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자의 글(본문 21-25페이지)
2. 나는 왜 남과 북의 국립묘지들을 모두 방문했나?(본문 35-45페이지)
3. 북녘의 국립묘지를 가다(본문 46-51페이지)
4. 책갈피에 수록된 대표적인 문장 모음(책표지 뒷면)
5. 저자 프로필(책날개 좌측면)
======== 1. 저자의 글(본문 21-25페이지) =========
저자의 글
지난 2015년은 우리 겨레가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해방되자마자 외세에 의한 분단으로 삼천리 반도는 남북으로 절단 나고 그로인해 우리 민족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을 견뎌왔 다. 7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돌이켜보니 북반부 조국은 자주와 주권을 지키기 위한 대미결전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러나 미국으로 부터의 제재, 고립, 압살책동과 맞서 싸우는 북측과는 달리 남반부 조국 땅은 그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다. 남측은 여전히 친미반북 정책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으며 박근혜 정권은 국제사회 앞에 부끄 러운 줄도 모르고 흡수통일에 불과한 통일대박론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었다. 민족공조에 대한 의지는 전혀 없이 불순하기 짝이 없는 반북 사대주의 허상을 통일정책으로 내놓고 선전하는 모습을 보니 제국 주의를 등에 업은 분단 마피아들의 횡포로 보일 뿐이었다. 이처럼 70 주년이 다 되어도 나의 조국 땅을 돌아보니 당장 자주통일에 대한 희망이 없었기에 답답한 심정에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과 분단을 종식시킬 수 있는 평화협정과 종전선언 조차 요원하기만한 상태에서 더 이상 내가 구상한 계획을 지체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분단 70주년을 앞둔 3년 전부터 남북의 국립묘 지에 각각 잠들어 있는 모든 영령들에게 무엇으로 응답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왔다. 이미 오래전부터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는 분들이 과연 영원히 화해할 수는 없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렇다면“살아있는 자들에 의해 어떤 계기가 마련된다면 죽은 이들의 화해는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를 궁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이일은 대한민국“국민”들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민”들은 아직도 적대관계에 놓여 있는 당사자들이기 때문에 서로 왕래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해외동포가 직접 나서야만 했다. 비록 상징적 의미의 퍼포먼스에 불과하지만 양쪽의 국립묘지에 잠든 이들을 서로 화해시키는 일은 아직 살아있는 자의 몫이었다.
이와 맞물려 나는 평소 한겨레통일문화재단(한겨레신문사)의 설립에 크게 재정적 기여를 했던 고(故)김철호 선생을 존경해왔다. 그는 투병 중이던 어느 날 주변사람들을 향하여“외국의 경우에는 살아있을 때서로 원수로 지내며 싸웠더라도 죽은 다음에는 같은 민족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러니 통일에 앞서 먼저 남측부터라도 손을 내밀어 죽은 자와 산자가 서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일을 진행해야 합니 다”라며 간곡한 어조로 제안한 적이 있었다. 이는 평소 내가 품고 있던 생각과 일치했기에 그분의 제안에 더욱 용기를 얻었고 구체적으로 남과 북의 국립묘지를 탐방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북의 국립묘지를 찾아 역사화해를 모색하다>라는 프로젝트를 세워 3년 동안 남과 북을 셔틀 왕래하며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분단 이후 최초로 북측의 국립묘지와 남측의 국립묘지를 교차방문하며 역사화해를 시도하는 중차대한 일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휴전선 DMZ, 그 아픈 허리를 따라서 남과 북의 국립묘지를 찾아 역사화해를 모색하려는 나의 발걸음은 이처럼 흥분과 설레임 속에 본격 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로 살육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양측의 영령들을 위로하고 보듬어주려는 나의 평화적 행동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비추어 볼 때 너무 시기상조이며 성급한 행동은 아닌지 우려스럽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다. 막상 일을 벌이고 보니 미국에 살고 있는 내가 남북의 국립묘지들을 탐방하는 일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마치 탐험가나 모험가들이 그랜드 슬램(Grand Slam)에 도전하는 과정처럼 무모해 보였고 장애요인들도 잇따랐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강팍한 대북 정책과 국보법의 덫이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혔을 뿐 아니라 극우세력들의 모함은 물론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 허당들의 근거 없는 음해와 질시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난관들을 모두 헤치고 마침내 목표를 달성하고 나니 마치 산악인들이 7대륙 최고봉 등정과 3극점 달성을 마치고 그랜드 슬램을 이룬 것처럼 뿌듯함과 희열을 느꼈다.
