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쪽, 231쪽: 내용 추가
강병주(姜炳周: 1882~1955) 장로교 목사, 한글학자. 필명 백남(白南), 옥파(玉波), 구슬결, 죽우(竹友). 경상북도 영주(榮州) 출생. 목사이자 신학자인 강신명(姜信明)의 아버지이다. 1915년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대구성경학교를 거쳐, 192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경 <영주청년회(榮州靑年會)> 창립에 참여하였고, 1920년 6월 22일 <영주청년회> 제1회 강연회에서 「조혼의 폐해(早婚의 弊害)」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강병주(姜炳周) | 姜白南(白南), 姜玉波(玉波, 玉波生), 구슬결, 병주, 姜竹友(竹友) | 慶北 榮州, 姜信明의 아버지 |
15쪽, 232쪽, 629쪽, 642쪽: 한자 수정
강영달(姜永達) → 강영달(康永達)
19쪽: 내용 수정
고한승(高漢承: 1902~1949)신극운동가, 아동문학가. 필명 서원(曙園), 포빙(抱氷, 抱氷生). 경기도 개성(開城) 출생.
※ '고마부'는 고한승이 아니므로 필명에서 삭제함
48쪽: 내용 수정
김완동(金完東: 1903~1963) 교육자, 아동문학가. 필명 포훈(苞薰), 한별. 전라북도 전주(全州) 출생. 전주제일보통학교와 전주고등보통학교(全州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대구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거쳐 줄곧 교직에 종사하였다. 군산공립보통학교(群山公立普通學校) 훈도, <군산청년동맹(群山靑年同盟)> 활동, 군산제이공립보통학교(群山第二公立普通學校) 설립 운동 등 군산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1930년경 경성(京城)으로 학교를 옮겼다가, 이후 1938년경까지 충청남도 서천(舒川) 일원에서, 1939년경에는 함경북도 소재 사립 보신심상소학교(普信尋常小學校) 교장으로 재직한 것으로 확인된다. 1930년 2월 <경성초등학교 조선어연구회(京城初等學校朝鮮語硏究會)> 창립총회 후 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부문 3등으로 「구원의 나팔소리!(전3회)」(1930.1.9~12)가 입선되었고, 1930년 『조선일보』에 신춘현상문예 동화 부문에 「약자의 승리(전3회)」(1930.1.11~15)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아동문학 관련 비평문으로 「신동화운동을 위한 동화의 교육적 고찰−작가와 평가 제씨에게(전5회)」(『동아일보』, 1930.2.16~22)가 있다. 1930년대에 다수의 동요 작품을 발표하였다. ◤저서로 유고시집 『(한별김완동선집)반딧불』(보광출판사, 1965)이 있다.
61-2쪽: 내용 수정
김홍수(金泓洙: 1911~1965) 언론인. 원명(原名) 김대봉(金大鳳). 창씨명 기무라 요시미쓰(香村義光). 서울 출생. 원산 제2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원산중학교 입학하였으나 1930년 독서회 사건으로 원산중학 3학년에서 중퇴하였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적기(赤旗)』,, 『가난 얘기〔貧乏物語〕』, 『게잡이 배(蟹工船)』, 등 좌익 서적을 탐독하여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몰려 퇴학처분을 당한 것이다. 중학 시절 이서향(李曙鄕: 본명 李永秀)과 친교가 두터웠다. 1941년 7월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청진지국 기자, 1944년 5월 경성지국 기자, 1945년 1월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 기자를 역임하였다. 해방 후 『조선일보』, 사회부장, 『국도신문』, 주필, 『 중앙신문』, 논설위원, 『동아일보』, 취재부장, 『경향신문』, 논설위원, 『대한일보』,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아동문학 관련 비평문으로 「(신간평)소년 기수」(『경향신문』,, 1947.6.26), 「(신간평)동화 『박달방망이』,」(『동아일보』,, 1948.11.10) 등이 있다.
출생지: 본래 함경남도 원산(元山) 산제동(山祭洞) 출생이나 편의상 호적을 서울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69쪽: 표기 수정
학 작품을 발표하였다. ◤저서로 마해송, 김영보, 진금성(秦金星=秦長燮), 고한승, 공진항, 김학경(金鶴烱), 임영빈(任英彬), 이기세 등과 함께 합작시집으로 <개성녹
69쪽: 내용 수정 및 추가
박노홍(朴魯洪: 1916~1982) 충청남도 부여(扶餘) 출생. 필명 산남(山南), 필명 이부풍(李扶風), 이노홍(李魯洪), 이사라(李史羅), 강영숙(姜榮淑), 노다지, 화산월, 이고려(李高麗). 북간도(北間島)로 이주하여 성장하다가 귀국하여 충청북도 청주(淸州)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학력은 소학교를 좀 다녔을 뿐이라 한다. 1931년 『동아일보』 신춘현상 시조 부문에 「봄빛」(『동아일보』, 1931.1.6)(이때 주소가 “청주읍 본정(淸州邑 本町) 1의 324”였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초춘사(初春詞)」(이고려(李高麗); 『조선일보』, 1935.1.1), 1935년 『동아일보』 15주년 기념으로 모집한 ‘농어산촌 생활기록(農漁山村生活記錄)’ 중에서 선외가작으로 「빈부기(貧婦記)(전16회)」(『동아일보』, 1935.7.30~8.16), 1937년 『매일신보』 신춘현상 시조 부문에 「사비성(泗沘城)을 차저서」(『매일신보』, 1937.1.9) 등이 당선되었다.(이때 주소는 “경성 관훈정 정미사진관 내(京城 寬勳町 正美寫眞館 內)”로 되어 있다.)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분(粉)이(전11회)」(1935.8.13~29)를 연재하였다. 1937년경부터 빅타레코드사 문예부에 적을 두고 대중가요 가사를 많이 발표하였다. 1938년 이후 전수린(全壽麟) 작곡의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박단마 노래), <아이고나 요 맹꽁>(박단마 노래), <외로운 가로등>(황금심 노래), 박시춘 작곡의 <애수의 소야곡>(남인수 노래), <알뜰한 당신>(황금심 노래), <가거라 삼팔선>(남인수 노래), 손목인 작곡의 <해조곡>(이난영 노래) 등이 있다. 1943년 이부풍의 이름으로 가극 <아리랑>의 각본을 씀으로써 극작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 현대악극단을 조직, 운영하면서 수많은 음악공연물의 극본을 썼다. 1951년 피난 시절 대구에서 국극(唱劇) 각본 <열녀화(烈女花)>를 연출․공연하였고 수복 후 창극단의 극본을 주로 썼다. 1957년 극영화 <봉이 김선달>(한홍열 감독)을 제작하면서 <밤마다 꿈마다>(1959, 박노홍 각본) 등의 극영화를 제작, 감독하였고 본격적으로 영화사도 차렸다. 1960년 국제친선문화협회를 조직하여 6․25전쟁 때 우리나라를 위하여 참전하였던 16개국과의 문화교류사업을 시작하였다. 국제친선문화협회 부회장이자 기획위원으로 1961년 3월 3일부터 25일까지 경복궁미술관에서 영화계의 원로 윤봉춘(尹逢春), 서월영(徐月影), 방의석(方義錫) 등과 함께 ‘한국영화 40년 기념 대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아동문학 관련 비평문으로 「김도산(金道山) 군의 ‘첫겨울’을 보고」(『어린이』, 1932년 5월호)가 있다.
