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맛① 소 설 하창수 소설가·번역가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기까지 중학교에 입학해 처음 영어를 배우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열세 살짜리 소년의 뇌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서로 말이 다른데 어떻게 같은 뜻으로 옮겨놓을 수 있을까?”라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외국어란 걸 처음 겪은 소년으로서는 매우 진지하면서도 당연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겪은 혼란은 만만치가 않아서 한동안은 흉몽도 꾸고, 모든 것을 의심하는 괴상한 버릇이 생겨나기도 했었다. 가령, “I go to school in the morning.”이 “나는 아침에 학교로 간다.”로 옮겨지는 이유가 납득되지 않았고, 그렇게 옮긴 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옮겼다고 할 수 있는지를 의심했다. I, go, school, morning이 나, 가다, 학교, 아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의심스러웠고, 그런 단어들을 끌어다 모아놓은 “I go to school in the morning.”이 “너는 저녁에 외할머니 집에서 돌아온다.”라는 뜻이 아니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이런 식의 의문이나 혼란은 ‘언어’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의문이며 혼란이다. 대륙 동쪽의 어느 지역에서 부르는 ‘오른손·왼손’이 대륙 서쪽의 어느 지역에서는 ‘right hand·left hand’라고 부른다는 일대일 대응현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나는 이 이상한 현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납득이 될 때까지 영어선생님을 물고 늘어졌지만, 결국 “잔말 말고 그냥 외워!”에 굴복당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의 완강한 주장에 내가 굴복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해주셨을 선생님의 친절하고 인내심 강한 설명을 내가 알아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내 기억창고 속 선반 위에 그때 처음 내 귓속으로 빨려들었던 ‘문화적 차이’라는 거창한 개념이 또렷한 명패처럼 놓여 있기 때문이다. 반고의 초상화와 《한서(漢書)》. 소설은 소설이 아니다 “언어는 문화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오래 전 열세 살 소년의 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주범이 숨어 있다. 범인을 한번 추적해보자. 오늘 이 범인의 이름은 ‘소설’이다. 소설 - 아무리 책만 손에 들면 잠부터 쏟아지는 사람이라도 살면서 몇 권 정도는 읽어봤을 매우 대중적인 이 장르는 동서양의 개념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나는 어제 소설을 읽었다.”라는 말을 서양사람에게 해줄 때 우리가 생각하는 ‘소설’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영단어를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얼핏 떠오르는 몇 개의 영어단어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적당히 골라 쓰면 되지 않는가 싶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은 이유가 있다. 차근차근 짚어보자. 한자문화권에서 소설은 ‘작고 소소한 이야기’를 뜻하는 한자어 ‘小說’ 하나밖에 없다. 일본에서는 이야기·전설이란 뜻을 가진 ‘物語(물어:ものがたり)’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한·중·일 세 나라에서 ‘소설’은 헛갈릴 것도 없고 달리 대체할 말도 없다. 동양에서 ‘소설’은 출처가 분명하다. 저 아득한 중국 후한 시절, 역사가 반고(班固:32~92)가 지은 《한서(漢書)》라는 역사서의 한 꼭지인 <예문지(藝文志)>에 소설이란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소설류에 속하는 것들은 대개 패관(稗官)의 손에서 나왔으며, 그것은 가담항어(街談巷語)와 도청도설(道聽塗說)로써 만들어진 것이다.”1) 여기서 가담항어와 도청도설은 모두 거리에 떠도는 소문을 가리키고, 그런 소문들을 그러모아 기록하는 일을 수행한 벼슬자리를 패관이라 불렀다. 이쯤 되면 ‘소설’이 왜 ‘작고 소소한 이야기’란 뜻의 ‘小說’인지 분명해진다. 동양에서 소설은 처음 이름이 붙여진 때로부터 거의 2천 년 동안 그저 “저자거리의 뜬소문에 불과한 작고 하찮은 이야기”였다. 이제현 《역옹패설(櫟翁稗說)》 표지와 내지 일부.<사진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양에서 문학으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은 건 시(詩)였다. 이때 시는 한시(漢詩)를 가리킨다. 시는 글자 수도 다섯 자나 일곱 자로 제한되고 운율도 반드시 지키도록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 선비로서 반드시 익혀야 할 분야였다. 그리고 어느 자리에서든 자연의 풍경이나 자신의 마음을 시로 표현해낼 수 있어야 선비로서 품격을 가질 수 있었다. 더구나 오늘날 공무원시험에 해당하는 과거(科擧)를 통과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시를 지어낼 수 있어야 했다. 오늘날과는 달리 예전의 문학은 곧 시였고, 소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고려말에 패관문학(稗官文學)이 유행했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데, 박인량(朴寅亮)의 《수이전(殊異傳)》이나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같은 작품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그래봐야 패관문학이란 민간에 떠도는 설화에 바탕을 둔 ‘전설의 고향’식 야담에 불과했고, 시가 받은 융숭한 대접을 바라는 건 우물에서 숭늉 찾기였다. 