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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개역성경에는 '에데'(이미')가 생략되어 있다. 이 단어는 본절의 '둘째 편지'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서가 베드로전서가 쓰여진 후 얼마되지 않아서 기록되었음을 나타낸다. 사랑하는 자들아 - 본문은 베드로가 본서의 수신자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수신자에 대한 베드로의 깊은 사랑과 관심 그리고 친근감을 시사한다. 한편 보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페토이'는 호격이다. 베드로가 수신자들을 호격을 사용하여 부름으로(8,14,17절)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Green, Morris, Gibson).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 본서가 '둘째 편지'라고 한다면 '첫째 편지'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본서가 본래 앞부분과 본장이 분리된 편지여서 '첫째 편지'는 본서 1,2장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rotius, McNamara).(2) 혹자는 유다가 유다서와 본서를 썼으며,'첫째 편지'는 '유다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obinson, Smith). (3) 혹자는 '첫째 편지'는 잃어버린 서신이라고 주장한다(Spitta, Zahn, Green). (4) 혹자는 베드로전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igg, Blum, Bauckham). 이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본서 서론 참조).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 본문의 '진실한 마음'의 헬라어 '에일리크리네 디아노이안'은 문자적으로 '순전한 생각' 혹은 '순수한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수신자들의 생각이 부도덕한 욕망에 의해서 왜곡되거나 타락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Bauckham). 한편 '일깨워 생각하게'라는 말은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빠지지 않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새롭게 일깨우는 것을 의미한다(유 1:5). 이것은 본서가 수신자들로 하여금 이단 사설에 빠지지 않고 과거의 진실한 마음을 갖도록 일깨워 순결하게 하기위해 기록되었음을 시사한다.
=====3:2
곧...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 '곧'은 시간적 의미를 나타내는 부사가 아니라 본절이 1절의 연속임을 나타내주는 연결 부사로서 본절이 베드로가 수신자들을 일깨우고자하는 내용임을 나타낸다.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 '거룩한'은 거짓 교사들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부인한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1:19-21) 선지자들이 전하여 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영감으로 되었음을 시사한다(Cranfield, Green). 또한 '예언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에이레메논'은 완료 수동태 분사로 선지자들이 선포한말씀이 영구한 것임을 나타낸다. 수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단회적으로 주신 완료된 예언의 말씀을 통해 지금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Mayor) 상기해서 이를 부인하는 거짓 교사의 가르침을 대적하고 순수한 마음을 통해 지켜야 한다.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 -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의 헬라어 '톤 아포스톨론 휘몬 투 퀴리우카이 소테로스'는 이중 소유격으로 '기원', '알림'을 나타내는 독특한 표현법이다(Mayor, Gibson, Morris). 이것은 '명하신것'이 사도들에 의해 선포되었으나 주님에게서 나왔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롬 1:2;유1:17)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선포한 말씀의 권위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기인한것임을 시사한다(Cranfield, Green, Bauckham). 따라서 본절은 구원의 진리를 예언한선지자들과, 그것을 실제로 성취하신 그리스도와, 또 그것을 효과있게 해석하고 전파한 사도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Calvin). 한편 '너희 사도들'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당시 모든 사도들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속해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ffatt, Schelkle, Kelly, Schrage). (2)혹자는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전하여 준 사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pitta, Zahn, Bauckham, Cranfield, Mayor,Fornberg).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맥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준 사도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3:3
