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河東)은 경상남도 최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 다사군 이었는데 경덕왕때 하동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때 남해현을 병합하여 하남현이라 부르기도 했다.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연원을 알수 없는 여섯 계통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하동정씨의 후손들은 본관을 같이 하면서 계통을 달리하는 다음의 세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첫째 계통은 삼한의 말기에 하동으로 이거하여 고려초에 호장(戶長)을 거쳐 평장사에 오른 정도정(鄭道正)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석숭(碩崇)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온 계통이다. 둘째 계통은 고려 초에 하동지방의 민병(民兵)을 주관하던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고려때 금자광록대부. 도첨의 좌정승. 검교태자첨사 등을 지낸 정응(鄭應)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셋째 계통은 고려 숙종과 명종조에 걸쳐 다섯 왕조에 벼슬을 지냈고 정헌대부. 지예부사.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후 하동백에 봉해진 정손위(鄭遜位)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손위(遜位)의 아들 세유(世裕)가 고려때 서북면 병마사를 거쳐 형부 상서를 지냈고, 세유의 아들 숙첨(叔瞻)은 참지정사를 거쳐 평장사를 역임했다. 참지정사 안(晏)은 평장사 숙첨(叔瞻)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진양 수령으로 나갔으나 부모의 봉양을 위해 사임, 뒤에 외숙(外叔)인 최우의 천거로 국자 제주가 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초(招)가 집의 희(熙)의 아들로 일찍이 당대의 명신 정몽주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태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을 거쳐 판승문원사에 이르렀다.
우사간(右司諫)을 거친 다음 세종조에서 공조. 예조참의. 좌우대언 등을 지낸뒤 함길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430년(세종 12) 왕명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찬진했다. 이어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정인지와 함께 역법(曆法)을 개정했고, [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 [삼강행실도발(三綱行實圖跋)]을 편찬했다
조선의 이름난 학자 인지(麟趾)는 현감 흥인(興仁)의 아들로 태종때 식년문과와 문과중시에 각각 장원 급제한 수재로 예조 및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고, 뒤에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와 직제학을 지냈다. 이어 형조판서에 승진하였으며,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예문관 대제학에 올라 [사륜요집(絲綸要集)],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을 찬진했으며, 공조 및 이조판서, 좌참찬 등을 거치고 계유정난때 공을세워 우의정에 올랐고 정난일등공신으로 하동부원군에 봉해졌다. 특히 그는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천문(天文) . 역법(曆法) . 아악(雅樂) 등에 능통하여 많은 책을 편찬했으며, 김종서 등과 [고려사(高麗史)]를 찬수하고 성삼문, 신숙주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창제에 공을 세우는 한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
인지의 두아들 또한 크게 현달하여 이름을 떨쳤는데, 인지의 큰아들 현조(縣祖)가 세조의 딸 의숙공주와 혼인하여 하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인지의 둘째 아들 숭조(崇祖)는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라 공조 및 이조참판을 거쳐 성종때 좌리공신으로 하남군에 봉해졌다.
제(提)의 다들 수충(守忠)은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여 환관(宦官) 교육을 위해 선발되었고, 뒤에 왕명으로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형제 무장으로 유명한 봉수(鳳壽)와 기수(麒壽)는 정묘호란때 용골산성에서 반장(叛將) 장사준을 죽이고 적군을 섬멸하여 포로가 된 많은 백성들을 구출하여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 밖의 인물로는 경흠(慶欽)과 충엽(忠燁)이 당대에 서화가(書畵家)로 이름을 날려,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한 실학자(實學者) 상기(尙驥)와 함께 명문의 대를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하동정씨(河東鄭氏)는 남한에 총 33,864가구, 142,4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