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논리(1969)』(Logique du sens, 1969) (ms 11/11/03)
뒤몽셀(J. C. Dumoncel), dans Les Oeuvres II, Dictionnaire, PUF, 1992, p.3156.
- 뒤몽셀(Jean-Claude Dumoncel, 1944-), 철학으로 국가박사. 수학자이며 철학자. / 저술로 La philosophie telle quelle: Suivie de Conversation apocryphe entre Bergson et Russell, 2005.
라깡(Jaques Lacan, 1901-1981)의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Seminaire sur la Lettre volee)」에 앞서서,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세 가지] 절차를 이미 묘사하였다. 그 절차에서, 물질적 어떤 대상(예를 들어 편지)은 "어떤 등장인물의 중요한 권위(une importance capitale)를 이룰 수 있게"하고, "사람들이 물질적 대상을 지니고 있다고 믿을때는 이미 [그것을] 벗어나" 있고, 드라마를 통하여 "점 점 기대되지 않는[예기치 않는, 우연(hasard)의 발생이 일어나는]" 단편적 사실들(des episodes)을 "그 과정에서 끌어 모아서" 굴러가게 한다. [논평자(Dumoncel)의 글에서 " " 안의 글은 베르그송의 글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우리로서는 MM(1896)의 책 속에서 이곳 저곳 나올 만한 곳을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찾은 분이 있으면 한 수 알려주시기 바라며...]
베르그송이 이렇게 해서, 그가 1896년[MM을 지칭한다]에 정의를 내렸던 존재론적 고깔(cone)의 논리적 쌍(pendant)이란 역동적 도식, [이 개념(Schema dynamique)은 1903-1904 꼴레주 드 프랑스 강의(「기억이론들(Les theories de la memoire)」에서 사용한 개념으로 그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는 개념이다. 베르그송은 MM(p. 121)에서는 운동도식(scheme moteur: 신체에서 일어나는 행위)이라고 썼다. 우리는 그가 1901년 라랑드(Lalande)와 함께 하는 철학모임에서 그의 심리학이 신비주의의 요소가 있고 인정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여기에 덧붙여서 이 역동적 도식은 프로이트의 위상적 심급(1919)과 닮은 데가 있다. 베르그송의 심리적 역동의 관심은 이미 프로이트보다 훨씬 앞섰다는 것을 여기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8자 형태로 점점 커나갈 수 있는 회로의 역동적 도식을 예시하였다. [8자 형태로 된 도식에서 외적지각과 내적 인상과의 역동적 또는 운동적 관계는 MM 115쪽에 도표가 있다. 베르그송 이 예는 MM(p. 114)에서 전기회로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우리는 그가 입자이론보다 장이론을 더 선호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DI 2장). 그래서 그의 회로이론은 요즈음 전자의 회로라기보다 자기장의 흐름과 같은 모습을 생각하면 8자 모양의 중첩되고 증가하는 모양을 상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막대자석의 양극에는 원의 형태에서 8자 모양을 그려보면 된다. 우리는 한가지 덧붙이자. 베르그송은 비유는 비유일 뿐이다. 실재의 경험에 대한 직관은 비유가 아니라 구체적 경험이며 실재이다. 그래서 그는 비유에 속지 말라고 말하곤 한다.]
이렇게 묘사된 도식론은 이미 앞서서 구조주의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도록 해주고, 그리고 우선 보기에도 기호학에 따르는 구조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게 해준다. 왜냐하면, 『의미의 논리(1969)』는 사실상(라이프니쯔의 의미에서) 실재적 논리(logique reelle)이며, 이 논리는 잘 짜여진 네 개의 학설체[체계]를 서로 엮고 있다. 즉 1) 모방체들(simulacres)의 존재론, 2) 역설의 논리학, 3) 드라마의 윤리학, 4) 환영(fantasme)의 시학.
1) 존재[론]에서 모방체는 사유[인지론]에서 환상을 생산한다. 고깔의 절단면이 베르그송에서처럼 직각의(orthogonale)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경우에도 모방체가 있다. 오히려 그 모방체는 니체(Nietzsche)의 "드라마를 형성하는" 각도에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존재 속에 정의[규정]된 경사진[빗금의] 단절의 수직적 투사는 사유 속에서는 환영의 형식으로 발견된다.