먼저 이것을 알지니 - '알지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콘테스'는 독립 분사 구문으로 베드로가 가르치고 전파할 때 흔히 사용한 문자의 형식이다(1:20, Bigg). 베드로는 이와 같은 독립 분사 구문을 앞서 언급한 예언자와 사도들의 말씀과 관련하여 경고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행 20:29-31;딤전 4:1,Cranfield). 먼저 수신자들은 사도와 예언자들이 전하여 준 말씀을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말세에'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다(Blum). 말세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프 에스카톤 톤헤메론'은 문자적으로 '마지막 날들에'라는 의미이며 그리스도의 초림과재림 사이에 신약 시대를 가리킨다(벧전 1:5,20;유 1:18, Green, Blum). 이처럼 신약시대를 '말세'라고 표현한 것은 오순절이후 세상의 심판 때 성취될 주의 재림을 기대함을 암시한다.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 '기롱하는 자들'은미래의 종말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을 가리키며(2:2,3,10,13-18,Blum) '기롱한다'는하나님을 경멸하고 모독하는 교만한 언사를 나타낸다.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뜻을따르지 않고 악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조롱하는 자들이다(Bauckham). 한편 '기롱하는 자들이...기롱하여'의 헬라어는 '엘류손타이...엠파이크타이'로서 동사가 먼저 나오고 주어가마지막에 놓여 있다. 본문의 이러한 구조는 기롱하는 자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을 시사한다(Morris, Bigg). 말세에 거짓 교사의 등장은 성경 전체에서 교훈하고 있는 것으로그리스도인들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전하여 준 말씀을 잘 숙지하여 거짓 가르침에 대적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3:4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 본절은 기롱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의 기롱은 '주의 강림' 즉, 모든 피조물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시는 주의 재림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림에 관해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며(마 24:34) 승천하실 때 천사가 약속하였으며(행 1:11; 3:20)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굳게믿고 전파하였다(살전 4:15;5:1-11;살후 2:1;벧전 4:7).따라서 주님은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기롱자들의 주장은 교회를 허물고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는 것이었다(Calvin).이러한 주의 재림에 대한 기롱자들의 조소는 마지막 날에 혀로 조소한 그 사실로 인해멸망당할 것이다(사 5:18,19;렘 17:15;마 24:38;눅 17:26-30).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있다 하니 - 본문은 기롱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는 근거이다. '조상들'에 대해서 혹자는 최초의 그리스도인 세대라고 주장하나(Kelly,Cranfield, Schelkle, Gilson) 구약의 조상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히 1:1, Blum). 왜냐하면 이것은 신약성경 전반에 나타나는보편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요 6:31;행 3:13;롬 9:5, Green, Bigg).한편 '잔다'는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막 5:39;요 11:11)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평안이 쉬며 부활을 기다리는 축복의 상태임을 암시한다. '그냥 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메네이'는 '지속되다' 혹은 '계속되다'라는의미로 갑작스런 이변이 일어나지 않고 과거나 현재처럼 그대로 남아 있음을 나타낸다. 기롱자들은 창조 이래로 세상의 모습과 자연 법칙이 변하지 않고 규칙적인 것처럼구약의 조상들도 수없이 잠들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이 계속적으로 반복될 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3:5
이는...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 본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저희가 의도적으로 이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RSV, JB, NIV, Plumptre, Bigg, Mayor,Moffatt, Spicq). (2) 저희가 자기 주장을 위해서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Spitta,W-indisch, Schelkle, Reicke, Kelly, Schrag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베드로는 본절에서 기롱자들이 주장한 것 즉 세상이 불변하다는 사실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것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된 것을 - 본문은 창 1장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창조사역이 성취되었음을 가리킨다(창 1:3-25; 히11:3). 하나님께서 명령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자연 질서가 그 자체로 충분하며 불변하다는 기롱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증으로 세상은 그 자체가 충분하여 불변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좌우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본문은 세상의 창조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이다. '하늘의 옛적부터 있는 것'은 창조때에 땅보다 하늘이먼저 창조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늘과 땅'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암시한다(창 1:1, Bauckham, Spitta). 물이 혼돈한 가운데서 윗 궁창과 아랫 궁창으로구별되면서 땅이 드러났다(창 1:8-10). 본문에 나타난 이런 구체적인 창조 과정은 긍극적으로 창조의 전 과정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진행된 것을 묘사할 뿐 창조 자체에있어서 다른 어떤 생각 즉 세상이 불변하다는 기롱자의 사상이 개입될 수 없다.