85-86쪽: 박영종 항 내용 수정
박영종(朴泳鍾: 1915~1978) 아동문학가, 시인. 필명 박목월(朴木月), 영동(影童), 박영동(朴泳童). 경상남도 고성군(固城郡)에서 출생하여 경주군 건천(乾川)으로 이주하였다. 1929년 3월 건천(乾川)공립보통학교 6년을 졸업하고, 1930년 4월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입학하여 1935년 3월 졸업하였다. 이후 도일(渡日)하여 영화인들과 교유하다가 귀국하였다. 1931년 시 「달밤」(『신생』, 1931년 10월호), 시 「기차 속」(『신생』, 1932년 11월호)을 시작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4년 「이슬비」(『아이생활』, 1934년 5월호), 「선물」(『어린이』, 1934년 5월호; 선외가작 작품 불수록)을 발표하면서 동시 창작을 시작하였고, 「통․딱딱․통․짝짝」과 「이슬비」(『어린이』, 1934년 6월호; 「이슬비」는 『아이생활』에 발표하였던 작품을 개작한 것임), ‘아동문예 현상’에 「제비마중」(『신가정』, 1934년 6월호)이 당선되었다. 해방 후 1945년 <조선아동문화협회(朝鮮兒童文化協會)>에서 『주간소학생』, 『소학생 벽신문』을 발간할 때 윤석중, 조풍연(趙豊衍), 정진숙(鄭鎭肅), 박두진(朴斗鎭) 등과 함께 창간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45년 12월 30일 대구에서 <조선아동회(朝鮮兒童會)>를 창립할 때 박영종(朴泳種)은 이영식(李永植), 김상신(金尙信), 이원식(李元植), 김옥환(金玉煥), 김홍섭(金洪燮), 김재봉(金再逢), 김진태(金鎭泰)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46년 『아동(兒童)』, 1947년 『동화(童話)』 등 대구(大邱)에서 발간한 아동문학 관련 잡지를 편집하였다. 1947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朝鮮靑年文學家協會)>의 아동문학부장을 맡았다. 1949년 4월 30일 <전국아동문학작가협회(全國兒童文學作家協會)>를 결성할 때 박목월은 김동리(金東里), 윤석중(尹石重), 그 외 7인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50년부터 『시문학』, 1973년부터 시 전문지 『심상(心象)』을 발행하였다. 1962년부터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아동문학 관련 비평문으로 「(뿍․레뷰)재현된 동심−『윤석중 동요선』을 읽고」(『동아일보』, 1939.6.9), 「꼬리말」(윤석중, 『(동요집)어깨동무』, 박문서관, 1940.7), 「동요 짓는 법−동요작법(전11회)」(『주간소학생』 제1호~제12호, 1946.2.11~4.29), 「명작감상 동요독본(전7회)」(『아동』 제1호~제7호, 1946.4~ 1948.4), 「동요감상 자장가」(『새싹』 제4호, 1947.4), 「동요 맛보기(전8회)」(『소학생』 제60~68호, 1948년 9월호~1949년 6월호), 「동요를 뽑고 나서(동시를 뽑고 나서; 뽑고 나서)」(『소학생』 제64호~제75호, 1949년 1-2월 합호~1950년 2월호), 「단순의 향기−『굴렁쇠』의 독후감」(『연합신문』, 1949.2.5), 「동요 교재론」(『새교육』 제2권 제5-6합호, 1949년 9월호), 「아동문화 향상의 길」(『신천지』 제46호, 1950년 5월호) 등이 있다. 이 외에 다수의 동시 작품을 발표하였다. ◤저서로 『동시집』(조선아동회, 1946), 『초록별』(조선아동문화협회, 1946), 『동시교실: 지도와 감상』(아데네사, 1957), 『보랏빛 소묘』(신흥출판사, 1958), 『산새알 물새알: 박목월 동요동시집』(문원사, 1961), 『동시의 세계』(배영사, 1963) 등과 편저로 『현대동요선(現代童謠選)』(한길사, 1948), 『명작 동요선(名作童謠選)』(산아방, 1950) 등이 있다.
99쪽: 손길상 항 내용 수정
손길상(孫桔湘: ?~?)아동문학가. 경상남도 진주(晋州)(본적 경남 진주군 진주면 평안동 227번지) 출생. 1923년 진주제일고등보통학교(晋州第一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여 1928년에 졸업하였다. 1928년 진주 진명학원(進明學院)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1930년 경성부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中央基督敎靑年會學校)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진주의 정상규(鄭祥奎), 이재표(李在杓) 등과 함께 <새힘사>(새힘社)를 통해 소년문예활동을 하였다. 192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나그네님」(『동아일보』, 1929.2.6)이 선외가작으로 당선되었다. 1930년 4월 7일 <진주청년동맹(晋州靑年同盟)> 제1회 집행위원회에서 신태민(申泰珉)과 함께 소년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0년 4월 7일 <마산소년동맹(馬山少年同盟)> 상무집행위원회에서 집행위원장 김기태(金基泰), 신태민(申泰珉) 등 9인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노동야학(勞動夜學) 활동을 하였다. 1930년 8월경 ‘중앙청년학교 손길상(中央靑年學校 孫桔湘)’의 신분으로 ‘진주군 진주면 평안동(晉州郡晋州面平安洞)’에서 문자보급반 활동을 하였다. 1930년 11월 장곡천공회당에서 개최된 『조선일보』의 제2회 한글문자보급반원 입상자 수상식에서 2등으로 입상하였다. 1930년 11월 12일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1학년으로 동맹휴학을 하여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1933년 10월에는 일본 반제 및 조선공산청년동맹원 가담 혐의 건으로 일본 경시청에 피검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기소보류 처분되어 풀려난 적이 있다. 1936년경 만주국 문교부(滿洲國文敎部)에 재직하였고, <신징조선인청년회(新京朝鮮人靑年會)> 활동을 하였다. 1936년 2월 29일 신징(新京)에서 재만조선아동학교(在滿朝鮮兒童學校) 교육의 보조적 역할과 아동 정서 교양을 목적으로 회장 이홍주(李鴻周), 총무 손길상(孫桔湘), 위원 배익우(裴翊禹), 박경민(朴卿民), 정항전(鄭恒篆), 임병섭(林炳涉), 강재형(姜在馨), 엄익환(嚴翼煥), 김진영(金振永) 등이 참여하여 조직한 <아동문학연구회(兒童文學硏究會)>에서 활동하였다. <아동문학연구회>의 첫 사업으로 1936년 3월 30일 신징(新京) 제1회 소년소녀동화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만주국 문교부 소속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였다. ◤아동문학 관련 비평문으로 「『신소년』 9월 동요평」(『신소년』, 1931년 11월호)이 있다. 이 외에 『신소년』, 『별나라』, 『아이생활』,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등에 다수의 동요 작품을 발표하였다.
