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투명한 유리창을 관통하는 태양빛이 작열한다. 건물 3층과도 맞먹는 나무가 우람한 초록빛의 덩치를 자랑한다. 그 안에 숨어있을 매미들이 맴맴 시끄럽게도 운다. 무료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교실을 가득 채우는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긴다. 너무 덥다. 너무 더워. 배경은 한여름. 책상에 지친 몸을 엎드리는데. 팔을 벤 얼굴 위로 시원한 감촉이 느껴진다.
"짠!"
"뭐야. 어디 갔다 왔어?"
"매점! 이건 백현이꺼!"
"더울텐데 그냥 있지 뭘..."
"어라. 되게 정 없게 굴어. 조금 서운하네."
"서운해?"
"응."
피실. 힘없는 웃음이 빠져나온다. 더위에 정신을 못 차리는 몸을 일으킨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자연스레 옆자리에 위치한 의자를 빼 몸을 앉힌 네가 캔 음료수를 따며 손에 쥐여준다.
"애정아."
"응?"
"안 더워?"
"음... 별로. 나 더위 잘 안 타잖아."
7월의 초입.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뜨듯미지근한 날씨. 19도까지 내려간 에어컨 속에서도. 덥다며 하복을 펄럭거리는 모습이 익숙한데. 그 익숙함 속에서 너는 춘추복을 고집했다. 다들 한 뼘씩 접어올리는 셔츠의 밑단을. 너는 그대로 두었다. 셔츠의 소매가 엄지손가락의 반까지 내려와 덮는다. 더위를 잘 타지 않는다며 어깨를 으쓱이는 너를 한번 본다. 뽀송뽀송한 얼굴을 매만진다.
"...만지지마."
"왜."
"그냥..."
"부끄럼 타네."
"..참나. 아니거든?"
땀에 젖지 않아 살랑살랑 흔들리는 앞머리를 한번 톡 건든다. 눈썹을 적절히 가리는 앞머리가 딱 너다웠다. 와이셔츠의 깃을 살짝 가릴 정도의 어깨 바로 위를 오가는 중단발도. 모든 게 너다웠다.
"애정아."
"응?"
"...."
"응? 응?"
큰 눈을 꿈벅거리며 얼굴을 들이민다. 그 눈도. 코도. 입도. 다른 아이들과 차별화된 네가. 너의 그 이름도. 다 너다웠다. 개구장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 한 번의 부름에 기필코 대답을 얻어내겠다는 듯이. 여러번 말을 붙여오는 그 모습도.
"그냥."
"헐. 음료수 바뀌었다."
"뭐가?"
내 손에 쥐여진 음료수. 네가 좋아하는 복숭아맛의 이온음료였다. 그리고 네 손에 쥐여진 음료수는 내가 즐겨 마시던 제로사이다였다. 아... 눈꼬리를 잉잉 내린 네가 입술을 댓발 내민다. 네 손에 쥐여진 음료수를 채가 이미 내가 한 모금 마신 음료를 바꿔 작은 손에 다시 쥐여준다. 따지 않은 새것의 사이다캔을 따서 아무렇지 않게 목을 축인다.
"...뭐야! 왜 내꺼 가져가!"
"원래 이게 내꺼 아니야?"
"...맞긴한데.."
"한 모금밖에 안 먹었어. 거의 새거야."
"...아니..."
힐끔힐끔. 볼에 바람을 넣고 열심히 눈동자를 움직인다. 한 모금밖에 사라지지 않아 무겁게 찰랑이는 캔을 든다. 이거 다 마시지도 못할걸. 무언가를 말하기 망설이는 듯 입을 달싹이는 너를 본다. 뚱뚱한 캔을 두 손으로 야무지게 잡은 네가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른다. 그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깨닫는다. 아.
"왜. 내가 입 댄건 먹기 싫어?"
"...아니!"
"그럼 좋아?"
"...아.."
