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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르신 자서전 쓰기 – 문영희 50편 -
<목차>
제 목 : 길고도 짧은 인생길
<인사말>
1. 아버지의 사랑
2. 심부름
3. 친정 형제들
4. 아무도 몰랐던 내 생활
5. 광주로 이사, 귀향 후 새로운 시작
6. 운전면허
7. 서울 생활
8. 어떤 일도 남의 일이 아니다
9. 완도 장 이야기
10. 교회안의 추억
11. 지난 이야기
12. 아들 이야기
13. 노루표 페인트 대리점
14. 남편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
15. 운전 중 있었던 이야기
16. 시니어들의 행복
17. 딸아이 이야기
18. 우리는 동반자
19. 시어머니의 병원 생활
20. 첫 아이 출산할 때
21. 아름다운 추억
22. 옛날 이야기
23. 다 비우며 살자
24. 여름이 지나고
25. 부부 싸움
26. 처음 해본 일
27. 가을을 느끼며
28. 일본 여행
29. 중국 여행
30. 흔들리며 피는 꽃
31. 신지 여행
32. 악기 배우기
33. 선배님을 만나다
34. 쓴 뿌리를 뽑자
35. 집세
36. 목포 시내 구경
37. 안좌도 여행
38. 자은도 여행
39. 목포 고하도 여행
40. 암태도 여행
41. 우리나라의 위상
42. 마무리를 하면서
43. 이런 삶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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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길고도 짧은 인생길
<인사말>
결실의 계절 가을을 맞이하여 생각도 못 했던 자서전 쓰기에 동참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희에게 관심을 두신 전라남도 경로당 관계자분들과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지극정성으로 지도해주신 지도 강사님, 복지관 관계 직원
여러분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잊어버린 추억을 더듬어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들의 지난날들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여기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들은 축복받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어르신이 앞으로도 참여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궁한 발전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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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의 사랑
나는 어렸을 때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특별히 생각 난 것은 중2때 수학여행 비용을 아버지가 시골에서 오셔서, 외할머니집
장롱 속에 들어있는 전축을 전당포에 맡기시고, 그 비용을 마련해 주신 거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철이 없었을까 그 돈을 받아, 전라북도 내장산으로 다녀왔다.
아버지 사업이 안되어 시골로 이사를 하시고, 나만 외갓집에서 할머니하고 삼촌하고,
학교 다닐 때였다. 다른 엄마들처럼 찌들어진 고생은 안 한 것 같지만 내 인생의 이야기도
너무 많다.
우리 아버지가 항상 엄하시고, 술을 좋아하신 분이라 별로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다.
우리를 시골에서 교육 시키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그때는 목포로 중학교 들어가는 애들은 동네서 한두 명 밖에 없었다. 아버지하고 제대로
대화도 못 해보고, 57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젊은 나인데 그때는
그런 생각도 안 들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동생하고 나를, 가르쳐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이 꼭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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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심부름
엄마가 계셨다면, 지난 일은 물어도 보고 할 건데,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고등학교에 진학을 못 하고, 시골에 들어왔다.
집에는 작은 구멍가게를 하고 계셨다. 목포에서 2시간 배를 타고 들어간 암태도였다.
어떻게 내가 목포까지 다니면서 옛날에는 (점방) 가계 물건을 해 날랐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에서 배 타는 데까지는 4Km 정도 되었는데 지금도 그 길은 선하다.
나무가 쭉 늘어서 있고, 참 아름다운 길이였다. 그 길을 걸어서 배를 타고, 목포에 가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열 가지가 넘는 물건들을 사놓고, 외갓집에 가서 자고, 이튿날 배를
타고 그 물건들을 챙겨서 배를 타고, 도착하면 조그마한 종선이 와서 물건을 그 배로
옮기고, 다시 종선을 타고 내리면, 어떨 때는 13, 14개 한 개씩 잃어버린 때도 있었다.
소 구루마에 옮겨서 집에 오면, 아버지는 수고했다는 말씀은 안 하시고, 물건 잘못 해 온
것부터 나무라신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심부름했을까?
생각해본다. 글을 쓰려고 하니까 그때 생각이 난 거다. 내가 한 3년을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장사가 잘돼서 수고는 했지만 좋았었다.
진학을 못해서 항상 아쉬워서 초꼬지(등잔) 불 켜놓고 밤새 책보던 생각, 엄마가 우리 영희는
서점 한데로 시집을 가야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셔서 엄마는 너무 힘드셨다.
나는 술만 취하시면 도망가 버렸다. 주무신 뒤로 집에 들어 왔었다. 밤에는 샘가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울기도 하고, 고향을 떠나고 싶었다.
살 만하니까 아버지가 원을 막으신다고 했다. 엄마가 너무 힘드신 것 같다.
막아 놓은 원 둑이 터져 버려서 바다가 돼버렸다. 나는 그때 자세한 것은 잘 모르고
너무 힘들어서 그때 서울에 있는 친척 집을 찾아 떠난 것 같다.
다음에 복구하셔서 주조장을 하시고, 어렵게 다시 일어나신 것 같다.
부모님과 오손도손 이야기도 못 해 보고, 넘어가 버렸다.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고,
나 산다고 엄마한테 걱정만 끼쳐 드린 딸이 되었다. 지난 일은 다 추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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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친정 형제들
우리들 형제는 딸 2. 아들 2.
옛날 엄마들같이 많은 형제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은 집안 형편이 좋았는데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어려웠고, 다시 일어나서 남동생들 가르칠 때는 아버지가 양조장을
하시고 큰아들은 공부를 잘해서 인천 인하공대까지 다녔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살기에 지금 내 글을 읽고 나도 그랬지 공감하는 분도 계시리라
믿는다. 나는 장녀인데 살다 보니 형제 중에서는 제일 못사는 딸이 되어서 엄마도 마음고생
많이 시켜드리고 나 자신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아는 분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는데 너무 가난했고 아이도 안 생겨서 결혼한 지 8년 만에
시어머니의 기도로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친정 형제들하고는 거리가 멀어졌다.
친정 소식은 동생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여동생은 남편이 교장으로 퇴임했고 남동생은
현대조선 이사로 퇴임하고, 작은동생은 지금도 양조장과 주류 도매업을 하고 있다.
형제도 나 사는 것을 보며 같이 느끼며 살아가야 알지 남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그때는
들었다. 왜 나만 이리 힘들게 살까? 생각도 했었다. 지나고 보니 주어진 나의 숙명적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신앙이 있기에 감사하며 살았다.
이상하게 남편이 돈도 잘 벌었는데 나는 너무 힘들었다. 날이 새지 않았으면 할 때도 있었다.
