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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1999년 등단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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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고 은 정진규 오세영 유안진 홍신선 이건청 서정춘 유자효 임동윤 문정희 김학철 나태주 이기철 정대구 유재영 윤용선 이동순 이해웅 정일남 정호승 조창환 허형만 이태수 김수복 박민수 송수권 신승근 장석주 김재진 윤강로 이영춘 하청호 강영환 구재기 이정환 최순섭 박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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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지 뱃사공 / 신경림
산과 물이 지겨워 아우라지 뱃사공의 아내는
세 아들딸을 두고 대처로 떠났다
아우라지 뱃사공은 산과 물이 싫다
종일 배를 건너 손에 쥐는
천원 안팎의 돈 그것이 싫다
세상이란 잘난 사람들끼리 그저
잘난놀음으로 돌아치는 곳,
그를 가엾다고 말하는 세상 사람들이 그는 싫다
딸애는 바람막이도 없는 난달에서
구호미를 삶아 저녁밥을 짓고
아들놈은 단간 셋방 맨바닥에 엎드려
몽당연필로 제 어미에게 편지를 쓴다
보낼 수도 없는 서러운 편지를,
아우라지 뱃사공은 그들을 보는 세사의 눈이 싫다
정선아라리의 구성진 가락이 싫다
*아우라지 : 정선읍에서 220여km 떨어진 나루.
▪신경림_1955년 《문학예술》 등단. 시집 <농무> <남한강> <목계장터> <뿔> <낙타> 외 다수.
동시집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가 있음.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
정선 아라리 / 고 은
아스라이 아스라이
성마령 넘어
어이 돌아오지 않으리
그대 정녕
정선 아라리 넋이거든
천 년 세 월
이 산 저 산 메아리로
어이 눈부시게
돌아오지 않으리
▪고 은_군산 출생. 1958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피안감성> <문의마을에 가서> <독도> <허공> <만인보> 등 다수.
만해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황금화관상, 은광문화훈장 등 수상.
껍질 / 정진규
어머니로부터 빠듯이 세상에 밀려 나온 나는 또 한 번 나를 내 몸으로 세상 밖 저쪽으로 그렇게 밀어내고 싶다 그렇게 나가서 저 언덕을 아득히 걸어가는 키 큰 내 뒷보습을 보고 싶다 어머니가 그러셨 듯 손 속에서 손을, 팔다리 속에서 팔다리를, 몸통 속에서 몸통을, 머리 털 속에서 머리털까지 빠뜨리지 않고 하나하나 빼곡하게 꺼내어서 그리로 보내고 싶다 온전한 껍질이고 싶다 준비 중이다 확인 중이다 나의 구멍은 어디인가 나갈 구멍을 찾고 있다 쉽지 않구나 어디인가 빠듯한 틈이여! 내 껍질이 이다음 강원도 정선 어디쯤서 낡은 빨래로 비를 맞고 있는 것이 보인다 햇살 쨍쨍한 날 보송보송 잘 말라주기를 바란다 흔한 매미 껍질 같이는 싫다 그건 너무 낡은 슬픔이지 않느냐
▪정진규_경기 안성 출생. 1960년 동아일보 등단. 시집으로 <마른 수수깡의 평화>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몸시> <알시> <본색> 등이 있음. 한국시인협회장 역임.
정선 구절리 / 오세영
구절리에선
냇물도 이야기를 할 줄 안다
돌, 돌, 돌, 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낭랑하게 이어지는
겨울 밤 계곡의 애틋한 발라드
구절리에선
꽃들도 노래를 할 줄 안다
도, 미, 솔, 라,
화알짝 입을 벌려 화음을 고르는
봄 산 철쭉들의 즐거운 합창
구절리에선
별들도 시를 쓸 줄 안다
ㄱ, ㄴ, ㄷ, ㄹ,
한 글자, 한 글자 하늘 원고지를 메꾸는
여름밤은 은하수의 그 꿈꾸는 서정시
아아, 구절초 흐드러지게 핀
가을 구절리에선
별과 꽃과 새와 냇물이
하나로 어우러진 교향악이 된다, 시가 된다
▪오세영_전남 영광 출생. 전남 장성, 전북 전주에서 성장. 1965-1968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바람의 아들들> <무명연시> <불타는 물> <밤하늘의 바둑판> 등. 소월시문학상, 목월문학상 등 수상.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예술원 회원.
아우라지가 몰운대에게 / 유안진
늑대가 산허리를 물어뜯는 밤
강물이 삽(섶)다리에게
처녀상이 뱃사공에게
정선이 강원도에게
표류가 체류에게
달맞이꽃이 해바라기에게
농담이 진담에게
수작을 건다, 어떠하시냐고
먼 하늘 우레가 탐내어 달려와
산허리를 썩뚝 잘라 세운 절벽 몰운대(莈雲臺)
고사목(枯死木)까지 한 목청으로 대답한다
콩과 콩나물이 콩의 선택이냐고
정선 아리랑이 어느 한 두 집의 딸자식이냐고
열 번쯤 불러보면 대답을 알 거라고
그래도 모르겠거든 목청이 쉴 때까지 불러보라고
▪유안진_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다보탑을 줍다><알고><거짓말로 참말하기><둥근 세모꼴> 등 16권.
시선집 <세한도 가는 길> 외 다수. 산문집으로 <지란지교를 꿈꾸며><딸아딸아 연지딸아> 등이 있음.
정선 장날 / 홍신선
1
도부꾼들 장짐 지고 와 벌인 시장 바닥 좌판에는 곤드레 나물 서너 죽, 백봉령과 황기 뿌리들, 방전된 폐건전지만 한 헛개나무 껍질의 드문드문 식은 얼굴들, 먹거리 골목 번철에서 부침질로 타는 식용유 냄새가 한가롭고 맵다
2
중고짜리 착암기로 폭약 심지 묻고 폭파하고 또 폭파하고 묻기 몇 십 번인가 터진 소금강 암벽 틈새에 제 발등 하나 온전히 못 묻고 구불텅구불텅 노근(露根)들 반공중에 덜렁댄다 그 언젠가 남포질 소리도 끊어졌다 비루먹은 중개만 한 멸문직전의 조선 솔 그도 나만큼 시간 틈에 붙어 늙었다
3
여량 여울목 아우라지 소리는 없고 겉늙은 메아리 몇몇 허공에 쪼그리고 앉아 팥 깍지 까듯 가을볕 툭툭 까 내린다 그 쪼그린 궁둥이 밑에는 얼마나 숱한 소리꾼들 헐고 목청 쉬어 묻혔나 숯무이처럼 잠적했나 마치 막돌 하나 정점에 얹기 위해 모인 수많은 부석돌들 그 아래 함구한 채 압살되듯 저 메아리들이 깔고 앉은 밑자리에는
4
난장 아닌 이 고을 골짜기 어디 있는가
▪홍신선_1965년 《시문학》 등단. 시집으로 <서벽당집> <겨울섬> <우리이웃사람들> <다시 고향에서> <황사바람 속에서> <자화상을 위하여>
<우연을 점 찍다> <삶의 옹이>와 연작시집 <마음경> 등 다수. 현대문학상, 불교문학상, 한국시협상, 김달진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등 수상.