서로의 체온이 간접적으로 닿는다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볼이 붉어진 네가 어쩔 줄 몰라한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손에 쥐여진 이온음료를 입에 털어넣는다. 액체가 묻은 입술이 번들거린다.
"잘 먹으면서."
"...."
손을 들어 너의 입술을 닦아준다.
"...."
"이제 앞으로 같이 먹을 수 있겠다."
두 볼이 터질듯 빨개진 네가 다급히 몸을 일으킨다. 의자가 드르륵 끌린다. 교제를 시작한지 1년이 넘어갔지만. 너는 아직 모든 게 처음인마냥 부끄러워했다. 그런 너의 순수함마저도 너다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안절부절 못하는 너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고 다시 자리에 앉힌다. 힘을 주지 않아 쉽게 몸을 낮춘 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다.
"애정아."
"...."
"좋아해. 오늘도."
"...."
1년이 지났지만. 항상 처음 그 고백을 듣는것처럼. 너의 두 귀는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어쩌면 그 모습이 귀여워서 더 짖궃게 행동하는 것도 이유에 있었다.
너를 만난지 1년. 18살의 한여름. 7월의 초입. 입하.
우리는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다.
"오늘 체육 운동장!"
"...아."
불호령과도 같은 그 말에 주위에서 아아 하는 불만이 쏟아진다. 더워 죽겠는데 무슨 운동장이야. 체육은 강당 냅두고 뭐하는 거래? 가볍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없앤 아이들이 툴툴거리며 체육복을 든다. 옷 갈아입기도 귀찮은데. 남자애들아 빨리 나가라! 앙칼진 여학생들의 소리가 울려퍼진다. 체육복을 들고 교실 뒷문을 나서려는 찰나. 멀뚱멀뚱 자리에 앉아있는 너를 발견한다.
"옷 안 갈아입어?"
"응? 아.. 나 체육복 놓고와서..."
"내 꺼 입어."
"어? 아냐아냐! 나 괜찮아!"
"...."
"얼른 갈아입구 와."
"...."
"아프다고 빠지면 되니까. 얼른."
"...알았어."
배가 볼록 튀어나와 항상 나무막대기를 들고 다니던 체육은 체육복에 대한 강박이 심했다. 항상 들고 다니는 그 단단한 막대로 엉덩이를 때리거나. 여학생들에게는 운동장을 몇 바퀴씩이나 돌게 했다. 그걸 잘 알아서 네가 걱정이 되었다. 자신은 괜찮다며. 어차피 아프다고 빠질 생각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유순한 미소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뗀다. 한여름의 운동장은 태양빛에 반사되어 곱게 잘게지지 못한 돌멩이가 반짝거린다.
"체육복 안 챙겨 온 놈들은 싹다 열외. 주애정이는 오늘 아프다 했나?"
"...네."
"넌 저기 스탠드에 가 쉬어."
"...감사합니다. 선생님."
티나지 않게 말려올라가는 입꼬리에 숨겨 넣은 너의 두 볼이 작게 부푼다. 선생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는 교복치마를 두 손으로 야무지게 쥔다. 종종거리며 스탠드로 멀어져가는 두 발이 멈칫. 뒤를 돈다. 두 눈이 마주친다. 마주친 두 눈이 화사하게 접힌다. 거봐. 내가 괜찮다고 했지? 그렇게 말해오는 것 같았다.
'얼른 가. 들키겠다.'
입모양으로 살금살금 말한다. 고개를 끄덕이던 네가 다시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다가 또 멈칫. 다시 뒤를 돈다. 빨리 가라니까. 내 입모양을 확인한 네가 아까와는 다르게 쉽게 등을 돌리지 않는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니. 입 사이로 앙증맞은 혀를 빼꼼 내민다. 메-롱. 웃음이 터진다. 뭐하냐 애정아.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바람을 넣은 네가 꾹꾹. 웃음을 참는다. 허. 헛웃음을 터트리기 무섭게 옆에서 불리는 이름에 고개를 돌린다.
