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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 경로당 자서전 쓰기 문덕임 - <총 64편>
<목차>
제 목 : 내 인생의 파도소리
<인사말>
1. 수학여행
2. 어머니의 감
3. 학교 가는 날
4. 초파일
5. 여름밤
6. 요가 하는 날
7. 송해 선생님
8. 6.25 전쟁
9. 바람아 구름아
10. 시집가던 날
11. 단칸방과 하숙생
12. 명절과 할아버지
13. 저축하는 습관
14. 내 삶의 반환점
15. 무명옷(목화솜)
16. 보험
17. 봉전암
18. 여름밤
19. 벼농사
20. 감나무
21. 남편이 병원 가는 날
22. 농장을 해체하고
23. 할아버지
24. 개포리 마을 부녀회가 조성되기 까지
25. 태풍
26. 혜경이 엄마와의 추억
27. 풍물과 열두 군고
28. 광수 아제를 그리며
29. 큰댁 형님
30. 남편과 개성 가는 날
31. 적십자 회장 할 때의 추억
32. 나의 약혼
33. 남편의 취미생활
34. 남편직장 생활할 때의 사연
35. 시누이 동생과의 사연
36. 시누이 동생이 집을 사다
37. 4층집 장만하기까지의 사연
38. 여성 이장들 중국 농어촌 견학가다
39. 구)한전 자리 주차장
40. 긴급 지원금
41. 사촌 형님과의 사연
42. 이장할 때 적십자 고지서
43. 마을 물통 청소를 하기까지
44. 경훈이 엄마 수급자 해주기
45. 새마을금고 재정보증 인생 공부
46. 너무나도 아까운 내 큰딸아
47. 소중한 내 아들
48. 사랑하는 내 둘째 딸
49. 내 효녀 막내딸
50. 서울 작은어머니
51. 우리 광일 시동생
52. 소꼽친구
53. 추억
54. 남편 친목계
55. 남편 환갑 때 제주여행
56. 중국 황산
57. 칠순 해외여행
58. 환갑 때 중국 여행
59. 나의 신혼생활
60. 친정 큰 오빠를 그리며
61. 친정 작은 오빠를 생각해 본다
62. 보험회사의 사연
63. 친정 사촌 고모님을 그리며
64. 내 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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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내 인생의 파도소리
<인사말>
내가 세상 살아오면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이제와서 되돌아보니 왜 그리
한 푼이라도 절약하고 아끼려고, 하숙하면서도 그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양손에
들고 택시비가 아까워 택시도 안 타고 시장에서 노두리까지 걸어서 다니곤
했습니다. 왜 그리 절약하고 살았던가 지금 생각하면 후회도 되지만 그렇게
살았기에 지금의 내가 남한테 손 안 벌리고 친구 형제 음식 대접이라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하고 싶은 취미생활 하면서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80년 살아온 세월 서투른 글이지만 있는 그대로 다소나마 털어놓았습니다.
자선전 쓰기를 권유 받을 때는 많이 망설이고 걱정도 됐으나 용기를 내 봤습니다.
누군가 내 글을 읽어 보시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자서전을 지도해 주신 문정권 선생님과 박미자 부장님, 황남대 학장님 그리고
복지관 관계자 여러분과 예총 서정희 사무국장님!
내 삶을 돌아보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1. 수학여행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어려운 시절이라 돈이 없어 수학여행 못가던 시절 학생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팔아가지고 대흥사로 수학여행을 갔다. 해남 현산면에서 내려 걸어서 쌀이랑 밥해 먹을 것을 짊어지고 걸어서 계곡에서 밥해 먹고 띠밭 재 넘어가서 대흥사에 도착하여 구경하고 저녁이 되어 기와집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에도 구경하고 찻길까지 걸어와서 무슨 차로 왔는지 기억은 안 난다. 그렇게 완도 도착했더니 부모님이 반기며 잘 갔다 왔냐? 물으셨다. 우리 은사님은 내가 70세 됐던가? 약 10여 년 전 광주를 가는데 같은 차를 타고 서울 가신다고 차 안에서 만나 깜짝 반기면서 지금도 덕임아 반갑다고 하시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광주에 도착했다. 점심이나 대접하려고 점심 먹으러 갑시다, 하니 나 지금 서울까지 가야 하니 그냥 갈란다. 그래서 3만 원을 드리면서 가시다가 점심 사드시고 가셔요 하고 드렸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고향은 완도 군외면이며 지금은 고인이 됐다. 보고싶습니다. 최길춘 은사님! 그때가 그립습니다. --------------------- 2. 어머니의 감 나 어릴 적 장좌리 친정집에는 큰 감나무 한 그루 있었다. 감이 주렁주렁 많이도 열린다. 가을에 감을 따서 된장 물 풀어 우린 감은 우리가 먹고, 홍시는 할아버지 드린다고 먹고 싶어서 달라고 하면 너희들은 커서 더 좋은 것을 먹을 것이니 할아버지 드린다면서 안 주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 어머니는 삼대독자 외아들한테 시집와서 아들 둘 낳고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호강 받고 살았다고 한다. 좋은 것 보면 어머니는 안 먹고 어른 먼저 드리고 나중에 우리가 먹고 어머니는 제일 나쁜 것만 먹고 하였다. 나는 어려서 어머니는 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참 효자였다. -------------------- |
3. 학교 가는 날
팔십 넘어서 대학교 간다고 동심으로 돌아가
친구야 학교 가자 걸어서 가자 걸어서 오손도손
이야기꽃 피우며 꽃도 보고 걸어서 가자
걸어서 가면 어느새 복지관 도착
복지관에 들어서면 반가운 얼굴
손에 손잡고 웃음꽃 피운다.
학장님의 강의 중 한 대목이 생각난다.
나이들면 아는 체, 있는 체, 잘난 체 세가지를 하지 말라고~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하시는 말씀이 생각난다.
인간이라 실천하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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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초파일 절에 들어서면 여기저기 울긋불긋 화려하게 등이 달려있다. 법당에 들어서면 부처님 앞 화려하게 차려져 있고 육법 공양한다고 꼬마아이 꽃바구니 들고 살며시 걸어가면 어찌 그리 예쁜지 스님 불공 소리 법당을 울리고 신도님들은 조용히 앉아 기도한다. 기도는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래서 기도는 마음에 수양이라 했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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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름밤
여름밤이면
친구들과 공원길 걸으며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운동한다.
걷다 보면
어느새 갈 시간
그냥 헤어지기 싫어서
우리 팥빙수나 먹으러 가자
팥빙수 먹고서야 헤어진다.
내일 또 만날 것을 기대하며 헤어진다.
만났다 헤어진 것이 인생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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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요가 하는 날
오늘은 요가 하는 날
가서 보니 내가 제일 일찍 왔네
요가를 하면 몸도 유연해지고
더 건강해진다고 하여 요가를 배우러 다녀본다.
젊은이들과 요가를 하니 조금 힘들어도
내가 젊어지는 기분이 들어 좋다.
요가 갔다 와서
나 혼자서 점심 먹고 피곤하니까 한숨 잤는데,
병희한테서 전화와서
대동 내 집으로 오라고해서
거기가서 저녁 먹고 이야기 꽃피우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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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송해 선생님 사람은 영원할 것 같이 살아온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송해 선생님은 전국 노래자랑 하면서 유모있게 너무도 잘하시기에 영원히 할 것처럼 보였는데 자기가 가실 줄 알았는지 마지막 좋은 양복 맞추어 입고 국민들한테 마지막 인사하려고 하였는데 그 양복 입지도 못하고 떠나셨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그 모습 다시 보고 싶습니다. ---------- |
8. 6.25전쟁
6.25 전쟁이 발발할 때 제 나이 아홉 살.
낮에는 무서워서 점심 싸 가지고 산 계곡에 가서 물놀이하고
온종일 놀다가 저녁에야 집에 온다.
이웃집 김미령 친구 아버지가 마을 이장을 하셨다.
나주부대가 와서 그때는 원동 다리(교량)가 없을 때 옷이고 발이고
갯펄을 잔뜩 묻혀가지고 이장집이라고 찾아와서 밥을 해주라고 했다.
모두 무서워서 오빠들은 숨어있고 못 나오게 하고 우리만 나와서 보았다.
우리 할아버지는 동네 남자 어르신들에게 절대로 피난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하여 나가지 않은 사람들은 다 살고, 나간 사람은 죽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 때문에 장좌리 동네가 피해가 적었다고 하였다.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팔십 고개 넘어서 인생 끝자락이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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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바람아 구름아
바람아 구름아 너는 어디로 가니
나뭇가지 꽃잎 잔뜩 흔들어 놓고
너는 어디로 가니 너 가는 곳 알려다오.
사람도 마찬가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그 세월 꼭 붙잡고 싶구나
나도 뜬 구름처럼
세월따라 왔지만 이젠 너만 가거라
나는 잠시 쉬어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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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시집가던 날
23세 어린 나이 장좌리에서 화흥리로 시집가서 보니 가족은 열두명
새댁이 밥을 지으려고 새벽에 일어나 가마솥에 물을 붓는다.
식구가 너무 많아 1년 살고 힘들어 수고 뒤편 짝지기미로 분가하였다.
방 하나 부엌 하나 솔잎 모아 불 지펴 밥 지워 먹고,
그 어려웠던 시절 다 넘기고 살았었는데
그때 그 시절이 자꾸만 스쳐가니 오늘의 삶에 교훈으로 남았는지
지금은 좋은 세상에서 지난 날을 돌아보며 나누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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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단칸방과 하숙생
단칸방에 살면서 우리 시아주버니 광주, 광일이 수고 입학해놓고
농삿집이라 집에 가면 일만 한다고 단칸방에서 집에 안 가고 숙박실에서
자고, 큰댁에서 곡식은 갖다 먹고, 채소 심어 시장에 갔다 팔고 한 푼
두 푼 저축해서 노두리에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집을 지어 단칸방에
살다가 그리 이사했다. 단칸방에 살다가 이사 오니 큰 대궐 같았다.
큰 집으로 이사를 왔으니 그래도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하숙
했다. 농촌지도소 직원, 여중 선생, 농산물 검사소 직원, 수고 선생들까지
수고 선생, 문원호 교장 선생, 너무 좋으신 분으로 제일 기억에 남고
지금까지도 안부 묻고 서로 연락하고 있다. 그때는 애들 키우라 혼자서
하기 힘들어 심부름한 아이 한 명 두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탄광에
다니는 사람을 누가 소개했는데, 3년 살고 바람나서 나가버렸다.
그때는 방에 불 때고 연탄불로 밥 지워 먹던 시절이었다.
애들 뒷바라지하랴 하숙생 밥해주랴 너무 힘들어도 그때는 젊으니까
다 해냈던 것 같다. 그때 고생했으니까 지금, 이 순간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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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명절과 할아버지
철없던 어린 시절 명절 오기만 고대고대 기다린 나, 명절에는 꼬까옷
입고 친구들과 뛰어 놀았는데 어머니들은 명절에도 왜 놀지도 않고
일만 할까 철없이 뛰어놀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그 세월이 흘러 지금 내가 그 위치에 서 있다.
명절이 돌아와 자식들 오면 무엇 한가지라도 더 해 먹이려고 쉴 새
없이 일한다. 그래도 명절이 오면 자식들 볼 생각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한다. 왔다 가고 없으면 허전하고, 아이고 허리야 다리야 안
아픈 데가 없다. 이것이 인생살이인가 보다. 나 어릴 적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문장이 좋으신 분으로 책력을 보셨다. 동네 아이들 이름을
지어 주시고, 택일도 봐주시고, 무슨 일만 있으면 물어보러 오신 것이
기억이 난다. 우리 할아버지는 엄격하시고, 동네에서 호랑이라고 이름이
났다. 그래도 손주들은 끔찍하게 생각하시고 우리한테는 참 잘해 주신
우리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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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저축하는 습관
나 어릴 적 공부할 나이에 돈 벌려고 사람들 따라 일하러 다녔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참나무로 숯을 구워 팔던 시절 대야리 대 숯 골 중턱에 숯가마가
있는데 그때 그 시절에는 인력으로 찻길 있는 데까지 운반하면 한
포대에 100원 인가? 받았던 기억이 나는데 조금이라도 벌어서 용돈
하려고 따라다니며 돈을 모으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 적
부터 저축하는 습관을 길렀던 것 같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 했던가?