103쪽: 송완순 항 내용 수정
송완순(宋完淳: 1911~1953) 동요시인, 아동문학가, 평론가. 필명 구봉학인(九峰學人), 구봉산인(九峰山人, 九峰散人), 송구봉(宋九峰), 송소민(宋素民), 소민학인(素民學人), 한밭(한밧), 송타린(宋駝麟), 백랑(伯郞), 호랑이, 호인(虎人), 송호(宋虎, 宋虎人), 송강(宋江). 충청남도 대전군(大田郡) 진잠면(鎭岑面)의 “조그만 지주(地主)”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일찍 부모가 구몰하여 형 송관순(宋寬淳)의 보호하에 성장하였다. 1927년 3월 충청남도 진잠공립보통학교(鎭岑公立普通學校)를 5년 수료하고 4월에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9월 30일 자로 휴학을 하고 이듬해인 1928년 4월 30일 가사상의 이유로 1학년 1학기에 자퇴하였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참여하였으나 1930년 4월 20일 <카프>를 중상했다는 이유로 <카프> 중앙위원회 결의를 거쳐 제명되었다. 1926년경 고향 대전(大田)에서 <소년주일회(少年週日會)> 활동을 하였고, 이후 『어린이』, 『신소년』 등의 독자담화실이나 독자동요란을 통해 문학 활동을 하였다. 1926년 서덕출(徐德出), 신고송(申孤松), 문인암(文仁岩), 박태석(朴泰石), 승응순(昇應順), 은숙자(銀淑子), 황종철(黃鍾喆) 등과 함께 윤복진이 주도하여 창립한 소년문예단체 <등대사>의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7월경 양창준(梁昌俊), 엄흥섭(嚴興燮), 김관(金管), 김광균(金光均), 현동염(玄東炎), 안함광(安含光), 박충진(朴忠鎭), 민병휘(閔丙徽), 장비(張飛), 궁규성(弓奎星) 등과 함께 예술잡지 『대중예술(大衆藝術)』을 8월 창간호로 발간하기 위해 준비를 하였다. 1932년 송영(宋影), 신고송(申孤松), 박세영(朴世永), 이주홍(李周洪), 이동규(李東珪), 태영선(太英善), 홍구(洪九), 성경린(成慶麟), 김우철(金友哲), 박고경(朴古京), 구직회(具直會), 승응순(昇應順), 정청산(鄭靑山), 홍북원(洪北原), 박일(朴一), 안평원(安平原), 현동염(玄東炎) 등과 함께 건전 프로아동문학의 건설보급과 근로소년 작가의 지도 양성을 목표로 월간 『소년문학(少年文學)』을 발간하기로 하였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아동문학부 위원을 보선(補選)할 때 박세영(朴世永) 등과 함께 아동문학부 위원이 되었다. 1949년 1월경, 박노갑(朴魯甲), 박계주(朴啓周) 등과 함께 『소년소녀소설전집』을 회현동(會賢洞)의 민교사(民敎社)에서 발간하기로 하였다. 1949년 11월경 자진하여 정지용(鄭芝溶), 정인택(鄭人澤), 양미림(楊美林), 박노아(朴露兒) 등과 함께 <국민보도연맹>에 가맹하였으나, 6・25전쟁 중인 1951년 월북하였다. 이후 평안남도 숙천군에서 창작활동을 하였다. ◤아동문학 관련 비평문으로 「신소년사 기자 선생 상상기」(『신소년』, 1926년 6월호), 「공상적 이론의 극복−홍은성(洪銀星) 씨에게 여(與)함(전4회)」(중외일보』, 1928.1.29~2.1), 「비판자를 비판−자기변해(自己辯解)와 신(申) 군 동요관 평(전21회)」(九峰山人; 『조선일보』, 1930.2.19~3.19), 「개인으로 개인에게−군(君)이야말로 ‘공정한 비판’을(전8회)」(九峰學人; 『중외일보』, 1930.4.12~ 20), 「동시말살론(전6회)」(九峰學人; 『중외일보』, 1930.4.26~5.3), 「조선 동요의 사적(史的) 고찰(二)」(『새벗』 복간호, 1930년 5월호), 「동요의 자연생장성 급(及) 목적의식성」(宋九峰; 『중외일보』, 1930.6.14~?)(5회 연재 중 중단), 「동요의 자연생장성 급 목적의식성 재론(전4회)」(九峰學人; 『중외일보』, 1930.6.29~7.2), 「‘푸로레’ 동요론(전15회)」(『조선일보』, 1930.7.5~22), 「(자유평단: 신진으로서 기성(旣成)에게, 선진(先進)으로서 후배에게)공개반박−김태오(金泰午) 군에게」(素民學人; 『조선일보』, 1931.3.1), 「동요론 잡고−연구노-트에서(전4회)」(『동아일보』, 1938.1.30~2.4) 등과, 해방 후 「아동문학의 기본 과제(상,중,하)」(『조선일보』, 1945.12.5~7), 「아동문화의 신출발」(『人民』 제2권 제1호, 1946년 1-2월 합호), 「조선 아동문학 시론(試論)−특히 아동의 단순성 문제를 중심으로」(『신세대』 제1권 제2호, 1946년 5월호), 「(문화)아동출판물을 규탄」(『민보(民報)』 제343호, 1947.5.29), 「(신간서평)못난 도야지」(『문화일보』, 1947.9.20), 「아동문학의 천사주의(天使主義)−과거의 사적(史的) 일면에 관한 비망초(備忘草)−」(『兒童文化』, 동지사아동원, 1948년 11월호), 「소년소설집 『운동화』를 읽음」(『어린이나라』, 1949년 1월호), 「나의 아동문학」(『조선중앙일보』, 1949.2.8) 등이 있다. 이 외에 1920년대부터 『중외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신소년』, 『별나라』 등의 신문과 잡지에 다수의 동요, 동화를 발표하였다. ◤저서로 프리체(Friche, Vladimir Maksimovich)의 책을 번역한 『구주문학발달사(歐洲文學發達史)』(開拓社, 1949)가 있다.