서양에서 소설의 사정은 동양과는 확연히 달랐다. 미리 귀띔을 좀 하면, 오늘날 문학을 대표하는 장르인 ‘소설’은 온전히 서양에서 들어온 개념이다. 노벨문학상-메달과 2018‧2019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올가 토카르추크, 페터 한트케.<사진출처: 노벨위원회 트위터> 장편소설, 소설의 진면 동양에서 통용되는 ‘작고 소소한 이야기’라는 뜻의 ‘소설’이란 이름은 서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길이가 아주 짧은 콩트(conte)도 “인생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한 유머·풍자·기지를 담은 소설”로 위상이 만만치 않았다. 콩트보다는 길지만 분량이 짧은 소설을 흔히 가리키는 단편소설은 ‘short story’다. 참 멋대가리 없는 이름이다. 그러면 길이가 긴 장편소설은 ‘long story’일까? 미안하지만 아니다. 영어로 long story라고 하면 그냥 지루하고 세세하게 늘어놓은 이야기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예컨대, 누군가에게 어떤 사연을 자세하게 털어놓기가 거북할 때 흔히 쓰는 “얘기하자면 길어.”라는 걸 영어로 하면 “It's a long story.”가 된다. 그렇다면 장편소설은 영어로 뭘까? 우리가 소설이라고 하면 맨 먼저 떠올리는 단어 ‘novel’이 바로 장편소설이다. 따라서 소설가를 뜻하는 ‘novelist’는 정확히는 “장편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서양에서는 장편소설을 써야만 비로소 소설가로 대접을 해주는 것이다. 단편소설만 쓰거나 단편소설을 주로 발표하는 작가는 ‘short story writer’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서양에서 소설가의 위상은 장편소설에 의해 결정된다. 얼마나 좋은 장편소설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 - 여기에 소설가의 명망이 좌우되는 것이다. 키플링 장편 <정글북> 원서와 키플링 장편 <킴>-하창수 역(譯). 어니스트 헤밍웨이.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시인이나 극작가를 제외하고 소설가로서 이 상을 받은 사람은 거의 모두 장편소설 작가, 즉 ‘novelist’다. 러디어드 키플링, 토마스 만, 펄 벅,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알베르 카뮈, 가와바타 야스나리…… 뛰어난 단편소설도 가지고 있긴 하지만 하나같이 걸작 장편소설의 주인들이다. 100년이 넘는 역사에서 단편소설 작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은 2013년 엘리슨 먼로(Alice Munro:캐나다)가 거의 유일하다. 엘리슨 먼로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며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이유도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Master of the contemporary short story)”이었다. 박경리 <토지> 영문판.<사진출처: 한국문학번역원> 그런데 우리나라의 권위 있는 문학상 가운데 소설에 주어지는 상들은 거의 대부분 그해 발표된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한다. 기이한 일이다. 과장을 좀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novelist’보다 ‘short story writer’의 위상이 더 높은 셈이다. 문학상이 수여되면 어김없이 수상작과 후보작을 묶은 수상작품집이 발간되고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된다. 문학 독자들을 형성하는 데는 단단히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지만, 단편소설에만 과도하게 집중된 이 현상은 결국 장편소설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로 인해 한국 소설문학의 덩치가 왜소해져버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박완서의 <미망>,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김성동의 <만다라>…… 선 굵은 장편소설들이 ‘소설의 시대’를 형성했던 1980년대를 돌아보면 새삼스러워진다. 그 이전의, 채만식의 <탁류>, 현진건의 <적도>,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 심훈의 <상록수>, 김남천의 <대하>…… 우리의 현대문학이 시작된 일제강점기부터 도도하게 이어져온 소설의 전통에도 가장 앞에는 장편소설이 놓여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신인의 등용문인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신인문학상에서 다루어지는 단편소설이 수십 년씩 소설가로 살아온 사람들의 문학적 능력을 가늠하는 데까지 쓰이는 건 뭔가 교정이 필요한 일이다. 소설의 본연인 장편소설이 소설 문학의 앞자리로 다시 나와야 할 것이다. 소설, 세상에는 없던 온갖 이야기들 “소설 쓰지 마세요.” 청문회나 국정감사장 같은 데서 국회의원들이 증인에게 두 눈 부릅뜨고 냅다 지르는 소리에 불경스럽게도 ‘소설’이 들어 있다. 이때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를 뜻하고, 영어로는 ‘fiction’이다.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편, 흔히 ‘과학소설’이라고 부르는 SF(science fiction)에도 들어있는 그 ‘fiction’이다. ‘픽션’은 길이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이야기를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소설’이고, 이 반대 개념이 지어낸 얘기가 아닌 실재하는 이야기를 가리키는 ‘논픽션(non-fiction)’이다. 소설을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로 규정하고 여기서 ‘새로운’에 방점을 찍었을 때 생겨나는 말이 바로 장편소설을 가리키는 ‘novel’이다. 