러한 저에게도 전환기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아내의 임신소식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22살이었고 아이를 기를 자신도 없었고 교육 따위는 생각 만해도 우울했습니다.
중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았고 제멋대로 해왔던 저였기에 그러한 남편으로서의 일을 해낼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아기를 지우도록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꼭 낳아야 된다고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이때 난생처음으로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딱히 의논할 사람도 없고 해서 학회사람에게 이일에 대해서 토로했습니다.
"야마모토씨 그래서 인간혁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저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인간혁명이란 누구나 할 수 있습니까?"
“당연하죠, 인간은 모두 다 같은데 어떻게 차이가 있겠어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연마하면 되는가, 그것만 알게 되면 쉽지 않겠어요?”
이 한마디에 저도 신심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자부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무렵의 생활은 값나가는 물건들은 모두 피스톤이나 타이어 값으로 사라지고 집에 있는것은 밥그릇이나 냄비 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근행창제, 좌담회, 절복, 선배가 이야기하는 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자 ‘오토바이 장거리 대경주에 파트너가 무조건 되어 달라!’고 하는 "초신의 공덕"이 나왔습니다.
생활에 희망이 솟았습니다. 불안정하고 빠듯한 생활 속에서 문득 옛날의 우리 집이 생각났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을 우리 집에서는 하고 있었던 것이구나, 신심의 위대함을 아주 약간이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후에도 생활고나 실업, 게다가 이혼의 위기...등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이해타산도 없이 어떻게 해서든 우리들의 성장을 위하여 계속 격려해주신 학회의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 가운데 그 어려움들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10년 이상 지난 지금에서는 우리 부자가 콩나물시루 같이 지내던 단칸 판자 집으로부터, 전세이긴 하지만 1층은 남자부 협의회 장소로, 2층은 살림집으로 쓸 수 있을 정도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회사에서도 크나큰 신임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정도로 되었습니다.
남자 30대, 이제부터 드디어 인생의 스타트를 열어가자! 라고 용솟음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평상시처럼 자동차로 출근중 적신호로 멈춰, 저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지 하며 무의식적으로 차를 도로가로 정차시키는 순간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차안에서 12시간이나 지난 후였습니다.
몽롱한 상태인 채로, 필사적인 심정으로 운전하여 집에 겨우 도착하니 사장님이 걱정하여 회사에서 달려오셨습니다.
"어디 있었던 거야, 모두가 걱정해서 많이 찾아 다녔네!" 라고...
그래서 그 사정을 이야기 하려 했더니 "신심도 좋지만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 보는게 좋을 것 같네"라고 말씀하시며 사장님은 바로 저를 근처에 있는 내과병원으로 데려 갔습니다.
거기서 검사한 결과 이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의사가 그 외의 또 다른 증상이 있으면 말해보라고해서, 1년 정도 전부터 좌반신이 저리고, 수족의 관절에 통증이 온다는 것, 귀가 울리고 시력이 저하되어있다는 것과 오토바이 경주할 당시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는 것 등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한번 뇌신경외과에서 정밀검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산업재해 병원의 뇌신경외과를 소개해주었습니다.
그렇게 까지나...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만, 옆에 계시는 사장님 체면도 있고 해서 소개한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습니다.
12월 24일 검사결과를 들으러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갔을 때에도 저는 안이하게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의사선생님은 뇌의 단층사진을 가리키면서, 뇌의 우측 중간부분에 비교적 큰 뇌종양이 생겨있어 좌반신에 기능장애가 일어나고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입원하여 수술해야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아내는 창백해져 있었습니다만 저는 이병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바가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 수술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라고 물어봤습니다.
"얼굴 형태는 굉장히 변형됩니다."
"변형이라니, 얼굴이 비뚤어진다는 것입니까?"
"당신 말이죠, 얼굴과 생명,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설령 수술이 성공한다 해도 원래의 몸을 되찾기란 힘든 병입니다."
"일은 계속 할 수 있는겁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의사로서,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이 운전한다는 것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습니다!!"
처음으로 이 병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생활은 암울해지고 타성으로 활동하게 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저를 참다 보지 못해, 선배로부터 엄격한 질타가 날아왔습니다.
"당신은 왜 뇌종양이라는 그 병이 자신의 숙명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저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신심을 하는 것입니까. 인간혁명을 하여, 숙명전환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지금은 무척 괴롭지요, 고달프죠,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숙명전환의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반드시 완치될 겁니다. 완치시켜버리고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저는 힘찬 용기가 솟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4시간, 5시간, 6시간, 동이 트는 것도 잊은 채 필사적으로 제목을 불러나갔습니다.
