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순흥안씨 족보는 1546년(명종원년)인 병오년에 처음 만들어져 벌년의 역사를 가진 명문가로서 그간 대동보와 각파보 등을 수십 차례에 걸쳐 하였다.
840여 년 전 시조공이 순흥안씨를 창관한 이래 순흥안씨의 자손은 500이 넘는 대성으로 성장하였으니 인구수 순위로는 1위 김해김씨, 2위 밀양박씨 전주이씨에 이어 경주김씨, 경주이씨, 경주최씨, 진주강씨, 광산김씨, 파평윤주한씨, 안동권씨, 안동장씨, 김녕김씨, 평산신씨에 이어 15위를 차지하며 뒤이어는 동래정씨, 달성서씨, 안동김씨(구), 해주오씨, 전주최씨이다.
1) 병오보(丙午譜)
1546년(명종 원년 병오) 겨울에 대구 선화당(정무를 보는 곳)에서 간행된 최초의 족보이다. 문성공의 후손인 14세 휘 현(玹)께서 종인(宗人)을 널리 만나고 찾서 지파(支派)와 세대(世代)를 알아 가보를 만들었는데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후 큰 댁의 휘 정(珽)께서 만든 보첩과 2파의 문의공(文懿公) 후손인 13세 휘 승종께서 가지고 있는 구보를 얻어서 이 셋을 종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가보니 보첩이니 구보니 다른 용어를 썼지만 서문상의 용어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고 내용은 가보였을 것이다. 하나로 만든 것을 휘 승종(承宗)이 대조하고 수정한 후 안동부사로 있는 성근(成謹)(1파 9세 휘 종약의 외손)에게 부탁해서 판각했고 글씨는 김해의 박영근이 썼다. 이 일에는 특히 병사 김순고 외에 25명의 지방관리가 협조하였으니 이들은 안씨의 외손이었다.
병오보에는 2세에 휘 영유(永儒), 영린(永麟)이 있으나 3파조 휘 영화(永和)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 '문성공 족자(族子) 석(碩)'으로 시작된다. 따라서 「석(碩)」자(5세) 할아버지 이상의 대는 다 누락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이유는 족보간행사업에 3파에서 참여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죽계세보(竹溪世譜)라 하여 3권으로 이루어졌는데 문성공 자손이 제1권이고, 검교공(2파 4세 휘 성철) 자손이 제2권이며 급제공(3파의 5세 휘석) 자손이 제3권이었다. 3대파의 명칭을 위와 같이 부른 것은 상대에서 1파는 4세 문성공이 너무도 유명했고, 2파에서는 4세 휘 성철께서 검교군기감의 실제 벼슬을 받은 분으로 아들을 셋이나 두었고, 3파는 5세 석께서 과거에 급제한 까닭에 누구의 후손인가를 명예롭게 여기는 당시의 관습에 따른 것이라 짐작된다.
2) 기해보(己亥譜)
최초로 병오보가 나온 지 114년이 지난 1659년(효종 10)에 경상북도 의성에서 간행된 것이다.
1파 참판공파의 18세 순원군 휘 응창(應昌)이 주관하였다. 순원군은 1603년(선조 36, 계묘)에 나시어 1680년(숙종 6, 경신)에 졸하셨는데 1636년에 문성공묘지(文成公 墓誌)를 지었고 1639년 문성공 신도비를 다시 세웠으며, 1643년에 안씨보유록을 간행하였고, 1654년(효종5, 갑오)에 사단을 설치하고 1656년에 의성현령의 벼슬에 있으면서 향려비(鄕閻碑)를 세우고 또 사현정비를 다시 세우는 등 종사에 큰 공적을 남기신 분이다.