수표도 막고 돈도 빌려야 하니까 주말이 되면 감사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생각이 든다. 그래도 우리 형제들이 내 여동생은 아들 3. 큰 남동생은 아들이 2.
작은동생은 딸만 3. 나는 아들 하나. 딸 1. 그것만은 내가 제일 잘한 것 같다.
나는 바보가 되어 살다 생각했다. 그게 제일 편하고 지나고 보면 나를 인정해주고 모든 것을
최대한 이해하고 배려하며 살았다. 신용은 잘 지키면서 그랬더니 지금은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다 인정해주고 있다.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듯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60이 넘어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해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싶어 목포에 다니면서
고등학교 2년 과정을 마치고 너무 아까워 다른 공부도 2년 더했다.
다 남편이 도와주고 협력해 주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할 뿐이다.
인생은 단 한 가지도 내 마음대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새삼 느끼고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며 살다 보면 나도 이런 날들이 있다고 할 때가 온 것 같다.
자녀들은 하고 싶은 공부를 서울까지 보내며 교육했다. 내 형편에 어떻게 서울을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공부를 잘하고 가르치는 것은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셨다. 힘들어도 아이들 가르칠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때는 내 고단한 생활이 조금 나아진 때였는지 지금은 우리들처럼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 살아간 사람들이 별로 많이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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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무도 몰랐던 내생활
선생님과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용기를 내어서 써보려 한다.
남편도 내가 이런 생활을 한 줄은 모른다. 항상 친정 부모님께 미안하고 죄송해서
언젠가 한 번은 지난 이야기를 털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은 다 못 하고 두 분
다 이 세상을 떠나가 버리셨다. 옛날 50년 전에는 목포에서 완도에 오려면 용당 건너서
상공에 내려 완도에 오는 버스를 타고 와야 했다. 직행 완행버스가 있었는데 잘못 타면
5시간 걸려서 집에 올 수 있었다. 우리 친정은 목포에서 2시간 배를 타고 신안군 암태면
에서 양조장을 하고 계셨다. 친정에 가면 엄마는 잔돈은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때는 막걸리가 한 말 통으로 팔았다. 낱게로도 사람들이 사러 오셨다. 방바닥에 있는 적은
돈을 나는 말도 안 하고다 모아서 올 때는 엄마가 용돈도 주시고 내가 부자가 된 기분으로
목포로 나와서 갈치, 조기, 설탕, 생필수품을 전부 사서 어렵게 용당을 걸쳐 상공까지 오면
힘이 다 빠졌다. 나는 막차를 탔다. 정말 완도에 오기 싫었다. 어디로 가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는 바느질을 해서 용돈을 벌어 썼다. 큰돈은 아니지만 나는 별 불편 없이 살 수
있었는데 너무나 없는집이라 생활에 그렇게 보태도 표가 안 났다. 이런 생활도 있구나
기가 막혔다. 시어머님도 너무 착하신 분이셨다. 선하기만 하시지 내가 보기에는 너무
약한사람. 콩나물을 길러서 시장에 갖다파셨다. 지금 생각하면 콩나물 백원 이백 원어치
사먹을땐데 돈이 되겠는가 생각다 못해 나는 쌀 대신 싼 소금을 가마니로 사서 장독에
있는 독에 가득 담아 놓으니 마음이 흐뭇했다. 시어머님은 신앙생활을 잘하셨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이런 말을 하면 이해나 할 수 있을까? 그런 어려운 날들이 있었기에
보석 같은 아들딸이 있고 지금 내가 이런 글을 쓰고있는 것이 아닐까? 잘 이기고 살아서
나 자신에게 잘했다 칭찬하고 싶다. 그 시대에는 영리한 엄마들은 장사해서 자식들도 다
가르치고 빚이 좀 지더라도 아이들을 가르치신 분들도 계셨는데 우리 어머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라 자녀들도 영리한 머리를 가졌는데 가르치지 못했다. 내가 친정에 갈 때는 부엌
쌀독에 쌀을 채워놓고 갔다. 어머니는 광주 딸네 집 가시면 우리 집 쌀독에는 쌀이 없었다.
나는 점심을 안 먹고 아는 집에 가서 고구마로 때우고 남은 밥할 때 얹혀 먹으면 밥이 한
그릇 많아진다는 것도 알았다.
어느 날 친정에 갔다 바리바리 장 보아 왔는데 중학교 다니던 시동생이 아버지 제사인데
나한테 늦게 왔다며 화를 내며 집안을 시끄럽게 하는 적도 있었다.
막내 시누이가 언제인가는 도시락에 계란 프라이 안 해 주었다고 짜증을 냈었다.
나는 시장바구니 들고 시장에 가는젊은 사람들이 제일 부러웠다. 그때는 저녁 시간만,
되면 시장바구니 들고 시장에를 다녔다.
한 번은 남편이 외항선을 타러 간다고 했다. 내가 말린 것 같다.
정말 가만히 목포 갔다 돌아오지 않고 떠나가고 싶었지만, 남편이 너무 나를 의지하기
때문에 발걸음이 안 떨어졌었다. 왜 이리 어려운데 아들은 결혼했을까에 대해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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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광주로 이사. 귀향 후 새로운 시작
광주에 시누이 남편이 고속버스 기사님이셨다. 그 소개로 광주로 월세방을 얻어서
올라갔다. 친정아버지가 월세에서 어떻게 살겠냐고 그때 800만 원 정도 하는 전세를
얻어 주셨다. 그래서 그런대로 둘이 살고 있었는데 한 번은 완도에를 내려와서 보니
시동생이 공부를 잘해 광주일고에 보내려고 어머니가 계를 들어 놓으셨는데 그때 돈으로
삼십만 원이라 한 것 같다. 그런데 다 넣었는데 계가 깨져버려서 한 푼도 못 받고 고등학교도
못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러면 안 된다고 수고를 입학시켜 주었는데 어느 날 광주
에서 내려가 보니 학교를 중퇴하고 무슨 장사를 하고 있었다. 같은 환경에서도 친구는 수고
졸업하고 서울 가서 대학도 나오고 박사도 되었는데 졸업장도 못 받고 끝났다.
배움이란 자기 의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할 생각만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길이 열릴
수가 있는 것이다. 부모덕이 아니라도 좋은 머리가 항상 아까웠다. 나도 광주에서 돈벌이가
아주 잘된 것도 아니고 광주 생활을 접고 전세금을 찾아서 완도에 내려와서 그때는 솜씨가
있는 사람만이 간판업을 할 수 있었다. 다행히 필체가 너무 좋아서 간판 집을 차리게 되었다.