그렇지! 저는 여태까지 절목을 하며 한분 한분의 회원님께 뭐라고 말했던가!
신심을 하면 반드시 행복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분들 앞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 수 있단 말인가!!
어렸을 때, 너의 집은 창가학회이지...라고 자주 따돌림을 당하고, 직장에서도 분하고 억울한 경우를 당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두고 보자...라고 이를 악물고 지금까지 불법을 해온 것은 무엇 때문인가!
뜨겁고 뜨거운 것이 북받쳐 왔습니다. 이기겠다. 반드시 이겨내겠다.
저를 위해서 동지 분들도 필사적으로 제목을 보내주고 계신다.
머리가 깨질 것 같고 눈이 침침해지고 혀도 굳어지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이케다 선생님의 지도를 읽고, 제목을 올리고 반드시 2월 중순까지 완쾌된다...라고 결의하며, 어본존님께 기원했습니다.
1월 29일 뇌신경외과에 입원하였습니다. 같은 병원에 있던 사람들은 '아버지, 아버지, 라고 하는 가족의 부름에 아무런 반응 없이 멍히 있는 사람, 몸은 움직이지 않는데 가족의 얼굴을 보면서 뭔가를 열심히 호소하려고 하는 사람들... 바로 지옥 그대로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 병실에서 망연자실 했습니다.
이것이 나와 똑같은 병을 수술한 후의 모습인가...라고 생각하면 살아 있다는 심정이 아니었습니다.
수술하기 위한 뇌혈관 촬영검사가 2월 8일 오후 1시로 결정되었습니다.
의사로부터 이 검사는 매우 위험한 것이고 검사 때 사용되는 약물 부작용도 아주 괴로워진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결심을 하고 진지하게 제목을 올리던 중, 우리지역의 많은 동지 분들이 검사시간에 맞춰 제목창제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꼭 이 검사로 병을 끝내겠다...라고 결의 하며 검사에 들어갔습니다.
검사가 시작되어 몇 분이 지난 그때였습니다.
엄청난 통증이 엄습했습니다. 그때의 공포는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南無妙法蓮華經, 南無妙法蓮華經, 일념부재총여의 대어본존님이 확실히 느껴올 때 그대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수 시간이 지나 의식이 회복되었을 때, 불가사의할 정도로 온몸이 상쾌해져 있었습니다. 약의 부작용도 없었고, 시원하고 상쾌해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주변의 사람들이 놀래고 있었습니다.
검사 후로부터 이틀 뒤인 2월10일 아침의 일입니다.
"야마모토씨 없습니다!! 종양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의사선생님이 갑자기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대답조차 못했습니다.
정신을 차려 "선생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저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종양이 사라진 겁니다. 정상적인 몸으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사태는 생각지도 못했던 결말을 보았습니다.
돌아갈 수 있다. 이것으로 돌아갈 수 있다. 어본존님 감사합니다.
바로 회사로 전화를 했습니다.
"사장님! 사라져 벼렸어요. 종양이 없어진 겁니다!"
"종양이 없어졌다니, 자네 완치되었는가? 정말인가? 잘되었네, 정말로 잘됐군요...야마모토씨!! 그것은 어본존님 덕분이네!!"
생각지도 못하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오랫동안 몇 번이고 불법대화를 거듭해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던 사장님이 "어본존님 덕분"이라고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제자진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동시에 어본존님의 공덕이란 이렇게나 엄청난 것인가, 라고 오로지... 오직 경탄할 뿐이었습니다.
2월 12일 기원한대로 떳떳이 퇴원, 우리 집에 돌아와 어본존님을 뵈었을 때, 넘쳐 흘러나오는 눈물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2월 13일, 안절부절 못해 하루 종일 활동을 다니고 밤에 후지와라 회관으로 갔습니다.
활동을 마친 동지들이 잇달아 들어왔습니다. 내 얼굴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 흥분하는 사람, 환희가 폭발했습니다. 이런 보잘 것 없는 저를 위해 모두가 이렇게나 기뻐해주신다. 간부회의 석상에서도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했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흥분이 온몸을 전율시켜 온몸이 흔들리기까지 했습니다.
신심하고 있어서 정말 좋았다. 마음으로부터 어본존님에 대한 감사함이 끝없이 솟아나왔습니다.