역사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참관했다는 차원을 넘어 마치 종교인들이 성지순례를 다녀 온 것과도 같은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사랑과 평화의 그랜드 슬램 달성을 위한 도전은 결국 남과 북 양측 사회에 미세한 파장과 긴 여운을 남기게 되었다고 자부한다.“용서와 사랑”에서 출발한 남과 북이“화해와 협력”의 단계에 진입하여“유대와 연대의 손을 잡고“소통과 통합”을 이뤄내 마침내 완전한“민족공조”의 길에 들어 서서“자주적인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것을 보고자하는 일념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통일지향적인 민족애의 발로가 아니라면 이억만리 이민 자로 살아가고 있는 내가 두 개의 조국으로 나뉜 양측을 오가며 무덤을 보듬고 비석을 어루만져주는 일은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무덤속의 영웅 열사들이 죽어서나마 서로 이질화된 간극을 좁히기를 소원했으며 진정한 화해가 성사되도록 성스러운 사랑의 불씨를 지피고자 했던 것이다. 남과 북이 서로 소통하고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민족애 외에 무슨 이념이나 교리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또한 내가 남과 북의 국립묘지를 일일이 찾아다닌 행보에 대해 어느 누구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이런 행위가 어느 한쪽에 편파적 이거나 그 체제에 충성을 맹세하거나 굴복하는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 다. 다만 자주적인 평화통일의 여정에서 반드시 서로를 인정하며 기본 적으로 갖춰야 할 열린 자세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모두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어느 한쪽이 상대를 무력으로 흡수통일 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고 해서 상대편 영토에 조성된 국립묘지들을 모두 폭파시 키거나 파묘할 수는 없지 않은가? 베트남전쟁의 경우를 보더라도 미군과 한국군이 한편이 되어 월맹군과 치열하게 싸웠으나 40년의 세월이 흘러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에 이르기 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베트남을 국빈 방문해 의장대를 사열하고 적국의 수장이었던 호치민 묘지에 헌화하고 참배했다. 전쟁 당사국인 미국도 클린턴 대통령을 필두로 부시, 오바마 등 역대 대통령들이 베트남을 방문해 의장대 사열을 받고 호치민의 묘지에 헌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수없이 침략하고 괴롭힌 일본과도 수교를 맺으면서도 유독 같은 민족이자 통일의 상대인 북측과는 아직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해방과 자주독립을 이룩하고 통일된 주권국가가 되려면 우리민족의 분단문제는 남과 북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내재적 관점에서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옳다. 또한 남측은 친북이 되어야 하고 북측은 친남이 되는 일이 매우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것은 결코 상대에 대한 굴종이나 타협이 아니며 오히려 민족공조의 첫 걸음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부모 형제를 죽인 원수의 무덤이라도 먼저 찾아가서 손
24_남북의 국립묘지를 찾아 역사화해를 모색하다
을 내밀고 보듬어 줄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그 어떤 우월한 이데올로기보다 더 위대한 것이며 모든 종교들이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를 뛰어 넘는 사랑의 대혁명이 아니겠는가? 아무쪼록 이 책이 통일의 상대인 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적대세력-냉소세력-비 판세력”들이 이제는 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이해세력-우호세력-소통세력”으로 바뀌는 역할을 해주기를 갈망한다. 끝으로 이 책이 출간 되기까지 애써주신 도서출판 메아리 박학봉대표에게 경의를 표한다.
_다운타운이 내려다보이는 로스엔젤레스 서재에서 최재영
==== 2. 나는 왜 남과 북의 국립묘지들을 모두 방문했나?(본문 35-45페이지) =====
나는 왜 남과 북의 국립묘지들을 모두 방문했나?
1.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남과 북의 국립묘지
현존하는 남과 북의 국립묘지들은 외국처럼 근대 민족국가가 성립한 이후에야 모두가 생겨났다. 남과 북 모두 국립묘지 규모의 절반은 6.25전쟁(조국해방전쟁, 한국전쟁)이라는 국가적인 사태로 희생된 전사자들과 참전 군인들을 위한 묘지와 추모시설물이고 나머지 절반은 일제 강점 36년 동안 조선총독부 소속 일경이나 관료들에게 저항하다가 희생했거나 만주와 조선에서 활약한 일본군들과 투쟁하다 희생한 항일투사들과 독립운동가들을 안장한 묘지들과 시설물들이다.
북측 국립묘지는 항일 독립투사들이 역사적 기원이 되어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으나 남측 국립묘지는 그 정체성과 상징성이 모호할 뿐 아니라 국립묘지의 재구조화가 불가피할 정도로 아직 항일 독립 투사들이 제대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채 전국에 산재한 공동묘 지에 떠돌고 있었다. 역대 정권들은 공원이나 야산, 공동묘지 등에 매장된 항일투사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의 묘지들을 무관심속에 방치하면 서도 친일파들의 묘소들은 국립묘지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는 극단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편 양세봉 사령을 비롯한 많은 항일투사들은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동시에 안장된 경우도 있었다. 양세봉의 경우 북측 국립묘지에 진묘가 있는 반면 남측 국립묘지에 조성된 그의 묘지는 허묘이다. 이는 남북이 모두 그의 항일업적을 존중하여 추앙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 다. 그리고 한 인물이 남과 북 모두에게서 항일투쟁 공로를 인정받아 서훈을 받거나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들도 많았다. 이는 남과 북이 역사 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민족적 가치가 다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항일투사들에 관한 인식이나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등에 관해서는 남과 북이 현재 일치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통일의 과정에는 민중이 참여해야하며 민중이 원하는 통일이 되어야만 한다. 특권 소수의 이익이나 강대국의 이익에 의한 통일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비민주적 통일이 되어서도 안 되고 비자주적 통일이 되어서도 안 된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착취당하는 사람들도 참여 하는 통일의 과정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야한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살아있는 민중이 결코 소외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이미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들도 역사를 초월해 통일의 주역으로 동참하도록 해야 한다.