아무리 작은 것이나, 짧은 시간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짐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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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내 삶의 변환점
어릴 적 국민학교는 죽청리에 있었는데 많은 비가 내리면 홍수로
마을 사이에 있는 교량이 끊겨 하천을 건널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면 부모님들이 데리러 오곤 하였다. 6학년 졸업식 때 왜 그리
울었던지? 학교에서 밤이 돼도 집에 가지 않고 종일 먹고 울면서
놀았던 기억은 더 이상 학교를 못 다닌다는 생각에 그렇게 서러웠던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공부에 취미가 붙었는데 중학교를 못 가고 동생을
돌봐야 했다. 시골에 살았던 아버지는 3대 독자 외아들이라 귀엽게
자라서 6.25전쟁 때 징용 안 보내려고 돈으로 버티다 기피자로 끌려
다니셨고 그 계기로 골병들어 농사일도 못 하시게 됐다. 어머니 혼자
고생하시였지만 할아버지는 일도 안 하시고 머리에 탕 근 쓰시고
죽청리 향교에 다니셨던 기억이 난다.
모두 고생했던 시절이었지만 부모님 살아생전에 고생한 그 시절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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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무명옷(목화솜)
내 나이 16세 정도 되었을 때 장좌리 개간 터에 우리 밭이 있다.
거기다가 목화를 심어서 밭에 목화를 따러 간다. 주래와 때깔이라는
열매가 있다. 목화를 딴 바구니에 어머니가 따서 가지고 오면 과일이
귀하던 시절 그렇게 맛이 있었습니다. 그 목화를 따다가 씨아시로 씨를
빼서 활로 타서 고추로 말아서 올래 가락에 지푸라기 끼워서 실을
뽑아서 실꾸리 어러 개로 만든다. 열 개씩 만들어서 실타래를 뽑는다.
여러 줄을 합쳐서 베를 나른다. 풀칠하면서 따뜻한 불 위에 놓고 베를
먼골로 빗어가면서 베를 맨다. 보두집에 한 올 한 올 끼어서 배틀 위에
차려 놓고, 실꾸리를 감아서 뜨거운 물에 삶아 북 속에 넣고 배틀에
앉아 베를 짠다. 베를 짜서 살며시 햇빛에 말린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무명옷이 만들어진다. 옛날에 딸 낳으면 무명베로 만들어서 옷을 농직이
해서 죽으로 만들어 놓고 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중국에서 담배 대롱 속에 넣어서 가지고 한국에
가져왔다. 나주 남평에 가면 문 씨 시조 산이 있다.
거기에 큰 제 각이 있는데 거기에 문익점 초상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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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보험
40대 중반 하숙을 하다가 아이들이 객지로 학교에 가면서 보험을
시작했다. 아들이 순천고등학교에 다니고, 처음에는 하숙했는데 큰딸이
순천대 가면서 자취했다. 2명을 하숙하기가 힘들어 자취시켜놓고 한
달에 세 번씩 다녔다. 하숙하기가 힘들어 누가 시험만 봐 달라고 하기에
보험회사 시험을 보러 갔다. 시험에 합격하니 다니라고 권유하여 하숙도
힘들고 해서 보험을 하게 됐다. 하숙하면서 보험 회사 다니다가 차츰
하숙을 줄였다. 처음이라 할 줄도 모르고, 연고를 대상으로 판매하다가
차츰 고객을 하나씩 늘려 갔다. 고객이 언제 저축이 끝난 지 다 적어
놓고 고객 관리를 하였다. 사무실 가면 칠판에 그래프가 잘하는 사람은
많이 올라가고, 못하는 사람은 적게 올라간다. 그것에 신경 안 쓰고 내
능력껏 했다. 보험은 욕심부리다 보면 더 손해 볼 때가 있다. 욕심
없이 내 능력껏 하는 것이 더 좋은 거 같다. 보험을 하다 보면 돈을
유혹하는 사람이 생긴다. 보험 하나 들어주고 돈 요구를 한다. 그러면
그때 조심해야 한다. 그 보험을 해약해서 그 돈이 나올 수 있을 만큼만
빌려주면 된다. 해약할 때는 사무실과 약속한다. 내가 고객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고 해약하게 되면 나한테 먼저 알려 주라고 약속을 한다.
어느 날 고객이 당좌수표 6백만 원짜리 한 장 가지고 와서 현금으로
바꿔 달라고 하였다. 수협 수표라 수협에 가서 추적해보았더니 부도난
수표였다. 고객한테는 부도난 수표라 하지 않고 돈을 빌리려고 해도
못 빌리겠다고 한 적이 있다. 보험회사 다니면 돈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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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봉전 암
내 나이 60대 중반이나 되었을 때 신흥사에서 범일 스님 주지로 계실
때 적멸궁 5대 사찰 순례를 갔다. 그 중 봉전암을 제일 먼저 가기로
했다. 봉전암은 미리 예약해야 갈 수 있다. 예약해놓고 완도에서 새벽에
김밥을 각자 싸가지고 출발하여 백담사까지 가서 백담사에서 걸어서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6시간 30분을 걸어서 갔다.
가서 보니 절도 조그만 하지만, 부처님 진실사리가 모셔진 5층 석탑이
세워져 있다. 법당에는 진실사리가 모셔진 절이라 부처님이 안 모셔져
있다.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잠자는데가 한사람 누울 만큼씩 그려
놓고 그 숫자대로 들어갔다. 좁아서 잠을 못자고, 앉아서 날 세웠다.
아침이 되어 아침밥이 맹물에 끓인 미역국 한 그릇에다 밥 한 덩어리
그것이 아침밥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또 6시간 30분을 걸어 백담사
에서 도착하여 둘러보고 전두환 대통령이 생활한 조그만 방에 입었던
옷만 몇 불 걸려있다.
계곡의 돌이 하얗다 하여 백담사라 하였다고 한다.
봉전암은 중국 오대산에서 부처님 진실사리를 가져 온 자장율사는
금강산에 올라 기도를 올렸다 어느 날 하늘이 환해지면서 오색찬란한
봉황새가 날아들었다. 신기하게 여긴 자장율사는 봉황을 따라 남으로
내려왔다. 설악산 봉우리 위를 날던 봉황새는 부처님 닮은 바위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자장율사가 그곳을 자세히 보니 부처님 이마 부분에서
사라진 것을 알았다. 주위를 둘러 보니 불두암 중심으로 좌우로 범상치
않은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는 게 아닌가 성지다!
바위 아래 사리를 봉한 뒤 5층 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었다.
부처님 이마에 봉황이 사라졌다 해서 봉전암이라 했다.
약 644년 전이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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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여름밤
옛날에 밀보리가 주식이었던 시절. 밀을 심어 수확해서 기계가 없던
시절에 맷돌에 갈아서 가루로 죽을 써먹기도 했다. 그 후 밀가루만
전문적인 만드는 기계가 나왔다. 그 기계로 밀을 빻아서 밀가루를
만든다. 그때는 밀가루가 더 맛이 좋았던 거 같다. 여름이면 밀가루로
팥 삶고, 밀죽을 써먹으면 그렇게 맛이 좋았다. 저녁에 밀죽을 먹고
남으면, 어머니가 양판으로 한 양판 담아 장독 위에 놓아둔다.
저녁에 놀다가 오빠들과 마당에다 밀대로 엮은 거적을 깔고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며, 그 죽을 오빠들과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다.
여름밤이 더워서 장좌리 선창가로 거적을 들고 오빠들과 잠을 자러
간다. 그러면 시원하고 모기도 없다. 어머니는 밤에 이슬 맞으면
안 된다고 혼 이불을 주신다.
지금은 미국에서 밀가루를 많이 수입해와서 국산 밀가루가 거의
사라졌다. 다시 조금씩 재배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 류계영 -
아이 때 늙은이 보고 백발을 비웃더니
그 사이에 아이들이 나를 보고 웃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아이야 너무 웃지 마라 나도 웃던 아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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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벼농사
옛날에는 기계가 없던 시절 농사지을 때 인력으로 다했다.
모내기 하면 대 행사였다. 품앗이로도 하고 쌀 한 되 주면, 하루 일을
해 주기도 했다. 양쪽에서 모 줄을 잡고 떼어가면서 모를 심는다.
비가 오면 우장 쓰고 비가 와도 모내기는 한다. 모내기할 때면 한나절은
모를 쩌서(뽑아) 놨다가 다음날 모를 심는다. 모내기하는 날은 어머니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쌀밥을 시루에다 찌고 보리와 팥은 밥을
짓고, 찐 밥과 보리밥을 혼합한다. 그러면 밥이 울긋불긋한 밥이 된다.
그때는 그 밥이 그렇게 맛이 좋았다. 감자에다 알밴 깡 다리하고 지져
놓고, 걸게 장만해서 남자 한 분이 지게로 가지고 온다. 그러면 어머니와
나는 지게로 지고 나머지는 머리에 이고 논으로 간다. 가지고 간 못밥을
논 한 모퉁이에다 크게 자리 잡고, 못밥을 나누어 먹는다. 주위 사람
다 불러서 같이 나누어 먹는다.
모내기를 해놓고 모가 어느 정도 크면 손으로 논을 매준다.
가을 되면 사람도 사기도 하고, 품앗이도 하고 벼를 손으로 벤다.
벼를 베서 지게로 져다가 벼를 쌓아놓고, 마당으로 둘러서서 홀태로
홀 튼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벼가 완성된다. 지금은 현대화가 돼서
모든 과정이 다 기계로 한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옛날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은 참 고생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밤에는 길쌈하여 옷 만들어 입고, 옷에다 풀 먹여 손질하고, 낮에는
농사일하느라 바쁘시고 화흥리 우리 어머니 우리 막내 낳을 때 너는
좋겠다. 좋은 세상에 태어나서 하시던 말씀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막내가 40대 중반이 되었다.
"세월아 가지 말라 가려거든 너만 혼자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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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감나무
우리 남편은 나무를 좋아하여 산에 나무를 캐러 가다가, 소가용리
장용이라는 사람을 만나 장용이네 밭을 보고, 여기다 감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어느 날 장용씨가 술을 잔뜩 먹고 와서 그 땅을 사라고
하였다. 그때는 땅 살 돈이 없었다. 그 땅은 농협에 저당된 땅이었다.
넘어가게 될까 봐 우리보고 사라고 해서, 그 땅을 사서 감나무 4백
그루를 심었다. 심을 때 구덩이 파서 경상남도 진영 가서 감나무 4백
그루를 사가지고 와서, 인력을 사기도 하고 수고 배 선원들도 와서
심어주기도 했다. 밭모퉁이에다 인분 구덩이를 파가지고 인분을 가득
채우고, 2~3년간 인분을 나무에다 염수마을 여자를 사서 한 동이씩
머리에 이고, 나무 한 그루에 반 동이씩 부었다.
그러니까 감이 너무 많이 달려서 떨어지지도 않고 감을 손으로 일일이
솎아 줘야만 했다. 가을에 감을 따서 작은 방에 쌓아놓고 장사꾼이
가져가는데, 인건비도 안 되게 헐값에 가져가기도 했다.
이웃집 동네 사람이 감을 갖다주라고 하면 감 한 접씩을 따서 차도
없으니까, 둘이서 자전거에 싣고 오다가 뒤에서 큰 트럭이 오면 비켜
준다고 하다가 구렁텅이에 빠진 적도 있다. 그렇게 고생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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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남편이 병원 가는 날
어느 날 갑자기 속이 더부룩하다고 해서 우리 집 앞 이영철 병원에
갔다. 이영철 원장님이 약을 지어 주면서 먹어 보고, 안 좋으면 위
내시경을 해보자고 하였다. 약을 먹어도 아무 차도가 없었다. 보건소에
가서 위내시경을 했다. 우리 딸 친구가 보건소에 있을 때였다.