폐광촌을 지나며 / 이건청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까맣게 몰랐다. ���사북사태���때에도 그냥 어용노조만 거기 있는 줄 알았다. 흑동고래가 산 속에 숨어 탄맥을 쌓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냥 막장인 줄만 알았다. 푸슬푸슬 내리는 눈발이 아이들도 개도 지우고, 유리창도 깨진 사택들만 남아 있는 줄만 알았다. 고래가 사는 줄은 몰랐다. 역전 주점, 시뻘겋게 타오르는 무연탄 난로의 그것을 불인 줄만 알았다. 카지노 아랫마을 찌그러진 주점에서 소주잔만 들어 올리는 사람들의 한숨인 줄만 알았다. 검은 탄 더미인 줄만 알았다. 그냥 석탄인 줄만 알았다.
▪이건청_경기 이천 출생. 1967년 한국일보 등단. 시집으로 <이건청 시집> <목마른 자는 잠들고> <하이에나> <코뿔소를 찾아서>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현대문학상·목월문학상 등 수상. 한국시인협회장 역임.
구절리에 대하여 / 서정춘
나는 모른다
구절리가 어딘 줄을
몰라도,
가을의 향기 같은 어감이 좋아서
그곳에 가고 싶다
예의를 갖추어 아홉 번 절하고
그곳에 다다르면 구절사가 있을 것 같다
없더라도,
그 자리에 구절초는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약이 되는 구절초를 꺾어와
부모님께 구구절절 아뢰며
약으로 달여서 드릴 것이다
▪서정춘_전남 순천만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죽편> <물방울은 즐겁다> <귀> 등이 있음.
박용래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그리운 조선 / 유자효
정선은 조선이다
한 오백 년 살아온 조선이 있다
아우라지 굽이굽이 물길 속에
조선의 눈물이 있다
한(恨)이 있다
흥도 있고
인정도 있다
정선에는 아직도 조선 사람이 산다
조선의 마음이 정선에 산다
그리운 조선
▪유자효_부산 출생. 1968년 신아일보와 불교신문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아직>, 한국대표명시선100 <아버지의 힘>,
우리시대 현대시조100인선 <데이트>, 유자효 시선집 <성스러운 뼈>가 있음.
정선 가는 길 / 임동윤
솔치재 넘는 길은 구절양장입니다
길은 굽이굽이 물안개로 자옥합니다
또 몇 굽이 돌아드는 비탈길에서
풍경에 취해 잠시 쉬어가기로 합니다
백두대간 넘어온 바람이 동해를 풀어놓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들이
당신에게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섰습니다
그러나 내겐 대수롭지 않습니다
당신 향한 그리움이 구절초로 피어나고
제 빛깔로 물드는 가을색만 또렷합니다
가리왕산 가랑이 헤집고 다니는 바람
마른 억새를 베고 있을 때쯤,
당신은 느티나무 동구까지 나와 계실까요
고랭지 채소밭 가꾸겠다던 당신은
이제 땅 속에서 꽃을 피우겠지만
모두 떠난 빈집엔 누가 사나요
산 숭숭 구멍 뚫린 마을은 그림처럼 남고
밭은 기침소리만 허공을 맴도네요
당신에게로 가는 오직 한 길인 이곳에서
여량, 구절리, 임계, 친근하게 불러봅니다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당신에게로 가는 길은 그날처럼 멀고
또 몇 굽이 젖은 밤안개 첩첩이지만
여전히 길은 푸르게 열려 있으니까요
▪임동윤_1968년 강원일보(시), 1992년 문화일보(시조) 당선. 시집 <연어의 말> <나무아래서> <아가리> <따뜻한 바깥> 등.
현재 《시와소금》 발행인 겸 주간.
새 아리랑 / 문정희
님은 언제나 떠나고 없고
님은 언제나 오지 않으니
사방엔 텅 빈 바람 텅 빈 항아리뿐
비어서 더욱 뜨거운 이 몸을 누가 알랴
그 위에 소금 뿌려 한세월 곰삭은
이 노래를 누가 알랴
기를 쓰고 피어나는 이 땅의 풀들
저 눈 밝은 것들은 알랴
떠나는 발자국이 님인 것을
돌아오지 않는 것이 님인 것을
그래서 더 보고 싶은 것이
우리 님인 것을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 님을 기다리며
밭고랑처럼 길고 긴 생애를 사느니…
세상에는 없는 고무신 같은
된장국 같은, 백자 항아리 같은
기막힌 이 사랑을 누가 알랴
냉수 한 사발의 사랑이
폭풍보다 더 무서운 힘인 것을
너무 울어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이 살갗이
지진보다 더 무서운 힘인 것을
님과 나 사이에는
꽃이라고 할까, 새라고 할까
청산처럼 숨 쉬는 아름다운 생명이 있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온몸으로 흔들리는 노래를 부르며
이 땅에는 사시사철 기다림이 피어나느니…
곁에 있는 것은 님이 아니리
안을 수 있는 것은 님이 아니리
결혼한 것은 님이 아니리
멀리 있는 것
그래서 두 눈이 아리도록 그리운 것만
우리 님이리 아리랑이리
홀로 푸른 하늘 바라보면서
푸른 하늘 굽이굽이 새겨둔 설움
바라만 보아도 말갛게 차오르는 눈물
질경이 같은, 엉겅퀴 같은, 뙤약볕 같은
어지럽고 슬픈 살 냄새
허리 구부리고 울던 흰옷들의 쓰라린 사랑이여
천 굽이로 살아나는 아리랑이여
▪문정희_전남 보성 출생. 1969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찔레>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나는 문이다> 등. 현대문학상, 소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국시인협회장
동강 달빛 / 김학철
달빛, 화사(花蛇) 한 마리
어라연 푸른 물을 건너간다
물살은 조용히 갈라지며 입을 다물고
시간의 은비늘이 하얗게 돋아난다
빛으로 반짝이는 것들은
내 안의 깊은 골에 불을 밝히고
길을 연다
다만 흐름이 있을 뿐
흔적조차 없는 길
놓아버리면 스스로 울어서 가버리는
강 마을 향해
먼 길 떠나도 좋겠다
나루를 지키던 늙은 사공
이른 어둠에 얕은 잠이 들었는지
주인 없는 뱃머리엔
바람에 실려 온 싸리골 올동박
아라리 한 소절만 남아 설움이 된다
어라연 달빛,
저 혼자 화안한 밤이다
▪김학철_서울 출생. 1970년 《시법》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사향 주머니> <햇빛 과원에서> <감정리에 별을 심다> <용오름> 등이 있음.
