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磵公 年譜
完譯 및 解說
羅千洙
南磵公 年譜
번역과 해설/羅千洙
□ 大明神宗顯皇帝萬曆十二年甲申, 國朝 宣祖大王十七年, 七月二十五日己亥未時 公生于羅州西部水口內錦溪里 (대명신종현황제만력십이년갑신, 국조 선조대왕십칠년, 칠월이십오일기해미시 공생우나주서부수구내금계리 )/대 명나라 신종 현황제 만력12년 갑신년, 조선국 선조대왕17년 1584년 7월25일 기해 미시에 公은 나주 서부 수구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卽官門一偰地先祖務安公卜居世傳焉(즉관문일설지선조무안공복거세전언)/官門에 나아가 오로지 깨끗한 땅을 선조 무안공께서 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하였다고 대대로 전하였다.
<해설>
◯ 西部水口內는 나주는 小京이라 불렸으며 서울처럼 읍성과 4대문이 있다.
나주 읍성을 통과하는 寒溪川이 있는데 西入東出의 방향으로 흐른다.
본 하천이 서쪽 수구로 흘러 들어와 동쪽 수구로 흘러 나가서 영산강과 합류한다.
水口는 邑城으로 통하는 물 통로이다.
◯卜居(복거)는 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함
◯ 務安公(무안공)은 나주나씨 9세 羅自康을 말한다.
무안현감을 할 때에 權攝羅州牧 하였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權攝이란 어떤 사무를 임시로 대신 맡아봄, 남을 대신하여 임시로 맡아보다 란 뜻이니,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나주목사가 잠시 공석이었을 때 自康公께서 무안현감으로 재직하면서 나주목사를 겸직하였다고 한다.
□ 萬曆十三年乙酉, 宣祖大王十八年, 二歲(만력십삼년을유, 선조대왕십팔년, 이세)/1585년 을유년 선조대왕18년, 두 살이 되다,
□ 萬曆十四年丙戌, 宣祖大王十九年, 三歲(만력십사년병술, 선조대왕십구년, 삼세)/1586년 을유년 선조대왕18년, 세 살이 되다,
□ 萬曆十五年丁亥, 宣祖大王二十年, 四歲(만력십오년정해, 선조대왕이십년, 사세)/1587년 정해년 선조대왕20년, 네 살이 되다,
自解語穎悟聞伯仲氏小學 輒記誦(자해어영오문백중씨소학첩기송)/스스로 말의 뜻을 깨달아 아는 총명함이 있어 맏이와 둘째 형의 小學을 듣고
번번이 쓰고 외웠다.
考通政公甚愛重焉(고통정공심애중언)/아버지 통정공이 이러한 것을 매우 愛之重之하였다.
<해설>
◯伯仲(백중)은 맏이와 둘째
◯通政公(통정공)은 羅德讓을 말함,
□ 萬曆十六年戊子, 宣祖大王二十一年, 五歲(만력십육년무자, 선조대왕이십일년, 오세)/1588년 무자년 선조대왕21년, 다섯 살이 되다,
□ 萬曆十七年己丑, 宣祖大王二十二年, 六歲(만력십칠년기축, 선조대왕이십이년, 육세)/1589년 기축년 선조대왕22년, 여섯 살이 되다,
文藝漸進吐辭成章聞者期以大器(문예점진토사성장문자기이대기)/文藝가 점차 전진 발전하여 語句를 토해내고 문장을 이루니 듣는 자들이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기약하였다.
<해설>
◯吐辭成章(토사성장)은 6살 아이가 語句를 입으로 말하고(吐) 손으로는 문장을 만들어 쓴다는 말
□ 萬曆十八年庚寅, 宣祖大王二十三年, 七歲(만력십팔년경인, 선조대왕이십삼년, 칠세)/1590년 경인년 선조대왕23년, 일곱 살이 되다,
□ 萬曆十九年辛卯, 宣祖大王二十四年, 八歲(만력십구년신묘, 선조대왕이십사년, 팔세)/1591년 신묘년 선조대왕24년, 여덟 살이 되다,
讀經史應對周旋有成人氣像(독경사응대주선유성인기상)/경사를 읽고 대답하고 접대하는 모습이 다 큰 어른의 기질이 있었다.
<해설>
◯周旋(주선)은 접대하다, 응접하다, 교제하다, 상대하다, 공방전을 전개하다,
□ 萬曆二十年壬辰, 宣祖大王二十五年, 九歲(만력이십년임진, 선조대왕이십오년, 구세)/1592년 임진년 선조대왕25년, 아홉 살이 되다,
四月聞倭變通政公爲倡義轉運使(사월문왜변통정공위창의전운사)/4월에 일본이 변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 통정공은 창의하여 전운사가 되었다.
四月十三日倭兵二十餘萬(사월십삼일왜병이십여만)/4월13일 왜병 20여만명이
船駕海而來連陷沿邑/배로 바다를 건너와 연도의 마을을 연달아 함락시켰다.
通政公有志討復來往海峽探察賊勢(통정공유지토복래왕해협탐찰적세)/通政公은 토벌할 뜻을 가지고 해협을 왔다갔다 반복하면서 적세를 샅샅이 찾아 살피었다.
山川險記諸囊帶(산천험기제낭대)/산천은 험하지만 기록한 여러 가지를 주머니에 넣어 허리에 차고
同議於隣友金千鎰爲倡義方略與洪遠柳溫等(동의어인우금천일위창의방략여홍원류온등)/의견이 같은 의론을 가진 이웃에 사는 친구 김천일과 창의하였으며, 홍원, 유온 등과 방법과 계략을 논의하였으며
會盟公館推公爲轉運使(회맹공관추공위전운사)/공관에 모여서 맹세하면서 公은 轉運使로 추천되었다.
受通政公訓誨(수통정공훈회)/통정공으로 부터 가르치고 일깨움을 받았다.
五月十六日公赴義隊向京師 (오월십육일공부의대향경사)/5월16일 公은 의병대로 나아가 서울을 향하였다.
申勉諸子曰(신면제자왈)/아들에게 거듭하여 권하여 말하기를
時値板薦我當盡忠(시치판천아당진충)/ “때가 되어 추천으로 직첩을 받았으니 나는 당연히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
勢雖流離爾勿墜學云(세수유리이물추학운)/무리들이 비록 일정한 거처가 없이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닐 것이나 너는 배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從金市西璇至海西(종금시서선지해서)/시서 金璇을 따라 海西에 이르렀다.
時通政公素與市西有同隣雅契(시통정공소여시서유동인아계)때는 通政公이 평소에 市西와 더불어 같은 이웃으로 점잖게 사귄 정분이 있어
將赴義托家眷(장부의탁가권)/의병으로 나아가면서 가솔을 맡겼는데
而至海道長連(이지해도장연)/이에 海道 長連에 이른 것이다.
冬聞再從叔都事公倡義于鏡城(동문재종숙도사공창의우경성)/겨울에 재종숙 도사공께서 경성(함경북도 경성읍)에서 창의 하였다고 들었다.
公以前都事謫鏡城倡義旅(공이전도사적경성창의여)/전 도사가 경성으로 귀양 갔는데 공적으로 창의한 의병대가
擊破倭將淸正於吉明界連捷/왜장 가등청정을 격파하고 길주, 명주 지경에서 잇달아 이김으로
于白塔橋斬獲數千級(우백탑교참획수천급)/백탑교 전투에서 수 천 급의 적을 목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解還兩王子駕/귀양이 풀려 두 왕자(臨海君과 順和君)의 수레를 모시고 돌아왔다.
<해설>
◯轉運使(전운사)는 조선시대 세곡(세금을 곡식으로)의 운반을 주관한 전운서(轉運署)의 관원을 말한다. 조운사(漕運使)·전운어사 (轉運御史)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임란 의병으로 가담한 민간인에게 적당한 호칭을 붙이지 못하여 통정공의 의병 역할이 轉運署의 역할과 가장 비슷하여 轉運使로 붙인듯하다. 그러나 轉運使는 조선왕조 관료의 정식 명칭이니, 민간에게 역할이 비슷하다고 붙일 수는 없는 것이다.
붙일 수 있는 경우는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임명 절차를 받았을 경우는 가능하다.
필자가 湖南節義錄에 기록된 通政公 德讓의 임란 활동이 운량의 책임을 맡아 하였던 바, 運糧使로 호칭을 하였다.
◯公館(공관)은 정부 관리들의 공적인 집인바, 나주에서의 공관은 어디인가. 바로 금성관이라고 볼 수 있다.
◯京師(경사)는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곳, 서울, 수도,
◯時値(시치)는 때가 되다,
◯板薦에서 필자는 薦으로 해독 하였다. 板은 詔書, 文書, 명패, 사령서, 職牒,
◯家養은 家眷의 誤記 같다. 家眷은 가족, 가솔
◯再從叔都事公은 누구인가.
羅士忱의 장자 羅德明을 말한다.
나덕명은 승훈랑 의금부도사를 하다가 기축옥사에 화를 입어 경성에 귀양 가 있었는데, 귀양지에서 창의한 것이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정보에 의하면
1551년(명종 6)∼1611년(광해군 3). 조선 중기 의병. 자는 극지(克之)이고, 호는 소포(嘯浦)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전라남도 나주(羅州) 출신이다.
부친은 수 의금부도사(守義禁府都事) 나사침(羅士忱)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기상이 늠름하였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에게서 수학하였다.
1579년(선조 12)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9위로 합격하였으며 승훈랑(承訓郞)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1589년(선조 22) 나덕명은 기축옥사(己丑獄死: 일명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었다. 그는 정개청의 문하생이었으므로 역적 정여립과도 가까웠을 것이라는 무고를 받아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생활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관노 국경인(鞠景仁) 등이 작란하여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및 수행 신하들을 왜적에게 넘겼다. 이에 의병을 일으킨 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 정문부(鄭文孚) 막하에 들어가 싸웠다. 이후 쌍포(雙浦) 백탑교(白塔橋) 싸움에 참전하였으며, 1594년 귀향이 풀린 후에는 형개(刑玠)에 있던 허충의‧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1537∼1599)과 함께 일본에 대적하였다. 또한 정유재란 때에는 아버지의 시묘살이 중이었음에도 판서(判書) 임담과 의병을 일으켜 전라남도 화순(和順)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적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증직되었다. 1803년(순조 3)에는 충신으로 정려(旌閭)되어 무안군(務安郡) 일로읍(一老邑) 청호리(淸湖里) 주룡(住龍)마을에 충신각이 건립되었으며, 도내 사림(士林)이 소포사(嘯浦祠)를 지어 그를 배향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외 나주 금호사(錦湖祠), 고양(高陽) 덕양구(德陽區) 행주내동(幸州內洞) 충장사(忠莊祠) 등에 배향되었다.
◯連捷(연첩)은 잇달아 이김,
◯洪遠은 풍산인으로 벼슬이 監正이요, 柳溫은 고흥인으로 벼슬이 主簿이다.
□ 萬曆二十一年癸巳, 宣祖大王二十六年, 十歲(만력이십일년계사, 선조대왕이십육년, 십세)/1593년 계사년 선조대왕26년, 열 살이 되다,
夏綴詩賦大篇(하철시부대편)/여름에 長文의 詩賦를 지었다.
時金市西丈同在(시금시서장동재)/때는 김시서 어른과 같이 있으면서
旅寓逐日勸課(여우축일권과)/집을 나와 객지에서 거주하지만 하루하루를 쫓아서 과업을 권장하였다.
而雖行道溷厠吟誦不(이수행도혼측음송부)/그리므로 비록 측간에 갈 때에도 읊고 외우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援得寸白聯綴作冊抄經史/얻은 것이 작아도 백 개의 聯을 짓고 經史의 책을 베끼기에 매달렸다.
<해설>
◯旅寓(여우)는 집을 나와 객지에서 거주함,
◯溷厠(혼측)은 뒷간, 변소, 측간,
◯白聯은 百聯의 오기 같다.
聯은 한시(漢詩)에서, 짝을 이룬 두 구를 하나로 묶어 이르는 말로 그것이 백 개란 뜻이다.
□ 萬曆二十二年甲午, 宣祖大王二十七年, 十一歲(만력이십이년갑오, 선조대왕이십칠년, 십일세)/1594년 갑오년 선조대왕27년, 열한 살이 되다,
□ 萬曆二十三年乙未, 宣祖大王二十八年, 十二歲(만력이십삼년을미, 선조대왕이십팔년, 십이세)/1595년 을미년 선조대왕28년, 열두 살이 되다,
□ 萬曆二十四年丙申, 宣祖大王二十九年, 十三歲(만력이십사년병신, 선조대왕이십구년, 십삼세)/1596년 병신년 선조대왕29년, 열세 살이 되다,
十二月遭再從祖縣監公服(재종조)/12월에 재종조 현감공을 상봉하였는데 服을 입었었다.
<해설>
◯再從祖縣監公은 羅士忱을 말한다.
◯服의 풀이
필자는 이를 복을 입었다고 풀이 하였는데, 상황을 모르니 정확한지 의문이다.
□ 萬曆二十五年丁酉, 宣祖大王三十年, 十四歲(만력이십오년정유, 선조대왕삼십년, 십사세)/1597년 정유년 선조대왕30년, 열네 살이 되다,
秋聞再從叔母鄭氏殉節注龍江(추문재종숙모정씨순절주룡강)/가을에 재종숙모 鄭氏가 주룡강에서 투신 순절했다고 들었다.
鄭氏卽再從叔潘溪公諱德顯夫人(정씨즉재종숙반계공휘덕현부인)/정씨는 즉 재종숙 반계공 휘 덕현의 부인이다.
潘溪公性之孝(반계공성지효)/반계공은 성품이 효성스러웠다.
是年倭寇猝至負母號哭(시년왜구졸지부모호곡)/이 해에 왜구가 갑자기 처 들어와 어머니를 업고 큰소리로 우니
賊徒惻然棄去事聞于朝贈參奉/도둑의 무리들이 가엽게 여기어 내버려두고 갔는데, 조정이서 이 일을 듣고 참봉으로 증직하였다.
妻河東鄭氏避寇之際過倭船/처 하동정씨는 왜구를 피하려는 때에 왜선이 지나가자
與少姑尹沆妻投死注龍江以烈旌/남편의 庶母와 윤항의 처와 더불어 주룡강에 투신하여 죽자, 열녀로 旌閭되었다.
<해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1597년 정유재란에서야 왜적들이 남해안을 통해 전라도 지역을 침략해 온 것이다.
◯再從叔潘溪公諱德顯(재종숙반계공휘덕현)은 나사침의 넷째아들이다.
◯少姑(소고)는 남편의 庶母 즉 나사침의 작은 부인이다.
◯尹沆妻(윤항처)은 윤항은 나사침의 사위이니 처는 나사침의 딸이다.
◯注龍江(주룡강)은 영산강 하구의 무안군 일로읍 주룡마을 앞 강을 말한다.
□ 萬曆二十六年戊戌, 宣祖大王三十一年, 十五歲(만력이십육년무술, 선조대왕삼십일년, 십오세)/1598년 무술년 선조대왕31년, 열다섯 살이 되다,
聞再從叔縣監公克倭于南海(문재종숙현감공극왜우남해)/재종숙 현감공께서 남해바다에서 왜적을 이겼다고 들었다.
縣監公丙申丁憂起服(현감공병신정우기복)/현감공이 병신년에 아버지의 상은 당하여 상복을 입었다.
爲茂長縣監是年露梁之役以統制使李舜臣前鋒將(위무장현감시년노량지역이통제사이순신전봉장)/무장현감으로 있을 이 해에 노량의 싸움에 통제사 이순신의 전봉장으로서
克倭有功錄勳(극왜유공녹훈)/왜적을 무찌른 공으로 녹훈을 받았다.
<해설>
◯再從叔縣監公(재종숙현감공)은 諱 德順을 말한다 라고 연보의 상단에 첨기 되었지만 德慎의 誤記이다.
羅德慎은 茂長縣監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과 함께 해전에 참가하였으며, 노량전투에서 앞장서 싸우다가 이순신이 탄환에 맞아 쓰러지니 公께서 장군의 아들이 울음을 터뜨리려 하자 손으로 가리고(手掩其子發哭之口) 붉은 천으로 가려잡고(取紅氈) 선상의 배 안으로 모시고(裏之坐于船上) 군사의 대오를 정돈하고 점검하여 전투를 감독하고 격려(勒兵督戰)하여 대첩을 이루었다(遂大捷), 을사년에 宣武原從功臣 一等하다 라는 족보 기록으로 보아, 이순신장군과 함께 해전을 한 것이다.
◯勒兵(늑병)은 군사의 대오를 정돈하고 점검하다
◯丙申丁憂(병신정우)는 아버지 羅士忱이 돌아가신 해이다.
◯起服(기복)은 상복을 입다,
□ 萬曆二十七年己亥, 宣祖大王三十二年, 十六歲(만력이십칠년기해, 선조대왕삼십이년, 십육세)/1599년 기해년 선조대왕32년, 열여섯 살이 되다,
秋自長連掇還故里(추자장연철환고리)/가을에 장연으로부터 철수하여 고향마을에 돌아왔다.
去丁酉錦城尤被㥘掠(거정유금성우피겁약)/지난 정유년에 금성은 더욱 겁약을 당하였는데
至是亂靖是還故土修輯舊第(지시란정시환고토수집구제)/난리가 다스려지기에 이르러 고향 땅으로 돌아와 옛집을 수리하였다,
卽今溪亭(즉금계정)/ 지금의 溪亭과 가깝다.
<해설>
◯㥘掠(겁약)은 怯掠과 같은 의미로 두려워하며 약탈하다,
□ 萬曆二十八年庚子, 宣祖大王三十三年, 十七歲(만력이십팔년경자, 선조대왕삼십삼년, 십칠세)/1600년 경자년 선조대왕33년, 열일곱 살이 되다,
受華人賚書(수화인뢰서)/중국 사람에게 글을 주니 받았다.
時華人隨天將東來歷過陰嶺見而評曰/중국 명나라 장수가 동래할 때 따라온 중국 사람이 음령(아산)을 지나면서 남간의 글을 보고 평하여 이르기를
漢宋節義韓柳文章云/한나라, 송나라 절의였던 韓愈와 柳宗元의 문장이라고 말하면서
以理學天文誌遣之/성리학과 천문지를 보냈다.