"뭐야. 7반도 체육이야?"
"축구 한 판 내기나 할래?"
"이기지도 못할 거 나대지 마라."
"와. 변백현 깡 봐라. 한번 붙던가."
수업이 겹쳤는지. 다가온 도경수와 오세훈이 축구공을 튕긴다. 됐어. 더운데 무슨.
"주애정한테 음료수나 사달라고 하던가."
"뭘 그런 걸 시켜."
"여자친구가 그런것도 안 사다주냐?"
"이미 아까 사다줬어."
"...와. 하여간 커플놈들은 싹 다 사라져야 돼."
괜히 이간질을 시도하려는 오세훈의 목소리에 여유롭게 웃으며 맞받아친다. 혼자 흥분한 녀석이 방방 뛰며 내기를 계속해서 제안한다. 한번 붙자고. 어? 그 모습을 말린 건, 나도 아닌 옆에서 한심하게 지켜보고 있던 도경수였다.
"애새끼야? 그만 찡찡대. 안 그래도 더운데 무슨 축구야."
"진짜 서럽다 서러워. 5반 우정 어디갔냐?"
"개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유치한 놈. 무시하고 갈길 가니 그제야 입 싹 닫고 졸졸 쫓아오는 오세훈이다. 몇 일 뒤에 농구로 수행평가 점수를 매길 예정이니 자유롭게 연습이나 하라는 체육의 말에 많은 아이들이 자리를 이탈한다. 그냥 자유시간이네. 매점이나 갈래? 아니 그냥 쉬자. 곳곳에서 소음이 들려온다. 그들을 따라 자연스레 자리를 이탈한다. 도착한 곳은 너의 옆자리. 그늘이 잘 진 스탠드였다. 뒤쫓아 온 녀석들의 소음이 시끄럽게 울린다.
"혼자 안 심심했어?"
"별로. 어차피 혼자 많이 있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주애정은 지금 혼자 있고 싶다고?"
장난스런 오세훈의 말이 틱틱거린다. ...그런 거 아니거든! 놈들에게 몇 번을 속으면서도. 순수한 너는 또 한번 속아넘어간다. 조그맣게 주먹을 쥔 손이 오세훈의 팔을 약하게 내려친다. 아, 아. 아프다. 괜히 아픈 척 하는 얼굴에 또 놀란 네가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다. 손을 들어 그런 너의 머리를 쓰다듬어 정리해준다.
"사과하지마 애정아."
"뭐?"
"와 변백현. 내가 아프다는데 넌 뭐냐? 어?"
"아프지도 않잖아."
"그거 아프면 세상 어떻게 살아가냐."
마무리를 짓는 도경수의 말에 오세훈이 됐다, 됐어. 하면서 털썩 앉아온다. 초록빛의 푸른 잎들에 그늘이 길게 진다. 그 아래서 자연스레 대화가 오고간다. 그 사이로 말장난이 수시로 던져진다. 그 모든 중심은 너였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했으며, 놈들에게는 소중하다기에도 입 아픈 친구였다. 남청색의 하복 체육복을 입은 사이로 와이셔츠 교복을 입은 너는 단연 눈에 띄었다.
"근데 주애정 안 더워?"
"응? 안 덥다니까..."
"보는 내가 다 더워서 쓰러질 것 같아."
도경수의 물음에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너였다. 보는 자신이 더 덥다며 손부채질을 하던 오세훈이 너의 손목을 확 잡아당긴다. 아!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네가 탄성을 내지른다. 와이셔츠 소매의 밑단을 꼭 걸어잠군 단추를 풀어헤친 오세훈이 긴 팔을 팔꿈치까지 걷어올린다. 아 하지마! 순간이었다. 그 행동에 놀란 네가 하지말라며 큰 소리를 낸다. 탁! 뿌리쳐진 오세훈의 손이 허공을 맴돈다.
"...야, 너.."
"애정아."