정선길 / 나태주
문득 푸진 눈발이 앞을 막았다
왜 왔느냐 왜 왔느냐고
산에도 눈
들에도 눈
마을길에서도 눈
눈발은 따지듯 묻고 있었다
활짝 핀 매화 꽃송이 위에 내려
또 다른 꽃이 되는 눈
털갈이 짐승처럼 부르르 치를 떨면서
일어서는 산, 산
산 넘어서 산을 넘어서
가라고 이젠 가라고 눈이 되다만
차가운 가랑비가 종일을
따라다니며 졸라대고 있었다.
▪나태주_충남 서천 출생.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대숲 아래서>에서 <돌아오는 길>까지 35권 간행.
정선 / 이기철
저 이름들이 살닿은 연인이다
어느 애닯은 눈매들이 서로의 살을 문지르며
저토록 도타운 이름들을 붙여놓았나
정선, 하고 부르면 가야금소리가 난다
막힌 둑 확 터지는 봇물 여량
소낙비 지나고 흘러넘치는 도랑물 소리
구절리는 구절양장, 또 재 넘으며 부르는
어욱새에 손 베어 부르는 중중모리 산조다
아우라지 아우라지, 하염없이 옷고름 푼
첫날밤 신부의 하얀 속적삼
산접동 물접동
속절없이 울어 넘는 진계면 아홉 곡조
▪이기철_경남 거창 출생. 1972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으로 <청산행> <유리의 나날> <가장 따뜻한 책> <나무, 나의 모국어> 등 14권.
에세이집 <손수건에 싼 편지> 등 3권. 김수영문학상, 시와시학상, 최계락문학상 등 수상. 현재, 영남대 명예교수.
정선 가세 / 정대구
정선 가세 정선 가세
산 높고 물 맑은 강원도라 산골
구불구불 소나기재 비행기재 넘어, 넘어
정선精選의 정선을 거듭해
숨겨놓은 보석 같은 낙지樂地
제일로 산수 좋고 인심 좋고 공기 좋은 정선 가서
천연 그대로의 바람 마시고 물마시고
열 일 제치고 리프팅 즐기며
철따라 한 사나흘씩 묵으며
정선한 정선旌善의 풍물
정선아라리, 정선5일장, 정선올챙이국수,
민둥산갈대밭 화암동굴, 몰운대, 오장폭포, 아우라지…
팔도강산 제일 좋은 정선 가서
폐활량 한껏 호연지기 깊은 숨 쉬고
*물속에 들어가 기름때 돈독 목욕하고
구름 춤추는 상큼한 바람 쐬며
중니 증석과 함께
정선아리랑 노래하며 돌아오세
*이하 4행은 공자 제자 증석이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산 바람 쐬고 시를 노래하며 돌아오겠다(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를
굴절시켜 씀(논어 선진편 참조) 증석은 공자제자 증점, 중니는 공자의 자
▪정대구_1972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나의 친구 우철동 씨> <무지리 사람들> <양산일기> <너가 바로 나로구나> 등.
구절리 햇빛 / 유재영
며칠 전,
투구벌레 두 마리
자웅을 가리던 곳
오늘은 쇠별꽃이
많이 피었습니다
부전나비 한 쌍
자꾸만 자리를
옮겨 앉고
호두만한
메추라기 새끼가
고개를 갸웃대며
바지런히 지나갑니다
구절리 햇빛들이
개살구 속살까지
말갛게 비추는 동안
어디선가
외대버섯 냄새가
고요히 퍼졌습니다
▪유재영_충남 천안 출생. 1973년 《현대시학》 등에 작품 발표로 문단에 나옴. 시집으로 <지상의 중심이 되어>
<고욤꽃 떨어지는 소리> <와온의 저녁> 등이 있음.
정선 구절리에 갔다 / 윤용선
오래 전에 정선에 갔다
느릿느릿 걷다가 구절리 어디쯤에선가
비가 와야
비로서 비단 같은 물줄기를 보여준다는
비와야 폭포를 만났다
그 마른 폭포 앞에서
어쩌면 한세상 휘돌아 가는 길도
그 비슷한 게 아닌가 싶었다
마치 아홉이라는 수가
때로는 꽉 찬 것을 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곤고한 처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구절리는 두 개의 얼굴로 다가와서
내게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구건이니, 구족이니, 구공이니 하는 항렬로는
충만한 가운데 겸허를 바라는 마음을,
구년 홍수에 구사일생, 구곡간장, 구공탄으로는
많이 척박했던 세월을 비추어 주므로
세상을 미리 경계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아주 오래 전에 정선 구절리에 갔다
▪윤용선_197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가을 박물관에 갇히다> 등.
현재 문화커뮤니티 <금토> 이사장으로 있음.
아우라지 술집 / 이동순
그해 여름
아우라지 술집 토방에서 우리는 경월소주를 마셨다.
구운 피라미를 씹으며 내다보는 창 밖에
종일 장맛비는 내리고
깜깜한 어둠에 잠긴 조양강에서
남북 물줄기들이 서로 어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염이 생선가시같이 억센 뱃사공 영감의 구성진 정선 아라리를 들으며
우리는 물길 따라 무수히 흘러간 그의 고단한 생애를 되살리고 있었다
―사발 그릇 깨어지면 두셋 쪽이 나지만
―삼팔선 깨어지면 한 덩이로 뭉치지요
한순간 노랫소리가 아주 고요히
강나루 쪽으로 반짝이며 떠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흐릿한 십 촉 전등 아래 깊어 가는 밤
쓴 소주에 취한 눈 반쯤 감으면
물 아우라지고
사랑 아우라지고
우리나라도 얼떨결에 아우라져 버리는
강원도 여랑 땅 아우라지 술집
▪이동순_경북 김천 출생.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개밥풀> <물의 노래> <미스 사이공> 등. 신동엽창작기금, 난고문학상, 시와시학상 등 수상.
정선아라리―치성 드리는 여인 / 이해웅
애간장 오려 신주단지에 모셔놓고
주야장천 치성 드리는 저 여인아
그대 지극정성이 때론 산 바위를 움직이고
날아가는 구름 당겨 비를 내리는데
이 땅 산천이 보내온 귀한 이내 몸
아들딸 낳아 보은 하랬더니
자식농사 없어 어이 할꼬
애리고 애린 저 소리
아라리 애간장 죄 녹이고도 넘쳐 돌아
굽이굽이 아우라지 강물 되어 흐르는데
한번 간 그인 여태 돌아올 줄 모르고
이승과 저승까지의 뱃길 아득하기만 하다
살아도 살아도 높아만 가는 저
아리랑고개
언제 한번 쉬이 넘어
쌓인 한 질펀하게 풀어나 볼꼬
▪이해웅_부산 기장 출생. 1973년 시집 <벽>으로 등단. 시집 <길의 식성> <허공 속의 포즈들> <사하라는 피지 않는다> <달춤> 등 다수.
부산시협 회장 역임, 부산 시울림시낭송회장.