아빠한테는 말 안 했는데 아빠 데리고,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전화가
왔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날 바로 전대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전대에서 하는 말이 사진을 보고, 수술해야겠다고 하였다.
남편한테 여기가 무엇을 알겠어요. 우리 서울로 갑시다. 사진이랑 자료
다 준비해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 있는 고모, 작은아버지, 다 깜짝
놀라면서, 고모는 고모대로 서울대 병원에다 예약해놓고, 작은아버지는
작은아버지대로 서울 중앙병원에다 예약해놓았다. 고모님이 서울에 와서
최고 병원으로 가야지 무슨 소리 하냐고. 서울대 병원에 고모님이 그때
당시 10년 전에 위암 수술한 최국진 박사 지금도 서울대 병원에
있다면서 최고로 잘한 권위자라고, 최국진 박사한테 하라고 하였다.
작은아버지가 하는 말이 너희 고모님 말대로 하라고 해서 서울대
병원으로 갔다. 그때 고모님 아들이 당시 김영삼 대통령 할 때 친동서
지 간이었다. 동생이 병원에다 말을 해놓으니까 일사천리로 진행돼서
바로 입원하고 검사 다시 하고, 간 지 일주일도 못 돼서 수술 들어가니까
담당 주치의가 와서 병원에 누구 아는 사람 있어요? 왜요? 수술이
빨리 들어갑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남은 몇 달을
기다려도 수술을 못 한다고 했는데, 동생 덕분에 빨리 진행됐다.
8시간을 수술하고 최국진 박사가 나오신다. 나는 얼른 뛰어가 최국진
박사님 어떻게 됐어요 물으니 수술은 잘 됐습니다만 지방에서 했으면
덮어버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많이 살면 1~2년 산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 그리고 남몰래 눈물 흘리며,
우리가 고생만 하고 살았는데 이대로는 못 보낸다고 다짐하고, 퇴원할
때도 비행기로 광주까지 와서 광주서 택시로 왔다.
남편이 아프니까 돈이 아까운 것이 없었다. 항암치료를 1년 동안 했다.
서울까지 힘들어 약과 주사를 가지고 와서 보건소에서 맞았다.
10년을 서울대 병원에 다녔다. 그 후 좋다는 것을 다해 주면 잘 먹고,
식당 밥도 안 먹고, 하루 조금씩 6번을 먹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10년은 내 말 잘 듣고, 몸 관리 잘했다.
지금은 30년이 넘어서 마음대로 술도 먹고, 아무렇게나 하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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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농장을 해체하고
병원에서 한 달 동안이나 있다 오니 집안일도 엉망이고, 농장을 가서
보니 풀하고 나무하고 똑같았다. 남편은 아파서 못하고, 내가 해보겠다고
예취기로 생전 안 해본 일을 한다고 풀을 베다가 기계 날이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서워 그만두고 말았다. 그 후 농장을 못 하고,
그때는 외국에서 과일 수입을 안 해서 감 가격이 좋았다.
광주 사람이 감 재배를 한다기에 5년 계약을 하고 세를 내주었다.
전문적으로 하니까 잘하시더니 5년 임기가 끝나자, 외국에서 과일을
수입해 와서 감 가격이 내려 타산에 안 맞는다고 그만하겠다고 하여
우리가 2년을 했다. 감을 수확하기까지는 약을 8번을 해야 좋은 감을
수확 할 수 있다. 꽃 필 때부터 하면 1주일 간격으로 약을 한다.
다음에는 10일 간격으로 하면 9월까지 약을 해야 좋은 감을 수확 할 수
있다. 2년을 하다 보니 도저히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묶여 놨다.
군에서 과일은 외국에서 수입해와서 타산에 안 맞는다고 감나무를 파
버리라고 지원해주었다. 감나무를 파 버리고 밭으로 만들어 새로
내주었다. 조금 하다가 남들도 경작을 안 해 결국은 산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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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할아버지
나 어릴 적 할아버지는 동네서 문장이 좋으신 분이다. 동네서 책력을
보셨다. 동네 아이들 이름을 지워 주시고, 날 귀도 봐주시고 동네 무슨
일만 있으면 물어보러 오고, 동네 제사만 모셔도 다라(큰 양푼)에다
차려서 오신다. 장좌리 솔개골에 논이 다섯 마지기가 있다. 물이 좋아서
흉년 밥그릇이라고 했다. 가을에 벼가 누렇게 익으면, 멧돼지가 내려와서
벼를 먹는다. 옛날에는 상정 막을 지어서 볏짚으로 움막을 지은 것을
보고 상정 막이라 한다. 저녁이면 상정 막에서 자고, 멧돼지를 지킨다.
할아버지를 따라 가서 같이 자고, 아침 일찍 집에 돌아온다.
옛날에는 어른 밥상을 따로 차려 드렸다. 할아버지 밥상은 항시 독상으로
차려 드렸다. 손주 배고플까 봐 상 내러 가면 김밥 한 덩어리 싸놓고
주시면서 이것 먹고 가라고 하신다. 우리 할아버지는 엄격하시고, 불의를
못 보신 분이다. 동네서 호랑이 할아버지라고 이름이 소문이 났다.
그래도 손주들 한테는 정도 많고, 참 잘해 주셨다.
항시 두루마기 입고, 탕근(양반 모자) 쓰시고, 향교에 다니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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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개포리 마을 부녀회가 조성되기 까지
완도읍 개포리 마을이 새로 개발된 지역이라 마을에 부녀회가 없었다.
처음으로 부녀회를 조성하기로 하고 마을 여자들이 사무실도 없어 남의
집에서 모였다. 부녀회장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초대 회장은 조수자
언니가 하였다. 1년 지나니 못하겠다 하여 읍사무소에서 매월 모이기로
하고 부녀회장을 선출하기로 했다. 지명을 하면 다 못하겠다고 하여
투표하기로 하였다. 서송자와 문덕임을 선정하여 투표해서 하기로
하였다. 투표 결과 문덕임한테 몰표를 주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맡게
되었다. 동네가 아무것도 없었다. 부녀회 회비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장갑 장사도 하고 부녀회원들과
박스를 모아서 팔기도 하여 기금을 마련하여 불우이웃 돕기도 하고
명절이면 혼자 사시는 할머니 조손 가정에 쌀 한 가마씩 사서 방문하고
마을에 물품을 준비해서 텐트, 가마솥, 그릇, 상을 준비해서 빌려주고
돈을 받기도 했다. 옛날에는 집에서 잔치하던 시절이라 빌려다 썼다.
그렇게 2년을 했다.
그리고 힘들고 해서 그만두기로 하고 이현자 언니한테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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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태풍
6.25 전쟁으로 인해서 아버지는 골병들어 일도 못 하시고 집안이
조금씩 어려워졌다. 친구 흥애 아버지가 놀러 오시면 시조나 한다고
무릎치고 노래하시는 모습이 생각이 난다. 큰오빠는 군대 가시고 작은
오빠와 내가 같이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태풍이 불어
옛날에는 김발 막은 산말(말뚝)을 바닷가에 세워놓았다.
태풍이 밤에 불어 산말이 떠내려간다고 새벽에 호롱불 들고 오빠와 같이
바닷가로 갔다. 컴컴하니까 바닷가에 있는 남의 집 부엌에서 날 새기만
기다리다가 날이 밝자 바닷가로 나갔다. 산말은 남의 것 하고 섞여서
누구 것인지를 몰라 아무렇게 조금 주어 세워놓고 왔다. 그렇게 집안일을
도우며 친구들과 같이 품앗이 다니고 할머니와 같이 밭일하고 옛날에는
풀도 베고 보릿대로 거름을 쌓아놓고, 어른들을 사서 지게로 져다가
밭에다 쌓아 놓았다가 보리를 파종했다.
그때는 곡식 가격이 좋아서 곡식을 주고 사람을 사서 농사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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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혜경이 엄마와의 추억
혜경이 엄마는 완도 하숙집 딸이었다. 남편은 약산이 고향이고 교편
생활을 하였다. 완도 같은 마을에서 살았다. 혜경이 엄마는 너무 부지런
하고 남의 일을 잘 도와주기도 하였다. 마음씨가 참 좋은 사람이었다.
같이 산으로 바다로 많이 다녔다. 한 번은 삼두리 공동묘지 밑에 있는
바닷가로 꿀(석화)을 따러 갔다. 동네 사람이 와서 외지 사람들은 못
오게 한다고 나가라고 하여 삼두리 동네가 학교가 있는데, 거짓말로
삼두리 학교에서 왔다고 하였다. 그래요? 그러고는 그냥 가버렸다.
그리고 꿀을 따가지고 해가 질 무렵 집에 온다고 공동묘지 아래 도로에
올라오는데 사람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린다. 사람이 있는 줄 알고
왔다. 도로에 와서 보니 아무도 없다. 무서움이 확 들었다.
집에 와서 혜경이 엄마한테 그 말을 했더니 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했다. 어느 날 산으로 밤을 주으러 갔다. 불목리 관리하지 않은
산으로 밤을 주으러 갔다. 밤을 가방 가득 주어서 짊어지고 머리에다
이고 찻길로 집에 와서 다라에다 부으니 다라에 가득 찼다. 그때는
젊어서 산으로 바다로 혜경이 엄마랑 많이 다녔다. 그때가 좋았던 것
같다. 지금은 이진모 선생님은 고인이 되고 혜경이 엄마는 자식 따라
서울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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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풍물과 열두 군고
서울대 병원에서 한 달 가까이 있다 오니 주위 사람들이 네가 환자
같다. 그때 내 체중이 49킬로 밖에 안 나갔다. 애들 이름도 생각이 안
나고 아무 기억이라고는 안 났다. 기억 상실증에 걸리는 것 같다.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나가서 무엇이라도 해야지 그리고 지도소에서
하는 풍물을 배우러 다녔다. 풍물을 배우면서 악보를 외우고 친구들과
웃고 하니까 기억력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열두
군고를 배워가지고 열두 군고 회원에 가입해서 20년이 넘도록 활동했다.
전남 풍물대회도 가서 일등도 하고 상도 많이 받았다. 그중에 제일
기억에 남은 것은 청산 아저씨들과 멸치 휘 리 뱃소리하고 열두군고를
가지고 영주로 경연대회에 갔다. 멸치 휘 리 뱃소리를 잘하시라고
막걸리를 먹여가지고 더 못했다고 하여 회원들이 웃기도 하였다.
청산 할아버지가 소리하다가 틀니가 빠져버렸다고 찾고 난리가 났다.
찾다 보니 자기 호주머니에 빠져서 다행히 그냥 찾아서 고생을 덜 했다.
멸치 휘 리 뱃소리가 특이 했던지 최우수상을 받아서 왔다.
문정안 오빠도 같이 열두 군고 활동하기도 했다.
오빠는 참 즐거움이 많은 사람이다.
<풍물과 열두 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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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광수 아제를 그리며
내가 시집을 가니까 광수가 중학생이었다. 우리가 큰댁에서 1년 살고
분가했다. 광수아제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수고를 입학했다.
내가 단칸방에서 같이 데리고 있었다. 집에서 다닐 수도 있었지만 공부
한다고 집에를 안 갔다. 공부도 잘하고 착해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여
공주 사대를 보내달라고 하였지만, 시골에서 어려우니까 못 보내고
공무원 시험 본다고 노두리에서 내가 하숙하던 때였다. 옛날에는 할부로
미싱을 샀다. 어느 날 미싱이 없어졌다. 할부 장사가 와서 할부 돈 안
준 줄 알고 가져간 줄 알았다. 이웃집 사람들한테 할부 장사 왔더냐고
물었더니 안 왔다고 했다. 뒤로 알고 보니 광수 아제가 책상이 없어서
미싱을 책상 삼아 공부한다고 뒷방으로 가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해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섬으로 발령받아 공무원 생활
하면서 첫 월급을 타가지고 와서 주면서 형님 옷 사주라고 하였다.
돈 못 벌고 공부할 때 형님 옷만 다 입었다고 옷 사주라고 하였다.