<해설>
◯賚書(뢰서)는 글을 주다, 주는 서신,
◯天將(천장)은 중국 명나라 장수를 말함,
◯陰嶺(음령)은 장안에서 보이는 북쪽 봉우리, 응달진 고개, 아산의 옛 지명,
◯韓柳(한유)는 韓愈와 柳宗元을 말함.
□ 萬曆二十九年辛丑, 宣祖大王三十四年, 十八歲(만력이십구년신축, 선조대왕삼십사년, 십팔세)/1601년 신축년 선조대왕34년, 열여덟 살이 되다,
□ 萬曆三十年壬寅, 宣祖大王三十五年, 十九歲(만력삼십년임인, 선조대왕삼십오년, 십구세)/1602년 임인년 선조대왕35년, 열아홉 살이 되다,
聘咸豊李氏(빙함풍이씨)/함풍이씨에게 장가들었는데
通德郞坤女禮曹正郞忠禮孫進士軾曾孫左部將晉州金秀河外孫(통덕랑곤여예조정랑충례손진사식증손좌부장진주금수하외손)/통덕랑 곤의 따님이요, 예조정랑 충례의 손녀이며 진사 식의 증손이며, 좌부장 진주 김수하의 외손으로
辛巳九月初三日生(신사구월초삼일생)/신사년 9월 초 3일 태어났다.
□ 萬曆三十一年癸卯, 宣祖大王三十六年, 二十歲(만력삼십일년계묘, 선조대왕삼십육년, 이십세)/1603년 계묘년 선조대왕36년, 스무 살이 되다,
□ 萬曆三十二年甲辰, 宣祖大王三十七年, 二十一歲(만력삼십이년갑진, 선조대왕삼십칠년, 이십일세)/1604년 갑진년 선조대왕37년, 스물한 살이 되다,
往學于靈光睡隱姜先生門(왕학우영광수은강선생문)/영광의 수은 강선생 문하에 가서 배우다.
與仲氏海龜同往學焉(여중씨해구동왕학언)/둘째형 해구와 더불어 함께 가서 학문을 하였는데
先生贈五律三首有羅氏好兄弟人言瓊樹枝之句(선생증오율삼수유나씨호형제인언경수지지구)/선생깨서 5율3수의 시를 주었으니 “나씨 좋은 형제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경수의 가지”라는 시구이다.
餘見附錄(여견부록)/나머지는 부록을 보라.
八月遭再從叔縣監公服(팔월조재종숙현감공복)/8월에 재종숙 현감공이 흉사를 당하여 복을 입었다.
<해설>
◯再從叔縣監公은 諱 羅德峻을 말한다. 羅士忱의 둘째 아들이다.
□ 萬曆三十三年乙巳, 宣祖大王三十八年, 二十二歲(만력삼십삼년을사, 선조대왕삼십팔년, 이십이세)/1605년 을사년 선조대왕38년, 스물두 살이 되다,
受通政公宮闕都監敎旨(수통정공궁궐도감교지)/통정공께서 궁궐도감 교지를 받았다.
通政公當壬亂以轉運使從金健齋水陸調粮兵餉/통정공이 임란을 당하여 전운사로서 김건재를 따라서 바다와 육지로 군량미와 군비 조달을
不之而水原之柵江華之陣/수원의 城砦와 강화의 진영으로 不絶하였다.
三江之賑/한강, 용산강(龍山江), 서강(西江)을 구휼하고
晉州之守/진주를 지켰으며
經辨周給及善山天兵所/도로를 나누어 선산의 명나라 군대 주둔소까지 두루 공급하였다.
元卽權公陣往來贊畫/권율 元帥가 있는 진영을 왕래하면서 찬획사로서 임시 보좌하였으며
戎服軍械多有隨補/군복, 군 기계를 많이 가지고 따라 수행하며 보급하였으니
與李大胤父子崔尙重等同爲元功/이대윤 부자와 최상중 등과 더불어 다 같이 으뜸이 되는 큰 공을 세웠다.
金按使誠一以三南漕運湖南爲最褒啓至/안찰사 김성일은 호남 조운이 三南에서 가장 뛰어 났다고 임금에게 아뢰기에 이르렀다.
是年朝廷去公除宮闕都監/이 해에 조정에서는 공을 들어 궁궐도감에 제수하였다.
秋中進士鄕試(추중진사향시)/가을에 進士 시험 향시(1차시험)에 합격하였다.
<해설>
◯宮闕都監은 궁궐을 짓거나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아보는 임시 관청을 이르던 말.
1606년(선조 39)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궁궐을 재건하기 위해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을 설치하고, 1609년(광해군 1)에는 그 기능을 축소하여 영건청(營建廳)으로 하였다.
궁궐도감은 임시관청명이며 벼슬 명칭은 아니다.
그러므로 通政公께서 궁궐재건의 임시관청에서 근무를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족보의 기록으로 보면 궁궐도감에 나아가지 않았었다.
◯兵餉(병향)은 軍糧, 軍備
◯金健齋(김건재)는 김천일
◯三江(삼강)은 한강·용산강(龍山江)·서강(西江)을 말함.
한성(漢城)의 남쪽을 흐르는 한강의 구간을 나누어 부르는 이름인데, 남산 남쪽 일대 노량(鷺梁)까지를 한강, 그 이서(以西) 마포(麻浦)까지를 용산강, 그 以西 양화도(楊花渡) 일대를 西江이라 함,
◯戎服(융복)은 군복,
◯贊畫(찬획)은 임시 보좌관, 贊畫使
◯李大胤(이대윤)은 완산인으로 벼슬이 正郞이다.
◯金誠一(김성일)은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아버지는 진(璡)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검열·대교 등을 거쳤다.
나주목사로 있을 때는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조광조·이황 등을 제향했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실정을 살피고 이듬해 돌아왔다. 이때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을 경고했으나, 동인인 그는 일본의 침략 우려가 없다고 보고하여 당시의 동인정권은 그의 견해를 채택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잘못 보고한 책임으로 처벌이 논의되었으나 동인인 유성룡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에 임명되었다. 그뒤 경상우도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다 진주에서 병으로 죽었다.
◯天兵所는 明나라 원정군의 주둔지인데, 묘비문에 보면 夫兵所로 誤記된 듯하다
□ 萬曆三十四年丙午, 宣祖大王三十九年, 二十三歲(만력삼십사년병오, 선조대왕삼십구년, 이십삼세)/1606년 을사년 선조대왕39년, 스물세 살이 되다,
春中進士會試((춘중진사회시)/ 봄에 진사 회시(2차 시험)에 합격하였다.
試題斫脂賀蘭座(시제작지하란좌)/시험제목이 “賀蘭은 자리에서 손가락 베듯 거절하였다.”였다.
參一等科與三從元吉張谿谷維同榜(참일등과여삼종원길장계곡유동방)/삼종 羅元吉과 더불어 나란히 한꺼번에 등과했으며 계곡 장유와는 동방 합격하였다.
與谿谷自此有雅契(여계곡자차유아계)/여기서부터 계곡과 더불어 깨끗하게 사귀는 정분이 있었다.
<해설>
◯賀蘭(하란)은 당 나라 안록산(安祿山)의 난리 때에 장순(張巡)이 수양(睢陽)을 지켜 싸우다가 군사를 가지고 있는 다른 고을의 하란(賀蘭)에게 구원을 청하였더니, 하란이 거절하자 다시 수양으로 돌아와 사수하다가, 성이 함락된 뒤에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장순과 함께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斫脂賀蘭座은 직역하면 “賀蘭은 자리에서 손가락을 베었다.”이지만
이를 당시 역사 상황 논리에 맞게 풀면 “賀蘭은 자리에서 손가락을 베듯 거절 하였다.”로 풀어야 문맥이 맞을 것 같다.
斫脂는 斫指와 같은 의미이다.
문과 과거 시험이나 진사시는 이처럼 試題를 역사상황을 문제로 제기해 놓고 응시자들은 요즈음 논술고사처럼 풀어내는 것이다.
과연 南磵公이 장순(張巡)의 입장이었다면 위기에 구원을 청하였지만 거절당한 그 상황을 어떻게 풀어냈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마찬가지로 1617년(광해군9년) 별시문과에 장원하였다는 답안지를 상상해 보라.
그 당시 어떤 역사상황을 試題로 설정하여 내놓고 응시자로 하여금 논술고사를 보는데, 南磵公이 가장 잘 썼지만 正論 즉 理致에 합당한 議論을 썼다는 이유로 합격을 다시 제외하여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 正論은 무엇과 관계되었을까.
그것은 아마 광해군의 시대를 이끌어 나가는 正論을 썼는데, 거꾸로 보면 광해군을 질타하는 답안지로 보여 졌을 것이다.
그래서 장원에서 갑자기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시켜 버린 것이다.
中宗조에 장원급제한 趙光祖의 文科 답안지도 보면 “만약 내가 王이라면 정치를 이렇게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는데, 거꾸로 보면 “王이시여 이러 이러하게 정치를 해야만 백성이 편하다.”라는 논술이었던 것을 中宗은 극찬한 것이다.
만약에 南磵公의 답안지를 광해가 보았다면 극찬하지 않았을까.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는데, 남간공의 답안지를 읽지 못한 광해는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羅元吉은 [생원시] 선조(宣祖) 39년(160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3등(三等) 57위(87/100)
羅海鳳은 [진사시] 선조(宣祖) 39년(1606)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 [증광진사] 3등(三等) 33위(63/100)
張維는 [진사시] 선조(宣祖) 39년(1606)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 [증광진사] 2등(二等) 10위(15/100)
◯삼종 元吉의 가계도를 보면
逸孫- 晊 -士愃 - 德絅 -元吉이다.
□ 萬曆三十五年丁未, 宣祖大王四十年, 二十四歲(만력삼십오년정미, 선조대왕사십년, 이십사세)/1607년 정미년 선조대왕40년, 스물네 살이 되다,
春修小學節目(춘수소학절목)/봄에 소학의 절목을 다듬어 정리 하였다.
時南土徑亂講學久廢/때는 남쪽 땅에서 올바르지 않고 어지러워서 오랫동안 講學을 하지 않았는데
受姜睡隱講規與鄕秀才修小學講節目/강수은의 명경과(明經科)의 규약을 받고 고향의 수재와 더불어 소학의 절목을 다듬어 정리하여 강론하였다.
<해설>
◯南土(남토)는 남쪽 땅,
◯講規(강규)는 명경과(明經科)의 규약
□ 萬曆三十六年戊申, 宣祖大王四十一年, 二十五歲(만력삼십육년무신, 선조대왕사십일년, 이십오세)/1608년 무신년 선조대왕41년, 스물다섯 살이 되다,
二月聞國哀參哭班(이월문국애참곡반)/2월에 들으니 왕실에 초상이 있어 곡반에 참가하였다.
二月初一日宣廟昇遐(이월초일일선묘승하)/2월초1일 선조가 돌아가셨다.
八月長子俊生(팔월장자준생)/8월에 장자 준이 태어났다.
八月十九日癸酉寅時(팔월십구일계유인시)/8월19일 계유날 인시이다.
冬註解禮經于普光寺(동주해예경우보광사)/ 겨울에 보광사에서 예경의 뜻을 주를 달아 알기 쉽게 풀이하였다.
時讀典禮問笑于谿谷有詩/때는 典禮를 읽고 웃으면서 張谿谷에게 물었던 詩가 있다.
禮經三百統精微之句/예경 3백을 살피니 깊고 정밀한 글귀가 되었다.
著二烈女傳(저이열여전)/이열여전을 저술하다.
見集選(견집선)/ 남간집선을 보라.
<해설>
◯參哭班(참곡반)은 곡반에 참여하다,
곡반은 국상(國喪) 때 궁중(宮中)에 모여 우는 관리(官吏)의 반열(班列)
◯國哀(국애)는 국민 전체가 복상을 하는 왕실의 초상을 이르던 말 뜻
□ 萬曆三十七年己酉, 光海君 元年, 二十六歲(만력삼십칠년기유, 광해군 원년, 이십육세)/1609년 기유년 광해군 원년, 스물여섯 살이 되다,
從師于沙溪金先生門(종사우사계김선생문)/사계 김선생 문하에서 사사하였다.
與仲氏海龜同往受學焉(여중씨해구동왕수학언)/둘째 형 해구와 같이 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講河圖卦理天文仁說(강하도괘리천문인설)/河圖의 괘의 이치와 天文, 仁說을 풀이하였다.
後庚午先生答書有曰/뒷날 경오년에 선생께서 답한 글이 있는데 이르기를
卦圖天文仁說多有先人所/“괘도, 천문, 인설은 선인들로 많이 가지고 있지만
未發之意可加高明潜心玩理/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뜻은 이치를 음미하고 마음을 집중 시켜야
훌륭함을 더할 수 있다.” 라고 말하였다.
<해설>
◯河圖(하도)는 옛날 중국 복희씨(伏羲氏) 때에 황허(黃河)에서 용마(龍馬)가 지고 나왔다는 쉰다섯 점으로 된 그림. 낙서(洛書)와 함께 《주역(周易)》의 기본 이치가 된다.
◯潜心(잠심)은 몰두하다, 마음을 집중시키다, 전심하다
◯玩理(완리)는 이치를 음미하다
□ 萬曆三十八年庚戌, 光海君 二年, 二十七歲(만력삼십팔년경술, 광해군 이년, 이십칠세)/1610년 경술년 광해군 2년, 스물일곱 살이 되다,
正月遭再從叔縣監公德慎服(정월조재종숙현감공덕신복)/정월에 재종숙 현감공 덕신이 돌아가시어 복을 입었다.
二月遭再從叔判官公德昌服(이월조재종숙판관공덕창복)/2월에 재종숙 판관공 덕창이 돌아가시어 복을 입었다.
五月遭再從叔都事公德明服(오월조재종숙도사공덕명복)/5월에 재종숙 도사공 덕명이 돌아가시어 복을 입었다.
秋受沙溪先生喪禮要儀(추수사계선생상례요의)/가을에 사계 선생에게서 喪禮要儀의 가르침을 받았다.
以服制問于沙溪(이복제문우사계)/ 상복을 입는 다섯 단계의 제도에 대해 사계선생에게 물었으며
以義禮遺之(이의례유지)/의례를 남겼다.
<해설>
◯服制(복제)는 상복을 입는 다섯 단계의 제도
◯再從叔縣監公德慎의 가계는
晊 - 士忱 - 德慎(다섯째 아들)
◯再從叔判官公德昌의 가계는
晊 - 士惕 - 德昌
◯再從叔都事公德明의 가계는
晊 - 士忱 - 德明(큰아들)
□ 萬曆三十九年辛亥, 光海君 三年, 二十八歲(만력삼십구년신해, 광해군 삼년, 이십팔세)/1611년 신해년 광해군 3년, 스물여덟 살이 되다,
春與金苔川地粹柳白石楫講解啓蒙圖說(춘여금태천지수유백석즙강해계몽도설)/봄에 태천 김지수와 백석 유즙과 더불어 啓蒙圖說를 강론하고 해석하였다.
<해설>
◯啓蒙圖說(계몽도설)을 검색 해보니
조선 후기의 학자 서명응(徐命膺:1716~87)이 주희(朱熹)의 〈역학계몽 易學啓蒙〉을 그림으로 알기 쉽게 해설한 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남간은 1600년대 인물이므로 이보다 훨씬 전이니, 서명응이 책으로 편찬하기 전에도 계몽도설이 세상에 알려진 것 같다.
◯苔川 金地粹는 1585(선조 18)~ 1639(인조 17)대 인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거비(去非), 호는 태천(苔川)·천태산인(天台山人). 할아버지는 예조정랑을 지낸 제민(齊閔)이고, 아버지는 서(曙)이다. 1616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교서관 교감에 임명되었다. 1617년 이이첨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자 이를 반대하여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다. 그뒤 정자(正字) 및 예조·병조의 낭관을 지냈고, 1626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正使) 김상헌을 따라 명나라에 갔다. 이때 〈조천록 朝天錄〉을 지었다. 사헌부의 지평·장령과 필선·보덕 등의 관직을 거쳐 1628년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이르렀다. 그뒤 무고하게 송광유(宋光裕)의 옥사에 연루되었다가 풀려나자 고향인 전라도 고부로 내려가 천태산(天台山)에 은거했다. 죽은 뒤 고부의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모셔졌다. 문집으로는 〈태천집〉 3권 2책이 남아 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白石 柳楫은 최명룡(崔命龍)·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6년(광해군 8)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김장생의 천거로 오수찰방(獒樹察訪)에 제수되었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동생 유도와 함께 고을마다 격문(檄文)을 보내며 창의(倡義)하였다.
1626년(인조 4) 청나라의 사신이 조정에 왔을 때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浡) 등과 더불어 이를 참수(斬首)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도·이흥발 등과 함께 창의하여 청주에 이르렀으나 이미 화의(和議)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귀향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 김장생의 막하에서 의병 모집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 뒤 고향(김제 출신)에 은거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1630년 다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고, 1636년 기린찰방(麒麟察訪), 이듬해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모두 사양하였다. 1650년(효종 1) 왕이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로 불렀으나, 병들어 나아가지 못하였다. 특히, 『대학(大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을 탐구하였다.
□ 萬曆四十年壬子, 光海君 四年, 二十九歲(만력사십년임자, 광해군 사년, 이십구세)/1612년 임자년 광해군 4년, 스물아홉 살이 되다,
著寒溪堂記(저한계당기)/한계당기를 지었다.
秋註解天文誌(추주해천문지)/가을에 천문지에 주를 달고 해설하였다.
去庚子受華人(거경자수화인)/지난 경자년에 중국인에게 받았던
理學經緯星數推驗(이학경위성수추험)/ 理學과 경도와 위도, 별로 점을 쳐서 나타나는 운수(運數)에 대해 추산과 응용하니
風雨無不精擇(풍우무불정택)/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것은 잘 골랐다.
<해설>
◯精擇(정택)은 잘 고름, 정선함,
◯無不(무불)은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즉 부정에 부정이니 긍정이 된다.
그래서, 모두 …이다 라고 해석한다.