"...."
그 행동에 놀란 것도 잠시. 오세훈의 행동으로 인해 단추가 풀린 소매가 위로 구겨져 올라간 너의 팔이 눈에 들어온다. 그 마른 팔이 시야에 들어오자 너나 할 것 없이 입이 닫힌다. 오세훈도, 도경수도. 너의 이름을 부른다. 애정아. 팔꿈치 아래로 시퍼렇게 멍이 든 너의 팔을 다시 확인한다. 손목을 단단히 부여잡는다. 네가 고개를 푹 숙이곤 웅얼거린다.
"..이거 뭐야."
"...넘어져서.."
"...."
"어제.. 집 나오다가 계단에서 굴러서.. 팔을 좀.. 부딪혔어."
"...."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가 중얼인다. 분위기가 싸해진다. 계단에서 굴렀다는 네 말에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애써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 누구도 너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래도.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 아직까지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너의 뒤통수를 쓰다듬다가. 팔을 끌어당겨 품에 안는다. 고개를 들어 놈들에게 눈빛을 보낸다. 그 뜻을 눈치챘는지. 옅게 한숨을 내쉰 도경수가 한껏 굳어있던 표정을 푼다. 입모양으로 네가 눈치채지 않도록 말을 전한다.
'다친 거 알고 있었어?'
'아니.'
'진짜 계단에서 구른거래?'
'그렇다고 말하잖아.'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번 미간을 구긴 놈들에게 표정을 풀라 경고한다.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조금 있으면 방학이네."
"그러게. 집에 박혀서 안 나와야지."
"그럼 오세훈은 빠지고."
"뭐?"
"애정아. 하고 싶은 거 있어?"
"음..."
곰곰히 입을 삐죽 내밀고 고민하던 네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연다.
"우리 바다 가자!"
"바다?"
"응!"
"바다 좋지."
"나 진짜 빠지라고? 어?"
"아 진짜."
"진짜?"
"귀찮게나 하지마 새끼야 좀."
"아싸."
도경수가 질색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우와. 나 완전 신나!
"1박 2일로 가자. 우리!"
"그래. 다 하자."
아직 방학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신이 났는지. 내 팔을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 입꼬리가 길게 올라간다.
"가서 고기도 먹어줘야지."
"토치랑 불판 대여해가자."
"됐어. 그냥 오세훈이 가져와."
"이럴 때만 필요한 듯이 말하지."
"이럴 때만 필요한 거 맞는데."
두 눈을 질끈 감은 오세훈이 귀를 막는다. 히히. 그저 신난 표정의 너는 그 모습을 보며 좋다고 방긋방긋 웃는다. 그럼 나는 너를 보며 미소를 띄운다. 좋아? 응, 좋아! 나도 좋아. 여름방학이 한 걸음 다가왔다.
"뛰지마 애정아."
"나 바다 처음 와!"
"주애정 신났네."
"완전 초딩같다."
푸른 바다의 탁 트인 절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자신을 향해 무슨 말을 하든지 말든지. 잡은 내 손을 놓은 네가 저 멀리 걸음을 빨리해 멀어져간다. 첨벙이며 모래사장을 적시는 파도의 경계선에 선 네가 발을 꾹꾹 적신다. 그러다가 쪼그려 앉아 반짝이는 모래알을 파서 그 자리에 작은 성을 쌓는다. 쪼그려 앉아 너의 긴 치맛단이 들어오는 바닷물에 조금씩 젖어간다. 조그만한 너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쟤 많이 배고프겠는데."
"아침은 먹었대?"
"아니. 점심도 안 먹었어."
"밥도 안 먹고 저런 힘이 어디서 난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모래사장과 수심이 얕은 바닷가를 배회하던 너는 몇 시간동안 주구장창 물장구를 치면서 놀았다. 목장갑을 끼고 토치를 든 오세훈이 숯을 달구면서 묻는다. 동시에 저녁준비에 한창 열이 오른 도경수는 사온 고기팩을 뜯느라 집중 상태였다. 바닷가 바로 앞에 위치한 펜션에 위치를 잡았다. 그곳에서 내려와 천천히 너에게로 걸음을 옮긴다.