그 돈 안 쓰고 통장에다 넣어 놓고 제대해서 오면 양복이나 한 벌
해주려고 하였다. 1년도 근무를 못 하고 군대에 갔다. 군대에서 제일
좋은 데서 근무한다고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어머니는 광수는 좋은
데서 생활하니 마음이 놓인다고 하였다. 광일이는 외항선을 타니 항시
걱정하였다. 옛날에는 군 생활이 3년이다. 3년이란 긴 세월 다 마치고
오늘 제대한다고 하는 아침에 막사에서 누전으로 인해 전사했다는
통보가 왔다. 기가 막히고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가서 정년퇴직하도록 월급이 나오고 연금
나오고 큰댁에 시숙님은 편히 살게 하고 가셨다. 우리 막내가 배 속에
있을 때 전사했다. 지금 벌써 약 40년 된다.
그때는 우리가 복이 없어 좋은 형제 못 지키고 가셨다고 통곡하고
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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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큰댁 형님 우리 형님은 중도리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형님은 키도 크고 인물도 잘생겼다. 시숙님은 작은 체격이지만 야무지고 똑똑한 분이다. 내가 시집와서 보니 12명 식구에다 농삿집에다 시숙님은 일도 잘 안 하시고 큰일만 조금 하시었다. 아버님 어머니가 많이 하신다. 시동생들 뒷바라지 다 하시고 부모님 모시고 사셔도 나보기는 불평 한마디 없이 잘하시고 어머니는 집안일 하시고 형님은 들일 하신다. 그때는 김발도 하고 바다에 가서 낙지도 잡고 꿀도 깨고 꼬막도 잡고 화흥리 앞바다 갯펄이 좋아서 바다 것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여자들이 더 힘들었다. 바다에서 김을 채취해다가 저녁에 호롱불 밑에서 방에 둘러앉아 파래를 골라냈다. 그때는 형님은 잠도 안 졸고 잘도 하는데 나는 잠이 쏟아져서 꾸벅꾸벅하고 졸리고 있으면 가서 자라고 하신다. 그때는 식구가 많아도 어른들만 일하고 시누이 동생들은 일도 잘 안 하고 사치만 하고 있다. 형님은 시누이 2명에다 시아주머니 3명에다 뒷바라지 다 해도 불평 한마디 없이 잘하시는 것을 보면 그때는 몰랐 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참 존경스럽습니다. 형님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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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남편과 개성 가는 날
남편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하는 11명의 동갑 계를 조직하여
가끔 여자들도 초대해서 부부 동반으로 모임도 많이 다녔다. 그중 제일
기억에 남은 것은 부부동반으로 개성에 갔던 것이다. 개성에 가기로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지금 개성가면 위험하니까 안 간다고 하였다.
이럴 때 안 가면 못 간다고 가자고 설득하여 개성에 갔다. 개성에 도착
하니 개성공단 직원들이 다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고 환영한다. 개성에
도착해서 보니 산에는 나무하나 없이 민둥산이고 들에는 풀잎 하나 없고
논에는 비어낸 모 포기가 서너 개나 된 것 같다. 관광지를 가면서 보니
똑같은 집이 모여있는데 사람은 하나도 안 보이고 집 근처 도로에 군복
입은 남자 한 분이 막대기처럼 꿋꿋이 서 있다.
도롯가에 전깃줄이 있는데 사람 팔뚝만 한 전봇대가 서 있다.
박연 폭포를 가서 구경하고 조금 올라가면 조그마한 암자가 있다.
구경하고 내려오는데 남편 친구 김형록이란 분이 쭈르륵 미끄러져서
때 굴 때 굴 굴러서 밑으로 떨어진다. 웃기도 하고 다치지나 안 했나
걱정했다. 다행히 다치지는 안았다. 다음 관광지로 개성 시내를 내려오니
사람도 하나씩 보이고 차도 하나씩 보인다. 시내도 조용하고 무슨 상점
하나 안 보인다. 선죽교라는 다리를 갔더니 선죽교는 정몽주가 피살된
다리다.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에 대나무가 자랐다고 해서 선죽교라고
했다. 선죽교 옆에 조그마한 상점이 하나 있는데, 가게 주인은 옛날
한국에 1969년대 한복을 입고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점심 때가
되어 점심을 먹는데 상차림이 각자 칠 첩 반상기에다 밥을 주었다.
구경하고 남으로 내려오니 모든 들녘이 다 푸르고 사람 산 것 같았다.
서울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완도에 내려왔다. 다음에는 평양간다고
하였는데 남과 북이 막혀 버려서 못 가고 말았다. 지금은 갑 계원이 다
돌아가시고 세 분 남아서 우리도 언제 갈지 모르니 부지런이 좋은 것
맛있는 것 많이 먹자고 한 달에 세 번씩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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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적십자 회장 할 때의 추억
완도읍 적십자 활동을 활발히 할 때였다. 제일병원 김상님 언니가 지구
회장을 하고, 완도 적십자, 주도 적십자, 완도에 적십자는 열 개가 넘게
있었다. 개포리가 없어서 개포리에 적십자 하나 개설하자고 하여 장보고
적십자라는 이름으로 하나 개설했다. 그리고 초대 회장에 이정숙이가
하고 다음은 우금자, 3대 회장에 문덕임이가 선출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모임 장소가 없어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회의를 하였다.
봉사 단체라 항상 어디 가서 봉사해야 할까 그런 회의를 한다.
독거노인, 장애자, 홀로 사시는 할머니, 조손가정 찾아다니면서 봉사한다.
적십자는 봉사해도 지구회에서 나오는 것으로 많이 한다.
한 번은 지구회에서 어려운 집수리하라고 사십만 원이 나왔다.
회원들에게 한 집 추천하라고 하여도 못해 장좌리 올케한테 어려운 집
있으면 한 집 추천해 주라고 했더니 허 구월 집을 추천받아 집에 가보니
흑집에다 벽에 흑이 부글 부글 떨어져서 종이를 부칠 수가 없어서 못
하고 부엌도 밥도 못 해 먹고 밖에서 밥을 해 먹고 있었다.
장좌리가 고향인 군청에 다니시는 김동삼 지역개발 과장님을 찾아가
요즘도 그런 흑집이 있더라고 도움을 청했다. 그래요? 몰랐습니다. 바로
사회계로 연락하여 2백만 원을 지원받도록 해주시면서 태풍 등 재해로
주택 피해가 있을 때는 지원금이 많이 나오는데 그렇지 않으면 어려워서
2백만 원밖에 못 했다고 하였다. 그것도 감사한다고 하고 우리
적십자에서 십만 원 보태고, 지구대에서 나온 돈 4십만 원 등 오십만
원 하고, 막내아들이 이백만 원 합계 450만 원 가지고 읍사무소
수급자들 집수리하는 사람들한테 맡겼다. 지붕만 놔두고 다 철거하고
새로 짓다시피 했다. 양쪽으로 방 1개씩 방 2개, 가운데 거실 겸 부엌,
화장실 재료는 다 중고로 갖다 완전히 새집처럼 지어 주었다. 장애를
가진 아들과 둘이 살다 아들은 돌아가시고 지금은 혼자서 살고 있으며,
계속 적십자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
봉사활동을 해보면 큰 보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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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나의 약혼
나는 장좌리에서 3대 독자 외아들 밑에서 아들 둘, 딸을 낳았는데
귀한 집에 딸이 태어나서 귀염받고 자라서인지 아무 철없이 큰 것 같다.
장좌리 한동네 집안으로는 형님 되고 시댁으로는 사촌 고모님 된다.
크는 과정을 다 알고 그래서인지 나를 친정 조카를 해주려고 항시
마음먹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부모님들끼리 서로 혼인 말을 오고
가고 했다한다. 옛날에는 공동 샘에서 물을 길어다 밥을 지워 먹던
시절이었다. 한 번은 저녁때가 되어서 밥을 하려고 양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 가지고오는데 키가 조그마한 어머니 한 분이 내 뒷을 따라온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어머니가 선보러 온
것이다. 그렇게 나를 보고는 남자가 선보러 왔다. 남자 먼저 방에
있었는데 어디 갔다오니까 방으로 들어 가보라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 갔다.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고 있다가 나온 것 같다.
그렇게 서로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남자 측에서 결혼하자고 하였다.
화흥리에서 시집와서 사시는 분이 좋은 집안이라고 남자도 그때 슬쩍
보았지만 얼굴이 예쁘장하니 생겼다. 그런 집 안 하면 어떤 집 하냐고
좋기로 이름난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선도 한 번도 안 보고 처음으로
선보고 아무 철없이 부모네 하자는 대로 하였다. 그리고 남자가 와서
약혼이라도 하자면서 약혼사진 찍자고 완도읍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약혼사진 찍고 둘이 식당에서 밥 먹고 나 데려다 준다고 같이 완도읍
에서 장좌리까지 둘이 걸어서 왔다. 집에 와서 오빠들과 술 한잔씩 하고
술이 취해 집에 못 가고 고모집에서 자고 갔다. 옛날에는 결혼하려면
날 귀보고 사상(좋은 날 받아 보내는 것)함에 담아서 보내고 해야
결혼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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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남편의 취미생활
남편은 직장에 다니면서도 토요일, 일요일만 되면 산에 가서 나무를
캐다 심고 화분을 시멘트로 만들어 나무를 심고 바다로 강으로 돌을
주어다 진열하고 창고에다 쌓아놓고 그렇게 직장에 다니면서도 취미
생활을 하였다. 퇴직하고 본격적으로 취미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나무 캐러 다니고 돌 주우러 다니고 서예 하러 다니고 하루도 집에 있을
날이 없다. 집 옥상에다 나무를 너무 많이 쌓아놓고 비가 오면 옥상에
물이 계단으로 새어 내려와도 소용이 없다. 한번은 우리 고모님 조카 된
분이 나무를 좋아한다. 남편한테 말하면 안 된다고 할 것 같아 말도 안
하고 한차를 실어 주었다. 그래도 워낙 많이 있어서 가져간 티도 안
났다. 그리고 옥상을 수리해야겠다고 했다.
국민학교 옆에 180평 땅이 있다. 거기다 하우스를 지어서 그리 옮기기로
하였다.옥상을 페인트칠했더니 물이 안 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
적으로 서예를 하면서 해남으로 서각을 배우러 다녔다. 서각을 하면서
너무 힘들게 하니까 취미 생활을 왜 그렇게 힘들게 하냐고 천천히 쉬어
가면서 하라고도 했다. 그렇게 힘들게 하더니 서각 150점 넘게 해 놓고
쌓아 놓기가 아까워서 하우스를 지어서 전시장을 만들어 놓고 어르신들
놀이터가 되었다. 퇴직하고 갈 곳 없는 어르신들은 다 모인다. 거기다
언제까지 해놓고 있을 수 없고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도 많이 했다.
광주에 있는 우리 막내딸 사위 후배가 아파트를 짓는다고 팔려면 거기
주라고 전화가 왔다. 이왕이면 그러자 했다. 그냥 회사에서 와 가지고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였다. 그때 당시 빌라 두 채 값을 받고 팔아서
지금 사는 아파트를 사고 화흥리에다 땅을 470평을 사서 전시장을
지었다. 대지 200평, 건평 50평을 지어서 화흥리로 서각을 다 옮겨서
전시장을 만들어 놓고 날마다 출근한다. 평생을 취미 생활하여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책도 냈다.
젊어서는 취미생활에 빠져 살면서 가족끼리 외식 한 번도 안 해 보고
놀러 한번 못 갔지만 남들은 나이 먹어 퇴직하고 갈 곳이 없다는데,
날마다 전시장에 출근하니 갈곳 있어 좋은 것 같다. 젊어서는 취미생활만
하고 다니니까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화투 치고 노름한 것보다
났다 하고 살아온 덕분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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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남편직장 생활할 때 사연
결혼하고 큰댁에서 1년 살고 수산고등학교로 취직해서 분가하였다.
부지런하고 머리도 좋고 열심히 일도 잘하여 학교에서 인정받아 사무직
으로 승진하였다. 일을 잘하여 학교에서 재산관리를 하였다. 그리고
광주에 출장을 자주 다녔다. 광주에다 가정 여관을 정해 놓고 출장을
다녔다. 한번은 여자가 상의 옷 한 벌을 사서 보내왔다. 무슨 여자가
옷을 사서 보냈어요? 아니 가정여관 아주머니가 하도 잘해 주길래
파라솔을 사주었더니 사 보냈다고 하였다. 그래요 하고 그냥 넘어갔다.