104-105쪽: 송창일 항 내용 수정
송창일(宋昌一: ?~?) 아동문학가. 필명 창일(蒼日), 송해광(宋海光), 창씨명 宋山昌一. 평안남도 평양(平壤) 출생. 1930년 평안북도 소학교 및 보통학교 교원 시험(제2종)에 합격하였다. 이후 평양 광성보통학교(光成普通學校) 등에서 교사로 재직했다는 기록이 있다. 1929년경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별나라』, 『아이생활』, 『가톨릭소년』 등 여러 매체에 동요, 동화, 소년소설,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조선일보』 신춘현상 동요 부문에 「거라지의 ᄭᅮᆷ」(平壤 宋昌一; 『조선일보』, 1931.1.1)이 2등으로 당선되었다. 1933년 『동아일보』 주최의 ‘제3회 학생 계몽운동’ 보도에 보면 ‘평양부(平壤府)’에서는 빈민 아동 중심으로 평양 정진여자보통학교(正進女子普通學校)에서 7월 24일부터 8월 7일까지 한글, 산술, 역사 등을 가르쳤는데 송창일도 교사로 참여하였다. 1940년 7월 9일부터 13일까지 평양애린원(平壤愛隣院) 주최 제2회 상설탁아소지도자강습회를 광성유치원 보육실에서 개최하였는데, 송창일은 강사로 참여하여 「동화법(童話法)」을 강의하였다.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하였다. <평양예술문화협회>(1945년 9월)와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 결합하여, <북조선예술총연맹>(1946년 3월 25일)이 결성되었고 이것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1946년 10월)으로 개칭되었을 때, 아동문학위원에 송창일(宋昌一), 박세영(朴世永), 송영(宋影), 신고송(申鼓頌), 강훈(姜勳), 이동규(李東珪), 정청산(鄭靑山), 강승한(康承翰), 강소천(姜小泉), 노양근(盧良根), 윤동향(尹童向), 이호남(李豪男) 등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1953년에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부문별로 재조직되는데 <조선작가동맹>의 아동문학 분과위원회에, 위원장 김북원(金北原), 위원으로 송창일은 강효순, 이진화, 신영길, 리원우, 윤복진, 박세영, 이효남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다. 1954년부터 1956년 1월호까지 『아동문학』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아동문학 관련 비평문으로 「동요운동 발전성−기성문인, 악인(樂人)을 향한 제창(상,하)」(『조선중앙일보』, 1934.2.13~14), 「아동문예의 재인식과 발전성(전4회)」(『조선중앙일보』, 1934.11.7~17), 「아동문예 창작 강좌−동요 편(3~4)」(『아이동무』, 1935년 3월호~4월호), 「아동극 소고−특히 아동성을 主로−(전6회)」(『조선중앙일보』, 1935.5.25~6.2), 「아동불량화의 실제−특히 학교 아동을 중심으로 한 사고(私稿)(전9회)」(『조선중앙일보』, 1935.11.3~13), 「아동문학 강좌(전9회)」(『가톨릭소년』, 1937년 11월호~1938년 8월호), 「동화문학과 작가(전5회)」(『동아일보』, 1939.10.17~26), 「북조선의 아동문학」(『아동문학』 제1집, 평양: 어린이신문사, 1947년 7월호), 「1949년도 소년소설 총평」(『아동문학집』 제1집, 평양: 문화전선사, 1950.6) 등이 있다. 이 외에 동요, 동화, 소년소설 등 다수의 아동문학 작품을 발표하였다. 송창일의 『참새학교』와 『소국민훈화집(少國民訓話集)』에 대해, 이석훈(李石薰)의 「(신간평)송창일 씨 저 『참새학교』 평」(『조선일보』, 1938.9.4), 임인수(林仁洙)의 「아동의 명심보감(明心寶鑑)−송창일의 『소국민훈화집』 독후감」(『아이생활』, 1943년 7-8월 합호), 김창훈(金昌勳)의 「송창일 저 『소국민훈화집』 독후감」(『아이생활』, 1943년 7-8월 합호) 등의 서평이 있다. ◤저서로 동화집 『참새 학교』(평양: 평양애린원, 1938), 『소국민훈화집』(아이생활사, 1943) 등이 있다.
113쪽: 글자 수정
안덕근(安德根: 1907~?)아동문학가. 필명 안영(安英). 황해도 해주(海州) 출생. <해주청년회(海州靑年會)> 집행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사회운동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중략) 1947년 9월 23일 『광명일보』 편집국장 안덕근이 수도경찰청에서 취조를 받고 있던 중 미군정 포고령 2호 위반 혐의로 불구속 송청되었다. ◤아동문학 관련 비평문으로 「동화의 가치」( 『매일신보』 , 1926.1.31), 「푸로레타리아 소년문학론(전12회)」(『조선일보』, 1930.10.18~11.7) 등이 있다. 그 외 비평문으로 정순정(鄭順貞)과 공동 집필한 평론 「예술동맹 해주지부 설치를 보고」(『중외일보』, 1927.12.23), 「신극예술운동−해주 민영회(海州 民映會) 혁신을 보고」(海州 安英; 『중외일보』, 1929.4.5), 「맑쓰주의 예술론」(『비판』 제2권 제11호, 1932년 12월호), 「‘투루게-넵흐’의 작품에 대한 단상」(『조선중앙일보』 , 1933.8.22), 「해방 이후의 연극운동」(『독립신보』 , 1946.8.15) 등과, 다수의 동화, 동요 등 아동문학 작품을 발표하였다.