2. 남측은“영원한 과거” 북측은“영원한 현재”
원래 국제사회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립묘지 조성이 가속화 되면서 우리나라에도 도입이 되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국립묘지 라고 해도 중국과 소련의 국립묘지도 서로 다른데 하물며 남과 북의 국립묘지는 말해 무엇하랴. 남과 북의 국립묘지는 사회적으로 소비되는 목적과 양태가 차이가 있다 보니 상이하게 운영되고 있었으며 설립 목적과 양태가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잘 알다시피 남북으로 분단되기 전부터 일제와 혹독하게 치룬 독립전쟁이나 해방전쟁을 경험했던 우리나라는 이념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져 6.25전쟁을 치뤘다. 양측 모두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군사적 배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이념에 의해 국립묘지들이 운영되고 있었 으며 그러한 추모시설들이 조성되고 유통되는 구조는 강력한 흡인력을 갖는 민족주의의 문화적 상징물이 되었다.
남과 북의 국립묘지들은 외형적으로 볼 때 서로 대비되는 부분이 많다. 남측에 현충원이 있다면 북측은 렬사릉이 있다. 그리고 남측에 전몰장병묘지인 현충원과 호국원이 있다면 북측은 평양 조국해방전쟁참 전렬사묘를 모체로 하여 전국 시군 단위에 인민군렬사묘역이 수십 곳조성되어있다. 또한 남측에 UN군 묘지가 있다면 북측에는 중국군묘지와 소련군묘지가 있으며 남측 국립묘지에 월남전 참전 전사자들을 안장했다면 북측도 월남전에 참전한 공군전사자들을 조국해방전쟁참전 렬사묘에 안장했다. 또한 북측에 항일투사들을 안장한 평양 대성산혁 명렬사릉과 혜산 련봉산혁명렬사릉이 있다면 남측에는 늦게나마 국립 묘지로 재조성한 대구 국립신암선열공원과 제천, 망우리, 수유리(삼각 산), 효창공원 등이 있다.
북측은 대성산혁명렬사릉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신미리애국렬사릉을 조성하였으나 이마저 포화상태에 이르자 전국 도 단위에 하나씩 렬사 릉을 더 조성해 전국에 10곳의 렬사릉을 별도로 조성했다. 그뿐 아니라 원래 전국에 흩어져있던 6.25전쟁 전사자들의 묘지인“인민군영웅 들의 렬사묘”들을 정전협정 60주년을 기해“인민군렬사묘”라는 이름 으로 재조성해 전국 시군지역에 45-50개 정도의 묘역을 일제히 준공 했다.
이는 남측도 마찬가지였다. 서울과 대전에 조성된 국립현충원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현재 경기도 연천에 또 한 곳의 현충원을 조성 중에 있다. 또한 국군묘지로서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서울과 대전의 현충원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전국 각 권역별로 5곳의 국립호국원을 별도로 두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제주도에 또 한 곳의 호국원을 조성 중에 있다. 이와는 별도로 남측은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한 3.15, 4.19. 5.18 등 3곳의 국립민주묘지가 조성되어있고 대구신암선열공원이 국립묘지로 승격된 것을 필두로 제천, 망우리공원, 수유리(삼각산)공원, 효창공원 등 전국에 산재한 항일 독립투사들의 묘지들을 지역별로 구분해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로 승격중이다.
이처럼 남과 북의 국립묘지들은 각각 사회적으로 유통되고 소비되는 국립묘지의 목적과 양태가 이념과 사상에 의해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죽음은 영원한 안식이어야 한다. 전쟁과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불안정하게 생애를 마감한 고인들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무덤은 영원한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남과 북의 국립묘지는 영면지(永眠地)로서의 역할보다는 치열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보니 현재 살아있는 자들에게 다시 소환되거나 애국심 고취의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이는 추모의 용도 외에 앞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전쟁에 대비해 더 많은 자국 군인들을 정당하게 동원할 수있는 기제로도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국립묘지는 산자와 죽은 자의 연대의식과 더불어 개인의 목숨과도 능히 바꿀 수 있는 애국심 고양의 전초기지로도 활용되고 있다.
남측의 국립묘지는“영원한 과거”로서 매장되었다면 북측의 국립묘 지는“영원한 현재”로서 매장되었다. 특히 북측 국립묘지에는 항일무 투(항일무장투쟁), 조국해방전쟁(6.25전쟁), 통일사업(대남사업)에서 “영웅”이나“렬사”칭호를 받은 고인들이 지금도 인민들이 삶에 직접 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처럼 양측의 국립묘지는 그 본질적인 의미와 양태에 있어서 공통점과 상이점이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강력한 이념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남과 북의 국립묘지들을 동포들에게 올바로 인식시키고자 했다.
3. 죽은 적(敵)은 없다.