"애정아."
"응?"
"밥 먹어야지."
"벌써?"
"6시가 넘었는데."
"몰랐어."
해가 길어진 한여름의 6시는 아직도 쨍쨍했다. 어차피 준비하려면 시간 좀 걸리니까. 조그만 더 놀면 안돼?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미소를 지으며 너의 옆에 똑같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왜 안 되겠어.
"이것 봐봐 백현아."
"응?"
손가락을 들어올린 네가 모래사장에 너의 이름과 내 이름을 나란히 적어나간다. 주애정. 변백현. 그 위로 출렁이며 다가온 파도가 모래알을 흐트려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작은 손으로 몇 번이나 우리의 이름으로 가득 채운다. 지워지고. 다시 써내고. 그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모래에 쓸리는 너의 손가락이 아플 것 같아 너의 손을 덮어 잡는다.
"왜?"
"아프겠다."
"...안 아픈데."
"그만해."
"...."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을 느끼고 똑같이 눈을 맞춘다.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먼저 내린 네가 잡은 내 손을 푼다. 잡힌 손을 빼내 이번엔 반대로 네 손이 내 손을 덮어잡는다. 내 손을 잡은 네가 손가락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네 손가락을 접게 만든다. 빳빳이 펴진 손가락으로 좀 전 네가 써오던 이름을 이번엔 내 손가락을 이용해 적는다. 작은 손이 잘도 왔다갔다한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애정아."
"응."
"애정아."
"...응."
너는 이름도 왜 애정이야.
글쎄.
애정아.
우리 엄마가 지어줬을 걸.
"네가 그렇게 불러줄 줄 알고 지어주셨나 봐."
"...."
고개를 내리자 내 손으로 써오던 그 이름들도 끝내 휩쓸려온 파도에 모습을 감춘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자꾸 사라지니까 좀 그렇네."
"...."
옅은 미소를 지은 네가 고개를 내려 내 어깨에 기대온다. 모래가 묻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네 턱을 잡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올린다. 눈이 마주친다. 점점 가까워지는 시야 안으로 끝내 맞물린 두 입술이 동시에 호선을 그린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예쁜 주황빛의 석양이 아닌, 쨍쨍한 푸른 하늘이었지만. 그것마저도 모두 너라서 좋았다. 우리의 방학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다들 방학 잘 보내고 왔지? 그런 것 같네. 아주 하얗던 놈들이 다 타서 왔어."
"아 쌤! 아니거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제 방학 끝났으니 또 열심히 공부 해야지?"
"...아아.."
"이제 조금 있으면 더위도 가실 테니까. 남은 2학년 열심히 지내자 7반 아가들아. 응?"
"네에."
다가오는 9월.
"애정아."
"...응."
"졸려?"
"...잠을 못 자서."
2학기의 시작.
"손 시려?"
"..아니. 왜?"
"아까부터 꼼지락거리길래."
"...괜찮아."
끝내 너는 하복을 꺼내입지 않았다.
"무릎에 반창고 뭐야?"
"...어제 버스 타다가 턱에 걸려서.."
"..조심 좀 하지. 어쩌다가,"
"나 괜찮아. 백현아."
방학의 끝.
"애정아."
"..진짜. 진짜 괜찮아."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너는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야 변백현.."
"...."
"...아니지?"
"...."
"..무슨 소리야.. 주애정이 왜..."
그 날은 네가 소년원에 들어가기 일주일 전이었다.
"..왜.."
"...."
"...지 엄마를 왜 죽여.."