117-119쪽: 내용 추가 및 수정
양미림(楊美林: 1912~?) 아동문학가. 본명 양제현(楊濟賢).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출생. 송화공립보통학교(松禾公立普通學校)와 진남포상업학교(鎭南浦商業學校)를 졸업하고, 1935년 3월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를 졸업하였다. 1936년 11월경 경성중앙방송국(京城中央放送局) 제2방송과(第二放送課) 아동부 주임으로 취임하였다. 1939년 7월 21일 JODK 제2방송 어린이좌담회의 사회를 맡았다. 1940년 5월 5일 아동애호주간에 아동애호간담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는데, 양제현(楊濟賢)은 김애마(金愛瑪), 독고선(獨孤璇), 이헌구(李軒求), 정인섭(鄭寅燮), 차사백(車士百)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광복군의 전과를 주위에 전했다는 ‘경성방송국 라디오 단파방송’ 사건(朝鮮臨時保安法 違反) 때 단파방송을 통해 수신한 미국의소리방송(VOA)과 충칭(重慶)방송 내용을 송남헌(宋南憲)에게 전했고, 송남헌은 이를 홍익범(洪翼範)에게, 홍익범은 다시 송진우(宋鎭禹), 김병로(金炳魯), 이인(李仁), 허헌(許憲) 등에게 전했다.(1943년 봄 경성방송국의 기술자와 아나운서 그리고 송남헌, 홍익범, 허헌 등이 검거된 사건을 경성방송국 단파방송 사건이라 한다.) 해방 후 1945년 <조선문학동맹> 아동문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3월 13일 결성된 <전조선문필가협회>의 추천회원 440명 중에 포함되었다. 1946년 5월 11일 어린이날준비위원회가 종로청년회관에서 소년문제대강연회를 개최하였을 때 안준식의 「조선소년운동에 대하야」, 박세영(朴世永)의 「아동문학운동과 금후 진로」, 김호규(金昊圭)의 「어린이 교육에 대한 개론과 실제」 등과 함께 양미림(楊美林)은 「세계 아동문화의 조류」를 발표하였다. 중앙여대와 조선보육사가 공동 주최(군정청 문교부 후원)하여 1946년 7월 23일부터 1주일간 개최한 제1회 하기 보육강습회의 ‘보육이론’ 강사{아동음악은 나운영(羅雲英), 아동미술은 이인성(李仁星) 등}로 참여하였다. 1946년 10월경 경성전기회사(京城電氣會社) 비서과장으로 임명되었다. 1946년 방송국에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1946년 12월 6일부터 1947년 3월 초까지 『예술통신(藝術通信)』과 1947년 3월 중순부터 6월 초순까지 『문화일보』에 「방송일평(放送日評)」을 연재하였고, 『동아일보』에 「아나운써-의 세계」(1946.12.10)를 발표하였다. 1946년 12월 30일 서울방송국의 전재(戰災) 아동을 위한 방송 출연금 200원을 전재아동구제에 써 달라며 경향신문사에 기탁하였다. 1947년 1월 30일 소년운동자간담회를 개최하여 ‘어린이날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기로 하였는데 양미림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7년 2월 소년운동자 제2차 간담회에서 소년지도단체 조직과 어린이날전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는데, 양미림은 양재응(梁在應), 윤소성(尹小星), 남기훈(南基薰), 안준식(安俊植), 박흥민(朴興珉), 정홍교(丁洪敎), 최청곡(崔靑谷), 윤석중(尹石重), 금철(琴徹), 현덕(玄德), 정태병(鄭泰炳), 박인범(朴仁範), 김태석(金泰晳), 정성호(鄭成昊), 김원룡(金元龍), 최병화(崔秉和) 등과 함께 어린이날전국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 및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5월 어린이날 행사 중 덕수궁(德壽宮)에서는 어린이날 기념과 표창식이 있었는데, 양미림은 부형대표로 답사를 하였다. 1947년 8월 10일 『조선출판신문』(朝鮮出版新聞)을 창간하여 발행인이 되었다. 1947년 10월 경향신문사의 설문(해방 후 조선출판서적 중 가장 재미있는 책은 무엇입니까)에 오천석(吳天錫), 윤영춘(尹永春), 옥선진(玉璿珍), 함대훈(咸大勳), 조지훈(趙芝薰), 김광주(金光洲), 김송(金松), 이무영(李無影) 등과 함께 책을 추천하였다. 1948년 12월 15일부터 20일까지 <여성문화협회>에서 여성문화강좌를 개설하였는데 김기림(金起林), 김동석(金東錫), 김동리(金東里), 설의식(薛義植), 노천명(盧天命) 등과 함께 강사로 참여하였다. 1949년 11월경 자진하여 정지용(鄭芝溶), 정인택(鄭人澤), 송완순(宋完淳), 박노아(朴露兒) 등과 함께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에 가맹하였다. 그 후 월북하였다. ◤아동문학 관련 비평문으로 「방송에 나타난 아동문예계의 한 단면」(『아이생활』 제140호, 1937년 10월호), 「소년필독 세계 명저 안내(전3회)」(『소년』, 1939년 10월호~12월호), 「노양근 저(盧良根 著) 『열세동무』 독후감」(『조선일보』, 1940.3.11), 「(북․레뷰)김태오 요, 김성태 곡(金泰午 謠, 金聖泰 曲), 유치원 동요곡집」(『조선일보』, 1940.4.25), 「아동학서설−아동애호주간을 앞두고(상,중,하)」(『동아일보』, 1940.5.1~5), 「아동문제 관견(管見)(전5회)」(『동아일보』, 1940.6.2~14), 「아동예술의 현상(전5회)」(『조선일보』, 1940.6.29~7.9), 「(演藝週題)고상한 취미−아동의 오락 문제」(『매일신보』, 1940.7.29), 「전시하 아동문제(전3회)」(『매일신보』, 1942.1.29~2.3), 「라디오 어린이시간에 대하여」(『아동문학』 창간호, 1945년 12월호), 「아동문학에 있어서 교육성과 예술성(상,중,하)」(『동아일보』, 1947.2.4~3.1), 「아동문화의 기본 이념−아동관의 문제를 중심으로(상, 하)」(『문화일보』, 1947.4.27∼29), 「‘어린이 시간’ 방송에의 회고와 전망」(『소년운동』 제2호, 조선소년운동중앙협의회, 1947년 4월호), 「‘어린이 세계’에 접근하자」(『여성신문』, 1947.5.10), 「김원룡(金元龍) 동시집 『내 고향』을 읽고」(『경향신문』, 1947.11.16), 「아동독물 소고(兒童讀物小考)」(『조선교육』 제1권 제7호, 조선교육연구회, 1947년 12월호), 「아동문화를 말하는 좌담회」(楊美林 외; 『아동문화』 제1집, 동지사아동원, 1948년 11월호), 「아동방송의 문화적 위치」(『아동문화』 제1집, 동지사아동원, 1948년 11월호) 등이 있다. 이 외에 동요, 동화 등 다수의 아동문학 작품을 발표하였다. ◤저서로 정태병(鄭泰炳)과 공동 번역한 『연애와 결혼』(문화출판사, 1948)이 있다.
