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주신 재능으로
김 성 덕
나는 1949년 11월 28일에 경상남도 거제시 둔덕면 학산리 604번지에서 태어 났다. 내가 3살쯤에는 경남 진해시 이동에서 살다가 5살쯤에는 속천동으로 이사를 와서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다. 나의 아버지는 무골호인이라고 할 만큼 말이 없고 잘 생긴 분이고 어머니는 여걸이라고 할 만큼 덩치도 크고 소리도 쩌렁쩌렁한 분이시다. 나의 위로, 누나가 두 분이고 아래로 여동생 세 명, 남동생 2명 모두 팔남매인 다복한 가정이었다.
나의 가정은 원래 불교집안이었다. 말이 불교집안이지 샤머니즘이랄까?(절에 다니는 것은 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어렸을 때 말을 조리있게 잘 하지 못했다. 조금 더듬거렸다고나 할까? 하루는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교회에 다니면 벙어리도 말을 한다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더러 교회에 나가보라고 농담조로 얘기하셨다. 고1때 우리 학교 선배가 나의 친구와 함께 교회에 나가자고 권유하였다. 그래서 그 선배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나는 친구와 함께 교회를 다니면서 인생의 진리를 배우고 깨달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다녔다. 친구는 교회에 다니다가 그만 두게 되었고 나혼자만 다니게 되었다. 1965년 고1 하반기에는 학생회 지육부 차장을 맡게 되었다. 주보를 편집하고 직접 등사를 하는 것이었는데 재미도 있고 열심히 일을 했더니 고2때 회장을 맡게 되었다. 일요일에는 거룩한 안식일이라 공부를 하지 않고 오로지 교회에 다니고 학생회 성가대에도 열심히 연습하며 찬송을 불렀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명절이 되면 제사상의 음식도 먹지 않고 절도 하지 않는다고 야단이 났다. 하지만 나는 장남으로서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앞으로 우리가 죽게 되면 장남에게 제사밥 얻어 먹기는 틀렸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하시는 말씀이 장남 따라 가려면 우리도 예수 믿자고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금은 안되고(친척들의 눈치때문) 내가 퇴직을 하고 난 후에야 교회에 나가자고 말씀하셨다. 나는 기회가 이 때라고 생각하고 아버지께 교회 나간다는 약속으로 서약서를 쓰자고 졸랐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나보고 직접 쓰라고 하셨다. 즉시 종이를 준비하고 교회 나간다는 서약서를 내가 직접 쓰고 맨 끝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도장을 찍으시라고 권했더니 손도장을 찍으셨다.
그 후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아버지께서 퇴직을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남부교회의 관리집사님에게 연락을 취하여 우리 집으로 심방을 권했더니 그 날 가정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나가기로 하고 온 가족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가 전도하여 우리 가족이 모두 예수 믿게 되었다. 나중에 나의 아내와 맞선을 볼 때 장인 장모님에게 점수를 가장 많이 받게 된 원인과 이유가 여기에 있었고 결혼하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만해도 대학진학은 해군사관학교였는데, 친구의 말을 듣고 진로를 바꾸어 부산교육대학에 들어가기로 했다. 부산교육대학에 들어가기 전 입학 시험에 피아노 연주 과목이 있었다. 나는 애석하게도 그 날 피아노에 손을 대지 못했지만 시험에는 합격이 되었다. 입학하기 전의 한 달간은 고향에서 쉬게 되었는데 도저히 피아노를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일선에서 어린이들을 지도할 때 곤란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쉬는 한 달 동안 고향(경남 진해)의 교회 피아노 반주자 선생님에게 배워서 꾸준히 연습을 하였으나 진도는 만족할 만큼 빠르지는 못했다. 대학(부산교육대학)에 들어가자 나는 혼자서 매일 기악실에서 오르간(풍금)과 씨름을 해야만 했다.(그 당시 기악실에는 오르간이 많지만, 피아노는 2대뿐이어서 항상 동작이 재빠르지 못한 학생은 피아노를 차지하지 못했다) 어떤 때는 새벽 일찍 기악실에 가서 피아노를 차지하려고 하면 이미 다른 학생들이 앉아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방과 후 다른 학생들은 다방에 간다느니, 미팅을 한다느니, 스포츠를 즐기느니 떠들썩하지만 그런 곳에는 아랑곳 없이 나는 음악에만 몰두했다. 학교에서 시간이 남으면 틈나는대로 교회에 찾아가서 찬송가를 펴놓고 오르간을 치며 4부로 된 찬송가곡을 치려고 무척 애를 썼다. 처음에는 도저히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겨우 <바이엘 교본> 피아노 연습하는 실력으로 어찌 4부로 된 곡을 칠 수 있다고 했는지 웃음이 나온다.