□ 萬曆四十一年癸丑, 光海君 五年, 三十歲(만력사십일년계축, 광해군 오년, 삼십세)/1613년 계축년 광해군 5년, 서른 살이 되다,
作文章歌答陳上舍景文鳳歌行(작문장가답진상사경문봉가행)/문장과 노래를 지어 상사 진경문에게 답하면서 해봉은 노래하며 나아갔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
<해설>
◯文章歌(문장가)를 하나의 단어인 명사로 볼지, 아니면 문장과 노래로 해석할지 어렵다.
필자는 문장과 노래로 해석코자 한다.
◯鳳歌行(봉가행)는 봉황새가 노래하며 나아가다란 뜻인데, 여기서 鳳은 海鳳을 의미한 듯하다.
◯陳景文(1561-1642)의 역사인물 소개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는 1561년 (명종16)에 태어나 號가 汝郁으로, [생원시] 선조(宣祖) 22년(158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증광생원] 3등(三等) 52위(82/100)였다.
字는 汝郁, 號는 剡湖로 아버지는 陳井壽이다.
어떤 기록은 1538년(중종33년)에 전남 나주에서 진정수(陳井壽)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렇다면 섬호 진경문은 104세를 사신분이다.
◯上舍(상사)는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급제한 사람,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란 기록이 있지만 남간집선이나 남간집에서는 이와 유사한 글을 발견치 못하였다. 후손들의 부주의로 분실된 듯하다.
□ 萬曆四十二年甲寅, 光海君 六年, 三十一歲(만력사십이년갑인, 광해군 육년, 삼십일세)/1614년 갑인년 광해군 6년, 서른한 살이 되다,
春聞永昌大君遭變(춘문영창대군조변)/봄에 들으니 영창대군이 변을 당하였다고 한다.
去丙午上庠時仁穆王后誕生大君及時年纔八歲遭變於江華府(거병오상상시인목왕후탄생대군급시년재팔세조변어강화부)/지난 병오년에 성균관에 있을 때 인목왕후가 대군을 낳았는데 이때의 나이가 겨우 8세인데 강화부에서 변을 당하였다.
作烏竹杖詩贈尹殿中希一(작오죽장시증윤전중희일)/오죽장 시를 지어 전중 윤희일에게 보냈다.
先是永昌之誕生也(선시영창지탄생야)/먼저 영창이 탄생하였는데
宣祖喜甚嘗一日親(선조희심상일일친)/선조는 매우 기뻐서 늘 날마다 가까이 하였다.
畵老竹惡竹嫩竹(화노죽악죽눈죽)/늙은 대나무, 쓸모없는 대나무, 여린 대나무를 그렸는데
使朝臣就觀(사조신취관)/조정 신하로 하여금 參觀케 하니
李恒福稱善(이항복칭선)/이항복은 훌륭한 인물을 말하였고
李弘老潜涕(이홍로잠체)/이홍로는 눈물에 잠겼으니
盖知上有比諭也(개지상유비유야)/대체로 임금께서 비유하고 있음을 알았다.
永昌纔三歲(영창재삼세)/영창이 겨우 3살이 되었을 때
上薨光海卽位(상훙광해즉위)/임금께서 돌아가시자 광해가 즉위하였다.
儒生李偉卿掌令鄭造尹糿等起廢母論(유생이위경장령정조윤공등기폐모론)/유생 이귀경과 장령 정조, 윤공 등이 폐모론을 제기하였다.
永昌牽大妃裳帶相持不解(영창견대비상대상지불해)/영창을 대비가 치마끈으로 이어놓고 서로 풀어지지 않도록 지켰으나
光海送宮女蹴願活我也云傳(광해송궁여축원활아야운전)/광해가 보낸 궁녀가 발로 차니 나 좀 살려주시오 하고 애원했다는 말이 전한다.
聞慘忍作烏竹詩贈尹喜一畧曰(문참인작오죽시증윤희일략왈)/차마 잔인한 말을 듣고 오죽시를 지어 윤희일에게 보냈는데 대략 이르기를
憑君莫近深潭去(빙군막근심담거)/그대여 깊은 못에 가까이 가지 마소,
白日風雷便化龍(백일풍뢰편화용)/밝은 대낮에 풍뢰가 치면 용이 될 수 있다오.
又曰(우왈)/ 또 이르기를
已幸君身誠得力(이행군신성득력)/다행인 것은 그대 몸은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성실하여
孰能圖我國之危(숙능도아국지위)/누가 능히 우리나라의 위태로움을 도모하겠는가.
盖寓意御畵竹也(개우의어화죽야)/대체로 임금이 그린 대나무 그림이 풍자한 것이리.
七月第二子休生(칠월제이자휴생)/7월에 둘째 아들 休가 태어났다.
七月二十二日壬申寅時(칠월이십이일임신인시)/7월22일 임신일 인시이다.
<해설>
◯上庠(상상)은 성균관
◯活我也(활아야)는 나 좀 살려 주세요,
◯尹殿中希一은 전중 윤희일로 殿中은 殿中監察(종6품)로 윤희일의 가계를 보면 부/尹器, 조부/尹承章, 증조부/尹侃, 고조부/尹弼商이었다.
◯寓意(우의)는 다른 사물에 빗대어 의도한 뜻을 드러내거나 풍자함
◯稱善은 稱善士의 준말로 善士를 말하다 란 뜻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한 고을의 선사라야 한 고을의 선사와 벗할 수 있고, 한 나라의 선사라야 한 나라의 선사와 벗할 수 있고, 온 천하의 선사라야 온 천하의 선사와 벗할 수 있다.〔一鄕之善士 斯友一鄕之善士 一國之善士 斯友一國之善士 天下之善士 斯友天下之善士〕”라고 하였다.
善士는 훌륭한 인물,
□ 萬曆四十三年乙卯, 光海君 七年, 三十二歲(만력사십삼년을묘, 광해군 칠년, 삼십이세)/1615년 갑인년 광해군 7년, 서른두 살이 되다,
元日和朴南郭春帖詩(원일화박남곽춘첩시)/정월 초하루 박남곽의 춘첩시에 화답하다.
詩曰(시왈)/시에 이르기를
逐頌椒花已上盤(축송초화이상반)/산초나무 꽃을 다투어 칭송하니 이미 소반위에 있고
滿城風日爆洞寒(만성풍일폭동한)/성 가득한 바람과 볕은 차가운 골짜기를 말리는구나.
迎春添得仁民思(영춘첨득인민사)/봄을 맞이하는 어진 백성들의 생각을 더 얻었으니
好把新梅仔細看(호파신매자세간)/새로 핀 매화를 붙잡고 자세히 보아도 좋지 않소.
是年卜民東津(시년복민동진)/이 해에 점을 치니 坤卦는 동쪽나루였다.
製崔評事內夫人挽(제최평사내부인만)/최평사 내부인 만시를 지었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
三月聞仁穆大妃移昌德宮/3월에 들으니 인목대비가 창덕궁으로 옮겼다.
時鄭桐溪縕請斬鄭沆(시정동계온청참정항)/때는 桐溪 鄭縕이 鄭沆을 참하라고 고하고
論造糿等罪光海大怒(론조糿등죄광해대로)/폐모론은 제기한 鄭造와 尹糿(승정원 일기에는 尹認)의 죄를 논하자 광해는 크게 화를 내면서
請鞠被李元翼伸救(청국피이원익신구)/이원익이 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히고 누명을 벗겨 구원하려는 자를 국문하도록 청하였으며
竄濟州仁弘箚數被(찬제주인홍차수피)/제주에 귀양 간 정인홍이 상소문을 올림으로서 여럿이 피해를 입었다.
大妃十二罪目是年移宮(대비십이죄목시년이궁)/대비는 12죄목으로 궁을 옮긴 것이다.
作大舜賦(작대순부)/대순부를 지었다.
時不勝憤惋作此賦畧曰(시불승분완작차부략왈)/때는 몹시 분하게 여김을 이기지 못하여 이 부를 지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曰若稽古大舜兮(왈약계고대순혜)/이르노니 만약에 舜임금님의 옛 道를 자세히 살피어 공부해 보면
盡人倫之極也(진인윤지극야)/인륜의 지극함을 다하였도다.
無不是底父母(무불시저부모)/옳지 않는 부모가 없듯이
式相好矣兄弟(식상호의형제)/형제간에도 서로 좋아하는 사이여서
舜爲子我爲子(순위자아위자)/舜 임금이 자식이요 나도 자식이니
我爲子舜何人(아위자순하인)/내가 자식인데 舜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我何人云傳播(아하인운전파)/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전파하여야 하는가.
遠邇聞者偉之(원이문자위지)/원근에서 듣는 자가 뛰어난 것이다.
餘見集選(여견집선)/나머지는 남간집 선을 보라.
<해설>
◯元日(원일)은 정월 초하루, 설날,
◯春帖詩(춘첩시)는 봄에 써 붙이는 시,
◯椒花(초화)는 산초나무 꽃
◯朴南郭(박남곽)은 朴東說(1564~1622/반남박씨)로 나주목사 (1611. 9. 13~1613. 6)을 지냈으며, 號는 남곽(南郭)ㆍ봉촌(鳳村)이다.
1594년의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선조 때 형조 참의가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충주 목사가 되고 이어서 대사성이 되었다. 1613년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다 동량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저서에 《봉촌집》이 있다.
◯崔評事는 병마평사 崔四勿을 말한다.
◯鄭桐溪縕(정동계온)은 桐溪 鄭縕을 말하며 1569-1641년대 인물로 參判을 역임,
◯鄭沆(정항)은 강화부사를 하면서 영창대군을 강화에서 죽였음.
◯數被(수피)에서 먹통 된 글씨의 형체로 보아 被로 필자는 해독하였으나, 맞는지 의문이다.
◯稽古(계고)는 옛 도(道)를 자세히 살피어 공부함
□ 萬曆四十四年丙辰, 光海君 八年, 三十三歲(만력사십사년병진, 광해군 팔년, 삼십삼세)/1616년 병진년 광해군 8년, 서른세 살이 되다,
正月往哭再從叔于咸安(정월왕곡재종숙우함안)/정월에 재종숙이 함안에서 죽어 가서 곡하였다.
時自雲峰歷丹城至鼎湖作詩有(시자운봉역단성지정호작시유)/때는 雲峰으로부터 丹城을 지나 鼎湖에 이르렀는데 지은 시가 있는데
揮淚惜別之意(휘루석별지의)/석별의 情意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十二月遭伯父服(십이월조백부복)/12월에 백부 상을 당하여 복을 입었다.
議定侍墓儀禮(의정시묘의례)/시묘 의례를 의논하여 정했다.
時從兄行襄于長興洞居廬墓/때는 從兄이 장흥동에 葬事를 지내는데 시묘를 하는 것과
側問朔望及節日祭竝行/곁에서 묻기를 삭망과 절일의 제사를 병행하는지
靈筵墓所如何/묘소의 영연을 어찌하는지에 대해
答行於几筵則設於墓所恐非合當/궤연을 묘소에 설치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답해 주었다.
<해설>
◯行襄(행양)은 葬事를 치르다,
◯靈筵(영연)은 혼백이나 신위를 모신 자리와 그에 딸린 물건들
◯几筵(궤연)은 혼백이나 신위를 모신 자리와 그에 딸린 물건들
◯伯父(백부)는 羅德謙이다.
◯從兄(종형)은 羅海崙이다.
◯雲峰(운봉)은 전북 남원군에 있음,
◯丹城(단성)은 경남 산청군에 있던 지명
◯鼎湖(정호)는 황제(黃帝)가 용(龍)을 타고 하늘에 오른 곳을 정호(鼎湖)라 하는데, 백부가 돌아가신 곳 을 지칭한 듯하다.
□ 萬曆四十五年丁巳, 光海君 九年, 三十四歲(만력사십오년정사, 광해군 구년, 삼십사세)/1617년 정사년 광해군 9년, 서른네 살이 되다,
秋擢別試魁科披考官拔去(추탁별시괴과피고관발거)/가을에 별시에서 甲科 장원으로(魁科) 뽑혔는데 考官이 이름을 빼버렸다.
時朝令有不應擧者輒抵罪故/때는 조정에서 명령하기를 천거를 받지 않은 자가 갑자기 죄를 지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일이 있으면
不得已觀光擢魁科/어찌할 수 없이 괴과에 뽑히는 영광을 볼 수 없는데
以正論見忤考官權縉有是拔擧/정론을 써서 考官 權縉을 거스르는 일이 있어 이름을 빼내버린 것이다.
居太學上疏斥廢母論被削籍/태학에 있으면서 폐모론을 배척하는 상소를 하였다고 學籍을 지우는 피해를 입었다.
時仲氏參鄕解來會試同留泮邸(시중씨참향해래회시동유반저)/때는 둘째형이 鄕試에 참가하였고, 會試를 보러와 함께 성균관(泮邸)에 묵고 있었다.
同州人辛光業陳好善附爾瞻仁弘等(동주인신광업진호선부이첨인홍등)/같은 고을 사람 辛光業과 陳好善이 李爾瞻과 鄭仁弘에게 붙어서
上將凶疏欲籍名爲重改(상장흉소욕적명위중개)/흉소를 올려 학적의 이름을 다시 고치고
正言析之卽日上疏(정언석지즉일상소)/바른 말을 분석하여 즉일에 상소하였다.
呌閽伸救李元翼李恒福鄭述金尙容吳百齡諸賢(규혼신구이원익이항복정술금상용오백령제현)/궐문에 호소하여 이원익, 이항복, 정술, 김상용, 오백령과 같은 여러 어진이가 죄가 없음을 호소하였으며
極論李爾瞻鄭仁弘閔夢龍等之罪凶徒啣之(극론이이첨정인홍민몽룡등지죄흉도함지)/극론을 하는 이이첨, 정인홍, 민몽룡 등 흉도들의 죄를 원망하였다.
0出機0/이 부분은 필자가 원문을 해독치 못하였다.<필자 주>
暗嗾儒生李偉卿鄭之泂黃承弼成夏行蔡兼吉郭有道等(암주유생이위경정지형황승필성하행채겸길곽유도등)/은밀히 사주한 유생 이위경, 정지형, 황승필, 성하행, 채겸길, 곽유도 등이
會坐朝食堂削名泮籍(회좌조식당삭명반적)/아침 식당에서 같이 자리를 하여 學籍에서 이름을 삭제하였다.
冬仲氏石壕公被停擧會試/겨울에 둘째 형 石壕公이 會試를 볼 수 없는 정거를 당하였다.
時仲氏入會講被東學停擧(시중씨입회강피동학정거)/때는 둘째 형이 文科 會講에 들어 왔는데 東學에서 停擧를 당하였다.
爾瞻使辛光業修簡送祿米(이첨사신광업수간송록미)/이이첨이 신광업을 시켜 서류를 고치고, 녹미를 보내었으며
使之解停欲參其論(사지해정욕참기론)/停擧를 풀려면 폐모론에 참가하라고 하였지만
嚴辭斥絶則更爲停擧斥出禮園(엄사척절칙갱위정거척출예원)/엄중한 말로 배척하였기에 다시 停擧가 되고 科場에서 쫓겨난 것이다.
作被停吟因下鄕(작피정음인하향)/停擧의 피해에 詩를 지어 읊고 고향에 내려왔다.
贈別金苔川之富寧匪所(증별금태천지부영비소)/ 함경북도 부영은 가야할 곳이 아닌데 떠나는 김태천에게 송별하면서 시를 보냈다.
與苔川力扶聖母共斥凶論(여태천력부성모공척흉론)/태천과 더불어 聖母를 지지하는데 힘써 함께 흉론을 배척하였는데
而是時被謫故贈別章(이시시피적고증별장)/이 시점에서 귀양을 가게 되었기에 이별의 글을 보냈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 선을 보라.
<해설>
◯魁科(괴과)는 과거의 문과 중 갑과를 이르는 말, 조선 시대, 과거의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사람,
◯考官(고관)은 과거 시험의 출제·감독·채점을 맡은 관리, 즉 試官 權縉을 말한다.
◯抵罪(저죄)는 죄를 지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다
◯不應擧者(불응거자)는 천거를 받지 않은 자
◯拔擧는 拔去의 誤記 같다. 拔去는 빼거나 뽑아버리다,
◯鄕解(향해)는 鄕試, 향교에서 거행하는 시험인 듯하다.
◯陳好善(진호선)은 [생원시] 선조(宣祖) 38년(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증광생원] 3등(三等) 15위(45/100)한 자로 字가 汝優이다.
◯辛光業(신광업)은 [진사시] 선조(宣祖) 36년(160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식년진사] 2등(二等) 1위(6/100)하고
[문과] 광해군(光海君) 2년(1610) 경술(庚戌) 별시(別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1/20) 한 자로 字는 伯述, 父가 辛彭年이다.
◯匪所(비소)는 가야할 장소가 아니다,
◯金苔川(김태천)은 태천 金地粹를 말한다.
□ 萬曆四十六年戊午, 光海君 十年, 三十五歲(만력사십육년무오, 광해군 십년, 삼십오세)/1618년 무오년 광해군 10년, 서른다섯 살이 되다,
春侍通政公患侯(춘시통정공환후)/봄에 통정공의 환후에 시중들었다.
時沉疴二載有奇湯藥不掇(시침아이재유기탕약불철)/때는 2년간 지병으로 기이한 탕약을 가리지 않고 썼으나
危谻斷斷指(위갹단단지)/위독해지자 斷指를 斷行 하였다.
夏四月二十七日丁通政公憂/여름인 4월27일에 아버지의 喪을 당하였다.
喪禮一遵朱子家禮沙溪先生備要(상례일준주자가례사계선생비요)/상례는 오로지 주가 가례와 사계선생의 喪禮備要를 따랐으며
六朔枕苦水糜無鹽柴毁骨立(육삭침고수미무염시훼골립)/여섯달 동안 결코 누워 자지 않았으며 물과 죽만 먹고 소금을 먹지 않았으며 바짝 말라서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五月第三子任生/5월에 셋째아들 任이 태어났다.
五月初二日己丑午時(오월초이일기축오시)/5월초2일 기축일 오시이다.
九月行襄禮于王考府君墓下結廬侍墓/9월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묘 아래에 장사를 지내고 여막을 지어 시묘하였다.
