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에세이 essay
-에세이(1)-
살아 있다는 기쁨에
지금 나는 살아 있다는 기쁨에 넘쳐 매일의 새날을 위해 소박하고 단순한 노래를 새처럼 즐거이 불러본다.
은회색 안개 속에 들의 윤곽이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나타나고, 잡풀 속에는 어렴풋한 향내가 가득하고, 어린 풀잎이 작은 바람에 흔들린다.
안개가 걷히고 반짝이는 연초록 빛 강물과 나무들, 초가집들 그리고 그 위에 드리운 연한 빛 하늘이 드러난다. 눈앞에 전개되는 아름다운 형태와 색깔들.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이 모든 것들을 화폭에 옮겨 담는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참으로 아름답게 잘 만드셨다.
태양이 솟아오르면 하늘이 불타면서 갈색 밤나무, 초록색 풀잎, 푸른 하늘이 싱싱하고 섬세하게 드러난다. 태양은 차츰 기울어져 노란색, 오랜지색, 진홍색, 분홍색, 보라색 순서로 물감이 튀어지고 마지막 햇살이 지평선 너머로
자주빛 테를 두르고 나면 황혼, 부드러움, 평화가 연노랑의 안개에 드리워 아늑해져 간다.
이어 하늘은 섬세한 녹색과 카키색, 회색, 갈색조의 색깔로 변해가고 강물도
하늘의 연한 그림자를 품고 녹아 들어간다.
나는 꿈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나중에 꿈에서 깨어나면 이 꿈도 그려야지.......
내가 그림을 그리는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요 특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서너 살 아니면 다섯 살쯤일 것이다.
특별히 잘 그린다는 것보다 형이나 누나가 그리니까 따라서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2학년 때 전교에서 1등 하고부터 그림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연필만 손에 잡으면 수업시간에도 노는 시간에도 그림을 그려댔다.
성인이 된 지금도 아름다움을 보면 그때의 열정이 온몸에 스미는 듯 느껴진다.
그럴 때면 나는 어린이만이 느낄 수 있는 뭐라고 꼭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환희에 사로잡힌다.
소년시절 처음으로 수채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을 때,
그때의 기분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럴 때면 나는 홀연히 어린 날의 무수한 순간들을 생각해 내곤 한다.
찌는 듯이 무더운 한낮, 풀 향기 코를 찌르던 벌판과 정원의 시원한 아침과 신비스러운 숲 속의 저녁한때...... 나는 마치 보물을 보는 것 같이 그림을 그렀었다.
특별히 예쁜 꽃이 아니라도 좋았다.
햇빛 아래 반사되는 갖가지 나뭇잎의 움직임,... 그것을 그린다는 기쁨에 숨이 막힐 지경으로 좋았다.
반짝이는 색깔 하나하나, 나무줄기 하나하나, 꽃의 잔털 하나하나가 눈에 또렷이 보일 때 그 긴장감과 환희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어린 시절 나의 부모님은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말렸기 때문에 그림 도구를 마련해주시지 않았다.
내가 지금 성인이 되었는데도 그림을 그리는 열정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전쟁을 하면서 살고 있다.
천하장사를 뽑는 씨름판에서 장사 한 사람을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씨름꾼들이 모래밭 위에 엎어지고 넘어지는 서러움을 겪어야 하는가. 운동시합에서 이기는 선수가 있으면 반드시 지는 선수도 있다. 경쟁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게 마련이어서 항상 긴장하게 하고, 경쟁의식은 사람을 야비하게 만들기도 한다. 승자의 기쁨 뒤에는 항상 패자의 슬픔이 있기 마련이다.
경쟁하는 삶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데,
다행히 나의 직업은 남하고의 경쟁 없이 혼자 묵상 하면서 혼자 생각하고 캔버스에 옮기는 일인 것이다. 주위와 경쟁할 필요도 없고 남을 아프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고독한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은 나만이 아는 것이다. 운동 경기에서 이긴 승자의 통쾌감이 아닌 조용하고 감격어린 환희, 그것은 그림에서 오는 것일 게다.
나의 지난 사십 년의 세월은 산 너머 저쪽 신비의 세계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어떤 일에 감동을 받거나 고독할 때 그 느낌을 화폭 위에 그림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하고, 가슴이 벅차올라 감동과 환희가 화음을 그려낼 땐 행복함을 느꼈다. 그것은 나의 신앙심과도 직결되어 기도를 하듯 행복감에
빨려 들어감을 느낀다.
오늘도 신비의 세계가 산 너머 저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것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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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2)-
눈이 많던 그해 겨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야외에 나가 이젤을 펴고 캔버스를 세워 놓고 눈길이 닿는 대로 무엇이든지 바라본다.
이런저런 물건들, 나무와 산과 잔디풀 등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한다.
눈을 크게 뜨고 주의 깊게 사물들을 바라본다. 마치 눈 안에 그것들을 집어넣을 듯이 바라보고 있으면 그 사물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지구 위에 그 사물과 나만이 있다는 느낌이 들고, 모든 사물들이 살아 있다는 것으로 수수께끼가 풀려가기 시작한다.
그 잎 속의 세포며 잔털이 숨 쉬며 움직인다.
평소 무의식적으로 보아왔던 내 앞의 사물들이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점점 내게로 다가옴을 느낀다. 나는 그들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진 것을 알았고, 진심으로 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지난날이나 지금이나 아니, 앞으로도 하루는 역시 24시간이지만 지난날의 하루와 지금의 하루는 차이가 크다. 오늘 하루는 덧없이 흘러 지나가고 또 내일이 선뜻 다가온다.
나는 지나가버린 그 많은 시간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1년 중에도 나는 유난히 12월을 좋아한다. 12월은 그 해의 끝 달이자 새해를 기다리는 달이기도 하지만 더 의미 있는 것은 아기 예수님이 탄생한 달이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달이기도 한 때문이다.
나의 생일은 23일이니까 정확하게 하루 반이 지나면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이어서 억울하게도 예수님 탄생일에 늘 생일을 겸해 같이 치뤘었다.
나의 꿈 많던 어린 시절은 이문동에서의 일들과 함께 지나갔다.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우리 교회는 나의 꿈을 키워주었다. 그때의 12월은 눈이 유난히 많이 왔었는데 누나는 동생을 등에 업고, 나는 햇살이 부서지는 눈부신 눈에 무릎까지 폭폭 빠지면서 강아지처럼 뛰어 주일학교에 갔던 일들이 떠오른다.
그때 눈밭 위로 들려오던 교회의 종소리와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들려주시던 재미있던 동화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한숨도 자지 않고 아이들과 어울려 지냈던 일, 새벽을 기다려 촛불이 켜진 등을 손에 들고 형, 누나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새벽송을 부르던 일, 커다란 자루를 짊어진 형, 언제 준비했는지 가는 곳마다 네모난 상자를 자루 속에 넣어주면 교회에 돌아와서 파티 하던 추억, 우리 교회보다 더 컸던 이웃 교회인 안식교회에서 코가 큰 서양선교사가 영화를 보여줄 때는 또래들이 몰려가서 구경만 하고 달아나오던 생각들이 12월이 되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중년이 된 지금, 든든한 믿음의 받침이 되는 것은 어린 시절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금쪽같은 시간들, 그렇게도 소망했던 화가의 길, 오직 앞으로 달릴 줄밖에 모르던 그 지난날들, 이제 반평생을 살고 짧은 앞으로의 생애가 남아 있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것을 보아왔다. 안경, 텔레비전, 망원경, 카메라 등으로 더 잘 보려 했지만 사실은 지금까지 장님의 눈으로 보아왔던 것 같다.
그동안 뜻 없이 사물들을 바라보는 멍청이였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물을 들여다보고 그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진정한 미의 ‘봄’이 아닐까 싶다.
11월이 감사하는 달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12월이 감사하는 달로 생각된다. 올 한 해를 되돌아보면 감사한 일이 너무나 많다. 개인적으로 또는 국가적으로 좁아 보이던 세상이 아주 넓게 보이는 해였고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어졌다.
이 땅에서 살다보면 무언인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싶어지는 게 우리 인간이지만 사랑으로 주고받을 때 이웃이 되듯이, 나도 작지만 나누면서 살아야 되겠다고 12월에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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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3)-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보면 즐거워한다. 그래서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어 한다.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듯이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느끼거나 만든다는 것도 인생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어려서 흙바닥에 나무작대기로 직직 그으며 무심코 그림을 그렸고, 남의 집 벽에 차돌이나 분필 같은 것으로 그림을 그렸다. 또 있다.
유리창에 입김을 ‘후 욱’하고 불어서 그 유리창에 입혀진 입김자국에 손가락 끝으로 직직 그어서 순간적으로 그림을 그렸고, 냇가 모래밭에서 조약돌로 그림을 그렸었다. 그러다 보니 그림이 되었다.
순이의 얼굴을 그리기도 하고 호랑이같이 무서웠던 영식이 할아버지도 그려보고 그저 사람의 얼굴을 그리기도 했었다.
어떤 때는 종이에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려서 공부방 책상 앞 벽에 밥풀로 붙이고 색 테이프로 테를 만들어 놓고는 며칠이고 감격했다. 그 그림들은 나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것이었다.
길을 가다가 꽃집 앞에서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마음에 든 꽃을 사서 그 꽃을 그림으로 담았다. 내 손으로 즐겁게 그렸을 때 아름다운 꽃과 같은 마음이 싹터 오고 황홀경에 빠져 감격한 일도 있었다.
그림을 대하고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름다움을 향한 본능이 충만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시각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포근히 가라앉히기도 하고 조용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미술을 벗 삼고 친숙해 질수 있었다.
그림은 곧 인생의 미적 정조를 줌으로써 생활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들고, 보다 살맛과 멋을 갖게 하며, 사는 의미와 사는 이유를 알게 하고, 사는 방향과 주제를 나에게 주는 것 같아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적 본능이 있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누구나 아름다움 앞에서는 순수해지는 것이다.
하얀 공간 위에 선과 형태라는 수단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지만, 창조적인 영감에 의하여 자기의 사상과 인생의 모든 것을 표출해 낸다는 설렘은 나에게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림이나 음악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이 정화되어 아름다운 사회가 이룩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인간의 소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이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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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4)-
화가라는 직업
사람은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한다. 일을 완성하고자 하는 욕망은 사람을 진리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사실이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고귀할 뿐만 아니라 신성하기까지 하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한 것이고, 저속한 일이라고 폄하할지라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이며, 자기 일에서 진지함을 찾을 수 있다면 그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개미에 대한 교훈을 책에서 보고 듣고 하면서 개미는 훌륭한 곤충이고 베짱이는 천하에 몹쓸 곤충으로 생각했었다. 사람들은 육체적인 노동만을 일로 생각했고 한 철 동안을 노래 부르며 생활한 베짱이는 일을 하지 않은 게으른 곤충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집에 한 달에 한 번씩 연탄을 배달해주는 50대 부부가 있다.