2) 이 존재론적 원리는 구조의 기호학의 모든 빗장을 뛰어넘게 한다. 우선 기표/기의라는 짝의 내재성은 지시에 관한 개방에 의해 열려진 체 있다. [우리는 개방성(열려)을 이원성이 무수히 많다고 해석하고, 또한 이원성이 이원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것과 짝을 이룰 수 있는 다변성에서도 개방성이라는 표현으로 해석한다. 정4면체 주사위의 한 면은 셋과 다변성을 동시에 이루고 있다.] 이 때에 사람들은 삼원적인 것: 명제적 표시(Signe)(8자 모양에서 교차점), 비형체적 선별(Lekton *)(8자의 교차에서 보면 상부의 둥근 모양: 우리가 설명을 보태면 의식 내부에 반영된 것, 즉 잔영으로 남아있는 (장의 영역으로, 자기장의 회로) 지시적 사건(Evenement)(8자 모양에서 아래에 있는 둥근 모양: 우리가 보기에 지각(공통감각)의 회로, 이것은 시각처럼 직선만이 아니며, 청각처럼 파동만인 것도 아니다), 즉 외적 대상에 대해 지각하고 있는 상태(또는 정황)이라는 스토아적 삼원적 이론을 다시 발견하게된다.
[(ms)정사면체(정삼각형 넷으로 된)의 경우, 한편이 다른 모든 면(3면)과 이원론적 관계를 이루는 것은 3가지 측면이다. 이런 의미에서 3원적 관계는, 이차원이 서로 안과 밖이 없는 관계인 메비우스 띠처럼, 다른 반대 방식에서도 3원적이다. 정육면체에는 한 면이 4개의 면과 관계를 맺지만 닿지 않는(보이지 않는) 다른 한 면이 남아있다. 이 면과 관계는 4면과의 관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관계를 추리할(유비적으로)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이 한 면은 무(le neant)도 빈 것(le vide)도 아니며,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존재하지만 모르는 어떤 존재[(non)-etre ou l'objet x)]이다. 여기서 첫 번째 한 면(주체든 몸이든)이 무관한 면(x)에 대칭적으로 대립 또는 모순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변증법론자의 시각이다. 변증법론자는 한계는 이 것을 자기에 유추나 비유에서 포함되지 않으면 과감하게 버린다는 약점이 있다. 이 버린 것에서 소외가 시작된다. 그러면 정 24면 체를 생각해보자. 이 버린 것이 첫 째의 한 면이 접하는 면은 한정되어 있고, 그리고 버려지는 것은 하나나 작은 부분이 아니라 거의 반을 버리게 된다. 하나이든 반이든 부분으로 취급하면 그만인 생각을 하는 경우에, 또는 공리주의적으로 또는 소위 말하는 수적으로 민주주의의 다수결로, 이 나머지 부분을 제거하면 얼마나 많은 부분이 제외되는(사회적으로 소외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을까? 그러면 그들은 다양체의 논의가 기본적으로 개별성의 자기 완결성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한다고 비판하면서, 완결성 없는 그 존재들을 존재로 인정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이냐고 반박하기도하고 또는 거꾸로 묻기도 한다. 이 물음이 문제를 푸는 핵심이 될 것이다. 이 완결성은 없다. 시대의 공시태로서 새로운 세대에 대한 교육이 그 일을 담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한 면에 대칭적 대립은 어떤 예외적 사항들(계열들)이 있으며, 이 한 면과 다른 계열들과 사이에 여러 파라독스가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파라독스들 중에서 한 유형은 다른 유형과 의미화 작업을 달리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면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여러 면들 중의 한 면(즉 한 계열)은 관계 맺지 않는 여러 계열들 중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라기보다 그저 알려지지 않은 즉 아직 규정되지 않은 무엇(x)이다. 이 무성은 생성 중에 있거나, 아직 생성되지 못하고 성운처럼 그냥 무규정자로 있을 수도 있다. 이를 "미친 생성"이라 이름지을 수 있다. 이것이 괴물(monstre)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에 있다는 점(내재주의)이며, 모든 사물 속에도 그렇게 있다고 할 때 '범자연내재주의'라 부를 수 도 있다. 이 '범자연내재주의'는 이 부정(x)을 버리고 가기보다 안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안고 가야할 문제를 버리고 간다는 발상에 대한 반대적 견해가 후기 구조주의 인 셈이다. 그리고 안고 가는 그 무엇이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Ding an sich)'이며, 플라톤이 말했던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로서 우리가 말하는 '질료'이다.]