순원군은 조부가 되시는 순계군 휘 세복(世復)께서 병오보 이후에 생긴 3개파의 후손들을 기록한 수권의 자료를 가지고 있었는데 1624년 병자호란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애석한 나머지 선조의 뜻을 이루고자 서울과 지방의 보계를 수집하여 적었다. 의성현령으로 있으면서 이 기록을 3파의 좨주공파 17세 휘 홍정과 1파의 17세 세형 (1608~1664)과 세형의 조카 18세 만규, 만규와 그들의 4촌인 만정과 2의 충정공파 17세 도징, 선징 형제(이들은 6형제로 문행이 높아 6룡이라 했다)를 불러서 세계를 연구하고 증거를 찾아 확실을 기하여 3개파의 족보를 만들었다. 죽계세보(竹溪世譜)라 하여 모두 6권이었다. 체제와 방법이 병오보를 따른 듯하며 문헌록은 없으며 이때도 외손들의 협력이 있었다.
3) 을유보(乙酉譜)와 정사보(丁巳譜)
기해보(己亥譜)가 나온 후 106년만인 1765년(영조 41)에 간행된 족보가 을유보(乙酉譜)이다. 1762년 1파 찬성공파의 승지공 대제(大濟)씨가 같은 파의 현감공 우제(羽濟)씨와 더불어 일을 시작하여 종로(宗老)인 필관(必觀)씨를 청하여 같이 검토하고 분별하여 4년에 걸려 죽계세보(竹溪世譜) 14권을 만들었다. 3개파가 같이 일하고 각각 만든 것이다. 이 책은 원보(原譜)와 부록과 별집이 있는데 증거가 확실하면 원보에 싣고 증거가 확실치 않으면 비록 병오, 기해보에 실렸다 하더라도 별집에 수록하였고 원보를 판각하기 시작한 후에 수단이 도착하였으면 부득이 부록에 추가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문헌을 통한 고증이 자세하고 취사(取)가 엄정하였다.
을유보는 수단(單)에 의해서 만든 최초의 족보이며 병오 · 을해보가 영남에서 간행된 것과는 달리 한양에서 이루어진 점에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정사보는 을유보 후 32년인 1797년(정조 21) 에 나왔으며 일명 병진보(丙辰譜)라 한다. 이제 간행 간격이 100여 년에서 1세대 간격으로 좁혀졌다. 을유보 때 수단을 늦게 내어 부록에 실린 사람이 많아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우제씨는 이를 고민하였고 후인이 다시 만들어 이분들이 원보에 실리기를 원하고 있었다. 또, 을유보 후에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순흥안씨보유록에 붙여서 족보를 만드는 자가 있는가 하면 몰래 여기저기서 이름도 알 수 없는 자가 보청(廳)을 설치하고 수단(單)을 거두는 일이 있어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지 못할 우려가 커졌다. 이에 성뢰씨가 주동이 되어 수보(修譜)를 시작하였다. 성뢰씨는 보소를 딴 곳으로 옮겨 괴뢰들의 요구를 물리쳤다 하니 얼마나 시달림을 받았는가 짐직할 수 있으며, 넣고 빼는 데 얼마나 엄정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널리 문적(蹟)을 찾아내고 도마다 유사(有司)를 두고 파마다 임원을 정하였다 서울은 주빈씨와 정익씨가 맡고, 경기도는 경기씨가 맡고 관동은 도영씨와 처택씨가 맡고, 호서는 좌도를 영로씨가, 우도를 성겸씨가 맡고, 영남의 좌도는 관향의 종인 협기씨가, 우도는 3파의 후손 치권씨가 맡았다. 호남은 우도를 2파의 언국씨가, 좌도는 발문을 쓴 사제공의 이손(현손의 증손)으로 남원에 사는 후(珝)씨가 맡고 해서는 동쪽을 정제씨가 맡고 서쪽은 형씨가 맡았다.