우리 집은 좁은 골목 안에 있고 더구나 계단으로 되어 있다. 남편은 앞에서 리어카를 끌고 부인은 뒤에서 밀며 우리 집 30미터 전방에서 리어카를 멈춘다.
그곳에서부터는 지게에 옮기고 우리 집 연탄창고에 가지런히 쌓아주곤 한다.
비록 그분들의 얼굴이나 옷은 검정색으로 물들어 있지만 아주 행복한 얼굴로 일하는 것을 볼 때 감동적이었으며 그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한때는 나에게 미운 사람이 있었으나 이내 반성한 일이 있다. 그 사람은 항상 우리 집 입구에 초록색을 칠한 청소리어카를 세워 놓고 매일 아침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연탄재 먼지를 일으키는 아저씨였다.
하필이면 상쾌한 아침에......
더군다나 새 양복을 입었을 때는 속상해서 거리는 멀지만 뒷길로 돌아갈 때가 있었다. 그런데 만약 그 청소부 아저씨가 없다면 우리 마을이 어떻게 될 것인가? 쓰레기 더미에 질식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니 그 청소부 아저씨가 너무나 고마워지는 것이었다.
정치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 공부 가르치는 사람, 종교인, 교통경찰, 버스운전사 등등 여러 가지 직업이 있고, 이런저런 직업을 생각하면 하나도 쓸모없는 일이 없고 그 직업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마 7~8년 전인 것 같다.
당시 사회운동 하는 대학생과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 학생이 말하기를“지금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은 피땀 흘려 노동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데 빈둥빈둥 놀며 그림이나 그리는 화가가 이 땅에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물음에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그 학생은 삶의 진리를 모르는 까닭에 현재 보이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것을 이해했다.
이 세상에는 개미, 벌처럼 한 리더 자를 위해 헌신하며 사는 사람.
다른 하나는 7년에서 15년을 물속에서 애충으로 험난하게 살다가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하기위해 마지막 물속에서 세상으로 부활해서 배필을 부르고(사람들은 놀고 노래만 부르는 곤충으로 오해) 알을 낳고 바로 생을 마치는
곤충을 닮은 예술가 같은 사람.
또 하나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땅속에서 평생 동안 인간이 오염시킨 흙을 먹어 기름지고 좋은 흙을 만들어 배설해 놓고 소리 없이 죽어간 곤충 지렁이 처럼 흙을 통해 일하는 농부같은 사람. 이 세 부류 자기의 몫을 아름답게 사는 것임을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사람이 직업을 가졌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각자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축복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개미만 일을 하고 베짱이는 놀고 있다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일터에 나가고, 태양이 서쪽으로 지면 쉬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일상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생활은 그렇지가 않다. 저녁에 출근해서 아침에 퇴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종일 집안에서만 일하는 사람도 있다. 육체적으로 농사, 노동일하는 사람이 있고, 정신적인 일을 하는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같이 그림만 그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
지금 지구 위에 50억의 사람이 살고 있다. 그 50억의 사람 중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다. 생긴 모습이며 성격이나, 생각하는 것까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니 각자 하고 있는 일도 다를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이 있고 놀고먹는 사람도 있다(사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름대로 일하고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 노는 것 같지만 다른 측면에서 그 사람도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 간다고 한다. 더할 수 없는 천한 종류의 노동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마음을 잡고 일하기 시작한다면 그 순간 그 사람의 영혼이 평정을 찾아 진정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자기가 할 일을 찾은 사람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에게는 일이 있고 생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추구한다.
나는 일하는 사람에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화가도 빈둥빈둥 놀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고, 이 땅에 작으나마 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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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5)-
동심
사람들은 언제나 날 어리게 봐준다. 사람들은 내 그림을 어린아이를 위한 그림 같다고 말한다.
나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고맙게 생각한다.
사실 나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도 그리고 또한 어른들을 위한 그림도 그리기 때문이다. 어린이를 위한 그림이나 어른들을 위한 것 모두 결국은 마찬가지의 그림인 것이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원이 완전히 겹쳐질 때 하나의 중심을 갖듯이, 사람마다 이해와 감정의 폭이 다르므로 공감과 해석의 범위가 보는 이에 따라 차이가 날 뿐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이든 어른을 위한 그림이든 그 작품이 고유의 리듬과 서정을 지니고 의미를 전달했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과연 내가 그린 그림이 작품성이 있느냐 하는 것은 객관적인 평가의 문제이니 나로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여간 나는 나의 정서와 리듬을 내 나름대로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인지 설명적이며 동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고집을 부리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어린이를 위한 그림인지 어른을 위한 그림인지 잘 구별이 안 되는 그림을 그리게 되는가 보다.
내가 어린 시절 대문 밖을 나가면 “복남이네 어린아이 감기 걸렸네 에이 취!” 하고 동네 아이들이 노래를 불러서 그것이 싫었으나 커가면서 어린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해서 주일학교 반사 할 때는 항상 “봉남이네 어린아이 감기 걸렸네 에이취!” 하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길을 가다가도 어린아이를 보면 그냥 지나가지 못했다. 항상 주머니 속에 껌이나 사탕 같은 것을 넣고 다녔다. 울고 있는 아이나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면 한 번이라도 더 보거나 미소를 지어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시간이 있을 때는 이웃 유치원이나 탁아원 같은 곳을 지나갈 때는 기웃거리며 아이들을 구경했다. 그래서인지 방정환 선생님이 만든 어린이 단체인 색동회에서 활동하였다.
고아원이나 초등학교 또는 어린이 행사에도 꼭 참여했고 우리 아이들이 운동회를 한다든지 무슨 행사가 있으면 카메라를 들고 잘도 쫓아갔다.
그러노라면 나도 어린아이마냥 즐겁기만 했다.
요즘에는 과자 대신 그림엽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귀여운 아이들에게 주기 위해서이다. 몇 년 전 개인전시회 때는 아이들을 위한 전시회를 했었다.
전시장 입구에 풍선을 수백 개 불어 달아 놓고 아이들에게 한 개씩 나누어 주고, 조금 큰 아이들은 미술연필을 한 자루씩 나누어 주었는데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나는 어린이를 그리기 위해서 친구 유치원에서 2년 동안 어린들과 같이 뒹굴면서 스케치를 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너무도 순수하고 소박하다. 그래서 어린이 그림을 많이 그려서 동심화가로 알려졌다. 매년 5월이 되면 각종 미술관에서 전시초대를 해주었고, 어린이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소개되어 무척 바쁘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어린이 모임에 가면 “봉남이네 어린아이 감기 걸렸네 에이 취” 하고 노래를 불러준다. 그리고 같이 즐거워한다. 이제 내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오늘에도 어린아이 마음은 그대로 남아 있다.
내 나이 쉰, 예순이 넘어도 마음만은 어린이 그대로 그림을 그리면서 어린아이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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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6)-
찬란한 삶의 빛깔들
사람은 저마다 빛깔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빛깔을 보는 눈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인간에게 있어 빛깔이라는 것은 공기처럼 가까우면서도 느끼기엔 먼 생활의 일부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이 빛깔이다.
주위의 모든 사물들이 우선 빛깔이 되어 눈으로 뛰어든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빛깔인 것이다. 커텐의 색채, 꽃병의 빛깔, 책상 위의 책꽂이, 식탁 위에 놓인 여러 가지 기물의 빛깔에서부터 음식물의 빛깔까지 다양하다. 옷, 구두, 악세사리, 그 밖의 모든 것이 색깔로써 우리에게 삶이라는 동선을 재촉한다.
밖으로 나오면 길과 건물들, 자동차의 물결, 교통신호등, 가로수, 사람들의 얼굴빛과 색색의 옷차림, 그리고 거리에 즐비한 간판들, 시골로 가면 초록빛들, 아름다운 색색으로 아롱진 꽃잎들......
우리들 존재의 공간은 색채가 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은 빛으로 보여지는 색채이고 보면 인간의 눈이란 자신의 삶을 이끌어 나가는 아주 소중한 근본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빛깔이 없었다면 우리 인간은 만물이 영장도 될 수 없었으리라. 눈이 없어 빛을 보지 못한다면 결국 촉각동물들처럼 더듬거리며 살거나 냄새에만 의존하거나 또는 소리에만 의지해야 하는 참으로 불편한 존재여서 발전력, 생존력, 기동력 등의 기능이 미미한 동물에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으리라.
다행히도 우리는 육안으로 모든 빛깔을 구별하며 살고 있으며 그 빛깔에 의하여 보다 풍부한 삶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육안뿐만 아니라 심안의 눈부신 자기성찰을 위해서 지구상에서 가장 뚜렷한 존재가 되었고, 지극히 고도로 발달된 삶을 이끌어가는 생존자가 되었다.
이 지구상에는 많은 나라가 있고 그 나라마다의 풍토에 따라 색채를 가지고 있다. 가까운 중국의 색채를 보자. 중국의 건축물이나 회화 등에서 보여 지는 색채는 적색, 군청색, 황금색이 많이 나타나고 일본에는 청색, 분홍색, 보라색등 2차색을 많이 쓰고 있다.
우리 한국의 색은 어떤가. 진갈색(기후색), 황토색(지형색), 백색(민족의 심상색)이 주를 이루고 있다.
아름다움을 향한 의지는 사람의 본성이고, 그 아름다움의 기준은 빛깔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아침에 거리에 나서면 피부에 부드럽게 와 닿는 싱그러운 아침햇살, 대낮의 작열하는 태양의 눈부심, 눈과 가슴에 낙인 찍힌 듯 한 저녁노을의 인상적인 빛깔들, 밤이 오면 어둠 그리고 그 어둠 속에 색색으로 아로새겨지는 무늬, 눈을 감으면 마음의 빛깔들이 홍수처럼 밀려든다. 꿈을 꾸며 기억의 샘이 내 무의식의 빛깔로 하여금 옛것을 되살려내게 하고, 갈 수 없는 곳으로 나래를 펴게 한다.
그 찬란한 빛깔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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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7)-
개구쟁이 옛 친구에게
사랑하는 친구여
그 옛날 우리에게도 장난꾸러기 어린 시절이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나이 들어 아이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버렸으니 정말 세월이 유수와도 같군. O형, 친구야! 아니 개구쟁이 짱구야! 이게 부르기가 더 편하군. 자네는 지금 몇 남 몇 녀의 아버지가 되었는가?
나는 남매를 두었다네.
우린 어릴 때 정말 남 못지않은 개구쟁이였었지(사실 나는 너만 따라다니던 겁 많고 얌전한 아이 였었지만). 지금도 간혹 생각나는 이야기들 모두가 어른이 되어서 겪은 일들보다는 자네와 개구쟁이 짓 하던 생각들뿐이라네. 참외서리 하던 시절, 참외밭에 몰래 기어들어 갔을 때 긴 장대를 휘두르며 뒤쫓던 영구네 어르신 생각이 간절하네. 매미채 들고 뒷산을 헤매던 일이며 중량교 개울가에 나가서 삼태기와 싸리나무 소쿠리를 들이대고 잔챙이, 피라미, 올챙이, 방개들을 잡던 일이 엊그제 같네. 봄이면 딸기밭에 가고, 여름이면 중랑천에 가서 수영하고, 가을이면
태능까지 달려가 배 따먹던 추억들이 한철도 거르지 않고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칠 때마다 나는 다시금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네. 이제는 흘러간 먼 옛날이 되어버렸네.