244쪽: 내용 수정, 송해광 항 삭제
송창일(宋昌一) | 蒼日, 宋海光. 창씨명 宋山昌一 | 平南 平壤 |
송철리(宋鐵利) | 창씨명 石山靑苔 | 咸南 惠山→滿洲, 壬水讀書會 |
승응순(昇應順) | 昇曉灘, 金陵人(金能仁), 쇠내, (南風月, 秋葉生) | 黃海道 金川, 글꽃사(朝鮮少年文藝協會), 大邱등대사, 新興兒童藝術協會 |
117쪽, 245쪽, 246쪽: 양가빈 항 양춘석으로 수정, 양가빈 항 삭제 및 양춘석 항으로 통합 내용 추가 및 수정
양춘석(梁春錫: 1915~1987) 아동문학가. 필명 춘석(春夕), 봄저녁, 양가빈(梁佳彬), 양천(梁天), 신철(申哲), 남궁만(南宮滿). 전라북도 남원(南原) 출생으로 2세 때 평안남도 강서(江西)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청년이 되어 황순원을 만나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이후 평양의 극단 <예우극장(藝友劇場)> 등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5월 평양에서 『동요시인(童謠詩人)』을 발간할 때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다. 1934년 7월경, 박고경(朴古京) 등과 함께 비밀 문화 클럽을 조직한 혐의로 검거되기도 하였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 신춘현상모집의 희곡 부문에 「데릴사위(전16회)」(남궁만; 1936.1.1∼30)가, 1941년 『매일신보』 신춘현상의 희곡 부문에 「전설(전17회)」(남궁만; 1941.1.25∼2.10)이 당선되었다. ◤아동문학 관련 비평문으로 「공산주의 소년운동의 상세(狀勢)와 당면 임무」(『학지광』 제30호, 1930년 12월호), 「(강좌) 써-클 이야기」(梁天; 『별나라』 통권67호, 1933년 4-5월 합호), 「『동요시인』 회고와 그 비판(전2회)」(양가빈; 『조선중앙일보』, 1933.10.30~31)이 있다. 이 외에 동요, 동화, 소년소설 등 다수의 아동문학 작품을 발표하였다.
양춘석(梁春錫) | 梁春夕(春夕), 봄저녁, 梁佳彬, 梁天, 申哲, 南宮滿 | 平南 平壤, 童謠詩人社 |
167쪽: 이주홍 항 내용 추가 수정
이주홍(李周洪: 1906~1987) 아동문학가, 소설가. 호적명은 이주홍(李柱洪)이고, 족보명은 이환주(李煥周)이다. 필명 향파(向破, 香波), 향파학인(向破學人), 방화산(芳華山), 여인초(旅人草), 망월암(望月庵). 경상남도 합천(陜川) 출생. 한학을
170쪽: 이학인 항 내용 추가 수정
이학인(李學仁: 1904~?)시인, 동요 작가. 필명 우이동인(牛耳洞人), 이성로(李城路), 이남원(李南園), 첫소리, 이소류(李小流). 평안북도 태천군(泰川郡) 출생. 일본 도쿄(東京)에서 잡지 제삼전선(第三戰線)을 발행하였고, <카프(KAPF)>의 맹원이 되어 제1차 방향전환을 주도하고 도쿄지부를 만들어 활동한 이북만(李北滿), 조중곤(趙重滾), 한식(韓植), 김두용(金斗鎔), 홍효민(洪曉民), 고경흠(高景欽), 홍양명(洪陽明), 장준석(張準錫), 전철박(全澈珀), 이학인(李學仁) 등 일군의 신진들을 가리키는 <제삼전선파(第三戰線派)>의 일인이다. 별나라의 동인이고, 1935년 2월 휴간 중이던 조선문단(朝鮮文壇)을 복간하였다.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
182쪽: 전춘파 항 내용 수정
전춘파(全春坡: 1907~1980) 시인, 아동문학가.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생. 본명 전우한(全佑漢). 애국지사 전좌한(全佐漢)은 그의 형이다. 1926년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30년 중퇴하였다. 이후 니혼대학(日本大學) 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934년 중퇴하였다. 1930년 전후 『신소년』의 편집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매일신보』 신춘현상의 동화 부문에 「행복의 길(전2회)」(1931.1.14∼15)이 당선되었다. 1935년 『매일신보』 사회부 기자로 언론활동을 시작하여, 1941년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 기자 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동방신문』 주필, 1953년 『대전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아동문학 관련 비평문으로 「평가(評家)와 자격과 준비−남석종 군(南夕鍾君)에게 주는 박문(駁文)(전5회)」(『매일신보』, 1930.12.5~11), 1932년 평론 「‘어린이’ 작품을 읽고−‘어린이’ 여러분에게(전5회)」(春波; 『매일신보』, 1932.6.1~9) 등이 있다. 이 외에 다수의 아동문학 작품을 발표하였다.
188쪽: 정인과 항 수정
정인과(鄭仁果: 1888~1972) 목사, 교육가. 본명은 정의종(鄭顗鍾), 창씨명은 德川仁果 또는 悳川仁果이다. 평안남도 순천군(順川郡) 출생.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와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를 졸업하고, 1913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1917년 로스앤젤레스 성경학원(Bible Institute of Los Angeles)을 수료하였다. 이어서 샌프란시스코 산안젤모신학교(San Anselm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하던 중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휴학하고, 4월 미주지역 대표인 안창호(安昌鎬)를 수행하여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920년 임시의정원 의원직과 외무차장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가 1921년 4월 산알젤모신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프린스턴신학교, 1923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컬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다 1924년 6월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924년 귀국한 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본격적인 친일활동에 나섰다. 1942년 『기독교신문』을 발간하여 종교인으로서 대표적인 친일활동을 하여, 해방 후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特委)에 체포되었고, ‘대한의 유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지나친 친일행적으로 개신교회에 복귀하지 못하였다. 1926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서 『아희생활』(아이생활)을 창간할 때 11월호(제1권 제9호)부터 1938년(제13권 제3호)까지 편집인을 맡았다. 그의 친일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256~289쪽)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아동문학 관련 비평문으로 「본지 창간 일굽 돌을 맞으며」(『아이생활』, 1933년 3월호), 「(社說)십년 전을 돌아보노라(본지 창간 정신의 재인식)」(『아이생활』, 1936년 3월호), 「본지 창간 십일주년을 맞으면서」(『아이생활』, 1937년 3월호) 등이 있다. 최봉칙(崔鳳則)이 쓴 「정인과론(鄭仁果論)」(『사해공론』 제2권 제6호, 1936년 6월호)을 참고할 수 있다.
