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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르신 자서전 쓰기 - 최포임 (64편) -
<목차>
제 목 : 선창 구미에서의 추억
<인사말>
1. 첫 펜을 든 나
2. 유년시절
3. 이름이 바뀌는 이유
4. 학교생활의 시작
5. 내 인생의 변화
6. 나의 학교생활
7. 진학을 못한 나의 공부
8. 잠깐
9. 고향에서 선보는 날
10. 결혼생활 첫 시작
11. 바다 생활의 첫날
12. 시집살이
13. 남편이 군대 생활할 때
14. 첫 아이 낳은 날
15. 남편과의 가정생활
16. 세월은 흘러가는 물결과 같더라
17. 차비로 빚을 받은 인연
18. 잃어버린 김 박스
19. 의심 많은 사람의 심정
20. 토도에서 김 값을 받음
21. 나의 중년기
22. 총알같이 달려간 세월
23. 변해가는 세월
24. 복잡한 시절
25. 약속
26. 직업 변경을 못함
27. 사람의 생활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
28. 아버지와의 관계
29. 어머니
30. 추억 속의 오빠
31. 우리의 사랑
32. 고마운 남편
33. 친구
34. 친구와 나와의 사연
35. 팔아버린 전답
36. 열마지기 밭
37. 나무로 땔감하고 살던 시절
38. 나무조사와 술
39. 옛 어른들의 산후과정 풍습
40. 무당굿
41. 큰 시할아버님과 관계
42. 장손의 무게
43. 태풍
44. 보증
45. 생각지도 못한 보증인이 되다
46. 법정에서 논과 산을 사다
47. 우리 부락과의 관계
48. 총무가 이사가고 새총무
49. 부녀회장의 활동
50. 나를 믿고 키워준 부락
51. 우리 시어머니의 여행 얘기
52. 추억
53. 나무하던 시절
54. 남편과 첫 장사
55. 고동촌이란 마을
56. 사투리
57. 나의 고향
58. 내 남편과의 마지막 이별
59. 노래 교실에서 강원도 여행
60. 이승만 대통령 별장을 가다
61. 디엠지 여행
62. 육남매
63. 보통으로 살아온 내 인생
64. 나의 글을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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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선창 구미에서의 추억
<인사말>
세월이 바람같이 빨라서 어느덧 내 나이가 9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습니다.
세상에서 필요 없는 존재가 되는 줄 알았더니 이 무슨 횡제입니까?
내 나이에 자서전을 쓰게 된 기회가 왔으니까요.
훌륭하신 지도 선생님 덕분에 서툴고 두서없는 글이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을 생각나는 데로 적어 보았습니다.
혹 이 글을 누가 보시고 동질감이 되신다면 나로선 영광일 것입니다.
아, 이분도 이렇게 사셨다고 하시고 고개를 끄덕인다면 나는 행복할 것입니다.
선창 구미(대창리의 옛 지명)에 내가 사는 마을입니다.
부락민들이 화목하고 서로 존경하며 경로당에서 외로움 없이 즐겁게 지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족한 저에게 이런 좋은 시간을 지내게 해주신 문정권 지도 선생님께
감사올리며, 자서전 글쓰기에 동참했던 예총 사무국장님과 박미자 부장님도
감사 드립니다.
경로당 자서전 쓰기에 동참했던 회원님들도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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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펜을 든 나
구십을 앞둔 나는 오늘 자서전이란 글을 쓴 교육을 받았다.
즐겁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이루지 못한 꿈과 배우지 못했던 아쉬움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살아왔던 일,
수많은 사람과 만남과 이별, 아픔을 한 자 한 자 생각나는 데로 적어 보려고 한다.
나의 인생 여행길에는 즐거움 행복도 있었고, 거친 파도 같은 풍랑도 있었으리.
어떻게 적어야 내가 가고 난 뒤 자손들이 보고 혹 삼자도 보고 이해할 수 있을까?
한번도 써보지 못했으나 앞으로 배우면서 열심히 적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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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년 시절 나는 한 농가의 평범한 가정 조부모님이 계시고 부모님 슬하에 오빠 한 분을 둔 외동딸로 잘살았다. 오빠는 공부도 아주 잘하고, 나를 아주 예뻐해 주셨다. 지금 같으면 어린이집도 다녔다. 너무 어려서 부모님이 들에 가시고 없으면, 바지 하나만 입고 가기도 했다. 선생님이 나를 보시고 집에 가서 위 저고리를 입고 오라고 돌려보낸 일도 있었다. 일요일도 모르고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다니기만 했다. 두 살 위 아랫집 언니가 오늘은 일요일 학교 가는 날이 아니다 하여 집으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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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름이 바뀌는 이유
첫날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는데 나는 대답을 안 했다. 일본어로 부르기 때문.
남자아이들은 나를 보며 웃는다. 호랑이 무섭다고 놀린다.
니야마 호렌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학교만 가면 짖꾸진 남자아이들이 호랑이 온다하고, 도망치며 놀려 댄다.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학교가 가기 싫어졌다.
윗집 언니가 선생님께서 나를 데리고 오라했다고 나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갔다.
출석 시간 또 이상한 이름이다. 앞 자만 바꿔서 부른다. 나는 또 울어 버렸다.
그 후 선생님께서 나의 이름은 한국어로 불러 주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선생님이 고맙고 감사한 생각이 든다.
그 후 2년이 지나서 부모님께서 정식 국민학교를 가자고 데리고 갔다.
다른 아이들은 다 이름을 부르는데 나는 부르지 않는다.
어머니께서 선생님께 가서 물어 보았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안된다고 하신다.
알고 보니 호적 나이가 세 살 늦어서 그랬다.
그 때문에 2년이면 졸업한 어린이 집을 4년을 다니게 됐다.
그 후 해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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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교생활의 시작
열 살이 되는 해.
나는 아홉 살에 해방이 되고 첫 학년이라 위 언니, 아래 동생 무척 학생이 많았었다.
한 반이 88명 1학년 5반에 86번 차로 이름을 올렸다.
무명베에다가 까만 물 들여서 검정 치마에 하얀 띠를 돌리는 치마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학교에 갔다. 한국어를 배우지 않아 국어는 몰랐으나 수학은 글씨가 똑같은 아라비아 숫자
이기 때문에 훨씬 쉬웠다. 학교 갔다 오면 청소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했다.
밤이면 아버지께서 나를 불러서 공부 잘하느냐고 물으셨다. 글씨를 보시고 항상 잘못 쓴다고 꾸중하셨다. 아마 내가 글 쓰는 재주가 없었던 것 같다. 지금도 글씨는 잘 못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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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 인생의 변화 나는 학교를 즐겁게 다니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 이름은 김만수 선생님 아름답고 예뻐서 그 선생님이 나의 목표가 됐다. 나도 크면 저 선생님처럼 여선생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어느 날 학교 갔다 오는데 나보다 12살 더 먹는 이웃집 오빠가 아야 학교 가서 너희 엄마 안 봤냐 하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 집에 있는데 하니까 그 엄마 말고야 너의 낳는 엄마야 한다. 나는 아무 말 않고 있으니 그 오빠의 큰 형수가 나오더니 아야 너희 엄마한테 안 가봤냐? 하는 말에 아무 말 하지 않고 집으로 와서 같이 큰 오빠에게 물어보았다. 오빠 아무개 오빠가 나더러 이래저래 하더라고 하니 오빠도 깜짝 놀라면서 나에게 조용히 말한다. 큰엄마가 아이를 못나서 오빠는 작은아버지 부인 작은 엄마가 낳고, 나는 읍에 있는 아버지의 또 부인 오빠의 작은 큰 엄마가 낳았다고 한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으나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때부터인가 엄마가 무척 조심스럽고, 눈치를 보게 되었다. 열 살밖에 안 먹는 어린아이라서 무척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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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의 학교생활
나는 학교를 갔다 오면 어머니 맘에 들려고 물도 길어다 놓고 청소도 하고 무엇이든 엄마
맘에 들려고 애를 썻다.
그때 제일 내가 싫어하는 말은 누구든지 나에게 생모 말을 하는 것이 싫었었다.
혹 기르는 엄마가 오해할까 봐 그리하였다.
세월이 가고 5학년이 되든 해 국어 일제 고사 시험이 있었다.
학교에 가니 선생님께서 내가 일등을 했다고 한다.
한 번도 일 등을 못 해보고, 잘한 학생 뒤만 따르다 처음으로 일등을 했다고 하니 기쁘고
설랬다.
선생님께서 내일은 머리 자르고, 옷도 깨끗이 하고 오너라 교장 선생님이 상을 준다고 하였다.
시간을 마치고 집에 와서 엄마한테 내가 일 등 해서 내일 상 받으니 이발할 돈을 주라고 하니, 엄마도 기분 좋아하시면서 얼른 가서 자르고 오너라 하셨다. 옷도 잘 챙겨 주시었다.
이튿날 학교에 가니 먼저 온 읍내 아이들이 모여앉아 하는 말 난리가 났다고 한다.
이북에서 어젯밤에 서울로 밀고 왔다고 한다. 나는 무서웠다
일본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무서웠었다. 그때가 6.25 전쟁이 일어난 날이었다.
선생님이 오시더니 오늘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있으라고 하시었다
나는 꿈에 부푼 상은 어디로 간곳없고 집으로 왔는데 그날로 상도 못 받고 정든 교실도
다시 보지 못했다.
6.25가 긑나고 학교에 오니 교실은 간곳없고 휘늘어진 수양버들 앞에 길게 지어진 학교
모습도 사라지고 없었다.
운동장 한편에 죽담을 치고 판자로 말뚝 박아서 만드는 책상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학교에 오는 날은 돌멩이 주워 들고 와서 투덩 투덩 못을 박고, 흔들리는 책상을 교정시키
느라 분주들 하였다.
일학기 맞아 이 학기는 동몽학원이던 건물로 가서 배우고 졸업은 그 뒤 교육청 지금의
도서관 자리에서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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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진학을 못 한 나의 공부
여선생이 되겠다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으로 중학교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때는 군청 학무 계가 있었다. 동네 오빠가 시험 성적을 보았는지 우리 아빠에게
칭찬하면서 동생이 시험을 아주 잘 봤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무슨 청청병력인가 오빠가 대학에 가니 나는 못 보낸다고 한다.
나는 누구도 가고, 누구도 가고 친구들 이름을 댔다. 그래도 오빠 가르치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나는 못 보낸다고 하였다.
그때 오빠는 고대 법대 합격을 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억지 쓰고 다니다 그만두었다.
오빠도 고대를 그만두고 작은아버지가 전주세무서에서 근무 할 때라 전북대 법과를 다녔다.
그리고 우리는 전라북도 김제읍 서안리로 이사를 했다.
오빠를 가르치려고 김제로 갔는데 아버지가 완도 청산면 국민학교를 지으셨다.
그때 아들을 얻는다고 아버지는 작은엄마를 새 처녀를 얻었다.
그 엄마가 5남 2녀를 낳아 완도로 다시 오게 되었다.
20살 때 완도로 와서 지금에 마을에서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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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잠깐
나는 글을 쓰다가 잠깐 잠이 들었네
꿈을 꾸다 깨어나 정신이 벌떡 들었네
꿈에 본 고향은 가파른 바닷가 언덕
꿈이라서 가보았네
내 고향 바다 언덕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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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고향에서 선보는 날
줄 쳐 놓은 듯 여섯 골목길에서 같이 놀면서 살았던 언니, 동생, 친구들,
봄이면 파 서리해다 파전 부쳐 먹고, 여름이면 참외 서리, 가을이면 호박, 콩 서리
겨울이면 무 서리까지, 엄마 몰래 쌀 담아와 밥 지어 먹던 그 시절 돌아보니
엊그제 같은데 그 많은 친구 하나, 둘 떠나더니 소식도 없네. 그래도 남은 친구
몇 명모임으로 만나고 있어 위안이 되고 있지만 그때 그 시절 그 추억이 그립구나!
아버님 친구분의 소개로 스물두 살 되든 칠 월 15일 나는 맞선을 봤다.
첫눈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부모님의 설득 때문에 승낙하고 그해 12월 30일
결혼하여서 한 가정을 꾸려 지금까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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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결혼생활 첫 시작
나는 결혼식을 마치고 3일 쉬고, 4일째 되는 날 시댁으로 버스를 대절해서 시집으로 왔다.
신작로에다 내려주니 동네 꽃 각시가 대리러 왔다. 새 신부라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집에까지 왔다.
언뜻 보니 동네가 큰 줄 알았다. 내가 집들이라고 생각한 것은 집이 아닌 김 말린 건조장
이었다.
동네는 자그마한 부락이었다. 식구는 할아버지, 부모님, 시누이, 시동생 나로는 시아제 두 분,
바다에 일꾼이라고 두 분, 나까지 열 사람의 식구였다. 두 분 외 일하신분은 소안도가 고향
이라 했다.
집안일은 일제 해주지 않고, 바다에 가술자라고 오직 그물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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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바다 생활의 첫날
시아제가 바다에 가자고 한다. 무엇을 하러 가는지도 모르고, 시누이 동생하고 갔다.