아이들이 벌써 그 같은 기억 속의 주인공이 되고 보니 개구쟁이 짓 하면서 불평하는 아이들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아 나로 하여금 옛날로 빠져들게 한다네. 우리는 그 옛날과는 아주 다른 시대, 단순히 문명이 발달된 시대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방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만큼 이제는 어린 자식에 대해서도 그들의 불만을 소상하고 섬세하게 듣고 해소시켜 주는 일에 진실과 애정으로 임해야 하겠다는 생각이네. 아마 자네도 마찬가지라고 믿는 바이네.
어린 아이들에게는 꿈이 있지. 그것도 무한히 크고 맑은 꿈이 있지. 물론 어른들에게도 꿈이 있지만 어른들의 꿈은 맑지 못하다는데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다네. 아이들의 꿈은 순수하고, 큰 것 같으면서도 크지 않고, 작은 것 같으면서도 작지 않지. 아이들의 꿈은 인간의 본성에 주어져 있는 꿈이기에 아름답고 밝고 끝없이 순수하다네.
나는 영웅이 될래!
나는 학자가 될래!
나는 군인이 될 거야!
나는 목사가 될 건데!
나는 선생이 될 거야!
나는 냉차장수 해서 달고 시원한 것 실컷 마실 테야!
그리고 너도 주고 말야!
나는 인형나라의 영웅이 될래!
나는 동화나라의 병정이 될 건데?
나는 네 시녀가 되어 줄께!
나는 동물나라에 가서 살 거야!
나는 저 구름 타고 나는 사람이 될 거야!
나는 엿장수가 될 테야!
아이들의 꿈은 이렇게 티가 없고 어떤 계산도 없다네.
그저 순간순간 생각나는 대로 꿈이 되는 것이지!
아무튼 아이들에게 즐거운 생활공간, 티 없이 맑고 밝고 푸르게 뻗어나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우리가 받아온 것처럼 끝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할 걸세!
그리하여 놀이터와 공해 없는 환경 그리고 정신적인 교양과 올바른 생활습관을 함께 갖추어 그릇됨이 없는 전인교육에 힘써야 할 나이와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서로가 어버이 되었다는 책임으로 지혜로운 ‘개구쟁이 대책’을 마련해 보세. 이만 줄이네.
봉남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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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8)-
모티브를 찾아서
이젤 앞에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하얀 캔버스를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임은, 소설가가 원고지를 앞에 두고 담배를 먼저 꺼내 물고 불을 붙이고 뿜어낸 연기를 바라보는 망설임이나, 연주자가 연주하기 전에 피아노 앞에 앉아 손을 비비는 모습과 비슷할 것이다. 의자가 불편할 까닭도 없겠지만 앉은 채로 몸을 움직여 의자의 상태를 점검해 보거나 팔레트에 짜진 물감의 상태를 재확인해 보고 왼손에는 팔레트, 오른손에는 붓을 든다.
이제는 그리기만 하면 된다.
유난히도 커 보이는 하얀 캔버스가 나를 노려보는 것 같다. 캔버스와 나의 눈이 마주치자 은근히 겁이 난다. 망설이던 나는 살며시 붓과 팔레트를 다시 놓는다. 내가 담배를 피운다면 담배를 꺼내 물것이나, 그렇지도 않다. 안방의 텔레비전은 이미 꺼졌고 초등학생인 아들과 딸이 곤히 잠들었고, 아내의 꿈틀거림을 보니 아마도 가벼운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발을 의자 밑 턱에 얹고 두 팔을 들어 손으로 머리 뒤통수를 받치고 반좌 반와의 자세를 취해 본다. 너무나 눈에 익은 내 화실 안을 새삼 둘러본다.
손을 뻗으면 언제나 잡을 수 있는 거리에 물감튜브들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다. 온 방을 채운 완성된 그림과 미완성된 그림들이 지저분하게 걸려 있고 세워져 있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이젤을 대한다.
그러나 가벼운 흥분이 좀체 가시지 않는다. 그것은 아내와의 대화 속에서 우연히 튀어나온 한마디가 나의 귓전에 울려 마치 몽롱한 취기의 구름을 헤치고 무슨 천계(天啓)와도 같이 나의 영감의 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농촌의 아름다운 정경이 머릿속에 구상되고 있었고, 동화 속의 어느 풍경이었다. 내 딴엔 가벼운 흥분을 가누지 못하고 구상에 구상을 거듭하고 머릿속에서 정리하여 막상 이젤 앞에 앉아 캔 아내의 천계의 한마디를 그때 그 자리에서와 같이 부활시켜보려 하였지만 애매 몽롱하기만 하다. 마치 산상의 부활기도와도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잡힐 듯이 잡히지를 않는다. 나는 별수 없이 미리 펴놓은 잠자리에 코를 박고 잠이 든다.
이렇게 해서 세워놓은 빈 캔버스는 주인이 한 점도 그려 놓지 않은 그림을 그려주기만을 기다리며 며칠이고 이젤 위에 놓인 채 빛이 바랠 때가 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새벽.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이젤 앞에 앉았지만 여기서부터 다시 악전고투가 시작된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고......
이렇게 해서 체념 반 위안 반으로 굳어진 물감 위에 다시 물감을 짜고 서서히 붓에 힘을 주어 그리기 시작한다. 물감의 아름다운 빛깔이 캔버스 위에서 반짝인다. 이제는 붓이 잘 나가 그림이 잘 될 것 같다.
아름다운 색채를 찍어 화폭에 옮기니 비로소 소박한 기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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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9)-
마술사 같은 우리 집
우리 집은 용도가 다양하고 설계가 잘된 편리한 집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하고 있다.
직장에서 퇴근을 하면 먼저 아이들 방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방이 좁다하고 장난감을 늘어놓고 두 남매는 열심히 소꿉장난을 하고 있다.
장난감을 정리하고 나면 그 방이 바로 우리 안방인 것이다.
내가 옷을 벗어 걸고 앉으면 아내가 밥상을 들고 들어온다. 이때는 안방이 식당으로 변한다. 조금 후에는 그 방이 나의 서재이자 화실이 된다.
그러니까 네모진 우리 방의 구조는 남쪽 벽은 나의 서재이자 화실이고 동쪽 벽은 아이들의 오락장 이자 공부방인 셈이다. 북쪽 벽은 아내의 살림이 놓인 안방이다. 손님이 왔을 땐 우리 방은 응접실로 변하고 저녁이 되면 침실이 되는 것이다.
우리 집은 이렇게 편리하고 용도가 다양한 저택(?)이다.
어떤 급한 때는 화장실로 변모하기도 한다. 오순도순 온 가족이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 맡은 일을 할 때는 웃음으로 꽃을 피운다.
이렇게 편리하고 좋지만 어떤 때는 짜증나고 불편한 때도 있다.
주로 저녁에 그림을 그리는 나로서는 괴로울 때도 있다.
그림을 그릴 때는 물론 내 방인 남쪽 벽에서 그린다.
그림을 그리고 말리기 위해 내 방 벽 쪽으로 세워 놓는다. 요란스런 아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옷에는 울긋불긋 물감 칠을 한 추상화가 그려진다. 그럴 때 나는 조심하지 않는다고 소리를 높인다.
물론 아이들도 장난감을 늘어놓고 그 장난감이 침범당하지 않도록 경계한다.
내가 내 방에서 한 치만 움직이면 아이들 장난감이 망가지는 것이다.
그럴 땐 아이들도 이때다 생각하고 나에게 큰 소리로 공격해 온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아이들 방인 동쪽 벽과 북쪽 벽까지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번에 첫 개인전을 끝내고부터이다. 그동안 그림들을 액자에 끼우지 않은 캔버스였을 땐 벽 쪽으로 잘 쌓아 놓기 때문에 내 방만으로도 충분했는데 개인전이 끝나자 그 그림들이 액자를 둘러 부피가 대문짝만큼씩 커져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백 호짜리 경우에는 내 방 벽 쪽을 모두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아내를 볼 때마다 눈치만 살피게 되었다.
다양하던 우리 방이 한 가지 더 늘어 이번에는 크고 작은 그림들이 벽을 꽉 채운 전시장이 되었다.
아이들 방은 다행히 방 복판으로 옮겨와 상을 펴고 공부를 한다.
예전에는 서로 등을 맞대고 일하던 때보다 이제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일할 수 있게 되어서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 본다.
나는 오늘도 추상화 그려진 물감 묻은 양복을 걸치고 즐겁게 출근한다.
내일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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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0)-
동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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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은 서울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도 마음만 앞설 뿐 실천으로 옮기기란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바쁜 일들에 묶여 먼 곳으로 나들이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온 것이다. 경기도 이천에서 도자기를 굽기 위해서였다.
아내와 함께 실로 오랜만에 나들이를 떠나게 되니 마치 어린이처럼 마음이 부푸는 것이었다.
마장동에서 시외버스를 탔다. 잠시나마 일상을 벗어나 버스에 몸을 실으니 긴장이 풀리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차창 밖으로는 산과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하늘과 강도지나 간다.
하늘은 끝없이 맑았고 둥둥 떠다니는 구름조차도 풍성함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몇 십 년씩 되었으리라 짐작되는 길가의 가로수들은 꿋꿋이 서서 그 아래로 일제히 그림자를 던진다. 어린 시절 뛰놀았던 개울가 비슷한 곳에서는 그때의 나만 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놀고, 구김살 없이 건강한 표정으로 물과 들과 한 몸으로 어울려 있는 풍경은 콧날을 시큰하게 할 지경이었다. 순간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치며 그곳으로 향해 달려가고 싶어진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스무 해, 서른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유년시절은 저만큼 눈앞에 보이는 듯 변하지 않고, 잡힐 듯 알 듯 앞에 펼쳐져 있다.
잔뜩 풍경에 도취해 있던 나는 옆에 앉은 아내를 돌아본다. 아내도 차창 밖을 내다보며 행복해 하는 표정이다.
그 모습을 본 나의 마음은 뭉클해졌다.
토실토실하고 건강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제는 창백하고 야윈 얼굴에 잔주름이 서려 있다.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면서 한편 감사와 사랑이 앞선다.
내가 아내와 결혼한 지도 벌써 십 년째, 지난 십 년 동안 아내는 두 아이를 낳아 길렀고, 사 년 동안을 위장병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나와 두 남매를 위해 열심히 헌신해 왔다. 가난한 화가에게 시집왔으나 투정 한번 없이 어려울 때는 기도해주며 위로해주었고, 사랑으로 이해를 아끼지 않았다.
이제 아들 명근이는 열 살이 되었고 딸 수진이는 여덟 살이 되었다.
아내는 지난 십 년 동안 장하게 살아왔다. 앞으로도 이십 년, 삼십 년, 육십 년, 아니 백 년을 용감하게 살아갈 것이다.