아우라지 / 정일남
모두 아우라지 간다 하네
거기 가면 골지천과 송천이
어우러져 아우라지가 되었다 하네
남한강 일천 리 물살 머리
뗏목이 출발한 나루라 하네
첩첩산중 사랑에 목마른 처녀들
동박 따러 간다는 핑계로
싸리골 찾아갔지만
동박 따는 건 건성이고
임 만날 약속이 있었다 하네
이뤄진 사랑보다 이별이 많았던 곳
옛날 뱃사공은 간 곳 없고
나루에 찾아온 길손의 여정은
간투사에 빠졌다 하네
▪정일남_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꿈의 노래> <훈장> 등 다수.
청량리역 / 정호승
정선 아라리 한가락이 울며 내려서
성바오로병원 건너
창녀들이 사는 뒷골목으로 퍼져가더라
눈보라를 뒤집어쓴
태백산 주목 한 그루가 울며 내려서
정선 아라리 뒤를 황급히 따라가더라
정동진의 맑은 아침 햇살도 내려서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다가
찰옥수수 파는 할머니 손을
환히 밝히더라
▪정호승_경남 하동 출생.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서울의 예수> <새벽 편지> 외 다수.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
정암사 / 조창환
정암사 적멸보궁 그윽한 절집에 들어
빈 방석 위에 앉아계신 허공 오래 우러른다
고즈넉한 허공이 두텁고 따뜻하여
빈 하늘 멀리서 우는 까마귀 울음에도
세상 일 경계 모두 스러지고
수마노탑 귀퉁이에 바람 공손히 스쳐 지나가며
거기 매달린 작은 종들 흔들어 깨운다
저 공손한 바람 앞에 묵은 번뇌가 부끄럽고
하늘 높아진다, 그윽하고 맑게 비어 있는
적멸(寂滅) 우러르며
허공에 빈 방석 깔아드린다
추전에서 정선, 두문재 터널 지나 고한으로
그대 태백산 정암사 찾아 가는 날
오래 그리던 모습들 모두 내려놓고
다만 빈 방석 하나 가슴에 품고 갈 일이다
빈 방석 위에 모신
허공 공손히 품고 돌아올 일이다
▪조창환_1973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으로 <벚나무 아래, 키스자국> <마네킹과 천사> <수도원 가는 길>
<피보다 붉은 오후> 등이 있음.
아우라지 동동 / 허형만
송천 물 골지천 물
한 몸으로 어우러지니
남한강 물길이여 천리로구나
뗏목 타고 떠난 님
세월은 흐르는데 오시지 않고
뱃사공 보이지 않아
저 건너 낭군은 만날 길 없네
꽃이 피면 오시려나
강이 얼면 만나려나
아우라지 아우라지
아으, 아우라지 동동
▪허형만_전남 순천 출생. 1973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으로 <불타는 얼음> <그늘이라는 말> <영혼의 눈> 등.
영랑시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 수상. 현재 목포대학교 명예교수.
산바람―몰운대 아래서 / 이태수
문을 와락 밀치며 산바람이 들이닥칩니다
열린 문 저편 절벽산 너머
구름 몇 조각
한가로이 흰 돛단배처럼 밀려옵니다
개었다 흐렸다 이제야 활짝 갠 산자락엔
초록 물결이 넘쳐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볼 겨를도 없이
나는 절벽 위 허공 깊숙이
둥둥 떠가고 있습니다
쪽빛 모든 문을 열어젖히며 떠가고 있습니다
▪이태수_경북 의성 출생. 1974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그림자의 그늘> <꿈속의 사닥다리> <그의 집은 둥글다> <안동 시편> <내 마음의 풍란> <침묵의 푸른 이랑> <침묵의 결> 등 12권과 육필시집 <유등 연지>가 있음.
몰운대 / 김수복
저녁 무렵이 되어 누군가가 몰운대를 보러 가자고 하였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 때문에 단풍 구경도 미루고 여관방에 눌러앉아 있던 화투판을 걷어치우고 길을 물어 몰운대로 향했다 비가 개이고 안개에 발목을 적시고 있던 먼 산들도 더욱 가까이 몰려왔다 산굽이를 넘을 때마다 옆구리에서 길들이 불쑥불쑥 불거져 나왔다 사람들이 반가와서인지 아니면 낯설어서인지 뒤로 물러난 길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산굽이를 돌 때마다 안개는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안개가 밀려난 자리마다 검게 탄 살자국이 드러났다 옆에 있던 한 시인이 산도 속이 썩을 때도 있는 모양이라고 하였다 가슴에 검은 상처진 몇 굽이 산자락 지나 언덕 길 옆에 차를 붙이고 '몰운대' 표지판을 따라 걸었다 비 갠 사이로 홍조를 띠기 시작한 물섶나무의 얼굴이 더욱 고와보였다 길섶으로 열리는 작은 길을 따라 점점 깊이 들어서니 앞쪽에서 '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망무제!라고 누군가 소리쳤다 禪도 無爲도 사랑도 미움도 모두 여기 있구나!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벼랑에서 뒤로 물러나 앉은 바위 위에 올라서니 저 벼랑 아래 안개 걷히는 개울 사이 작은 돌 위에 위태롭게 물새 한 마리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禪도 無爲도 사랑도 미움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 오르막길을 숨차게 올라오는 완행버스만이 보였다 몰운대는 없고 몰운대는 어디에도 없고 몰운대는 비 갠 저물 무렵에도 없었다
▪김수복_경남 함양 출생. 1975년 《한국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새를 기다리며> <모든 길들은 노래를 부른다>
<사라진 폭포> <달을 따라 걷다> 등이 있음. 현재 단국대 문창과 교수.
슬퍼서 아름다운―정선 아리랑의 추억 / 박민수
어느 날 문득 나 홀로 길 떠나
백 년 전 정선 마을 기나긴 아리랑 고개를 넘고 싶다
구불구불 굽이진 아리랑 고개 너머 저 만치 홀로 있는 외딴 주막
그곳에 들러 농주 한 대접 길게 마시고 싶다
눈이 오든가 비가 오든가 억수장마가 몰아쳐도
아우라지 뱃사공 그 오실 이 기다리며 하루가 다 기도록 술대접 앞에 놓고
나 홀로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자유롭게 바람에 날리듯
내 마음 흔들리는 대로 어디에 묶어두지 않고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질 때까지 그냥 먼 산이나 보며
나 홀로 묵고 묵은 백 년 사랑 기나길게 고백하고 싶다
그래도 오지 않는 아우라지 뱃사공
그 사람 다시금 그리움 속에 버려두고
해질녘 아리랑 고개 되넘으며
두견새 우는 소리 장단 맞추어 억수장마 펑펑 눈물을 흘리고 싶다
슬퍼서 아름다운 아리랑 고개 위에 잠시 나 홀로 설 자리 잡아
오줌줄기 남기며 휘청휘청
어둠 속 감추어 두었던 그리움의
기나긴 아우라지 뱃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싶다
▪박민수_춘천 출생. 1975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개꿈> <낮은 곳에서> <잠자리를 타고> 등.