광고사를 했는데 기술이 좋고 부지런하고 신용 있게 일도 잘하셔서 초가집도 헐어버리고
새로운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때 생각에 2년 벌면 집 한 채씩 지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시집 식구들은 내가 들어와서 가정을 이루고 산다고 시어머니와 시누이들도 늘 고맙게
생각하셨다. 옛날에는 일본 전자제품 소니 라디오가 있었다. 19만 원을 24개월 할부로 사서
얼마나 귀하게 닳아지도록 잘 썼다. 사업이 잘되어서 잘 살 줄 알았는데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뜻깊은 말이 있다. 열정이 너무 많아 방향을 잘못 잡아, 열심히 돈벌이는
하면서도 나는 힘이 들었다. 사람의 심리는 돈이 손에 닿으면 욕심이 생기고 하고 싶은 것이
많아져 손해를 보게 된다. 인생은 누구나 겪는 인생살이 다시 한번 살아보라면 그런 실수를
하고 살겠는가 후회투성인 우리들의 인생살이 반복이 없는 한번 주어진 우리의 인생.
이것이 세상 살아가는 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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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운전면허
우리 가게는 섬을 상대로 일해서 물건을 보내야 하므로 심부름하는 일이 너무많았다.
내가 운전을 배우기로 마음먹고 망석리에 학원이 있을 때 등록하고 목포로 시험을 보러
갔는데 필기는 한 번에 70점만 넘으면 합격이었다. 필기는 붙었는데 실기가 문제였다.
두 번 가도 떨어지고 나중에는 남편한테 말을 안 하고 갔었는데 동네방네 전화를하고
난리가 났었다. 오니까 화를 내 가지고 네가 리어카나 끌지 무슨 운전이냐고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나는 오기로라도 따야지 생각하고 다섯 번 만에 합격했다. 내가 운동신경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그때 내 나이 50세였는데 내 나이에 운전을 많이 하지 않았다.
배워놓고 나니 화흥포 항, 항만부두 심부름, 강진 마량까지 심부름. 나는 어릴 때부터
심부름을 잘하는 아이였기에 나이 들어서도 잘 써먹었다. 내가 생각해도 심부름은 지금
까지도 잘하고 산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주행 연습도 없이 가다가 교통순경이 잡으면
오천 원주면 그냥 보내주고 지나니까 만원 나중에는 이만 원까지 주었다.
주행을 안 했기 때문에 교통질서를 잘 모르니까 주행 비라 생각하고 그렇게 다닐 때도
있었다. 한 번은 해남 우리병원에 다녀오다 졸음운전을 해서 차가 폐차되어 버렸다.
하나님 은혜로 나는 아무 데도 다친 데 없고 차만 망가졌다. 운전할 때 졸음운전은 안
하는데 그날은 치과에서 마취를 한 다음이라 이런 현상이 일어났던 것을 모르고 억지로
하다 변을당했다. 그 뒤로 못할 줄 알았는데 지금도 가까운 데는 조금씩 다니고 있다.
생각만 해도 운전배운 것이 감사한 일이다. 너무 잘한 일이다. 적은 사람이 통이 크다고
옛날 사람들이 말했는데 내가 적어 가지고 운전을 통 크게 하고 다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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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울 생활
사촌 언니가 서울에 살고 있어서 형부는 조달청에 다니신 집에서 살았다.
청량리였고 거기서 좀 있다 연희동에 양장점 하는 집안 작은아버지 집에서 양장을
배우며 살기도 했다. 형부란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꽁보리밥에 반찬은 고추만
먹고 언니를 너무 힘들게 했다. 그 옛날에 시골에서 서울대에 합격했는데 졸업은
못했고 자만심에 빠져서 꼴 보기 싫었다. 양장점 한 작은 아버지는 옛날에 전대까지
다니셨다는데 작은엄마가 하는 양장점에서 미싱을 했다. 그것도 이해가 안 되었다.
작은할아버지 집에서는 대학까지 가리켜 놓았더니 장가 잘 못 가서 미싱하고 있다고
작은 엄마 탓만 했던 것 같다. 얼마 살다가 목포로 내려왔는데 오니까 버스가 다녀서
깜짝 놀랐다. 옛날에는 옛 북항에서 문태고등학교까지 선창까지 다 걸어 다녔다.
삼촌들은 엄마가 고등학교 다닐 때 밥을 다 해주셨다.
시골에서 나온 형제들 하숙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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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어떤일도 남의 일이 아니다
세상에 어떤 일들도 나 자신이 겪어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다. TV에서만 보고 사고가
나고 어마어마한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도 나하고는 먼 것 같이 안되었다는 생각만 하고 넘어
갈 때가 많다. 친정 조카가 38 나이에 아파트에서 떨어져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70이 넘어
갑자기 다리가 부러져서 오른쪽 다리만 3번 수술하고 병원 생활을 몇 달 했다. 남편의 지극한
보살핌이 있어서 회복될 수 있었다. 병원 생활하면서 입원해 계신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이야
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겪고 나니 남편이 귀하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돼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나게 했다. 어떠한 불행도 나도 당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해보면 깨닫게 되고 인생의 공부가 된다.
죽을 때까지 공부는 해야 한다고 했다. 모른 것을 배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낮에는 가게
일하고 저녁에는 해남 우리 병원에 날마다 오셔서 간병하시고 아침에 완도에 내려가시고
싫은 기색 하나 없이 그렇게 나를 보살피고 퇴원해서 집에 오니 가게에다 이층 올라다니기
힘들다고 편백 나무로 방을 만들어 놓으셨다. 정말 앞으로 남은 인생 남편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지 다짐했다. 젊어서 힘들게 살았던 것이 다 잊혀 버리고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신앙생활 잘하며 성실하고 진실하게 우리들의 노후를 보내고 싶다.
--------------- 9. 완도 장 이야기 하나 기억에 남는 게 있다. 옛날 완도 장에 가면 청산에서 문어를 말려서 10마리씩 묶어 왔다. 홍합도 꼬챙이에 꽂아 말려서 팔러 왔다. 문어 한 축에 쌀 한 가마니라는 말도있었다(80K) 나도 그것을 사서 친정아버지에게 보내 드렸는데 아버지가 너무 좋아하셔서 지금도 그런 이야기한다. 술을 좋아하신 분이라 문어를 잘게 잘라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식구들도 한 개씩 던져 주셨단다. 돌아가신 뒤에도 그 문어가 조금 남아 있었단다. 술안주에는 안성맞춤이었나 보다. 신지 명사십리도 한 해 여름 구경시켜 드렸다. 아주 젊었을 때 일인데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젊은 줄 몰랐다. 세월이 이렇게 많이 변해버린 뒤에 생각하니 아득한 옛날이다. 우리는 너무 많이 살고 있다. 마지막 준비를 멋지게 아름답게 보내고 싶은 소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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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교회 안의 추억
아주 젊었을 때 신앙생활을 생각해보니 날마다 날마다 저녁이면 교회 가서 울며 기도하고
내 설움에 통곡하고 하나님께 엎드렸다. 내 별명은 가까운 교우들이 욥이라 불렀다.