남과 북의 현실은 아직도 전쟁 상태에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70 년이라는 정전 체제의 장기화 속에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폭발성에 대해 무감각해져 왔던 것은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전쟁 그 자체에 무슨 선과 악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미 남과 북 양측의 전몰장병 묘지에 잠들어있는 병사들에게 무슨 범죄행위가 계속 발생할 수 있겠는가?
5대양 6대주 모든 인류의 보편적 정서는 적군이든 아군이든 혹은 악인 이든 의인이든 그 죽음 앞에는 대개 옷깃을 여미는 것이 관례이다. 심지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민형사상의 흉악 범죄를 저지른 중범죄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사체로 발견되면 해당 사건은 수사 자체가‘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된다. 이처럼 죽음의 현실과 신비 앞에 우리는 경건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자 도리이다. 아울러 하찮은 미물이나 풀 한 포기 라도 모든 생명체의 죽음에는 숙연해지는 법이다.
그러기에“죽은 적(敵)”은 없다. 죽은 병사는 더 이상 적군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만 적이 되는 것이다. 죽고 나면 그저 역사의 무대 에서 함께 싸운 용사였을 뿐이다. 그가 죽었기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적군이라 해도 존중하고 예를 갖춰 주는 것이 전장의 법칙이다. 원치 않은 전쟁이었다 해도 그 자체로 우리의 살아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는 아직 전쟁의 상흔이 아물지도 않았 고, 총부리를 내릴 수도 없는 대치 상황이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특히 내가 남과 북에 각각 조성된 군인묘지들을 찾을 때마다 무덤속의 영령들은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고 나로 하여금 알 수 없는 통한의 폭풍 오열을 불러일으켰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상대를 죽인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영웅열사 칭호나 순국선열로 분류되어 각각의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이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평양 순안공항 인근의 련못동에는“조국해방전 쟁참전렬사묘(6.25 참전 인민군전사자묘지)”가 새로 조성되면서 준공 식이 거행됐는데 나는 어렵사리 참가할 수 있었다. 내가 남측에서 군복 무를 마치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나는 다른 나라 국적자의 신분 으로 평양의 군인묘역을 찾아 그곳에 안장된 559구의 인민군 영령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묘역을 돌보던 나는 그날따라 몹시도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어 땀을 비오듯 쏟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애잔한 통증이 밀려오며 서러움과 회한이 밀려왔다. 마치 부모상을 당한 듯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두 다리를 쭉 뻗고 목 놓아 울
었다. 너무 원통한 심정으로 울다보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울부짖듯한 것이다. 서로를 향해 아직도 괴뢰군이라고 부르며 증오심을 키워야 하는 현실이 너무 기가 막혀 땅을 치고 통곡했다. 남측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제도권 학교로부터 철저 하게 반공교육을 받았으며 현역으로 군복무를 할 때는 북측의 병사들을 향해“괴뢰군”이나“북괴군”으로 세뇌를 받아왔다. 그러니까 대한 민국 국군이 싸워야 할 주적(主敵)은 미군이나 일본군, 중국군, 소련군 등 외국군대가 아니라 같은 동족인 인민군이라고 교육을 받아왔으니 모든 기성세대들의 머릿속에 북은 언제나 적이었다. 반대로 조선민 주주의인민공화국 군대는 자신들의 주적을 남측의 국군으로 삼지 않고 미군과 일본군으로 삼아왔다. 다만 매국노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미국과 일본에 빌붙어 협력하는 남측 적폐세력들이 정권을 잡을 시기에는 북에서도“괴뢰정권”이나“괴뢰도당”으로 불러왔다. 이처럼 같은 부모형제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70년을 대치하는 현실이 너무 어이가 없었을 뿐 아니라 한편으론 이런 비극적 결과를 초래한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외세에 대한 증오심이 울분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4. 상대가 먼저 찾아와 내미는 손도 잡지 못하는가?
지난 2014년 8월 18일에는 서울 현충원에서 김대중 대통령 5주기 추도식이 거행됐다. 그러나 이날 일부 극우세력들은 북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보낸 근조 화환이 국립묘지 내부에 반입되는 것을 저지하려다가 실패를 하자 이를 문제 삼아 현충원장에게 협박전화를 했으며 현충원 인터넷 게시판에는 항의와 욕설이 난무했다. 결국 이 사태에 대해 현충원 측이 공식 해명을 하기까지 했다. 현충원에 안장됐기 때문에 예년처럼 현충원 측은 행사장 제공과 지원을 했던 것이며 북에서 보낸 화환도 정부의 협의를 거쳐 승인받은 후 반입된 것이다. 또한 행사장 입구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근조화환이 좌우에 비치된 상황이었다. 이 사태를 바라보면 아직도 남측 사회는 통일의 상대가 건네는 따듯한 위로와 화해의 손길을 수용할 준비가 안 됐음을 확인 할수 있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분단 마피아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통일을 방해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2005년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북측의 김기남 로동당 비서와 림동옥 로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등 32명의 일행이 8.15 민족대축전 기간인 14일 서울 현충원 충혼탑을 찾아 묵념하며 참배했다. 이때도 극우세력들은 기습시위를 벌였으며 극우언론인들은 맞장구를 치며 노골적으로 비난일색이었다.“6.25 전범집단이 피해자 묘소에 참배하는 일은 전범행위를 덮고 넘어가려는 술책이며 김정일 정권은이 참배를 평화공세의 하나로 활용하여 대한민국의 민족혼과 대북 경계심과 애국심과 정의감을 마취시키려 들 것이다”라며 연일 거품을 물며 선동적인 보도를 일삼았다. 이처럼 남측사회는 아직도 통일을 향한 화해의 온도계가 차가운 영하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의 책임을 무조선 북측에 떠넘기는 편파적 반북사관과 식민사관을 지닌 극우세력들의 저항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북측 방문단은“6·15선 언이 없었으면 우리들도 남조선을 이렇게 직접 찾아와 현충원을 참배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라며 자신들은 순수한 민족 화합 차원에서 참배한 것임을 밝혔다.