나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줄줄이 줄 처진 대발에 까맣게 길어 나는 김발이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냐고 물어보았다. 시아제가 하는 말이 김이 나란히 같이 크기 위해
큰 김을 자르라고 하였다. 나는 시키는 대로 너무 긴 것을 잘라 버렸다.
한 칸 가고 두 칸 차 가는데 시누이가 배를 너무 붙여서 김이 다 떨어진다고 하였다.
나는 내가 자르는 것이 그렇다고 하였다.
시누이가 깜짝 놀라며 왜 그랬냐고 물었다. 아제는 깔깔대며 웃어 댄다.
그때야 수출하려면 파래가 섞이면 안돼서 파란 파래만 골라내라고 한다.
나를 놀리려고 거짓말로 하였던 것이였다. 조금 지나니 뱃멀미가 나서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견딜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배에 엎드려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멀미가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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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시집살이
처음으로 바다에 가던 날부터 바다의 아낙네로 살게 됐다.
서툰 일이었지만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김 제조하는 과정을 배우게 됐다.
상상해 보지도 못했던 김 제조하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시아버님은
나를 곁에 두고 무슨 일이든지 시키셨다.
아버님께서는 예뻐하시면서도 나를 힘들게 하셨지만, 같은 여자이기 때문인지
어머님께서는 나를 편하게 해주시면서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셨다.
밤에도 김을 세고 있으면 내일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 한다고 등 밀어낸 적도
수차레요, 옷타령을 하시는 아버님에게 언제나 내 편에서 얘기해 주시었다.
서투른 일을 배우고 견디면서 살아온 지난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철없는 나를 가르치고 함께 살아온 부모님! 고생 많으셨고 애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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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남편이 군대 생활할 때
결혼하고 이듬해 아이가 들었다.
일은 고되고 밥도 못 먹고 고생 중에 남편이 군대 영장이 나왔다.
그해 9월에 군대에 갔다. 그때는 완도읍에서 모여 목포 배로 갔었다.
나는 남편과 같이 와서 나는 친정집, 남편은 예비 소집 장소로 갔다.
다음날 선창가로 오니 벌서 남편은 배에 타고 있었다.
배에서 나를 본 남편은 손을 흔들었다. 잘 가란 말도 못 하고 뒤돌아 시집으로 왔다.
너무 허전하였다. 그날부터 내 방은 동네 처녀들이 와서 수놓고, 잠자고 시누이
친구들 방이 되었다. 이따금 남편 동생 친구들도 와서 시끌벅적하였다.
내 맘대로 쉬지도 못했다. 그 시절은 어찌 손가락 발가락도 자주 아팠다.
나는 시아버님과 어장도 같이 보러 갔다.
남편 동생까지 자원해서 군대에 가고 남편의 작은동생은 학교에 갔기 때문에 일꾼
두 분과 시아버님이 커다란 어장을 돌보게 되었다.
남편의 편지가 왔다. 31사단 광주 통신학교 교관으로 자대배치 되었다고,
군번이 적어지고, 이병 남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편지 받고 몇 달 지나서 아이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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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첫 아이 낳은 날
나는 첫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데 옆에는 시누이가 있었다.
그 시누이를 잡고 애를 쓰니 시누이가 못 견디고 나가 버렸다.
부엌으로 나간 문고리에다 손가락을 집어넣고 얼마나 힘을 썼던지 아이 낳고
한 달 이상 손가락이 감각이 없었다. 시어머님이 오시더니 짚을 깔아 주셨다.
짚 위에 누워서 여자아이를 낳고 나를 생각하니 눈물이 말없이 흘러내린다.
그 이튿날 무장을 하고, 총을 메고 남편이 왔다.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때 4.19가 일어나서 계엄령이 내려져서 송정리역에서 보초를
서다 열차가 오니까 무작정 타고 목포로 해서 배를 타고 와 버렸다고 한다.
내 서러운 투정은 말도 못 꺼내고, 걱정돼서 잠도 안 왔다.
그날 저녁 한 심도 못 자고, 남편을 쫓아내듯 보냈다.
그 후 들어보니 상관이 좋은 사람이어서 그날이 일요일이고 해서 무사히
모면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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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남편과의 가정생활
세월은 흘러가 이년 육 개월을 마치고, 남편이 제대하고 왔다.
나의 신혼 생활은 어느 소설책 속의 이야기고 하루하루를 생존 경쟁 속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는 태풍이 심해서 어장에 실패하고
시집이 빚이 많아져서, 나도 모르게 생존 경쟁 속으로 빠져 들은 것 같다.
남편과 같이 어장을 복귀하여 덤 장을 넣고 멸치를 첫 물 잡아서 옆 마을
영풍리에서 잘 팔았다. 그런데 저녁 물때를 봐서 영풍리로 안 가고, 대야리로
배가 가버린다.
저녁에 달고 밝고, 바다도 잠잠한데 남편 동생이 혼자 들어온다. 왜 혼자
오냐고 하니 형이 친구들과 술 마시고 있으니 혼자 와 버렸다고 하였다.
멸치가 좀 남아있으니 가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나는 큰 대야를 가지고 갔다.
멸치를 담고 있는데 시어머님이 등불을 들고 오셨다.
배로 내려와서 등불을 비춰 주면, 한 손으로 선창 돌을 잡았다.
나는 멸치 통을 선창으로 올리다 무거워서 그만 배가 멀리 밀려 나가 어머님과
나는 바다에 빠져 버렸다. 나는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다 정신을 차리니 어머님이
나의 발목을 잡아 내가 움직이지 못하였다. 겨우 발을 빼고 보니 어머님이 가라
앉는 것이다. 나는 어머님 머리카락을 잡고, 한 손으로 휘저으며 수영도 못한
나는 구원을 청했다. 사람 살리라 하고 소리를 막지르니 선창가에 살던 친구가
먼저 나왔다. 줄 좀 던져주라고 소리 지르니 줄이 왔다. 한 손으로 어머님 잡고,
한 손으로 줄을 잡았는데, 줄이 당기지 않는 것이다. 팔로 줄을 감아서 당기려
하니 줄 끝이 와 있었다. 어머님 잡고 줄을 감으니 무게가 차서 나도 그만 가라앉았다.
물을 몇 번 먹고 줄도 어머님도 나발이고 허우적거리니 다시 뜨게 되어 마치 바다에
장어 잡으러 가던 동네 청년들이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 돌아와서 나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으니 선창은 바로 가까웠다. 나와서 어머님이 바다에 있다고 하니 보이지
않는다고 배에서 한참 동안 찾으니 어머님이 가라앉은 것이었다.
어머니를 올려놓고 보니 숨도 안 쉬고, 입도 꽉 악물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코를 입으로 빨았다. 고향에는 논 갓 쪽에 방죽을 파서 거기에
아이들이 멱감다 자주 빠져 죽기도 하고 사는 아이도 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물에서
건지면, 코를 빠는 것을 어렸을 때 보았기 때문이었다. 코를 빨면 물이 입으로 하나씩
몇 번을 빨고 뱉으니 나중에 공기가 나왔다. 그러고 있는데 사우도 청년이 군대서
다니러 오다 이 광경을 보고 인공호흡을 시킨 것이었다. 한참 있으니 입에서 거품이
나왔다. 그리고 계속 인공호흡을 시키니 그르렁 그르렁 하면서 숨이 쉬는것이었다.
음력 3월이라 추워서 짚불을 피워주니 아주 따뜻했다.
그 후 고마운 분들 덕분에 불상사 없이 어머님도 나도 오늘까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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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세월은 흘러가는 물결과 같더라
결혼하고 군대 가고 제대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슬하에 자식이 4명이 됐다.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다에 어장은 다 해보았다. 덤장, 이광망, 낙지 통발,
삼마이까지 해봐도 돈은 모이지 않고, 어장에 실패한 빚만 늘어갔다. 그 와중에
남편이 사고가 났다. 공판장에서 사소한 말끝에 사고가 나서,남편이 많이 다쳤다.
방광파열로 흥일약국에서 4일 있다 동성의원에서 하루, 광주로 이송해서 광주
선 외과로 가서, 그날 일요일이어서 전대병원으로 갔다가 다시 밤에 김기창
병원으로 가서 그날 밤에 임학택 교수님이 수술했다.
겨울에 병원에 들어가 이듬해 늦은 봄에 나오니 보리가 익어 갔다.
나와서 보니 아버님은 편찮으시고, 다치게 한 사람은 장흥 교도소에 있다고 한다.
형사가 우리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고 부른다기에 남편과 나는 장흥을 같이 갔다.
그때 시아버님 친구이신 김선태 장관님이 변호사로 계셨다.
찾아가 인사를 하니 소식은 잘 들었다만 그 사람이 돈이 없는 사람이어서
병원비를 민사로 청구해야 받는다고 한다. 그때 그 사람도 젊고 우리도젊으니
서로 나가서 열심히 해서 갚을 터이니 그냥 끝내주십시오 하니
방청객도 검사님도 손뼉을 치며 잘 생각하였다고 했다.
나는 집으로 오다 남편보고 어떻게 생긴 분이지 얼굴이나봐야겠다하고 감옥으로
갔다. 그냥 갈 수 없어서 담배 한 보루를사서 가지고 갔다.
문 앞에 가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면회를 청했다. 그분이 나왔다.
나는 그 분을 처음 보았다. 고생한다고 인사하고, 서로 운이 없어서 그러니
용서했으니 나가서 열심히 잘 사시라고 하니 그분이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합니다, 했다.
병원 생활을 오래 해서 병원비는 그때 돈으로 60만 원이었다.
그때 내 나이 33살, 두 살 먹은 어린애 업고 돈 한 푼 없이 병원에 갔다.
그 후 남편 동생이 병원에 입원한 돈을 가지고 왔었다.
나는 광주도 처음이고 병원 생활도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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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차비로 빚을 받은 인연
병원에서 퇴원 준비를 하라고 하는데 집에선 아무 연락이 없어서 아이를 업고 집으로 돈 준비
하러 왔다. 아버님은 편찬하시고, 일꾼 데리고 김은 했으나 맨 등외로 빠져서 김발에 투자한
비용은 못 갚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읍내 사는 친구를 찾아 가서 사정을 말하니 친구가
다른 친구한테 빌려 주었다. 너무 고마웠다. 그 돈 갖고 퇴원해서 고향에 오게 되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남편이 회복이 안돼서 완도읍 조합에서 중매인들한테 외상을 얻어서 장사를
하였다. 그 후 하지 않아본 장사가 없이 했다. 옷 장수, 이불 장수, 화장품 판매원, 김 장수,
멸치 장수, 가진 장수를 다 해 보았다.
하루는 송지장에 갔다가 남창에서 집으로 온 차를 타려고 앉아 있는데 나는 얼굴도 잊어버린 젊은
청년이 인사를 한다. 누구요 하고 물으니 장흥서 봤던 그 청년 이름을 댄다. 깜짝 놀라며 그땐
미움이 풀린 것이 덜해서 당신 때문에 장사하는 사람이 됐소! 하였다. 그 청년은 고개를 숙이면서
정유소로 가더니 집에 오는 차비 200원을 끊어 차표를 주었다. 돈 이백 원이 그리도 고맙고
용서가 다 되었다. 그 후 겨울에 김 뜨고 오는 길에서 고기 장사 두 분을 만났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 그냥 와 버렸다. 집에 와서 막 짐을 내리는데 고기 한 꾸러미 들고 고기
장수가 들어온다. 고기 안삽니다. 하니 그 부인이 내가 아니고 원동 그 남자 우리 식구랑 다툰
분의 아내가 미안해서 직접 못 가져오고 그 아줌마한테 보냈다고 한다. 나는 깜짝 놀라서 쫓아
나가니 벌써 대창리 2구를 넘어가고 있었다. 아줌마에게 감사하다고 하고 그 후로 원동 가서
찾아보니 서울로 이사를 갔다고 하였다. 그 후 그 분들이 항상 생각나고, 잘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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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잃어버린 김 박스
한 참 김이 안 되는 시절이었다. 김 시절이 안 좋아서 갑을 더 받으려고 수협에다 안 넣고
광주 양동 상회로 팔러 다닌 지를 수협에서 알고 원동 다리에서 직원들이 지키고 했다.
그때 직원들이 안 나온 첫차로 김을 싣고 갔다. 동네 분들과 차를 불러서 싣는데 남들이 먼저
와서 밑에 짐칸은 다 차서 나는 손님 실은 뒤에 다 실었다. 김은 두 박스였다.
무사히 원동을 지나 달도 마을을 가니 달도 사람들이 김을 여럿이 차에다 실었다.
막 뜨려고 하니 트럭이 한 대 오더니 앞을 막고 정차시킨다. 차에서 나온 사람들은 수협
직원들이었다. 손님 칸에 있는 김을 다 내리는 것이다. 나도 내 김을 내렸다.
군외 수협으로 와서 입건하는데 내 김은 한 박스뿐이다.