춘천교육대학 총장 역임. 현재 박민수뇌경영연구소 운영, 춘천고음악제 이사장.
섶다리 / 송수권
전통(傳統)은 박제된 풍경이 아니라
흐르는 동강의 개울물에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이쪽도 밟고 저쪽도 밟는
휘돌아나가는 물기에 구부러진 고샅길에
쪽달이 밟고 가듯
밟고 가는 것
누이야,
그 휘모리 가락 장단을 네가 아느냐
그 여울물 따라
한 마리 암소 몰고, 꼴망태 지고
불여귀 울음소리 밟고, 쪽달의 그늘을 밟아서
밤 늦은 농부 한 사람이 베잠방이 다 젖도록
건너가듯
건너가는 것
섶다리,
섶다리 건너서 가는
쪽박 같은 세월을 네가 아느냐
▪송수권_전남 고흥 출생. 1975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산문에 기대어> <꿈꾸는 섬> <아도> <달궁아리랑> <퉁> <허공에 거적을 펴다> 등 17권.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다수. 현재,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 전 순천대 교수.
물의 마을 / 신승근
아름다운 물의 마을
가수리에 가면
동강의 물이 되어 흐르고 싶어진다.
흐르다 지친 몸이
때로 뼝대 끝에 닿는다면
그대로 멈춰 서서 잠들고 싶어진다.
산 끝에서 산 끝을 물고
돌아가는 수심(水深)처럼
우리들 생애 또한 깊어질 수 있다면,
물밑 자갈돌처럼이나
맑아질 수만 있다면 어찌
더딘 물길이라고 흘러가지 않겠는가.
수백의 폭포가 몸을 던져
그들의 거친 생애를 동강에 맡길지라도
산과 나무, 구름에게조차
몸을 허락하는 강물처럼
우리도 함께 섞여 흘러보지 않겠는가.
물의 끝이
그 어디인들 어떠랴.
물 끝까지 가 닿을 수 없다한들
또 어떠랴
▪신승근_강원 정선 출생. 197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와 《심상》으로 작품 활동.
시집으로 <바람이 접시에 닿고 있을 때> <그리운 풀들> <이외수> 등.
민둥산에서의 하룻밤 / 장석주
이미 옛집의 불은 꺼지고
저문 길 위에 바람만 적막하구나
세상은 산 사람 마른 기침소리만 남고
아무도 죽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갑자기 잊혀진 어린 시절이 온다
아궁이에는 불꽃들이 펄럭거리고
말없이 외로운 어른들의 얼굴에도 불꽃은 넘실거렸다
그때는 누가 죽었었던가
세상 밖의 추운 길 위로 떠도는 죽음
오늘 너무 늦게 민둥산에 닿은 나는
떠도는 죽음이다, 옛집 불은 꺼지고
몹쓸 바람만 밤새 불어 쓸쓸한
민둥산에서 하룻밤을 머물러야 한다
▪장석주_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리운 나라> <어둠에 바친다>
<절벽> <몽해항로> <오랫동안> 외 다수.
구절리 / 김재진
선평. 정선. 나전. 여량
그 어디쯤 닿고 싶다
지금은 사라진 완행열차를 타고
산골 역 어딘가에 내리고 싶다
낡어서 삐거덕거리는 나무의자에 앉아
해지는 풍경을 한 마흔 번 쯤 보고 싶다
살아가다 문득
모든 것들이 시들하고 황량해질 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훌쩍 떠나고 싶다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한다거나
절실히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이 다
스스로를 태우는 짓이라는 것을
철길 지워지는 구절리쯤서
아프게 깨닫고 싶다
▪김재진_대구 출생. 1976년 영남일보 등단. 시집으로 <누가 살아 노래하나> <실연가>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등 다수.
어둠 스케치―폐광에서 윤강로
모두 떠났다
렌턴모를 벗어 쌓아놓고
뿔뿔이 흩어져 갔다
통근버스는 문이 열린 채 암담한 짐승이 되어
갱목더미 옆에서 떠날 줄 몰랐다
슬레이트 지붕 밑 맨바닥엔
라면을 먹다가 떠난 광부의
마지막 젓가락이 뼈처럼 놓여 있었다
눈물겨워라
그들은 삶의 패잔병
광부들의 백기는 흐르는 눈물에 까맣게 젖었다
파란 하늘 겨울산에 둘러싸인 폐광에
녹슨 바람이 서성이고
광부들은 그림자 하나씩 이끌고
진폐증에 쿨럭이며 사라졌다
그때
남은 것들은
모두 컴컴했다
▪윤강로_고려대 국문과 졸업. 197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다섯 사람의 분수(噴水)> <불꽃놀이> <피피피 새가 운다>
<비어있음의 풍경> <작은 것에 대하여> 등.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수상.
구절리 돌 우는 소리 / 이영춘
정선 아우라지를 지나 구절리에 갔었네
무명옷 입은 사람들 목숨처럼 뚝 끊어진 마지막 철길,
바람은 윙윙 늑대처럼 울고 있었네
사방 절벽, 돌각달들* 하늘 천장에 매달려 울고 있었네
손발 다 터진 내 그분들, 무명옷 입은 얼굴들 언뜻 언뜻 보이네
돌각달처럼 살다간 그분들의 얼굴, 돌무덤 되어 울고 있었네
나물 광주리 옆구리에 끼고 산비탈을 오르던 그분들
한 서린 ‘아리랑’ 가락이 내 고막을 치고 달려오는데
내 그분들, 지금 어디에도 없네
나는 돌아서서 돌 우는 소리로 산짐승처럼 울었네
오후 3시,
두 다리 뚝 끊긴 역사엔 돌 그림자만 모로 누워 있는데
역무원은 빈 역사를 혼자 지키고 있네
무명옷들 되돌아올 길 없는 빈 역사를
*강원 산간지방의 돌들이 무덤처럼 층을 이루고 있는 모양
▪이영춘_강원 평창 봉평 출생. 1976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시시포스의 돌> <슬픈 도시락> <시간의 옆구리>
<봉평장날> <노자의 무덤을 가다> 외 다수. 시선집으로 <들풀>이 있음. 인산문학상, 고산문학상, 동곡문화상(문학) 등 수상.
동강할미꽃 / 하청호
깎아지른 암벽에
동강할미꽃 피었다
청보라 꽃잎엔
동강의 물빛이 배어나고
정선의 푸른 얼도
내려와 있다
놀라워라!
긴 목 곧추세운
저 당당한 동강의 할미
▪하청호_경북 영천 출생. 대구에서 자람. 1976년 《현대시학》 시 추천완료.
시집 <다비茶毘노을> 외 다수가 있음.
아우라지 나루 / 강영환
상강에 더 깊어진 하늘이다
저물녘 아우라지 푸른 물에 들어
투명한 얼굴로 검은 산을 품고
강물은 죽은 듯이 누워 산다
구절리로 떠난 기차가
먼 곳 가느다란 손짓도 없이
끌고 가버린 물소리
빈자리 서릿발이 늙어 산다
바라보는 풍경 속에는 언제나
혼자 짙어져 가는 노을이
슬몃, 뗏목 자리에 들어 와
피 같은 노래를 토하고 산다
▪강영환_경남 산청 출생. 1977년 동아일보 시 등단. 1979년 《현대문학》 시 천료. 1980년 동아일보 시조 당선.