이 단어에서 파생한 ‘novelty’는 ‘새로움·진기함’을 뜻한다. 사실 이 개념은 소설을 뜻하는 프랑스어 ‘nouveau(누보)’에 어원을 둔다. 1950년대에 등장한 프랑스 소설의 한 유형으로, 기존의 소설 형식이나 관습을 부정한 새로운 기법의 실험적 소설을 ‘nouveau roman(누보로망=신소설)’이라 한다는 것도 머릿속에 입력해놓기 바란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roman’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유럽 문화의 원류인 고대 로마를 뜻하는 ‘roman(로망)’은 중세 프랑스에서 생겨난 운문체 소설을 가리키는데, 그 자체로 ‘이야기’나 ‘장편소설’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말에서 사랑의 감정이나 그런 감정이 얽힌 이야기를 뜻하는 ‘romance(로맨스)’가 생겨났다. 소설과 거짓말의 너무도 큰 차이 소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소설가에 의해 지어진 이야기가 맞다. ‘지어낸 이야기’에만 주목하게 되면 ‘소설은 거짓말’이라는 이상한 등식이 생겨난다. 실제로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소설을 거짓말과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한다.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장에 소환된 증인들에게 툭하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 때 등장하는 ‘소설’은 곧 ‘거짓말’이다. “소설 쓰지 말아요.”는 “거짓말하지 말아요.”인 것이다. 소설을 거짓말과 동일시하는 건 완전히 잘못된 일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 “소설 쓰지 말아요.”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차고도 넘치지만, 지면상 딱 네 가지만 얘기하자. 먼저, 거짓말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이 하는 얘기가 거짓말이란 것을 철저히 숨긴다. 그러나 소설가는 자신이 쓴 소설이 사실이라고 주장할 필요조차 없다. 처음부터 사실을 전제하고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읽는 사람 또한 소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이 받는 감동에 손상을 입지 않는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픽션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을뿐더러, 숨기는 식의 제스처를 쓸 이유가 없다. 그러니 “소설 쓰고 있네”라는 표현은 상대의 거짓말을 문학적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우매한 짓이다. 그리고 소설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존재의 의미를 파헤치는 철학적 변론들과 맞닿는다. 흑사병이라는 팬더믹을 피해 회당으로 숨어든 자들의 감추어지지 않는 욕망을 드러낸 <데카메론>이나, 살짝 정신줄을 놓친 사내가 벌이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진지한 해프닝을 그린 <돈키호테>를, 어떻게 유치하고 저열한 농간으로 범벅이 된 거짓말과 견줄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소설가는 소설을 써서 원고료라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는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자는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숨김으로써 정당하지 못한 대가를 챙긴다. 원고료는 만천하에 공개되어 있고 매우 일정하지만, 거짓말로 챙기는 대가는 공개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액수를 가늠할 수도 없다. 마지막으로,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 명성을 얻고, 거짓말쟁이는 거짓말을 통해 악명을 높인다. 이건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소설’이란 말을 함부로 잘못 쓰는 사람들 중에 유난히 국회의원들이 많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자신은 호통을 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쟁이의 거짓말을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어이없고 볼썽사납고 우스꽝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 1) 小說家者流, 蓋出於稗官, 街談巷語, 道聽塗說者之所造也. --------------------------------------------------------------------------------------- 하창수 소설가이자 번역가. 198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청산유감」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1991년 장편소설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로 한국일보문학상, 2017년 단편 「철길 위의 소설가」로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중단편집 『지금부터 시작인 이야기』, 『수선화를 꺾다』, 『서른 개의 문을 지나온 사람』, 『달의 연대기』, 장편소설 『젊은 날은 없다』, 『죽음과 사랑』, 『허무총』, 『그들의 나라』, 『함정』, 『1987』, 『봄을 잃다』, 『천국에서 돌아오다』, 『미로』, 『사랑을 그리다』 등을 출간했다. H.G 웰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스콧 피츠제럴드, 러디어드 키플링, 헨리 제임스 등 주요 영미작가의 소설과 『어떤 행복』, 『과학의 망상』, 『바람 속으로』, 『명상의 기쁨』 『오늘부터 다르게 살기로 했다』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