어느 해인가 보잘것없는 나를 회장을 시켜 주었다. 나는 얼마나 울었던지 그 일로 인해
교회 안에 일을 여러 가지 맡아서 할 수 있었다. 나는 온전히 나를 버리고 죽자 그것만이
주님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봉사했다. 완도군 9개면을 통솔하는 지구장도 했다.
섬을 다 돌아다니면서 전화 연락하고 3개월에 한 번씩 지구 회로 모여 회의도 하고 아주
잘했다고 칭찬받았다. 정성을 다해 회원들을 섬겼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들뿐이다. 나는 부족하지만, 때에 따라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었다. 태풍이 불고 비바람이 친다고
일기예보가 나오면 내일 행사를 주님께 맡깁니다. 밤새워 기도했다.
다음날은 날씨가 좋아 보길, 노화 먼 데서까지 시간 맞추어 다들 나오셨다. 신지 다리가
개통이 안 되었을 때도 걸어서 회원들은 다 모였다. 정말 감격이었고 감사했다.
시골에 계신 분들의 신앙이 너무 좋으셔서 우리들은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그분들과 같이 손잡고 일했던 분들도 대강 다 세상을 떠나시고 이제는 내 차례가 된 것
같다. 교회 일도 내가 교회 안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지낼 때가 가장 행복했었던 것 같다.
전에는 완도에 소고기가 비싸다고 장흥까지 교회 행사를 하면 고기 사러 권사님하고 내 차로
장흥까지 고기 사러 다녔다. 행사 고기 사고 이 사람 저 사람 주문받아 7, 8십만 원어치씩
사 왔다. 생각해보면 옛날이야기다.
이제는 교회 일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지난 이야기를 이렇게 추억 삼아 쓰고 있다.
교회 일에도 내가 필요할 때가 가장 행복할 때라고 열심히 힘 있을 때 하라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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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지난 이야기
오래전에 광고사 할 때는 완도에서 우리 집이 제일 잘했다. 그때는 한 번에 행사가 있으면
면마다 면장 취임, 청년회장 취임 특별한 행사 할 때마다 우리 집에서 직접 행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념품부터 행사장 꾸미는 것까지 다 준비해서 행사를 맞추었다. 면마다 돌아
가면서 일이 있었다. 바쁠 때는 광주에서 기술자 2명 3명이 면까지 와서 일했었다.
다른 데는안 가도 우리 집 일한다면 다들 와서 도와주었다. 그때 점심은 여로 콩국수를
날마다 시켜먹어서 나는 지금도 콩국수는 잘 안 먹고 싶다. 한 그릇에 300원으로 기억한다.
기계도 없고 오직 손으로 모든 일들을 했었다. 그 시절에는 패넌트(행사 때 기념으로 나누어
주는 것)라는 것이 있었다. 수협에서 해마다 행사 때는 홍보 겸 그림을 넣고 마크를 넣어서
판을떠서 인쇄해서 천장 이천 장씩 찍었다. 밤새 찍어서 만들기도 했다. 지금 사람들은
패넌트는 이름도 모를 것이다. 새벽 배로 면에 일해 놓은 물건을 보내기 위해 우리 집
아저씨는 밤을 새울 때도 있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밤새워 일해서 새벽 배로 보냈다.
참 열심히들 살았다.
기계들이 나오고 세월이 흘러 이벤트 업체가 생기면서부터는 그런 일들이 없어졌다.
이때가 되면 면사무소 행사들이 들어올 때가 되었는데 안 들어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모든 것이 세상의 변화에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아날로그 시대가 가고 디지털 시대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사람 사는 넉넉함과 작은 틈이 있고 서로 알았던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며
생각하며 머리를 맞대고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대로 부탁한 대로 쉽고
간편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것들이 발전이란 것이다.
편리해서 좋기도 하지만 아쉽기도 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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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아들 이야기
엄마들은 아들이란 이름만 생각해도 마음이 뿌듯하고 기쁘다. 아이가 안 생겨서 8년 만에
친정어머니와 병원도 다니고 시어머니의 기도. 지극한 정성으로 아들이 태어났다. 목포
콤 층방 병원에서 아이를 낳는데 목포에 계신 작은아버지 집에 가 있었는데 새벽 3시
우리 작은아버지가 식육점 문을 두드려 우리 영희가 아들 낳았다고 소리를 지르며 고기를
사 오셨단다. 지난 이야기도 못 해보고 작은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아들은 크면서
너무 많은 행복을 부모에게 주었다. 무엇이든 잘하고 책도 많이 읽고 얼마나 책을 보는지
국제서점 있을 때 문을 닫아야 집에 왔다. 내가 미안해서 이불을 사다 준 기억이 난다.
지금은 책보기도 좋은데 도서관도 있고 마음대로 볼 수 있는데 그때는 서점 아니면 직접
사주지 않고는 볼 수 없었다. 계몽사, 금성사, 프로 레이에서 나온 책들을 사주었다.
특히 계몽사에서 나온 책 중에 과학만화가 있었는데 16권으로 된 책을 닳아지도록 보았다.
그 책은 많이 보고 나니 모르는 것이 없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중학교에 가서는
국어 선생님께서 공부 시간에 말이 통하는 학생은 우리 아들 하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 것들이 책을 많이 읽는 데서 오는 결과였다. 계속 수능 볼 때까지도 언어능력 평가는
잘 받고 영어는 윤선생 영어를 잘해서 기본이 되어 있었다. 순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그때는 학교 명예가 있기 때문에 학생들 점수가 많이 나오면 권면하는 학교가 있었다.
한양대 공대 제일 좋은가를 가라고 선생님이 사정하였는데 우리 아들이 음악을 한다고
해서 음대에 가게 되었다. 졸업하고 계속 뒤받침을 할 수 없고 나중에 머리가 좋아
아쉽던 차에 사법고시를 본다기에 자식이 한다는데 부모가 말릴 수가 없었다.
3년 공부해서 1차 합격했는데 그 뒤로는 마음대로 안 되었다. 지금도 그 계통에서 일하고
있다. 건강이 많이 안 좋아 엄마의 마음은 건강하고 마음 편하게 사는 것. 지금도 생각하면
제대로 뒷바라지도 못 해주는데 몇 년 동안을 공부한다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주님께서 함께 가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강이 안 좋아 집에서 좀 지내다 올라갔다.