時葬禮適從權(시장례적종권)/장례를 지낼 때 그때그때의 사정이나 형편에 따라 알맞게 변통하여 알맞게 하였으며
是月安窆于先王考護軍公墓下丁向原(시월안폄우선왕고호군공묘하정향원)/이번 달에 조부 호군공 묘 아래 정향원으로 편히 하관하였다.
結廬墓側兄弟同處朝暮環哭(결여묘측형제동처조모환곡)/묘 곁에 여막을 지어 형제가 같이 거처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돌아가면서 곡을 하였다.
蔬糲經朞三年一不到私(소려경기삼년일불도사)/변변하지 못한 음식으로 지내기를 朞年이나 三年이 되도록 한번도 私家에 이르지 않았으며
朔望入城以慰慈親勸令家人極致甘旨(삭망입성이위자친권령가인극치감지)/삭망 일에만 城에 들어와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고 집안 식구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보내어 권하기를 다하였다.
金市西題墓廬東壁曰永慕(금시서제묘여동벽왈영모)/김시서가 墓廬의 동쪽 벽에 쓰기를 永慕라 하였고
西壁曰終慕(서벽왈종모)/서쪽 벽에 쓰기를 終慕라고 하였다.
作記文見集選(작기문견집선)/기문을 지었으니 남간집선을 보라.
聞師睡隱公訃(문사수은공부)/스승 수은공께서 돌아가셨다고 부고가 왔다.
五月初六日(오월초육일)/5월초6일이다.
<해설>
◯患侯(환후)는 患候와 같은 뜻, 웃어른의 병을 높이어 일컫는 말,
◯沉疴(침아)는 고질병, 지병
◯危谻(위갹)은 위독
◯丁憂(정우)는 어버이의 상사(喪事)를 당함
◯柴毁(시훼)는 바짝 마르다, 여위다, 앙상하다
◯從權(종권)은 그때그때의 사정이나 형편에 따라 알맞게 변통함,
◯蔬櫔는 蔬糲의 誤記 같다.
蔬糲(소려)는 야채와 현미, 변변하지 못한 음식
◯家人은 하인, 한집안 식구,
◯永慕와 終慕의 풀이
永慕는 평생 부모의 은혜를 잊지 않다, 죽을 때까지 어버이를 잊지 않음,
終慕는 그리움이 끝이 없다는 말,
市西의 終慕堂記 마지막 표현에 “終身孝慕 曷有其極 玆以之名其堂曰終慕” 즉 죽을 때까지 사모함이 어찌 끝이 있으리요. 그래서 그 堂을 이름 하여 終慕라 하였다.
□ 萬曆四十七年己未, 光海君 十一年, 三十六歲(만력사십칠년기미, 광해군 십일년, 삼십육세)/1619년 기미년 광해군 11년, 서른여섯 살이 되다,
四月行常事(사월행상사)/4월에 일상적인 일을 행하였다.
□ 光宗貞皇帝泰昌元年庚申, 光海君 十二年, 三十七歲(광종정황제태창원년경신, 광해군 십이년, 삼십칠세)/1620년 경신년 광해군 12년, 서른일곱 살이 되다,
四月行詳事(사월행상사)/4월에 자세한 일을 행하였다.
六月禫(육월담)/6월에 禫祭를 지냈다.
七月服闋(칠월복결)/7월에 상기(喪期)가 끝나 상복을 벗었다.
<해설>
◯禫祭(담제)는 대상을 지낸 그 다음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
□ 熹宗哲皇帝天啓元年辛酉, 光海君 十三年, 三十八歲(희종철황제천계원년신유, 광해군 십삼년, 삼십팔세)/1621년 신유년 광해군 13년, 서른여덟 살이 되다,
春著鄕校東齋上樑文(춘저향교동재상량문)/봄에 향교 동재 상량문을 지었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
閏二月遭再從叔監察公德潤服(윤이월조재종숙감찰공덕윤복)/윤2월에 재종숙 德潤公의 喪을 당해 服을 입었다.
□ 熹宗哲皇帝天啓二年壬戌, 光海君 十四年, 三十九歲(희종철황제천계이년임술, 광해군 십사년, 삼십구세)/1622년 임술년 광해군 14년, 서른아홉 살이 되다,
元日作貞則復元箴(원일작정칙복원잠)/정월 초하루에 貞則復元箴을 지었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
五月第四子倬生(오월제사자탁생)/5월에 넷째 아들 倬이 태어났다.
五月初九日甲辰辰時(오월초구일갑진진시)/5월초9일 갑진일 진시이다.
著司馬齋上樑文(저사마재상량문)/사마재 상량문을 지었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
<해설>
◯貞則復元箴(정칙복원잠)은 곧으면(貞) 근본(元)이 회복된다는 警戒의 글
□ 熹宗哲皇帝天啓三年癸亥, 仁祖大王元年, 四十歲(희종철황제천계삼년계해, 인조대왕원년, 사십세)/1623년 계해년 인조대왕원년, 마흔 살이 되다,
二月五子仁生(이월오자인생)/2월에 다섯째 아들 仁이 태어났다.
二月二十日(이월이십일)/2월20일이다.
三月倡復聖母疏議(삼월창복성모소의)/3월에 國母의 상소 논의가 다시 창도 되었다.
時先倡母后復位之疏議(시선창모후복위지소의)/때는 모후 복위에 대한 상소의 논의를 먼저 창도하여
與道內金東準高弘達諸人治疏上京(여도내금동준고홍달제인치소상경)/도내 김동준과 고홍달 등 여러 사람이 상소를 다듬어 상경하여
倡改王而退(창개왕이퇴)/다시 창도하였으나 왕이 물리쳤다.
夏被除慶基殿參奉(하피제경기전참봉)//여름에 경기전 참봉에 제수 되었다.
時朝廷擧遺逸白江李公敬輿薦于朝除參奉(시조정거유일백강이공경여천우조제참봉)/때는 조정이 유일을 천거하라고 하자 白江 李敬輿가 조정에 참봉으로 제수할 것을 천거하였다.
謝恩不就職(사은부취직)/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직을 취하지 않았다.
秋迎長子俊婦(추영장자준부)/가을에 큰아들 俊의 부인을 맞이하였다.
珍原朴氏生員濬哲女/진원 박씨 생원 준철의 따님이다.
<해설>
◯白江 李敬輿는 1585(선조 18)~ 1657(효종 8)대의 인물로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사인(舍人) 등을 지냈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이 광해군에게 죽음을 당하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다시 기용되어 부수찬·부교리 등을 지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扈從)하고, 이어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다. 그뒤 부제학·청주목사·좌승지·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을 사수할 것을 주장했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에 오른 뒤, 이조참판·대사성·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42년 명나라 선박과 몰래 무역하는 것을 묵인하고 청나라 연호인 숭덕(崇德)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밀고하여 심양에 억류되었다. 이듬해 은(銀) 1,000냥을 바치고 풀려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돌아온 뒤 우의정에 올랐으나, 이후에도 청으로부터 기피인물로 지목되었다. 1644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청 황제가 "경여가 전에 죄가 있는 것을 사면하여 내보내기는 했으나 벼슬을 승진시켜 정승을 삼은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다시 억류되었다. 1645년 세자가 청의 황제에게 상소하여 풀려나 귀국했다. 이해 소현세자가 변사하여 세자책봉문제가 대두되자 '경상(經常)의 도(道)'를 주장하며 세손(世孫:소현세자의 아들)을 지지했으나, 인조는 봉림대군(鳳林大君:뒤의 효종)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듬해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昭顯世子嬪)가 소의 조씨(昭儀趙氏)를 저주했다고 하여 사약을 받게 되었을 때, 이에 반대하다가 진도에 유배되었으며, 1648년에는 삼수(三水)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즉위하면서 풀려나와 다시 중용되어, 1650년(효종 1) 영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그뒤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654년 영풍군(寧豊君) 식(湜)이 세자책봉을 청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갔을 때 그의 근황이 보고되기도 했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진도 봉암사(鳳巖祠), 흥덕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백강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李敬輿가 인조 즉위년에 南磵을 遺逸로 천거하여 경기전 참봉에 제수하려 했다.
李敬輿와 南磵이 상호 교유했던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는 입장이 같았으며, 광해군의 폐정을 正論으로 썼던 文科 답안지 사건도 李敬輿는 들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南磵을 특별히 참봉에 제수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후 인조11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李敬輿가 부임해 왔기에 더욱 친해졌을 것으로 본다.
□ 熹宗哲皇帝天啓四年甲子, 仁祖大王二年, 四十一歲(희종철황제천계사년갑자, 인조대왕일년, 사십일세)/1624년 갑자년 인조대왕1년, 마흔한살이 되다,
二月聞逆适擧兵叛馳倡義檄/2월에 역적 이괄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고 들려서 창의 격문을 전파하였다.
正月二十二日逆适以平安兵使與龜城府使韓明璉(정월이십이일역괄이평안병사여구성부사한명련)/정월 22일 역적 평안 병사 이괄과 구성부사 한명련이
謀反直向犯京(모반직향범경)/ 반역을 꾀하여 곧바로 서울로 침범하니
始聞急警發檄道內畧曰(시문급경발격도내략왈)/처음 급한 경보를 듣고 격문을 도내에 보냈으니 이르기를
彼逆适負天地邜/卵/育之恩(피역괄부천지석/란/육지은)/저 역적 이괄은 천지에 알을 품듯 길러준 은혜를 저버리고
肆陞梁吹主之毒(사승양취주지독)/방자하게 들보에 올라가 주인에게 독을 불고 있습니다.
又曰(우왈)/또 이르기를
當於十六日整旅啓行爲諸道倡云(당어십육일정여계행위제도창운)/이 달 16일에 군사를 정돈하여 길을 떠나니 여러 도에서는 앞장서 주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는데
餘見集選/나머지는 남간집선을 보라.
邜育之恩
聞大駕幸公州與靈光郡守元斗杓議討賊之策(문대가행공주여영광군수원두표의토적지책)/임금이 탄 수레가 다행히 공주에 있다고 들어서, 영광군수 원두표와 적을 토벌함 계책을 논의하였다.
書畧曰(서략왈)/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國有大變軍與方急宮軍外(국유대변군여방급궁군외)/나라에 큰 변란이 있어 軍은 바야흐로 급하므로 宮을 지키는 軍 외에
加抄別隊直赴行在(가초별대직부행재)/예비로 뽑은 별대는 행재소로 직접 가고
則急調義兵卽當繼援云(칙급조의병즉당계원운)/그리고 급히 調發한 의병은 마땅히 후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聞慈殿至完府董督義旅(문자전지완부동독의여)/임금의 어머니께서 전주부에 이르렀다고 들었으며, 의병대를 독촉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初十日李公元翼奉慈殿至完府/초10일 이원익공이 받들어 임금의 어머니가 전주부에 이르렀는데
道內臣民尤切奔問之擧/도내 관원과 백성들이 더욱 절실히 급히 달려가 안부를 여쭙고 물었다.
會兵公館布告慈殿敎文/공관에 모인 병사들에게 布告하여 임금의 어머니께서 敎文를 내렸다.
十三日敎文畧曰(십삼일교문략왈)/13일 임금이 내리던 글에 대략 이르기를
嗟爾八方忠義之士(차이팔방충의지사)/아, 너희 팔방에서 충의에 찬 선비들이여
皆我祖宗及先王敎育之人/모두 나의 조종이나 선왕이 가르친 사람들이니
當此危難爾等各出義兵穀/마땅히 이 위난에 너희 등이 각각이 의병과 곡식을 내어
急急來救云/매우 급히 와 구원하였느니라.
聞大駕還都罷義旅(문대가환도파의여)/임금의 수레가 환도한다고 들어서 의병대를 파하였다.
十一日元帥張晩先鋒(십일일원수장만선봉)/11일 장만 원수가 선봉이 되고
鄭忠信再從叔宣傳德憲戰于鞍峴(정충신재종숙선전덕헌전우안현)/정충신, 재종숙 선전관 덕현께거 안현 전투에서
适敗走就斬二十二日(괄패주취참이십이일)/이괄이 패하여 도주하였는데 22일 붙잡아 목을 베었다.
上還都湖南義兵遂罷(상환도호남의병수파)/임금께서 환도하자 호남의병은 일을 마치고 파하였다.
答義廳募穀通文(답의청모곡통문)/義廳의 募穀 통문에 답하다
時自靈光郡義廳分定九大邑(시자영광군의청분정구대읍)/때는 영광군 의청에서 9대읍에 나누어 정한 바
定有司付屬邑馳通募穀(정유사부속읍치통모곡)/정한대로 관리는 부속 읍에 모곡에 대해 뒤좇아 통문 하였다.
故二十三日答文畧曰(고이십삼일답문략왈)/그러므로 23일 답문에 대략 이르기를
官廩軍儲罄竭無餘(관름군저경갈무여)/官의 창고는 군량이 탕진되어 여분이 없습니다.
當此板蕩之時(당차판탕지시)/이처럼 국정이 문란할 때는
可不効治(가불효치)/가히 다스리는데 힘쓰지 못하겠지만
埃之補云(애지보운)/조그마한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幼學鄭如龍姜鳳覽李榮廷李完廉公弼羅海崙李宗吉生員吳挺男進士羅海鳳生員吳以健等(유학정여룡강봉람이영정이완염공필나해륜이종길생원오정남진사나해봉생원오이건등)/幼學 鄭如龍, 姜鳳覽, 李榮廷, 李完, 廉公弼, 羅海崙, 李宗吉, 生員 吳挺男, 進士 羅海鳳, 生員 吳以健 等입니다.
爲募義穀有司(위모의곡유사)/모의곡 유사가 되었다
本州有司爲十七員(본주유사위십칠원)/본주의 모의곡 관리는 17명이다.
見募義錄(견모의록)/모의록을 보라
聞林戚丈觀海殉節作輓(문임척장관해순절작만)/친척되는 어르신 관해 임회가 순절하였다고 들어서 輓詞를 지었다.
秋中別試(추중별시)/가을에 별시에 합격하였다.
謝林石村公惠送寄韻/임석촌공의 은혜에 사례하며 詩賦를 보냈다.
時石村爲黃海監司送布墨作詩以謝/이때 황해 감사 石村이 布와 墨을 보냈기에 사례의 詩를 지었다.
<해설>
◯邜育之恩은 卵育之恩인것 같다. 필자가 수정 해석코자 한다.
卵育之恩은 알을 품듯 길러준 은혜
◯加抄別隊(가초별대)는 예비로 뽑은 별대,
◯完府(완부)는 전주부,
◯董督(동독)은 감시하며 독촉하고 격려함,
◯奔問(분문)은 급히 달려가 안부를 여쭘
◯敎文(교문)은 임금이 내리던 글,
◯軍儲(군저)는 군량의 저축, 軍糧,
◯罄竭(경갈)은 다 써버리다, 탕진하다, 고갈하다
◯埃之補(애지보)는 보탬이 없지는 않다.
◯募義穀(모의곡)은 의병에게 필요한 곡식을 모우는 것,
◯林戚丈觀海(임척장관해)는 친척 되는 어르신 觀海 林檜를 말한다.
1562년(명종 17)∼1624년(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공직(公直), 호는 관해(觀海). 증좌승지 임정수(林貞秀)의 아들이며, 중부(仲父) 임길수(林吉秀)에게 입양되었다. 정철(鄭澈)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林檜의 아들이 任得說인데, 임회의 선대 林檐은 나성군의 손녀사위임.
林檜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도성을 침범하므로 박영서(朴永緖)‧마우현(馬佑賢)과 함께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경안역(慶安驛)싸움에서 전사하였다.
◯林石村(임석촌)은 石村 林㥠(임서)를 말한다.
□ 熹宗哲皇帝天啓五年乙丑, 仁祖大王三年, 四十二歲(희종철황제천계오년을축, 인조대왕삼년, 사십이세)/1625년 을축년 인조대왕3년, 마흔두 살이 되다,
春貽書沈判書陳時務(춘이서심판서진시무)/봄에 沈판서에게 글을 보내어 당장에 시급한 일을 개진하였다.
書曰(서왈)/편지에 이르기를
宗社有慶國難底窆(종사유경국난저폄)/종묘와 사직은 국가 경사나 난리가 있으면 무덤구덩이에 이르고
倉廩罄竭(창름경갈)/창고와 곳집이 탕진되었기에
外覦尤慮使兩西實儲救(외유우려사양서실저구)/밖에서 넘겨다보면 더욱 염려되어 황해도와 평안도로 하여금 곡식을 저축하여 구원하고
武以虞邊備使(무이우변비사)/국경의 경비에 대비하여 군인으로 하여금
三南興敎運漕以固邦本云(삼남흥교운조이고방본운)/三南에서 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도록 교화를 흥기시키는 것이 오로지 나라의 근본입니다.
有唱和詩見集選(유창화시견집선)/남의 시에 운을 맞추어 지은 시가 있으니 남간집선을 보라.
<해설>
◯貽書(이서)는 글을 보내다,
◯兩西(양서)는 황해도와 평안도
◯邊備使는 備邊使와 같은 의미 같다.
◯底窆(저폄)는 해석하기가 참으로 모호하다. 필자는 무덤구덩이에 이르다로 하고자 한다.
◯運漕(운조)는 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
□ 熹宗哲皇帝天啓六年丙寅, 仁祖大王四年, 四十三歲(희종철황제천계육년병인, 인조대왕사년, 사십삼세)/1626년 병인년 인조대왕4년, 마흔세 살이 되다,
同太學生上疏請斬虜使(동태학생상소청참로사)/태학생과 함께 오랑캐 사신을 베도록 상소하였다.
時虜使至與道內進士李興浡兄弟(시로사지여도내진사이흥발형제)/오랑캐 사신이 도래하였을 때 도내 진사 이흥발 형제와
及同館苦而人上疏極言(급동관고이인상소극언)/같은 태학관에서 애를 쓴 사람들이 극언으로 상소하여
虜方匪茹大邦在義不可交(로방비여대방재의불가교)/오랑캐가 바야흐로 큰 나라로서 義가 있지만 제 힘을 헤아리지 못하여 교류를 할 수 없으므로
請斬虜价凾送(청참로개함송)/청컨대 오랑캐를 베어 큰 함에 넣어 보내야 합니다.