=====3:6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 베드로는 본절에서 세상이 불변하다는 기롱자들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관하셔서 홍수로 심판하신 사실을 예로 들어 반박한다. '이로 말미암아'의 헬라어 '디 혼'에서 관계대명사 '혼'이 받는 선행사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하늘과 땅'이라고 주장한다(Reicke, Marin). (2)혹자는 '하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James). (3)혹자는5절의 '물에서 나와 물로'라고 주장한다(Spitta, Plumtre, Moffatt, Chaine,Sidebottom). (4)혹자는 '물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Bigg, Kelly, Green).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물에서 땅이 드러나게 하신 것처럼(5절) 물을 통해서 세상을 심판하셨다. 홍수를통한 심판은 세상이 불변하다는 기롱자의 주장에 대한 반증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며 섭리하심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심을 예표한다(시 47:2,3,8).
=====3:7
이제 - 이것은 전후 문맥을 연결하는 연결사 '데'로서 현재의 하늘과 땅과재림후에 전개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조를 나타내고 있다(13절). 미래에 있을 심판에는 현재의 하늘과 땅이 불살라지고 새 하늘과 새땅이 약속된다.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 '그 동일한말씀'은 5, 6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명령을 가리킨다. 한때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물로 심판을 행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미래에 현재의 하늘과 땅을 심판할 것이다(Morris). 한편 심판의 방법은 과거에는 물이었던 반면에 미래에는 불사름이다. '불사르기 위하여'는 '불에 의한' 세상의 심판을 의미한다(Robertson). 하나님께서 물로세상을 심판하실 때 경건치 않은 자들만 심판하시고 하늘과 땅을 남겨두신 것은 미래에 있을 불에 의한 심판을 위해서 간직하신 것이다. 이와같이 예정된 심판이 있을 미래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때로서 현재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일지라도 이는 불심판이 유보된 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욕을 좇으며 기롱하는 불경건한 자들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잊으려 해도 끝내는 멸망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마25:31-46; 고전 3:13;살후 1:8). 한편 '불 심판'에 대해서 혹자는 범신론적인 스토아사상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나(Origen, TDNT), 세상의 마지막 날에 있을 불 심판은이미 구약성경의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예언 중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 유래된 것이다(사 29:6;30:30;34:4;단 7:9,10;욜 2:30,31).
=====3:8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 베드로는경건치 않은 자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한 후 사랑하는 수신자들을 위해 시 90:4을 인용하여 재림 지연에 대한 미혹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천 년이 하루 같은'은실제로 주의 재림이 연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의 때를 인간들의 시간 개념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이 설정해 주신 제한된 인간의 시간 개념은 어떤 법칙이나 제한에 얽매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에 비추어 볼때 우리의 천 년은 하나님의 하루에 불과한 것이다(시 90: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인간의 시간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달려 있음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다거나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거짓 교사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경계해야 한다(요 7:1-9 주제 강해 ''카이로스'에 관하여' 참조).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 본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앞절의 시간 개념보다 진보된 설명이다. '어떤이'는 주의 재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기롱자들(3절) 뿐만 아니라 기롱자들의 미혹으로 말미암아 악한 영향을 받고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Blum). 이들은 주의재림에 대한 약속이 더디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디 오시는 것이 아니라 '참으시는 것'이다. '참으심'은 피조물을 향해 세워놓은 계획에 대해서 실행하시는신실한 속성과 더불어 죄인들을 향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다. 주의 재림의 지연은 믿음 없는 자들이 보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태만이나 능력의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래 참으시는 긍휼이다. 한편 '너희를 대하여'의 헬라어 '에이스 휘마스'는 사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본문과 같이 기록된 사본은 B,C,P이며, 어떤사본에는 '에이스 헤마스'(우리를 대하여')로 되어 있으며(K,L) 어떤 사본에는 '디 휘마스'(A) 이러한 사본상의 차이는 뒤이어 나오는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것'과 연관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대상에 대한 언급으로, 사본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참으심의 대상이 전인류를 향한 것임을 시사한다(Calvin,Blum).