199쪽, 257쪽: 조종현 필명 추가
조종현(趙宗泫: 1906~1989) 시조시인, 승려. 본명 조용제(趙龍濟), 법명 종현(宗泫), 법호 철운(鐵雲), 벽로(碧路), 예암산인(猊巖山人), 당호(堂號) 여시산방(如是山房), 필명 조종현(趙宗玄, 趙鍾現, 趙宗炫), 조탄향(趙灘鄕, 趙彈響, 灘鄕, 彈響), 석범(石帆), 조혈해(趙血海). 전라남도 고흥(高興) 출생. 1922년 17세 때 선암사(仙
조종현(趙宗泫) | 본명 趙龍濟. 鐵雲, 碧路, 猊巖山人, 如是山房. 趙宗玄(趙鍾現, 趙宗炫), 趙灘鄕(趙彈響), 石帆, 趙血海 | 全南 高興, 새틀團(새틀社) |
204쪽, 258쪽: 진장섭 필명 추가
진장섭(秦長燮: 1904~1975) 아동문학가. 필명 학포(學圃), 금성(金星), 고송(孤松). 경기도 개성(開城) 출생. 1916년 개성제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개성간이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의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 2학년에 편입하였다.
진장섭(秦長燮) | 學圃, 金星, 孤松 | 京畿道 開城, 색동회 회원 |
212쪽: 글자 수정
최영택(崔永澤: 1896~?) 필명 노경(老耕, 崔老耕, 老耕生), C生, 아현동생(阿峴洞生). 경성(京城) 출생. 최연택(崔演澤)은 그의 형이며, 최호동(崔湖東)은 동생이다. 아현태극학교를 졸업하였고, 이후 상급학교 진학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기독교
217쪽: 한상진 항 내용 추가
한상진(韓相震: ?~?) 아동문학가. 필명 설봉(雪峰), 한탄영(韓灘影). 전라북도 이리(裡里: 현 益山市) 출생. 이리공립보통학교(裡里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1931년 ‘裡里 韓相震’의 이름으로 「동무소식」(『매일신보』, 1931.3.24)에 여러 동무들의 투고를 요청하면서 ‘全羅北道 益山郡 益山面 裡里新町 四六一番地 韓吉洙 氏에게’라 하였는데 이를 통해 주소를 가늠할 수 있다. 1936년 3월 발간된 『아동문예(兒童文藝)』의 주간을 맡았다. 1936년 12월경 종전의 <조선소년총연맹>, <경기도소년연맹>, <경성소년연맹> 등 3 단체를 해체하고 <조선아동애호연맹>을 발기하고자 창립준비위원회를 발족한 바 김상덕(金相德), 정세진(丁世鎭), 김영진(金英鎭), 박동일(朴東一) 등과 함께 한상진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창립준비위원은 진장섭(秦長燮), 김태오(金泰午), 이정호(李定鎬), 정홍교(丁洪敎), 남기훈(南基薰), 홍순익(洪淳翼), 고장환(高長煥) 등이었다.
217쪽: 한석원 항 수정
한석원(韓錫源: 1894~?) 목사. 필명 큰샘(큰ᄉᆡᆷ), 창씨명 西原錫源. 평안남도 평양(平壤) 출생. 일본에 유학하여 고베 간사이학원(神戶關西學院)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정동교회(貞洞敎會)에서 예배를 보았고, 1920년 피어선기념성경학원(皮漁善紀念聖經學院) 원감으로 재직하다가 <조선주일학교연합회(朝鮮主日學校聯合會)> 대표자로 피선되었다. 세계주일학교 시찰단 환영위원회의 총무부장을 맡았다. 1920년 12월 아동문학 잡지 『새동무』(활문사 서점)를 발간하였다. 1921년 이상재(李商在), 안국선(安國善) 등과 함께 <조선아동보호회(朝鮮兒童保護會)>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제1회 조선주일학교대회를 개최함에 있어 총 간사로 행사를 총괄하였다. 1928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조선 대표로 출국하였다가 바로 휴런대학(Huron College)에서 유학하였다. 1926년 『아이생활』 창간호부터 편집인을 맡았는데, 이후 정인과(鄭仁果)를 거쳐, 1940년 11월호(제15권 제9호)부터 폐간 때까지 편집인을 맡았다. 1941년 장로교중앙위원회 석상에서 정춘수(鄭春洙), 정인과(鄭仁果) 등과 함께 교회 기금 및 종(鐘) 용해 수익금 등을 가지고 일본군에 비행기 2대, 전투기용 기관총 7대, 군용 자동차 2대 등을 헌납하고, 신자들로부터 유기그릇 2천여 점을 징수하여 일제에 헌납하였다. 이러한 친일 행위로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特委)에 기소되었다. ◤아동문학 관련 비평문으로 「『아희생활』의 출세」(『아희생활』 창간호, 1926년 3월호), 「본지 역대 주간의 회술기(懷述記)」(韓錫源 외; 『아이생활』, 1936년 3월호)를 발표하였다. ◤저서로 동화 『눈ᄭᅩᆺ』(눈꽃)(새동무사, 1920), 『종교계 제명사 강연집(宗敎界 諸名士講演集)』(활문사서점, 1922), 『(최근)주일학교론』(Athearn, W. A. 著, 韓錫源 譯; 조선야소교서회, 1922), 『(音譜附 脚本)소년소녀가극집(少年少女歌劇集)(제1집)』(영창서관, 1923; 제2집, 영창서관, 1924), 『(표정유희유치원)노래』(영창서관, 1928)가 있다.
222쪽: 현동염 항 문장 수정
현동염(玄東炎: ?~?) 아동문학가, 소년운동가. 필명 현동염(玄東廉, 玄東濂, 東炎, 蝀艶, 憧灔). 경기도 개성(開城) 출생. 1927년 10월 개성 <소년문예사(少年文藝社)> 임원으로 동화음악대회를 개최하였고 출판부와 선전부 임원을 맡았다. 1928년 4월 19일 <소년문예사> 제1회 정기총회에서는 조직부 임원을 맡았다. (중략) 1936년 7월 개성 <고려청년회(高麗靑年會)> 주최 제3회 전조선단체정구대회에 대회 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고, 1939년 4월 개성 시민운동회에도 대회 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40년 <고려청년회>에서 개최한 제21회 전개성시민대운동회에도 대회 임원으로 참여하였다.