한 박스는 차에서 내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 있으니까 안심하고 입건해놓고,
직행버스 타고 광주로 갔다. 양동시장 대영상회가 우리 동네 단골이었다. 상회로 가니 입찰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내 김 한 박스가 차에 실렸다고 했더니 우리 것은 없고, 임자 없는 박스가 하나 있어서 입찰을
안 했다고 하였다. (박스가 바뀌었다) 그것을 보니 엣날 박스에 틀림없이 누가 바꿔 내렸다고
입찰시키려고 하니 김이 전부 파래김이 아주 하등급이었다. 나는 중단을 시켜 놓고 집으로
내려왔다. 집에 와서 동네 사람들한테 어디 어디서 실었냐고 물어도 아무도 몰랐다.
나는 달도 마을에 갔다. 기다리다 달도 분들이 오니 박스를 좀 보자고 했다.
다 들 박스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우리 박스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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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의심 많은 사람의 심정
달도 분들이 세 분인데 세 분이 다 서로 의심한다. 한 분은 배가 아프다고 공판하고 바로
방으로 가버리니 남의 거로 팔아서 그랬을거로 의심하고, 한 분은 그 집 김이 나쁜데 그 집
돈이 많더라 하고 서로들 의심하였다. 그러나 박스가 아니니 나는 집으로 와서 다시 같이
살던 동네 나이 많은 어머니한테 물어보았더니 좌일 넘어서 몇 사람이 김을 싣더라고 하였다.
그래서 다음 날 광주로 갔다. 진월동에서 완도에서 어제 첫 차에 실은 김 박스가 어디 어디
상회로 다 내렸냐고 짐꾼들에게 물었다. 완도에서 오는 물건이 어디 어디 3 상회로 내렸다고
하였다. 대영상회는 어제 보았고, 포항상회로 갔다. 김 판매가 다 끝나고 경리한테 물었다.
사실을 말하고 어제 장부를 좀 보여 달라고 하니 비밀이라고 싫어 했다. 나는 사정을 하였다.
하는 수 없다고 하면서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없었다. 우리 김은 제일 깊은 바다 김이어서
좋은 김이다. 거기에 12속만 파래 섞인 김이 들어서 찾을 수가 있었다.
다시 대흥 상회로 갔다. 입찰이 다 끝나고 휴식 중이었다. 거기는 부부가 하고 있었다.
사정을 말하고 어디 사람들이 어제 입찰을 하였느냐고 했더니 고마도 뒤 토도 마을 사람들이
왔었다고 했다. 장부를 보자고 해도 전혀 반대 하였다. 사실을 말하고 절대 피해 안 가게
한다고 하고 장부를 보니 우리 김이 나 말한 대로 나왔다. 그분들도 내가 말한 김이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거기서 장부대로 적어서 대영상회에서 김을 입찰하니 6만 원 밖에 안됐다.
우리 김은 16만 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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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토도에서 김 값을 찾음
버스를 타고 가다 좌일에서 내려 걸어서 마치 물이 나 있어서 토도를 걸어서 들어갔다.
중간에 가다 우리 친구를 만났다.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사실을 말하니 그 청년이 아주 착하다고 하였다. 마을에 들어서니 내가 기지고 간
박스를 보고 동네 입구에서 몇 명의 청년들이 서 있다가 한 청년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무작정 김 찾으러 오냐고 하였다.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 박스 갖고 모른 분이 오니 물어 봤
다고 했다. 사실은 박스에 우리 주인의 이름이 크게 쓰여 있는데도 밖에 간 것이 좀 의심스러워했다.
그 청년은 자기 집에 안오고, 나만 가서 그 분의 아버지 한테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토도 가게에 가서 술 한병을 사갖고 가니 어르신이 계셨다. 사실을 말하고 돈을 달라고 하였다.
그 어르신 하는 말이 자기 아들이나 되니까 돈을 순순히 내 준다고했다
나는 아무말 않고 감사하다고 돈만 갖고 나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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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나의 중년기
남편의 몸도 회복이 되고, 아이들은 커가고 벌이가 별로 없어서 나는 남편과 같이
생활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 소를 키워 볼까 생각했다.
남편과 상의하고, 농협에서 돈 30만 원의 빚을 냈다.
그리고 이튼날 해남읍 장에 가서 송아지 1마리를 사서 대야리 1구분이 싣고 왔었다.
그 인연으로 친형제처럼 친하게 지냈었다.
그 송아지가 커서 새끼를 해마다 낳고, 새기가 커서 또 낳고 해서 25마리까지 기르게 되었다.
숫송아지는 값도 비싸서 돈도 생겨 아이들도 도와주었다.
그러는 동안 남편은 소 키우고, 염소, 개도 키우고, 나는 화장품 판매원 5년을 하였다.
그동안 큰딸은 국민학교 강사가 되고, 둘째는 회사에 경리를 보고, 생활이 조금씩 풀려
무난한 중년 생활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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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총알같이 달아난 세월
나는 셋째 딸하고 남편과 집에서 좀 멀리 있는 밭에 콩을 거두로 갔다.
우연히 나오는 말로 너희들 어서 커서 다 결혼시키고 나는 농사 지어서
너희들 도와주면서, 딸 집도 가고, 아들 집도 가고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니
남편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너는 시집가서 아빠가 가면 용돈은 꼭 줘야 해
하면서 그냥 두어라! 하고 돌아서면 이쪽 호주머니에다 넣어 주렴 하고 한바탕 웃었다.
그때가 어제 한 것 같은데 아이들은 커서 민들레처럼 하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큰딸이 시집가고, 둘째, 셋째 직장으로 나가고, 어린 동생들도 커서 학교 간다고 광주로 다
가고 부모님들께서도 한 분 한 분 제 곁을 떠나가시고, 이 시절은 기쁨과 슬픔이 동행하는
시절인가 봅니다.
시아버님께서 67세 나이로 세상을 뜨시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주 한창때인 것 같아요.
그땐 환갑을 넘었으니 괜찮게 살다 가신 줄 알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젊은 나이에
가신 것 같습니다.
지나고 보니 아무 철없이 세월만 보내는 것 같습니다.
남은 시간 얼마 되지 않아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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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변해가는 세월
생활이 좀 나아지고 소 키워서 소득이 좀 있어서 옆에 밭에다 축사를 지어 남편은 소를
키우고, 나는 미역 공장을 처음으로 갔다.
완도읍 조카가 하는 공장으로 갔는데, 숙모님은 안해 봤으니 날일로 하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킬로로 하였다. 남이 해놓은 것을 갖다 검근하였다.
너무 무거운 것을 끌다가 팔이 뚝 하더니 많이 아팠다. 그 후 병원을 다니면서 공장도 다녔다.
3년 동안 아팠다. 사람들은 그 병이 오십견이라 하였다.
그 후 달도 제일식품에서 일을 했다. 톳 치르는 일을 하는데 기계로 하니 멀미가 났다.
1일 요금 7,000원을 받고 다녔다. 아이들이 한 참 배우는 때라 그도 안 벌면 어려운 때였다.
하루는 남편이 마을을 갔다 오더니 내가 나가서 일할 테니 자네가 소를 키우라고 하였다.
무엇을 하려고 물으니, 학림아파트를 지으는데 친구들도 간다고 하였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막노동을 해도 18,000원을 주니 자네 돈보다 많으니 내가 나가서
일할 테니 소를 키우라고 했다.
그 후 남편은 점심을 싸서 막노동 일을 5년이나 다녔다.
나는 소를 키우면서 주사도 놓고 약도 먹이고 수의사 노릇을 하면서 열심히 키웠다.
동리 분들과 소가 아프면 약 사다 놓고 나보고 주사 좀 놔주라고 하면 사양 못하고
남의 소도 치료하면서 소를 키웠다. 세월은 그렇게 변하면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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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복잡한 시절
아이들이 다 세 살 사이인데 큰딸이 결혼하면, 넷째 아이가 대학에 가고, 둘째가 시집가면,
다섯째가 학교 가고, 셋째가 시집 가면 여섯째가 학교 가고, 돈이 어디서 펑펑 쏟아져도
부족하게 생긴 시절이었다.
한 시간만 멈춰도 자리가 난 시간이었다. 남편도 돈 번다고 몸은 돌보지 못하고,
못에 발도 찌르고, 병원 생활도 하고, 고된 노동일 하다 병도 나기도 하였다.
세월이 가고 아들, 딸들이 다 커서 큰아들은 군대에 가서 수방사에서 제대하고,
복학하고, 작은아들도 수방사에서 형 자리로 가서 근무하다 제대하고 복학하고,
막내딸이 대학을 들어가고 정신없이 바쁜 시절이었다. 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소 파동이 와서 솟값이 날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사료는 비싸고, 25마리 소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소를 정리하고, 1마리만 남겨 놓았다.
종자소로 남겨 논 소가 떨어져서 사료를 많이 먹어 탈이 났다.
약을 사 먹이고 치료해서 나았으나, 새끼를 갖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팔아 버렸다.
그 후 소가 계속 떨어지니 사지 못하고 있다가, 솟값이 갑자기 오른 바람에 그만 축사는
폐쇄하고 말았다. 그 후 소는 키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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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약속
큰아들이 졸업하고, 강진여고 수학 선생으로 발령받고, 강진서 근무 1년 하고, 광주 고등학교
수학 선생으로 가서 같은 학과 여자 학생과 결혼하였다. 며느리는 수학 학원을 차렸다.
소를 키우고 축사를 늘렸을 때 며느리가 어찌 부지런히 일하든지 좋아서 약속했다.
이 축사에다 소를 하나 채워서 너희들한테 물려 주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소 파동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지금도 아쉬움이 있다.
아이들 키울 때 부모님 사업이 실패하고 너무 어려웠는데 같이 살던 부모님이 돌아가시니,
그 빚이 전부 우리에게 상속되어 갚도록, 되어서 내가 하는 말이 나는 너희들한테 빚만은
물려주지 않으련다 했더니 어느 날 아들이 물어본다 "어머니 지금도 빚이 많이 있소?" 하니“
다 갚고 조금 남아있다. 하니까 고생 많이 하셨소 우리들한테 빚은 물려주지 않는다고
하시더니"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이 때 힘들어서 하는 말을 안 잊고 지금까지
생각하는구나 하고.
그 후 열심히 해서 빚을 다 갚고 나니, 아이들 보기가 홀가분하였다.
아이들 앞에선 함부로 약속이나, 무슨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걸 나는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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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직업 변경을 못함 아이들이 다 커서 저희 자리를 찾아서 안정 되어가고 우리의 생활도 좀 나아갔다. 남편은 작은 배 한 척을 샀다. 나는 무슨 배를 또 샀냐고 물었다. 낙지를 잡는다고 하였다. 바다 일이 서투른 나는 바다가 아주 싫었다. 그러나 배를 한 번 샀으니 할 수 없이 바다 생활을 또 하게 되었다. 낙지를 잡으면 돈도 되지만 아이들이 집에 오면 풍족하니 먹일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었다. 하루는 바다에 갔는데 바람이 크게 불어서 나는 무서웠다. 그냥 집에 가자고 하니 통이 큰 남편은 배가 가만히 있다고 세게 저으라고 하였다. 나는 무서워서 배 삼 곁에는 못 가고 배 안에서만 노를 저으니 배가 나가지 않는 것 같았다. 죽을힘을 다하여 젓는데 남편이 돌아보며 말을 하였다. 원 세상에 배 안에서 노 저은 사람은 자네밖에 없겠다고 하며 허허 웃더니 그만 가세하며 통발을 놓고 일어섰다. 멀미까지 하는 나는 그런 남편이 서운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시절이 좋은 시절이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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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사람의 생활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아이들도 저 갈 길을 가서 각자 자기 자리를 잡고 생활도 풀려서 아이들 덕에 외국도
사 개국이나 가보고 살기가 편해지니 병마가 시샘하듯 남편의 몸이 아팠다.
병원 가서 진찰하니 신중우근이라고 하였다. 그 후 광주로 가서 김기창 씨 내과 병원에서
김영석 원장님이 병을 고쳐주셨다. 그 해 빚에 잡혀있던 열 마지기 땅도 찾아서 남편 명의로
이전했다. 그 밭을 큰아들한테 준다고 하였는데 농사짓는 것이 별 소득도 없고 해서 그 밭을
팔았다. 처음으로 돈을 좀 예금시키고 했는데 막내딸 아이가 간호대를 나와서 외국기업에
간호사로 근무하다 순천에 출장 갔다 오다 만날 사람이 있어 잠깐 내려가서 얘기하고 오니
가방을 누가 가져가 버렸다고 했다. 시골이어서 순천까지 가는 시간이 조금 걸렸는데 그사이에
카드로 돈을 많이 빼 가 버렸다. 은행에 가서 카드와 통장을 막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가을에 잃어버렸는데 이듬해 봄에 큰아들 집으로 잃어버린 가방과 일기장이 우편으로 왔다.
아들이 분명 사고가 난 것이다 하고 형제들을 불러서 동생에게 물어보니 잃어버린 돈을 혼자
갚느라 카드를 여기저기서 돌려막아서 그 돈이 꽤 많았었다. 그 돈을 갚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된다고 하였다. 남편은 말하였다.