너와의 모든 게 끝이었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떴다. 갈아입지 못한 불편한 외출복에서 알코올 향기가 코를 찌른다. 숙취가 오는지 토기가 밀려온다. 말라 따끔거리는 눈을 간신히 들어올린다. 메스꺼운 속을 버티지 못하고 몸뚱아리를 일으킨다. 비척비척 발걸음이 옮겨가는 곳은 화장실 안. 변기커버를 올리고 얼굴을 처박는다. 나올 것도 없으면서 헛구역질을 하는 식도를 타고 투명한 위액을 토해낸다. 불타오르는 느낌의 위장에도. 그저 무시하고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눕힌다.
"...아."
목소리가 갈라져 듣기싫은 쇳소리를 낸다. 뒤지게 아프네. 협탁 위를 울리는 진동이 퍼져 머리 골을 울린다. 눈도 뜨지 않은 채 그 위를 더듬거린다. 간신히 들어올려 통화버튼을 누른다. 아픈 목을 몇 번이고 큼큼거린다. 전화가 수신된 핸드폰을 귀 옆에 대고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뗀다.
"...어."
도경수. 발신인의 이름이었다. 갈라지는 목소리를 어느정도 예상했는지. 수화기 반대편에서 한숨소리가 들린다. 아.
-많이 아파?
"...됐어."
-되긴 개뿔. 죽 사갈테니까 좀 먹어.
"...됐다니까."
-약은.
항상 이 맘때쯤. 눈앞이 핑 돌 정도로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렸다. 온몸이 찢겨지는 고통을. 올해도 다를 거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전날 열심히 위장 안에 알코올을 때려부었다. 안주도 없이 들이킨 대가였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다.
-어차피 지금 집 앞이야. 죽만 주고 갈 테니까 다 먹어라. 그리고...
"...."
-많이 아프면 쉬어.
"...."
-오지 말라고.
"...."
감긴 눈을 한 번 더 질끈 힘을 주어 감는다. 별다른 첨언 없이 통화종료를 누른다. 맥없이 뚝 끊긴 핸드폰을 가차없이 볼에서 떼어낸다. 침대 밖으로 뻗어진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손가락이 벌어지고 쥐어져있던 핸드폰이 툭, 볼품없는 소리를 내면서 땅으로 처박힌다. 밖에서 도어락 소리가 울린다.
"그러니까 어제 왜 술은 처먹어가지고..."
"...."
"야채죽이니까 다 먹어라."
"...."
"아니다. 너 다 먹는 거 보고 갈거야."
"...그냥 가라."
"그냥 가면. 음식물 쓰레기나 만들게?"
쯧쯧. 혀를 찬 도경수가 사들고 온 죽을 한번 더 데핀다. 그릇에 옮겨담아 숟가락과 함께 그것들을 내민다. 받아들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으니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뭐. 이젠 직접 먹여주기까지 해야 돼?"
"...너도 참 지극정성이다."
"알면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
미간을 찌푸리고 낚아채듯 손에 든다. 곱게 갈아진 죽이 목으로 꿀떡꿀떡. 별다른 힘 없이도 매끄럽게 넘어간다. 다만 오래가지 못하고 밀려오는 역함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남은 그릇을 받아든 도경수가 방을 나선다. 뒷정리까지 마무리 하려는지. 부엌에서 식기구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설거지까지 마친 놈이 다시 들어와 짐을 정리하고 약을 챙긴다.
"약 꼭 먹고."
"...어."
"..오세훈은 먼저 갔다 온다고 했어."
"...."
"나 간다."
"...."
그대로 등을 돌린 놈이 집을 나선다. 현관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힌다. 그 소리를 들으며 무거운 눈꺼풀이 같이 닫힌다. 그대로 암전. 눈을 감는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닫힌 눈을 들어올리니 이미 창 밖은 주황빛의 노을이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켜 고개를 이리저리 비튼다. 협탁 위에 올려진 약봉지가 시야에 걸린다.
"...아."