10년 전 결혼 때는 제주도를 가고 싶어 했다. 결혼 10주년 때에는 제주도에 가자고 약속을 했으나 아직도 생활에 쫓기다 보니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내년에는 꼭 이행하리라 다짐해본다.
그러면서 나를 위해 고생을 마다않던 아내의 거친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아내는 말없이 미소로 답한다.
차창 밖을 내다보는 표정이 무척이나 평화스러운 얼굴이다.
아내는 분명히 알고 있다. 이 작은 여행(?)으로 인해 억눌렸던 가슴에 청량한 몇 줄기의 바람이 불어와 생활의 찌꺼기를 날려 보내고 있음을, 비록 흡족하지는 않지만 오랜만의 부부동반 외출을 통해 새삼스럽게 사랑을 확인하고 있음을.
자동차는 신나게 달리고 아내와 나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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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1)-
최선을 다할 때
결혼하여 새로운 살림을 시작하면 살림이 한 개씩 늘기 시작한다.
세월이 흘러 아들딸을 기르면서 정말 무섭도록 살림이 늘어만 간다.
온갖 복잡한 물건들, 종류가 너무나도 다양해진다. 그렇지만 어느 한 가진들 버릴 수 있을까?
이 땅에서 살아가자면 너무나 많은 물건들이 필요하다.
장롱, 찬장, 책장, 냄비, 그릇, 수저, 옷, 구두, 우산, 볼펜, 책, 라디오, 텔레비전 등등 일상생활 속에서 거의 필수불가결한 물건들이다.
알뜰히 모은 돈으로 물건을 새로 장만했을 때의 행복감, 이런 물건들이 생활의 편의를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삶을 부축해주기도 한다.
결혼을 하고 십 년 하고도 반이 넘으니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고, 그 많은 것들은 그만큼 생활의 규모가 커졌다는 의미도 된다. 누구나 많은 물건들을 갖고 싶어 하고 사들인다. 그 물건들은 곧 삶을 살아가는 데 힘을 상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살림이라고 들은 기억이 난다.
호랑이를 쫓으면 달아나기라도 하지만 살림이란 쫓을 수도 버릴 수도 없다고 한다.
그 많은 물건들은 우리의 삶을 살찌우고 편하게 그래서 즐겁고 행복하게 하려고 만들어진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것들이 우리를 위해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그것들을 위해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사극 영화 같은 데서 이사 가는 장면을 보게 된다.
괴나리보따리 한두 개 정도 또는 낡은 농이나 궤짝 같은 퍽 구질구질해 보이는 때 묻은 이불 보따리나 물동이 같은 질그릇, 먼지와 때 묻은 우그러진 가방 같은 것들이 소등에나 지게에 얹혀가던 모습들이 생각난다.
오랫동안 이웃에 살던 정이 아쉬워 떠나는 집, 보내는 마을 아낙네들이 행주치마에 눈물을 훔치며 아쉬운 이별을 하던 정경, 이렇듯 옛날의 시골살림들은 구수한 인심과 더불어 가난해도 행복한 풍경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물건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애쓴다.
물건에 대한 애착과 욕심, 물건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유혹, 물건을 많이 가질 때 자신감과 힘을 상상해 본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싶어 하고, 보다 고급 물건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물건을 만들고 소유하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일하며 평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사람과 사람은 인연과 우연으로 인간관계를 맺고, 사회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에 대하여 조화롭게 주고받는 사랑을 하며 사는 것에 행복을 찾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음악의 가사를 생각하며 듣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곡만 들으며 사는 사람이 있다. 가사는 형태, 즉 눈에 보이는 물체를 말하고, 어떤 사람은 곡, 다시 말하면 정신세계(추상)를 보며 살아가고 있다.
형태의 세계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행복이고, 추상의 세계는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행복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밖에서부터 나에게 접근해오는 행복이란 물질을 말하고, 나에게서 밖으로 나가는 행복이란 창조에서 오는 것이다. 모든 물건들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즉, 맨발은 하나님께서 만든 그대로이지만 구두는 인공적인 것이다.
사람이 만든 물건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고 행복이 있지만 어찌 하나님이 만든 아름다움에 비할 수 있을까?
국어사전을 보면 행복은 ‘심신의 욕구가 충족되어 조금도 부족감이 없는 상태와 복된 좋은 운수’라고 정의되어 있다.
외부에서 내면으로 와 닿는 행복보다 내면에서 외부로 발산하는 행복은 상대적이지 않고 영원한 행복일 것이다.
물질에서 찾는 행복, 사랑 속에서 찾는 행복도 아름답지만 자기 자신의 정신세계를 발산하는 행복, 나에게 주어진 것에서 최선을 다할 때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강한 행복이 밀려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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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2)-
마음의 여행
사람은 혼자 뚝 떨어져 외톨이로 살 수 없나 보다.
외롭다거나 불편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산다는 것 자체가 만나 이야기하고 정을 나누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목숨을 잘 다루기 위해 먹고 입고 잠자는 것부터 걷고 달리고 팔다리 내뻗는 것까지 늘 정성 들여서 하듯이, 내가 자식에게 향한 사랑 또한 같은 것 같다.
사랑하는 법은 사람을 끌어안는 법이라고 가르쳤던 아들 명근이가 군대에서 첫 휴가를 왔다. 애송이 였던 학생시절 마냥 까불어 대던 아들이 이제 제법 어깨가 딱 벌어진 늠름한 군인이 되어 돌아왔다.
서로 따뜻한 손길 주고받고 정감어린 말 나누며 성큼 다가온 아들이 대견스럽다.
우리 네 식구가 저녁을 먹고 대학로로 바람 쏘이러 나갔다.
온 가족이 손에 손을 잡고 거닐며 행복감에 젖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작은 기적을 많이 경험했다.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받아 감사하며 걸어왔다.
몇 년 전, 그 해 여름의 휴가를 다시 한 번 떠올린다. 어느 큰 회사에서 전국 유명한 지역에 콘도를 지어놓고 각 분야의 예술가들 중 한 가정씩 초청하여 쉬도록 했는데, 화가 중에는 우리 가정이 선택되어 3박 4일 동안 편안히 쉬도록 모든 것을 제공해주었다. 딸 수진이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 이어서 혼자 남아 공부하겠다고 하여서 집에 남겨두고, 대학생이던 아들과 아내 그리고 나 세 식구가 초대받아 갔다.
눈앞에 전개되는 전원 풍경들, 깨끗하고 정돈된 숙소, 창문 아래에 펼쳐지는 수영장, 뒤쪽에 잘 다듬어진 골프장......
아름다운 자연을 볼 때 행복했었다. 보잘것없는 생물이나 풀 한 포기까지도 태어나 자라고 살고 죽는 이야기, 씨 퍼트리고 새끼 낳는 생애가 거기 있고, 제멋대로 지내고 거저 살고 건성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닌 분명히 정해진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
지금까지 아내와 같이 살아오는 동안 밤이 으슥하도록 대화를 많이 해보았지만 아들과 같이 우리 세 식구가 밤이 새도록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던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이 고향이라고 말하지만 지금은 시골도 도시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에 고향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사계절의 변화가 있고 대자연 속에서 만물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가보지 않은 길과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던 곳을 가보는 것이 여행이라면,
새로운 느낌과 생각을 선물해주기 때문에 무엇이든 해볼 만하고 어디든지 가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은 놀고, 먹고, 마시고, 떠들고, 돈 많이 쓰고, 뽐내는 것이 아니라 풀잎 냄새, 온갖 울음소리,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를 퀴퀴하고 매캐한 내음,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산과 들, 도회지의 그 독한 바람을 맑게 하고 깨끗하게 해주는 숲과 계곡, 대자연의 신비와 하늘의 비밀과 사람과의 신비함을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50생애는 감사의 생활이었다.
그동안 닥쳐온 큰 고비들도 그저 술술 풀려나가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는 아직 갖지 못했고,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던 색다르고, 낯설고, 이상야릇한 것들이 많이 있는 자연을 보면서 경탄해 왔다. 내 마음속의 동화공장에서 그림을 만들어낼 때에는 내가 어딘지 철학자 같기도 하고, 마술사 같기도 하고, 또 예언자 같기도 한 그런 생각에 행복해진다.
화가 피카소가 ‘상상하는 모든 것은 실재한다’고 했는데 나도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누가 나에게 세상에서 정말로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많지만 일단 정욕과 식욕과 변덕스러운 욕심 따위의 바보 같은 생각들을 제쳐두고 더욱 뜻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미술) 쪽으로 대답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갈 때 앞을 바라보며 앉는다.
미래를 계획하면서 살기 위해. 그러나 나의 경우는 오늘도 뒤돌아 앉아 계획에 없던, 상상도 못했던 풍경이 전개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 미래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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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3)-
나의 가족 이야기
나는 하나님께서 인체 중에서 우리 몸을 감싸고 있는 살갗을 만들어주신 것을 감사한다. 얇은 살갗은 병균이 몸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땀을 내보내며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과, 닿거나 아픈 느낌, 차고 더운 느낌, 딱딱하고 부드러운 느낌, 까칠하고 매끄러운 느낌, 그리고 물체의 크기와 모양, 움직임 등 을 살갗만으로도 느낄 수 있게 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가족 네 식구는 항상 곁에서 살갗을 마구 뒤섞고 호흡 하여 지내다보니 느끼지 못했는데, 새삼 우리 가족을 조리개를 확대해서 들여다보니 새롭게 보인다. 항상 내 곁에서 어린아이처럼 애교 떨며 자라던 개구쟁이 명근이와 수진이가 어느덧 어른이 되어 곁에 있잖은가,
놀랍다. 어느새 이렇게 커버렸단 말인가?
1995년 봄에 명근이는 군에서 제대를 하여 다시 복학을 했고, 수진이가 벌써 대학을 졸업했으니......
그러고 보니 나의 아내이자 내조자인 아름다움을 뽐내던 순임씨를 만나 결혼한 지도 벌써 스물다섯 해, 은혼식이 있는 해가 되었다. 정말 세월이 빠르다.
나는 어린 시절,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꿈 많은 무지개빛 동심의 세계 속에서 성장했다.
사람은 혼자 뚝 떨어져 외톨이로 살 수 없으므로 결혼을 하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꿈 많고 들떠 있던 기억보다는 어려웠던 생활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나이가 차고 인생의 마디 마디와 고개를 넘어서다 보니 어느덧 세월이 흘러 모르는 사이에 해와 달이 수없이 넘어갔다.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미술만 생각하며 지내오다 보니 가정에는 소홀했었다.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더 그렇다.
그러나 아내의 눈물 어린 헌신과 내조, 봉사로 그 자리가 메워졌고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전공을 찾아 공부해온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가족은 벽돌이며, 그 벽돌 한 장 한 장이 쌓아 올려져 사회와 나라를 이루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가족이 없으면 삶의 보금자리이자 사람들의 둥지와도 같은 가정이 없게 되고, 그러면 사회와 국가도 존재할 수 없다.
가족이야말로 최소의 사회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정은 지상의 작은 낙원인 셈이다.