그 후 남측의 김혜경 민주노동당 대표가 이끄는 방북 대표단도 8월 23∼27일 평양을 방문했으며 도착 첫날은 만경대생가를 방문했고, 둘째 날인 24일에는 평양 신미리애국렬사릉을 방문해 추도 묵념을 했다. 남측 정당 대표단이 평양의 국립묘지를 방문하고 추모를 한 것은 역사 적으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추모를 마친 김 대표는 방명록에“당신 들의 애국의 마음을 길이길이 새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방명록 내용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방북단은 극우세력들에 의해 크게 곤혹을 치루며 사회문제화 되기도 했다. 애국렬사들의 묘지이니만큼 그들 의“애국의 마음”을 기리겠다는 방명록의 문구를 반북세력들이 왜곡한 것이다. 이는 2001년 평양 만경대생가를 방문한 동국대 강정구 교수가“만경대 정신”이란 문구를 방명록에 적었다는 이유로 국보법으로 체포되어 크게 곤혹을 치룬 사건과 비슷했다.
이처럼 북측 김기남 대남비서 일행과 남측 김혜경 민주노동당 대표 일행의 교류 사례는 남북의 현실을 여과없이 보여주었다. 방북중인 남측 일행들은 북녘의 인민들로부터 따듯하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서울을 방문한 북측 일행들은 멸시와 테러의 위협 속에 신변의 위협까지 받았던 것이다. 화해와 포용을 위한 평화적인 추모 의도조차 날조하고 왜곡하는 태도를 보면서 대체 이 간극의 골을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상대가 먼저 내미는 손을 냉정하게 뿌리칠 것인가? 이 모든 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친일친미 사대주의 매국노들과 적폐세력을 청산하고 자주적인 힘을 응집해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속박에서 빨리 벗어나야는 방법외엔 없다. 남과 북의 국립묘지를 추도하는 행위는 민족 화해와 동질성 회복과 민족의 자주노선에 큰기폭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3. 북녘의 국립묘지를 가다(본문 46-51페이지) ======
북녘의 국립묘지를 가다
다양한 유형의 북측 국립묘지들
북에서 가장 핵심적인 국립묘지 5곳을 꼽으라고 한다면“금수산태 양궁전”을 필두로“대성산혁명렬사릉” ,“련봉산혁명렬사릉” ,“신미리 애국렬사릉” ,“련못동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이다. 이어서 전국 각도 단위에 소재한“평성렬사릉” ,“함흥렬사릉” ,“해주렬사릉” ,“사리 원렬사릉” ,“혜산렬사릉” ,“평양렬사릉” ,“원산렬사릉” ,“강계렬사 릉” ,“청진렬사릉” ,“신의주렬사릉”등 10곳의 렬사릉이 중요 국립묘지 반열에 들어간다. 이어서 평양 련못동에 소재한 조국해방전쟁참전 렬사묘를 모체로 하여 전국의 각 시군 지역에 조성된 45개의“인민군 렬사묘와 추모탑”이 있다.
전국에 산재한 인민군렬사묘지 분포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황해북도는 개성특급시, 사리원시, 금천군, 서흥군 등 4곳이며 황해남도는 해주시, 신천군, 안악군, 연안군 등 4곳으로 황해도 전체는 모두 8곳의 인민군렬사묘가 조성되어있다. 함경남도는 함흥시, 단천시, 금야군, 정평군, 홍원군 5곳이며 함경북도는 청진시의 청암구역, 온성 군, 어랑군, 경흥군 등 4곳으로 함경도 전체는 모두 8곳이다. 평안남도 에는 평성시, 안주시, 성천군, 회창군, 은산군등 5곳이며 평안북도에는 신의주시, 정주시, 박천군, 염주군, 동림군, 대관군, 녕변군, 태천군 등 8곳으로 평안도는 모두 13곳의 인민군렬사묘가 조성되어있다. 량강도는 혜산시 1곳이며, 자강도는 강계시, 만포시 등 2곳에 인민군렬사묘가 조성되어 있으며 강원도에는 원산시, 금강군, 고성군, 안변군 등 4곳에 인민군렬사묘가 조성되어있다.