우리 친구는 돈 갖고도 아픈 딸을 못 살렸다고 하면서 그 돈을 갚으라고 하였다.
하는 수없이 그 큰돈을 다 갚은 딸도 고생 많이 하고 형제들도 도와주었고
처음으로 통장에 들어 있는 돈도 없어졌다. 그 아이가 시집을 가서 자식 낳고 잘 사니
큰아들이 하는 말 그때 많은 돈도 갚았으나 동생이 잘 사니 기쁘다고 하였다.
나는 아들이 따뜻하게 하는 말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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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아버지와의 관계
아버지는 항시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남의 아들 열하고 안 바꿀 딸이라고 하면서
바위 끝에 올려놔도 굶어 죽지 않을 딸이라고 나를 칭찬 하시었다. 그러면서도 딸은 많이
배우면 고생한다고 우리 동네 공부 잘한 선배가 중학교에서 유명하게 일 등 한 언니는
아이가 세 명 딸린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꼭 그 언니만 들먹이면서 앞날은 읽지 못하시고
나를 공부에 대해 안 가르치셨다. 아버지는 가정교육을 아주 엄하게 가르치셨다.
아버지의 엄하신 교육 덕분에 가난에 찌들고 험난한 세상을 이겨내는 것 같다.
지금도 살아가는데 아버지의 교육 영향이 내 몸에 많이 배 있는 것 같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가난하다는 핑계로 의복 한 벌 못 사드리고 용돈 한 번 못 드리고 안 가르쳤다고
원망만 하고 철없이 살았던 어느 날 갑자기 일하시다 혈압으로 쓰러져서 말 한마디 못 남기고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나 잘살라고 집도 고쳐주시고 가진 도움 다 주시다 가신 우리 아버지
하늘나라에서는 나도 잘살고 있으니 안심하시고 내가 가서 다시 만날 때까지 편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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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어머니
온갖 정성을 다해 나를 키우시고 남들한테 뒤처질까 봐 철 따라 남보다 먼저 좋은 옷 사
입히고 좋은 음식 가려 먹여 사랑으로 키워주신 천사 같은 우리 어머니. 작은어머님과
한집에서 같이 살면서 온갖 양보 다 하시고 밤이면 이 못난 딸에게 속엣말 털어놓던
우리 어머니. 지금 와서 생각하니 같은 여자로서 그 시절을 어찌 사셨을까?
낳지 않은 자녀들을 아홉 명이나 기르시고 온갖 사랑 다 주신 부처님 같은 우리 어머니.
나 시집 보내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시집온 사흘만에 신혼집 갔다 올 때 아버지, 어머니
망석리에서 읍내 노두리까지 걸어서 따라오신 부모님. 노두리 도정공장 넘어 원뚝길
올 때까지 바라보면서 계시던 부모님. 철없는 딸자식은 신랑 따라와 버리고 두 분이
돌아설 때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이제야 철들었는지 글 쓴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져 펜 잡기가 멈춰지네.
시부모 돌아가신 뒤 우리 집에 와서 몇 달 살면서 나 잘살라고 온갖 일 다 도와주던
우리 어머니. 서울 큰아들 집으로 가서 살고 계실 때 큰아이 군대 가서 면회 가면서 처음으로
어머니 뵙고 넷째 동생 결혼식 한다고 부산으로 간다고 하니까 엘레베이트 앞에까지 나와서
언제 다시 만날 까 하시던 어머니. 돌아가실 때 완도로 오셔서 그 마른 몸으로도 내 이름
잊지 않고 내 딸 아무개야 하고 부르시던 우리 어머니. 고마워요. 어머니. 다음 세상에
다시 만나 태어난다면 꼭 어머니 아들로 태어나고 싶어요.
헤어지지 않고 어머니 곁에서 못다 한 효 하고 싶어요.
이 글을 쓰다 보니 어머니가 저 곁에서 꼭 그리해라 딸아! 하신 것 같아요.
어머니 나 고생한다고 이젠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저세상에선 행복하세요.
우리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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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추억 속의 오빠
내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같이 자란 나에겐 오빠가 있었다. 조부모님 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촌이란 생각은 아예 해본 적도 없이 행복하게 살았었다. 초등학교 가기 전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 후 알고 나서는 더욱 사랑스러운 오빠였다. 내가 마음 다칠까 봐
더욱 신경을 써서 잘해 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조부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큰아버님께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시라고 우리는 아주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고 큰집 아버님이 조부모
모시고 사는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알고 보니 큰집 아버지는 식구도 많고 우리나라
풍속대로 하려고 아버님께서 큰댁에게 다물려 주고 큰댁에 살던 집으로 갔다고 하였다.
오빠와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사 간다고 좋아서 나는 새로 만든 수제 통을 들고 오빠는
작은 소반 상을 들고 작은 집으로 갔던 일이 문득 생각난다. 오빠는 머리가 좋아 천자문을
같이 배우는데 7일 만에다 외워 버렸다. 나는 아직 10자도 외우지 못했는데 항시 나를
칭찬한 오빠였다. 너는 그림도 잘 그린다 하면서 미대를 나와 미술선생 하면 좋겠다고 하시고
나는 크면 판사가 되련다 하시던 오빠. 완도에서 사 학년을 다니다 강진으로 전학 가서
1년 다니다 목포에서 졸업하고 목포 사범 중학교와 사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대에
합격하고도 경제 사정으로 전북대 행정학을 졸업하였다. 작은 아버님이 전주 세무서장으로
계실 때이니 그리했었던 것 같다. 오빠는 행정고시에 합격했는데 5.16 쿠데타가 일어나서
군대를 마치지 못한 오빠는 그만 사표 내고 사범학교 출신으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
하시었다. 오빠는 학교 다닐 때도 방학이 되면 작은집은 안 가고 완도에 있는 우리 집에 와서
생활하였다. 오빠와 같이 크면서 바다로 산으로 들로 다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오빠는 완도에 첫사랑이 있었다. 오빠가 대학 시절 우리 동네 착하고 예쁜 언니하고
좋아한다고 언니들이 말하면 나는 무척이나 부끄러워서 오빠한테 말했다. 오빠 아무개 언니랑
연애한다고 언니들이 놀리던데 참말이냐고 물으면 오빠는 웃으면서 누가 그러더냐?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오빠는 46세 젊은 나이에 혈압에 쓰러져 돌아가셨다.
우리 남매는 꿈은 이루지 못 했으나 오빠 자식이 부장 판사가 되고 작은 아이는 공학박사가
됐으니 하늘나라에서 기뻐하세요. 저도 자식들, 손자들까지 선생님이 되었어요.
오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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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우리의 사랑
나는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하였다. 둘이다 철이 없었든가 사랑이 뭔지 무엇이 사랑인지
조차 모르고 잠자고 일하고 그저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면서 내 젊은 시절을 보내버렸다.
내 나이 60세가 될 때 남편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남편을 보니 머리가 하나씩
하얘지고 남편이 아픈 데가 생긴다고 하였다. 그때 마음이 짠하고 안쓰러워 보였다.
이 나이가 되어 부부의 정을 알게 됐을까? 지난날은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었다.
어르신들이 하신 말씀이 세상 사는 것 잠깐이라고 하시더니 참으로 잠깐 지나가 버렸다.
힘들고 어려울 땐 긴 세월인 것 같더니 서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시간은 바람처럼 날아가
버린 것 같다. 생활도 나아지고 사랑도 알아갈 때 심술스러운 병마가 내 인생의 화려함을
막아버렸다. 남편이 병이 나서 행복도 즐거움도 잊어버리고 기나긴 세월을 병마와 동행하고
살아왔네. 남편은 파킨슨병이라고 진단받고 이 병원 저 병원 안 가본 병원이 별로 없이
다녀보고 한방 침도 원광대 병원, 장흥 약국 몇 달씩 다녀 봐도 효험을 보지 못하고
긴 세월을 고생하였다. 마음은 여리고 자존심 강한 남편은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 한번
못하고 그 세월을 견디어 내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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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고마운 남편
남편은 그 고생한 중에도 사촌 시누이 소개로 노인학교에 가라고 하였다. 집에 같이 있으면
둘이다, 환자가 된다고 하면서 자네나 나가서 여가생활도 하고 친구들과 만나야 한다고
하루도 못 빠지게 하면서 나갔다 오라고 하였다. 그 덕분에 마음 놓고 스포츠, 노래 교실,
노인학교, 갤러리 안 빠지고 다녀 보았다. 이루지 못했던 꿈을 노인이 되어서 다해보게
되었다. 전국대회 천안으로 춤추러도 가보았고 도 대회 합창단도 나가보고 전국 미술
대회도 나가서 입선도 해보았다. 이 모두가 남편이 나를 믿고 내보내 준 덕이었다.
한편으로 좋은 세상을 만나는 것도 되고 친구들 잘 둔덕도 되었다. 남편은 여행을 좋아해서
아픈 몸으로도 누가 여행만 하러 간다고 하면 안 빠지고 나선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하면서도
꼭가고만 성질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손발이 돼서 따라다녔다. 그 덕에 서울 구경,
강원도, 경상도, 제주까지 가보았다. 심지어 지리산 청학동도 가보았다. 손을 잡고 다니면
처음에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항시 그런 세상이니 다음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른손이 많이 떨어 식사는 항상 내가 챙겨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이 또한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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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친구
나에겐 속마음을 다 터놓은 친구가 있었다. 세 명이 나란히 윗집, 가운데, 아랫집 날마다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눈만 뜨면 만나는 친구였다. 한 친구는 일 년 선배이고 한 친구는
같이 학교도 갔다. 밤이면 놀다 헤어질 땐 세 명이 꼭 서 있다 같이 집에 들어가고 하였다.
그 친구 중 한 친구가 나이 19세에 대신리로 시집을 갔다. 우리는 둘이 남아 모든 걸 다
터놓고 살았다. 그러다 내가 먼저 결혼하고 한 친구는 1년 더 있다 군인한테 결혼하여
강원도 양구에서 살았다. 결혼하기 전 친구가 대구에 사는 또 한 명의 친구가 고향에 와서
나를 만난다고 두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시집온 지 몇 날 되지 않는 나는 친구가 반갑기는
하는데 날이 궂어서 방에서 김을 베끼는데 앉을 자리마저도 없는데 친구를 맞이한
내 마음은 어찌할 줄을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그 반가운 친구들이 조금 서 있다가 봤으니
가겠다고 하였다. 나는 같이 밖으로 나와 뭐라고 표현을 못 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때 헤어져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대구에 사는 친구가 지금도 소식을 알려고 노력하나
아직 연락을 못 하고 살고 있다. 친구야 보고 싶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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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친구와 나와의 사연
강원도에서 살던 친구가 신랑이 전역하고 완도로 와서 이불집을 차려 잘살고 있어서
내가 어려움에 있을 때 많이 힘이 도와준 친구였다. 나는 큰딸을 결혼시키려고 일부러
혼수이불을 전부 친구 집에 주문했다. 이불을 광주로 붙이려고 친구 가게로 갔더니 문이
잠겨져 있었다. 친구를 부르니 친구가 나와서 너 급전 좀 돌려주면 사흘만 쓰고 돌려주마
하였다. 나는 믿는 친구라 신랑 양복 찾으려고 광주 우리 사촌 동생한테 백만 원 빌린 돈은
있다만 하니까 지금 택시로 가서 그 돈 좀 빌려 달라고 하였다. 나는 같이 와서 아무 의심
없이 그 돈을 내주었다. 그리고 삼일 있다 이불 붙이려고 친구 집에 오니 문은 닫혀있고
친구는 안 보이고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숙덕이고 있었다. 아는 분한테 물어보니 부도가
나서 채권자들이 돈 받으려고 모여 있다고 하였다. 나는 멍해졌다. 그날 밤 시누이 집에서
자고 밤새 기다려도 친구는 보이지 않는다. 큰일 났다 하고 나도 가게 앞을 떠나지 않고
채권자들과 자세한 사연을 예기했다. 그분들도 사정이 딱한 걸 알고 다음 날 혼사 할 이불과
기타 물건들은 대충 내주었다. 그러나 돈만은 안 된다고 하였다. 하는 수 없이 다른 데서
돈을 빌려 무사히 결혼식은 잘 마쳤다.