그제야 약을 먹지 않고 잠에 들었다는 걸 눈치챈다. 땅에 발을 딛고 간신히 일어나 약봉지를 뜯어 맨입에 털어넣는다. 그대로 부엌에 들어가 물 한컵을 멈추지 않고 삼켜낸다. 옷소매가 점점 길어지는 날씨. 어느정도 밤에는 찬바람이 부는 9월 중순의 가을이었다. 화장실로 들어가 몰골을 정리한다. 지독한 술 냄새가 벤 옷을 벗고 말끔한 차림에 가벼운 코트를 집어입는다. 집을 나선다.
운전석에 앉아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정리했다가. 느릿하게 핸들을 움직인다. 대략 1시간을 달려야 네비게이션에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려퍼진다. 평소보다 늦게 도착했다. 한 번도 빈 손으로 간 적이 없어서. 이번에도 다름없이 중간에 핸들을 돌려 구해온 꽃다발을 조수석에 내려놓는다.
8시가 살짝 지난 시간. 이제는 완벽한 어둠이 드리운다. 사람이 거의 다 빠져 정적이 무섭게 들이닥친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로 단 하나의 구둣발소리가 울려퍼진다.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네가 있는 그곳은. 매년을 한번도 빠짐없이 들러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 손에 이쁘게 포장된 파란 안개꽃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
마침내 너의 얼굴이 보인다. 3층 제일 끝에 위치한 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다행히 어둠 속에서도 환한 너의 미소가 시야에 들어온다. 액자 속에 교복을 입고 단정히 정면을 바라보는 너의 두 눈과 마주친다.
故 주애정
너의 미소를 담기 바쁜 두 눈이 깜박이는 과정도 까먹어 점점 메말라온다. 시린 두 눈이 끝내 촉촉해진다. 애정아.
"...나 왔어."
사진 속에서 19살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너는 마지막을 준비하지도 못했다. 너의 부고에 쓰인 사진은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너의 학생증 사진이었다. 눈동자 밑으로 아슬하게 쌓인 눈물이 떨어진다.
"..오세훈이랑 도경수는 봤어?"
내가 좋아하던 웃음을 짓고 있는 너는 더이상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늦어서 미안."
조심스레 꽃을 너의 앞에 내려놓는다.
"..애정아."
너의 이름을 한번 더 불러본다. 그 호명에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기울이는 네 모습이. 바로 어제처럼 생생한데. 더 이상 너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파랑새가 되어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너의 두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끝내 고개를 푹 숙인다. 매년 찾아올 때마다 먼저 시선을 물리는 것은 항상 나였다. 그런 내게 벌이라도 주려고 하는 듯. 너는 항상 변함없이 그곳에 갇혀서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발걸음을 뒤로 한 발짝 물린다. 땅바닥에 시선을 처박은 고개를 들어 이번엔 아예 반대편으로 돌린다. 차마 너의 두 눈을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무릎 바로 위에서 살랑이는 치맛자락을 본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알맞게 눈썹을 가리는 앞머리가 살랑인다. 어깨 위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에서는 실존하는 것처럼 샴푸향기가 맡아지는 듯 하다.
매년 너를 찾아갈 때마다. 그런 나에게 매년 너는 나를 찾아왔다. 너의 6번째 기일. 내게 6번째 찾아온 너는 작년보다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 사진 속의 미소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대로 넘친 눈물이 범람한다. 몸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너의 앞으로 무릎이 꿇린다. 미안해. 미안해. 꽉 막힌 가슴이 아프다.
"...애정.."
"...."
"...."
고개를 기울인 네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온다. 서서히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는다. 창백하다 못해 곧 사라질 것 같은 손가락이 대리석 바닥 위를 움직인다. 눈동자를 움직여 더이상 쓰여지지 않는 글씨를 읽는다.
주애정. 변백현.