마음대로 되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이제는 무엇을 해도 먹고는 살고 저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건강하기만 바랄 뿐이다. 효도는 학교 다닐 때 다했다고 생각한다. 엄마를 너무
사랑하는 아들 말은 안 하지만 너 마음 다 알고 있다. 욕심부리지 말고 건강 챙기며
하고싶은 공부 하며 생활하기 바란다. 엄마기 때문에 자식한테는 약하고 우리 부모들 모두가
엄마들 모두가 자식을 짝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알면서도 엄마기 때문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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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노루표페인트 대리점
옛날이야기가 나오기는 나오네요. 우리 딸 한 돌도 안 되었을 때 우리 집은 노루표페인트
대리점을 했다. 완도에는 아주 하급만 썼는데 메이커 페인트 대리점을 내놓고 완도군에서
군 사업으로 지붕개량을 했었다. 섬마다 돌아다니면서 일했는데 그때 업자들이 그 계기
로 우리 집에서 페인트를 갖다 공사를 하고 물건값을 안 주니까 내가 아이를 업고 보길, 노화,
금당 섬으로 수금을 다녔다. 지금 같으면 어린이집에 맡기고 다닐 수 있을 건데 어린아이를
업고 시골 가서 자고 섬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아이를 보고 배에서 엄마들이 내가 안 이쁘니까 아빠 닮았구나 하고 안아 주시기도 했다.
아무리 받을 것이 있어도 주려는 사람 마음이 있어야 주는 거지 법으로 해놓아도 재산이
없으면 받을 수가 없었다. 10년 대리점을 했는데 그때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손으로 벌어서 빚만 지고 말았다. 빚내다가 물건을 들여놓으면 마음이 흐뭇했었는데
한참 지나고 나니까 그것도 버틸 힘이 없었다.
물건값 수표는 막아야 하고 물건은 푼돈으로 없어지고 날마다 사는 것이 지옥이었다.
어느 날 페인트 가게를 치우기로 하고 가게를 정리했다.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너무 홀가분
하였다.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다. 사람은 나름대로 감당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하나씩
주셔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는데 순간 다른 사람 말을 잘 못 듣고 일을 하다 보면 실패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깨닫는 순간 이미 때는 지나가고 후회만 남는다. 인생을 다시 한번
살아보라면 그런 일들은 없겠지요. 다 지난 추억이 되었습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말도 별로 안 하는 내가 어떻게 그런 생활을 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상
상도 하기 싫다. 페인트 대리점 할 때 수표는 막아야 하고 남에게 실수는 안 해야 하기에
신용을 지키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썼다. 15일, 20일, 25일 공무원들 월급날은 다 알아서 사모
님들한테 돈을 빌리려 다녔다. 그때는 통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월급을 현금 봉투로
받았을 때였기에 가능했다. 그래도 그때그때 잘 돌려주셔서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 그것도 다 추억이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기 위해 아주 낮고 천한 사람을
만드는 과정. 내가 이겨내는가 보시려고 그러한 과정을 걸쳐서 나를 만드신 것 같다.
모든 것들은 지나고 나야 제대로 인성을 갖추어지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지금도 멀었지만
배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신용을 잘 지키며 바르게 살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힘든 고난을 잘 이겨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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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남편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
우리 집 아저씨가 기계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로 할 수가 없다. 핸드폰 처음 나올 무렵
그때는 150만 원 할 때인데 어느 날 그것을 사 와 어디다 숨겨 놓았다가 뒤늦게 가지고
나오셨다. 내가 언젠가는 어디를 다녀왔더니 영화 보는 멋진 기계를 사놓았다.
물건 하려 광주에 가면 차로 몽땅 사와 버린다. 당장 쓰지 않을 것도 뭐가 있어야겠다는
말한 번이나 들으면 얼마 있으면 비싼 기계가 집으로 들어왔다. 내가 얼마나 말은 못 하고
가슴앓이했는지 밤에는 동네를 돌아다녔다. 누구한테 말할 사람도 없었다.
셀 수도 없는 적은 것부터 큰 것까지 기계가 집에 가득 찼다. 목이 뜨거워 말도 못 하고
한참 있어야 가라앉으면 말할 수가 있었다. 나한테 핸드폰 해주고 잘 안 받는다고 싸움도
많이 했다. 모두다 지나간 옛날이야기다.
기게 만지는 것을 그렇게도 좋아하시더니 지금도 그런 일로 생활하고 있다.
------------------ 15. 운전 중 있었던 일 목포로 공부하러 다닐 때 아침 6시에 나까지 4명이 내 차로 다녔다. 봄에는 해남 물 뜨러 다니는 길로 가면 길이 너무 아름다웠다. 벚꽃길도 좋았고 이른 아침 그 공기가 너무 좋아 우리들은 행복해서 점심을 싸서 물이 있는 영암에서 맛있게 먹기도 했다. 오는 길에 쉼터에서 하루는 쉬고 차를 타려는데 차가 미끄러워 내려가는 거였다. 우리는 놀라서 뒤에서 밀고 타이어 밑에다 돌을 갖다 괴기도 하고 어떻게 어렵게 해서 온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도 차에 대해서 모르고 운전하고 다녔다. 브레이크를 올리고 사이드를 올리면 중지가 된 것이 아녔을까 신호위반으로 딱지가 날아오면 탄 사람들이 벌금을 내주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지내놓고 생각하니 무모한 짓 을 하고 다녔다. 지켜주신 분이 계셨기에 사고 없이 마칠 수 있었다. 감사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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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시니어들의 행복
2020년 상상도 못 했던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바이러스 코로나로 인하여 엄청난
변화가 왔다. 그래도 자연은 어김없이 봄이라는 계절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우리들은
시니어 클럽이 있어서 좀 나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시니어 클럽에 일원이 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그곳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혼자서는 살아
갈 수 없다는 것 사람이 모인 데서는 어디서나 문제가 있다는 것도 서로의 배려심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들 나이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감사한 마음으로 인생의 마지막
여행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감사할 뿐이다. 우리들의 모든 소망은 더 아프지 말고
올해도 무사히 마칠 수 있는 것이 소망이 아닐까 생각한다. 몸이 좀 불편한 것 같으면
조금씩 배려해주는 같은 팀의 그 고마운 마음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우리 모두 이러한
마음으로 지낸다면 즐거운 시니어 활동이 될 것 같다. 옛말에 나이가 들면 철든다는 말도
있는데 아무리 지나도 본 성격은 버리지 못 한 사람도 있다. 나이 들어도 죽을 때까지
배우고 잘못된것은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멋진 시니어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흔들리지 않고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흔들리며
지금까지 잘 이기며 살아왔으니 앞으로 남은 인생길 시니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
고 싶다. 계단은 좀 높지만, 전망 좋은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엄마들이랑 수다도 떨고
지난이야기도 하며 살고 싶다. 내 삶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나는 별고생을 안 한 것 같다. 병원 생활도 해보고 여러 가지 아픔도 겪어 보니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있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누구나 사람은 각자가 생각하는 점이 틀리기
때문에 나 자신만이 맞는다고 자기주장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시각을 감사하며 사세요~라고말하고 싶다. 행복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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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딸아이 이야기
남매를 키웠는데 아들은 별 옷이나 신발 같은 것에 신경을 안 썼는데 딸아이만큼은 신경을
써서 키웠다. 예쁜 옷 예쁜 신발 어렸을 때 두 아이 데리고 광주에 심부름 가면 화신 백화점
가든 백화점이 있었다. 거기 가서 빨간 예쁜 구두 예쁜 옷 사입하고 7층 레스토랑에 가면 돈
가스 (최고급 그때는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다) 사서 주고 야끼만두 사서 완도에 내려왔다.