-------------- 35. 팔아버린 전답 우리 부부는 부지런히 김도 하고 어장도 하고 가진 노력 끝에 목 질 게에 논 두 마지기를 샀다. 작은 집이 거기에 살기 때문에 그 연고로 사게 되었다. 첫 해 농사를 지었는데 풍년이 들어서 벼가 아주 잘 되었다. 돌보기는 어머님께서 돌보았다. 가을이 돼서 벼를 수학하였는데 배를 타고 가져오게 되었다. 그땐 농공단지가 바다이고 지금 찻길도 구 도로로 다닐 때이다. 바다 원둑까지 이고지고 오솔길을 걸어서 하루 내 우리 부부는 날랐다. 가을밤에 바람은 좀세게 불었다. 바다에는 김발을 막아서 선로(뱃길)를 찾아야 가게 되었다. 배에 짐은 가득 싣고 물결은 찰랑대고 달은 환하게 밝은 날이었다. 나는 무서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때는 기계배도 아닌 조그마한 김 채취선이였다. 막상 바다에 떠서 오는데 하도 무서워 벌벌 떨면서 소리질렀다. 어머니 무서워하고 남편은 자신 있게 말을 한다. 안 죽을 것이니 아무 소리말고 누워 있으라고 한다. 가만히 기대고 엎드렸더니 더 무서웠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워매 무서워라! 하고 소리 몇 번 지르고 나니 우리 마을 앞에 와서 선로로 들어온 것이다. 워매 이제 살았다 하고 말을 하니 남편은 죽을까 봐 걱정도 안하면서 웃고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안심이 됐다. 그런 고생을 한 삼 년 하고 나는 이 논을 팔자고 하였다. 아이들 가르치려면 돈도 있어야 하고 해마다 가을 되면 간이 콩알만 해진다고 하면서 남편에게 말을 했더니 어느 날 우리 친척분이 같은 주위에 논을 버니 그 오촌님께 팔았다고 하였다. 막상 팔고나니 서운하기는 했다. 지금도 읍내 가면 차로 그곳을 지나니 꼭 그 논을 돌아봐진다. 지금은 매립하여 밭으로 만들어 밭곡식을 심고 있다. 차로 그곳만 오면 남편과 고생했던 시절이 생각나고 그때가 우리의 전성기였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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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열 마지기 밭
대창 1. 2구 사이에 우리 밭이 있었다. 이 밭은 부모님께서 장좌리 황동섭 씨란 분에게
담보로 잡혀두고 돈놀이 돈을 빌려 썼다. 이자는 5부 이자 하다 조금 낮춰서
4부 이자로 불리고 있었다. 어장이 태풍으로 실패하고 돈을 갚지 못하고 몇 년이
되니 아주 많은 돈이 되어 버렸다. 고리 체신고가 있었는데 아버님께서 신용을 잃으면 죽는
목숨과 같다고 신고하지 않아서 우리에게로 그 빚이 물려받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꽤
오랜 세월을 빚으로 고생하였다. 안 해본 직업 없이 다해서 그 돈을 갚고 우리남편
명의로 이전하였다. 그 밭에서 나의 젊은 시절을 많이 보내서 항상 잊히지
않는다. 지금은 축양장으로 변해 있지만 나는 읍에 갈 때면 차에서 꼭 내려다보고 간다.
나만은 옛날 우리 밭이었을 때 그 모습을 그려보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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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나무로 땔감하고 산 시절
나는 시집온지 한 오 개월쯤 되는 날. 한 동네에 사는 친척 시형님 되는 분과 나와 같은
또래 친구와 우리 집에 와서 시누이를 찾았다. 무슨 일로 찾느냐고 물으니 나무하러 가자고
하였다. 나는 내가 간다고 하니 형님이 하신 말씀이 자네가 어떻게 나무를 한다고 하는가
동생하고 갈라네 하는데 나는 따라나섰다. 신작로에 막 올라가니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을
신작로에서 만났다. 뭣하러 가는가 하니 형님이 하는 말이 시간이 좀 있으니 나무하러
가네 하신다. 우리는 산에 올라가니 잘 마른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 우리들은 횡재했다고
그 나무를 묶고 있으니 개가 한마리 온 것이다. 형님이 개를 보시더니 동생 얼른 이리 오게
하며 도망가듯 가는 것이다. 나는 무조건 형님 뒤만 따라갔다. 칙칙한 숲속에 앉아 있으니
기침소리를 내면서 할아버지 한 분이 온 것 같았다. 큰 소리로 우리 아저씨 이름을 부르면서
아무개 마누라 일로 숨었냐고 고함을 치며 친구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고 야단을 친다.
친구가 그 옆에 바위 뒤로 숨었든지 나 여기 있소 하고 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우스워서 입을 막고 웃고 있으니 아무개 처는 왜 안 나오냐고 소리치니 우리 형님마저도
예 나갑니다 하고 나간다. 나는 하도 그 광경이 우스워서 웃고 있으니 또 하나는 왜 안 나와
하는 것이다. 깜짝 놀라있으니 형님이 동생 이리 나오게 하는 것이다. 나는 부르니 아무
말 없이 나가서 그분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나는 새 사람이라고 봐주는지
내 이름은 부르지 않고 우리 형님과 친구를 막 꾸짓으며 가진 악담을 하신다. 친구가 아이를
가졌는데 아이 배서 도둑질하면 아이도 도둑질한다면서 완전 도둑놈 취급을 하였다. 그때
시절엔 산(감독)한테 안 잡히기만 하면 누구나 아무 산에 가서 나무해다 땔감 하는 시절
이었다. 그 댁은 우리 동네서 좀 떨어져 있는 산밑에 외딴집이다. 나무를 압수한다며 그
할아버지는 강연을 한참 하시더니 나무를 묶어서 자기집에다 갖다 주라고 하신다.
다들 말을 잘 듣는다. 친구는 나무를 엄청나게 크게 묶는다. 나는 우리 것도 아닌데 하고
꾀를 부렸다. 조금만 묶었다. 그 집으로 가자고 할아버지가 우리를쫒듯이 데리고 갔다.
그 집에다 나무를 내려놓고 보니 인자하신 할머니가 계셨다. 아이고 이 더운 날씨에 고생들
한다며 찬물을 갖다주신다. 그리고 어서 나무이고 가라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가긴 어딜 가
하면서 방으로 들어가신다. 그 할머니가 어서이고 가라시며 웃는다. 우리는 할머니 말씀
듣고 나무를 이고 오게 되었다. 친구는 많이 묶어서 덕을 보는데 얕은 생각먹은 나는
손해를 보았다. 사람은 언제나 순리대로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 같다.
그 후 나무 잡힌 후 형님과 친구보고 왜 그리 떨면서 고분고분 하였냐고 물어보았다.
그 영감한테 나무하다 잡히면 공사할 때 동네다 불러 내놓고 야단을 치고 아무개는 잡혀서
산림계에 넘긴다고 야단이어서 민어 큰 놈 한 마리 사 갖고 가서 싹싹 빌어서 면했다네
하시며 웃었다. 그리고 친구 이름까지 부르며 너무 합디다 하니까 그건 그 집서 좀
살었드라네 노인들 밥해주고 시집오기 전에 그래서 이름 부르고 더 야단친 것이었을
것이네 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광경을 상상하면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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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나무조사와 술 조사
옛날에는 가정집에 직접 들어와서 조사하는 술 조사가 있는가 하면 나무도 조사 와서
가정집을 뒤지는 일이 가끔씩 가다 있었다. 어느 날 비가 와서 어른들은 맬막(멸치잡던
움막)으로 일하러가시고 나만 집에서 바느질하고 있는데 모르는 젊은 분들이 방으로
들어와서 여기저기보더니 벽장에서 맥고리(집으로 만든 바구니)를 꺼내어 방바닥에다
내려놓는다. 나는 놀라서 무엇하는 사람들 이냐고 물었다. 세무서에서 나온 술 조사라고
하였다.나는 그때서야 그건 우리 어머님이 (밀 줄) 밀 껍데기를 버리기 아까워서 필요할까
하고 만든것이라고 용서해 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아무 말 않고 우리 아버님 문 표만 적고
나가 버린 것이다. 나는 따라가면서 용서를 빌었으나 그분들은 빠르게 이 집 저 집을 다니고
있었다.하다 못해 그분들이 지나갈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뒤에 그분들이 오고
있었다.또 사정하였다. 알아들었소만 하고 지나가려고 할 때 우리 작은 아버지도 당신들과
같이 세무서에 계시고 사촌 오빠도 세무서에 계신다고 하였더니 누가 작은 아버지 냐고
물었다. 나는 작은 아버지 존함을 말하였다. 그분들이 작은 아버지와 오빠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작은 아빠는 목포, 무안 세무서에 계시다 전북 김제 세무서 소장으로 발령받아서 김제가
계시다 전북 전주 세무서장으로 계실 때였다. 그분들이 새댁 걱정 마시요 하고 가려는데
우리 아버님 성함을 적었지 않소 그 문서를 좀 빼내 주십시오 하였더니 그분들이 알았소 하고
아버님 성함을 지워주었다. 새댁 이제 됐소 하면서 참으로 대단하요 하면서 대창 2구로
넘어갔다.여름에 그 일이 있었는데 가을쯤 돼서 우리 마을 한 집이 잡혔는데 벌금이 나왔다고
하였다.나는 좋아 좋아 하였다. 혹 벌금이 나올까 봐 그런데 벌금은 안 나오고 그 일은 작은
아버지 이름석자로 무마되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를 생각하면 작은 아버지의 크나 큰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이 서성대며 분주하니 서둘러 집들로 가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동네에 산감이 와서 집을 뒤진다고 하였다. 나도 집으로
와보니 어머님이 밭가를 쳐서 집에다 쌓아놓은 나무에 생 소나무도 하나씩 섞여있고 도토리
나무도 들어 있었다. 이걸 어디다 감출 수도 없고 서성대는 때에 우리 집에 산감이 들어왔다.
나는 놀라 처다 보니 국민학교 동창이었다. 낯은 서로 알지만 말은 해보지 못한 남자 동창이었다.
아무 말 못 하고 서 있으니그분도 나를 아는가 웃고 나가 버린다. 그때 탈없이 지내는 일이
동창인 친구 덕분인 것 같아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친구 덕을 크게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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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옛 어른들의 산후 과정 풍습
나는 첫 아이 날 때 남편은 군부대에 가고 없고 시누이랑 한 방을 썼으니까 당연히
시누이가 같이 있었다. 진통이 너무 심해서 시누이를 기대고 힘을 쓰니 시누이는 못
견뎌서 나가버리고 시어머님께서 소 반상에다 물을 떠 가지고 들어 오시더니 내 머리맡에
두고 두 손 모아 비는것이다. 어지신 지향 님네 우리 며늘아기가 헌 치마에 왜 빠지듯이
푹 빠지게 해 주십시오 하고 계속 비는 것이다. 나는 진통이 오는데도 그 소리가 하도
신기해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보니 어느 순간 아이가 나왔다. 어머님은 밖으로
나가시더니 짚 한줌을 가지고 와서 자리에 깔아 주면서 누우라고 하였다. 그때는 아이를
낳으면 금줄을 친다(짚으로 만든 줄) 아들 낳으면 고추를 달아주고 딸을 낳으면 하얀
종이만 달아 주었다. 3일이 되면 삼질이라고 밥 차려 놓고 7일이면 일하라고 밥 차려
놓고 빈다. 그렇게 3, 7일이 넘어가면 금줄도 걷고 산후조리도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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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무당굿
삼칠일이 넘고 밥도 보리밥 먹고 일을 하니 머리도 아팠다. 풍족하던 젖이 부족하다.
멸치 어장하니 3, 7일 안에 동네 분들이 멸치를 사러 와서 집엔 안 들어오고 대문에
서서 나를 보고 좀 갖다주라고 하였다. 나는 멸치를 갖다주었는데 우리 어머님 말씀이
이레 안에 물건을 내주어서 젖이 적어졌다고 하였다. 옆 마을 영풍리에 무당이 살았는데
그분을 불러서 지향 맞이 굿이라고 (술) 조래를 잡고 날을 받아 굿을 하였다.
나는 시집올 때 해온 저고리 한 벌을 내주고 돈은 부모님께서 주었을 것이다.
그분이 하는 말이 젖을 타오려면 (술병) 댓 병 두 개를 가지고 새벽에 아무도 물을 가져가지
않을 때 우물 샘에 가서 물을 두 병 가득 담아 솔잎으로 막아서 물이 뚝뚝 떨어지게 목에다
걸고 우리 집으로 오면서 우리 아이 젖을 먹고 남게 해주세요 하고 집으로 오라고 하면서
삼칠일을 하라고 하였다. 나는 아주 힘이 들었다. 그러나 시킨 대로 하였다. 그러나 젖은
매한가지였다. 잘 먹은 날은 더 잘 나오고 못 먹은 날은 더 적었다.
그 후 다른 아이들 낳을 때 똑같이 그리했다. 밑에 아이들은 그런대로 아무 방침 않고
그대로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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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큰 시할아버님과의 관계
내가 시집오니 큰 할아버님께서 계셨다. 청산에서 사시다 집으로 오신 지가 2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큰 할아버님께선 남매를 두셨는데 아드님께서 고기 잡으러 바다에 가셨다 돌아
가셨다고 하였다. 우리에겐 당숙인 그분께선 딸을 한 분 낳으시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원래 우리 시조부님께서는 죽청리 작은집에 가 계셨다. 셋째 작은 아버님께서 모시고
사셨다. 큰 할아버님께선 우리와 같이 살면서 우리 첫째 둘째까지 돌봐 주시었다. 산도 개간
해서 밭도 일구고 같이 집안일도 도와주시며 십 년 가까이 사신 것 같다.
