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의 자전거 스케치
로마 근처의 그로타페라 수도원의 수사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들 중에서 한 권을 복원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들이 무심코 수백 년 동안 봉인되어 오던 블록버스터 습작을 무심히 공개했다. 복원 과정에서 수사들이 1600년대 초부터 붙어 있던 두 장의 종이를 분리하자 왜 그 페이지들이 맨 앞에 봉인되어 있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났다. 그 페이지들에서는 14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레오나르도의 좀 산만한 학생이 끄적인 낙서가 나왔다. 그런데 그 만화 위쪽 구석진 곳에 틀림없이 ‘자전거’로 보이는 조잡한 스케치가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자전거가 아니라 19세기 말에야 실현되는 체인 추진의 자전거였다. 마리노니는 그 자전거 스케치가 천재 레오나르도의 디자인을 어느 학생이 본뜬 것이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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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자전거 스케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전거를 발명했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그 자전거가 현실화되지 않았으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 1800년대 이전까지 근대적인 형태의 자전거가 만들어졌다거나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레오나르도가 그 디자인을 분명 창안했다면, 그 디자인을 잃어버리고 봉인하고 감추었던 사실은, 그렇게 수십 세대를 속여 왔다는 것은 세계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왜곡 가운데 하나라고 말이다. 레오나르도 사후 거의 400년 동안 도로 여행은 수레를 끄는 지친 짐승의 길, 맙소사 기원전 3000년부터 이용되었을, 그 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건 자전거도 아니고 퀵보드도 아니야
레오나르도 논쟁이 있기 이전에, 자전거의 발명은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칼 폰 드라이스 드 사베르브룬 남작, 줄여서 드라이스에게 가장 많이 돌아갔다. 드라이는 1816년에 나무로 된, 두 바퀴가 달린 운송수단을 만들어서 드라이지네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냈다. 크랭크나 페달은 없었다. 즉, 라이더가 “달리는 기계”에 걸터앉아서 발끝으로 치고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해부학적 문제를 차치하고(아이쿠)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타이즈와 여성스런 셔츠 차림으로, 그 모양도 우스운 드라이지네 위에서 깡충거리며 나아가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이건 결코 자전거가 아니었다. 안장이 있는 퀵보드라고나 할까. 드라이스는 퀵보드를 발명한 것도 아니었다. 퀵보드 같은 장치들은 그 옛날에도 많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으로 두 바퀴의 경이가 주는 멋을 세상에 선사했다는 명예를 태평스럽게 드라이스에게 수여할 수는 없다. 드라이스가 주요하게 공헌하는 것은 예전의 디자인에 조정 가능한 앞바퀴를 덧붙였다는 점 정도일 뿐이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혁신이기는 하지만, 그가 자전거를 발명했다고 말하는 것은 한참 과장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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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자전거로 잘못 알려진 드라이지네.
어떻게 이게 자전거인가? 그냥 끌것 또는 탈것?
리컴번트?
드라이지네를 넘어 20년쯤 지난 1836년경에, 스코틀랜드 친구 몇몇이 깡충거리며 나가는 것에 싫증이 나서 퀵보드에 여러 가지 크랭크와 레버들을 가까스로 달게 되었다. 땜질의 정확한 성격은 신비에 가려 있지만, 옛날의 재봉틀처럼 디딤판으로 뒷바퀴를 추진시키는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친구들은 대단한 물건에 다가간 셈이었다. 커크패트릭 맥밀란과 가빈 델젤은 살아남아야 할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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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달만 보면 누워서 타는 리컴번트 같이 생겼다
뼈흔들이boneshaker? 빠른발velociped?
좀 더 우아한 자기 추진 방식은 삐에르 미쇼와 에르네스트 미쇼 부자에 의해서 1855년 이후 10년 간 시도되었다. 이들 빠리장 부자는 그들 디자인을 세세하게 다듬어서 작지만 무거운, 크랭크 방식의 탈것으로 발전시켰다. 희망적인 사람들은 이 자전거를 벨로시페드, 냉소적인 사람은 본쉐이커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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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 부착된 최초의 크랭크
미쇼 부자의 영감은 아름다웠으나 그 실제는 실패였다. 크랭크와 페달을 앞바퀴에 달았던 것이다. 저런! 이 지점에서 자전거의 발전은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고 말았다. 사이클리스트들은 그 뒤 30년 동안 이 뒤엉킨 디자인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크랭크의 위치 때문에 그 기계는 자전거라기보다는 빅휠Bigwheel에 가까웠다. 벨로시페드의 최고 시속은 빅휠과 같은 시속 16킬로미터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쉐이커 테마를 변형한 탈것들이 유럽, 영국, 미국에서까지 순식간에 퍼졌다.
높은 자전거인high-wheeler?
하이휠러는 1876년 필라델피아 백주년 박람회에 소개된 이후에 미국에서도 얼마간 인기를 끌었다. 1878년 이후에는 알버트 포프Albert Pope 대령에 의해서 미국에서도 제작이 되었다. 포프는 “콜럼비아”라는 브랜드에 가격을 약 300달러로 매겼다. 빅휠러치고는 비싼 편이었으나 포프는 별 문제 없이 팔아치웠다. “두 바퀴의 기적”은 계층 구분이라는 말썽 많은 풍조를 그 시작부터 드리우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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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고풍스러운 하이휠러
이것으로 경주까지 했다니, 넘어지는 것도 우아할 것 같다.
안전자전거Safety Bicycl
마침내 1885년에 앞바퀴 구동 개념이 심한 감기처럼 그 소임을 다한 후에, 영국 코벤트리의 스탈리J. K. Starley가 “안전자전거Safety Bicycle”를 발명했다. 스탈리의 자전거는 위험한 하이휠러에 대한 소박한 대안으로 계획된 것이었지만, 그 디자인의 명백한 우수성은 대번에 나타났다. 스탈리는 적당한 부품을 대부분 적당한 위치에 배치했다. 바퀴들은 거의 크기가 같았고, 크랭크는 보텀브래킷에 있었으며 직접 구동 방식의 체인은 뒤축의 스프라킷에 연결되었다. 프레임은 다이아몬드 꼴이었다. 브레이크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 스탈리 자전거는 고정 기어라서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인 마찰 브레이크는 개념을 필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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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인 자전거의 출현!
1889년 스코틀랜드의 던롭이라는 사람이 고무타이어를
발명해서 진정으로 지금과 같은 자전거가 만들어졌다.
그전에는 고무를 바퀴에 묶고 다녀야 했다.
아마도, 스탈리는 레오나르도와 교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순수한, 평범한 천재였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그가 필요했다. 드라이스는 잊어버려라. 스탈리는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존 켐프 스탈리John Kemp Starl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