완도읍 신발 집에서도 가장 예쁜 신발 예쁜 옷 사서 입혀 키웠다.
나는 힘이 들었어도 사업을 하니까 그런 정도는 쓸 수 있는 생활이었나 싶다. 초등학교 6학년
되던 해 광주로 전학을 했다. 딸아이가 옷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디자인 학교를 보내려고 광
주를 갔는데 중학교는 없다고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음악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항상 짠한 마음이 들어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어릴 때 엄마를 떠나서 사춘기도 나는 모르고 저 혼자 객지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숙집 아주머니가 딸을 어떻게 이렇게 잘 키웠냐고 전화하셨다.
많은 아이 중에도 너무나 마음에 들게 모든 것을 잘한다고 내가 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키워 주셨습니다.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고2 때 서울로 전학시키고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데
얼마나 울었던지 많이 울었다. 입시를 앞두고는 다달이 서울에 다녔다. 겨울 앙상한 나뭇가지
눈이 내려앉은 모습을 보고 봄이면 새싹 조금 있으면 연녹색의 나뭇잎 여름의 푸른 숲
가을이면 낙엽을 보며 자녀들을 만날 기쁨에 즐거운 마음으로 서울을 올라 다녔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사위를 보고 다이아몬드 딸이 되어서 아빠
엄마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딸을 결혼시키고 권사 님은 멋쟁이가 되었다고 교회 식구들은 말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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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우리는 동반자
나는 완도가 고향이 아니다. 동창도 친구도 없다. 성격상 사람을 잘 사귀지를 못해 언니
동생하고 지내는 사람도 없다. 교회를 몇십 년 다녔어도 속마음 털어놓고 이야기하고
서로 생각을 나누며 대화할 사람도 없었다. 교회 안에서 모임도 있고 선후배들이 있지만
내가 문제가 있는지 좋다는 소리는 들어도 마음을 공유하고 대화하는 친구는 없다.
틀 안에서 생활하고 살았다. 신앙이 다른 사람하고는 또 서로 모든 면에서 통하지 않는 것
같고 거리감이 생겼다. 모든 것을 감쌀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게 안 되었다. 어떤 분이 말씀
하셨다. 핸드폰에 컴퓨터 안에 입력된 친구는 많지만 150명이 입력되어 있어도 필요할 때
부르면 바로 만날 수 있는 사람 차라도 한잔 마시며 오늘 하루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식사 한번 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정리하며 대화할 수 있는 사람. 이러한 친구가 몇이나
되느냐고 묻는다. 한두 사람이 있으면 성공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그런 것 같다.
나이 들어 진짜 친구가 생겼다. 교회는 틀리지만, 나이는 내 막냇동생 같지만 15년을
지내오면서 몇 년 전부터 가까워진 것 같다. 2, 3년 전부터 그 동생도 몸이 아주 건강하지는
않기 때문에 서로 배려하고 나를 인정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남에게 못 하는 말들을
나에게는 할 수 있고 시간 나면 동네도 한 바퀴 돌고 어묵도 먹고 차도 마시고 언니를 배려
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아니까 친구가 된 것 같다. 우리는 동반자라며 서로 즐겁게
지낸다. 다른 사람들은 그 동생과 그런게 가깝게 지내지를 못한다. 나한테 어떻게 그렇게
지낼 수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그 동생 역시 묻는다.
나이 차이가 많은 분하고 어떻게 친구가 되냐고 나도 생각해본다.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서로가 말을 잘 들어주고 그 말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해 준다는 것, 인정해 준다는 것,
남편에게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고 칭찬해준다는 것을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항상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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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시어머니의 병원 생활
시어머니께서 고구마, 떡을 잘 잡수셨는데 체한 것 같아서 못 잡수셨다. 체도 내려보고
약도 써 보아도 안 되어 이영철 외과 선생님 계실 때 가서 진단했더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건강검진을 안 받을 때였나 보다 광주 어느 병원에 갔는데
전대로 가라 해서 조직검사를 하고 결과를 보니 췌장암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기도가
어머님을 수발하는 동안 죄짖지 않고 최선을 다할 힘을 주시라고 기도했다.
전대에 계시다가 집에 계시다가 또 가시고 2, 3번 그렇게 했다. 그때 만해도 항암치료
그런 게 없었나 보다 황달기가 오면 심해진 거였고 수술해도 7, 8개월 사시다 다른 사
람들은 돌아가셨다. 병원에서 준 약을 어느 날인가 시어머니가 펴시더니 진통제를 빼는
것이었다. 내가 야단을 쳤다. 병원에서 하라는데 안 하려면 왜 병원에 오냐고 내려가자고
그 통증을 이겨내면서도 진통제를 안 드신다고 했을까? 몸에 안 좋다고 하니까 퇴원해서
집에 올 때는 가지고 와서 복용했었다. 그 아픔 고통 이겨내시고 3개월 정도 고생하시다
세상을 떠나셨다. 착한 분이라 그때는 교회에서도 소복 입고 줄 잡고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초상을 치렀는데 그 풍습이 마지막인 것 같다. 지금은 옆집에서 초상이 나도 모른다.
우리 집 앞에다 채 양 쳐놓고 손님 받고 1월 8일 그때는 상당히 추웠다. 불 피워놓고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본인도 자식들도 아주 힘들게 안 하시고 천국으로 가셨다.