[렉톤(Lekton)은 라틴어 레고(lego)일 것이며, 그리스 레고(????, lego)에서 나왔을 것이다. 라틴어에서 레고의 분사형의 변형으로 렉툼(lectum)이 나올 것이며, 불어로 읽기(lecture)도 여기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라틴어 레고는 모으다, 끌어 모으다, 집어 올리다, 라는 기본적인 뜻이 있고, 확장된 의미에서 선택하다, 선별하다, 라는 뜻도 있다. 베르그송의 기억이론에서 회로 형성이 선택이라고 보았던 것도 어원상으로는 이런 의미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시체의 단칭성(unicite)에 (예로서 금성, Venus)에 대해, 제 각각으로 해당하는 다수의 의미화 (예로서 '저녁별', '아침별'; 샛별, 새벽별, 효성, 개밥바리기, 자금성 등)의 다수성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한 과학적 실명보다 의미화되어 쓰이는 단어가 더 중요하다. 저녁이 되어 개가 자기 밥을 바라는 시각에 보이는 별로 쓰인 용어는 그 시대에 개는 하루에 한끼를 얻어먹는 셈이다. 저녁에 밥 한끼 얻어먹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인간의 삶의 반영이라면 이 배고픈 저녁의 별... 다른 예로 같은 사월이지만 19년 만에 한번 오는 낮이 긴 윤사월(거의 양력 6월이다, 하지에 가까운 음력 4월) 이것도 배고프고 가난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기다림이 길기도 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의미화는 여럿이다, 맞다.] 들뢰즈는 분석적 영감으로부터 나온 언어 철학의 모든 습득물을 끌어 모을 수 있었고, 그리고 이들을 캐롤(Carroll, 즉 Dodgson)이 이미 준비한 [구문론적으로] 언어계열도식(Paradigme) 속에 위치시키다.
[(구문론적 언어계열)도식(Paradigme): 언어 연쇄 중에 한 점에 있어서 교환 가능한 제요소의 총체: 예를 들면, 음식점이 장사한다(Le restaurant est ouvert)라는 문장에서 음식점(restaurant)대신에 상점(magasin)이나 가게(marche)를 대치할 수 있는 경우 이들은 계열을 이룬다, 여기에는 메타퍼적인(은유) 것과 메토니미(환유) 적인 것이 다르다. )
럿셀(Russell, 1872-1970)이 파라독스의 해결로서 제시한 유형을 위계질서로 정리하는 것이 루이스 캐롤에서는 파라독스가 된다. 그래서 본체론적 무의미(Nonsense)가 현상적 의미를 생산한다 [우리가 보기에 내재적 실재성(미친생성, 즉 무의미)가 현상적 의미를 불쑥 불쑥 생성한다.] 똑같은 경우에, 분석적 틀도 이번에는 위계질서적 구조에 의해서 넘쳐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의미화 작업들은 똑같은 둥근 회로에 위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이 같은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공시태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닐 수 없다고 말했다. 같은 성향을 지닌 두 한국인이 타국에서 같은 시대에 같은 한국인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기표상의 같은 의미이지, 기의는 전혀 다를 수 있다. 두 기표가 동일하지도 않고 또한 같은 기의도 아니며, 의미화들은 항상 차이가 있다.]
그 예로서 스피노자(Spinoza)의 편지 9 (Lettre IX)에서 "이스라엘(Israel">"야곱(Jacob)"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의 『윤리학』제 2장 40번 명제 부명제(sc.) 1을 참조하자.
3) 들뢰즈에서는. 베르그송의 8자 형식이 뫼비우스 고리(anneau)가 된다. 들뢰즈가 끌어 모은 다수의 교환[관계, 파라독스]들 가운데, "신경증 환자 개인의 신화(의미: sens)"가 신경증 강박[행위] (사건: evenement)으로 이행하는 교환이 있다 (21번째 계열의 파라독스 전체에서).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같은 분열환자(le schizo)와 도즈슨(Dodgson: Carroll, 1832-1898)과 같은 도착자(le pervers) 등은, 푸꼬(Foucault)가 매료되었던 개체발생의 관점에서, 그 당시 외디푸스적 고뇌에 기울어져 있었다 (27 번째 파라독스 계열에서 32번째 파라독스 계열에까지).
4) 모방체는 존재 속에서 모델(가본, 우리는 진본이 없다는 의미에서 가본으로 쓰고 가끔은 짜가라고 할 것이다)들을 뒤엎어 버리고, 그리고 언어 속에서는 자유를 누리게되는 환타즘(fantasme)의 도착(perversion)이 있게 된다. [플라노메네 아이티아 즉 운동하는 질료, 그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원본(형상)이 없다면, 이데다을 본뜬 모델(짜가)가 설치고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이 짜가가 모방체의 예외적인 특이한 하나일 뿐이고, 이 예외적인 것을 모방하는 것 자체가 인류의 역사상으로 불가능했다. 이 불가능을 성직자와 학자는 인체하면서 인민에게 강요하는 재미로 살았었다. 인민은 이것이 거짓인 줄 알지만, 그 교권, 권력이 무서워 말을 못하고 사라졌다. 루소는 이런 낌새를 알아차렸고,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인민에게 이야기하게 만들었다. 원본도 없고(교황천부권), 모델도 짜가이며(왕원 천부설), 진정으로 인민의 모습 그대로가 하늘의 모습(인민권 천부설, 인내천 사상)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모델(짜가)가 뒤엎어진 세상에는 인민이 자유를 누리게 된다. 언어 속에서 환타즘은 인민의 놀이 상태이다.]