그때부터 1년, 인간의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때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홍콩지도에서 "인간은 어떤 사람이라도 행복하게 될 권리가 있다. 그리고 나날이 향상하여 성장할 의무가 있다. 나아가 어떤 사람이든 반드시 훌륭한 사명이 있다." 라고 지도해주셨습니다.
그렇다. 저는 인간으로서 더더욱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여 그것을 위해 사는 것. 이것이 진정한 행복인 것이다.
그런데 나의 사명이란 무엇인가.
지금 거리에 많은 오토바이가 달리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무엇인가를 통해 발산하는 것처럼 굉음을 내며 달리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그러한 행위를 충분히 이해하려 하지 않고 머리부터 억누르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억누르려고만 하지 말고 그들의 행위와 에너지를 받아들여주는 밑받침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리를 달리면 폭주족, 경주장을 달리면 레이서인 것입니다.
장소만 다를 뿐이지....
어떤 사람이라도 훌륭한 인재이며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는 그러한 밑받침으로써의 기관이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기관의 실현에 이바지 하고자 결심했습니다.
지난 4개월 동안 여러 일들에 도전하여 기획서를 만들고 은행이나 사업주를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습니다만, 어본존님께 기원하고 또 기원하며 저의 이러한 마음을 여기저기에 알려나갔습니다.
그 결과 드디어 현재 진심으로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상사나 사업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달리는 것에 대한 의의, 완전연소를 하는 세계,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삶의 소중함을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고, 어떤 경우의 사람이라도 참여할 수 있는 그러한 모터스포츠의 세계, 이러한 기관을 만드는 것을 저의 사명으로 결의하여 반드시 성취해 낼 것을 약속하며 저의 체험담을 마치겠습니다.
창가가족 카페에서 -
정하고, 기원하고, 움직일 것
※ 3년 전에 어떤 부인이 찾아와 “남편이 암으로 3개월밖에 살수가 없다는 선고를 받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질문하여 ...
“나을 수 있는 것은 의사에게 가면 빨리 낫는다. 그러나 의사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이제는 어본존 밖에 없다고 정한 시점부터 낫기 시작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젠 어본존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고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하고 기원했을 때, 자신이 갖고 있는 생명력으로 지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불계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약한 면이 보이면 병이 걸립니다. 그 근원은 숙업입니다. 방법(謗法)으로 염색된 생명의 마가 나타난 것입니다.
반대로 강한 면을 나타내면 병은 낫습니다. 불계입니다. 최고의 생명력을 나타내면 낫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의사도 말하기를 병에 걸린 사람 중 ‘병이 나으면 좋겠다.’ 또는 ‘낫고 싶다.’ 등 결의가 약한 사람은 낫기 어렵다고 합니다. 반대로 ‘절대 완쾌하고야 말겠다.’고 강하게 결의하면 빠른 속도로 나아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과 관계없으나 신앙도 같은 것입니다. 치유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는 낫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낫고 말겠다.’ 라고 정한 때부터 낫기 시작합니다.
만 1년 후 부부가 함께 와서 ‘병원에서 더 이상은 무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무리이기에 기원합시다. 더 할 수 없기에 기원합시다.”라고 지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원했더니 나아 버렸습니다.
무리인줄 알았지만 기원했더니 잘 듣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 작년 4월에 다른 도시에 간 적이 있습니다. 회합 후, 50세 정도의 권부부인부장이 와서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발이 아파 걷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의사에게 치료받고 있으나 낫지 않는다며 호소했습니다.
“혹시 낫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나을 리가 없다. ‘어본존님 낫지 않지요?’ 라고 기원하고 있었던 것과 똑같다. 어서에 ‘남묘호렌게쿄는 사자후와 같다. 어떤 병인들 장애가 될 것이냐!’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은가! 단지 류머티스는 제외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의사가 못 고치니 신심으로 낫게 해야지요. 낫지 않더라도 낫게 해야지요.” 라고 지도했더니 “고치겠습니다!” 하고 가셨습니다.
다음날 그 부인께서 “어제부터 아픔이 멈추었습니다.”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그리고 약 2주일 후에 “나았습니다.”
결의하고 기원하면 낫기 시작합니다. 병이 나을까가 아니고 고치겠다는 것입니다. 결의하고 강하게 기원하면 필히 좋은 방향으로 갑니다.
‘신심하니까 어떻게 되겠지!’ 라고 하는 것은 미신의 일입니다. 아무것도 안 됩니다. 기원한 만큼 결과가 나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 카와이 부회장 지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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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체험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