남포특별시는 남포시 와우도구역, 강서군, 온천군, 룡강군등 모두 4 곳에 인민군렬사묘가 조성되어있으며 평양시 락랑구역에는 대문산기 슭에 있는 남사리지구 인민군렬사묘와 락랑구역 제2묘역이 있으며 이와는 별도로 평양시 만경대구역 선내동에 있는 선내동인민군영웅들의 렬사묘가 있어 평양시에는 모두 3곳의 인민군렬사묘가 조성되어있다.
이로서 황해도 8곳, 함경도 9곳, 평안도 13곳, 강원도 4곳, 남포특별시 4곳, 량강도 1곳, 자강도 2곳, 평양시 3곳 등 이북 전역에는 모두 44 곳의 인민군렬사묘와 추모탑들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평양 련못동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를 포함하면 45곳이나 된다. 또한 남측과 해외동포들을 안장한“평양 재북인사묘”와“평양 해외 동포애국자묘”등 2곳의 특별묘역이 있다. 그리고 동해바다 함선에 근무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희생한 동해함대사령부의 구잠함 233호 병사들만을 안장한“해군 제790군부대 용사들의 묘”가 전몰장병들의 묘지의 성격으로 원산에 조성돼있다. 이와는 별도로 해방정국과 6.25전쟁 시기 참전해 전사한 소련군묘지가 있고 6.25전쟁에 참전해 희생한 중국인민지원군묘지가 있다. 해방탑과 소련군묘지는 전국 12곳에 조성 되어 있으며 북 당국에서는 국립묘지 급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평양 모란봉에 조성된 조중우의탑과 전국 67곳에 조성된 중국지원군 묘지들도 렬사릉원으로 승격되어 북 당국에서는 국립묘지 급으로 관리하고 있다.
또한 지금은 평양으로 이장했지만 과거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공군전사자들의 묘가 베트남 박쟝성에 있었는데 그 당시 참관한 이야 기를 통해 베트남전쟁이 우리 민족 전체에게 가져다주는 교훈을 구체 적으로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남측 영토에 조성되었으나 묘지의 특성상 경기도 파주시에 조성된 적군묘지를 이 책의 부록으로 실었다. 적군묘지에는 6.25전쟁 시기 남측영토에서 전사한 북 인민군들과 중국지 원군들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었으나 현재 중국군묘지는 중국으로 이장 되고 북 인민군묘지만 남아있다.
북녘의 국립묘지 이해하기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65곳의 북측 국립묘지를 세계 각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우선 그곳에 안장된 영웅 렬사들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으며 그들을 더욱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 배경도 다루었다. 또한 북녘의 국립묘지를 통해 남녘의 국립묘지와의 관계를 조명하였고 이를 통한 역사화해를 시도하고자 했다. 한편 북측 국립묘지가 가져다주는 교훈들과 의례적 총체들을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다면적 시각에서 설명했다. 이어서 자국민은 아니지만 자국의 국립묘지 수준으로 관리하는 소련군 묘지와 중국군 묘지 등 외국군 묘지들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접근을 통해 해방정국과 6.25전쟁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또한 베트남전에 참전한 공군전사자들의 묘지와 동해 바다 함정에서 근무 중 불의의 사고로 희생한 해군전사자 묘지 등 특수 묘지에 대한 현재적 의미들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월북인사들을 안장한 재북인사묘와 해외동포들을 안장한 해외동포애국자묘를 통해 민족과 운명이란 무엇인가를 재조명하고자 했다.
이처럼 북녘의 국립묘지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통찰하는 일은 자본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 북측 국립묘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묘지가 탄생한 배경과 함께 역사적 으로 누적시켜왔던 감성과 정신 속에 내재된 자신의 현재적 위치까지 알아야만 가능할 것이다. 영웅 열사들의 무덤은 혁명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인민들에게 순례지가 되고 있으며 결코 죽은 자로 받아 들이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시작과 끝은 있으나 서로 분리되지 않듯“현재의 과거” ,“현재의 현재” ,“현재의 미래”가 점이나 선처럼 하나로 연결되는 것처럼 무덤속의 영웅 열사들은 시공간 차원에서“과 거”로 분류하는 그곳에서“현재”로서 영구히 살아내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북조선 당국이 많은 국립묘지들을 역대에 걸처 조성한 이유는 우선 항일혁명 선렬들을 영생의 모습으로 내세워 지금까지 이어 내려온 혁명전통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가려는 목적에 있으며 그와 같은 계승은 로동당과 인민들의 확고한 의지를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영생의 차원에서 볼 때 모든 렬사릉과 애국자릉, 참
전군인들의 묘지들은 과거로서 매장된 것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로 혁명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안장된 여러 유형의 다양한 국립묘지들은 투쟁업적에 대한 높은 평가의 상징물이라고 볼 수 있다. 영웅 렬사들로 칭송받는 그들은 과거와 현재와의 연결고리로서 무덤이 라는 매개체로 신성화되었다. 어쩌면 현재 살아있는 북 인민들은 이들의 영웅적 죽음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애가 극적이고 영웅적인 인물들일수록 그들은 산자의 세계로 빈번하게 동원되어 자주와 주권 회복의 대열에 힘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덤속의 영웅 렬사들은 대미결전의 현장으로 소환되어 언제나 정당화되고 신비화되고 있으며 자신들의 영도자를 따르다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영원히 수령의 분신이 되어 있었다. 이런 영웅적 인물들은 생전에도 능력이 있었으나 죽어서도 현실 세계로 깊숙이 들어와 자신들의 영생이 사회에 강제되게 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듯했다. 