天朝辭旨凜然(천조사지늠연)/중국 조정의 언사의 취지는 위엄이 있었다.
貽書張谿谷議邦禮(이서장계곡의방례)/張谿谷에게 편지를 보내어 나라의 길흉과 관련된 전례를 의논하였다.
時朝家有議禮貽書谿谷/조정에서 禮를 논의하고 있을 때 谿谷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終歸於沙溪金先生所守/결국 沙溪 金선생이 지키는 바가 되었다.
三月十三日丁妣淑夫人李氏憂(삼월십삼일정비숙부인이씨우)/3월13일 오후 1시경 어머니 숙부인 이씨의 親喪을 당하였다.
四月祔葬通政公墓侍廬(사월부장통정공묘시여)/4월에 通政公을 합장하고 묘를 여막에서 모셨다.
前喪時結墓廬服闋(전상시결묘여복결)/아버지가 돌아 가셨을 때 여막에서 시묘를 끝내고 상복을 벗었는데
浚尙修耸有時往省(준상수용유시왕성)/성묘를 갈 때에는 오히려 엎드려 안으며 묘를 손질하여 우뚝 솟게 하였다.
至今喪兄弟侍墓如前儀(지금상형제시묘여전의)//오늘의 喪에 이르도록 형제의 시묘는 여전히 모범이 되었다.
十月聞李延平筵說(십월문이연평연설)/10월에 연평군 이귀가 임금의 자문에 답하여 말을 올렸다고 들었다.
十月十八日延平君入侍(십월십팔일연평군입시)/10월18일 연평군이 入侍하여
經筵建白曰(경연건백왈)/경연에서 의견을 제기하기를 왈
湖南士子等皆有爲國之心(호남사자등개유위국지심)/호남의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 등은 모두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어
當适亂募義勤王極力可尙(당괄란모의근왕극력가상)/李适의 난을 당하여서는 의병을 모집하여 勤王에 힘을 다하여 숭상할만한데
而國家未有酬勞之擧(이국가미유수로지거)/국가가 수고나 공로에 대하여 보답함을 움직이지 못하여
未免落莫矣(미면락막의)/마음이 쓸쓸한 모양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上曰予非不留念(상왈여비불유념)/임금께서 이르기를 “내가 마음을 두지 않아서가 아니다” 하였다.
而迄未擧行矣(이흘미거행의)/그리하여 마침내 행동하지 못한 것을 행하였다.
<해설>
◯匪茹(비여)는 자신을 요량하지 않는다는 뜻,
◯凜然(늠연)은 매우 엄하다, 위엄이 있다
◯邦禮(방례)는 나라의 길흉과 관련된 전례
◯朝家(조가)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정치를 의논하고 집행하던 곳, 왕실, 조정,
◯筵說(연설)은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임금의 자문(諮問)에 답하여 올리던 말
◯李延平을 延平君으로 해설하였는데, 延平府院君 李貴를 말한 듯하다.
이귀(李貴)는 1557년(명종 12)∼1633년(인조 11),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1582년(선조 15)에 생원이 되었다.
1592년에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가(御駕)가 서행(西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하고 물러나와 의병을 모집하여 황정욱(黃廷彧)의 진중으로 갔다가 다시 어가가 주재하는 평양으로 가서 청죄(請罪)하고 방어대책을 아뢰었다.
이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 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이듬해에는 숙천행재소로 가서 왕에게 회복대책을 진언하자, 왕이 후하게 상사(賞賜)하고 다시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명나라 군중에 군량을 수송하게 하였다.
그는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각 읍으로 순회하며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해서 서울 수복전을 크게 도왔다.
그뒤 장성현감‧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김제군수를 역임하면서 난후수습에 힘썼다.
160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배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1616년(광해군 8)에 숙천부사로서, 해주목사로부터 무고를 받고 수감된 최기(崔沂)를 만나본 일로 탄핵을 받아 이천에 유배되었다.
1619년에 풀려나와 1622년에 평산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및 두 아들 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 등과 함께 반정의거를 준비하였다.
이듬해 3월에 광해군을 폐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을 왕으로 추대,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김류‧이서(李曙)‧심기원(沈器遠)‧김자점‧신경진‧최명길‧이흥립(李興立)‧심명세(沈命世)‧구굉(具宏) 등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그뒤 호위대장(扈衛大將)‧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우참찬‧대사헌‧좌찬성 등을 역임하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그동안 남한산성의 수축, 호패법의 실시, 무사의 양성, 국방을 충실히 할 것 등을 건의하여 국력강화에 힘썼다.
1626년(인조 4) 병조‧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이해에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 元宗妃)의 상기를 만 2년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여 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다가 다시 탄핵을 받았다. 당쟁이 치열하고 명‧청 관계의 외교가 복잡한 시기에 일신의 안위를 잊고 나라를 위하여 공헌한 바가 컸다.
◯士子(사자)는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
◯落莫(낙막)은 마음이 쓸쓸한 모양
□ 熹宗哲皇帝天啓七年丁卯, 仁祖大王五年, 四十四歲(희종철황제천계칠년정묘, 인조대왕오년, 사십사세)/1627년 정묘년 인조대왕5년, 마흔네 살이 되다,
正月聞虜賊犯境(정월문노적범경)/정월에 오랑캐 도적들이 국경을 침범했다고 들었다.
十五日反賊弘立引虜騎入義州(십오일반적홍립인노기입의주)/15일 反賊 강홍립이 이끈 오랑캐 기병들이 의주로 들어 왔다.
朝野凶懼(조야흉구)/조정과 재야는 흉흉하게 두려워하였다.
二月起復爲募義將(이월기복위모의장)/2월 부모 喪中에 모의장이 되었다.
時沙溪金先生爲號召使傳檄諸道(시사계금선생위호소사전격제도)/사계 김선생이 호소사가 되어 여러 도에 격문을 전할 때
爰與同志招集義師(원여동지초집의사)/이에 더불어 뜻이 같은 의병을 불러서 모았는데
而方在草土以禮自固(이방재초토이예자고)/바로 전에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으로 예의를 굳게 지키고 있었다.
칙선생특유소명칙선생특유소명)/그런데 선생께서 특별한 소명을 받고
仰念社稷危急之勢(앙염사직위급지세)/위급한 형편의 사직을 우러러 생각하였다.
追思師生付托之敖(추사사생부탁지오)/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추억하며 오만하게 부탁을 맡았는데
且有仲氏勸勉(차유중씨권면)/또한 둘째형이 격려해주어
不得已起復募義(부득이기복모의)/부득이 喪中에 있으면서 募義將이 된 것이다.
建幕府于公館布告號召使告諭文(건막부우공관포고호소사고유문)/공관에 전쟁 사무소(幕府)를 짓고 호소사의 고유문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여 일반에 알렸다.
正月二十五日自沙溪告諭文畧曰(정월이십오일자사계고유문략왈)/정월25일 沙溪의 告諭文에 대략 이르기를
天禍吾邦寇戎充斥(천화오방구융충척)/하늘에서 내리는 재앙으로 우리나라가 도적으로 넘치니
咨爾丙湖素是忠烈之鄕(자이병호소시충열지향)/너희들에게 묻노니 병자년 호남은 평소에 忠과 烈의 고향이었으니
豈不奮義赴難云云(개불분의부난운운)/어찌 義를 떨쳐 위험에 처한 나라를 구하러 가지 않겠는가 여차여차 하였다.
抄軍簿定節目馳報義廳(초군부정절목치보의청)/뽑힌 군사들의 장부는 節目을 정하여 義廳에 급히 보고하였다.
軍簿內畧曰(군부내략왈)/군사들의 장부 안을 대략 이르면
勿論前啣忠義衛品官(물론전함충의위품관)/전 직함이 忠義衛 품관은 더 말할 것도 없고
閑良除役(한량제역)/한량은 부역을 면해주고
公私賤成冊事節目內畧曰(공사천성책사절목내략왈)/공노비와 사노비는 책으로 만들 일인데 절목 안에 대략 이르기를
戰馬軍器軍根願納者(전마군기군근원납자)/“전투 말과 군 병기, 군사 능력을 자원하여 바치는 자는
建褒賞次成冊事(건포상차성책사)//포상을 개진” 하는 것은 다음에 책으로 만들 일입니다.
整旅啓行諭勤王誓(정여계행유근왕서)/의병을 정돈하여 출발하면서 勤王을 맹세하고 깨우쳤다.
誓文畧曰(서문략왈)/맹세문에 대략 이르기를
我赴義之士(아부의지사)/우리가 義로운 선비로 나아감에
明聽誓辭(명청서사)/명세의 말을 밝게 들어야 합니다.
嗟余寓劣强(차여우열강)/아, 우리가 약하고 강함을 핑계 삼아
奮情私抗顔(분정사항안)/사사로운 정을 일으키거나 굽히지 않은 낯빛으로
臨師有死而已(임사유사이이)/군사에 임하면 죽을 길 밖에 없습니다.
今日啓行惟在諸義士(금일계행유재제의사)/금일에 출발하지만 오로지 여러 義士들에게 달렸으니
文一乃心(문일내심)/글로나마 마음을 하나로 해야 합니다.
鍛乃戈矛礪乃鋒刃(단내과모려내봉인)/戈矛(창)를 날 세우고 칼날을 숫돌에 갈아서
奮揚武烈勦滅賊酋(분양무열초멸적추)/ 싸움에 용기 있고 맹렬히 떨쳐 일어나면 적 추장을 무찔러 없앨(勦滅) 것입니다.
如不從令(여부종령)/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罔有宥赦云(망유유사운)/사면은 없습니다.
進完府與李梧里定軍策(진완부여이오리정군책)/전주부로 나아가 梧里 李元翼과 더불어 군 계책을 정하였다.
時見梧里論軍策則梧里曰(시견오리론군책칙오리왈)/때는 오리 이원익과 군 계책을 논의할 때에 오리께서 이르기를
此策正合(차책정합)/이 계책은 바로 합치하고
安邦俊所陳時務當啓聞採用云(안방준소진시무당계문채용운)/안방준이 당장 시급한 일을 진술한바 마땅히 임금께 아뢰어 채택하여야 합니다.
至礪山扈送王世子駕承朝命罷兵(지여산호송왕세자가승조명파병)/왕세자 받들어 수레를 호송하여 여산에 이르니 조정이 병사를 파하도록 명령하였다.
貽書廟堂斥和議(이서묘당척화의)/조정에 和議를 배척하는 편지를 전했다.
時金差劉海諸和議(시금차유해제화의)/때는 金나라 差官 劉海와 여럿이 화의를 할 때
而張谿谷管籌司抵書斥和畧曰(이장계곡관주사저서척화략왈)/張谿谷은 비변사를 관할하는데 척화의 글을 보냈는데 대략 이르기를
若以講和(약이강화)/만약에 강화를 하면
苟免兵衄(구면병뉵)/임시로 모면하겠지만 코피가 나도록 싸운 병사들은
遽從其欲則未免賤(거종기욕칙미면천)/그들의 욕구를 들어준다 했던 免賤이 되지 않았습니다.
虜射天之逆(노사천지역)/오랑캐가 중국을 욕보이는 반역이니
請以安義(청이안의)/청컨대 安州, 義州의
二州爲首尾之應(이주위수미지응)/두 고을이 머리와 꼬리로서 응원하도록
闕北勁卒(궐북경졸)/변방 북쪽에 강한 군사를 두어
逷其侵鎬之鋒云(逷기침호지봉운)/멀리서 국경을 침범하면 선봉이 되어야 합니다.
又有坤門韻五首見集選(우유곤문운오수견집선)/또 곤문운 5수가 있으니 남간집선을 보라.
三月十三日行常事(삼월십삼일행상사)/3월13일 일상의 일을 행하였다.
解兵卽日服襄直來侍墓廬(해병즉일복양직래시묘여)/병사를 해산하는 즉일에 복을 입고 장사지낸 곳에 곧바로 와서 여막에서 시묘를 하였다.
聞三月從嫂金氏殉節安州(문삼월종수금씨순절안주)/3월에 종수 김씨가 안주에서 순절하였다고 들었다.
金氏卽壯武公浚女/김씨는 곧 장무공 준의 따님인데
三從弟守素夫人/삼종제 羅守素의 부인이다.
隨壯武公在安州衙/장무공을 따라 안주 관아에 있을 때
遭虜變與父親同時殉節/오랑캐의 변을 당하여 부친과 동시에 순절하였다.
故以烈旌/그러므로 열녀로 정려되었다.
<해설>
◯反賊(반적)을 고문헌 번역 사례를 보면 그대로 반적으로 해석하였다.
필자가 여러 사례를 종합해 보니 反賊은 반역을 하여 賊의 무리에 들어간 사람을 지칭하는 것 같아 보인다.
◯弘立은 姜弘立을 말한 것 같다.
연보의 기록을 할 때에 그 당시 국사 기록을 참작은 하였겠지만, 강홍립이 이끈 오랑캐 기병대가 의주를 침략한 것으로 하였지만, 이것은 침략군의 선봉대가 아니라 후금군에 이끌려 들어와 화의를 주선하였던 것인데, 이 모두 후금이 강제로 시킨 것이다.
姜弘立은 누구인가.
강홍립은 1560(명종 15)~ 1627(인조 5)대의 조선의 무신이다.
明나라는 후금이 변경에 침입하는 등 세력을 크게 확장하자, 조선에 원병을 청해왔다. 광해군은 明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姜弘立을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으나 후금과의 관계를 의식하여 戰勢를 보아 행동하라는 지시를 함께 내렸다.
이에 부원수인 김경서(金景瑞)와 더불어 1만 3,000여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다. 1619년 명 제독(提督) 유정(劉綎)의 군과 합류했으나 부차(富車)에서 크게 패하자, 광해군의 비밀지시에 따라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했다.
이듬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그는 김경서와 함께 계속 8년간 억류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도(先導)로서 강홍립이 입국하여 화의(和議)를 주선했다. 그뒤 국내에 머물게 되었으나,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 당했다. 죽은 뒤에 복관되었다.
◯起復(기복)은 부모의 상중(喪中)에 벼슬자리에 나아감
◯義師(의사)는 정의를 위해 일어난 군사, 의군, 의병
○“戰馬軍器軍根願納者(전마군기군근원납자)/전투 말과 군 병기, 군사 능력을 자원하여 바치는 자는 ”에서 根願納의 부분은 당초 해독치 못하였는데, 추후에 규장각 원문을 보고 찾아냈다.
하지만 軍根의 根은 문맥상 틀린 글자처럼 느껴진다.
◯號召使(호소사)는 전쟁이 났을 때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를 모집하던 임시 관직.
◯方在(방재)는 바로 전에
◯草土(초토)는 거적과 흙 베개로 시묘(侍墓)를 산다는 뜻으로,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
◯付托之敖(부탁지오)는 오만하게 부탁을 맡다,
이를 자칫 “오만한 부탁”으로 해석하면 문맥이 달라져 버린다.
◯告諭文(고유문)은 어떠한 사실을 널리 알리는 내용의 글
◯
◯充斥(충척)은 충만하다, 가득 차다, 넘치다
◯忠義衛(충의위)는 1418년(세종 즉위)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 3공신의 자손들을 입속(入屬)시키기 위해 설치된 양반 숙위군이었다. 전투나 국왕시위보다는 3공신 자손의 군역을 대체하고, 관료 진출상의 특권을 베풀어주기 위해 마련한 병종이다.
◯閑良(한량)은 일정한 직사(職事)가 없이 놀고먹는 말단 양반 계층.
◯抗顔(항안)은 굽히지 않은 낯빛
◯一乃心(일내심)은 몸과 마음을 다하다, 한마음으로 하다,
◯啓聞(계문)은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던 일
◯劉海(유해)는 원래 조선 사람인데 金나라의 劉提督의 差官이 되었다.
◯籌司(주사)는 비변사
◯抵書(저서)는 글을 던지다 즉 글을 보내다,
◯苟免(구면)은 모면을 꾀하다
◯遽從其欲則未免賤(거종기욕칙미면천)의 풀이
나라에 전란에 발발하여 병졸을 모집하는데, 나라는 보통 천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免賤을 미끼로 삼았다.
전쟁에서 이기면 면천해준다는 국가가 약속했는데, 화의를 해버려 면천의 기회를 놓친다는 것이다.
◯射天(사천)은 우리의 군사가 중국 군대에게 활을 쏘았다는 말, 중국을 욕보인다는 뜻,
◯安義(안의)는 두 고을 명칭을 줄인 말로, 安州와 義州를 말한다.
◯勁卒(경졸)은 강한 군사
◯安州(안주)는 평안남도 안주군을 말한다.
◯羅守素(나수소)는 晊 - 士忱 - 德憲 - 守素의 가계이다.
◯壯武公浚(장무공준)은 安州牧使를 지낸 장무공 金浚을 말한다.
장무공 신도비는 전북 정읍시 소성면 주천리에 있다.
◯又有坤門韻五首見集選(우유곤문운오수견집선)/또 곤문운 5수가 있으니 남간집선을 보라.
★坤門韻。 羅公詩。(이 시를 계곡 장유에게 보냈으며 송자대전에도 실려있다)
六月飛霜不是冤。(유월비상불시원)/원통함이 아니면 유월에 서리 내리랴.
吾知朔氣遍乾坤。(오지삭기편건곤)/그대가 아는 삭기는 하늘과 땅을 덮었네.
煩公入告敷文德。(번공입고부문덕)/그대 번거롭지만 들어가 고하여 문덕을 펴라.
鎖鑰何人又北門。(쇄약하인우북문)/누구라도 북문을 자물쇠로 채워두라.
-韻 : 坤 , 門
□ 毅宗烈皇帝崇禎元年戊辰, 仁祖大王六年, 四十五歲(의종열황제숭정원년무진, 인조대왕육년, 사십오세)/1628년 무진년 인조대왕6년, 마흔다섯 살이 되다,
三月行祥事五月禫七月服闋(삼월행상사오월담칠월복결)/3월에 商事를 지내고, 5월에 禫祭를 지내고, 7월에 喪期가 끝나 喪服을 벗었다.
冬入聖齋菴讀兵抄陣訣(동입성재암독병초진결)//겨울에 성재암에 들어가 병초진결을 읽었다.