남을 위해 땀 흘리기도 많이 하시고 고생도 많이 하시고 기도로 손주, 손녀도 응답받아
보시고 지금도 천국에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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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첫아이 출산할 때
40년도 전전에 내가 아이가 없어 8년 만에 첫아이를 가졌다. 옛날에는 저녁이면 동네 엄마
들이 나와놀면서 달음질 시합도 했다. 전봇대 하나 정도 달려 다녔다. 한 번은 내가 넘어
졌었다. 동네 엄마들이 잠을 자지 못하였다. 귀한 아기가 어떻게 될까 봐 아침에 일어나니
아무 이상이 없어서 다들 좋아했었다. 어느 날 배가 아프고 안 좋아서 우리 집 위에 윤정수
외과가 있었다. 병원에 갔더니 아기가 내려왔다고 장갑을 끼고 주사를 꽂았다.
그때부터 나는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철로 생긴 침대에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제왕절개 해주라고 내가 소리쳤다. 촉진제를 놓고 기계를 가져와 아기 머리를 잡아당겨도
안 나오고 결국은 자궁을 찢어서 아기를 꺼냈다. 아기가 울지도 않고 새벽 3시에 죽었다.
우리 시어머님은 울고 불고 기도하고 계시고 죽은 얘기를 살린다고 거꾸로 잡고 때리고
지금 같으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기 양쪽 머리가 기계로 얼마나 잡아 당겼는지
하얀 얼굴에 흉터로 남아 있었다. 나도 처음 일이라 몰랐는데 알고 보니 아기 낳기 전에
모레짐이 터져서 미리 알린다는데 병원에서는 그것도 모르고 억지로 아기를 빼내려다
얘기도 잃어버리고 나도 후유증으로 오래도록 치료했다. 지금이면 병원도 못 하고
손해배상도 받아내야 할 정도였는데 옛날 세상이라 그런대로 넘어갔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해 3명이나 실수가 있었다 했다. 표구점 손자는 장애인이 되고
하나는 급히 광주로 이동하여 생명은 건졌다. 그래도 나는 아이를 또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서 잘 이겨냈다. 1년 있다 지금 아들이 들어서서 그때는 놀래서 목포로 콜롬바
병원으로 갔는데 자궁도 이상 없고 정상적으로 모레 짐도 터지고 무사히 쉽게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지금도 손목을 못 쓴다. 쇠 침대 위에를 얼마나 잡았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고
아픈상처다. 다리가 떨려서 검사받으러는 못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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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아름다운 추억
아이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광주로 올라가고 아들은 순천에서 오고 딸하고 만나
그때는 롯데 햄버거 가게가 터미널 있는 데가 있었다. 거기서 만나서 지금도 나는 햄버거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좋아하니까 맛있게 먹고 많은 이야기 하며 즐겁게
보낸다. 완도에서 소고기를 볶아서 광주에 가지고 가서 식당에서 아이들 만나서 먹이고 돌아
올 때도 있었다. 서울에서 아이들이 자취하고 살 때 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어느 날은 쌀이 떨어졌다길래 깜짝 놀라 옆집 아주머니한테 전화해서 팔아다 놓으라 했는데
애들이 고맙단 말도 없었다. 나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쌀이 여러 날 없어도
아이들은 걱정 없이 잘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어 버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아들이 갈치 토막이 왜 이리 적냐고 했다. 항상 엄마들은 가운데 토막 보내고
집에서는 머리하고 꼬리 부분만 먹었다. 아들은 그걸 몰랐다. 어쩌다 적은 갈치토막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부부가 가운데 토막 갈치를 구워 먹었다. 맛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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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옛날이야기
50년 전만 해도 신안 암태도에서는 없는 사람들은 봄에는 보리쌀 한 말(소두) 주면 3일씩
일해주었다 한다. 어떤 잘 사는 집 일을 가면 맛있는 밥도 하고 반찬도 넉넉히 해서 먹
이고 싸주기도 해서 그 집에 일한다면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한다. 어떤 집은 먹고 살만
하면서도 어떻게 야박하게 하는지 일하고도 배가 고팠다는 이야기도 있다.
절대로 그렇게 살면 자식들이 잘되지 않는다. 우리들 눈앞에서 보여준다. 우리 엄마가
잘사셔서 먼 친척들도 항상 우리 집 말을 하고 우리 엄마를 칭찬했다.
부모님의 덕으로 우리 형제들은 복을 받아 사는 것 같다. 한 마을이어도 당 모실,
사장 돔으로 나누어 있는데 한쪽은 잘살고 한쪽은 못살고 너무 차이가 나서 그때 사람들은
봄이면 샛거리(봄을 넘기기 위해 곡식)를 내다 봄을 넘기고 살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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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다 비우며 살자
많은 이야기들을 적었습니다. 지나 놓고 보니 다 추억입니다.
맏이란 자리도 없었고 너무 힘들어 남에게 아쉬운 소리만 얼마나 하고 살았는지 지나고
나니 그때를 어떻게 살았을까 싶지만, 그 또한 내 몫이기에 잘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제는 다 내려놓고 그날그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물 위에 젖지 않는 만월처럼 다 포용하고 감싸주며 단
한 가지도 가슴에 맺힌 것 없이 살아가고 싶습니다.
좀 있다면 베풀면서 살고 싶습니다. 친정 형제들한테 항상 열등감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
하면 내 삶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고 지금의 축복을 받기 위해 젊었을 때의 고난을 받고
살았는가 싶습니다. 지금은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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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여름이 지나고
옷깃을 여미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계절.
창문을 닫으며 따뜻한 곳을 찾는 계절.
우리에게 말없이 찾아온 선물 아름다운 계절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요?
뭉게구름 아름답게 떠 있는 아름다운 가을 하늘 푸른 숲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있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이렇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데
과연 인간인 우리들은 무엇으로 보답할까요?
어느 나라에서는 물고기들이 물이 없어 살지 못하니 낚시하는 사람들이
고기들을 수거해 넓은 물 있는 곳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산에 사는 동물들도 살 수가 없어 멸종위기가 점점 되어가고 있답니다.
뜨거워지는 기후 때문에 청산이란 깊은 섬에도 에어컨이 많이 있어
옛날 시골 풍경이아니라 하네요.
우리들은 다 살아가지만, 후세들을 위해서 좋은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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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부부 싸움
우리들 나이에 부부싸움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직접은 아니지만, 마음으로는 많이 하고 살았지요. 결혼 초창기에 나도 성격이 화가 나면
보통은 아니었는데 덤벼 보려 했더니 어떻게 성격이 급하고 무서운지 그 뒤로는 아예 나
혼자 속만 썩고 말았다. 저질러 진일 잔소리한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말을 안 하고
살았다. 우리 시어머님이 나를 아셨는지 며느리가 화내면 보통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부부싸움을 했다는 기억이 별로 안 난다.