큰 할아버님께서 나를 망니 아가라고 부르셨다. 친손자처럼 예뻐하시고 꼭 같이 일하였다.
나는 큰 할아버님을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존경하였다. 같이 긴 세월을 보내니 정이 많이
들어서 친 할아버님 같았다. 내가 집안 식구들과 언짢은 일이 생기면 내 편에서 얘기하여
주시었다. 이러시던 할아버님께서 하루는 동네잔치에서 술을 좀 많이 드셔서 술주정도 나에게
하시었다. 우리 집에선 내가 제일 편안하여서 그리했을 것이다. 돌아가실 때도 임종 전까지
나를 부르시던 할아버님 망니(망석리) 아가 미안하다만 나 좀 일으켜주라 하신 소리가 지금도
나의 귓전에 생생하니, 생각이 난 것 같다. 아버님 어머님 온 가족이 임종할 때 다 지키고
있는데 제일 끝에 있는 나를 부르시던 할아버님. 하늘나라에선 아무도 외로워하지 말고
편하게 사십시오. 존경합니다. 할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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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장손의 무게 나는 직손의 할아버님과 직손의 아버님 밑에서 자랐다. 그런데 시집을 오니 장손에 할아버님 장손에 아버님, 남편까지 장손이었다. 우리 시 친 할아버님은 직손이었는데 큰 할아버님께서 자식이 없어서 우리가 모시게 되었다고 하였다. 제사가 7분이었다. 고조, 증조, 큰 할아버님, 큰 할머니, 큰 할아버님께서 아들 한 분이 있었는데 딸 한 명 낳고 고기 잡으러 가셔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당숙 제사까지 7번을 지내었다. 지금은 제사가 10분인데 며느리 생각해서 유행 따라서 아버님 제삿날 합쳐서 지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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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태풍
세월이 오래되어서 무슨 태풍이었는지는 혹시 애그니 때 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해 음력 8월 5일 정도인 것 같다.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크게 불어서 죽청리 목질께에
사시는 할머님과 작은 어머님 조카까지 산사태로 돌아가셨다. 물론 장손인 우리 집으로
소식이 왔다. 우리 온 가족이 다 가서 일을 보았다. 다음날도 비가 많이 와서 사람들이
출입을 못 할 정도였는데 바로 옆에 사촌 시누이가 살고 있어서 그 집에서 초상 준비를
하였다. 시신은 시누이댁 창고에다 모셔 놓고 밤을 새우는데 다른 형제들은 집으로 다 가고
없는데 우리 부부와 같이 거기 산 사촌 시누 부부, 우리 내 밑에 동서와 사촌 시누 한 분
그렇게 밤을 새우는데 진짜로 무서웠다. 시신을 염을 해놔야 관속에 넣을 때 불편하지 않
은다고 밤에 창고로 염을 하러 가려는데 아무도 따라나서지 않는다. 남편은 할 수 없이 그
때 총각인 사촌 동생을 데리고 들어가서 염을 해놓고 나오더니 할머님이 얼굴을 많이
다쳤었는데 밤에 보니 아무렇지도 않고 고이 주무신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다음 날
할머니 조카분과 남편의 계군 한 분과 세분이 소다름 하러 들어가더니 남들은 쑥으로 코를
막고 나왔다 들어가고 하는데 남편은 다하고 나오는 것이다. 당신은 괜찮았느냐고 하니까
어째 괜찮했겠느냐고 하면서 그 환경에서 자기가 냄새난다고 하면 남들은 더 할 것 아니냐고
하면서 꾹 참아냈다고 하였다. 그런데 밤에 본 할머니는 그렇게 곱고 깨끗해 보였는데
낮에 보니 그래도 많이 다쳐서 피가 응구 되어서 흙조차 있어서 닦아 내느라 힘들었다고
하였다. 그날 밤 너무 무서워서 못 받든지 할머님이 좋은 모습으로 손자에게 보여주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하면 장손으로 살다 간 남편이 장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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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보증
아무리 급한 사정이 있어도 보증은 안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보증 문제로 많은
괴로움을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바로 밑에 시아제가 한 동네다 살림을 내서 김하고
살라고 어장 건과 새 배를 지어서 살림을 내주었는데 처음 하는 일이어서 소득을 내지
못하고 김발막는 비용만 빚으로 남게 되었다고 막내 시아제에게 밀어주고 원양어선을
타러 가버렸다. 시아제가 동네서 살 때 어촌계장 하면서 김 제조 하는데 물이 필요하다고
수협에서 융자를 받아 용수 탱크라고 하는 큰 물탱크를 만들었다. 우리는 잘 몰랐는데
어촌계원이 보증을 서고 가져왔다고 했다. 그런데 물이 작아서 몇사람만 김제조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돈 가져 올 때 우리 동네 김기연 씨라는 분이 탱크 핑계로 자기 논과
산을 담보로 잡고 돈을 더 많이가져 왔다고 하였다. 그 담보 잡을 때는 수협에서 감정도
나왔다고 하였다. 감정 나온 사람은 기연 씨의 조카라고 하였다. 그런데 물도 적어서
실패하고 아제도 외국에 가고 없으니 그 내막(내용)을 아는 분이 수협에 가서 돈도 그렇지만
산은 아무 가치 없는 데를 잡아놓고 동네 사람들을 보증세웠다고 어떻게든 수협에서
받으라고 우리 동네 분이 말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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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생각지도 못한 보증인이 되다
수협에선 그 소리를 듣고 하는 일인지는 모르나 기한도 되지 않았는데 돈 갚으라고
동네로 통보가 오고 내용증명도 오고 하니 기연 씨는 기한이 많이 남아 있다고 말해도
아무 반응도 없었다. 동네 분들은 이 일로 날마다 회의하고 우리 식구를 불러 간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들은 다 모여서 우리 집에 와서 돈을 갚으라고 조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혼자 아이들 데리고 사는 동서에게 이런 말을 해봤자 아무 대책이 서지도
않아서 그냥 그대로 당하고 있었다. 협박한다. 외국 간 시아주버니를 불러들인다고
하고 며칠 안에 갚지 못하면 형사소송 한다고 하고 여러 가지로 협박을 하니 동네 분들이
다 무서워졌다. 뒤로 아는 일이지만 동네 분 누가 가서 수협에다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집 형이 보증을 서면 된다고 아니나 다를까 수협에서 우리 남편에게 보증을 서고
그 논과 산을 사라고 권고하였다. 그때 우리도 형편없이 빚에 쪼들릴 때였다.
돈이 없고 빚도 많아서 못 한다고 하니 수협에서 봐준다고 자청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이 시끄러운 사건을 매듭지려고 보증을 서게 되었다.
---------------------- 46. 법정에서 논과 산을 사다. 보증을 섰으나 기연 씨가 산과 논이 기한이 남아있다고 땅을 내주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장흥까지 가서 인수하게 생겼다. 수협에선 우리에게 떠넘겨 버렸다. 지금만 같았어도 뭘 좀 알았을 텐데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면 시간이 남아있으니 아제가 와서 정리하게 놔두었어도 될 일인데 미리 겁을 먹고 말았다. 그 당시는 형사인지 민사인지도 모르고 수협에서 시키는 대로 하였을 뿐이다. 장흥을 세 번 가서 법정에서 그 땅을 우리 명의로 받았다. 법정에서 바로 등기가 나왔다. 그 땅은 시아제가 가지고 우리의 그 빚을 시아제가 갚았다. 동네 사람들은 수협과 장흥에 다닌 비용이라고 우리 선산을 잡았다. 그 선산을 우리가 또 사게 되었다. 그 일로 우리는 많은 경비와 손해가 있었지만, 형이니 할 수 없이 다 겪고 나왔다. 심지어 출자금도 우리 돈으로 넣고 빚은 갚으러 갈 때마다 출자금 타령에 그때 돈 200만 원을 끼였는데 수협마저 부도나서 한 푼도 못 받았다. 세월이 가니 다 잊고 살았는데 자서전이란 글을 쓰게 되니 복잡했던 한 시절이 적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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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우리 부락과의 관계
나는 22살 때 군외면 대창 1구 마을로 시집을 왔다. 사는 동네는 작았지만 그땐 1, 2구가
한마을이었다. 어느 날 밤 이장님이 방송하였다. 오늘 저녁엔 부녀회의가 있으니
한집에 한분씩 여성들은 빠지지 말고 나오라고 하였다. 나도 그날 밤에 나가 보았다.
가서 보니 나이 많은 어머님들도 많이 오시고 내 위에 형님들이 많이 모였었다.
1, 2구 분들이 다들 모인 것 같았다. 그날 회의가 부녀회장을 뽑는 자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칠판에다 회장에 내 이름과 총무에 우리 집 바로 옆에
사는 시댁이모 되는 분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내가 무엇을 할 줄 안다고
이렇게 해 놨다고 항의하니 총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계산만 해주고 서류만
정리해주면 되네하고 설득을 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회장이 되고 말았다. 시집온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내가 그저 총무께서 하자는 대로 하였다. 이모님께서는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하시면서 먼저 회원들의 명부부터 적으라고 하시면서 한 분 한 분 이름을 대라고
하시었다. 옛날 어머님들 이름이 아주 정겹고 재미있었다. 김 쌀례, 고망 내, 서 잔 근년,
김 처녀 어머님들 이름을 적으면서 회원들이 한바탕 웃기도 했다. 그 후 부녀회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15일이면 꼭꼭 회의하였다. 바다에 조개 파는 것도 막았다.
함께 채취하고 보리쌀 1되씩 걷어 팔아서 그 돈으로 그릇을 사서 동네 큰일 치르는 집에
빌려주고 사용료를 받아 예금도 하고 생활필수품도 동네서 팔아서 수입을 늘려가고
부녀회원 활동이 아주 활발하였다.
--------------------- 48. 총무가 이사가고 새총무 그땐 1, 2구 두 마을 합쳐서 백 가구가 넘었었다. 총무가 그릇 사서 내주고 들이는 것을 다 하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이모님이 해남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그릇을 우리 집으로 옮기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일도 많고 시집 생활에 복잡하였다. 집도 좁아서 큰일 났다 생각하고 남편에게 말하였다. 남편은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네! 우리 집 광 한편에 두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모 집에서 그릇을 옮겨다 우리 집 마루 옆에있는 광에다 놓아 주었다. 그 후 새 총무는 우리 동네서 아주 야무지고 똑똑한 형님이 맡게되었다. 그 형님은 샘(욕심)도 많고 부지런해서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동네 분들이 돌아가면서 막걸리도 받아다 팔게 하였다. 김하고 고된 작업에 어른들은 술도 아주 잘 먹을 때였다. 통장에 돈이 꽤 모여지니 총무 형님 하는 말이 우리 이 돈으로 관광도 가고 동네잔치도 하고 귀하게 쓰게 하고 통장만 보면 좋아하시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형님이 병원에 가시더니 암판정받았다고 하였다. 전대병원에서 수술하는데 나는 병원에 병문안을 갔었다. 돌아가실 줄은 모르고 나에게 동네 이야기하고 바지락 팔 얘기까지 하던 형님인데 수술을 하려고 벌려 보니 만기가 돼 다른 장기까지 전이가 돼서 그냥 닫아 버렸다고 하였다. 그 후 퇴원해서 몇 달 사시다 돌아가셨다. 나는 지금도 그 형님이 생각난다. 여행 한 번도 못 가고 일만 열심히 해서 돈만 모아 놓고서 그 돈으로 남은 우리는 여행도 많이 다녔는데 누구 한 사람도 그때 총무 하신 분들이 열심히 모아 놓은 돈이란 말은 한 분도 들먹이지 않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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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부녀회장의 활동
나는 부녀회장을 하면서 완도 미역 홍보도 하러 다녔다.
처음으로 미역을 고금면 덕동리에서 가공할 때인 것 같다. 2박 3일 교육받고 군외면
수협에서 미역 홍보를 할 사람으로 나를 정했다고 하였다. 김 할 때라 무척 바쁠때인데
우리남편이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속없는 양반이라고 탓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군외수협에서 사람이 왔다. 최병진 씨와 조제기 씨가 고금면 직원 한 분과 한 조가 됐다고
하였다. 우리는 광주로 가서 그분들은 여관에서 자고 각자 홍보하고 나는 우리작은집에서
자고사촌 동생 옷 도방(도매)하는 가게로 가서 미역을 다라(광주리)에다 물을 붓고 담가
놓았다. 파랗게 대처있는 미역이 아주 부드럽고 먹음직스럽다. 거기서 많이 주문받아서
팔았는데 다음에 동생 집에 갔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미역이 여름 넘으니 다 썩어서
처지더라고 사 간 사람들이 우리 동생한테만 꾸중했다고 하였다. 그때 처음이라 데치기만
해서 염장을 안 하고 박스에다 1kg씩 담아서 팔았었다. 처음이라 그랬을 것이다
<사진>
-------------------- 50. 나를 믿고 키워준 부락 시집 막 와서 아무것도 모를 때 나를 믿고 회장직을 맡겨놓고 가르쳐 가면서 키워주신 부락민들이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젊을 때는 바쁘고 힘든데 계속회장에 총무에 일을 맡기니 싫은 적도 있었다. 지니고 보니 나를 믿고 일을 맡긴 부락민이 고맙습니다. 동네일을 보다 보니 힘든 일도 있었지만 좋은 일이 더 많고 좋은 어른들과 만남도 있고 좋은 친구도 사귀고 많은 경험과 삶의 지혜도 얻어지는 것 같아서 나이가 든 나로서는 행복하고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시집와선 정도 안 들고 무엇이든 낯설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53년 이란 긴 세월을 함께하고 함께 웃고 같이 살아온 우리 부락민들이 그 누구보다 친절하고 정겹고, 사랑합니다. 남은 내 인생은 작은 도움이라도 내 힘이 되는 데까지 우리 부락을 위하여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부락 주민분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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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우리 시어머니의 여행 얘기
우리 시어머님께서는 내가 시집올 때 나이 50세이셨다.