시집 <칼잠> <집산 푸른 잿빛> 외 다수. 이주홍 문학상, 부산작가상.
아우라지에서 / 구재기
급하게 서두르거나
안간힘을 쓰지 아니하고
유장한 흐름 같은
믿음이라면
우직스럽게 믿으며
늘 마음을 되돌리면서
저렇게 크지 않은
흐름을 이룬 것이라면
흐름이사
절로 이루어진 것
가장 깊은 곳에 고인 슬픔이 듯
이별에 이르기까지
아끼며 동행하는 그리움이 되는 것
흐르는 물에
조금씩 몸을 부리며
함부로 헤아리려 하지 않고
그냥 잘 흐르는 대로
처음의 자리에서 여여如如하게
믿는다는 것은
결코 참고
기다린다는 것만이 아니다
흐름에 몸을 내려놓으면 그뿐
하오라기 홀로
물 흐름에 발목을 담고
흐름 속의 온몸을 굽어보듯
내 안에 내가 있음이어니
※ 아우라지는 강원도 정선군의 지명으로 정선군 여량면 여량5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골지천과 송천이 합쳐져서 한강의 본류인 조양강을 이루는 곳이다. ‘아우라지’는 ‘어우러진다’는 뜻으로서, 두 물줄기가 어우러져 한강을 이루는 데에서 이 이름이 유래한 것이라 하고,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사랑을 나누던 처녀 총각이 싸리골로 동백을 따러가기로 약속을 했는데, 간밤에 폭우로 인해 불어난 물줄기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하자 그립고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한 이곳의 나루터를 일컫기도 한다.
▪구재기_충남 서천 출생. 1978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추가 서면 시계도 선다>와 시선집 <구름은 무게를 버리며 간다> 등 다수.
현재 충남시인협회 회장.
아우라지 별사 / 이정환
너를 떠나보낼 곳
여기구나, 아우라지
붙들어 두고 싶어도
백년을 참지 못하니
마침내 놓아도 좋을 곳
여기구나, 아우라지
돌아보지 말지니
이곳 아우라지에서는
보내고는 결코
더는 그리지 말지니
저물녘 놀빛 속으로
길도 연해 끊어질 곳
먹빛 아우라지로다
철철철 천애의 강
모든 노래 그치는 곳
그쳐서 먹먹해지는 곳
떠나고 돌아오지 않아
먹빛 울음 멎는다
▪이정환_경북 군위 출생. 1978년《시조문학》추천완료 및 1981년《중앙일보》신춘문예 등단.
시조집으로 <아침 반감> <휘영청> 외 다수.
정선 아우라지 / 최순섭
새벽 수채화 밑그림에
방금 샤워 끝내고 나온 노랑 올동백
이슬방울 똑똑 흘러내린다
겹쳐지고 부서지는 두 줄기 물결은 버들처녀와 여랑총각
바위 적시며 살 섞는 소리, 우당탕 퉁탕 수천의 죽은 달이 떠내려간다
날마다 죽음을 관통한 만남은 생명을 잉태하고
삶의 경계에서 울음소리 더 크다.
만나자 헤어짐에 퉁퉁 부은 눈, 그날 밤
머리 풀어헤치며 몸을 던진 그대는 급물살 소용돌이에 감겨 사라진다.
산길에서 골똘히 바라보던 늙은 소나무가 한숨을 캐며 솔가지를 흔들었다
얼마나 더 흘러야 다시 만날까
물 따라 흘러 흘러가는 건 바람이 아니야 그리움이야
물안개 하얀 젖줄 물고 찌걱찌걱 빈 나룻배 하나 떠간다
▪최순섭_대전광역시 출생. 1978년 《시밭》 동인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말똥, 말똥> 등.
동강할미꽃―동강 할미의 말씀 / 박호영
그대들 동강에 오거든
내 얼굴만 보고 가지 말고
내 매무새만 살피다가 돌아서지 말고
기 막히고 분통 터질 일 많은 이 땅에서
비 바람 몰아치기 일쑤인 이 차가운 땅에서
왜 내가 뼝대*에 허리를 곧추 세우고 있는가
왜 고개가 무거워도 땅으로 떨구지 않고
하늘을 향해 들고 있는가
이 할미의 심지心志를 조금이라도 헤아리고 가게
*뼝대 : 강원도 사투리 ‘절벽’을 뜻함.
▪박호영_서울 출생.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2002년 《시와시학》 시 등단.
시집 <오두막집에 램프를 켜고> <그대 아직 사랑할 수 있으리> <바다로 간 진흙소>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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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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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1989년 등단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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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리 조영수 백우선 오승철 이사라 박기동 이화주 최문자 박세현 박옥위 이승철 이재무 임문혁 도종환 소재호 이승하 이은봉 김민정 문인수 서지월 공광규 김진광 나호열 권정남 김연동 박방희 서범석 한지혜 허 림 김홍주 문창갑 이향지 허문영 황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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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운대 이소리
그대, 아찔한 벼랑 끝에 서 보았는가
켜켜이 깎아지른 바위틈에 무엇이 매달려 있던가
이 앙다물고 바싹 엎드려 있는 이끼
바람을 부채질하며 위태로이 흔들리는 샛대
안간힘 쓰며 연보랏빛 꽃 한 송이 피워내는 쑥부쟁이
그들이 무어라 속살거리던가
세상살이는 이처럼 악을 쓰며 사는 것이라고
삶과 죽음은 늘 벼랑 끝이라고 하던가
그래 그것만 보이고 들리던가
저 아스라한 벼랑 아래 사람 사는 마을
바람 찬 다랑이밭 곳곳에 뿌리째 버려져
꽁꽁 얼어붙은 조선무와 조선배추
벼랑 끝자락에 뿌리박은 고사목이 죽어도 죽지 못하고
마을을 보듬고 징징 울고 있는 까닭을 이젠 알겠는가
세상은 사람이 끌고 가는 것
세상살이는 사람과 싸우며 살아가는 사람살이
몰운대는 그걸 가르치려 거기 서 있다네
누가 몰운대를 모른다 하는가
누가 벼랑이 두렵다 하는가
거기 벼랑이 있어 마을이 있고
거기 사람이 있어 희망이 흐른다는 것을
그래, 우리 사랑도 그러한 것을
몰운대는 이 세상 거울이었네
▪이소리_창원 출생. 1980년 《씨알의 소리》로 작품 활동. 시집으로 <노동의 불꽃으로> <홀로 빛나는 눈동자> <어머니, 누가 저 흔들리는 강물을 잠재웁니까> <바람과 깃발> 등.