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본문은 하나님을 기롱하고 재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미혹되어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자들에 대한해답이다. 그것은 회개하여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기를 원하는 대상에 대하여 혹자는 이미 선택받은 자들중에서아직 회개치 않은 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Clark) 타락한 모든 인류로 해석하는것이 더 타당하다(Calvin, Blum).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많은 차이점이 생기기 때문이다(겔 18:23,32;33:11;롬 11:32;딤전 2:4;딤후2:25). 하나님께서 전인류가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인류의 보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를 향해 똑같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성품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지연이 공허한 하나님의 약속임을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인류를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기회를 불신자들에게 알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성화된 삶을 영위해야 한다.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 '그러나...오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헥세이데'는 '헥세이'를 문두에 두고 반의(反意)를 나타내는 접속사 '데'와 함께 연결하여 기술됨으로 기롱자들과 미혹된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께서 오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오실 것임을 강조한다. 한편 '주의 날'은 일반적으로 심판과 관련된 그리스도의재림을 나타낸다(사 2:12;겔 13:5;욜 1:15;말 3:2;행 2:20;고전 5:5;살전 5:2;살후 2:2, Gibson, Charles). 본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재림이 도적이 아무런 예고없이 찾아오는 것처럼 예기치 않게 임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갑작스러운 재림은 이미 예수 자신이 말씀하셨고(마 24:43;눅 12:39), 바울과(살전 5:2)요한이(계 3:3;16:15) 강조한 것으로 베드로는 이런 표현을 재삼 강조하여 수신자들이기롱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고 깨어 준비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 본문의 '큰 소리로'의 헬라어 '로이제돈'은 강풍이나, 강한 물살 혹은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세상이 파멸되거나 진멸될 때 나타나는 소리를 암시한다(Gibson). 이는 곧 주의 재림에 나타나게 될 심판의 무서운 상태를 암시한다(계 6:14;20:11).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 '체질'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토이케이아'는 '스토이코스'(열')에서 유래된 단어로 세상을 구성하는 원물질 곧 흙, 공기, 불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가리킨다(갈 4:3;골2:8;히 5:12, TDNT, Robertson, Blum). 이것은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물질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문은 주의 재림 때에 온 세상이 불에 타 해체됨을 시사한다.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드러나리로다'의 헬라어 '휴레데세타이'는 사본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본절 역시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태워 버리다'(A.L). 이 경우는 인간이 이루어 놓은 모든것이 파괴되고 불살라 지는 것을 나타난다. (2)'발견하다'(* ,B,K,P). 이 경우는 인간의 모든 것이 심판 때 분명히 알려질 것임을 나타난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중 전자가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불로 태워질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NIV, Blum).
=====3:11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 이제 베드로는 확실한 재림을 앞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취하여야 할 자세에 대해 권면한다. '어떠한 사람이'의 헬라어 '포타푸스'는 헬라어 어법상 의문문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감탄사로 사용된 것으로 하나님이 택한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의 시민인 동시에 하늘나라의 시민권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Gibson, Charles). 한편 '되어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파르케인'은 '에이미'(이다', 'be')의 강조형으로 그리스도인의 지속적으로 영위해야 하는 종말론적 삶을 시사한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 '거룩한'은 악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헌신된 것을가리키며 '경건한'은 하나님을 닮아가며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Blum). 그리스도인들은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확실히 파멸될 것이기 때문에 악을 떠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하나님의 날'은 구약성경의'여호와의 날'과 같은 의미로 10절에서는 '주의 날'로 나타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재림을 가리킨다(계 16:14, Green). 