고개를 들어올린다. 너의 흔적은 온데간데도 없었다. 사라졌다. 너의 사진 앞으로 높여진 파란 안개꽃이 괜히 살랑거린다는 착각을 받는다. 바람 한점이 들어올 수 없는 꽉 막힌 건물안이라는 걸 알면서. 고꾸라진 몸을 일으킨다. 다시 한 번 사진 속 너와 눈이 마주친다. 너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단정히 입은 교복 마이 위로 너의 이름이 정갈히 쓰인 명찰이 보인다.
너는 꽃을 다 피우기도 전에 저버렸다. 사람들의 힐난 속에서 자멸을 선택했다. 그 꽃이 다 펴보기도 전에 시들게 된 건 모두 우리 탓이었다. 잔인하게 너의 꽃을 밟아버린 그 발의 주인은 모두 우리였다.
애정아.
내가 알았으면 너를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같이 도망쳐줄 수 있었을까.
네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지금 너는 웃고 있었을까.
늦은 밤, 도로 위를 달리는 차는 한적했다. 창문을 완전히 열어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괸다. 대충 나머지 한 손으로 핸들을 움직이며 위태롭게 나아간다. 도로 위에도. 차 안에도. 가득한 정적을 메우는 소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뿐이었다.
[6년 전, 전국민을 분노케 했던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일가족을 몰살한 것도 모자라, 무고한 젊은 여성들의 성을 돈주고 사고 판 전과 20범의 흉악범이 오늘 오전 10시 서울 **교도소에서 사형 집행이 이루어졌습니다. 긴 공방 끝에 생을 마감한 흉악범에 대해 여러 일각에서 썰전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죽음으로 사죄하라는 의견도 있는 반면, 너무 고통스럽지 않게 벌을 달게 받는 것이 아니냐, 무고한 희생자들을 기리기에는 한없이 가벼운 벌이라며 일침을 가하는 의견도 비일비재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꽃도 다 피우지 못한 채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머리가 지끈거리는 소음에 손을 들어 미련없이 꺼버린다. 하나남은 소음마저 사라지니 정말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네가 잠든 그곳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지체한 덕인지. 11시를 넘기고 나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키를 던지듯 내려놓고 무거운 몸을 침대 위로 쏟는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열이 온몸을 집어삼킨다.
의식이 점점 돌아온다. 감겨진 두 눈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느낀다. 아... 내가 어제 블라인드도 안치고 잠에 들었나. 미간이 찌푸려진다. 감은 두 눈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시야 안으로 하얀 천장이 들어온다. 무거운 상체를 일으킨다.
"...뭐야."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아니. 낯설기보다는 오랜 시간이 지나 조금은 반갑기도 한 풍경.
"이게 대체..."
방문이 벌컥 열린다.
"어머. 일어났네? 일어났으면 빨리 씻어야지. 너 그러다 지각한다~"
들어온 사람은 누나였다. ...누나? 의아함에 얼굴이 구겨진다. 내가 독립한 지가 언젠데... 그러다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린다. 다급히 발을 내려 책상 가까이 다가간다. 책장과 책상에 한가득 쌓인 문제집. 수능특강. 사회문화. 영어.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나가려는 인영을 붙잡는다.
"..지금... 몇 월이야?"
"...얘 왜이래."
"...."
"8월이잖아. 더위를 처먹었나..."
"...."
"너 빨리 씻으라니까?"
손을 뿌리친 누나가 방을 나선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멍만 때리다가. 돌아온 정신에 다급히 휴대폰을 들어올린다. 눈부신 화면위로 적힌 날짜를 확인했따. 2015년 8월 16일. 숨을 토해낸다.
"....과거..로 돌아온건가."
현실감각이 떨어진다. 손을 들어 몇 번이고 자해를 한다. 고통은 그대로 느껴지는데. 그때 방문 밖에서 외침이 들려온다. 아 엄마! 나 깨웠어! 쟤가 안 일어나는거라니까!? 야 변백현 일어나라고!!
"...진짜.."
내가 정말 과거로 돌아왔다면.
"...애정.."
내가 정말 너의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
2015년 8월 16일.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대략 1개월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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