또, 보첩에 올리거나 빼는 일과 수정하는 일은 여러 이론이 있을 수 있는 중대사로 성뢰씨 스스로 독단하기는 어렵다 하여 별도로 배천의 서제씨에게 맡기고 충주에 사는 영로씨가 근재선생(문정공)의 후손으로 각파의 내력을 잘 앎으로 함께 참여하여 대조케 하였다. 이 밖에 순흥의 필성씨, 문경의 성로씨, 해주의 이행씨, 원주의 상환씨도 유사로 활약하였다. 영로씨는 문숙공파 사촌공 후손으로 22세이며 1736년에 나시어 1799년에 졸하셨는데 부자분이 순흥에 거주하는 등 관향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분이다.
정사보(丁巳譜)는 3개파가 동역(同役)하여 합보한 것으로 19권이며 한양에서 나왔고 기구를 조직화하고 엄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흔적이 뚜렷하다.
4) 파보 발간과 빈번한 속보(續譜)
갑신보(甲申譜)는 1824년(순조 23)에 이루어진 파보다. 1823년 관향 종인들의 제창으로 수보의 종의가 모아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의견이 갈렸다. 1. 2․ 3파가 다수록된 합보로 하자는 의견과 범위가 넓고 많으면 난잡하게 되니 파보로 하자는 의견이었다. 1파의 최량씨는 후자의 의견에 따랐고, 3파는 기명씨가 합보의 효잡(뒤섞임)을 고려하여 파보에 동의했고 2파에서는 빠지고 말았다. 1파에서는 배천, 해주의 종인이 또 갈라져 집의절도공(執義節度公) 자손이 별도로 파보를 만들었다.
어떻든 1파에서는 최량(最良)씨가 보소가 너무 멀고 궁벽하여 성사가 어려울까 염려하여 가져다가 일을 하였다. 모두 16권인데 원보가 9권이고 속집과 부록과 별록이 각 2권씩이며 또 총서가 1권이었다. 총서는 문성공의 전과 상과 묘비와 묘지문과 문순공 이하의 유적을 수록하였다. 처음으로 총록편이 나오게 되었다.
3파에서는 문숙공파 충의공(휘 우익) 후손 22세 파주목사 성연씨 (1776~1834)와 같은 후손 22세 승사랑 기명씨 (1775~1841)와 사촌공 후손 21세 환씨(호 용담 1779~1844)가 주관하여 경기도 용인에서 12개월만에 완성하였는데 총 8권으로 자손록이 6권이고 사적과 총록이 2권이었다. 자손록 끝에는 추록이 39매, 별록이 4매 붙어 있다. 서문이 다음해 을유년 봄에 된 것으로 보아 실제는 을유년에 간행되고 1파와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갑신보라 한 듯하다.
파보의 시초로 세대는 멀리 이어지고 자손은 가지와 같이 번성하여정명하지 못했던 폐단을 보완하고 판단에 근엄하고 자상할 수 있었다. 또, 전보다 총록이 있기는 했지만 이번 파보로 총록다운 문헌록이 되어 선조와 방친(親)의맑은 덕과 아름다운 행(行)를 널리 찾아 실었다.
경인보(庚寅譜)는 1830년(순조 30)에 나온 합보이다. 갑신보가 파보인 데다 2파는 빠졌고 1파는 또 둘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순흥과 김제의 종인들이 합보를 게창하고 원근에서 같은 의견들이 나왔다. 이리하여 1파 갑신보에 서문을 쓴 찬성공 후손 23세 재묵(형조정랑)씨가 맡아서 만들었다. 1파에서 나온 두 족보와 3파의 촉보를 모아 1질로 만든 것으로 24개월이 지나 갑신보- 불과 6년인 1830년에 간행되었다. 합보라는 명분을 찾았을 뿐 자손록에는 별다른 변동이 없었을 것이다. 모두13편이었으며 총록 2편과 고증록 반편을 책머리에 붙였다. 고증록을 만든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다.
병신보(丙申譜)가 1836년 우량씨에 의해서었으나 대보라 할 수 없었고, 1865년 을축보(乙丑譜)를 기양씨가 황해도 배천에 보소를 설치하고 해주의 익묵, 순흥의 의순, 옥천의 석구, 춘천의 대형, 양주의 정과 함께 15권을 간행하였으나 이것 역시 대보는 아니었다.