한편 '바라보고'의 헬라어 '프로스도콘타스'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구약에서 발전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나타낸다(Robertson, Calvin, Bauckham). 또한 '간절히 사모하라'에해당하는 헬라어 '스퓨돈타스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면서 오래 참으시는 성품과 관련된 것으로(9절) 문자적으로 '서두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사 60:22의 반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회개를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회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종말을 앞당길 수 있음을 시사한다(사 10:23, LXX;행 3:19,20, Eliezer, Bauckham, Blum).그리스도인들은 깨어 있어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주의 재림에 관한 소망을 잠시라도 잊지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통해서만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종말론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 '그 날에'(디 헨)는 문자적으로 '날 때문에'라는 의미로 그 날 곧 '하나님의 날이오기 때문에'라는 의미로 그 날 곧 '하나님의 날이 오기 때문에' 또는 '그 날의 임재때문에'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하여 온 세상은 불을 통한 심판을 받아사라지게 된다(10절).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 베드로는본절에서 하나님의 날에 경건한 자들에게 약속된 것에 대해 구약성경을 통해 설명하고있다. '그의 약속'은 하나님 자신의 의에 근거한 약속으로(사 11:4,5;45:8;렘 23:5-7;33:16;단 9:24) 노아 시대에 대 홍수로 불경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죄악된 세상을 새롭게 하셨듯이 주께서 재림하는 하나님의 날에 온 세상을 불로 심판할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의가 영원한 집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시킬 약속을 말한다(사 65:17;66:22;계 21:1). 한편 '새 하늘과 새 땅'은 구약성경(사 65:17;66:22)과 유대 묵시문학에 나타나며(위경 에녹1서 45:4,5;72:1;91:16;바룩 2묵시록 32:6;44:12;57:2;에스라 4서 7::75) 신약성경에서도 받아들여져 나타난다(마 19:28;롬 8:21;계 21:1). 이것은 하늘과땅이 새롭게 창조되어(시 102:26;사 51:6;히 1:11;계 20:11) 새로와지고 완전해짐을시사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날'이 죄악된 세상과 피조물에 대해서는 멸망과 재앙의의 날이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악과 세상의 고난을 도말하는 기쁨의 날이될 것임을 기억하고 기대하며 사모해야 한다(벧전 1:7).
=====3:14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 베드로는 새하늘과 새 땅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경건한 삶을 실천해야 할것인가에 대해 언급한다. '점도 없고 흠도 없이'는 거짓 교사들이나 기롱자들의 미혹되고 방종하는 삶과 대조되는 삶으로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이 살아야 하는 삶이다. 이런 삶은 그 기준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의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온전하고 거룩한 삶을 가리킨다(민 19:2;빌 2:15;벧전 1:19). 한편'평강 가운데서'는 소망과 인내에 뿌리를 박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근거한 상태를 의미한다(1:2).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재림의 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될구원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 베드로는 9절에 이어 그리스도의 재림이 연기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부가적으로 설명한다. 기롱자들 그리스도의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며, 하나님의 인내이다. 따라서 재림의 지연을 재림을 부정하거나 핑계의 근거로 삼을 것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 '형제'라는 호칭은 바울이 복음을 위해 사역하는 동역자를 부를 때 즐겨 사용한 것이었으며(고후 2:13;빌 2:25;살전 3:2) 당시 로마 교회 지도자들에게 흔히 사용된 호칭이었다(엡 6:21;골 4:7,9;벧전 5:12). 초대 교회 때에 베드로와 바울이 서로 좋지 않은 긴장 관계에 있었음을 전제하면서(갈 2:11-14) 튀빙겐 학파(Tubingen Schule)는 본절이 본서가 위작(僞作)임을 나타내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형제간의 사랑과 용서를 강조했던 사도들의 사상에 어긋난다(엡 6:21;골 4:7,9;몬 1:16, Green, Bauckham). 사도 베드로는 본절에서 같은 사도로서 바울에게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언급하고 있으며(Bigg) 자신이 언급한 재림에 관한 교리도 바울의 사상과 일맥 상통함을 암시한다(롬 2:4).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 혹자는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파사이스 에피스톨라이스'에 정관사가 없으므로 '모든 편지'는 바울의 서신에 고정시킬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접할 수 있었던 여러 서신들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Morris). 그러나 '모든 편지'는 전후 문맥상 바울이 쓴 모든 서신들을 가리킨다(Gibson, Bigg).