아우라지 조영수
꺼내 닦을수록 은은한 정선아리랑으로 엮은
뗏목 노를 젓던 할아버지의 부르튼 세월이
물밑에 가라앉혔던 음색만 흐르는 게 아니다
빛과 그늘이 덧내놓고 아물리지 못한 상처가
세월 마디마디에 아픈 옹이로 박히지 않으려고
무늬 없이 깊어진 울음이 아직도 흐르고 있다
부질없는 꽃말 지우느라 어수선한 숲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속옷을 벗던 달빛을 집어 들고
수묵화를 그리다 참선에 든 풍경도 흐르고 있다
기억 밖의 따뜻한 이름 부르며 눈시울 붉히다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질 때까지 건너지 못한
아우라지 처녀 저릿한 그리움만 흐르는 게 아니다.
▪조영수_강릉 주문진 출생. 1980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세상 밖으로 흐르는 강> <네 안에서 내 안으로> <꽃은 꽃으로 피게> <시간 밖의 꽃밭>이 있음.
정선 아우라지 백우선
음물과 양물이 비로소 몸을 섞어
물다운 물의 강, 금실강이 되는 곳
크고 살진 고기들은 혼인색을 빛내고
마을과 마을은 걱실걱실 사람을 늘렸으리
희비를 아우르고 곡류로 반짝이는
우리 가슴도 아우라지, 발걸음도 조양강이리
어제 마신 흐린 술과 맑은 술
밤새 우리도 융융히 굽이쳤고
검푸른 이 물결을 따라
세상의 노랫소리도 더 깊이 넘실거리리
▪백우선_전남 광양 출생. 198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으로 <춤추는 시> <길에 핀 꽃> <미술관에서 사랑하기> <봄의 프로펠라> 등.
별어곡역 오승철
설령
하늘에 건 맹세는 아닐지라도
가자, ‘이별의 골짝’ 억새물결 터지기 전
아리랑 첫 대목 끌고
거기 가서 헤어지자
기차마저 그냥 가는 타관객리 정선선
기다림은 다 해도 간이역은 남아 있다
한때의 섰다판처럼
거덜 난 민둥산아
곤드레 막걸리 한 잔
콧등치기국수 훌훌
떠밀리고 떠밀린 아우라지 구절리
단판에 이별을 건다
암세포 같은 그리움아
▪오승철_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개닦이> <누구라 종일 홀리나> 등이 있음. 이호우시조문학상,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
정선에 가면 살아있는 것부터 만나고 싶다 이사라
정선에 가면
살아있는 것부터 만나고 싶다
봄볕 속의 아지랑이
아지랑이 속의 아라리
그리고 당신과 나
양지 송천과 음지 골지천처럼
어우러져 아우라지
우리 예전처럼
만나지 못하는 일 없이
뗏목 함께 타고 먼 곳 다녀와
다시 정선에 닿고 싶다
여태까지 살아남은 긴 가락처럼
굽이굽이 동강을 거쳐
다시 봄볕 맞으며 할랑할랑 마음 녹이고 싶다
▪이사라_서울 출생. 1981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으로 <히브리인의 마을 앞에서> <미학적 슬픔> <숲속에서 묻는다> <시간이 지나간 시간> <가족박물관> <훗날 훗사람> 등. 대한민국 문학상 수상.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비와야폭포 박기동
새삼 유명해진 동강 상류쯤 된다
정선 여탄리 덕산 계곡
가다보면 물이 뚝 끊어지고 없다
원앙이 한 쌍 나타났다 앞서 가는 길이다
숨었다가 흐르는 계곡 물, 계곡은 온통 자갈밭
계곡 바닥만 그런 게 아니다
이 동네 말로 뼝대에서 솟는 샘들이 허다하다
비와야폭포는 더욱 가관이다
물 흘러내린 자리, 삼베 기저귀 절벽에 붙인 듯
선명하게 남아있는 뼝대
비오면 폭포가 되고, 그치면 흔적으로만 폭포인
비와야폭포, 그러니까
동강은 물속에서도 폭포를 안고 흐른다
▪박기동_강릉 왕산 출생. 1982년 《심상》 등단. 시집으로 <어부 김판수> <내 몸이 동굴이다> <나는 아직도> 등. 현재 강원대 교수.
가슴 속에 꽃을 숨겨둔 땅 이화주
정선, 그곳은
가슴 속에 꽃을 숨겨둔 땅
용감한 아버지들이
용감한 삼촌들이
천길 어둠에 길을 내며
꺾어 왔다. 그 꽃
밤처럼 까만 아버지가 되어
밤처럼 까만 삼촌이 되어
춤추며 밥을 지어 주고
춤추며 국을 끓여주고
얼어있는 가슴들을 덥혀주던
그 꽃, 불꽃은
하얗게 지고
하얗게 지고
용감했던 아버지와 삼촌은
잊혀져가고 있다.
까맣게
새까맣게
▪이화주_경기 가평 출생. 198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와 아동문학평론 추천으로 문단에 나옴. 동시집 <내 별 잘 있나요> 외 다수. 그림동화 <엄마 저 좀 재워주세요>가 있음.
밀알 최문자
호밀들이 나란히 서있네
마음껏 옷을 찢고도
푸르게 서있네
마음껏 썩으면
밀밭이 된다고 믿으며 서있네
나란히 서있네
나란히 썩고 있네
사람처럼
마주 보며 썩고 있네
스윽스윽
밀알을 빠져나가는
슬픈 목소리의 바람도 만들었네
어둠 속에서
밀알이 되려고
오래오래 비명을 참았네
창밖으로 신발을 벗어 던지고
반쯤 더럽혀진 발을 고백하며
아무렇지 않게 등짝을 녹였네
미래의 축복은
아주 무더울꺼라며
푹푹 썩었네
썩는 고요함이 얼마나 고단한지
자고 깨면
잔뜩 입술이
부르튼 호밀이 되었네
매번 그런 것처럼
마음껏 썩어보질 못했네
거기 만지면
아직도 푸른색이 쏟아지는
시인이 있었네
호밀의 뼈가 출토되는
▪최문자_서울 출생. 1982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으로 <귀 안에 슬픈 말 있네> <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 <사막일기> <울음소리 작아지다>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사과 사이 사이 새> 등. 박두진문학상, 한국여성문학상 등 수상. 협성대학교 총장 역임.
별어곡 박세현
곱슬곱슬한 고사리의 머리털 같은 슬픔
백이숙제도 먹지 않았다는 서글픈 나물의 이름같은
해묵은 핏발이 풀리지 않고 새록새록 피어난다
완장을 찬 역무원이 씩씩하게 깃발을 올리자
질긴 슬픔 몇 덩이가 꾸물거리며 출발한다
제천으로 가는 슬픔
원주기독교병원으로 가는 슬픔
예미 함백 석항으로 이사 가는 슬픔
영월 청령포로 흘러가는 슬픔
서울 공장으로 굴러가는 슬픔
슬픔은 역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목숨이 붙은 한 어디든 가고 또 간다
고사리 같은 슬픔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또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어 손짓한다
외로운 역사(驛舍)가 졸고 있는 역무원을 깨우듯이
슬픔이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단 한 번도 아름다워 보지 못한 사람들을
▪박세현_강릉 출생. 1983년 《문예중앙》 등단. 시집으로 <사경을 헤매다> <치악산> <정선아리랑> <길 찾기> <오늘 문득 나를 바꾸고 싶다> <꿈꾸지 않는 자의 행복>이 있음. 산문집 <설렘>과 연구서 <김유정의 소설 세계>가 있음.