또한 도착적인 위대한 소설가들의 계보만큼이나 전복적인 것은 없다. 즉 예로서 캐롤(Carroll, 1832-1898),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Dublin 1882-1941), 베케트(Samuel Beckett, Dublin 1906-1989) 등이 있다. 어떻게 이들의 글을 루셀(Raymond Roussel, 1877-1933), 곰브로비츠(Gombrowicz, 1904-1969, 폴란드 작가), 클로소프스키(Klossowski, 1905- 폴란드출신 프랑스 작가) 등처럼 읽을 수 있겠는가? 『의미의 논리(1969)』는 이처럼 예술에서나 문학에서 근대성의 이중토대를 여는 열쇠 꾸러미이다.
[(ms 36VLI)우리는 캐롤, 조이스, 베케트 사이의 지리상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캐롤은 잉글랜드 데어스버리(Daresbury, Cheshire주의 작은 도시) 출신이다. 이 도시는 멘체스터와 리버풀의 중간에 있는 작은 도시이고, 리버풀은 더블린을 잇는 직선 항로이다. 이렇게 볼 때 아일랜드의 가난한 노동자는 멘체스터 공업 속에 합류되지 못할 경우에 - 우리나라의 구로처럼 - 멘체스터 외곽에 아일랜드 출신이 우굴거릴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상상이 상상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나는 캐롤의 글을 베르그송이 자라면서 상당히 읽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베르그송의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영국 출신이다. 그 어머니는 아일랜드계에서 나오는 어떤 것을 지니고 있었으리라. 이런 생각은 베르그송이 사상적인 면에서 스피노자만큼이나 총체적 사유를 한 사람으로 버클리를 꼽고 있기 때문이다(PM).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의 지각된 것(percipi)의 이론이 추억이론과 유사하고, 영혼의 비물질성의 이론은 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마쥬로 바꾸어 설명하면, 베르그송의 영혼과 유사한 면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얻게 된 것은 어머니 덕분이 아니었을까? 동생( 중에 심령과학에 몰두한 여동생을 보아서도 베르그송의 어머니는 대단한 독서가였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베르그송에서 아일랜드적 사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 영향과 마찬가지로 조이스나 바케트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런 것은 어쩌면(추측이지만) 아일랜드계 카발라에서 유래할지도 모른다. 사실 조이스에서도 카발라의 낌새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 사실 우리는 베르그송 어머니 가계에 대한 연구를 필요로 하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술레즈의 베르그송 전기 작업을 이어 나갈려면 베르그송 어머니 가계와 베르그송 부인가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베르그송 부인 가계는 베르그송 어머니 가계와 관계와 프루스트 어머니의 가계와의 연결도 마찬가지이다. 조이스(1882-1941)의 『율리시즈(fr. Ulysse an. Ulysses, 1922)』와 푸르스트(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1913-1922)』사이에도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5:02, 36VLA)
첫댓글 들뢰즈를 처음 읽던 시절이 2001년 정도 였을 것인데, 같이 읽은 것은 영화에 관해서 일 것이다.
2003년 아마도 "의미의 논리"를 철없이 용감하게 읽었던 것 같다.
뒤몽셀의 이책 평을 읽으면서, 벩송의 기억과 추억의 설명(MM)과 흐름의 추적이,
라깡과도 다르고,
들뢰즈가 논문썼던 니체의 드라마적 방법을 밹송에게서 체계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 평에 대한 나의 생각의 변화 과정을 엮어볼까 한다.
들뢰즈, 그는 "의미의 논리" 짧은 서문에
... <하나의 “얽히고설킨 이야기(histoire embrouillé)”>이며
....<이 책은 논리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소설(roman)의 시론이다. (7)>이라 한다.
이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은 감상문인 셈인데,
씨앗에서 뿌리 내림도 있을 것이고, 기둥을 세우고 줄기를 뻗으며 수많은 잔가지에서 꽃을 피우면 좋겠다.
열매는 다음의 이야기일 것이다.
푸꼬의 평에 도움을 받았다. 푸꼬는 이런 이야기에 깊이 아직 나오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 뿌리에서 이야기가 "앙띠외디푸스" 다음에 "천개의 고원"에서 리좀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나는 믿는다. (57P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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