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 바울도 자신의 서신에서 여호와의 날, 즉 세상의종말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장한 바대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아시아에 있는 지역은 물론 그 외 많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회람되고 있었던 바울 서신에도 진술되어 있음을 언급함으로 자신이 언급한 그리스도의 재림이 확실히 성취될것임을 증거한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 본문은 바울이 쓴 서신들 가운데 이해하기 힘든 주제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바울에게 교리적 문제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신을 받는 독자들이 바울이 의도한 바와 다르게 이해할수 있는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예로,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를 말할 때(롬 3:20-24,28)그것을 성화의 삶을 소홀히 여기는 듯한 주장으로 이해하거나,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주장을(롬 7:4;8:1,2;갈 3:10) 도덕폐기론으로 이해하는 것 등이다(롬 6:1-7;고전 6:13-20). 바울이 쓴 주제들이 난해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 '무식한 자들'의 헬라어 '아마데이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배우다'라는 '만다노'의합성어로 성령으로부터 배우지 못했거나(요 6:45) 사도들로부터 영적 진리들을 배우지못한 자들(행 2:42)을 가리킨다. 또한 '굳세지 못한 자들'은 믿음의 뿌리가 내리지 않은 기초가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2:14;눅 22:32).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 '다른 성경'에 대해서 혹자는 바울 서신과 성경을 구별하여 '또 다른 종류의 성경'을 가리킨다고주장하나 사도들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것을 믿기 때문에(1:20;딤후3:16,17) '다른 성경'이라 함은 베드로가 바울 서신을 구약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성경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시사한다(Robertson, Green, Blum). 한편 '억지로 풀다가'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트레블루신'은 '왜곡하다', '비틀다'라는 의미로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바울 서신과 다른 성경을 자신들의 뜻에 맞게 아전 인수격으로 해석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무지한 생각과 논리로성경의 교훈들을 왜곡시키고 복잡하게 만들어 고집함으로 멸망당함을 의미한다. 베드로의 이 같은 단호한 주장은 그리스도인들이 난해한 말씀을 접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것이 아니다. 단지 성령의 도우심과 조명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바르게 해석할것을 권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3:17,18
베드로는 본절에서 본서 전체에 대한 요약과 함께 마지막 두 가지 권면을 하고 있다.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 '무법한 자들'은이제까지 언급된 거짓 교사들, 기롱하는 자들, 무식하고 굳세지 못해서 성경을 잘못해석하는 자들로서 영적으로 실족시키려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자신들의 거짓된생각과 논리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여 실족케 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떠나게한다. 한편 '삼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퓔랏세스데'는 '퓔랏소'( '경계하다')의 현재 중간태 명령형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대처하고 깨어 경계해야 함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대처하는 방법은 (1)그들의 활동을 미리 알며 (2)그들의 부도덕한 삶을 경고하며(2장) (3)사도들의 메시지를 일깨우고(1:16-18) (4)예언자들의 말씀을 통해 선포하며(2절;1:19) (5)그런 자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다(Blum).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 본문 두번째 권면이다.'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카리티 카이그노세이...예수 크리스투'에서 '은혜와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유격에 의해서 수식받고 있다. 이는 '은혜와 지식'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시사한다. 한편 '자라가라'의 헬라어 '아욱사네테'는 '아욱사노'(자라다')의 미완료로 계속적으로 자라가야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그리스도를영접하고 구원받는 것에만 만족하여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에 대한 지식 안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하여 굳세게 서서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빠지지 않는자가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 베드로는 마지막 인사말에서 주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 고백을 한다. '영광'의 헬라어 '헤 독사'는 문자적으로 '그 영광'이란 의미로 오직 주님에게만 영광이 있을 것을 나타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암시한다(Calvin). 한편 '영원한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헤메란 아니오노스'는 문자적으로 '그 시대의날까지'라는 의미로 '여호와의 날' 곧 주의 날인 '재림의 날'을 가리킨다(7,10,12절,Blum).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주님이 종말에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서 나타날'여호와의 날'을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모든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을부인하여 미혹하려는 거짓 교사들의 교훈에 미혹되지 않고 영광 가운데서 인내할 것을 권면한다.