어느 날 빨래하려고 호주머니를 뒤집는데 오토바이 타고 여자 뒤에
태우고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하숙하고 애들 키우고 힘들어서 질투할
생각도 안 하고 관심도 안 두고 모르는 척하고 넘어갔다. 알고도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는 것도 가정에 좋은 것 같다. 그리고 집안일이라고는
모르고 아침에 나갔다 밤에 들어오고 직장밖에 모르고 살았다.
나무를 좋아하고 부지런하니까 학교 정원은 다 가꾸고 지금에 정원에
있는 동백나무도 남편이 다 심어 놓았다. 내가 하는 말이 당신은
학교에서 공로상을 받아야겠다고 말 한 적도 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추억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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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시누이 동생과의 사연
우리 시누이는 촌에서 살아도 일도 잘 안 하고 집에서 곱게 자랐다.
그래서인지 시집도 촌에 일 안 한 데로 간다고 고르고 고르다가 화흥리
에서 고금면으로 시집간 집 안으로는 형제간 되시는 분이 그리 가면
촌에서 안 살 거라고 중매했다. 그 말을 듣고 선을 보고 마음에 들었든지
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승낙이 되어 고금면으로 하게 되었다. 형제간도
많고 직손으로 가서 분가했다. 일도 안 할 줄 알고 왔는데 속아서 갔다.
그래도 우리 시누이는 착하다 분가해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일도 잘 안 해보고 커 가서 고생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금면
촌에서 살면 발전이 없다고 노두리 오빠네 곁으로 온다고 이사를 왔다.
내가 하숙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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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4층 집, 장만하기까지의 사연
내가 하숙을 20년 넘게 하였다. 하숙하면서 월급은 안 쓰고 다 저축
하고 하숙하고 돼지도 키워서 팔고 해서 먹고살았다. 그때는 은행
이라고는 모르고 다 계를 했다. 계를 해도 계주를 잘 선택 해야 한다.
그때 낙찰계를 하였다. 필요한 사람이 많이 써 넣는다. 많이 써넣은
사람이 낙찰된다. 이자를 풀이해서 나누어 먹고 나머지만 곗돈을 내면
된다. 제일 끝에 타면 돈을 조금 내고도 목돈을 탈 수 있다.
그렇게 계를 해서 제일 끝에 타가지고 가용리 국민학교 앞에다 쌀이나
안 사 먹는다고 제일 물 좋고 땅도 제일 좋은 데다 산다고 천 평을 샀다.
그때 당시 화흥리 시숙님이 화개리 앞 구러시(수렁) 논 묵혀있는 논이다.
논이 좋다고 사라고 권유하였다. 우리가 화흥리에 들어가 살 것도 아닌데
무엇 하러 화개리다 사냐고 내가 안 한다고 하였다.
지금은 구러시(수렁) 논이라 기계가 못 들어가니까 묵혀있다.
그리고 광주 북구 운암동에 주공 1차 아파트 13평 짜리를 세 주고 우리
은화 대학교 다니고 아들은 광주에서 공부할 때 사서 자취했다. 하숙하고
보험도 하고 해서 너무 힘들어 모두 다 놔 버리고 편히 좀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얘들 광주에 학교 보내놓고 다달이 돈을 나오게 해
놓고 안 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 때 논이 매립해서 반 절씩
나뉘어 있는 상태였다. 밑이 나눠진 땅이 350평이었다. 조금 오르니까
팔고 광주 집 팔고 그때 당시 광주 집은 팔백만 원 주고 산 것이 2천만
원 주고 팔았다. 합쳐서 4층짜리 집을 계약했다. 집 계약과 동시에 보험
회사도 그만두었다. 2년 동안은 수금만 해주었다. 인생이 해방된 기분
이었다. 노두리에서 4층으로 이사하고 조금 편히 살까 했더니 일 년도
못 돼서 남편이 위암에 걸려 10년 동안 서울대 병원에 다니면서 고생
했다. 많이 살면 1, 2년 산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내 곁에 있어 주어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사랑한다는
말 한 번도 못했습니다. 미안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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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여성 이장들 중국 농어촌 견학 가다
내가 이장한 지 4년째 되던 해였다. 전라남도에서 각 읍, 면에서 여성
이장 한 명씩 추천해서 중국 농어촌 견학을 보내주었다. 그해 내가 추천
되어 견학을 가게 됐다. 중국 가면서 가이드가 레크레이션을 재미있게
하였다. 노래자랑을 하여 제일 잘한 사람을 선택해서 진주 목걸이를
주기로 했다. 재미있게 놀면서 중국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어린이집을
견학했다. 그리고 농어촌을 가서 보니 시골집이 아닌 도시 집같이 깨끗
하고 농촌집이 아닌 것 같다고 했더니 설명해준다. 거기는 직장에 출근할
때 신사복 입고 출근하고 거기 가면 공장같이 농기계가 다 있다고 한다.
공장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농사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다음은 시내를 둘러보고 중국 제일 부자 갑부집이라고 하였다. 너무 좋게
꾸며져 있다. 자식들이 재산을 탕진하여 망해버리고 결국은 국가에서
관광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리저리 다 구경 잘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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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구) 한전 자리 주차장
개포리 마을에는 읍사무소가 있고 또 여관도 많이 있다.
그리고 도로가 비좁고 복잡하다. 그래서 마을 사업으로 주차장을 신청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구)한전 자리가 비어 있어 거기를 주차장으로
해야겠다고 읍사무소에 신청해 놓고 군청으로 회의하러 갔다.
회의하러 부군수님이 오시고, 발언권을 얻어서 주차장 문제를 발표했다.
그렇게 3번이나 회의에서 건의했다. 그렇게 해서 주차장 자리를 신청해
놓고 내가 몸이 안 좋아 청해장식 동생한테 이장직을 넘기고 이장 5년을
하고 그만두었다.
그리고 청해장식 동생이 열심히 해서 결국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후로 나는 전대병원에서 검사했더니 검사 결과 심장이 안 좋아
시술해야겠다고 하였다. 바로 전대병원에서 심장 시술을 하고 지금까지
계속 약을 먹고 있어 많이 좋아졌다. 그래도 힘들고 신경 쓰면 지금도
조금씩 안 좋다고 의사한테 말하면 조금씩 안 좋으니 그대로 살라고
한다. 완전히 좋을 수는 없다고 했다.
심장이 안 좋아서인지 글씨 쓰기가 조금 힘들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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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긴급 지원금
개포 1리에 사시는 사촌동생 이모 아들이 찾아왔다.
큰 아들이 공부하다가 콩팥이 안 좋아서 대수술을 했다고 하였다.
긴급지원금이라고 있다고 해서 신청을 했더니 안 된다고 하여 누님한테
부탁하러 왔다고 하였다. 왜 안된다고 하더냐고 물었더니 재산이 많아서
안 된다고 하였다. 내가 하면 된다냐고 하니 누가 나한테 누님 되고
하니 가보라고 했다 한다. 군청 복지과로 가서 보니 완도읍장으로
계셨던 조과장님이 복지과장으로 계셨다. 깜짝 반기면서 이장님 어쩐
일이요 한다. 소파에 앉아 차 한잔하면서 사정 이야기를 했다. 바로
직원한테 지시를 내린다. 가지고 간 서류를 다 주었더니 바로 일
처리를 하였다. 그렇게 해서 긴급지원금 3백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아들은 치료를 잘하여 건강해지고 로스쿨 대학을 다녀가지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활동하고 결혼도 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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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사촌 형님과의 사연
우리 시아버지 형제분이 삼 형제가 있다. 큰아버지께서 화흥리에서
사시다가 해남으로 이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부모님
모시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남 역할을 하게 되었다.
큰아버지께서 아들 셋에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이 완도에서
금방을 했다. 옛날 동광당 금방이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금방 할
때는 돈도 잘 벌고 우리는 하숙하고 살고 우리 형님 되시는 분은 멋쟁
이고 유지급하고만 놀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보고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하였다. 그때는 사채이자가 이부일 때 은행 이자가 연 12퍼센트
일 때다. 그래서 노두리에서 문원호 교장 선생님이 같은 마을에서 살 때
였다. 문원호 선생님 선생님께 2백만 원을 빌려다가 형님에게 빌려
주었다. 그리고 다달이 이자를 받아서 갖다 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형님이 해남으로 김 공장을 한다고 이사하게 되었다.
형님이 쓰다가 옛날 희망 가구점 했던 형님 친구를 빌려주었다고 하였다.
형님 친구한테 이자를 받아다가 주었다. 해남에 가게되니까 나보고
이자를 받으러 가라고 하였다. 나는 완도에 있고 형님은 해남에 있고
해서 내가 대신 이자를 받으러 갔다. 이자를 받아서 문원호 선생님을
갖다주었다. 어느 날 채무자가 형님 친구분이 부도가 났다고 이자를 못
받고 원금도 못 받게 되었다고 하였더니 자네가 이자를 받으러 다녔으니
자네가 줘야 한다고 하였다. 이미 자네한테 넘어갔다고 하였다.
아니 그런 법도 있느냐고 기가 막혔다. 그 후 형님한테 돈을 못 받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내가 이자를 주다가 안 되겠다고 중도리가 논을 닷
마지기 사놓은 것이 있었는데 그 논을 팔아서 돈을 갚고 형님한테는 못
받고 말았다. 그 후 형님은 사업이 어려워지고 대장암에 걸려서 고생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세상 살면서 그렇게는 안 살아야지 하는
나에게 큰 교훈을 남기고 가셨다.
형님 좋은 곳으로 가서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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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이장할 때 적십자 고지서
내가 65살 때였다. 동네 개발 위원장이 오셔서 읍사무소에서 금년에
우리 마을도 여성 이장을 선출하라고 하였다고 나한테 와서 이장을 한번
해보라고 하였다. 벌떡 뛰면서 못 한다고 하였다. 해보라고 사정하였다.
잘할 거라고 해도 그래도 못한다고 하여 그날 돌아갔다. 며칠 있다가 또
와서 권유했다. 부녀회장도 해 봐서 잘할 거라고 해보라고 하였다.
자꾸 사정하니까 내가 마음이 약해서 또 넘어갔다.
이것이 이장하는 계기가 돼서 이장을 하게 되었다.
우리 마을에서 최초로 여성 이장을 하게 되었다. 날마다 출근하고
그리고 읍사무소에서 마을에 어려운 가정 명단이 넘어온다.
그러면 무슨 일이 있으면 이장이 다 돌봐야 한다. 그때는 마을별로
적십자 고지서가 나올 때다. 우리 마을은 가구 수가 2백 가구이고
인구수는 5백 명이 넘는다. 적십자 영수증은 호주별로 나온다.
처음이라 집 주소도 알기 겸해서 집집마다 방문하였다. 돌리고 나니
몸살을 했다. 그리고 한 번은 적십자에서 노두리 골짜기에 사시는
어려운 가정 집수리를 해주었다. 쓰레기, 이불, 장롱 다 도롯가로
내놓고 차로 한차는 된다. 쓰레기가 많고 큰 것이어서 읍사무소에서
처리를 못 해준다. 개인이 돈을 주고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돈을 주고 버리려면 돈이 많이 든다.
내가 한번 읍사무소에다 말을 좀 해보겠다고 하였다.
읍사무소 사회계를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바로 처리해주었다.
이장님 덕분에 돈도 안 들이고 처리했다고 고맙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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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물통 청소를 하기까지
완도 읍사무소에는 여성 이장이 개포1리 이현자, 개포2리 문덕임,
신기1리 이연순, 신기2리 황덕희, 모두 4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마을에 무슨 일 있으면 여성 이장이 더 꼼꼼히 잘한다고 칭찬도 하였다.
어디 견학 가거나 이장단이 놀러 가면 여성들이 있어서 분위기가 더
좋다고 한다. 읍내 마을은 촌이 아니라 특별한 사업을 할 것이 없다.
