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西面)교당 3대(代) 교무인 금타원(錦陀圓) 박세경(朴世經)교무가
부산진구 양정동에 교당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김은실, 박진덕화(朴振德華), 김안락화(金安樂華), 김명덕(金明德), 이성안교도 등
알뜰한 교도들의 합심(合心)합력(合力)을 바탕으로
원기57년(1972년) 2월 15일 양정동에 거주하는
명타원(明陀圓) 박진덕화(朴振德華)교도의 자택에서 첫 출장(出場) 법회(法會)를 시도함으로써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개교(開校)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여건이 적당치 않아 김은실 교도 자택을 빌어 법당을 옮기고 출장법회를 계속해 오던 중,
이곳 역시 큰길 가로 소음(騷音) 공해가 심하여 법회 진행에 불편이 커서
김은실교도가 3층 자택을 처분하고 양정 2동 136번지에 새로 주택을 마련,
2층 방 2간과 거실, 부엌 등을 교당으로 활동하면서 안정을 찾고 활기찬 교화활동을 전개하였다
.
원기59년(1974) 4월 10일에 중앙총부로부터 선교소 인가를 받고
(서면교당은 제4대(代) 박정묵 교무가 부임하여 있을 때 연원교당을 낸 셈이다)
5월 13일에 판타원(辦陀圓) 이효원(李孝源)교무가 초대교무로 부임을 하여
김은실, 박진덕화, 김안락화 교도를 주무로 사령하여
교화에 안정을 찾고 활기찬 교화활동을 전개하였다.
설립당시의 유공인(有功人은)
이성암(李聖庵), 정경제(鄭敬濟), 박진덕화(朴振德華), 김은실, 김명덕(金明德),
김안락화(金安樂華), 김복전화(金福田華), 오덕순화(吳德順華), 이문수(李文洙)교도 등이었다
원기59년(1974)에는 어린이회를 결성 유년교화를 시작으로
학생회를 아울러 결성(초대 회장; 조제민), 청소년 교화의 기틀을 갖추었다..
원기 59년(1975년) 4월 6일 지역사회에 이바지 하며 교도간의 친목으로 상호 훈련지도와 교당 발전을 위해 노력할 목적으로 봉공회 결성을 보았다..
회장엔 박진덕화(朴振德華), 부회장에는 도성덕(都聖德) 교도가 선출되었다.
2년여의 출장법회를 이끌어 오면서 법당의 잦은 이동속에서도
이효원 교무의 활발한 교화활동 속에 일원의 법음에 심취한 교도들이 노력한 결과
교도가 증가함에 따라
원기60년(1975) 7월 20일 부산 진구 양정 2동 78-7번지에 6백만 원으로
주택을 매입 첫 법당을 마련하였다.
원기61년(1976년) 11월 7일에는 청년회를 결성하여
(회장; 김성철(부산대) 부회장; 조제민(부산대), 권성명(부산교대))
청년회 동계수련회도 개최하고 청년회 회보인「법우」를 창간 발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원기62년(1977) 5월 30일 선교소에서 교당으로 승격된 뒤
교도가 날로 증가하여 교당확장이 요청되었다.
원기 62년 부지 1백 52평을 적립금 700만원, 교도성금 400만원, 차입급 500만원을 합하여
1천 5백 만 원(현 시가 9천 만 원)에 매입하였다.
그러나 5백만 원의 부채를 짊어져야 했고, 여기에 공지세가 1백 만 원이 추가되자
부득이 교화· 교육· 자선 등에 활용될 건물을 신축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요인회에서는 교당을 신축할 것을 결의하고
1차 마련한 법당을 매각한 대금 1760만원과 500만원의 적립금으로
원기63년(1978)8월 9일 기공식을 갖고 사(私)없는 합력으로 정성을 다하여
맨주먹으로 5천 만 원 법당공사에 개미역사의 피나는 합력으로 정성을 쏟았다.
예를 들면 기일성화 할머니 교도의 경우, 할머니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교당행사에 빠지는 일도, 지각 한 번 하는 일도 없는 정성의 보살 기일성화 할머니 교도는 집에서 교당까지는 걸어서 1시간이 걸리는데도 시내버스를 타지 않고 그 돈을 저축했고 별로 넉넉하지 않은 아들 살림살이를 지켜보며 푼푼히 모은 잡비로 적립금을 부어 찾은 돈, 망가진 치아를 치료하라고 영감님이 주신 이 치료비, 아들딸들이 모아 여행비로 드린 돈, 그리고 국민 학교 교사인 딸집에 식모가 없자 할머니는 집안일을 대신 보살펴주고 받아낸 것 등을 모아 10만원 또는 5만운 이렇게 여러 차례로 도합 50만원을 아무런 말도 없이 교무에게 살며시 내민 교무님 손에 꼬옥 넣어주었다..
원기64년(1979년) 4월 8일 교화가 시작된 지 7년 만에 8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부산 진구 양정 3동 356-26번지에
출가교역자 60여 명이 재가교도와 지역사회 인사 등 4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축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교당 구조는 대지 1백 52평, 총 연건평 1백 60명으로
지하 1층(청년관 학생관) 지상 1층은 소법당과 식당 겸용, 2층은 대법당으로 구성되었다..
이날 봉불식에서는 정해영 국회의원, 부산진 구청장, 서면교당 김법운(정수) 교도회장 등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이성암 교도회장에게 종법사 표창이 수여되었고
공사를 맡았던 김석원씨에게 감사패가 전달되었다.
원기66년(1981년) 4월 7일 2대교무로 은산 김장원 교무가 부임한 이래
대산종법사님이 하신 말씀 “너희들, 유치원을 설립하여라. 유치원 없는 교당은 가지도 않겠다.”고 하신 말씀을 받들어 유아원 설립의 꿈을 가지고 추진하여
12월 16일 교당 요인회에서 결의를 하고
12월 17일 부산진 구청에 가서 어렵게 설득을 해서 어린이집(정원 100명) 설립인가를 받고
어린이집 설립을 위한 100일 특별기도를 실시하고
1900만원을 들여 3개월간 어린이집 설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아시아 미니버스 12인승을 500만원에 구입 운행하고 교당 건물 1층 학생관, 청년관, 창고 등을 교실 A, 화징실로 개조하고 2층 소법당, 응접실, 방 일부를 교실 B, 사무실, 화징실로 개조하고, 화단을 없애고 놀이틀과 철주보호시설을 설비하였다.
원기67년(1982년) 3월 17일 어린이집을 개원하여
어린이 114명, 정교사 5명으로 3개반을 편성하여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원기68년 1월에 교당 부설기관인 어린이집이
정원 132명의 양정원광 유아원으로 재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