어쨌든 기본 3화음(I, IV, V)만을 갖고서 오른손으론 멜로디를, 왼손으로 화음을 짚어가면서 쉬운 조로부터 어려운 조까지 단계를 높여가며 차근차근 익혀갔다. 솜씨가 모자라는 실력으로 예배시간에 가끔 오르간 반주를 하기도 했고, 성가대의 대원이 되어 노래도 부르며 지휘도 하게 되었다. 특히 주일학교 교사로서 아동들을 지도하며 노래를 율동으로 표현해 보기도 하였다. 전문가들이 볼 때는 햇병아리가 연주를 제법 한다고 보았으리라. 그러나 나는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나의 신앙과 음악에의 집착은 서로 정비례되어 갔다.
그 당시 부산교육대학 부근에 베다디교회가 있었다. 베다니교회에는 개척교회라서 목사님 혼자서 목회를 하고 계셨고 주일학교를 이끌고 나갈 사람이 없었다. 성가대도 없었다. 그래서 용감하게 내가 맡아서 북 치고 장구 치다시피 열심을 다하였는데 여름방학이 되자 울릉도에 봉사활동을 하게 된다고 하여 3일간은 태하장로교회, 3일간은 천부장로교회에 가서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를 열게 되었다. 거기서도 나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되었는데, 포스터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는 것에서부터 설교, 동화, 노래지도, 율동까지 다양하게 가르쳤다.
부산교대에 다니는 동안 특별활동반에는 음악반이 있었지만 영어반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되었고 동아리에는 Muse반이 있었는데 거기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거기서 인정을 받아 1학년 봄소풍에 4명으로 구성된 중창단의 테너파트로 멋지게 노래하게 되고 교내합창경연대회에 우리 반에서 합창지도를 맡게 되고 솔리스트를 하게 되었다. 오페라 <카르멘>의 합창단에 가서 활동하며 <쉴 하쉴림 코랄>에 테너 파트에서 합창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게 되면서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1970년 5월 1일자 초임지는 괴정동에 있는 사하초등학교였다. 3학년을 맡게 되어 그 해 12월에는 음악연구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참새>라는 단원을 택하고 기악합주를 하는 수업이었다. 노래 부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악기로 기악합주도 하였다. 수업하기 전 한 달간 준비하며 연습한 결과가 연구수업에 반영되었는데 수업이라기 보다는 음악회였다.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참관하신 선생님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그 일로 인정 받아 이듬 해(1971년) 1학년을 맡게 되었다.(1학년은 신규발령을 받은 교사는 잘 맡기지 않고 경력이 많은 교사들을 주로 맡김) 1학년 입학생들은 처음 한 달 간 운동장에서 율동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풍금을 쳤다. 5월에는 음악연구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또 노래도 부르고 기악합주하는 수업을 하게 되었다. 단원은 <무엇이 무엇이 똑 같은가>라는 곡이었고 그 날 피아노를 잘 치는 꼬마 어린이 노은미가 맡았는데 풍금을 너무 잘 쳐서 칭찬을 들었고 수업도 잘 해서 다른 반 선생님들도 내가 수업했던 기악합주 큰 악보(반짝이 종이를 오려서 악기모양을 붙였기 때문에 화려함)를 돌려가면서 수업을 하기도 했다.