허리가 약간 굽은 편인데 하얀 당목 치마에 하얀 당목 저고리 입으신 어머님이 늙으신 줄
알았었다. 지금 내가 나이를 먹고 보니 어머님 그 나이엔 아주 젊은 나이였었다.
어머님께서 부락에 계 부은 몇 분 어머님들과 대흥사로 여행을 가셨다. 그리고 2구에 사시는
30대 형님 한 분도 같이 갔다고 하셨다. 대흥사에 도착하니 젊은 남녀들이 많이 왔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분들이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고 놀더라고 하셨다.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젊은 남녀가 꽉 부둥켜안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꽉 안고 키스하고 또 돌다가 키스
하더라면서 나보고 나이 젊어선 여행 다니면 못 쓰겠다고 하셨다.
하도 볼썽사나운 짓을 하니 꼴도 보기 싫더라 하시며 2구에서 간 형님도 같이 놀라고 밀어
넣었더니 그놈에 사내들이 아무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원동에서 놀러 온 젊은것들 하고만
키스하고 지랄들 하더라면서 이놈에 세상이 어찌 되려고 신랑 있는 젊은것들이 그렇게 지랄
들 하는가 몰라하시면서 우리가 어머님 말씀이 재미가 있어서 웃고 있으니까 너희들은 웃을
것도 셌다며 젊은이들이 즐겁게 노는 것이 못마땅해했다.
그때 시대가 60년 대 시대였었다. 아마 부부 동반 여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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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추억
나는 오늘 운동 가는 길에
반백 년을 걸었던 추억의 길을 걸었네
임과 함께 걸었던 길을 걸었네
재 너머 농사짓던 밭에
나도 모르게 발길이 이 길로 가고 있었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그 추억 그 모습은 어디로 가고
검은 아스팔트 길 축양장 옆 양옥집
사방이 포장되어 밭둑길 덮었네.
차만 오가고 풀 한 폭 없는
옛날 모습 그리워도 찾아보기 어렵네
언덕 위몇 그루 푸른 나무들
저 나무가 나를 반기듯 하네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나무만 바라보다
살아왔던 옛 추억을 그려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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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나무하던 시절
하루는 동네 처녀들이 댕각목(입사귀 없는 나무)을 하러 가자고 시누이 동생을 찾는다.
그땐 나무를 해다 우리 멸 덤장에다 파는 때였다. 그땐 맬 디치려면 나무가 연료였을 때였
다. 그래서 나도 따라나섰다. 우리 동네 산봉우리를 넘어서 영풍리 부락림이라고 하는
산에 도착하여 동네 처녀 세 분과 시누이 나 그렇게 갔었는데 그 지역 이름은 조세 목이라
불렀다. 산에 도착해서 나무를 몇 가지 찍고 있는데 이놈 잡았다 하며 나이 든 아저씨
한분이 내 옆에 서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낫을 빼기지 않으려고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 서서보니 내 손에서 피가 흐른 것이다. 아픈 줄도 모르고 놀라고 있으니 그분이
하신 말씀이 낫은 어디에다 두고 손만 비었느냐고 하시면서 쩌쩌 하며 낫을 찾아다니더니
숲속에서 찾아 송진을 벗겨서 내 손을 묶어 주시었다. 나는 오해를 했다. 낫을 뺏으려고
그런줄 알았는데 낫으로 나무껍질을 벗겨서 나를 치료해주려고 그리했던 것 같았다.
누구네 며느리냐고 물으면서 귀신같은 놈들은 다 도망갔는데 처음 온 놈이 잡혔구나
하시면서 2구에 사신 아저씨 이름을 부르면서 그 집 며느리냐고 하셨다. 눈치를 보니
가르쳐 주어도 용서할것 같아서 우리 시아버님 존 암을 대주었더니 깜짝 놀라면서 그 집
며느리가 왜 나무하러 왔냐면서 집에서 땔 나무는 사주지 않는 것이구나 하시며 자기들도
우리 멸덤장에다 나무 팔기도 한다고 하시었다. 알고 보니 영풍리에 사신 아저씨인데
영풍마을 산지키는 산감이시었다. 그 아저씨가 동생들이 찍어 놓고 도망가버린 나무를
손수 다 모아서 나무로 멕기를 틀어서 단단하니, 묶어서 내 머리 위에 올려준 것이다.
나는 그 나무를 이고 고맙다고 하고 집에 오니 우리 마을 쉼터 나무해오다 쉬는 곳에서
동생들은 놀고 있었다.
- 뒷 말 -
동생들이 나를 보고 웃으면서 하는 말이 손 안 대고 코 풀었다고 하면서
알지도 모르면서 우리 동생이 도망가면서 야단쳤다고 하였다.
느려도 느려도 저렇게 느린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하면서 야단치더니 나무만 한 짐이고
온다면서 동생들은 신이 난 듯 한바탕 웃고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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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남편과 첫 장사
우리는 바다 일을 안 하고 살아보려고 아이가 들이댈 때 완도읍으로 돈도 가진 것 없이
부모님께서 조금 준 돈으로 방을 얻어서 나갔었다. 밥그릇 숟가락을 집에서 같고 이불과
옷만으로 살림을 차리러 갔었다.
처음 시작하는 인생길 참으로 어려웠었다.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친정어머님이 땔나무를
갖다주시고 식량도 가끔 가지고 오셨다. 집 옆에 이모가 살아서 돈을 좀 빌려주시었다.
우리는 그 돈으로 장사를 시작하였다. 수협에서 멸치, 김, 미역을 받아서 각 읍내 장으로
팔러 다녔다. 우리 남편은 장사에 취미가 없는 건지 도저히 같이 다니지 않으려고 했다.
물건 살 땐 조금 도와주는데 파는 데는 나 몰라라 하였다. 하루는 망남리에 가서 미역을
백뭇을 사서 트럭을 빌려 호남화물로 나주장으로 붙이었다. 다음 날 남편과 같이 가자고
했다. 장에 가서 장사하는 사람들한테 도방으로 넘기는데 다 못 넘기고 조금 남았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하숙을 정하고 물건을 맡겨놓고 시장으로 알아보려고 가는데 어떤
신사한 분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장사는 안 한 사람 같은데 하면서 다가오더니 미역을
자기가다 팔아 주겠다고 하면서 우선 술이나 한 잔씩 하자고 주막집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나는 거기가 같이 있기가 그래서 하숙집으로 와버렸다. 한참 있다 남편이 들어오더니 내일
그분이 다 팔아준다고 했단다. 술값은 남편이 내고 왔다고 하였다. 우리는 다음날 그분을
만나러 약속 장소로 갔다. 그분이 먼저 와서 하는 말이 자기가 이리저리 다 알아보았으니
여기 그냥 계시다 점심 먹고 갖다 만 주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소 갈비탕집으로 가서
자기가 점심을 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점심을 먹고 미역 팔아준다는 말에
점심값도 우리가 냈었다. 그리고 미역을 인계하고 오려고 하는데 앉아서 무슨 얘기만
늘어놓은 것이었다. 나는 하숙집으로 와서 짐 옮길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오더니
아마도 사기꾼 같아서 화장실 간다고 와버렸다고 하면서 집주인에게 이런 말을 하니
집주인도 끄덕이면서 피해 버리라고 하였다. 우리는 미역을 조금 가지고 시내 밖으로 나와
버렸다. 처음 장사를 하다보니 사기꾼이 우리 부부를 알아보고 다가온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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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고동촌이란 마을
시내 밖으로 나와 어디로 갈까 하고 있으니까 차 타려고 오는 아줌마가 미역 팔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를 따라오면 미역을 동네다 팔아 준다고 하였다.
우리는 다시 하숙집으로 가서 조금만 놔두고, 이고 지고 나와서 시내버스를 타고
고동촌이란 마을로 갔다.
마음씨 좋으신 아주머니가 친척같이 점심도 차려주고 젊은 분들이 살려고 고생한다면서
물건을 그 부락에다 다 팔아주었다. 그 마을은 아주 큰 마을이었다.
우린 감사하다면서 미역 1뭇을 사례로 주고 다시 온다며 헤어졌는데 아직 가보진 못했다.
그 아주머니는 돌아가셨을 것 같다. 그때 우리 형님들 년 갑이나 됐으니까.
그 후 우리 남편은 서울 갈 때 나주만 지나면 그때 그 얘기를 하였다. 우리 여기 미역
팔러와서 고생 많이 했었지, 하면서 항상 그 얘기를 안 잊고 꼭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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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사투리
나는 내 밑에 동서하고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밍크 옷을 사다 완도에서 팔았다.
서울에 갈 때는 완도에서 김과 파래를 사 가지고 팔고 올 때는 이불을 사서 붙여 놓고
와서 완도에다 팔았었다. 서울 응암동에 가 우리 동서 친정어머님이 살고 계셨다.
우리는 응암동 화물로 부쳐놓고 가서 응암시장에서 팔았다. 그땐 비닐 봉지도 없을 때였다.
신문지로 포장하여 주던 때였다. 응암동 시장에서 김과 파래를 팔고 있는데 우리 사부인께서
잘 팔고 있나 하고 구경 겸 나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야 완도가 김으로 유명한 곳이니
서울 사람들도 완도를 알고 있으니 완도 사투리를 쓰면서 사라고 해라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웃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예말이요 완도에서 가지고 온 김과 파래좀 사시오
하면서 나오는대로 우리 완도 말을 썼다. 그러니 우리말이 우스운지 몇 사람이 지나다
웃으며 보고 갔다. 그런데 안장을 찬 한 젊은 신사분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당신들 어데서 왔소
하고 물으신다. 우리는 그냥 완도서 왔어라우 하니까 그분이 놀라는 듯하면서 완도 어데서
왔소 하는 것이다. 엉겁결에 완도 망석리에서 왔어라 하니 깜짝놀라며 나도 완도 사람이요
망석리가 우리 누나가 살아서 중학교 다닐 때 망석리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우리는 서로
반가워하였다. 서울이란 큰 곳에서 우연히 만나는고향 사람에게 덕을 보았다. 그분이
응암시장 장감이었다. 우리같이 잡상인이 들어오면 몰아내는 역할도 하는 것이었다.
그 후 삼 일간을 좋은 자리를 정해주면서 눈치껏 자기 가고 나면 살짝 피하는 척하면서
팔고 가시라고 하였다.
우리는 삼 일간 그곳에서 잘 팔았다. 그런데 한 여인네가 그분이 나가시오 하고 오니까
아저씨 왜 저분들은 날마다 저기서 파는데 가만두냐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 우리는 놀라서
우리도 나가려고 하고 있소 하고 그 장면을 살짝 피해 주었었다.
그 후 고마운 인사도 못 하고 고향에 왔는데 그 뒤론 가지 않아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였다.
지금쯤 그분도 많이 늙으셨겠지. 그분의 고향은 신지면 신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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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나의 고향
내 고향은 완도읍 망석리였지.
앞산과 뒷산이 광주리 모양처럼 싸고 있는 곳.
인정 많고 사랑 많은 우리 고향 분들
어쩌다 읍내에 나가면 아니 멀리서도 알아보고
읍에 왔네 하고 반겨주던 우리 동네 사람들.
아야 너는 지금도 거기서 사냐 하고 물어도 보고
네가 그 동네서 살지는 몰랐다 하는 오빠도 있었다.
그런데 무심한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가서 정겹던 고향 분들
다 돌아가시고 만나면 안부 물어보며 반가워하던 고향 분들
안 보여서 물어보면 돌아가셨다고 하네.