聖齋菴在州西五里(성재암재주서오리)/성재암은 나주 서쪽 5리에 있는데
曾王考翰林公讀書于此(증왕고한림공독서우차)/증조할아버지 한림공께서 이곳에서 책을 읽었는데
人謂羅氏山房(인위나씨산방)/사람들이 나씨산방이라고 일컬었다.
時卽見虜情叵測(시즉견노정파측)/때는 오랑캐의 정세를 헤아릴 수가 없음을 보고
亂將不已退捿山中(란장불이퇴서산중)//亂이 장차 끊임없을 것 같아 山中에 물러나 있으면서
讀兵書手抄陣圖/秘/訣及觀氣法(독병서수초진도/비/결급관기법)/병서를 읽고 손수 진도비결과 관기법을 베꼈다.
上自黃帝入井奇正之法(상자황제입정기정지법)/위로는 우물에 들어간 黃帝가 奇正의 兵法과
下及孔明八陣大小之圖以至(하급공명팔진대소지도이지)/아래로는 제갈공명의 8陣이 미치는 크고 작은 법칙에 이르기까지
風雲之驗(풍운지험)/바람과 구름을 시험하고
日月之欲無不曉達(일월지욕무불효달)/해와 달처럼 막힘없이 환하게 알려고 하는
名曰登壇必攷(명왈등단필고)/그것을 登壇必考 즉 “隊長이 알아야할 필수 참고서”라고 하는데
述序文畧曰(술서문략왈)/序文을 지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天啓以後羞深跪羊(천계이후수심궤양)/명나라 휘종 이후 羊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심한 수치로
意切嘗膽每欲持釼(의절상담매욕지일)/복수를 하겠다는 뜻이 간절하여 늘상 칼을 가지고 다니며
而斬虜賊(이참노적)/그리고 虜賊들을 베려 하였다.
願一殞身而報皇明云(원일운신이보황명운)/이 한 몸 죽어 황제의 나라 명나라에 보답하기를 원하였다 라고 하였다.
著聖齋菴記(저성재암기)/성재암기를 지었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
<해설>
◯祥事(상사)는 사람이 죽은 뒤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
◯叵測(파측)은 헤아릴 수 없다, 추측할 수 없다
◯抄陣圖訣은 抄陣圖秘訣로 수정한다.
남간집선에는 秘자가 삽입되어 있어 필자가 이를 보완하였다.
◯黃帝(황제)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삼황오제 중의 한 사람
◯奇正(기정)은 기이함과 正道를 말하는데, 손자병법 병세(兵勢) 제5편에 보면 “정(正)으로 대치하고 기(奇)로써 승리를 거둔다(以正合 以奇勝)”라는 말이 나온다. 경쟁을 하거나 싸움을 할 때는 정(正)을 기반으로 하되, 기(奇)로써 이겨나간다는 말이다. 정(正)이란 방패로 막고 기(奇)란 창으로 찌르는 것이다.
◯入井인지 八井인지, 漢字 解讀이 참으로 어렵다,
식견이 높은 사람은 漢字가 눈에 보이겠지만, 필자처럼 처음 번역을 시도하는 자는 도무지 漢字가 보이지 않아 눈에 보이는 글자도 잘 해독하기 어려워. 入과 八을 혼동하고 있다.
본 글이 地理誌라면 八井(우물이 8개)로 보겠지만 병법을 말하고 또 한편 舜임금도 우물에 들어갔기에 入井(우물에 들어가다)으로 해독하여 해석코자 한다.
◯曉達(효달)은 막힘없이 환하게 앎, 막힘없이 환하게 알다
◯登壇必攷는 登壇必考와 같은 의미, 즉 대장이 알아야할 필수 참고서
◯述序文은 序文을 지었다.
◯天啓(천계)는 천지신명의 계시, 명 희종의 연호
◯여기서는 羞深跪羊인데 남간집선에서는 羞深跪犬으로 되어 있다.
□ 毅宗烈皇帝崇禎二年己巳, 仁祖大王七年, 四十六歲(의종열황제숭정이년기사, 인조대왕칠년, 사십육세)/1629년 기사년 인조대왕7년, 마흔여섯 살이 되다,
冬中東堂別試(동중동당별시)/겨울에 동당별시에 합격하였다.
與張谿谷有酬唱詩(여장계곡유수창시)/張谿谷과 더불어 수창시가 있다.
時張谿谷出補本州(시장계곡출보본주)/張谿谷이 外任으로 나가 本州에 왔을 때
特以下榻(특이하탑)/특별히 극진히 대접하였으며
有唱斯和每稱精詣(유창사화매칭정예)/이쪽에서 노래하면 매양 화답하였는데 문장이 精詣하다고 칭찬하였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
著愛竹軒記(저애죽헌기)/애죽헌기를 저술하였다.
卽柳水使精舍居會津(즉유수사정사거회진)/곧 柳水使의 精舍로서 會津에 있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
<해설>
◯出補(출보)는 外任으로 나가다,
◯柳水使(유수사)는 水使 柳持敬을 말한다.
유지경은 1570년(선조 3)∼미상,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죽헌(竹軒).
나주(羅州) 출생으로, 진안현감(鎭安縣監) 유여강(柳如岡)의 손자이다. 참봉(參奉) 유헌(柳憲)의 아들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의 공적으로 일등공신이 되었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공을 세웠다.
1635년(인조 13) 7월 공청수사(公淸水使)에 제수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28일 사사로운 영리를 취하여 군졸들을 침탈했다는 공청도(公淸道) 암행어사(暗行御史) 강대수(姜大遂)의 상소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가(扈駕)하여 그 공으로 후일 부조사(不祧祠)에 배향되었으며, 1641년(인조 19)에는 오위장(五衛將)에 제수되었다.
□ 毅宗烈皇帝崇禎三年庚午, 仁祖大王八年, 四十七歲(의종열황제숭정삼년경오, 인조대왕팔년, 사십칠세)/1630년 경오년 인조대왕8년, 마흔일곱 살이 되다,
春立南磵精舍扁以而樂堂(춘입남간정사편이이락당)/봄에 남간정사를 세우고 이락당이라고 편액 하였는데
取魯論貧而樂之義(취로론빈이락지의)/노나라에서 전해진 논어에서 貧而樂의 뜻을 취하였다.
水石精潔(수석정결)/精舍 주변의 냇물과 바위는 깨끗하며 조촐하고
花木周行(화목주행)/꽃과 나무속을 두루 돌아다닐 수 있으며
右書左圖(우서좌도)/좌우에 책을 싸놓고
几案惟心(궤안유심)/의자와 책상에만 오로지 마음을 두니
經近思錄小學諸子書而已(경근사록소학제자서이이)/心經과 近思錄, 小學은 여러 학자들의 책일 뿐이다.
時兄弟同室(시형제동실)/ 형제가 한방에서 살았을 때
而適仍回祿之灾(이적잉회록지재)//화재의 재앙을 당하므로 인하여
仲氏石壕公建別業於石峴(중씨석호공건별업어석현)/둘째형 석호공은 석현마을에 별장을 짓고
有時來往講明義理(유시래왕강명의리)/내왕할 때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義理)를 확실하게 강의(講明)하였는데
以引進後學爲已仕(이인진후학위이사)/ 끌어 들인 후학들이 이미 벼슬을 하고 있어
鄕子弟多有來學者(향자제다유래학자)/고을의 자제들이 배우러 오는 자가 많았다.
著精舍上樑文(저정사상량문)/정사 상량문을 지었다.
疏辨張侯遞職事(소변장후체직사)/張侯가 체직된 일을 상소하여 辨明하였다.
疏文見集選(소문견집선)/상소문은 남간집선을 보라.
<해설>
◯回祿(회록)은 화재, 불이 나는 재앙,
◯遞職(체직)은 벼슬을 교체하다,
◯張侯(장후)는 谿谷 張維가 나주목사이기에 이렇게 호칭한 것이다.
◯疏文見集選이라 하였지만 규장각에 입력된 자료에는 疏文이 보이지 않는다.
□ 毅宗烈皇帝崇禎四年辛未, 仁祖大王九年, 四十八歲(의종열황제숭정사년신미, 인조대왕구년, 사십팔세)/1631년 신미년 인조대왕9년, 마흔여덟 살이 되다,
二月遭伯叔母服致祭文(이월조백숙모복치제문)/2월에 백숙모 상을 당하여 제문을 보냈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
秋迎仲子休婦(추영중자휴부)/가을에 둘째 아들 休의 부인을 맞아 들였다.
光山金氏府使運海女(광산금씨부사운해여)/광신김씨로 부사 運海의 따님이다.
□ 毅宗烈皇帝崇禎五年壬申, 仁祖大王十年, 四十九歲(의종열황제숭정오년임신, 인조대왕십년, 사십구세)/1632년 임신년 인조대왕10년, 마흔아홉 살이 되다,
春被除承議郞修城禁火司別座謝恩就職(춘피제승의랑수성금화사별좌사은취직)/봄에 승의랑 수성금화사 별좌에 제수되어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직을 취하였다.
七月初二日參慈殿哭班(칠월초이일참자전곡반)/7월초2일에 임금님 어머니 哭班에 참가하였다.
十月初三日參祖奠製進輓詞/10월초3일 발인에 앞서 지내는 제사에 참가하여 만사를 지었다.
初六日反魂時參班/초6일 반혼 시에 곡반에 참가하였다.
聞自上招見胡差作懷憤詩(문자상초견호차작회분시)/임금께서 오랑캐 사신을 초청하여 만난다고 들어서 분한 마음을 시로 지었다.
詩畧曰(시략왈)/시에 대략 이르기를
有盡此皮幣難支無已/求/未(유진차피폐난지무이/구/미/)이 예물을 다 준다 하더라도 한량없는 朝貢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것이다.
餘見集選(여견집선)/나머지는 남간집선을 보라.
上書李白江論治道(상서이백강논치도)/李白江에게 治道를 논하는 편지를 올렸다.
因弼善洪鍾韻薦有雅契(인필선홍종운천유아계)/필선 홍종운으로 인하여 천거되었는데 점잖게 사귄 정분이 있었다.
<해설>
◯5품 別座와 6품 別提의 구분을 왜 혼동하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옛날에는 관직의 자리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은 관직의 명칭에 해박한 지식이 없었다.
아마 이 연보를 작성한 것은 남간 사후 7대손 이후 같다. 그것은 6대손 나학신이 남간집선을 편찬하였는데, 수시로 見集選을 말한 것은 나학신 이후에 이 연보가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어찌 5품 별좌로 입사하여 6품 별제로 승진한다고 기록할 수 있는가.
서민들은 별좌와 별제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그 당시의 상황인 것 같다.
어찌 연보를 한사람이 작성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공동 작업을 하며 작성할 것인데, 이러한 오류를 누구도 발견치 못하는 것이다.
◯祖奠(조전)은 발인에 앞서 지내는 제사
○피폐(皮幣)는 예물, 조공물품,
◯본문에서는 無已未인데 남간집선에는 無已求이다.
해석해 보면 無已求가 맞는 것 같다.
◯無已(무이)는 끝이 없다, 부득이하다, 다함이 없다
難支無已求/한량없는 요구를 지탱하기 곤란하다 란 뜻,
◯弼善(필선)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관원. 정4품직이다
◯李白江(이백강)은 白江 李敬輿를 말한다.
◯洪鍾韻(홍종운)은 1613(광해군 5)∼1658(효종 9)대 인물로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원백(遠伯), 화백(和伯) 호는 덕곡(德谷). 우갑(宇甲)의 아들이다.
1639년(인조 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필선을 지냈다.
1646년 고산현감(高山縣監)을 지낼 당시 마흘동(磨屹洞)에서 일어난 적도(賊徒)들이 고산지방으로 도망하였는데, 이들을 체포하지 못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1652년(효종 3) 다시 등용되어 정언을 지냈다.
[생원진사시] 인조(仁祖) 17년 (163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二等) 14위
거주지가 남평(南平)인 것을 보니 나주인이다.
南磵을 丈席으로 호칭하는 奉呈南磵丈席(봉정남간장석)/학문과 덕망이 높은 南磵에 삼가 바치다 라는 홍종운의 시문이 南磵集에 게재되어 있다.
□ 毅宗烈皇帝崇禎六年癸酉, 仁祖大王十一年, 五十歲(의종열황제숭정육년계유, 인조대왕십일년, 오십세)/1633년 계유년 인조대왕11년, 오십 살이 되다,
正月陞別提(정월승별제)/정월에 別提로 승진하였다.
侍從崇恩殿祀事著頌德詩(시종숭은전사사저송덕시)/숭은전 제사 일에 시종하면서 송덕시를 지었다.
時自上親祭崇恩殿(시자상친제숭은전)/임금이 친히 숭은전 제사를 지낼 때
以差備官見召(이차비관견소)/差備官으로서 부르심을 받았는데
申後入直齋所(신후입직재소)/申時가 지난 뒤 齋所에서 당직을 근무하면서
有頌德之詩畧曰(유송덕지시략왈)/송덕의 시를 지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王修祀典(왕수사전)/왕께서 제사지내는 예의에 관한 법도를 닦으시고
問德在追/尊/存(문덕재추존)/죽은 이에게 존호를 추서하는데 德이 있음을 고하네, 하였다.
寄詩崔遲川謝擧仲氏遺逸(기시최지천사거중씨유일)/遲川 崔明吉이 둘째 형을 遺逸로 천거한데 감사의 詩를 부쳤다.
遲川時爲吏判/遲川이 이조판서였을 때
素有雅契夙聞/평소 점잖은 정분의 사귐이 있다고 일찍이 들었는데
仲氏有孝友操行薦于朝除禧陵參奉/둘째 형이 孝友操行으로 희능 참봉에 천거된 것이다.
寄詩謝之畧曰/감사의 시를 보냈는데 대략 이르기를
箇裏情何極/ 이 속의 본성이 어찌 다하리오 만,
還傷金玉音/公의 소식 들으니 도리어 속이 상하구나.
三月解官歸第(삼월해관귀제)/3월에 벼슬을 벗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仲氏抵書曰(중씨저서왈)/둘째 형이 편지를 보내기를 왈
前月承旨見道呈辭歸臥別業(전월승지견도정사귀와별업)/전월에 承旨를 만나 도리로서 사양함을 올리고 돌아와 별장에 누웠는데
君亦早還以叙欝陶云(군역조환이서울도운)/그대 역시 일찍 돌아와 답답하고 근심스러움을 펴라 하니
卽日決意歸第(즉일결의귀제)/그 날로 굳게 마음을 먹고 뜻을 정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해설>
◯陞別提에 대해,
연보를 작성하는 후손이 別提와 別座의 품계를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別提는 6품이요, 別座는 5이니, 6품으로 입사하여 5품으로 승진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연보는 거꾸로 써 놓은 것이다.
◯差備官(차비관)은 특별한 사무를 맡기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하는 벼슬을 이르던 말
◯齋所(재소)인데 齊所(제소)로 誤記되어 있다.
齋所는 祭祀를 지내는 곳이다.
◯祀典(사전)은 제사지내는 예의에 관한 법도
◯追存은 追尊의 誤記 같다.
追尊은 죽은 이에게 존호를 추서하다
◯金玉音(금옥음)은 금옥 같은 음성,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호칭으로 그대의 소리, 그대의 소식,
◯“還傷金玉音。(환상금옥음)/公의 소식 들으니 도리어 속이 상하구나.”은 무슨 뜻인가.
둘째형에게 유일로 천거한 희능참봉 직을 중형이 취임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속이 상한다고 한 것 같다.
◯鬱陶(울요)는 답답하고 근심스러움
□ 毅宗烈皇帝崇禎七年甲戌, 仁祖大王十二年, 五十一歲(의종열황제숭정칠년갑술, 인조대왕십이년, 오십일세)/1634년 갑술년 인조대왕12년, 오십 일세가 되다,
秋作元繩菴宴士序(추작원승암연사서)/가을에 승암 元斗杓이 선비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序文을 지었다.
時繩菴爲方伯(시승암위방백)/승암이 전라도 관찰사였을 때
巡道至光羅(순도지광나)/도를 순방하면서 광주 나주에 이르러
設戰藝場榜宴/(설전예장방연)技藝를 겨루는 科場에서 연회를 연다는 방을 써 붙였는데
請爲序文(청위서문)/서문을 청하였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
悼姪子脩喪又遭伯氏服致祭文(도질자수상우조백씨복치제문)/조카 脩의 喪을 당해 슬퍼했으며 또 長兄의 상을 당해 복을 입고 제문을 바쳤다.
著南溪異石記(저남계이석기)/남쪽 시내의 기이한 바위 돌 이야기 지었다.
谿谷評曰(계곡평왈)/계곡이 비평하기를
滿篇古氣(만편고기)/예스런 기운이 문단에 가득하고
意亦圓暢/(의역원창)/생각 역시 원만하였다.
篇間有復語(편간유복어)/문단 속에 중복된 말이 있는데
孰省必自得(숙성필자득)/잘 보면 반드시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命休倬繕寫所著文自序/休와 倬에게 명하여 잘못을 바로 잡아 다시 고쳐 베낀 바 自序의 글을 지었다.
秋製再從叔判官公德昌改葬輓(추제재종숙판관공덕창개장만)/가을에 재종숙 판관공 德昌의 묘를 개장할 때 輓詞를 지었다.
<해설>
◯조카 脩는 족보에 나오지 않고 長兄은 海龍은 가계가 단절되어 있다.
아마 통정공의 5형제 중에 끝까지 살아남은 석호, 남간만 족보에 기록되고, 海龍, 海鵬, 海鶴은 斷孫 된듯하다.
◯戰藝場(전예장)은 技藝를 겨루는 科場
◯命休倬繕寫所著文自序은 남간유집을 편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圓暢(원창)은 圓滿 和暢,
□ 毅宗烈皇帝崇禎八年乙亥, 仁祖大王十三年, 五十二歲(의종열황제숭정팔년을해, 인조대왕십삼년, 오십이세)/1635년 을해년 인조대왕13년, 오십 이세가 되다,
春見長子俊中司馬(춘견장자준중사마)/봄에 장자 俊이 사마시를 보았는데 합격하였다.
與族姪襻同榜(여족질반동방)/족질 襻과 동방 합격하였다.