1971년에는 새마을운동이 활발한 해였다. 그래서 학교마다 어머니들이 주축을 이루는 새마을교실이라는 모임이 조직되고 어머니합창단이 생겨나게 되어 내가 지휘를 하게 되었다. 대회에 나가서 입상은 못했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고적대도 조직이 되어 지도교사로도 활약하게 되었다. 나 혼자 학교 도서관에 있는 피아노에 가서 소나타앨범과 체르니연습곡 및 피아노 명곡집을 열심히 연습하여 제법 수준이 있는 곡들을 치게 되어 심지어는 동료 여직원의 결혼식에는 내가 웨딩마아치를 치게 되고 권상선 여교장선생님의 아들 결혼식에도 웨딩마아치를 부탁 받게 되어 연주를 하였다. 아직도 총각시절이어서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대담하게 용기를 내어 했지만 지금 그렇게 하라고 하면 그런 용기는 나지 않는다.
1972년 어느 날 베다니교회에 시무하시던 목사님이 영도중앙감리교회로 부임하게 되어 나를 불러 오라고 하셨다. 그 교회에는 일꾼들이 없어서 나를 보고 교회 일을 봉사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빈 사택이 많아서 토요일에는 사택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목사님 댁에서 아침 밥을 먹고 9시에 주일학교를 혼자서 인도하고 11시 예배 때는 성가대를 지휘하고 예배 마치고 목사님 댁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2시에 중고등부 모임에 설교하고 인도하며 오후 5시에는 주일학교 오후예배를 인도하였다. 저녁 예배 드리고 하숙집에 가면 오후10시쯤 되었다. 교회 전도사 역할을 한 셈이었다.
1974년 3월 22일에는 서울 KBS TV <우리들의 새 노래> 프로에 작곡을 응모하여 대상을 받게 된 날이다. 곡목은 <바닷가에서>인데 같은 학교에 근무하시는 정진채선생님이 자기가 지은 시를 보이면서 곡을 붙여서 작품을 응모해보자고 하셨다. 그 시를 읊조리는 가운데 삽시간에 지은 곡이 당선되어 상을 받게 된 것이었다. 정말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 날 사회는 김상희, 노래는 문정선, 심사평에 시는 박화목, 노래는 박용구 씨가 맡았는데 시와 곡이 너무 맑고 깔끔해서 어린이가 작사 작곡한 것 같다고 극찬해 주셨다. 그 곡이 너무 좋아서인지 전국 방송을 타고 나가 약 600여통의 우편엽서가 앙코르로 다시 일주일 후에 노래 불렀다. 대단하였다.
1974년에는 내 생애에 있어서 굉장한 해였는데 그 당시 중등학교 음악교사자격증을 받은 일이었다. 그 당시 교사들이 부족해서 정식으로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국가검정고시를 치러 합격되면 자격증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그 앞 해에 한 번 시험을 치룬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어려웠다. 오전에 2시간 동안 필기 시험, 오후에 2시간 동안 필기 시험을 치뤘는데 국가고시라서 그런지 음악 전반에 걸쳐 주관식 문제로 치루어졌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래서 온갖 시험을 위한 준비로 서울에서 발행한 시험대비 교재를 받아 보면서 철저하게 준비를 하여 이듬 해 다시 시험을 쳤는데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하였다. 2차 시험은 실기 시험이었는데 시창, 청음, 피아노 연주(소나타의 빠른 악장 한 악장을 암보로 연주), 한국가곡 중 그 날 지정한 곡 1곡을 피아노 반주와 함께 노래 부르기였다. 필기 시험뿐만 아니라 실기 시험도 만만치 않았다. 피아노는 평소에 연습을 하고 있었으나 한 악장을 외어 친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마침 연명희 씨(현재는 음악목사)가 이상근 교수님에게 2차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준비를 함께 하자며 고맙게도 준비를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2차 시험은 숙명여대(윤양석교수님)에 가서 시험을 치게 되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합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당시 문교부장관(지금의 교육과학기술부장관) 직인이 찍힌 중등학교 교사자격증을 받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초등학교 동료직원 김원생선생님의 권유로 준비하게 되어서이다. 사하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 내가 그 분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을 때 저의 재능을 인정하시면서 초등학교에 계속 있지말고 중등학교 검정고시제도가 있으니 시험 준비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정말 고마운 분이었다. 그 분 덕택으로 기악곡 작곡을 할 때 바이올린 파트를 쉽게 작곡할 수 있었다.