동강할미꽃 박옥위
할미라 부르려니
연보라로 눈 뜨기에
어머니의 꽃댕기를 아릿하게 만져보네
동강이 비취빛가슴 갈마 안는 이른 봄
겨울을 건너오기
너나없이 아슬 할 때
동그란 수태 속에 초승달도 귀가 돋아
귀퉁이 여린 별빛 풀어 어머니가 오시네
뻥대*에
오밀조밀 이른 봄을 불러 앉혀
그냥 척 둘러봐도 그리움은 낯이 익다
울음도 삭은 꽃섶에 다시 피는 동강할미
*뻥대: 강원도 석회암산을 뻥대라 이름. 동강할미꽃 서식지
▪박옥위_부산 출생. 1983년 《현대시조》《시조문학》 천료. 1965년 《새교실》박남수 황금찬 시 천료. 시집 <들꽃 그 하얀 뿌리> <석류> <금강초롱을 만나> <유리고기의 죽음> <플룻을 듣다> <숲의 침묵> <겨울 풀> <지상의 따스한 순간> <그리운 우물> <조각보평전> 등.
정선, 곤드레나물밥 이승철
내 인생의 무너진 성터를 떠올릴 적마다
정선 한 자락이 내게로 달려오곤 했었다
거무튀튀한 설움과 같잖은 시름 따위
모두 허공에 날려버리고자 그날 난,
정선 싸리골식당으로 휘달려 갔다
항상 처음처럼 내 실핏줄이 곤두섰고
혀끝마다 오직 그녀 얼굴이 떠올랐다
곤드레나물밥과 자박장과 꼴뚜기젓이
이토록 황홀하게 서로를 얼싸안고 있었다
그때 몰운대 너럭바위를 휘감아온 바람이
침몰을 멈추고, 뼈아픈 생의 골짝에서
다시금 환생했다, 몰운대 주목 위로 쌓이던
햇살과 소금강을 건너온 솔빛 바람결이
시퍼렇게 병풍을 치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노추산 오장폭포 아래 내리꽂히던 삶이여
밤새도록 나는 수직으로 나부끼고 싶었다
너 때문에 깨달은 피치 못할 인생의 결말
오늘도 당신은 이승의 텃밭에서 나물을 캤고
나는 뭇 생과 더불어 온종일 저리 흔들리면서
곤드레나물밥에 맺힌 그 눈물을 기억할 것이다
▪이승철_전남 목포 출생. 1983년 《민의》 제2집으로 등단. 시집으로 <당산철교 위에서>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 등.
구절리 가는 길 이재무
비 온 뒤 연달아 파어 오르는 안개의 혀
큰 산의 나신 햝는다 안개는
뱀의 등허리가 되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되고
아아, 안개는 내 여인의 가는 허리가 되고
큰 산은 쑥스러워 靑靑 웃는다
가도가도 구절양장의 길 구절리
한 굽이 돌 때마다 거기, 우리네 아픈 생의
내력 있다는 듯 자동차 바퀴에 튀어
옆구리 퍽, 질러오는 묵언의 저 돌멩이들.
노변, 싸리나무꽃이 있었다
볼우물 수줍은 그녀
내 어릴 적 공부에 게으른 날
종아리 아프게 파랗게 하더니
오늘은 불룩해진 아랫배 쿡 찌르며 웃는다
길 좇다 길 잃고 길 잃으니
내 잠시 비워두고 온 세간
저렇듯 반짝이는 녹엽으로 멀리서도 환하다
산사가 차려주는 저녁공양
달게 비우고 山心에 젖어 어둠이
어둠을 낳는, 밟을수록 더욱 싱싱해오는
산길 한 마리 산짐승되어 꿈틀꿈틀
내려온다 이미 밤이 깊어서 광 속처럼
빼곡히 들어찬 어둠의 속살
그 안에 묵직한 돌 되어 풍덩 빠지면서도
나는 상장 받은 아이인 양
내일이 전혀 두렵지 않다
한낮에 본 사랑에 눈먼 철부지 안개 처녀들아
큰 산 데불고 다들 어디로 갔나 벌써 그것들
내 안에 들어와 꽃으로 웃고 있는지
내 몸은 산으로 의젓하고 또, 얇은
종잇장 되어 나는 한없이 가볍게 날아오른다
▪이재무_충남 부여 출생. 1983년 《삶의문학》과 《실천문학》 그리고 《문학과사회》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시집 <섣달그믐> <위대한 식사> <푸른 고집> <경쾌한 유랑>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등. 난고문학상, 편운문학상, 윤동주시상, 소원시문학상 등 수상.
같이 살고 싶은 임문혁
정선은, 형제 같은 친구 태영이가 사는 곳
다락산 아래 송천 냇가 거기 구절리 황토집 짓고
산나물에 메밀국수 말아 먹으며
들꽃처럼 바람처럼 살고 있는 곳
그래서 왠지 정이 가는 곳
정선 아리랑, 하춘화가 구성지게 피어오르고
겸재 정선의 그림 같은 산수가 펼쳐진 곳
생강나무 꽃이 피는 노오란 봄날
배낭 하나 짊어지고 정선역에 내리면
황조롱이 조롱조롱 마중 나올 듯
화암동굴, 소금강, 몰운대, 올챙이 국수 한 그릇에
민둥산, 오장폭포, 하늘에서 쏟아지는 우렁찬 말씀
무릉이 따로 있으랴 여기가 도원이니
이대로 눌러앉아 동강 흘러가는 거기쯤에 오두막집을 짓고
친구들 불러 모아 임과 함께 한 세상 살고 싶은 곳
밭 갈고 씨 뿌리며 바람처럼 들꽃처럼
그렇게 살고 싶은 곳, 내 친구 태영이가 사는 정선은
▪임문혁_충남 당진 출생. 198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외딴 별에서> <이 땅에 집 한 채> 외 다수.
나리소 도종환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가장 고요해지는 사랑이 깊은 사랑이다
나릿재 밑에 나리소 못이 가장 깊고 고요하듯
요란하고 진부한 수식이 많은 사랑은
얕은 여울을 건너고 있는 사랑이다
사랑도 흐르다 깊은 곳을 만나야 한다
여울을 건너올 때 강물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햇살도
나리소 앞에서는 그 반짝거림을 거두고 조용해지듯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이 가장 깊고
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 아니다
물빛처럼 맑고 투명하고 선해지지 않으면
▪도종환_청주 출생.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접시꽃 당신> <해인으로 가는 길>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