聞喜宴命倬兒製慶賀詩(문희연명탁아제경하시)/과거에 급제한 자축연에서 어린아이 倬에게 명하여 경사스럽고 기쁜 일을 축하하는 시를 짓도록 하였다.
兒年十四資稟粹美(아년십사자품수미)/어린아이 나이 14살에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文藝早詣(문예조예)/문예가 일찍이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老來托愛隨事勸勉(노래탁애수사권면)/늘그막에 아낌이 두드러져 일에 따라서 권면하였다.
聞榜之後(문방지후)/듣기로는 과거 합격 후에는
使之製韻(사지제운)/詩賦를 짓는 것을 좇아
以付慰悅底意(이부위열저의)/위로하고 반기는 底意에 맡겼다.
製進中殿昇遐箋(제진중전승하전)/中殿이 돌아가시자 글을 지어 나아갔다.
立鄕約修洞禊述序文(입향약수동계술서문)/향약을 세우고 닦는 洞禊의 序文을 지었다.
倣藍田呂氏遺䂓(방람전여씨유규)/남전여씨가 남긴 규약을 본받았으며
且行鄕飮酒禮於春秋講會(차행향음주례어춘추강회)/장차 고을에서 봄, 가을 講會(강론하는 모임)에서 행하는 음주 예절이다.
<해설>
◯羅襻은
[생원시] 인조(仁祖) 13년(1635) 을해(乙亥) 증광시(增廣試) [증광생원] 2등(二等) 16위(21/100)
아버지는 羅緯素이다,
◯聞喜宴(문희연)은 과거에 급제한 자축연
◯老來(노래)는 늘그막
◯藍田呂氏(람전여씨)는 송대(宋代)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 사람인 여대균(呂大均)을 이름.
여대균이 처음 향약(鄕約:여씨 향약)을 만들었는데, 뒤에 주희(朱熹)가 이를 확충하였음,
여씨향약(呂氏鄕約)은 송(宋)나라 여태균(呂太鈞)의 향리(鄕里)인 남전(藍田)에서 실시한 자치규약(自治規約)을 가리키는 것으로, 덕업을 서로 권장하며, 과실을 서로 바로잡으며, 예속(禮俗)으로 서로 교제하며, 환란을 서로 구제하는 것을 강령(綱領)으로 삼으며, 후세 향약의 모범이 되었음. 남전 여씨 향약(藍田呂氏鄕約)이라고 함.
□ 毅宗烈皇帝崇禎九年丙子, 仁祖大王十四年, 五十三歲(의종열황제숭정구년병자, 인조대왕십사년, 오십삼세)/1636년 병자년 인조대왕14년, 오십 삼세가 되다,
夏聞再從叔以春信使抗節深陽(하문재종숙이춘신사항절심양)/여름에 재종숙이 춘신사로 심양에서 항절하였다고 들었다.
時再從叔爲春信使與回答使李廓同到深館(시재종숙위춘신사여회답사이곽동도심관)/재종숙이 춘신사로, 회답사 이곽과 더불어 함께 심양 객관에 도착했을 때이다.
四月日汗襲尊號受諸國賀(사월일한습존호수제국하)/4월 일 칸이 황제의 칭호를 계승하여 받았다고 여러 국가의 하례를 받았는데
公獨不參拜(공독불참배)/公은 홀로 참배를 하지 않았으며
不受汗新泥書(불수한신니서)/칸이 주는 새로운 詔書도 받지 않자
汗大怒折脅毒楚敺曳剪蘆田(한대로절협독초구예전로전)/칸이 크게 성을 내며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모질게 매질하고, 베어낸 갈대밭으로 끌고 갔으나
終不屈節(종불굴절)/끝내 절의를 굽히지 않았다.
境上訛言參賀(경상와언참하)/이러한 처지를 축하의 참배를 하였다고 임금께 잘못 말이 전해져
故被謫白馬城(고피적백마성)/그래서 백마산성에 유배되었었다.
秋著蘇武辭(추저소무사)/가을에 소무사를 지었다.
深中不屈之節(심중불굴지절)/심양에서 불굴의 절개를 지킨 것을
昭揚日星而朝議紛異(소양일성이조의분이)/해와 별이 밝게 하늘에서 보았지만 조정의 논의는 어지럽게 이상해져 가
故不勝激慨(고불승격개)/그러므로 격렬히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作此辭畧曰(작차사략왈)/이 글을 지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奧以漢運之興隆兮(오이한운지흥융혜)/옛날에 한나라 운이 흥성하였는데도
天胡未滅其夷狄(천호미멸기이적)/하늘은 그 오랑캐를 멸하지 않았다.
帝有臣曰蘇武(제유신왈소무)/황제의 신하가 있었으니 이름 하여 소무이니
汝往欽哉單于系曰(여왕흠재선우계왈)/임금의 명을 받들어 오랑캐의 군장 선우(單于)에게 이음을 말하였다.
嗟乎(차호)/아!
子卿烈烈之氣(자경열렬지기)/子卿(소무의 字)의 열열한 기백(氣魄)으로
使武沒而不返(사무몰이불반)/사신 소무가 죽고 안돌아 왔다면
史氏書以節否(사씨서이절부)/史官이 소무의 절의를 썼을까.
餘見集選(여견집선)/나머지는 남간집선을 보라.
十二月聞虜變發倡義文通諭境內(십이월문노변발창의문통유경내)/12월에 오랑캐가 변란을 일으켰다고 들어서 창의 격문을 통하여 경내를 깨우쳤다.
初九日虜賊犯京(초구일노적범경)/초9일에 오랑캐 적들이 서울을 침범하여
上幸南漢(상행남한)/임금은 다행히 남한산성으로 가고
世子入江都(세자입강도)/세자는 강화도 도읍지로 들어갔다.
十九日命黃一晧傳敎諸道召義兵(십구일명황일호전교제도소의병)/19일 黃一晧에게 명하여 의병을 부르도록 여러 동에 傳敎하였다.
長子俊居泮聞急警罔夜下鄕(장자준거반문급경망야하향)/큰아들 俊은 泮宮(성균관)에 있었는데 급한 경보를 듣고 밤을 세워 고향에 내려와
爲倡義方各(위창의방각)/사방에서 서로 倡義를 하도록 하였다.
與仲氏石壕從兄松島次子休族弟好義及前察訪金璇生員洪逴進士洪南柱前參奉吳以建幼學洪致震崔垈吳守翼李先茸等(여중씨석호종형송도차자휴족제호의급전찰방금선생원홍탁진사홍남주전참봉오이건유학홍치진최대오수익이선용등)/둘째 형 석호, 종형 송도, 차자 휴, 족제 호의, 그리고 전 찰방 김선, 생원 홍도, 진사 홍남주, 전 참봉 오이건, 유학 홍치진, 최대, 오수익, 이선용 등
同聲而起先爲發通于境內(동성이기선위발통우경내)/같은 목소리로 먼저 일어나 경내에 통문을 발송하였다.
林光胤廉振國柳時泌鄭存仁鄭之說洪邊曺弘業等(임광윤염진국유시필정존인정지열홍변조홍업등)/임광윤, 연진국, 유시필, 정존인, 정지열, 홍변, 조홍업 등
各以兵粮來會(각이병량내회)/각자가 병사와 식량을 가지고 모임에 왔다.
聞三從兄繼素扈駕(문삼종형계소호가)/삼종형 繼素가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였다고 들었다.
<해설>
◯再從叔은 춘신사로 간 羅德憲을 말한다.
1573(선조 6)∼1640(인조18)대의 인물로
시호는 충렬(忠烈),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
이성 현감(泥城縣監) 사침(士沈)의 아들. 1603년(선조36) 무과(武科)에 급제, 2년 후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을 보좌, 안현(鞍峴)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그후 사신으로 여러 차례 후금(後金)의 심양(瀋陽)에 다녀왔고, 1628년 봉산 군수(鳳山郡守), 1631년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있다가 덕천(德川)에 유배(流配)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635년(인조13) 창성 부사(昌城府使)·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내고 이듬해 춘신사(春信使)로 또 심양에 가 있을 때, 마침 후금 태종(太宗)이 황제를 칭하고 즉위식(卽位式)을 거행하자 그에 대한 하례(賀禮)를 거부했다가 구타를 당한 후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國書)를 받아 가지고 귀국했다.
그 국서에 황제라 칭한 내용이 있어 황제 참칭(皇帝僭稱)의 글을 받아왔다고 조정의 척화론자(斥和論者)들로부터 논핵을 받았으나 김상헌(金尙憲)의 변호로 겨우 극형을 면하고 백마성(白馬城)에 유배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1636) 후 앞서 심양에서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용서받고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에 특진, 1639년(인조17) 사임하고 나주에 돌아갔다.
◯汗은 중세의 몽고, 터키, 달단(韃靼) 종족의 군주의 칭호. 중세 몽골 어 ‘칸(khan)’의 음역어이다.
khan은 역사적으로 몽골족의 통치자나 군주를 가리키는 용어인데 중국어로는 汗으로 표기하고 있다.
◯泥書는 황제가 주는 詔書인데 글씨의 색에 따라 金泥書, 紫泥書라 부른다.
◯蘆田(노전)은 갈대가 많이 난 곳,
◯節境은 節境界/절개의 경계에서
이 말은 협박과 고문으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그리고 인간이 참아낼 수 있는 고문의 한계에 다다르면 절개마저 버리게 되는 그 경계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본 南磵年譜에는 興隆이나 南磵集에는 興降으로 되어 있다.
필자가 보기에 興隆이 타당한 것 같다.
○ 선우(單于)는 본래는 흉노(匈奴)의 군장
單은 오랑캐 이름 선(單)으로 해석해야 한다.
◯본 연보는 單于系이나 남간집은 單于馳이다.
◯
◯罔夜(망야)는자지 않고 밤을 새움
◯扈駕인데 본문은 扈賀로 誤記하였다.
◯三從兄繼素의 가계를 보면
晊- 士忱 - 德峻 - 繼素다
◯黃一晧(황일호)는 1588(선조21)~1641(인조19)대의 인물로
시호는 충렬(忠烈), 자는 익취(翼就), 호는 지소(芝所), 음보(蔭補)로 운봉 현감(雲峰縣監)·군수(郡守)를 지내고, 1635년(인조1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거쳐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독전어사(督戰御史)로서 남한산성(南漢山城) 수비에 공을 세웠다. 그 후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지내고, 1638년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되어 청나라 태종(太宗)이 명나라를 치는 기회에 청나라에 원수를 갚고자 명나라를 도우려다가 청인에게 단서(端緖)를 잡혀 살해당했다. 의주의 백마산성사(白馬山城祠),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 부여(扶餘)의 의열사(義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 毅宗烈皇帝崇禎十年丁丑, 仁祖大王十五年, 五十四歲(의종열황제숭정십년정축, 인조대왕십오년, 오십사세)/1637년 정축년 인조대왕15년, 오십 사세가 되다,
正月初二日馳倡義檄于道內/정월초2일 창의 격문을 도내에 전하였다.
檄文曰(격문왈)/격문에 이르기를
彼奴賊無義犬羊(피노적무의견양)/저 종놈 같은 도적들은 의리가 없는 개나 양이며
有慾溪壑(유욕계학)/물릴 줄 모르는 한없는 욕심꾸러기입니다.
鑾輿播越一片孤城(란여파월일편고성)/임금의 수레로 한조각의 외로운 성으로 망명하여
國事蒼黃十行哀旨(국사창황십행애지)/국가의 일은 미처 어찌할 사이도 없이 매우 급작스러움에 임금께서 열 줄의 슬픈 교지를 내렸습니다.
今月初六日率旅啓行(금월초육일솔여계행)/이달 초6일에 의병대를 거느리고 출발할 것이니
伏願列邑君子檄到如章云(복원열읍군자격도여장운)/엎드려 바라건대 여러 고을의 군자들은 격문이 도달하면 글월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建幕府于公館招集義兵(건막부우공관초집의병)/공관에 지휘 사무소를 세우고 의병을 불러 모았다.
時招軍節目一依(시초군절목일의)/군사를 부르는 시행 지침에 오로지 의지할 때
甲子丁卯間有增損/塤/(갑자정묘간유증손/훈)/1624년 갑자년과 1627년정묘년 사이에 의병의 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있지만
故不復謄錄(고불복등록)/다시 베껴 적지는 않았다.
初六日率兵啓道(초육일솔병계도)/초6일 병사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時仲氏石壕公同鄕諸義士率兵啓行(시중씨석호공동향제의사솔병계행)/둘째형 석호공과 같은 고을의 여러 의병 군사들을 거느리고 출발하였는데
而使俊掌軍務(이사준장군무)/俊에게 군사업무를 시키고
休命軍餉(휴명군향)/休에게 군사 식량을 담당토록 명하였으며
倬主書記(탁주서기)/倬은 주로 문서 기록을 맡았다.
二十日會于礪山與鄭公弘溟合部(이십일회우여산여정공홍명합부)/20일 여산에서 鄭弘溟과 회동하여 부대를 합쳤다.
時鄭公以召募之命推爲義兵將(시정공이소모지명추위의병장)/의병을 불러 모은 鄭公이 의병장과 나아갈 때
道伯李公時昉率本營將士(도백이공시방솔본영장사)/전라도 관찰사 李時昉公이 거느리는 본영의 장병과
而來玉果縣監李興發兄弟(이래옥과현감이흥발형제)/그리고 옥과 현감 이흥발 형제가 오고
淳昌縣監崔蘊(순창현감최온)/순창 현감 최온
前翰林梁曼容(전한림양만용)/전 한림 양만용
前察訪柳楫合部而進(전찰방류즙합부이진)/전찰방 유즙이 부대를 합하여 전진하였다.
使長子俊代領軍至淸州(사장자준대령군지청주)/큰아들 俊으로 하여금 대신 군사를 領導하여 청주에 이르렀다.
時兵行屢日(시병행누일)/병사들과 여러 날을 계속하여 행군할 때
宿疴復發不能自力(숙아복발불능자력)/오래 묵은 병이 다시 발병하여 자력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使長子俊代領軍輿疾而行(사장자준대령군여질이행)/큰아들 俊으로 하여금 군사를 대신 영도하게 하고 病중에 가마를 타고 행군하였다.
立木柵整軍伍(입목책정군오)/목책을 세우고 군사의 대오를 정비하였다.
進至淸州無城郭(진지청주무성곽)/행군하여 청주에 이르렀는데 성곽이 없고
日已勳黑(일이훈흑)/날은 이미 어둠에 이끌려
下令軍中收篙篅長木而來盛土(하령군중수고천장목이래성토)/軍中에 영을 내려 상앗대와 천, 긴 나무를 수거하여 오면 흙을 쌓고
于蕃積築押(우번적축압)/흙을 모아 쌓은 곳에 울타리를 박아
抹不移時成城(말불이시성성)/성이 만들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도록 문지르면
衆頼而安(중뢰이안)/무리들이 편안해질 수 있다.
追援李起浡斬賊于山谷(추원이기발참적우산곡)/뒤따라 도우러 온 이기발이 산곡(산골짜기로 이해된다)에서 적을 베었다.
有樵卒膚鏃還曰/나무를 하던 병졸이 살갗에 화살촉을 맞고 돌아와 이르기를
賊兵迫近/적의 병사가 가깝게 접근해 있다고 하자
一軍騷擾/한때 군사들이 떠들썩하게 들고일어나 술렁거렸다.
李起浡陟山峴/이기발이 산 고개에 올라가 보니
賊胡騎方宰牛馬于谷中/적의 오랑캐 기병이 산골짜기 속에서 바야흐로 牛馬를 도살하려는데
喝聲突入/큰소리로 꾸짖으며 돌격해 들어가자
賊兵披靡/적병들이 패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督軍繼援乘勝/군사를 살펴 계속 응원하여 승세를 타면서
逐北追斬九級/달아난 적을 추격하여 9급을 참하였다.
盡得所棄輜重/무거운 짐수레를 내버린바 모두 획득하였다.
以犒軍軍中聳躍/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으로서 軍中은 좋아라고 뛰었다.
聞南漢解圍罷兵(문남한해위파병)/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렸다고 들어서 병사들을 파하였다.
時江都失守(시강도실수)/강화도 도읍을 지키는 것이 실패할 때
王妃大君被執(왕비대군피집)/왕비와 대군이 붙잡혔다.
正月三十日不得已和事成(정월삼십일부득이화사성)/정월30일 어쩔 수없이 화의의 일이 성사되어
三南義士北望慟哭罷兵還(삼남의사북망통곡파병환)/3남의 의로운 선비들이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고 군사를 파하여 돌아왔다
秋遯跡海島(추둔적해도)/가을에 바다의 섬으로 자취를 피하였다.
州西百里有鴨海島(주서백리유압해도)/나주 서쪽 백리에 압해도가 있는데
自和成後痛恨(자화성후통한)/화의가 이루어진 후에 한이 맺힐만큼 원통해 하였으며
宗社受辱(종사수욕)/종묘와 사직은 통한의 수치를 당하였다.
大明淪喪謝世入海作詩有曰(대명윤상사세입해작시유왈)/대 명나라가 없어지자 세상을 사양하고 바다에 들어가 시를 지었는대 이르기를
吾其被髮矣(오기피발의)/내가 오랑캐 머리를 하겠구나.
慟哭此人間(통곡차인간)/통곡하는 이 인간이여!
餘見集選(여견집선)/나머지는 남간집선을 보라.
聞三學士被俘著浙江律(문삼학사피부저절강율)/삼학사가 사로잡혔다고 들어서 절강율을 지었다.
時三學士力斥和議俘虜庭(시삼학사력척화의부로정)/삼학사가 화의를 애써 배척하였다고 오랑캐들이 조정에서 잡아갔다고 들어서
故著律遣憤畧曰(고저율견분략왈)/그러므로 율시를 지어 분을 달랬는데 대략 이르기를
八月稽山飛白露(팔월계산비백로)/8월 회계산에 흰 이슬 날리고
背秋歸雁海門遙(배추귀안해문요)/가을을 등지고 돌아간 기러기는 해문이 멀겠구나.