무진보(戊辰譜)는 1868년에 나왔으니 경인합보(庚寅譜)로 부터 38년이 지난 후였다. 족보를 만들자는 의론이 6, 7년 전부터 있어 1864년 기영씨 집에 보소를차렸으나 승정원 벼슬을 하고 있어 시간이 없으므로 정언으로 있는 문간공(휘 현)후손 재린씨 집으로 옮겨서 문성공 19세손 좌형씨의 회양공 사손 용호씨, 첨추공후손 재억씨와 더불어 일을 보았다. 이러는 중에 기영씨가 자산부사로 나가고 재린씨도 뒤이어 외직으로 나감으로 휘일씨와 호중씨 협력하였다. 삼대파를 분류하여완성하니 모두 18권이었다.
불과 6년만인 1874년에 또 족보가 나오니 갑술보(甲戌譜)이다. 경인보(庚寅譜)부터 갑술(甲戌譜)까지는 너무 빈번하게 수보가 이루어졌다. 이유야 다 있겠으나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번 갑술보는 관향지인 순흥 영모암에서 만든다는것에 의의를 두고 있었다. 집의공의 후손 병상씨와 성연씨가 앞장서고 도경 창열씨가 협력하여 21권을 간행하였다. 앞서 만든 무진보(戊辰譜)의 중간(重刊), 속간(續刊)이라 할 수 있겠다.
5) 파보의 전성기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파보가 성행하였으니 종족의 번연(衍: 자손이 많이 퍼짐)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그 수 또한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니 자연스러운 추세였다.우리는 순흥을 본고장으로 하고 12세기에서 창관된 성씨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초에 걸쳐 명유현상(名儒賢相)이 배출되어 6대성의 하나로 꼽혔고, 6대성 중에서도 갑을(甲乙)의 지칭을 받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서 개성에 많이 거주했고 또 한양으로 옮겨 살았으며 서울 근방으로 퍼져나갔다. 다시 동서남북 각지로 세는 뻗어 나가서 오히려 관향지 순흥보다 더 큰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1930년 왜정하 총독부에서 실시한 국세조사에 의하면 순흥안씨의 40호 내외 이상의 집성촌이 48촌이 되었고, 남으로는 경남 함안군에 300호, 북으로는 멀리 평남 신안주 일대에 268호나 되었다.
파보의 전성기를 이루면서 1900년 경자보(庚子譜)를 비롯하여 1981년 경신보(庚申譜)까지 6회에 수보(修譜)가 있었고, 2파는 1926년 병인보(丙寅譜)와 1981년경신보(庚申譜)가 있었고, 3파는 1903년 계묘보(癸卯譜)부터 1979년 기미보(己未譜) 1996년 현대화한 병자보(丙子譜)까지 5회의 수보가 있는 셈이다.
6) 전자족보의 발간
1546년 병오보를 처음으로 수십 차례 대동보와 파보 등이 발간되었다. 그러나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디지털정보가 생활화되면서 과거처럼 족보책을 찾아야만 뿌리를 알 수 있는 시대가 아닌 영상공간에서 컴퓨터를 비롯한 다양한 미디어에서 족보를 알 수 있는 사이버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에 대종회와 각 파종회는 홈페이지 구축사업을 완성하면서 동시에 족보의 전산화사업을 추진하였다. 가장 먼저 3파종회가 인터넷족보사업을 2005년 완성하여 자손록과 족보책을 전산화하였다. 이에 따라 자손록 이름을 클릭하면 계보도가 나타나고 계보 이름을 클릭하면 자손록이 나타나며 연중 수시 수단을 접수받아 검증을 거쳐 입력함으로써 본격적인 전자족보시대를 열며 종사업무전반의 디지털화와 인터넷화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