내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그 때는 단지 인생의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중학교때까지는 반에서 성적이 중간쯤이었는데 고1때는 머리가 트이기 시작해서 우등상을 받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이 머리를 트이게 하신 것 같다. 고2때 학생회 임원을 맡고 회장까지 되어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해미문화원에서 주최하는 영어실력대회에 학교대표로 나가 장려상을 받게 되었다.(경남지역에 있는 고등학교 대표들이 참가했고 진해고등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하여 3명이 참가했는 데 나 혼자 상을 받게 됨) 대학교에 들어 가면서 교회봉사활동은 더 많아졌다.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지휘자, 청년회 회장 등으로 봉사 및 헌신하면서 나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느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세례를 받았고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구원의 확신이 서게 되었고 기도의 응답 속에서 구원의 확신을 더 많이 체험하게 되었다. 나의 하나님은 정확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시는 기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는 늘 숫자에 있어서 빈틈없이 정확하게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내용은,
첫째로 내가 처음으로 예수를 믿고 나의 가정이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여 부모님, 첫째 둘째 누나, 여동생, 남동생이 지금 교회에 다니고 있고, 둘째로 내가 신앙이 좋은 아내와 결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불과 두 달만에 결혼하게 되어 지금은 교회에서 나는 장로, 아내는 권사로 교회를 잘 섬기고 있으며, 셋째로 자녀들이 신앙생활 잘 하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두 아들, 두 며느리, 손녀들 모두 자자손손 믿음의 대를 잇고 있으며, 넷째로 청소년단체활동에 있어서 가입 인원이 20명이 되도록 기도한 것인데 정확하게 응답 받은 것이고, 넷째로 작곡활동에 있어서 내게 들어온 돈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사용할 터이니 내가 돈을 들이지 않고 작곡집이 출판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지금은 서울의 모출판사에서 작곡 위촉이 들어와 내 돈을 들이지않고 작곡집을 내어주며 작곡료도 받고 있으며, 다섯째로 <동요사랑회> 주최 <제14-15회 동요사랑큰잔치> 행사에 30팀이 참가할 수 있도록 기도했는데 31곡이나 발표하게 되었으며 그 외에도 기도 응답 받은 것은 수 없이 많다. 예수님 믿어 구원 받고 천국 시민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기도의 응답 받고 복 받아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1975년도에는 부산노회주일학교연합회 음악부장을 맡게 되었고 약 5년간 열심히 일하다가 발탁이 되어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음악부장을 맡게 되었다. 특히 <즐거운 노래집>을 편집하게 되다보니 일년에 내가 작곡한 곡을 10곡씩 싣게 되었고 그 때 <교사의 노래>를 공모하게 되어 차숙자 씨의 시에 내가 작곡을 하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초교파적으로 널리 불리어지고 있고 전임작곡가로 인정 받아 <즐거운 노래집>에 해마다 2곡씩은 실리게 되어 어린이들이 열심히 부르고 있다. 그리고 1997년 8월 12일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창립 30주년 기념예배때에는 음악부문 공로상을 받게 되었다.
2011년 2월말에는 내가 교직생활 42년을 마치고 정년 퇴직을 하게 되었다. 대통령으로부터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기나긴 세월동안 하나님이 저를 잘 인도해주셨고 음악과는 무관했던 무익한 종을 교편생활과 더불어 교회음악활동을 통하여 남들이 힘들고 어렵다는 작곡에까지 손을 대게 하시고 작품을 많이 써서 지금도 많은 교회에 내가 쓴 작품을 연주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않을 수 없다.
2012년도에 미완성출판사와 한국명곡진흥협회 주최로 전국좋은음악작곡콩쿠르 작품 공모가 있다는 것을 이메일 및 인터넷으로 보고는 준비해서 1등을 해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내용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사로 쉽고 은혜스러운 곡으로 하며 마지막에 아멘이 붙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요즈음은 젊은 사람들이 작곡을 CCM스타일로 작곡을 하며 경쾌하고 복잡한 리듬과 현대적인 화성스타일을 사용하여 작곡을 많이 하기 때문에 나는 그런 스타일로 했다가는 1등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나의 장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국악스타일이었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국악스타일에는 약한 면을 잘 알고 있기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민요조스타일, 가락은 5음음계, 리듬(장단)은 국악장단, 화음은 4도화성, 5도화성, 부가화음, 7화음, 변화화음 등을 나의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여 작곡을 하였다.