세월은 흘러가 아무리 오래돼도 변하지 않는
내 마음속 내 고향은 망석리 라네
지금도 꿈을 꾸면 고향 꿈이 꾸어지네
고향 내 평생 잊지 않는 고향 내 부모님이 묻혀 있는 곳
지금도 살고 계신 분들 만나면 반갑고 옛날이 그리워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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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내 남편과의 마지막 이별 나는 내 남편이 항시 내 옆에 있는 줄만 알았네. 긴긴 세월을 같이 지내면서 어느 날 갑자기 그리 허망하니 가실 줄은 전혀 몰랐네 보통 때 같이 밥 먹고 닦아주고 그러고 사는 게 하도 길어서 언제나 똑같이 그 마음으로 생각하였지. 어느 날 남편이 말을 하였지. 어야 학교가면 빨리좀 오게 자네 기다리는 시간에 눈이 빠지것네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남편은 가는 날을 알고 있었을까 평소에 안 하든 소리를 하였는데 나는그런 소리를 보통때와 똑같이 알았소 하고 넘겨버렸다. 항시 아프다고 해도 몸이 불편해서 움직임이 불편하지, 식사도 잘하시고 자기 관리는 자기가 하는 분이라 그런 줄만 알았는데 마실갔다 오니 작은아들이 와서 아버지가 엄마를 찾고 소리를 지르며 이상하다고 하였다. 곁에 가보니 많이 힘들어 하는것 같았다. 나는 119에 전화해 놓고 광주 큰아들에게 알렸더니 119구 먼저 도착 하였다. 막내, 큰딸, 큰아들이 도착하여 막내가 119구로 전화해서 당 조절한 주사를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119가 도착해서 당 주사를 놓고 약 먹이니 좀 나은 것 같았다. 대성병원에서 사 일간 입원하니 정신이 들어 퇴원하여 집에서 간병하는데 말도 잘하고 식사는 미음으로 조금씩 먹었다. 그래도 나는 몰랐다. 그렇게 가실 줄은. 어느 날 둘째네 부부가 왔었다. 고추 심을 시기라 지주대를 사려고 사위와 나는 밭에 가서 막 지주대를 세우고 있는데 딸이 나를 부른다. 엄마 아버지가 엄마를 찾는다고 했다. 예감이 이상해서 빨리 가니 말을 못 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아침에 식사하고 잘 닦아 주었는데 마음이 이상하니 마지막일 것 같아서 따뜻한 물로 다시 닦아주면서 말을 좀 해보라고 흔들며 불러봐도 아무 소리못 하고 그냥 숨만 쉬고 있다가 긴 숨 쉬고 가버렸다. 참으로 허망하였다. 동갑내기로 철없을 때 만나서 서로 자식들 키우고 살아보려고 죽도록 일만 하고 의견 충돌하고 멋없이 살아오다 철들고 아낄 줄도 알아갈 때 허망하니 가고 말았다.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간 게 지금도 후회가 된다. 밭에 안 가고 있었으면 무슨 말을 남겼을까 하고 내 인생 후회뿐인데 인생 자서전을 쓰게 돼서 이나마 남겨 놓을 글을 쓰고 있다. <사진> ----------------------- 59. 노래 교실에서 강원도 여행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우리나라 노인 복지가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만 못하다고 하여도 나는 아주 잘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완도군 복지회관에서 목포에서 오신 민복례 교수님한테 노래를 배우고 있었다. 노래 교실 회장님이 군외서 소개받아 강원도 고성군 군민 행사에 초대되어 여행을 가게 되였다. 공짜 여행 관광버스를 타고 대관령을 넘어서 설악산을 구경하고 고성군으로 간다. 가는 도중 산중으로 가는데 땅속에서 군인들이 나오고 있었다. 문 만 터놓고 아예 보이지 않은 곳에서 군인들이 근무한다고 하였다. 아마 옛날 모습을 그대로 두는 것 같았다. 구불구불한 길로 한참 가니 광주리 속 같은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 이름은 잊어버렸다. 그곳에 가니 강원도 토속적인 식품을 파는 가계가 있었다. 강원도 콩으로 만든 된장, 간장, 청국장, 두부, 산나물 일체가 다 진열되어 있었다. 아마 관광하러 오신 분들께 파는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구경만 하고 사지는 않았다. 그리고 인솔하신 분이 백마고지를 간다고 가실 분들은 가시자고 하였다. 우리는 다는 안 가고 몇 일행이 따라나섰다. 한 참 산으로 올라가니 작은 냇개를 건너는 다리가 있었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절같은 한옥이 한 채가 크게 있었다. 우리는 절이 있다고 하니 인솔 하신 분이 하는 말이 절이 아니고 백마고지에서 육이오 때 전사하신 분들이 가족을 찾지 못한 영혼들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 제각(곳)이라고 했다. 우리는 안에는 보지 못하고 백마 고지는 더 많이 올라간다고 하니 너무 멀어서 더 올라가지 못하고 거기까지만 가고 내려왔다. 지금은 산이 무성하여 푸른 산이지만 그때는 하도 폭탄을 맞아 민둥산이었다고 한다. 그 산에서 열렬히 싸우시다 가신 우리 외삼촌이 생각났다. 결혼하고 바로 그 해 군대 입대해서 한번 휴가에 왔다 가서 돌아오지 못하신 우리 외삼촌은 유복자로 딸 한 분을 두셨다. 그 동생은 결혼해서 잘살고 있다. 아버지가 전사하고 호적은 작은 삼촌에게 올려 학교 다녔다. 숙모는 재혼하시고 지금 동생이 육군본부에 가서 사실을 밝혀 유족 연금은 동생이 받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 외삼촌은 백마고지 전투에서 전사 하였는데 시체를 발견 못했다고 유골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유족 연금도 일찍 받지 못했다. 월북한 게 아닌가 하고 조사도 많았는데 결국은 그곳에서 전사로 밝혀졌다고 하였다. ------------------------ 60. 이승만 대통령 별장을 가다 우리 일행은 그곳에서 내려와 금광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그날 저녁 그곳에서 축제가 있었다. 노래자랑, 우리 춤 여러 가지 행사하였다. 그곳에서 통기타 가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분도 오고 여러 가수가 와서 노래를 불렀다. 우리 일행 중에서도 나이 든 언니가 불러서 운동화도 탔다. 다음날은 걷기 대회가 있었다. 완주하면 쌀 10kg을 준다고 하였다. 우리 일행 몇 명이 일찍 걸어 갔다. 군인부대가 일조로 가는데 거기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군인이 구령하면 같이 구령하고 절반이 넘은 것 같은데 우리 일행들이 저 멀리서 손을 치고 부르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돌아다 보니 못 걸어간다고 그냥 구경하고 내려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아쉽지만, 차로 올라 하진포로 여행하게 되었다. 거기에 가니 지도에선 보이지 않던 섬이 있었다. 육지와 연륙이 되어 차로 들어가니 경치가 아주 좋았다. 이승만 별장이 있었다. 자그마한 한옥이었다. 안에 들어가니 이승만 대통령 사진과 영부인이신 호주분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천천히 구경하면서 안으로 들어가니 도서관 진열장이 있었다. 거기에 우리들이 해방되고 첫 글을 배웠던 교과서가 있었다. 나는 반가워서 한참을 보았다. 지금 책과는 다르게 아주 작았다. 오래되어 색이 누렇게 변하는 그 책이 그렇게 정겨웠었다. 국어, 셈본, 과학, 이과, 미술 하고 적혀 있어서 내가 초등학교 일 학년이 되는 기분으로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우리 일행은 그곳에서 나와 바로 바른편에 있는 건물로 갔다. 그 건물은 양옥이었다. 일제 시절에 일본인이 지어놓고 해방되니 일본으로 가버려 그곳이 삼팔선 이북이어서 육이오가 나기 전엔 이북 땅으로 김일성이 하루를 묵고 가서 김일성 별장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우리는 문이 잠겨 있어 안에는 못 보고 겉만 보고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진부령 고개를 넘어서 서울을 지나 1박 2일의 즐거운 여행을 하였다. ------------ 61. 디엠지 여행 우리는 완도 노인대학에서 수학여행을 일선에 있는 제3 땅굴로 여행을 갔었다. 나는 이곳은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지금도 일선에서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철모를 쓰고 총을 메고 안전 무장 한 채로 보초를 서고 있는 군인들이 간간이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군인들의 덕분에 후방에서 편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말로만 듣던 철조망은 참으로 철통같이 막아 놓았다. 우리는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디엠지로 들어 갔다. 들어가 보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으나 벼를 심어서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여기도 농사를 누가 지으냐고 물으니 철장 너머 마을에 사신 분들이 국가의 허락을 받고 짓는다고 했다. 들어오고 나갈 때는 군인들의 허락을 받고 농사를 지은다고 하였다. 논은 아주 작은 다랑논들이었다. 나는 이북 땅은 아주 멀고 강이나 높은 산을 넘어야 간다고만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바로 앞이 이북 땅이었다. 한 발만 내 들면 이북인 줄은 몰랐다. 바로 앞에 있는 땅 바로 우리 땅이 이북이었다. 가서 직접 보니 실감이 났다. 땅굴로 들어가니 얼마나 노동력을 들여서 그리도 길게 파놓았을까? 이북 군인들의 고생이 빤히 보이는 것 같았다. 땅굴에 가서 작은 구멍으로 이북 땅을 내다 보고 우리는 다시그길로 나오게 되었다. 나오는데 중간에서 외국인들이 관광하러 와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분들은 서양 분들인지 키가 커서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오다 쉼터가 있어서 거기서 앉아 사진도 찍고 쉬였다가 나왔다. 차로 가려는데 우리 동서가 쉬고 있는 자리에다 핸드폰을 두고 나와 버렸다. 우리는 도로 갈 수 없어서 관리실에다 신고하려고 가는데 정 부장이 우리 뒤로 오다가 핸드폰을 발견하고 우리 일행일 것 같아서 가지고 나오고 있었다. 우린 다행히 사고 없이 핸드폰도 찾고 무사히 땅굴 여행을 마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부곡 온천에서 자고 다음 날 집으로 왔다. ---------- 62. 육 남매 나는 슬하에 위로 딸이 셋 가운데 아들 둘 끝으로 딸 한 명 육 남매를 두었다. 자녀들 낳아서 키울 땐 나라도 가난하고 우리 집도 가난해서 자식들을 어렵게 키웠다. 그땐 용돈이란 것은 전혀 없고 입고, 먹고 공부하는 데만 돈을 주었다. 자식이 육 남매다 보니 잔돈이 수없이 들어갔다. 여섯이 다 차를 타고 학교에 갔으니까 하도 차비 차비하니까 너희들 상급 학교 가서 방을 얻게 되면 교문 앞에다 얻으련다 하고 말한 적도 있었다. 세 아이는 완도에서 고등학교를 마쳤으나 나머지는 광주에서 다니는데 각 교문 앞에다 방을 얻어서 가르쳤다. 위로 딸 셋은 김 한 시절이라 김도 들어내고 발 장도 치고 김도 널고 자기 밥값을 하고 다녔다. 그렇게 아이들도 조금은 하였다. 지금 같으면 학원이 다 공부만 하라고 하는데 일까지 도와주고 다니면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자식들이 감사하다. 한 배에서 나와서 중학교까지는 한 학교에 다녔는데 육 남매가 성격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많고도 많지만 다 다르듯이 우리 아이들도 다 다르게 산다. 육 남매 자식에게서 손자가 열넷이고 증손자가 네 명이나 됐다. 앞으로 얼마를 보고 내가 갈 줄은 모르나 지금 나는 행복하다. 올 추석엔 네 남매가 다녀가고 큰 딸과 막네 딸은 생일에 온다고 전화가 왔다. 결혼한 손자들도 오고 직장 다닌 손자들도 다 왔다 갔다. 올 추석은 우리 육 남매 자손들 덕에 아주 행복하고 즐거웠다. 아마 사람은 태어날 때 자기 직업을 갖고 태어난 것 같다. 육 남매를 다 똑같이 키웠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기 할 일을 찾아가는 것 같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너희들 직업을 갖고 태어났는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 63. 보통으로 살아온 내 인생 나는 평범한 농촌의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이 공을 많이 들여 키워주시고 클 땐 귀하게 자란 것 같다. 배우지는 많이 못 했으나 국졸로 내 이름은 쓰는 것이고 잘 키워서 결혼까지 부모님이 시키셨으니 그도 잘한 것이다. 평범한 시골 가정으로 시집와서 시 부모님이 잘 봐주셨으니 부락민이 칭찬하고 나를 인정해 주어서 사회가 나를 인정하니 분에 넘친 대접도 받았다. 좋은 이웃도 있고 좋은 친구도 많고 내 나이 팔십 넘어서 좋은 지인들도 만나고 자식들한테 대접받으니 나의 인생도 평범한 인생은 된 것 같다. 태풍 같은 모진 비바람도 있었지만, 봄날 같은 따스한 날이 더 많은 것 같다. 돌아보니 남과 같이 보통으로 산 것 같은데 내 남은 인생은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질 것인가 깊은 생각이 든다. ------------------- 64. 나의 글의 마감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서전을 쓰고 보니 팔십육 년을 살았습니다. 유아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더듬어 보니 많고 많은 일들이 지났습니다. 좋은 세상 만나서 좋은 선생님들과 좋은 벗들과 한자리에 앉아서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는데 이런 기회가 있어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생각도 해봤습니다. 설레고 걱정했던 시간이 벌써 지나가고 헤어지게 되니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그동안 많은 지도를 해주신 문정권 선생님, 박미자 선생님, 이 인연 잊지 않을 게요. 다음에 만나면 형제들처럼 반가울 것입니다. 우리가 헤어져도 항상 건강히 지내십시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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