그래서인지 사회계 추 계장이 오셔서 마을 사업으로 마을 물통 청소를
해주겠다고 하였다. 그때 당시 5일 급수를 할 때였다.
물통 청소를 해주겠다고 신청받으러 집집마다 다녔다.
우리 마을은 상가 지역이라 세 들어 사는 사람이 많다.
주인으로 안 살아도 주인 명의로 신청받아 사회계로 제출하였다.
물통 청소를 처음 했다고 다 좋다고 하였다.
추 계장님이 오셔서 참 좋은 일을 하셨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힘들어도 주민들이 흡족해하시면 내 마음도 즐거울 때가 이장으로서
보람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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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경훈이 엄마 수급자 해주기
경훈이 엄마는 개포리에 살면서 보건소에 청소하러 다녔다.
아들 둘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 하나 딸 하나는 객지에 살고 큰아들만
데리고 산다. 큰아들은 일하다 사고로 다쳐서 일도 못 하고 집에만 있다.
퇴직하고 집에 가 있는데 누가 다단계를 해보라고 하여 퇴직금으로
다단계를 하였는데, 퇴직금을 다 날려 버려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고
하였다. 큰아들은 일하다 다쳐서 일도 못 하고 집에만 있고 작은아들은
객지에 있어도 특별한 직장이 없다. 딸은 결혼해서 살아도 어렵다고
한다. 어렵게 사는 것을 보고 내가 수급자라도 해주었으면 하고 서류를
좀 해보라고 하였다. 아들 병원 진단서 하고 객지 있는 작은아들 월급이
일백만 원 미만인지 서류를 해오면 한 번 신청해 보겠다고 하였다.
서류를 해서 읍사무소에다 제출하고 사정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수급자가 되어서 가정에 조금은 도움 된다고 고맙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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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새마을금고 재정보증 인생 공부
최병찬 시숙님은 큰아버지 둘째 아들이다. 완도에서 금은 방을 하면서
새마을금고 이사장을 해보겠다고 재정 보증을 서주라고 하였다.
금은방에서 돈도 잘 벌고 잘살고, 형제간이라 거절도 못 하고 재정
보증을 서 주었다. 이사장직을 잘하고 계신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도가 났다고 하였다. 감사가 와서 이사장이 돈을 안 갚으면
구속한다고 하여 구속된 것이 두려워 다 책임을 지고 도장을 찍어
주었다고 하였다. 이사장이 못 갚게 되자 보증인한테 빚 갚으라는
고지서가 날아왔다. 우리가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도움도 못 주고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새마을
금고에 가서 이사장이 돈을 얼마를 썼는가 하소연하고, 감사하듯 서류를
뒤져보았으나, 이사장이 쓰는 것은 하나도 없고 상무가 무단 대출해 주고
못 받아 부도가 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못 갚겠다고 재산을 도피시켜
놓고 재판했다. 법원에서 오라고 소환장이 오면 죄도 없는데 왜 가슴이
뜨끔하다. 재판하러 가려면 그날 저녁에 답변서를 써서 재판하러 가면
새마을금고에서는 안 온다. 그렇게 2년을 재판하였다. 재판할 때마다
새마을금고에서는 안 오고 하여 결국은 재정 보증인이 승소했다.
2년 동안 재판하러 다니면서 마음고생 많이 했습니다.
내 남편 참 똑똑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재정보증 서주고 인생 공부 참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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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너무나도 아까운 내 큰딸아
너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 글 쓰려고 몇 번을 시도하다 못 쓰고
했단다. 네가 태어날 때는 음력 6월 30일 제일 더울 때 태어났다.
네가 첫 아이라 너무 행복하고 즐거움을 주었단다. 몸은 가냘프게 태어
났지만, 특별히 병치레 안 하고 엄마 힘들게 안 하고 잘 먹고 잘 놀고
했었다. 대학교를 순천으로 가서 유아교육과를 나와 완도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했다. 학교 다니면서 같은 학교 학생하고 연애했다.
엄마는 결혼이 중요하니? 말렸지만 장남이고 직장도 없어 못 하게 해도
소용이 없었고 둘이 좋아하면서 결국 결혼하여 분가한 후 아들 셋 낳고
잘살았다. 어느 날 사위가 과부하고 바람났다고 시어머니하고 쫓아다녔
다고 했다. 그것이 오래돼 시어머니도 아들 편이 돼서 딸이 설 자리가
없게 됐다. 얼마나 신경을 쓰고 살았던지 신경암에 걸렸어도 엄마 걱정
할까 봐 말도 안 하고 혼자 앓고 있다가 병이 커져 나한테 아빠가
서울대 병원에 다녀봐서 서울대 병원으로 가보겠다고 전화가 왔다.
바로 서울대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수술하고 방사선 치료하고 3개월
만에 퇴원해서 화순 전대병원에서 치료하려고 화순병원 가까운 데다
아파트를 사서 전대병원에서 치료했다. 많이 좋아졌는데 집에서 넘어져
다리가 골절되어 다시 수술하고 4년 만에 다시 암이 재발돼 저세상으로
떠난 너를 보내 놓고 하루도 잊을 날 없고 너를 생각하면 하루도 눈에서
눈물을 안 흘릴 때가 없구나. 보고 싶고 또 보고 싶다.
저세상에서 다시 태어나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아라.
49재 지내고 나니 조금은 내 마음이 안정된다.
보고 싶다. 내 딸 은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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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소중한 내 아들
67년 음력 6월 13일 아침 7시 30분 사랑하는 내 아들이 태어나서
옛날에는 아들을 선호하던 때라 딸 낳고 아들 낳았다고 부모님 모두가
좋아하였다. 나는 너를 낳고 키울 때가 제일 행복했단다. 건강하게 잘
자라 학교 다닐 때도 공부 잘하고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3년
우등하고 3년 간 반장하고 천재들만 간다는 순천고등학교를 학교 각
반에서 1등짜리만 뽑아서 보냈다. 객지에 보내 놓고 하숙을 못 하고
큰딸을 순천대를 보내면서 자취했다. 객지에 적응을 못 하고 심적으로
방황했다. 그때는 내신 점수를 가지고 대학에 갔다. 대학 시험 볼 때
엄마가 가서 보았더니 감기가 들어서 시험도 제대로 못 보고 좋은
점수가 못 나와서 목표는 서울로 가려고 했는데 광주에서 대학을
다녔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를 본다고 서울 가서 3년을 고시 공부를
했다. 나는 고시를 원하지 않으니 빨리 내려와서 공무원 시험 봐서
밑에서부터 올라가거라 하고 내려오라 하여 공무원 시험 보고 바로
합격하여 용인시청에 근무하고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딸 하나
아들 둘 낳고 행복한 가정 꾸리고 잘살고 있다.
내 아들아 그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기고 안정된 가장 꾸리고 잘살고
있어 고맙다. 우리 아들 사랑한다.
항시 건강 잘 챙기고 건강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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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사랑하는 내 둘째 딸
그 시절에는 정부에서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기 운동했다.
그만 낳는다고 피임하다가 낳은 것이 우리 둘째 딸을 낳았다.
하숙하면서 출산하여 조리도 못 하고 화흥리 어머님이 며칠 해주고
갔다. 애를 봐줄 리가 없어 밥해 주면서 아기 키우고 제일 고생하고
키웠다. 놀아 주리가 없어 맨날 울고 하여 하숙생이 울 애라고 이름도
지어주었다. 그렇게 어렵게 자랐다. 완도중학교에 다닐 때 공부도 잘해서
고등학교를 광주로 보내려고 했는데 학교에서 완도고등학교 키운다고
해서 전체 학생을 광주로 못 보내게 했다. 그래서 완도고등학교에
다녔다. 대학은 광주 보건대학교 유아교육 학과를 다녔다.
너는 절대 학교 다니면서 연애하지 말라 언니가 연애해서 고생하니 절대
연애하지 말라고 하였다. 엄마가 연애하지 말라 하여 연애를 안 해 중매
하라고 하였다. 중매가 들어오면 장남도 아니고 직장 좋고 키도 크고
해야 간다고 고르고 있다. 아는 동생이 좋은 사람 있다고 선 한번 보라고
하였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발령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선을 보았더니 직 손이고 키도 크고 직장도 좋고 하여 그냥
한다고 하여 결혼해서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잘살고 있다.
좋은 남편 만났으니 남편 내조 잘하고 좋은 시부모님 효도하고 좋은
형제 우애있고 사이좋게 건강관리 잘하고 가족 건강 잘 챙기고 행복
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 우리 은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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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내 효녀 막내딸
그때 산아제한 할 때였다. 힘들고 해서 임신했는데 그만 낳는다고
그래서인지 유산하고 저녁에 꿈을 꾸니까 우리 집 뒤에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에 물이 가득 차 있다. 물 뜨려고 바가지를 넣으니까 돼지 새끼가
죽어서 물에 둥둥 떠 있다. 하도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내가 유산해서
이런 꿈을 꿨구나 하고, 피임을 안 했더니 다시 임신한 것이 77년 음력
8월 3일, 양력 9월 15일 우리 효녀 막내딸 혜지가 태어났다. 어머니가
산후 조리해주려고 와서 하는 말이 너는 좋겠다. 좋은 세상에 태어나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이 난다. 건강하게 귀염받고 잘 자라서 유치원 보낼
나이에 학교 간다고 하여 입학하러 갔는데 한글도 제대로 모르고 쉬운
글자만 알고 갔다. 면접을 보는데 선생님이 너희 언니 오빠가 다 공부
잘해서 공부 잘할 거라고 받아 주었다. 생일도 늦은 데다 7살에
입학했다. 엄마가 학교 갔다 오면 공부에 대해 가르쳐서 한글은 다
배웠다. 초등학교부터 공부 잘하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 광주에서 하숙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본다고 경기도에서 보고 떨어지고 많이
뽑는 대로 간다고 강원도까지 가서 합격했는데 면접에서 떨어졌다.
다시 전라도에서 봐서 합격하여 첫 발령을 완도고등학교로 왔다.
완도가 고향이고 국민학교 동창인 김대웅이가 임용고시 합격하니까
날마다 전화가 온다. 그때 당시 서울에서 대학 나와 삼성 회사 본사에서
근무할 때다. 친구가 나한테 남자가 머리도 좋고 남자 가정도 좋다고
결혼하라고 하였다. 둘이 좋으면 알아서 해라하는 것이 승낙돼서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하고 슬하에 아들만 둘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사위는 서울에서 직장 그만두고 공무원 싸이버 경찰 시험봐서 광주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딸은 광주로 이사 와서 담양에 있다가 지금은 곡성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착하고 머리 좋고 건강한 신랑 만났으니 남편
내조 잘하고 좋은 시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화목하고 가족 건강 잘
챙기고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내 효녀 딸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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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서울 작은어머니
아버지 삼 형제 중에서 작은아버지가 화흥리에서 살았다.
슬하에 딸 둘, 아들 삼 형제 등 5남매를 두었다. 큰아들이 서울에서
일본 도시바 회사에 다녔다. 일본 도시바 회사에 다니면서 돈도 잘 벌어
서울에 집이 두채나 된다. 시골에 부모님이 계시니까 마음이 불편하여
부모님을 모셔갔다. 작은어머니가 서울로 이사 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인자 시집 살러 간다. 며느리가 시어머니 밑으로 오면 며느리가
시집 살지만 내가 며느리 곁으로 가니 내가 시집 살러 간다고 하였다.
서울에 가시면서 손을 잡고 서로가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흘리고
작은어머니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잘 사시라고 하고 서로 헤어지면서
서로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했다. 서울에 가서 부지런하여 손 안놀고
상보를 만들어 완도에 오시면 가지고 오셔서 형제간에 다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자식들이 같은데 모여 살면서 주말마다 모인다.
서로가 화목하고 우애 있게 산다. 남이 보면 부러울 정도로 잘하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골반을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 치료하다가
회복을 못 하시고 별세했다. 고향에 산소가 있어 고향으로 모시라고 해도
자식들이 가까운 데다 모시고 자주 찾아뵙도록 한다고 서울에다 모시고
고향에는 못 오고 말았다. 작은어머니 그때 그 목소리 듣고 싶습니다.