새벽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기도의 내용은 첫째 1등을 하게 되면 상금 전액(100만원)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왜냐하면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주님께 보답해야 되고 영광을 돌려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심사위원이 작품을 심사할 때 공정하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왜냐하면 작품의 기교 및 예술성에 치우쳐 심사가 한 쪽으로 기울여서 평가가 되는 일이 많고 나이 든 사람의 작품보다 젊은 사람들의 작품에 손을 들어주는 경향이 많기때문이다.
발표가 되자 나는 깜짝 놀랐다.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 같은 사람도 1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대구에 가서 시상식에 참석하여 상장과 상금 100만원을 받게 되고 주일에 하나님께 상금 전액(100만원)을 감사하며 바치게 되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상을 너무나 많이 주셨다. 이러한 상은 내가 잘 나서 또는 내 공로로 받은 것이 아니며 오로지 주님이 주신 재능때문이라는 것을 항상 감사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라고 나는 고백한다. 할렐루야!
2013년 5월 22일에는 나의 일생 중 가장 뜻 깊은 날이었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수여하는 한국예술문화명인 인증서와 인증패를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1명, 연극 1명, 공예 약100명, 줄타기 1명, 태권도 1명 등 111명 중 내가 교회음악 작곡 부문에서 명인이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 인터넷을 통하여 명인신청을 받는 절차에 따라 1차 심사에는 포트폴리오를 통한 서류심사였다. 이력서에 관한 것인데 출신학교 졸업장, 예술활동경력, 수상경력, 작품 등 다방면에 걸쳐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복사하여 소포로 부쳤다. 1차 합격 통보가 왔다. 2차에는 작품제출이 있었다. 그동안 발표했던 음반(CD)을 한 박스 제출하였다. 2차에도 합격이 되었다. 3차에는 면접 또는 현장 실사심사였다. 나는 면접을 받게 되었는데 작곡을 누구에게 배웠느냐가 중요하였다. 바울은 가말리엘에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배운 사람들이었다. 위대한 사람은 그 배후에는 위대한 스승이 존재한다. 율곡은 어머니 신사임당에게서 배운 사람이고, 맹자, 링컨 도 역시 어머니에게서 배운 사람이었다. 나는 유명한 이상근교수님에게 배운 사람이라 심사관은 이상근교수님의 실력을 아시는 분이라 인정해주셨다. 그리고 많은 상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작품수를 따졌다. 1500여곡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혀를 내둘렀다.
나는 지금까지 명인이 되기까지는 남 다른 고생을 많이 하였다. 약15년간이나 많은 대학에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작곡을 하기 위하여 성악, 신학, 성경, 지휘, 피아노, 오르간, 국어국문학 등 그리고 방학 때면 온갖 세미나, 강습회, OO교실 등 일생의 1/2은 공부와 친구가 되어 세월을 보내어야 했다. 그런 가운데 작곡을 하고, 도전을 하여 상을 타고 발표회도 수 없이 많이 하였다. 여간해서는 아무나 명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열정, 끈기, 부지런함, 성실, 도전정신 등이 뒤따라야 하며 누가 뭐라해도 한 우물을 깊숙이 파면 성공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비로소 알았다. 아내가 때로는 면박을 주는 때도 많았다. 그렇지만 오히려 쓴 소리가 약이 되어 나의 강한 의지력이 더욱 단단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누구도 못말리며 말린다해도 언젠가 그 일을 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재능은 하나님이 주셨기에 잘 활용하면 빛을 내기 때문에 아껴서 썩히게 하지말고 쓰면 쓸수록 빛이 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한 달란트 받은 종보다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를 오늘도 기도하며 남은 생애동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나갈 것이다.
|
첫댓글 장로님, 축하드립니다. ^^
축하합니다. 상복이 많은지 재주가 많은지 하여간 대단한 사람은 분명한것 같습니다.
축하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