우리 가족이 빚어낸 삶의 이러저러한 모습과 이야기들이 역사를 이루고, 온갖 미담을 엮어갈 것이다.
기쁨과 슬픔도 바로 그 속에 있었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원천도 우리 가족 속에 있으리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뭔가를 남기고 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고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살다 간 흔적을 남기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고 소망이고 기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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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4)-
봄의 향기
오랜만에 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오니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두어 송이 떠 있다.
구름을 바라보며 맑은 공기를 깊이 빨아들여 시원함을 맛본다.
긴 장대를 두 손에 잡고 높은 하늘로 솟구치다가 마침내 손을 놓고 포물선을 그리며 훨훨 날아간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우리의 땅덩이는 호랑이 등 무늬처럼 곡선으로 펼쳐지고, 백두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오는 산줄기들이 곡선미의 장관을 이룬다. 그 곡선들이 하늘을 날아 땅으로 내려앉으면서 강줄기가 비단 폭처럼 흘러 마을마다 사람들의 가슴마다 맥박을 이어준다.
기와집은 위로 곡선, 초가집의 지붕은 아래로 곡선미를 이루고 기와 집은 하늘 쪽으로 곡선을 이루고 수천 년을 살아온 우리의 마음도 곡선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물려받은 자랑스러운 자연, 우리 민족의 바탕은 전원과 강산에 뿌리내리며 살아오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자연을 분류하고 분석하고 실험하는 태도로 접근했지만, 우리 선인들은 인간 모두를 스스로 자연 속에 포괄시키고 자연을 보호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을 예찬하면서 사는 민족들이었다.
겨울에 쌓였던 눈과 얼음이 녹아 콸콸 소리를 내며 바다로 향하는 시냇물, 이제 도시 환경에서 벗어나 전원을 찾고 넓은 들길을 걸어보자. 따사로운 봄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쪼이는 그 길, 흙 내음을 맡으며 봄을 맛본다.
꽃향기 아름답고 어딘지 모르게 구수하고 정겨운 추억의 그 내음,
오순도순 인정이 넘치던 사랑방의 그 냄새, 쑥 내음에 가슴 설레며 봄 언덕에서 꽃바구니를 들고 꿈을 캐는 아가씨들,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추억들, 이런 것들은 분명 흙 속에 깊이 뿌리내린 정서의 정원이다. 자연은 참으로 위대하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삼라만상에게 따스한 입김을 불어 넣어주는가 하면, 봄은 우리 인간의 생명의 빛깔로 파랗게 수놓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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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5)-
인간과 자연사이
내가 그림 그리는 전업 작가로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째다.
나는 비교적 늦게 화가의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그런 공부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체계적인 그림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글을 쓸 때 서론, 본론, 결론을 쓰듯이 작품생활을 하는 나도 같은 과정을 밟아야 했다.
나는 피 끓는 서론기랄 수 있는 삼십 대에 나의 눈에 비친 강한 힘이 솟는 선과 색채가 나를 유혹하고 있었고 인간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창조행위, 이런 것들은 모두 나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나에게 강한 신앙심을 그리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더욱 밀착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3층 높이의 건물 속에서 창 너머로 내려다 보았는데 그 아래에는 갑돌이와 갑순이가 지나가고 있었다. 15층쯤 다시올라
가서 내려 보니 그 아래에는 남자가 지나가고 여자도 지나가고 있었다.
30층으로 올라가서 내려 보니 자동차가 지나가고 인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의 시야가 낮을 때에는‘과장님’ ‘사장님’ 하듯이 높고 낮은 계급의 수직선이 보였었는데 시야가 높아졌을 땐 수평선, 그래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신과 나와의 관계를 더듬어가면서 동심 시리즈를 그려왔다.
화구를 메고 야외로 나가 그림 그릴 준비를 하고 앉아 앞을 응시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은 가까이 확대해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고 무질서한 것 같았으나 멀리에서 바라보면 모두 곡선으로 안정된 평화로움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건물들이나 모든 과학 물은 가까이에서 보면 생명이 없는 직선으로 질서 정연하게 된 것 같은데 멀리에서 보면 그렇게 무질서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과, 인간이 만든 과학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며 그 속에 신과 인간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이 깃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삼십 년 동안 열일곱 번 작품을 발표했고, 나는 자연적으로 자연과 인간에게 천착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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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6)-
내가 짓고 싶은 집
월간 <**주택>에서 ‘내가 짓고 싶은 집’을 써달라고 원고 청탁이 와서 집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지금까지 여러 모양의 집에서 살아왔지만 내가 살던 집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특징과 독특한 추억이 서려있기 때문에 모두 잊지 못할 집들이다. 새삼 내가 짓고 싶은 집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지난날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꿈이 서린 집이 떠오른다.
그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앞과 옆으로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기역 자의 연못이 있었다. 정문에서 잔디 사이로 징검다리 돌멩이를 밟고 걸어가면 돌계단이 나타난다. 조금 걸어 올라가면 수많은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꽃나무 사이로 우리 집이 앉아 있다.
하늘에서 내려 보면'ㅁ'자 형의 집인데 'ㄷ'자로 마루가 있어서 세 방향으로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오른쪽'ㄱ' 자 연못 옆에 아래채의 집이 있는데 윗채와 아래채 사이 연못 위로 구름다리 마루가 놓여 있었고, 연못에는 연꽃과 난초꽃이 많이 피어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이 집에서 태어났고, 소꿉장난하며 유치원을 거쳐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 서울의 인구 중 60퍼센트 이상이 집이 없다고 한다. 나도 그 60퍼센트 사람들 속에 들어 있으니 외롭지 않고 앞으로 집 지을 꿈이 있으니 즐겁다.
내가 집을 짓는다면 우선 마술사 같은 집을 짓고 싶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나에게는 네 식구가 있으니 30~40평 정도면 되지 않을까? 어린 시절에 큰 집에서 살아 보았지만 지금은 나에게 분수에 맞는 적당한 크기면 좋을 것 같다.
아름다운 호숫가의 양옥집보다 도심 속의 조그마한 집, 마을이 내려 보이는 언덕진 곳, 앞면에 커다란 창 너머로 하늘이 보이고 마을이 내려 보이며 사람들이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소박하고 담장이 없는 집을 지으면 좋겠다.
우선 그림을 그리는 직업을 가졌으니 넓지도 좁지도 않은 화실 공간이 있어야 되겠고, 한쪽 벽면은 밖이 환히 내다보이고 한쪽 벽은 책을 많이 꽂아두고 또 한쪽 벽면은 그림을 걸어놓고 싶다.
아파트처럼 상자 속 같은 공간이 아니라 앞면 천장이 2층 높이로 높아야 될 것 같다. 거실에서 반 계단을 내려가면 부엌이 있고, 거실에서 절반 높이 한 층을 올라가면 작은 방 세 개에 잠자는 침실을 만들겠다. 거실 겸 화실은 모든 것이 해결되는 다용도 방이 되어야 할 꺼다. 손님이 오면 응접실로, 공부할 때는 공부방, 음악을 듣고 싶을 때는 음악 감상실이 되고, 미술관도 될 것이다.
연갈색의 시원한 봄의 향기, 생명의 빛깔인 녹색 여름, 기쁨의 색깔인 가을, 편안한 흰색의 겨울이 보이는 집, 거실 안에는 색채가 있고 소리가 있고 아름다운 향기가 있는 다목적 집을 짓고 싶다.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은 그 외관이 아름다웠었으나 지금 성인이 되어 내가 짓는 집은 외관이 아름다운 집이 아닌 내면세계가 아름다운 그런 집을 짓고 싶다. 꽉 닫아놓고 혼자 사는 집이 아니라 열어놓고 누구든지 자유롭게 왕래하는 집, 도시 속에서 조그마한 예술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집, 주어진 공간 안에서 행복하고 풍요로운 마음이 있는, 그런 집을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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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7)-
탈춤과 그림
요즈음 텔레비전이나 신문 등에서 ‘우리 것’ 또는 ‘전통’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 있다. 나의 화실이 대학로 주변이어서 젊은이들이 즐기는 탈춤이나 풍물놀이를 자주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스케치북을 들고 그것들을 스케치하다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살며시 붓을 놓고 말았다.
은은하고 구수한 우리의 옛것이 과연 이것인가 의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한다. 일찍이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Taynbee)는 ‘일류역사는 응전과 비전의 율동’이라고 말했듯이, 인간은 환경의 굴레 속에서 적응과 극복을 되풀이하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성격이 형성되어 왔다. 이처럼 환경은 인간의 성격 및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 개인과 민족은 나름대로 특성을 지니게 되어 온 것이다.
우리 한국인에게는 한국적인 사고방식이 있고, 중국인에게는 중국적인, 영국인에게는 영국적인 사고방식이 나름대로 형성되어 그것이 각자의 전통으로 이어져 온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지리적인 것 때문에, 다시 말해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는 대륙과 인접해 있는 반도로서 북쪽에는 산악지대, 남서쪽에는 평야가 있는 지리적 조건에 영향을 받아 대륙적인 기질과 도서적인 기질이 혼재했고, 왜적의 침략이 잦아 서로 협력하고 저항하고 인내하면서 강한 민족으로 길들여졌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드러냈고, 우리 조상들은 자연현상에 순응하고 참아내는 곡선 민족이었다.
외래문명이 혼존한 지금 우리 것, 전통을 살리겠다는 노력이 가해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노력이 벌어지고 있음을 본다.
과거에 하던 것을 똑같이 해볼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조상들의 원형을 바꾸어서도 안 된다.
내가 어린 시절에 많은 마을사람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즐거워했던 것을 기억난다. 소리와 리듬과 몸의 율동은 은은한 곡선으로 이루어졌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왔던 서양 사람이 우리 민족을 처음 본 인상은 흰 옷과 긴치마를 입고 발이 보이지 않아서 걸어갈 때 멀리에서 보면 유령이 가는 것 같아 보여 ‘한국은 유령나라’ 같다고 했단다. 조용한 우리 민족의 리듬을 아주 잘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춤은 들뜨지 않고 차분하고 조용한, 마음을 가라 앉혀주는 전통 춤이었다.
젊은 세대인 대학가에서부터 우리의 민족 춤을 시작하여 활발하게 하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나는 부끄럽게도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우리의 실제 탈춤을 구경했다.
그것도 젊은이들의 춤에서...
나는 탈춤을 그리기 위해 동작의 움직임과 가면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스케치를 하였다. 탈, 그 속에 있는 고발과 광기 어린 폭발, 직선적이고 격정적인 점에 놀랐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 ‘이것이 과연 우리의 춤이었던가?’ 하고 반문해 보았다.
내가 어린 시절 아무 곳에서나 덩실덩실 어른들 따라 추던 춤은 이제는 전문가들만(춤을 배운 사람만) 출 수 있는 춤이 된 것 같다.