그 얼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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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우리 광일 시동생
광일 시동생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광일 시동생은 화흥리
에서 4남 2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내가 시집오니까 중학교 3학년
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수고 어로과를 입학하였다. 바로 외항선을
탔다. 외항선을 타서 돈도 잘 벌고 인물도 좋고 하여 한동네 처녀가
짝사랑해 가지고 고향에 와서 임신해놓고 배타러 나가 버렸다. 배 타고
부산에 오면 결혼식이라도 하라고 시숙님이 날까지 받아놓고 해도
절대로 결혼식은 안 한다고 또 그냥 배 타고 나간다. 결국은 부산에다
방 얻어 아기 낳고 살면서도 결혼식을 안 하고 살았다. 배 타고 돈을
잘 벌어서 땅도 사고 빌딩도 사고 부자로 잘살았다. 나이도 먹고 해서
배는 그만 타고 호텔 사가지고 직접 운영했다. 적성에 안 맞는다고
그만두고 집을 팔았다. 또 식당 한다고 하더니 그것도 그만두고 이것
저것 하다가 재산만 없애버리고 결국은 몸이 안 좋아 폐암 진단을 받고
계속 서울로 치료하러 다녀서 많이 좋아졌다고 공기 좋은 데로 온다고
그 좋은 재산 다 탕진하고 아무것도 없이 고향으로 왔다. 고향에 와서
많이 좋아져서 노인 일자리도 다녔는데 다시 암이 재발하여 고생하시다
저세상으로 가셨다. 태어나서 결혼식도 못 하고 살면서 슬하에 딸만
셋이다. 그것도 팔자려니 하다가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보고
싶습니다. 저세상에서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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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소꼽친구
내 소꼽친구를 그리면서 펜을 잡아 본다.
상왕봉 줄기 따라 장보고 대사의 얼이 깃드는 장좌리에서 태어났다.
우리하고 바로 이웃집에 살았다. 나이는 한 살 더 먹었다. 학교도
선배다. 이웃에 살면서 어깨동무하고 친하게 살았다. 국민학교에 다니
다가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가 하나 불편하다. 그래도 생활하는 데는 큰
불편은 없다. 시집갈 나이가 되어 한 번은 선을 보았다고 한다.
선을 봤는데 다리가 불편한 것을 보고 남자가 안 한다고 하였다.
그 후로는 시집을 가보라고 하면 선도 안 본다고 하였다.
나 같은 것을 누가 데려가냐고 시집 안 가고 친정에서 조카들 키우며
오십이 넘도록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을 찾아와서 덕임아 나
시집이나 갈란다. 왜 이제야 시집간다고? 그러니까 올케 언니가 나
한테는 짐이 돼도 우리 자식들한테는 짐 되게 안 한다고 나가서
살라고 하여 셋방 얻어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나와서 혼자 사니까
외로워서 안 되겠다고 시집 갈란다고 했다. 그러면 상처하고 혼자
사시는 분이 있어 소개했으면 하고 마음먹고 있었다. 갑자기 연락해
왔다. 덕임아 나 결혼한다. 그해 12월이다. 대야리 교회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연락와서 가서 결혼 축하해주고 왔다. 남자 나이가 한 살 위다.
결혼하여 세탁소 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몸이 안 좋다고 하였다. 계속 병원 다니면서 고생하시다가 결국은
별세하고 혼자서 딸 곁으로 가서 살고 있다. 지금도 서로 연락하고
안부 묻고 살고 있다. 친구야 아프지 말고 건강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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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추억
9월 1일 복지관 노인대학 가는 날.
노인대학에 가서 학장님 강의 끝나고 완도 예총에서 와서 완도 예술인
공연을 했다. 풍물도 하고 노래하고 북춤도 추고 공연을 하였다. 풍물
하는 것을 보면 옛날 생각이 난다. 나도 옛날에 풍물도 하고 공연도
하러 다녔는데 구름같이 바람같이 흘러가 버린 세월. 꼭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는 세월 그 누가 다 가져가 버렸나 벌써 80 고개 넘어
인생 종점에 가까워졌네. 그 옛날 그 추억 하얀 벽지 위에 그려본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평생 교육 있어 나이 먹어 갈 데 없어 외로운 때
평생교육에 다니면서 하고 싶은 취미생활하고 친구 만나고 즐겁게
살면서 내 마음 달래 본다. 오늘도 완도예총에서 예술인이 오셔서
노인대학생들 너무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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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남편 친목계
내가 시집을 가니까 남편이 총각 때부터 했다고 친목계를 하였다.
돈 대신 곡식을 주고 돈을 모으고 있다. 일 년에 2번씩 봄, 가을로
부모님 모시고 잔치를 한다. 그렇게 해마다 하면서 여행도 다니고 형제
처럼 즐겁게 살았다. 여행을 많이 다녔어도 기억은 다 못하고 목포
유달산 꼭대기까지 점심 준비해 가지고 가서 먹고 오는데 계원 부인이
넘어져서 다쳐서 고생했다. 그리고 또 한번은 충청도 고수동굴로
구인사에 갔다. 구인사는 양쪽 산이 둘러싸여 있고 골짜기에 절이 있다.
제일 끝에 가면 절 설립자라고 초상화가 있다. 그 건물은 다 금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다. 구인사는 박정희 대통령 큰 부인이 거기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때 많이 지원해서 절이 너무
크고 좋았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해마다 여행 다니다시피 했는데 나이 먹으니까 모임도
식당에서 하다가 지금은 많이 별세하고 모임도 못 하고 있다. 총알 같이
가버린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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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남편 환갑 때 제주 여행
남편 환갑 때 우리는 여행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는 아들도 결혼 안 하고 혼자 있을 때였다. 딸네가 아들하고
의논했다고 제주 신라 호텔에다 2박 3일 예약해놓고 아빠 환갑이고
해서 엄마, 아빠 둘이 여행이나 갔다 오라고 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가라고 하냐? 미리 말도 안 하고. 엄마한테 말하면 못 간다고 할
것 같아 말도 안 하고 예약해 놓았다고 하였다. 예약해 놓았다니 할 수
없이 제주 여행을 갔다. 제주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신라호텔에 가자
하니까 기사가 하는 말이 자식들이 돈 많이 썼네요. 왜요? 신라호텔은
대통령이 회의를 한데라서 그 주위가 관광지다고 하였다. 호텔을 가서
보니 으리으리 했다. 방에 들어가서 보니 술병에 먹을 것이 가득 쌓여
있었다. 남편한테 하는 말이 저것을 먹으면 돈이 많이 나온다고 손도
못 대게 했다. 하룻밤을 자고 나오는데 호텔에 반짝반짝하고 으리으리
한데가 있어 가만히 들어가 보았더니 카지노라고 한다. 빨리 나와서 각
나라 전시장을 가서 보니 세계여행 간 것 같았다. 어느 동굴을 가서
보니 강원도 석류굴, 충청도 고수동굴을 보다가 무슨 굴도 안 같다.
도로처럼 넓기만 했다. 여기저기 구경하고 자식들 덕분에 둘이 신혼여행
간 것처럼 잘 갔다 왔다.
<남편 환갑 제주여행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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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중국 황산
동네에서 중국 황산에 간다고 모집하였다. 친구가 중국 황산이 유명
하다고 가보자고 하였다. 그래서 가기로 하였다. 여행 갈 준비를 하고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도착하여 황산 가는 버스를 타고
케이블카를 타는 데까지 가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꼭대기를 올라가서
거기서도 호텔이 산꼭대기가 있다. 호텔까지 군복을 입은 남자가
들것으로 짐을 들어서 호텔까지 옮겨준다. 호텔까지 옮겨주는데 돈을
받고 옮겨 준다. 호텔 가서 보니 경치가 기가 막히게 너무 좋다.
신이 산을 보여 주는 것처럼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을 못 할 정도로
구름이 사라졌다 다시 덮고, 다시 구름 사이로 살짝 보여주고 다시
덮어 버리고 했다. 그리고 모택동이가 9년을 걸쳐 개발했다고 바위
낭떠러지에다 쇠로 길을 만들어 놓고 그 절경을 보게 만들어 걸어
다니게 하였다. 그렇게 멋있는 광경은 처음으로 보았다.
그때 중국 여행은 황산만 구경하고 왔다. 그때 그 시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절 그때가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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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칠순 해외여행
내 아들이 용인에 살면서 며느리가 어머니 칠순인데 용인에 와서
가족끼리 모여 식당에서 점심이나 먹고 하룻저녁 자고 에버랜드나 구경
하고 오자고 올라오라고 하였다. 제일 좋은 식당에다 예약해 놓았다.
점심을 먹고 가족끼리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놀다가 아들 집으로
와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에버랜드에 가서 구경하고 왔다.
대접을 잘 받고 왔는데 칠순이라고 전자제품이 오래된 거라고 칠순
기념으로 세탁기, 냉장고를 사주었다. 우리 며느리 돈을 너무 많이
썼다. 고맙다. 며칠 있다가 동네 칠순이 된 친구가 우리 외국 여행
가자고 하였다. 부부 동반 해서 간다고 하였다. 자식들한테 그말을
했더니 형제들 곗돈 모아놓은 거 있으니 갔다 오라고 하였다.
남편보고 그 말을 했더니 나는 절대 안 간다고 혼자 갔다 오라고
하였다. 자식들이 아빠는 안 가도 엄마나 갔다 오라고 돈을 통장으로
넣어 주었다. 그래서 9박 10일을 호주로 해서 뉴질랜드로 여행을 갔다.
호주에는 석탄이 많이 난다고 모노레일을 타고 산꼭대기까지 석탄이
매장된 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 나라 주민들은 세금을 많이 내고 나이
먹어서는 국가에서 먹여 살린다고 한다. 뷔페로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많아서 깨임을 하고 뷔페에서 밥 먹고 온종일
놀고 온다고 한다. 국가에서 주는 돈으로 쓰고, 먹고, 놀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뉴질랜드에 가서 약 꿀을 다 사도 안 사니까
나보고 마쿠라 꿀이나 사라고 하여 마쿠라 꿀을 사 왔다.
위장에 좋으니 남편보고 먹으라고 하였다.
-------------------- 58. 환갑 때 중국 여행 임오생 말띠가 계 모임을 하였다. 그동안 계 모임을 해서 돈을 모아 환갑 때가 되어 우리 중국 여행이나 가자고 했다. 그러자고 다 동참하였다. 요즘은 환갑 때 젊으니까 잔치도 안 한다고 가족들도 여행이나 갔다 오라고 하였다. 날짜 받아서 인천 공항에서 중국 간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한국 임시 정부를 갔다. 그 마을은 하나도 발전이 없고 옛날 그대로다. 옛날 구식 집만 있다. 임시정부를 가서 보니 올라간 계단이 덜거덕 거려서 올라 가는데 무서웠다. 2층에 올라가서 김구 선생님이 있는 그때 활동했던 사람들 사진이 걸려있고 그때 사무 보았던 책상도 있다. 구경하고 나와서 쇼 관람하고 녹차 전시장을 가서 보니 한국 녹차하고 똑같았다. 거리에서 여자들이 녹차를 손에 들고 한국 돈 천 원 하고 외치고 다녔다. 그것이 특이했다. 그때 당시 중국은 밤 야경이 너무 좋아서 저녁에 배 타고 야경을 구경하러 갔다. 지금은 한국도 밤이면 호텔 같은 데는 밤 야경을 볼 수 있다. 갑 계원 친구들끼리만 여행을 가니 더 재미있고 즐거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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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나의 신혼생활
상왕봉 줄기 따라 장보고 대사의 얼이 깃드는 장좌리에서 태어났다.
2남 3녀 중 장녀로 내 밑으로 여동생이 7살 터울이고 막내는 띠동갑이
둘이나 있다. 농사 집이라 일도 많고 하여 내가 동생들을 많이 돌봐야
했다. 장녀라고 우리 어머니가 나를 강하게 키웠던 것 같다.
23세가 되어 시집을 가게 되었다. 가족, 친지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하여 옛날에는 결혼식하고 신붓집에서 좋은 날 받아서 간다고 하룻밤
자고 다음날 남자 집으로 신부가 간다. 그때는 버스가 없을 때다.