그리스도의 재림
베드로후서3:1-9
거짓 선생들의 말은 매우 그럴듯합니다. 그들은 논리적인 '사실들'과 과학적인 데이터를 놓고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관한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누가 과학적인 연구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실체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원리는 '보라 그러면 믿게 될 것이다'가 아니고 '믿어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은 하나님을 믿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은 철저한 삶의 개혁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의 생활 스타일이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면 생활을 고치든지, 아니면 성경 말씀을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려고 시도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적당히 해석해 버리거나 아예 무시해 버립니다. 그들은 성경의 진실성을 믿지 않으며 성경 말씀을 고칠 경우에 당하게 될 무서운 결과들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계22:18-19).
우리는 성경을 묵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수신인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가장 즐겨 쓰는 문구로서 베드로전서 2:11절과 4:12절에서 사용했었는데 본 장에서 다시 나옵니다.
(벧후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3: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베드로는 지금까지 거짓 선생들에 대해서 혹독한 비판을 하였습니다. 3장에서는 베드로가 이 일로 혹시 수신인 성도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까 봐 염려하는 듯한 어조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그의 수신인 성도들을 계속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인 듯합니다. 베드로는 둘째 편지를 쓴다고 1절에서 밝혔습니다. 그런데 첫째 편지가 베드로전서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바울의 경우에서처럼 베드로의 서신들도 아마 우리들에게 전수되지 않은 것들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베드로 서신들의 목적은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3:1)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수신인 성도들이 건전한 사고를 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불건전한 사상들이 사회에 범람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사고방식으로 거짓된 이론들을 마치 증명된 확정적인 정설인 양 생각합니다. 진화론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쁜 사상들은 거의 학교 교육이나 기타 대중매체를 통해 펴지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대중매체들은 매우 큰 영향력이 있습니다. 교인들은 세속의 그릇된 사상과 성경 말씀에 배치되는 자유주의적인 해석들을 더욱더 경계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건전한 사고를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됩니다. 말씀의 묵상은 눈을 감고 상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체계적으로 일정한 분량의 본문을 읽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 성도들을 어떻게 보살피시며, 어떤 뜻과 성품을 가지신 분인지를 살펴보면서 자신에게 주는 교훈을 찾아야 묵상이 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신관이 깊어질수록 우리 자신들의 세속적이고 이교 적인 사고방식이 드러나게 되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3:2)해야만 성경을 날마다 대하는 자세가 보다 진지해집니다. 베드로는 자신도 사도 중의 한 사람이라고 당연히 전제하고서 그의 수신인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그들의 메시지가 지닌 권위를 다같이 인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하나의 답변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예수님의 명령들과 지신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회개와 믿음의 촉구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로부터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감금된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막1:14-15)고 선포하셨습니다. 바울도 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
베드로의 메시지도 회개와 믿음에 대한 것이며(3:9). 복음을 믿지 않고 불의를 행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언급된 "말세"는 오순절에서 시작되어 주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되는 기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 세대가 이 말세에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지상으로 재림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 교리는 시대와 역사적 상황에 따라 강조되기도 하고 무시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재림 교리는 교파나 특정 학파에 따라 많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혼란을 야기시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보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 벌써 재림하셨다고 말하면서 마태복음28:20절을 인용합니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어떤 이들은 오순절에 성령께서 큰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강림하셨을 때에 주님의 재림 약속은 육체적인 지상 재림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는 학자들 중에서도 재림의 형태와 시기에 대해 의견이 크게 다릅니다. 어떤 학파에서는 예수님이 '공중에서'모든 신자들을 이끌어 올리시고 그 다음 지상에서는 7년 대환란이 따른다고 가르칩니다. 또 다른 학파는 예수님의 재림이 7년 대 환난 이후에 있고 그 다음 주님의 지상 왕국이 건설되어 1천 년간 존속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7년 환난이나 1천 년의 지상 통치에 대한 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우주적 통치의 왕권을 가리키는 영적이고 상징적 언어라고 해석하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 사건을 놓고 왈가왈부합니다. 신학자와 목회자들도 재림의 순서나 전후 사건들을 상세히 설명해 보려고 부질없이 시간을 낭비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정확히 예고하거나 알아 맞추겠다고 시도하기도 하고 건전하지 못한 위기의식을 조장하여 성도들을 불안하게 하거나 흥분하게 하는 불순 사역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것도 나쁘지만,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에서 밝히지 않은 재림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 무슨 환상이나 계시를 통해 깨달았다고 발표하는 따위의 행위들도 커다란 잘못입니다. 