물론 작년에 피었던 꽃이 금년에도 똑같지 않다. 작년 꽃의 빛과 향기가 그 전년과 다르듯이 금년에도 똑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꽃의 이름과 목적은 작년과 금년에도 똑같듯이 우리 민족의 전통이 정신적인 것을. 은은하고 구수한 곡선의 우리 옛것을 찾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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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8)-
요즘 여자는 장미꽃
어느 잡지사에서 ‘옛날여자와 현대여자의 다른 점’ 주제로 글써달란다.
결론으로 요즈음 여자를 꽃으로 비유한다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장미꽃이다.
요새 흔한 말로는 남녀평등, 여성해방, 여성상위 시대라는 용어도 나온다.
옛날의 일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이웃집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 집의 남편이 매일 술에 만취되어 돌아오면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부인을 두들겨 때리는 것이었다.
그 집의 아이들은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무서워 벌벌떨고 있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 집 부인은 항상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우리 어머니에게 울면서 하소연하는 것을 들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닌 매일이었다.
어린 나의 마음에도 그 부인이 불쌍하여 눈물을 흘린 때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옛말에도 있듯이 ‘여필종부(女必從夫)’‘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은 너무 가혹한 형벌이 아니 었나 생각한다.
무조건 맹종해야 했고, 자기의 주장이나 발언권이 필요하지 않았고, 여자가 시집을 가면 좋으나 싫으나 그 집에서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어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곤 했었다.
요즘에는 어떠한가. 텔레비전을 보면 연속극 내용에서 부부가 싸움을 하면 여자는 봇짐을 싸가지고 친정집으로 달려간다. 그리고는 가족들과 같이 이혼소동을 벌인다. 내가 어려서 듣던 부부 이야기와 지금의 부부 이야기는 하늘과 땅 차이다.
물론 나도 요즈음 여자들을 좋아한다.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기의 주장도 관철하면서 활발하게 용감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지나온 과거 역사를 보더라도 큰 인물 뒤에는 항상 여자가 있었다.
체구가 비록 남자보다 작은 여자이지만 그 여자들이 큰일을 해내는가 하면, 큼직하고 당당한 체격조건을 가지고 있는 남자라 할지라도 작은 일도 못하는 것을 종종 보아온다.
남자들은 체격 적으로도 크고 큼직큼직한 물건을 좋아하지만, 자잘한 꽃무늬에 오밀조밀한 물건을 좋아하는 여자들이라도 마음이 강하고 큰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크고 웅장한 아름다움이 있는가 하면, 작고 섬세하고 가냘픈 아름다움도 있다는 말이다.
요즘 세상에서 크고 작음과 남자 여자를 가린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 아닌가 생각한다. 무조건 맹종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이제는 서로 돕고 존중하는 그런 삶이 일반적인 시대가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옛날의 여자를 꽃으로 비유한다면 가냘픈 코스모스라고 말하고 싶고, 요즈음 여자를 말한다면 이미 말했듯이 장미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색깔로 비유한다면 옛날의 여자는 원색이라 할 수 있고, 요즈음의 여자는 2차색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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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9)-
봉사와 청년
온양에서 아산만을 이은 작은 길은 울퉁불퉁 자갈길을 가운데 끼고 양옆에 10여 호의 스레트 지붕과 초가집들이 납작 엎드린 마을로 통한다.
그 마을엔 인기척이 없었다. 마을사람들은 10리 밖에 있는 백석포 초등학교에서 무료진료를 하는 날이어서 노인들은 모두 그 곳에 가고, 건강한 젊은이들은 일터에 나갔고,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간 모양이다.
하늘은 저항 없는 푸르름을 무한히 펼치고 마을의 사방을 온통 에워싼 노오란 들판을 굽어보고 있었다.
백석포 초등학교는 몇 십 년은 되었으리라 짐작되는 버드나무와 소나무들이 진 초록을 하고 묵직이 학교를 둘러 감싸주고 있었다.
뽀얀 길과 조그마한 운동장, 작은 교실 속에는 무릎에도 오지 않는 작은 의자에 궁둥이 끝만 걸치고 않아 진료를 하는 의사와 환자들, 그을은 검정에 가까운 진갈색 피부, 무쇠 같은 손, 바늘이 들어가지 않을 듯 한 강한 살결들, 연속 고개를 굽실하는 무표정한 그 얼굴들, 신기해서 교실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의사의 청진기를 보고 무서워서 울어대는 어린아이, 축 처진 앞가슴을 내어놓고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아낙네들, 지팡이를 짚고 세 발로 걸어오는 할머니, 리어커에 실려 오는 중환자들, 난생 처음 주사를 맞아 보았다는 할머니, 하얀 고무신, 곧 벗겨질 것 같은
검정색 고무신을 신고 연신 고마워하며 굽실하는 노인들......
우리 의료진들은 모두 즐거워하며 정답게 대화한다.
나의 임무는 약을 나누어주는 일이다. 그리고 모두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위의 내용들은 내가 소속하고 있는 봉사단체에서 무료진료 하러 갔을 때의 소감이다. 봉사를 한다는 것은 참 삶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봉사’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첫째로 남의 뜻을 받들어 섬김, 둘째 남을 위하여 자기를 돌보지 않고 노력함, 셋째 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함이라고 쓰여 있다. 또 사전에 ‘청년’은 생리적, 정신적으로 모든 면이 현저하게 발달한 청춘기에 있는 젊은 사람이라고 쓰여 있다. 그래서 봉사와 청년은 떨어질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푸른 청년시기에 봉사를 한다는 것은 의무이며 사명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청년들에게 무한 한 가능성과 엄청난 가치성과 독특한 유일성을 주셨다. 만약 1억 원이 예금된 통장의 돈을 찾지 못하여 못 쓰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우리 청년들은 그 달란트를 놀리지 말고 사용해야 하고 봉사함으로써 참 삶의 맛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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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20)-
독서의 계절
10월이다. 또 한 장의 달력이 넘어간다.
시원한 여름바다 풍경이 들어 있던 그림이 단풍이 무르익은 가을 그림으로 바뀐다. 달력이 한 장 넘어가니까 제법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지고 길거리 사람들의 옷차림이 바뀌었다.
가을이 되면 되살아나는 것은 ‘책을 봐야 할 텐데!’하는 생각이다.
내가 책을 못 읽은 지 오래된 것 같다. 요즘 독서라곤 신문을 읽는 것이 고작이니......
머리맡 책장에는 책이 많이 꽂혀 있지만 손이 가질 않는다.
책 위에는 먼지가 쌓여 있을 뿐이다.
텔레비전에서나 라디오, 신문, 잡지 등에서는 너도나도 사람들이 말한다.
10월은 독서의 계절이며, 식욕의 계절이라고. 나는 지난해 가을, 아니 몇 년 전의 가을까지 독서를 못하고 바쁘게 시간을 보내버렸다.
온통 생활에 쫓기다 허송세월을 한 느낌이다. 낮에는 사무실에서 시달리고 퇴근 후는 집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밤늦게야 그림을 그리는 일과였으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독서는 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은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금년 가을에도 책 한 권 못 읽고 보낼 것 아닌가.
8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정말 독서에 미쳐 있었다.
그땐 신혼시절이었는데 서울 변두리 서대문구 끝인 남가좌동 모래내에 살고 있어서 종로5가에 있는 직장을 버스로 출퇴근 하였었다.
버스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4,50분 이상이 되었고, 다행히 종점에서 살았기에 버스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출근을 하곤 했었다.
그 시절 나는 차 안에서 책을 읽으며 출근을 하였는데 그해 1년 동안 버스 안에서 읽은 책이 전집 2질(30권)이나 되었다. 흔들리는 차 속에서 책을 읽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글자가 둘로 보이고 눈이 시려왔다.
그러나 자꾸 보는 중에 요령을 터득했다. 그때의 도로는 별로 좋지 않아서 차가 많이 흔들렸었다. 차가 흔들리면 책도 같이 따라 흔들면서 보았다.
시력이 나빠지는 게 아닌가. 염려도 되었지만 시력검사를 해봐도 여전히 1.5였다. 버스 안에서의 독서는 나에게 참으로 유익했다.
마음을 살찌게 할 뿐 아니라 출퇴근길의 지루함도 피곤함도 잊을 수 있었다.
종점에서 회사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편안히 갈 수 있어서 좋았다. 만약에 책을 보지 않고 멍하게 차창 밖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면 모든 것이 불안하였을 것이다. 운전기사의 실력이 의심스러워 자동차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말고도 숱한 번민이 머리를 가득 채워 스치곤 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책을 읽을 때에는 그런 잡다한 생각들이 들어 앉을 틈이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독서로 마음을 살찌우고 편안히 출근을 하게 되어 일거양득이었다.
나는 지금도 8년 전의 그때가 그리워진다. 회사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에 그나마의 독서 기회도 잃은 요즈음, 이 가을을 놓치지 않으려면 무언가 읽기 위해 빈자리를 찾아야겠다. 걸으며 책을 읽기엔 너무도 사회구조가 복잡해져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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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21)-
나라 사랑
낫선 나라의 거리를 거닐 때, 그곳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나 물건을 살 때에도 그들의 나라와 나의 나라를 견주어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럴 때 내가 태어난 나의 조상이 묻힌 땅, 내가 자라고 우리의 역사가 이어지는 조국을 생각하는 감회가 더욱 커짐을 깨닫게 된다.
때로는 끝없는 자부심이 느껴지고 한없는 정이 솟구쳐 마음 가눌 길 없을 때가 있다. 한민족의 얼이 담긴 황토색 짙은 우리의 흙, 그 흙 내음을 맡으며 언제인지 모르게 떠오르는 정겨운 추억, 깨끗하고 소박했던 백의민족,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숨결소리가 나지막이 내 귀에 들려온다.
너무나 밝고 순진한 그 표정들.
우리의 하늘과 땅 사이를 가르고 있는 구름, 우리 인생도 구름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구름은 비를 내리고 삼라만상의 모든 생물을 생명 되게 하면서 또한 우리의 마음을 기름지게 해준다.
구름은 옮겨 다니고 떠다닌다. 나는 그 구름을 타고 머나먼 나라로 가고 오는 꿈도 꾸었고, 구름에 시심詩心 담아 멀리 띄워 보내는 아름다움도 가져 보았다.
물로 그리는 동양화나 기름으로 그리는 서양화 같은 풍경화에서도 꼭 구름이 있게 마련이고 음악이나 시, 문학에서도 구름은 예술의 모든 것에 연인처럼 되어 있다.
나의 생명으로 인하여 얻어진 온갖 것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내가 비추어야 할 빛, 빛의 존재는 더욱 절실하여 그래서 촛불을 켜고 등대를 만든다. 마음의 눈을 뜨고 진리의 광명을 비추기 위해서. 인간에게는 각기 제 길이 있고 그 길을 가면서 충실히 제구실을 다하도록 힘쓰는 것이 생활인의 자세이다.
어떤 사람은 인생은 곧 예술이라고 하고 예술이 없는 인생은 노예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어떤 일에도 예술적 창조의식과 가치를 부여하면 인생은 아름답고 그것이 곧 자기를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고, 사회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는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삶에 후회가 없도록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우리는 후손들을 위해서 사과나무를 심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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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22)-
티셔츠 예찬
나는 아무래도 신사가 되기에는 아예 틀렸나 보다. 나는 티셔츠를 사랑한다.