이들에 대한 추앙은 20세기적인 사회주의 체제가 갖는 속성을 통해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북측이 지닌 주체사 상과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특수성이 오늘날의 북측 국립묘지들을 지탱 하고 유지시키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필자가 북측의 국립묘지들로부터 요청 받은 가장 핵심은 자주정신을 통해 평화를 이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평화는 곧 인민들이 생존과도 같이 여기는 조국통일로 이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자주적인 조국통일은 무덤 속 모든 영웅 열사들의 지상명령이며 간절한 염원 이었다. 오늘날의 분단 체제 속에서 어떻게 평화를 이루고 조국통일을 이룩하여 저들이 꿈꾸던 완전한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가장 긴급한 과제이다. 그리고 그 과제는 가장 구체적인 현장인 국립묘지에서부터 발현되어져야 할 것이다. 타민족에 의해서 고난을 당해 온 우리민족의 인식론적인 특성을 통해 국립묘지 에서 자신의 역사와 민족의 역사를 읽어나가게 될 것이다. 이는 역사의 객관성을 주장하기보다는 북녘 인민들의 체험 속에 축적된 판단력에 근거하는 주체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역사화해가 모색될 것이기 때문이다.
========== 4. 책갈피에 수록된 대표적인 문장 모음 ===============
책갈피에 수록된 대표적인 문장 모음 12개
<대표적인 문장 1>
“죽은 적(敵)”은 없다. 죽은 병사는 더 이상 적군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만 적이 되는 것이다. 죽고 나면 그저 역사의 무대에서 함께 싸운 용사였을 뿐이다. 그가 죽었기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이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적군이라 해도 존중하고 예를 갖춰 주는 것이 전장의 법칙이다. 원치 않은 전쟁이었다 해도 그 자체로 우리의 살아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는 아직 전쟁의 상흔이 아물지도 않았고, 총부리를 내릴 수도 없는 대치 상황이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특히 내가 남과 북에 각각 조성된 군인묘지들을 찾을 때마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상대를 죽인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영웅열사 칭호나 순국선열로 분류되어 각각의 국립묘지에 안장된 무덤속의 영령들은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고 나로 하여금 알 수 없는 통한의 폭풍 오열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인 문장 2>
남과 북의 국립묘지를 추도하는 행위는 민족 화해와 동질성 회복과 민족의 자주노선에 큰 기폭제가 될 것이다.
<대표적인 문장 3>
남측의 국립묘지는 “영원한 과거” 로서 조성되었다면 북측의 국립묘지는 “영원한 현재”로서 조성되었다. 특히 북측 국립묘지는 항일무장투쟁, 조국해방전쟁(6.25전쟁), 통일사업(대남사업)에서 “영웅”이나 “렬사” 칭호를 받은 고인들이 지금도 인민들이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남과 북의 국립묘지는 그 본질적인 의미와 양태에 있어서 공통점과 상이점이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강력한 이념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남과 북의 국립묘지들을 분단 70주년을 기해 동포들에게 올바로 인식시키고자 했다.
<대표적인 문장 4>
북측 국립묘지는 항일 독립투사들이 역사적 기원이 되어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으나 남측 국립묘지는 그 정체성과 상징성이 모호할 뿐 아니라 국립묘지의 재구조화가 불가피할 정도로 아직도 항일독립투사들이 국립묘지에 제대로 안장되지 못한 채 전국에 산재한 공동묘지에 떠돌고 있다. 역대 정권들은 공원이나 야산, 공동묘지 등에 매장된 항일투사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의 묘지들을 무관심속에 방치하면서도 친일파들의 묘소들은 국립묘지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는 극단의 모순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문장 5>
북녘의 국립묘지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통찰하는 일은 자본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묘지가 탄생한 배경과 함께 역사적으로 누적시켜왔던 감성과 정신 속에 내재된 자신의 현재적 위치까지 알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영웅 열사들의 무덤은 혁명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인민들에게 순례지가 되고 있으며 결코 죽은 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시작과 끝은 있으나 서로 분리되지 않듯 “현재의 과거”, “현재의 현재”, “현재의 미래”가 점이나 선처럼 하나로 연결되는 것처럼 무덤속의 영웅 열사들은 시공간 차원에서 “과거”로 분류하는 그곳에서 “현재”로서 영구히 살아내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대표적인 문장 6>
북조선 당국이 많은 국립묘지들을 역대에 걸쳐 조성한 이유는 우선 항일혁명 선렬들을 영생의 모습으로 내세워 지금까지 이어 내려온 혁명전통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가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와 같은 계승은 로동당과 인민들의 확고한 의지를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영생의 차원에서 볼 때 모든 열사릉과 애국자릉, 참전군인들의 묘지들은 과거로서 매장된 것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로 혁명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안장된 여러 유형의 다양한 국립묘지들은 투쟁업적에 대한 높은 평가의 상징물이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문장 7>
영웅 열사들로 칭송받는 그들은 과거와 현재와의 연결고리로서 무덤이라는 매개체로 신성화되었다. 어쩌면 현재 살아있는 북 인민들은 이들의 영웅적 죽음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애가 극적이고 영웅적인 인물들일수록 그들은 산자의 세계로 빈번하게 동원되어 자주와 주권 회복의 대열에 힘을 주고 있다.