소가용리까지 차로 가서 도암리 도꾹재 넘어서 화흥리까지 걸어서 갔다.
집에 도착하여 문 앞에다 짚불을 피우고 바가지를 엎어 놓고 바가지를
발로 밟고 깨서 불을 넘어가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하나의 방패인 것
같다. 집안 형님 되시는 분이 전업을 앉았다. 방에다 병풍을 치고 예쁜
요 깔고 온종일 앉아 있다. 시집을 와서 보니 행랑채 조그마한 방 하나
에다 신혼 방이라고 해놓았다.
신혼생활 일 년 동안 큰댁에서 12명 식구 밥해주고 일하고 살았다.
일 년 살고 가용리 수고 뒤편으로 겨우 밥 끓여 먹을 것만 가지고 분가
하였다. 식구 많은 데서 살다가 분가하여 아무것도 없어도 지금부터
신혼생활 한 기분이고 너무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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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친정 큰 오빠를 그리며
큰오빠가 보고 싶어 팬을 들고 무엇부터 써야 할지 모르고 두서없이
펜을 잡아 본다.
오빠는 삼대독자 외아들 밑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자랐다고 한다. 자랄 때 너무 예쁘고 우량아로 자라서 동네분들이
다 예뻐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오빠가 5세 때 됐을까 할 때 가족사진을
찍었던 게 지금도 내게 있습니다. 너무 우량하고 예뻤던 그때 가족
사진을 보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머리에 떠올려 봅니다.
장좌리에서 화개리로 장가가서 외동딸과 결혼하여 귀엽게 일도 안하고
자랐다고 결혼해서도 농삿집이어도 일도 잘 안 하고 집에서 아기나
키우고 어르신과 오빠가 곡식을 주고 사람 사서 일한 것 같다.
시골에서 무슨 사업이라도 해보겠다고 하여 똑딱선 배를 지어서 김발을
사우도 섬에다 50대 이상 많이 막아서 김을 했다. 그때 당시는 일본으로
수출할 때다. 김을 많이 했지만, 갑자기 일본 수출길이 막혀 사업이
어려워져서 은행에서 빚으로 했는데 빚을 못 갚게 돼서 전답을 팔아서
빚을 갚고 올케는 일도 못 하고 하여 사무실 옆에 밭이 있는데 거기다
집을 짓고 가게를 하였다. 오빠는 기계배를 타고 낚시 하러 다니고
친구를 좋아하니까 친구와 술이나 먹고 하여 몸이 안 좋아졌다.
가게를 하니까 더 술을 먹게 된다. 우리 오빠는 인정도 많고 동생들도
잘 챙기고 우리가 가면 무엇이라도 더 챙겨주려고 하시던 우리 오빠가
그립습니다. 술을 너무 좋아해서 아들, 딸 잘 키워놓고 덕도 못 보고
슬하에 아들 하나 딸 4명 5남매를 두고 저세상으로 떠나셨다.
인정 많고 마음씨가 고와서 자식들도 다 잘 풀려 딸들은 서울에서
잘살고 아들은 여수에서 좋은 직장 다니고 있다.
우리 올케가 자식 복이 있어 자식 덕 보고 편히 살고 있다.
큰오빠 그때 얼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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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친정 작은 오빠를 생각해본다
나는 친정 오빠가 2명이 있다. 큰오빠 밑으로 작은 오빠가 있다.
나하고는 세 살 터울이다. 큰오빠는 인정도 많고 정이 많고 성질도 좋은
편이다. 작은오빠는 성질도 급하고 남에 잘못을 못 참는 성격이다.
큰오빠하고는 대조적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촌에서 옛 날에 택일하고
사주도 보았다. 작은오빠 낳아 놓고서 사주를 보았다고 한다. 사주를
보니 너무 사주가 안 좋아서 단단하게 살라고 돌석자를 써서 이름을
재석이라고 할아버지가 지어 주었다고 한다.
큰오빠는 군대가고 아버지는 몸이 불편하시고 작은 오빠와 내가 집안
일을 많이 도우고 살았다. 총각 때는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하여 완도읍 경해 하숙집 큰아들 딸이다. 하숙집 작은아들이
형님 딸 조카를 소개해서 결혼했다. 결혼해서 아들 하나 딸 둘을 낳고
오빠는 군청에 다니며 잘살았다. 그런데 올케 언니가 시집오면서부터
몸이 좀 약했다. 큰아들 7살, 딸 5세, 3살 된 자식을 낳아두고 별세했다.
군청에 다니고 있으니까 같이 근무한 직원이 소개하려고 소개한 여자가
집에 왔는데 한 동네 언니가 사는데 언니집에 와서 다른 여자가 먼저
와서 살아 버렸다. 직원이 소개 해준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갔다고 한다.
지금 살았던 똑똑한 여자였는데 아들 하나 낳고 살았다. 장사한다고
시장에서 홈패션 가게를 하였다. 가게를 하면서 사회생활하면서 돈
무서운 줄 모르고 잘쓰고 다녔다. 결국은 남의 돈을 많이 빌려쓰고
못 갚고 집을 나가 버렸다. 젊어서는 혼자 살아도 큰소리 떵떵 치고
살더니 나이 먹으니까 남자는 여자가 있고 가정이 있어야지 혼자
사니까 집안이 말이 아니다. 퇴직하면서 연금으로 돈은 있지만 가정이
있어야지 돈이 필요가 없다. 남자는 나이 먹어서 가정이 없으면 불쌍한
사람이 된다. 내가 젊어서 너무 안타까우니까 반찬도 해다 주고 가끔씩
돌봐 주었다. 나이가 먹으니까 나도 못해주고 마음만 아픕니다.
우리 작은 오빠는 세상 살면서 너무 고비가 많았고 나이 먹어서까지
혼자서 고생하시는 것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할아버지 사주 보는것이 맞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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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보험회사의 사연
못다 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보험회사 다니면서 힘들었던 일 즐거웠던 일 머릿속에서 떠올려 본다.
고객을 하나라도 확보해 보려고 가정을 방문하면서 보험상품을 설명해
주고 했다. 보험회사 다니면 고객 재산 관리해주는 마음으로 다녔다.
그때는 은행 자동이체가 없고 집마다 방문하여 수금해다 주었다.
수금해서 저녁이 되어 입금을 못 하여 안전하게 두고 간다고 퇴근
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소장님이 쓰레기통에다 돈을 넣어두고 퇴근했다.
다음 날 아침 경리 아가씨가 일찍 출근하여 쓰레기차가 오니까 쓰레기
통을 그 차에 비워버렸다. 소장님이 출근하여 보니 쓰레기통에다 돈을
넣어 두었는데 비워버렸다. 큰일 났다. 쓰레기장을 가서 종일 뒤졌다.
보험회사 종이가 나오니까 희망을 품고 파헤쳐 다행히 돈을 찾았다.
신지 명사십리 우리 친척 이모 되시는 댁이 있었다.
아들 며느리가 신지 명사십리 해수욕장에서 민박하여 돈을 잘 벌고 있다.
내가 저축하라고 방문하러 가면 내년에 해주겠다고 하여 서비스 물품만
주고 온다. 나는 약속한 날짜에 또 선물을 잔뜩 가지고 간다. 그러면 또
내년으로 거르고 한 것이 5년을 찾아다녔다. 결국은 나보고 끈질기게
찾아다닌다고 하였다. 선물만 5년 동안 잔뜩 받아먹고 배신당했다.
남도 아니고 형제간이라고 선물도 주면서 저축할 능력이 없으면 내가
이해하고 그렇게 찾아 다니지도 않았다. 형제간이라 더 서운했다.
집에 와서 눈물 흘리면서 내가 이것을 안 하면 못 사나 하고 슬프기도
했다. 보험을 하다 보면 좋은 일도 많이 있다. 해주겠다고 자청해서
해주는 사람도 있고 실적을 많이 올리고 잘하면 보험회사가 참 대우가
좋다. 일 년에 한번씩 전남 신안비치호텔에서 행사를 한다.
가면 쇼 관람하고 한가운데 통로를 해놓고 여자 혼자 걸어가면서 옷을
하나씩 벗고 걸어간다. 끝에 가서는 옷을 홀랑 다 벗어 버린다.
그 광경이 그때는 왜 그리 웃겼던가 보험회사 다니면 사무실 가서 친구
사원들하고 그날 활동했던 것 서로 대화하면 즐거울 때가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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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친정 사촌 고모님을 그리며
친정 할아버지 형제 두 분이 계셨다고 한다.
큰할아버지가 딸하나 낳고 별세했다. 할아버지가 별세해서 할머니가
대흥사 암자 절로 들어가서 스님이 됐다고 했다.
고모님은 우리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키웠다고 한다.
대흥사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가서 절에서 있기도 했다고 한다.
고모님은 해남으로 시집가서 딸 둘, 아들 하나 3남매를 두었다.
해남에서 살다가 고숙이 일찍 별세하여 목포로 이사 가서 살다 또
서울로 이사가 옷 장사를 했다. 강남에 땅을 많이 사서 그때는 강남에
땅이 허허 벌판이었다. 주택을 지어서 살았다.
강남이 발전되니까 빌딩을 짓고 정연 패션을 했다.
백화점에다 정연 패션가게를 해놓고 장좌리 친정 조카 내 동생 둘을
데려갔다. 동생이 백화점에서 정연 패션가게를 하면서 서울에서 결혼
하여 둘 다 서울에서 잘살고 있다. 고모님은 아들 하나라고 아들밖에
모르고 살았다. 아들은 자라서 김영삼 전 대통령 처제랑 결혼하였다.
그리고 백화점 정연 패션을 하고 공장을 직접 운영하고 디자인해서
백화점에 납품하고 가게도 운영하여 돈을 잘 벌었다. 서울에 13층
빌딩도 있다.
내 남편 위암 걸렸을 때 서울대 병원에다 동생이 부탁해서 치료를 빨리
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다 우리 고모님 덕택입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고모님도 별세하시고 동생도 아들 하나 낳고 아들
공부시킨다고 미국으로 가서 가족이 미국에서 생활하고 한국에 있는
빌딩은 조카가 관리하고 있다.
고모님 살아계실 때는 고모님 사랑 많이 받고 살았습니다.
백화점을 하니까 좋은 옷도 많이주셨던 우리 고모님 보고 싶습니다.
그 다정스러운 목소리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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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내 동생들
사랑하는 내 동생들을 한번 생각해 본다.
덕례는 내 밑에 일곱살 터울, 막냇동생은 띠동갑이다.
농사집이라 부모님은 일하러 다니시고 언니가 많이 돌 본것 같다.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 사랑도 많이 못 받고 자란 것 같다.
몇 살때인가 내가 결혼을 한 후로 서울 고모님이 서울에서 정연패션
상호를 가지고 백화점에서 가게를 하였다. 막냇동생하고 둘이서 같이
고모님 댁에 살면서 백화점에서 가게를 하였다. 부모님 사랑 받고 살
나이에 내 동생들 객지에서 얼마나 마음고생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고모님 댁이라 해도 고모님이 아무리 잘해주어도 내 집만은
못 할것이다. 서울 고모님 댁에서 살면서 결혼하여 착실하고 성실한 남편
만나 아들만 둘 낳고 서울 마포고에서 슈퍼 가게를 하다가 나이도 먹고
돈도 어느 정도 벌고 해서 서울 집 처분하고 부천에다 5층짜리 집사서
편히 잘살고 있다. 아들도 둘 다 결혼하여 부천서 잘살고 있다. 내 냠편
위암 수술하고 서울대 병원을 10년을 다니면서 마포구에서 살 때다
내 동생 집으로 가서 서울대병원 버스가 집 앞에서 타면 병원 앞에서
내린다. 교통이 좋고 내 동생이라 허물없이 전날 가서 자고
다음날 병원 진료를 받고 늦으면 다시 와서 자도 내 동생 집이라 편하게 자고
한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10년이란 세월 한결같이 다니고 했습니다.
내 동생 고맙고 감사하다. 동생들 덕분에 너희 형부가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
항상 건강하여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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