옷 중에서 제일 간편하고 자유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 벗어버리고 실오라기 하나 없다면 더욱 자유스럽겠지만......
내가 티셔츠를 즐겨 입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40년 가까이 입었으니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티셔츠는 나에게 작업복이요 또한 외출복이기도 하다. 나는 한 달 중에 90퍼센트는 티셔츠를 입고 사는 자유인이다. 그것은 목을 졸라매지 않고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자유로운 해방감을 주기 때문이다. 마음 문이 활짝 열려 공상의 세계에 잘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창작 인으로서는 티셔츠가 안성맞춤이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다.
청소년 시절 다른 아이들이 가슴에 영어가 가득 쓰여 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면 민족정신이 부족하고 외국 물건을 좋아하는 아이라고 흉보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진 것 같다. 지금은 티셔츠 풍년이고 가슴에는 세계 각국 언어와 그림들이 수없이 수놓아져 있어서 오히려 그것들이 발랄하게 보여서 너무나 좋다.
모임에서 행사가 있을 때나 사업체 같은 곳에서도 기념 티셔츠를 선물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는 외국에 다녀온 친지나 친구들도 너나없이 티셔츠를 선물하기도 한다.
혹시 여러분께서 내가 외국어로 쓰여 진 티셔츠를 입고 있을 때 ‘외제가 그렇게 좋은가? 그 좋은 국산품을 두고 말이야 저이는 정신이 외제 병에 걸려 썩었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나 큰 오해이다.
사람은 원래 원죄가 있어서 육체를 가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고 그것이 벗겨질까봐 꽁꽁 동여매는 습관이 생겼다.
지구 남쪽의 작은 섬, 사모아제도의 원주민들은 옷을 입은 문명인들을 ‘빠빠라기’라고 부른다. 그들은 문명인들을 보면서 너무나 불쌍해서 어쩔 줄 몰라 한다고 한다.
문명인들은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아름다운 육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무엇으로 항상 감싸는 일에 고심하고, 혹시 몸의 어느 부분이 드러나면 예의범절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 받고, 맨살을 많이 가릴수록 정숙하고 만족해하는 문명인들을 불쌍하고 측은해 한다.
그래서 문명인들은 응달에서 자란 식물처럼 창백하여 여위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옛날 우리나라는 유교의 영향으로 예의를 숭상하는 점잖은 처신에 알몸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던 것도 서양하고 같은 것 같다. 우리 동양 사람들은 온 몸은 헐렁하고 간편한 옷에 발목과 허리를 끈으로 졸라매었고, 서양 사람들은 몸에 꼭 맞게 천을 맞추고 허리와 목에 끈으로 졸라매었다.
현재 지구 위의 사람들 중에 서양 사람들이 만들고도 잘 안 입는 양복을 유일하게 일본과 한국만이 정장으로 입고 있단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양복을 안 입으면 예의범절 없는 사람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한다.
나도 예의범절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가끔 큰 모임에 나갈 때 양복을 입어 본다. 1년에 고작 몇 번 입는 양복인지라 양복 맞춘 지가 몇 십 년쯤 되어서 단추를 못 잠그는 것도 있다. 나는 거울 앞에서 넥타이로 목을 졸라매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동물들이 목을 묶으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온순해지듯이 나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 해야지’.라고 기도한다.
그 기도와는 달리 양복을 입은 날은 몸이 거북하고 더욱 빳빳해져서 남 보기에 더욱 교만하게 보여지는 것 같다.
특히 나의 경우 양복을 입은 날은 아무것도 못하는 날이다.
어쩌다 양복을 입고 화실에 들리면 어느 사이에 물감이 양복 이곳저곳에 묻는다. 비싼 양복에 물감이 묻으면 물감을 원망해 본다.
여러분께서 혹시 필자의 양복에 물감이 묻어 있을 때 칠칠맞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본인은 섭섭하게 생각할 것이다. 당신에게만 살짝 말하겠다. 좋은 아이디어를......
시장에 들러서 얇은 러닝셔츠 몇 장을 사서 가슴부분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도 써서 가족들이 입고 다니면 속옷이 겉옷이 되고, 돈도 절약되어서 일거양득이다. 나는 오늘도 티셔츠를 입고 외출한다.
“참 잘 어울려요, 티셔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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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23)-
사랑의 열매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생의 보람을 느낀다. 물론 시인도 시를 쓸 때, 학자는 연구를 할 때 삶의 의의를 발견하고, 산악인은 높은 산을 정복할 때 생의 환희를 느끼고, 기업가는 새로운 사업을 일으킬 때 생의 충실감을 경험한다.
어린아이는 소꿉장난에 몰두할 때 가장 행복을 느낀다.
어느 날 신은 천사를 불러서 지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을 세 가지 골라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천사는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는 이 지상에서 아름다운 것 세 가지를 골랐는데 그중 하나는 예쁜 꽃이었고, 또 하나는 어린아이의 웃음이었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꽃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이다. 아름답지 않은 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양과 빛깔, 향기가 다채롭게 한데 얽히어 자연의 가장 으뜸가는 미의 여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아이의 웃음 또한 아름답다. 맑은 눈으로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는 모습은 인간의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이다. 맑은 웃음은 하늘나라의 표정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천사가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신에게 가는 동안 변화가 왔다. 아름다웠던 예쁜 꽃은 이미 시들어서 추하게 되어 있었고, 어린아이의 웃음도 아름다운 모습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한결 같이 변치 않고 아름다운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은 주고 또 주고 끝없이 주는 것이었다. 받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주기만 하는 사랑이었다.
샘터에서 샘물이 넘쳐 주위에 철철 흐르듯이 어머니의 가슴 속에는 따뜻한 사랑의 힘이 한없이 솟는다. 우리는 이 사랑을 먹고 자랐다.
우리는 이 사랑의 힘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다.
사랑의 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열리기 마련이다. 따뜻한 친절의 열매, 남의 괴로움을 측은히 여기는 동정의 열매, 남의 수고를 덜어주는 협력의 열매, 높은 이상과 목적을 위해 자기의 정성을 바치는 봉사의 열매, 이것들은 모두 사랑의 나무에서 만 열릴 수 있는 열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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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24)-
아름다운 봉사
내가 생명의 전화와 인연이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한국에 생명의 전화를 처음 발족하면서 1기 상담원 교육을 시작할 때 나에게도 프러포즈가 왔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내성적인 데다가 말로 하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사양을 했다. 주변의 아는 친구들 몇 사람이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받았던 친구는 퇴근하기가 바쁘게 전화 받으러 간다고 나갔다.
그 친구는 흥분되어 많은 이야기들을 했으나 나는 다른 세상의 일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나는 생명의 전화와 다시 만났다.
생명의 전화 기금 모금을 위한 바자회에 그림을 기증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상담원은 아니었지만 점점 가족이 되어 가고 있었다. 참 묘한 인연이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도대체 전화와 미술이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데......
그리고 내가 그 단체와 어울릴 수 있을까?
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속에 무수한 사연들이떠 있는 소리(음악)와 줄거리(문학)들뿐인데.......
그러나 비록 전화 속에 감추어져 있는 형태들이지만 그 속에서 서로의 대화가 오고 갈 때 아름다운 형상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속에는 희로애락이 범벅이 된 채 나의 눈앞에 영상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고 거기에 있는 모든 줄거리에는 슬픈 얼굴, 기쁜 얼굴들이 보였다.
역시 생명의 전화는 미술과도 연관이 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눈으로 본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셨고 특별히 인간에게는 오감을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다. 우리 인간에게는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재능을 주셔서 자기 직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사고를 주셨다. 그리고 인간에게 환경을 똑같이 주었는데 똑같은 환경 속에서 두 가지방법으로 살고 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포도 한 송이를 먹으려고 하는데 그 포도송이는 알맹이 크기가 서로 다르고, 색깔 또한 다르다. 먹어보면 맛도 모두 다르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는 두 개도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A라는 사람은 그 포도송이를 먹기 위해 우선 못생기고 맛없는 것부터 먹기 시작한다.
그의 생각은 이러하다. ‘나는 맛이 없고 나쁜 것부터 먹고 맛있는 것은 아껴서 나중에 먹어야지!’ B라는 사람은보기 좋고 맛있는 알부터 따 먹었다.
A는 결국 많은 포도 알 중에 한 알만 맛있게 먹었고, B는 한 송이 모두 맛있게 먹었다.
우리 에게 똑같은 환경이 주어졌지만 긍정적인 마음과 부정적인 마음 때문에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파가니니는 어느 날 길거리를 지나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좀 서투른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서 그도 구경을 했다.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는 연주를 끝내고 모자를 벗어 동냥을 구했는데 파가니니는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 대신 한 곡을 연주해주겠다고 했다. 똑같은 바이올린이었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었고 그 소리를 듣고 많은 관람객들이 모자 속에 많은 돈을 넣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 각자에게 재능(달란트)을 주셨고 그 재능으로 봉사하도록 하셨다.
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외로운 일, 쓰라리고 아픈 일, 방황하고 눈물 어린 사연들뿐만 아니라 인생의 소중한 아름다운 체험이라든지 소망과 확신이 있는 감동스러운 이야기들이 오고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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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25)-
정신적 사기꾼
떠들썩하던 회원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차창 밖에는 포근한 담갈색으로 물들여 진 부드러운 색채가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가느다란 능선에는 솜털이 소복이 나 있고 끝의 능선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수많은 형상들이 계곡 속에 구상과 추상이 어우러져 화음이 되어 나의 눈과 귀에 들려온다. 버스속의 일행들은 숨을 죽이고 위엄 있는 자연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버스는 한계령 꼬불 길을 수없이 돌고 있었고 가끔 버스의 엔진소리만 가냘프게 들리고 있었다. 오색삼거리에서 내린 우리는 잔칫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눈은 앞에 전개되는 회 암갈색의 부드러운 살결 같은 계곡을 바라보면서 손 바쁘게 눈에 보이는 색깔의 물감들을 팔레트 상 위에 짜고 있었다. 계곡의 경관에 신비롭도록 아름다움을 느낀다.
하늘 높이 솟아 오른 바위틈에 박힌 노송들, 산 위에서부터 몰아치는 찬바람은 마른가지 위의 흰 눈을 날리고 있었다. 각종 생김생김으로 어우러진 골짜기를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색깔의 물감들을 캔버스에
바르고 있었다. 날씨는 무척 추웠지만 하늘이 맑아서 좋았다.
그런데 이때 계곡에서부터 바람이 흰 눈을 안고 불어오자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과 유화물감이 반죽이 되어 캔버스 위에서는 그림이 그려졌다. 조금 전에 웅장했던 산들이 살며시 흐려지더니 이윽고 그 산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앞에 전개 되는 광경들이 마침 마취상태처럼 신비에 젖어갔고 그림도 구상과 추상으로 범벅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점점 손이 시려오고 발도 꽁꽁 얼어갔다. 옷을 많이 껴입었으나 몸이 떨리며 추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셨으면’하는 생각이 나서 캔버스에 산을 그리다 말고 내 화실에 있는 주전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펑펑 눈이 내리는데도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나서 뒤돌아보니 몇 사람이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지만 50대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는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가면서 중얼거렸다.