우리는 2천 년간의 기독교 역사에서 그런 오류와 오행들이 반복되어 개인과 교회에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재림 사건에 대한 이견(異見)을 극대화시키거나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놓고 전혀 보장될 수 없는 무근한 주장들을 하면 결국 사단에게 좋은 일을 해 주는 결과가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간단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이끌려 올라가셨을 때, 제자들이 천사들로부터 무슨 말씀을 들었습니까? (행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둘러싼 상술 내용과 시기를 놓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기보다 분명한 이 근본적인 진술에 더 마음을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만일 주께서 우리들에게 재림 계획을 다 알리고 싶으셨다면 일체의 재림 사건들을 하나씩 세밀하게 설명하시고 도표까지 아름답게 그려서 우리들의 손에 쥐어 주셨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주님의 재림에 비추어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며 살아야 하는가?" 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벧전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벧전3: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 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재림 교리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비웃게 합니다(3:3-4). 그러나 베드로는 이 가르침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신약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언급이 수시로 나옵니다.(참조, 딤후3:1-4, 막13:7).
거짓 선생들은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지만, 그들의 반론은 틀린 것입니다.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3:4). 그들의 말은 결국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 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시간이 시작된 이래로 이 세상 일에 간섭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이 현재나 미래에도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지만 거짓 선생들의 주장들은 오류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였습니다. 창세기 1:7절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노아 시대에 홍수가 나서 모든 악인들이 죽은 사건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 기롱자들은 마지막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그리스도의 재림을 조롱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옛 세상을 물로 멸망시켰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입장이므로 앞으로 있게 될 불의 심판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벧후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활동을 인간들이 부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인간들이 악하기 때문에 (노아의 때처럼) 심판의 날을 정해 놓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원치 않습니다. 자기들의 죄가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자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처럼 시간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시간은 우리들의 활동을 통제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일 저 일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 "내가 시간이 날 때 그 일을 하겠습니다.' 우리는 자주 놀란 목소리로 "벌써 시간이 됐어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3:8)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이 말씀은 시편 90:4절의 반영입니다. 본 절의 의미는 하나님이 시작에서부터 마지막을 보고 계시며 마지막에서 시작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하고 영원한 현재입니다.
기롱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비웃었습니다. "하나님은 무능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자기의 약속을 이행하려고 했다면 벌써 옛날에 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말을 반박하였습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한편 우리들이 모두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요항들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모두 죄인들이며 누구도 핑계를 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잘 명심한다면 거짓 선생들의 꾀임에 넘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둘째, 거짓 선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롱할 때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을 배격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어떤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거나 예수님이 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등의 이론들은 거짓입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어리석은 열 처녀의 비유에서처럼 주님의 재림에 대비하지 못한 채 세월을 허송해서는 안 됩니다.(마25:1-13).
넷째, 모든 사람들에게 닥칠 대심판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속해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거나 못 받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들은 천국이 아니면 지옥으로 가도록 운명되어진 존재들입니다. 심판날이 되면 누가 하나님께 소속된 자이며 누가 아닌지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그냥 기다려 보겠다는 자는 가장 큰 바보입니다. 우리들은 갖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지금 현재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비교 겔18:23, 32).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의 구원을 원하시지만, 만인 구원을 작정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을 구별합니다.
다섯째, 모든 사람들을 향한 구원의 초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구원에로의 초대는 자기의 죄를 내던지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자들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갈보리의 십자가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최후의 심판을 지연시키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심판의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히9:27). 그 날이 이르면 은혜의 시기는 끝나고 맙니다. 그 때에는 누구도 회개의 기회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단12:10). 예수님의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마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13: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누가 감히 이 엄숙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을 불신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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