堂堂大節淸霜洌(당당대절청상렬)/大義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지키는 당당한 절개는 된서리처럼 찬바람이 나고
斷斷丹誠白日昭(단단단성백일소)/단연코 마음속으로부터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뜨거운 정성은 대낮처럼 밝았다네.
餘見集選(여견집선)/나머지는 남간집선을 보라.
<해설>
◯檄文인데 敬文으로 誤記하였다.
◯溪壑(계학)은 한없이 큰 욕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播越(파월)은 망명하다,
◯蒼黃(창황)은 미처 어찌할 사이도 없이 매우 급작스러움
◯十行哀旨(십행애지)는 임금께서 내린 열 줄의 슬픈 교지
◯節目(절목)은 사업지침, 시행 지침,
◯增損(증손)은 수나 양이 늘어나거나 줄어듦, 또는 많아지거나 적어짐
◯篙篅(고천)은 상여집의 긴 말목과 천을 말한듯하다.
◯李起浡(이기발)은 1602년(선조 35)∼1662년(현종 3)대의 인물로 字는 패연(沛然)이고, 號는 서귀(西歸)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전라북도 전주(全州) 출신이다.
인조반정 이후 1624년(인조 2)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3위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같은 시험에서 형 이흥발과 동생 이생발까지 삼형제가 동시에 합격하여 이름을 날렸다.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627년(인조 5)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성균박사(成均博士), 정언(正言), 예조정랑(禮曹正郞),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 지평(持平) 등을 역임했다.
1636년 대동찰방(大同察訪)으로 있을 때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당시 옥과현감(玉果縣監)이었던 형 이흥발, 순창군수 최온(崔薀), 전 찰방(察訪) 유즙(柳楫), 전 한림(前翰林) 양만용(梁曼容) 등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여산(礪山)의 모의소에서 다른 의병단과 합류한 후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진격하였으나, 화약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全州)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끝까지 청(淸)과의 화친을 반대하고 명(明)과의 의리를 주장하였으며, 인조가 승하하자 3년간 3년간 술과 고기를 마시거나 먹지않고 상례(喪禮)를 치르는 등 평생 충절(忠節)을 지켰다. 이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그를 동방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로 비교하면서 칭찬하기도 하였다.
◯胡騎(호기)는 오랑캐의 기병
◯披靡(피미)는 패하여 흩어져 달아나다
◯犒軍(호군)은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
◯淪喪(윤상)은 없어지다, 소멸하다, 잃다
□ 毅宗烈皇帝崇禎十一年戊寅, 仁祖大王十六年, 五十五歲(의종열황제숭정십일년무인, 인조대왕십육년, 오십오세)/1638년 무인년 인조대왕16년, 오십 오세가 되다,
春聞倭人賚書病中述懷/봄에 왜인이 글을 주었다는 말을 듣고 병중에 회포를 기술하였다.
峕對馬島人賚本國書(시대마도인뢰본국서)/때는 대마도 사람이 본국의 글을 주었다.
欲探我國與虜情云(욕탐아국여노정운)/우리나라와 오랑캐의 정세를 탐지하려는 것인데
故著詩(고저시)/그래서 시를 지었다.
見集選(견집선)/남간집선을 보라.
五月二十八日考終于南磵精舍/5월28일 사람이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남간정사에서 돌아갔다.
易簀前數日取啓蒙讀之曰/임종 전 수일 가르치고 깨우침을 취하려면 책을 읽으라 하면서 이르기를
遐數年無大過/오랫동안 수년을 큰 실수가 없었으니
今而知聖人言也/이제야 聖人의 말을 알겠구나 하였다.
十二月己丑十六日甲辰(십이월기축십육일갑진)/12월 기축월 16일 갑진일에
葬于州東石峴亥向原(장우주동석현해향원)/나주 동쪽 석현 땅에 해향원으로 장사를 지냈다.
後二十年丁酉祔淑夫人李氏墓(후이십년정유부숙부인이씨묘)/그후 20년 정유년에 숙부인 이씨를 묘에 합장하였다.
<해설>
◯賚書(뢰서)는 글을 주다, 주는 서신,
◯考終(고종)은 사람이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음,
◯易簀(이책)은 침대에 까는 돗자리를 바꾸다, 임종, 임종하다
□ 乙未 英宗大王五十一年(을미 영종대왕오십일년)/1775년 을미년 영종대왕 51년
◯ 全義李尙書基敬記(전의이상서기경기)/全義李氏 尙書 李基敬이 記文을 썼다.
□ 丙申 英宗大王五十二年(병신 영종대왕오십이년)/1776년 병신년 영종대왕52년
◯ 贈通訓大夫司僕寺正(증통훈대부사복시정)/ 통훈대부 사복시 정으로 증직되었다.
□ 戊申 正宗大王十二年(무신 정종대왕십이년)/1788년 무신년 정종대왕12년
◯醇菴吳提學載純跋(순암오제학재순발)/醇菴 吳載純 提學이 跋文을 썼다.
□ 庚戌 正宗大王十四年(경술 정종대왕십사년)/1790년 경술년 정종대왕14년
◯ 立祠羅州(입사나주)/나주에 祠堂을 세웠다.
在南磵遺趾/남간의 남은 터가 있어
幷享張谿谷金市西洪錦隱/장계곡, 김시서, 홍금은을 아울러 享祀하고
配長子溪叟公/큰아들 溪叟公(俊)을 追配하였다. 追配
◯ 渼湖金贊善公元行述享祠祭文(미호김찬선공원행술향사제문)/미호 김원행 찬선이 享祠 제문을 썼다.
□ 丙辰 正宗大王二十年(병진 정종대왕이십년)/1796년 병진년 정종대왕20년
◯ 入御定尊周錄(입어정존주록)/존주록에 넣도록 임금이 정하였다.
自上命閣臣撰次丙丁以來忠烈藏內閣(자상명합신찬차병정이래충열장내합)/임금이 몸소 閣臣이 정묘년 병자년 이래 감춰진 忠과 烈을 가려 뽑아 차례를 정하라고 내각에 명하였다.
※참고
O 尊周錄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이태수(李泰壽)가 존명양이(尊明攘夷)의 사적(事蹟)을 간추린 책.
O閣臣(각신)은 1776년(정조 즉위) 정조가 정치개혁을 위해 궐내에 설치한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의 관원.
O 撰次(찬차)는 가려 뽑아 차례를 정함
□ 戊午 正宗大王二十二年(무오 정종대왕이십이년)/1798년 무오년 정종대왕22년
◯ 刊行丁卯倡義錄(간행정묘창의록)/1627년 정묘년 창의록을 간행하였다.
宋煥其序金箕殷啓(송환기서금기은계)/송환기가 서문을 쓰고 김기은이 狀啓하였다.
□ 己未 正宗大王二十三年(기미 정종대왕이십삼년)/1799년 기미년 정종대왕23년
◯ 刊行南磵集選(간행남간집선)/남긴집선을 간행하였다.
西河任承旨焴序咸豊李司諫東植識(서하임승지육서함풍이사간동식식)/서하 승지 任焴이 序文을 쓰고 함풍이씨 사간 李東植이 識文을 썼다.
□ 庚申 正宗大王二十四年(경신 정종대왕이십사년)/1800년 경신년 정종대왕24년
◯性潭宋贊成公煥箕書(성담송찬성공환기서)/성담 宋煥箕 贊成이 인사의 글(書文)을 쓰고
杞溪兪監役星柱傳(기계유감역성주전)/기계유씨 감역 兪星柱가 傳文을 썼다.
□ 甲子 當宁四年(갑자 당저사년)/1804년 갑자년 순조4년
◯ 續刊南磵集選附錄(속간남간집선부록)/南磵集選과 附錄를 續刊하였다.
■ 谿磵祠 毁撤과 復設의 역사 이야기
필자가 南磵年譜를 완역하므로서 南磵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명백히 하고, 그때 그 당시의 숨은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내보였다고 본다.
특히 석간합보의 序文 기록이 1833년(純廟 癸巳)인 것을 보면 2012년 현재로부터 190여년 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하던 계간사가 철폐되었다가 다시 복설되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서원 철폐는 1870년 전후에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전국의 서원을 겨우 47개소만 남기고 모든 書院, 祠廟를 훼철하였을 때 계간사도 훼철된 듯하다.
국가가 정략적으로 전국 書院, 祠廟 철폐의 일환이었으니, 누구도 이 일을 비켜갈 수 없었을 것이다.
남간연보에 보면 계간사의 위치가 南磵遺趾 즉 남간의 남은 터라고 한 것을 보면 남간정사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남간정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나주 읍성 서문 밖에서 한계천을 따라 올라가다가 隱者가 숨을 만 한곳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한수제 제방에서 경현동 쪽으로 올라가는 월정봉 아래의 지점 같다.
남간유허비가 세워진 그 위치 근방일 것으로 생각된다.
祠廟는 건립과 유지관리가 겉으로는 지방 유림으로 되어 있지만 안에는 재정 관리를 하는 문중의 보이지 않은 후원이 있다.
그러므로 계간사가 최초 건립될 때에도 계간사에 모셔야할 位牌의 후손들이 재정적 후원을 맞고 享祀의 유지관리는 지방 유림이 하는 것으로 사전 공감대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享祀되는 位牌의 후손들이 재정을 분담하여 건물을 짓게 되었을 것이다.
이 사묘가 훼철되었다가 다시 복설할 때에도 이러한 과정을 밟아야 한다.
겉으로는 유림이 주관을 하고 안으로는 해당 문중이 후원해야한다.
후원이란 재정적 부담을 말한다.
어느 시기에 복설한 것인지 필자는 그 자료에 접근할 수 없어 알 수는 없지만, 복설할 때에 남간정사 위치에서 남간의 묘가 있는 석현마을로 옮겨진 것 같다.
그리고 당연히 복설할 때 재정적 후원을 해야 할 張維의 후손, 南磵의 후손, 錦殷의 후손, 市西의 후손이 재정적 뜻을 같이하여 비용을 분담하는 공감대가 이루어져야 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데,
필자의 추측으로 보면 市西의 후손 측에서 비용부담을 못했거나, 안했을 것 같다.
이유야 재정적 여건의 미흡하기에 재정 부담을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市西가 계간사에 향사되는 것을 반대할 다른 이유는 없다고 본다.
이제라도 市西 후손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동해 지방 유림에 호소하여 市西를 다시 계간사 享祀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市西遺稿에서 市西, 張維, 南磵 세 사람의 시문 수창의 내용이 타 문인보다 훨씬 많은 것은 그만큼 도의적 교류를 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더더욱 궁궐도감 通政公 羅德讓이 임진왜란 때에 金千鎰과 의병에 나아갈 때 德讓의 식구들을 市西 댁에 맡겼고, 市西를 황해도 장연으로 피난을 가면서 함께 가서 7년 전쟁기간 동안 南磵에게 공부를 가르쳤던 것이 석호, 남간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이제 과거의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후손들 간에 있을 앙금을 모두 털어버리고 그야말로 市西, 南磵, 張維 3인방의 그때 그 시절로 후손들이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숨은 역사를 추적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놓으려는 필자의 노력이 있을 때에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할 것이다.
謹按諸子集中年譜率多起例(근안제자집중연보솔다기예)/삼가 살피건대 여러 아들들이 연보의 일에 힘을 쏟아 부으면 대부분의 準例가 되고 있습니다.
噫(희)/ 아,
我曾王考南磵公有年譜(아증왕고남간공유연보)/나의 증조부 남간공도 연보가 있습니다.
盖自皇明正朔分列(개자황명정삭분열)/대개 황제의 나라 明의 曆法으로 나뉘어 늘어섰는데
我國朝大書起頭(아국조대서기두)/우리나라 조선은 글의 첫머리는 글씨를 크게 쓰고
語釋以註說去(어석이주설거)/말의 풀이는 기록으로 설명을 덧붙이면서
平生言行事業(평생언행사업)/평생 말과 행동 그리고 사업은
皆自忠孝節義文章中做出來(개자충효절의문장중주출래)/모두 자기의 충효, 절의, 문장 중에 나온 것이며
某年月日上多不盡書(모년월일상다부진서)/모년 모월 일에 올린 상소는 많아서 글로 다 쓸 수 없습니다.
不過大句管(불과대구관)/큰 글귀는 피리에 불과 합니다.
若宗族之嘉言善行(약종족지가언선행/만약 宗族이 좋은 말과 착한 행실을 하거나
以至緦功而無疎忽(이지시공이무소홀)/복(服)이 있는 가까운 친족에 이르기까지 소홀함이 없었으며
師友之講問(사우지강문)/스승과 벗들과의 강론하고 질문하면서
著作必着記述而總略(저작필착기술이총약)/반드시 짓고 저술을 착수하고 총략의 내용을 기록 서술하였습니다.
于六載侍墓之儀(우육재시묘지의)/6년 시묘의 儀禮와
三亂倡義之事(삼란창의지사)/세번의 亂에 倡義한 일과
護聖母斥奸黨(호성모척간당)/國母를 보호하여 간사한 무리들을 배척하였으며
尊皇明斬虜使之疏(존황명참노사지소)/황제의 나라 明을 존경하여 오랑캐 사신을 베도록 상소한 것은
尤可祥焉(우가상언)/더욱 상서로울만 합니다.
自成一大全三綱明五倫備(자성일대전삼강명오륜비)/몸소 삼강과 밝은 오륜을 갖춘 모아 역은 책을 크게 이루었으니
足以感觀於後之(족이감관어후지)//훗날에 고맙게 보기에 충분하며
爲子孫者一再傳(위자손자일재전)/자손 되는 자들이 거듭 전할 것입니다.
從祖水竹軒季父松磵亭(종조수죽헌계부송간정)/종조 수죽헌과 막내 숙부 송간정이
手寫口傳(수사구전)/말로 전한 것을 손으로 베껴 써서
俱不莢實(구불협실)/꼬투리 열매가 되지 않도록 갖추었습니다.
自十歲以上恐是後日記事(자십세이상공시후일기사)/열 살 이상부터 아마 後日의 記事는
有贊揚底意思(유찬양저의사)/칭찬을 할 생각이 있었습니다.
四十五歲一語黙一動靜是手澤存焉(사십오세일어묵일동정시수택존언)/45세에는 한번 말하고 침묵하고, 한번 움직이고 정지하는 것이야 말로 손때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當時善觀善記者(당시선관선기자)/당시를 잘 보고 잘 기억하는 것은
眞箇盡出此一部(진개진출차일부)/참으로 낱낱이 모두 나온 중에 이것은 일부인데
不肖孫炯奎有得於此受行(불초손형규유득어차수행)/불초한 손자 炯奎가 얻어서 이를 받아 간행하면서
章於德殷宋公得基(장어덕은송공득기)/문장은 덕은 宋得(煥)基公이 쓰고
表於我師寒泉門(표어아사한천문)/標識는 寒泉(李縡)門下였을 때 나의 스승(李縡)이 썼으니
似無餘憾而恨(사무여감이한)/풀지 못한 바람이나 恨은 없는 것 같습니다.
不得全集之成以侯來裔云爾(부득전집지성이후래예운이)/全集을 만들 수가 없었는데 이후는 장래의 자손들이 할 것을 말합니다.
◯ 이상의 글문은 형규가 쓴 것으로 보여진다.
◯我曾王考南磵公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곧 손자가 부르는 호칭이니 곧 형규의 글인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글은 1833년 순조 33년 계사년부터의 글은 성유가 덧붙여 쓴 것이다. ◯본 석간합편서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짜깁기를 한 것이다. |
上之三十三年癸巳(상지삼십삼년계사)/순조 임금 33년 癸巳年에
七世性裕謹以世系年譜刊行之意(칠세성유근이세계연보간행지의)/7세 性裕가 삼가 世系와 年譜 간행의 뜻을
問議於宗族族叔致八氏曰(문의어종족족숙치팔씨왈)/종족과 족숙 致八씨에게 문의하였더니 이르기를
宗族之志卽余志(종족지지즉여지)/“종족의 뜻이 곧 나의 뜻인데
幷印石壕公行錄(병인석호공행록)/石壕公 행록과 아울러 인쇄하는 것이다.
于松月軒訖功(우송월헌흘공)/이것은 松月軒도 功을 들이다 그만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在仲春之晦日(재중춘지회일)/(1833년) 음력 2월 그믐날에 (性裕 쓰다)
<해설>
◯率多(솔다)는 대부분
◯正朔(정삭)은 정월 초하루, 황제 나라의 曆法
◯語釋(어석)은 말의 풀이
◯緦功(시공)은 복(服)이 있는 가까운 친족을 말함
◯從祖水竹軒은 休를 말한다.
◯季父松磵亭은 松磵 重器를 말한듯하다.
◯手澤存(수택존)은 손때가 남아있다,
◯寒泉門(한천문)은 문맥으로 보아 寒泉門下로, 渼湖集, 近齋集에서도 寒泉門下란 표현을 볼 수 있다.
분명 한천이란 큰 스승이 있는 듯하다.
李縡(1680-1746)의 號가 陶菴 또는 寒泉이다.
필자가 “和羅心甫 烱奎(화나심보 형규)/심보 나형규에게 화답하다”의 글에서 형규가 이재선생 밑에서 수학한 사실을 밝힌바 있다.
◯以侯는 以後의 誤記 같다.
◯宋得基(송득기)는 宋煥基(송환기)의 誤記 같다.
한국역대인물 정보 시스템에서 보면 宋煥基와 宋煥箕는 같은 인물이다.
◯性裕(성유)의 가계는 俊 - 世器 - 炳奎 - 廷泰 - 得綸 - 學慎 - 性裕
◯致八(치팔)의 가계는 倬 - 鼎器 - 漢奎 - 廷益 - 有萬 - 系子 致八
◯松月軒(송월헌)은 羅泰奎이다.
첫댓글 깨알보다 작은글씨 번역 감사 합니다..
선대를 알아가는 훌륭한 카페입니다..감사 합니다..
이재(李縡.1680.숙종 6~1746.영조 22)
조선 숙종ㆍ경종ㆍ영조 때의 학자.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ㆍ한천(寒泉), 시호는 문정(文正). 대신 숙(䎘)의 손자, 진사 만창(晩昌)의 아들인 李縡 선생님 묘소가 용인에 있습니다..
작년에 도로를 달리는데 도로변에 이정표가 있어서 우연히 참배했습니다.
나형규(1691~17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