“이 추운데 무슨 짓이람, 정신적 사기꾼들이 미쳤지!”
같이 그림 그리던 우리 일행 중 한 회원이 기분 나쁘다며 속상해 하였지만 나는 영롱한 오색약수를 마시며 그 중년의 한마디를 다시 떠올려 본다.
"정신적 사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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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26)-
이 가을에 생각나는 것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면 나는 왠지 신중하고도 철학적인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내가 인생의 중년기에 접어들어서인지 아니면 주변이 노랑, 빨강색으로 물들어버린 색채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나는 나의 의식 저변에 있는 깊고 사뭇 은밀한 욕구에 대해서 생각 중이다. 충족될 때 커다란 행복감을 주는 그런 욕구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삶의 어떤 비밀스러운 목표를 가지고 있다.
나의 최상의 목표는......
이 같은 비밀스러운 목표를 인생의 중년기에 접어든 이때에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이기도 하다. 사람은 마침내 연인을 만나 사랑의 결실로 아기가 태어나고 그 아이는 성장하여 공부를 마치고 결혼하여 자신의 일을 하다가 그리고 가족을 남겨두고 하늘나라로 올라간다.
다음 세대 갓난아기도, 또 그 다음 아이들도 똑같은 과정을 거친다.
나는 나의 일상생활 중에 내 일에 집중하다가 옆이나 건너편과 주변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는 항상 나의 친구요 반려자요 아내인 한 사람을 보게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더욱 끈끈한 정이 깊어가는 것을 느낀다.
지금 지구 인구는 50억 명이라고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200명쯤의 사람이 죽고 480명쯤이 새로 태어나고 있단다. 이것은 약 2분 동안에 태어나고 죽는 사람의 숫자이다. 계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인구수에 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들은 만일 지구의 인구가 오늘날과 같은 비율로 끝없이 늘어난다면 서기 3530년에는 전 인류의 살과 피의 질량이 지구의 질량과 같아진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세상은 퍽이나 많이 달라지고 발전했다.
한때 누군가가 미래를 상상하면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흘려버렸으나 세월이 흐른 후, 그 상상이 우리 눈앞에서 실현되는 경우가 무수히 많지 않은가. 과학의 힘이 크다는 것을 감사하면서 오늘을 살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참 편한 세상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텔레비전이나 신문이다.
온갖 세상 소식을 간단하게 전해들을 수 있다. 그 속에는 주먹과 돈으로 세상을 휘두르는 내용들이 사회면을 채운다. 모든 사람들이 흥분하면서 고함을 질러댄다. 모두 무서운 세상이라고 하고 교통지옥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차에다 대고 고함치고 어떤 사람은 하늘을 향해 고함치는 사람도 있다.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떠들어 대고 이 세상은 더럽고 험악하여 사람들은 모두 글러 먹었다고 하고 요즘 사람들은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속단하는 사람도 있다.
정치가건 의사건 선생이건 상인이건 하나같이 남을 속여 벗겨먹으려 든다는 것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정말 막돼먹은 세상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혼자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나의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친구들, 이웃 한 사람 한 사람 나와 관계된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나와 관계된 사람은 백 명, 천 명 아니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사람들은 모두 착하고 편안하고 개성이 분명한 아름다운 사람들뿐이다.
이것이 나만이 겪는 것일까?
내 주변 사람들 중에 사기꾼 같은 사람은 찾을 길이 없다.
여러분들도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라,
아마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이 있을 뿐일 것이다.
고함치는 사람들의 소리는 텔레비전 상자 속에서나 신문 활자에서 보고 듣는 것이니 그것은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먼 나라 이야기 같다.
나의 이 같은 생각을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아마 바보 같고 무지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오해하지 마시라.
우리 동네 사람들, 나의 친구들, 우리 동네시장 상인들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며 그들은 어느 때든지 내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차려놓고 친절하게 물건을 고르게 해준다. 만약 그 상인들이 그 직업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먹고, 입고, 자면서 살 수 있겠는가.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나쁜 일이 보도되는 것은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좋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말로 나쁜 사람이 많은 세상이면 좋은 사람들만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올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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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27)-
전화 때문에
현대인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전화가 오지 않으면 다이얼을 돌리고 계단을 오를 때도 한 개씩은 답답해서 서너 개씩 건너뛰어야 직성이 풀리고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숨이 차도록 성공을, 출세를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결국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 잊어버리고 무작정 남이 달리니까 뜀박질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간다.
지금의 우리 생활 속에서 전화가 없다면 도시 속의 암흑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내가 그런 경험을 했었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없어져서 암흑 속에서 살아야 했다.
세계 2차 대전을 일으켰던 일본은 전쟁 초에 중국을 거쳐 남양군도 일대를 점령해 갔다. 그 승전의 일환으로 태평양상의 괌도도 점령했었다.
전세는 역전되어 미군이 그 섬을 탈환했고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일본군의 일부가 그 섬의 울창한 숲속에서 숨어 지내게 되었다.
그 후 16년이 지난 1961년 어느 날, 지금까지 은신해 오던 일본군인 하나가 우연히 발각되어 붙잡힌 적이 있었다. 즉시 따뜻한 목욕물과 새 옷, 그리고 먹을 것이 그에게 제공되었으나 그는 바뀌어버린 현대에 어울릴 수가 없었다.
우리의 생각으론 16년 동안이나 숲속에서 문명의 혜택 없이 살아온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했지만 그는 오히려 그곳에서 숨어 살았던 생활이 더 좋았다고 술회했다.
우리에게 문명은 좋은 사람에게는 좋으나 또 나쁜 면도 많이 있다.
몇 년 전 가난한 예술가들의 건강을 위한다고 의료보험이 실시되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모든 회원들이 너도 나도 가입했고 몇 년 동안 열심히 보험료를 불입했다.
전업 작가로 그림만 그려오는 나에게는 별다른 수입이 없어서 보험금을 계속 낼 형편이 되질 못해서 실무자를 찾아가 상담을 했다. 잠시 동안 탈퇴를 하고 형편이 좋아지면 다시 가입하겠노라고 했으나 담당자는 냉정하게 법을 내세워 안 된 다는 것이었다.
탈퇴할 최선의 방법은 이런 것이었다.
첫째는 죽는 것, 둘째는 외국으로 이민 가는 것, 셋째는 미술협회에서 불명예로 제명당하는 것, 이 세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내 나이 40 되도록 보험이라곤 들어본 적 없어서 보험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이제 죽는 날까지 올무에 묶여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며 돌아왔다.
몇 년 후 드디어 나에겐 하나밖에 없는 생명줄이랄 수 있는 전화를 빼앗아 갔다.
가난한 미술가에게는 재산이라고는 그림밖에 없는데 그림은 재산가치가 안되고 특히 한국에서는 화가의 직업자체가 법적으로 인정이 안 되어서 은행에서는 무직업으로 써야 융자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다는 보험이 앞으로도 무엇을 차압해 갈지 무서운 존재로 보여 지기 시작했다.
전화를 잃게 되자 제일 미안한 사람은 동생이었다. 그 전화는 10년 전 동생이 선물로 놓아 주었기 때문이고 그 전화를 처음 개통했을 때 너무나 신기해서 한참 동안 행복했었다.
나는 군도에서 숨어 살았던 일본군을 생각해 본다.
나도 그 일본군처럼 도시의 암흑 속에 혼자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 일본 군인이 숲속의 은신생활이 피난처라고 표현했듯이 나도 사회와 차단된 은신처 같은 생활이 되어갔고 점점 평안을 찾아 밀림 속 같이 조용한 나의 작업실 속에서 천연의 아름다움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때 깨닫게 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원수를 맺는 것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실이 너무 괴롭고 어두워도 내가 당한 적은 손해와 모욕에 더욱 과민해지고 한 치의 여유도 없는 척박한 마음으로 인하여 생긴 부질없는 마음을 회개하니까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고, 세상의 모든 소식을 끊고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전화 없는 나의 화실은 도심 속의 자연, 그런 공간이 되었다.
화려하지는 못해도 평화롭게 살고 싶은 것이 나의 꿈이 아니었던가.
세상길에서 만난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서 정을 나누며 용서하면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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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28)-
살아간다는 것
늘어가는 교통량과 인구에 비례해서 대기오염으로 바래져가는 하늘이지만 오묘한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
고요의 씨를 뿌리듯 가슴 깊숙이 살아나는 저 평온한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밤, 마당에 돗자리 깔고 누워 별빛이 강처럼 흐르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별들을 헤아리던 소년시절의 회상이 새로워진다. 한없이 높고 끝없이 넓은 하늘을 가로질러 흐르는 은하수, 아! 신비로운 우주, 신비한 우주 한 모퉁이에 보이는 조카의 얼굴,
그 얼굴에서 오래전 세상을 떠난 제 아버지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난 듯한 느낌. 추억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있고 그것은 괴롭고 슬픈 일이지만 뒤돌아보면 모두가 아름답다고 시인 푸시킨이 말하지 않았는가.
지난 것은 그리워지고 추억이 되어버린 열세 해 전의 일이 떠오른다.
나에겐 형과 동생들이 많아 조카 또한 많이 있다.
남달리 무거운 짐을 짊어졌던 그 큰 조카를 보면 언제나 눈물이 흘러내릴 듯한 안쓰러움이 있었다.
장남 형의 장조카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아버지를 잃은 서러움 때문인지 조카의 얼굴에는 웃는 일이 없었다. 그가 일곱 살 되던 해, 그저 어리광이나 부리던 그 어린 나이에 조카는 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두 눈 반짝이는 삼남매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엄마 뱃속의 동생마저 남겨 둔 채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하늘나라로 떠났던 것이다.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머물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이 세상 한 분밖에 없는 아버지를 잃고 세상에 적응하며 온갖 고생이라는 그늘 아래서도 꿋꿋하게 다섯 식구는 하루하루 생명을 유지해야 했었다.
부모가 모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희망에 부풀어 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한 조카의 둘레에는 항상 어둠만이 있었을 것이다. 기술을 익히기 위해 찾아 나선 공업고등학교, 자세한 주위 사정을 묻지 않아도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를 알 것만 같다. 조카는 어렵고도 먼 길을 용케도 걸어왔고 어느새 군대도 갔다 온 스물넷의 청년이 되어 있다.
거듭 태어나는 매일의 아침을 보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이나 조건에 불만을 품고 철새처럼 보금자리를 옮겨가는 동안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있음을 본다. 이제는 다 성장한 조카가 할아버지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가 선산에 묻히지 못하고 다른 곳에 외롭게 누워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을 보니 대견스럽고, 그동안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굳세게 살아온 조카가 자랑스럽다. 부디
사랑하는 조카의 미래는 따스한 햇살이 온 누리를 감싸 안듯 사랑의 저력을 널리 펼치기를 이 삼촌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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