233쪽: 김갑연 추가
금철(琴澈) | 琴徹 | 京畿道 江華 |
김갑연(金甲淵) | 慶北 金泉 | |
김경묵(金敬黙) | 창씨명 金城景黙 | 咸南 德源→咸興 |
240쪽: 박대영 항 수정
박달성(朴達成) | 春坡, 茄子峰人, P(生), TS생, ㄷㅅ생(生), 대갈생, 도호 夢菴 | 平北 泰川 |
박대영(朴大永) | 朴對映 | 慶南 南海, 南海흰벗사, 새힘사 |
박덕순(朴德順) | 咸北 城津 |
245쪽: 양가빈 항 삭제 (양춘석 항 참조)
안회남(安懷南) | 본명 安必承 | 京城, 安國善의 아들 |
양건식(梁建植) | 梁白華(白華), 菊如 | 京畿道 楊州 |
245쪽: 양춘석 항 수정, 내용 추가
양준화(楊浚華) | 平北 寧邊→江界 | |
양춘석(梁春錫) | 梁春夕(春夕), 봄저녁, 梁佳彬, 梁天, 申哲, 南宮滿 | 平南 平壤, 童謠詩人社 |
엄달호(嚴達鎬) | 京城 |
247쪽: 오세창, 오영수 항 수정
오성덕(吳聖德) | ||
오세창(吳世昌) | 京畿道 高陽, 글붓社 | |
오영수(吳永壽) | 月洲, 蘭溪, 吳波枕, 吳夕帆(夕帆生), 麥浪生(麥浪兒), 오유섭 | 慶南 蔚山 |
247쪽: 오파침 항 삭제
오파침(吳波枕) | 慶南 彦陽 |
250쪽 : '이상대' 항 수정
이상대(李尙大) | 본명 李喜錫. 白泉, 흰뫼(힌뫼), 禹範, 姜相大 | 慶南 咸安, 신소년사 |
253쪽: 이학인 항 내용 추가 수정
이학인(李學仁) | 牛耳洞人, 李城路, 李南園, 첫소리, 李小流 | 平北 泰川→京城, 별나라 동인 |
253쪽: 이해월 추가
이해문(李海文) | 李孤山(孤山生, 李苦山, 리고산), 金烏山人, 夢星 | 忠南 禮山 |
이해월(李海月) | 咸南 咸興 | |
이향술(李鄕述) | 啄木鳥 | 咸南 安邊, 新高山→京城 |
262쪽: 한석원 항 내용 추가
한석(韓晢) | 黃海道 兼二浦(松林) | |
한석원(韓錫源) | 큰샘(큰ᄉᆡᆷ). 창씨명 西原錫源 | 平南 平壤, 『아이생활』 발행인 |
한유일(韓裕馹) | 咸南 咸興 |
331쪽: 문장 수정
체호프(Chekhov, Anton Pavlovich: 1860~1904) 제정 러시아의 소설가, 극작가. 러시아의 남부 타간로크(Taganrog) 출생. 1879년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가족 생계를 위해 단편소설을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하였다. 1884년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체호프에게 1886년 작가 그리고로비치(Grigorovich, Dmitrii Vasil’evich: 1822~1899)가 남작(濫作)으로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는 충고를 담은 편지를 보내자 체호프는 감동을 받았다.
370, 380, 425, 431, 440, 443, 475, 650쪽: 글자 수정
'白鳥省五'를 모두 '白鳥省吾'로 수정
383쪽: '수석'을 '소세키'로 수정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なつめ そうせき: 1867~1916) 소설가, 평론가, 영문학자. 본명 나쓰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 에도(江戶: 현 東京) 출생. 1893년 도쿄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00년 9월 영어교육법 연구를 위해 문부성(文部省)의 지원을 받아 영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1903년 1월에 귀국하여 4월부터 제1고등학교(第一高等學校)와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강사가 되었다. 계속되는 신경쇠약을 완화시키기 위해 첫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를 집필하였다. 처음에 친구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문하의 모임인 <야마카이(山会)>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1905년 1월 하이쿠(俳句) 잡지 『호토토기스(ホトトギス)』에 1회 완결로 발표하였는데 호평이 있어 1906년 8월까지 속편을 연재하였다. 이즈음부터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해 「런던탑(倫敦塔)」, 「도련님(坊っちやん)」을 연달아 발표하여 인기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소세키의 작품은 세속을 잊고 인생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저회취미(低徊趣味)의 요소가 강해, 당시의 주류였던 자연주의와는 대립하는 <여유파(余裕派)>로 불렸다.
414쪽: 일본어 표기 수정: 'の' 추가
槙本楠郞, 「朝鮮の新興童謠」, 『新児童文学理論』, 東宛書房, 1936, 184~191쪽.
517쪽: '대구 소년진명회' 항 내용 수정
대구 소년진명회(大邱少年進明會, 대구소년진명사, 대구진명사)경상북도 대구(大邱). 이학군(李學君), 강우일(康右一), 노영근(盧榮根). 작문 「직공 위안의 일기」(대구소년진명회 삼석(三石); 『아이생활』, 1929년 7월호), 동요 「아참」(대구소년진명회 강우일; 『아희생활』, 1929년 9월호), 「ᄯᅥ나가는 제비」(대구소년진명회 강우일; 『아희생활』, 1929년 11월호), 「농촌의 새 훈는 노래」(大邱少年進明會 盧榮根; 『아희생활』, 1929년 11월호, 27쪽), 「거지 동무」(대구소년진명회 강우일; 『아희생활』, 1929년 12월호), 「나의 슬픔」(대구소년진명사 노삼석; 『아희생활』, 1930년 1월호), 「나물 캐는 노래」(대구진명사 이학군; 『아희생활』, 1930년 6월호), 「3월 소낙비」(대구진명사 노삼석; 『아희생활』, 1930년 6월호), 「팔녀 가는 송아지」(삼석 노영근; 『아이생활』, 1931년 3월호) 등. 삼석(三石)은 노영근의 필명이다.
525쪽: '색동회' 항 한자 수정
색동회일본 도쿄(東京)→경성(京城). 창립준비회에 참가한 사람은 방정환(方定煥), 강영호(姜英鎬), 손진태(孫晉泰), 고한승(高漢承), 정순철(鄭順哲), 조준기(趙俊基), 진장섭(秦長燮), 정병기(丁炳基) 등 8명이었고, 그 뒤 윤극영(尹克榮), 조재호(曹在浩), 최진순(崔瑨淳), 마해송(馬海松), 정인섭(鄭寅燮), 이헌구(李軒求), 윤석중(尹石重) 등이 참여하였다.
529쪽: '신의주 프롤레타리아아동문학연구회' 내용 수정
신의주 프롤레타리아 아동문학연구회(조선 프롤레타리아아동문학연구회) 평안북도 신의주(新義州). 1933년 1월 신의주에서 김우철(金友哲), 안용만(安龍灣), 이원우(李園友) 등이 조직하였으나, 1934년 12월에 해산되었다.
◀ “<조선프로레타리아아동문학연구회>는 1933년 1월 달에 조직되였는데 2년 후인 1934년 12월 달에 일제 경찰에게 강제 해산을 당하였다.”(송영, 『해방전의 조선 아동문학』, 교육도서출판사, 1956, 76쪽)
612쪽: 글자 수정
∙정홍교(丁洪敎), 「(일인일문)어린이가 울고 웃음이 조선의 울고 웃음−크나 적으나 단합하라」, 『조선일보』, 19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