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후7시에 진행된 한얼무용단(단장 정해랑)제5회 정기공연 교방춤의향연이 300석의 객석을 가득 메운체 진행되어 참석한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막을 내렸다.
이날 공연은 의전무. 명지대 무용팀의 즐거운계절. 미얄할멈 과 축원무. 김진옥 교수의 교방살풀이. 교방장구춤. 교방검무와 가야금병창. 한국춤 신동으로 유명한 양정현양의 박병천류 북춤 과 11명으로 구성된 부채춤은 동양의 신비를 보여주는 극치라며 관중들은 환호 하였고. 용인농협의 30여명의 단원들로 구성된 난타 공연팀이 출연하여 공연 마지막 휘날레를 장식 하여 공연장 분위기를 한층 업 시켰다.
♣교방춤은 조선시대에는 여악 제도를 통해 고려시대 교방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조선의 여악은 태종 6년(1406)에 설치된 의녀제도(醫女制度)에서 비롯되었다. 내외법이 엄격했던 조선시대 왕실과 양가의 부녀자들은 병이나도 남의(男醫)의 진찰을 꺼려 생명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여의(女醫)의 양성이 필요했으며 각 지방의 관비 중에서 똑똑한 자를 가려 뽑아 제생원에 소속시키고 글과 의술을 가르쳤다. 이들 중 특히 용모가 빼어난 자를 선출하여 가무를 학습시키고 궁중의 각종 연회에 참여하도록 하였는데, 의녀는 바로 고려시대 관기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기녀의 교육 과정은 매우 엄격하여 15세에 기안(妓案)에 올라 가무를 학습하였으며 재주가 출중하면 서화도 익혔다. 일류 기생이 되려면 사범들에게 호된 기합을 받으며 어려운 전수 과정을 감수해야만 했고 이러한 교육 과정을 거쳐 각 지방 관아에 배치되면 기생의 우두머리격인 수행 기생에게 복종해야 했다.
조선시대 여악의 존속에 대한 찬반론은 계속 제기되었으나 한말까지 여악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연산군대에는 기녀의 전성기였는데 이 때 각 지방에서 뽑아온 기녀수가 1천여 명에 달했고, 운평, 가평, 흥청이라는 이름이 주어지는 등 기녀 사회에 등급이 부여되었다. 이에 따라 일정액의 봉족이 지급되기도 하였다.
한말 기녀는 일패,이패,삼패 등 등급을 매겨 구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몰락으로 교방청은 폐지되고 관기들은 서울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으로 흩어지고 권번(券番)이나 기생조합(妓生組合)을 조직하여 부자들의 생일잔치나 회갑연에 불려가 가무함으로써 주연(酒宴)에 추어진 예술적인 사랑채춤이 된 것이라 보아진다.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에 따르면 1900년 초에 서울에는 한성 권번을 위시하여 대정 권번, 한남 권번, 경화 권번 등이 있었고 전국 각지에 소규모의 기생 조합이 있었는데 기녀의 수는 서울이 2백 명으로 가장 많았고, 평양이 156명이었으며, 대구에 120명이 있었다.
그런데 기방 무용의 종류는 서울의 경우 정재는 42종류로 나와 있으며 그 밖에 승무,검무,입무,남무 등이 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승무,검무,입춤,남무,남중속무(지금의 살풀이춤)등은 추었으나 정재는 추지않은 경우가 많았다.
교방춤의 종류는 살풀이춤(수건춤 또는 입춤)을 비롯하여 승무, 검무, 태평무, 남무, 한량춤, 승전무와 같은것 남아 있는데 이러한 춤은 비록 양반들의 주석(酒席)에서 춘 것이지만 그 춤은 예술적으로 다듬어져 있었으므로 공연 예술로도 훌륭한 춤들이었다.
이 춤들은 교방청에서 다듬어졌지만 예술적으로 발전한 것은 교방이 폐지된 후의 기방(妓房)이었으므로 이른바 판소리, 가야금 산조, 삼현육각과 같이 개인적 멋과 기예능이 높은 수준에 있는 춤이라 할 수 있다.
출처<용인뉴스>
첫댓글 단장님 수고 많이 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