<대표적인 문장 8>
무덤속의 영웅 열사들은 대미결전의 현장으로 소환되어 언제나 정당화되고 신비화되고 있었으며 특히 자신들의 영도자를 따르다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영원히 수령의 분신이 되어 있었다. 이런 영웅적 인물들은 생전에도 능력이 있었으나 죽어서도 현실 세계로 깊숙이 들어와 자신들의 영생이 사회에 강제되게 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듯했다. 이들에 대한 추앙은 20세기적인 사회주의 체제가 갖는 속성을 통해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북측이 지닌 주체사상과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특수성이 오늘날의 북측 국립묘지들을 지탱하고 유지시키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대표적인 문장 9>
자주적인 조국통일은 무덤 속 모든 영웅 열사들의 지상명령이며 간절한 염원이었다. 오늘날의 분단 체제 속에서 어떻게 평화를 이루고 조국통일을 이룩하여 저들이 꿈꾸던 완전한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가장 긴급한 과제이다. 그리고 그 과제는 가장 구체적인 현장인 국립묘지에서부터 발현되어져야 할 것이다. 타민족에 의해서 고난을 당해 온 우리민족의 인식론적인 특성을 통해 국립묘지에서 자신의 역사와 민족의 역사를 읽어나가게 될 것이다. 이는 역사의 객관성을 주장하기보다는 북녘 인민들의 체험 속에 축적된 판단력에 근거하는 주체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역사화해가 모색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문장 10>
나는 분단 이후 최초로 북측의 국립묘지와 남측의 국립묘지를 교차방문하며 역사화해를 시도하는 중차대한 일에 도전했다. 휴전선 DMZ, 그 아픈 허리를 따라서 남과 북의 국립묘지를 찾아 역사화해를 모색하려는 나의 발걸음은 흥분과 설레임 속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로 살육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양측의 영령들을 위로하고 보듬어주려는 나의 평화적 행동이 국내외 정세에 비추어 볼 때 너무 시기상조이며 성급한 행동은 아닌지 우려스럽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다. “용서와 사랑”에서 출발한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 의 단계에 진입하여 “유대와 연대”의 손을 잡고 “소통과 통합”을 이뤄내 마침내 완전한 “민족공조”의 길에 들어서서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것을 보고자하는 일념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대표적인 문장 11>
내가 남과 북의 국립묘지를 일일이 찾아다닌 행보에 대해 어느 누구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이런 행위가 어느 한쪽에 편파적이거나 그 체제에 충성을 맹세하거나 굴복하는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자주적인 평화통일의 여정에서 반드시 서로를 인정하며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열린 자세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모두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어느 한쪽이 상대를 무력으로 흡수통일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상대편 영토에 조성된 국립묘지들을 모두 폭파시키거나 파묘할 수는 없지 않은가?
<대표적인 문장 12>
우리나라를 수없이 침략하고 괴롭힌 일본과도 수교를 맺으면서도 유독 같은 민족이자 통일의 상대인 북측과는 아직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해방과 자주독립을 이룩하고 통일된 주권국가가 되려면 우리민족의 분단문제는 남과 북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내재적 관점에서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옳다. 남측은 친북이 되어야 하고 북측은 친남이 되는 일이 매우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것은 결코 상대에 대한 굴종이나 타협이 아니며 오히려 민족공조의 첫 걸음이 되기 때문이다.
=========== 5. 저자 프로필 ============
[저자 프로필]
남과 북을 셔틀 왕래하며 집필과 강연활동을 통해 동포들에게 민족화합과 자주통일을 위한 새로운 이슈와 비전을 제시하는 통일운동가이자 대북사역자이다. Social Movement Group NK VISION2020 설립자이며 산하에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역사), 동북아종교위원회(종교), 남북동반성장위원회(경제), 오작교포럼(언론), 문화예술위원회(예술) 등 다섯개 기관을 두고 활발히 시민사회운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직책>
*NK VISION 2020 대표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
*인터넷언론 프레스아리랑 공동대표
<저서>
「전태일 실록 1-2권(동연)」, 「북녘의 교회를 가다(동연)」 , 「북녘의 종교를 찾아가다(동연)」, 「손원태 회고록(동연)」, 「평양에서 서울로 카톡을 띄우다(가갸날)」, 「평양에선 누구나 미식가가 된다(가갸날)」외 여러 권이 있으며 공저로는 「평양냉면(가갸날)」 「북 바로알기 100문 100답(사람과 사상)」 「자주시대를 부탁해(민주노총)」 「북한, 다름을 만나다(선인)」 외 여러 권이 있다.
<저자 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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