우리네 엄마들은 다들 그렇게 살았겠지요. 나 자신에게 영희야 잘 참고 살았다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그런 날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행복이 있고 또 이런 글도 쓰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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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처음 해본 일
아주 아주 오래전 우리 큰 시누이가 생일도 섬에서 사셨다.
그대 남편이 별 하는 일이 없었던가 생일도에 가서 조금 살았다.
어느 날은 산에 갈퀴나무(솔잎이 떨어진 잎을 갈퀴로 긁어모아 나무를 하던 시절)
나는 생전 처음 해본 것이라 따라다니다가 조금 해가 지고 나무 뭉치를 머리에 이고 집에
오는데 나는 나무를 떨어뜨리고 울고 있었다. 시누이는 얼마나 속상했을까 생각이 난다.
또 한번은 교회에서 여름에 대야리 집사님 집에 보리 베기 봉사활동을 갔는데 보리를 베어
묶어서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다가 부려 버렸다.
그 뒤로는 교회에서 그 이야기를 해놓고 웃음거리가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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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가을을 느끼며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면 봄이 왔다는 소식이고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나면 가을이 왔다고 하는 계절입니다.
새벽에 눈을 뜨며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기분이 좋습니다.
밖에도 들립니다.
자연의 이치 속에 우리들은 잠깐씩 행복해집니다.
맑은 가을 하늘 뭉게구름 조개구름 국민학교 때 배웠던 구름 종류들
새삼스레 떠오르며 기분이 좋아진다.
차를 타고 장흥을 갔다 오는데 양쪽의 나무들이 푸른 숲을 이루고
하늘은 맑고 너무 아름다워서 감탄사를 연발하며 다녀왔습니다.
아름다운 우리나라 이렇게 좋은 곳에 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완도에다 케이블카를 설치한다니 여기저기 케이블카도 많고
그러려면 환경도 망가질 건데
완도는 자연 그대로 너무 많이 손대지 말고 아름답게 가꾸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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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일본여행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여행을 갔다.
일본의 선교지 견학은 배 안에 목욕탕이 있어서 깜짝 놀랐다. 보따리 장사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제일 놀란 게 일본은 소형차가 80%는 된 것 같다.
같이 간 장로님들이 한국에 가면 차를 당장 바꾸어 타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가는 곳마다 생생한 증언들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역사관을 보살피며 관리하고
계셨다. 그런데 일본 윗사람들은 사과를 안 할까? 히로시마 원자폭탄 떨어뜨리는데도 가
보았다. 어느 역사관에는 우리나라 수많은 사람이 죽어서 유골이 사진으로 무덤 마냥
높이 쌓여 있었다. 끌려가서 일하다 죽은 사람들이라 했다. 화산이 폭발했다는 산 옆에
가면 지금도 화산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밑에는 뜨거운 물이 흐르고 달걀을 그물에
삶아서 팔고 있었다. 산 옆에 조그마한 무덤이 있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고
그 뜨거운 물에 던져 버렸단다 두 형제를. 그래서 그곳에 무덤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일본은 어디를 가나 깨끗했다. 쌀 한 가마니에 백만 원씩 하는 쌀도 있다고 했다.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고 산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도 큰집은 별로 없고 2층
작은 집들이 많은 것 같았다. 차 살 때도 주차장이 있어야 차를 살 수 있다고 했다.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갔는데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섬에다 방갈로같이 둥글게 지어서
많은 모텔들이 들어서 있었다. 특이하고 신비스러웠다. 온천에도 가보았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데가 여러 가지 온천 할 수 있는 종류를 많이 해놓고 다녀볼 만했다.
올 때는 마지막으로 쇼핑하는 데에 차를 세웠는데 많은 사람이 많이들 샀다.
나는 사고 싶은 생각도 없고 안 사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물건은 사지 않기로 그렇게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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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중국 여행
우리는 중국 여행지를 간 게 아니라 선교지를 돌았다.
점심 먹으러 가는 시간이 2시간 가장 가까운 거리란다. 광개토왕 묘지도 가보았는데
너무도 초라했다. 부각하지 않기 위해서 중국이 일부러 그렇게 해 놓았다고 했다.
백두산에 올라가는 길은 계단이 127개라 생각한다. 그때만 해도 젊었었나 보다 가는 길에
해가 뜨고 비가 오고 비옷 입고 한쪽은 북한 땅, 한쪽은 중국 땅 그곳에서도 꽃이 피고
백두산천지를 보려고 가는데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메고 올라왔다. 올라가니 압록강이
구름에서 차근차근 벗겨져서 우리 일행은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전날 올라온 사람들은
못 보고 내려갔단다. 일 년에 잘해야 30번밖에 못 본다는 광경을 보고 사진도 찍고 즐거운
여행이 되었었다. 중국은 땅이 넓어서 산도 높고 크고 우리나라는 정말 적은 나라였다.
과일 농장이 있는데 그곳은 그대로 관리도 안 하고 놓아둔단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이 긴
농장 과일은 볼품도 없고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한쪽은 너무너무 부자로 잘살고
외진 곳은 너무 못사는 나라. 화장실이 우리나라 60년대 화장실을 쓰고 있고 길이 안 좋아
차가 지나가기 힘든 곳도 있었다. 중국 음식은 기름기가 너무 많아 나는 통 식사를 제대로
못했다. 한국 식당에 와서야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현재 적은 우리나라가 제일 살기
좋은나라라는 것을 느끼고 왔다. 왜 그리 땅덩어리도 크고 인구도 많은 나라가 지금도 다른
적은 나라를 침략하려 하고 욕심을 부리는지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문화 혜택을 받지못하고
어렵게 사는 곳을 돌보며 서로서로 잘 사는 나라가 되도록 정치를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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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 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시를 읽고 또 읽어 보아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한참 때는 김소월 진달래 꽃
나이가 들고 보니 흔들리며 피는 꽃 시는 구
절 구절 우리네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정말 아름다운 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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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신지 여행
부장님 덕택에 신지 한식 뷔페에서 점심을 잘 먹고 신지면 구경을 잘하고 왔다.
동고리도 오래전에 한, 두번 가보기도 했지만, 자세히 둘러보니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약산도 눈앞에 보이고 바닷물이 가득 차 가지고 출렁거렸다.
동고리 해수욕장에는 길 위에 나무가 우렁차게 멋지게 쭉 늘어선 풍경이 너무 좋았다.
날씨가 좋았다면 더 멋지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물 위에 떠 있는 바위 위에 갈매기
새 떼들이 앉아있는 모습도 너무 좋았다. 완도읍은 동부 서부로 한 바퀴 돌면 서부 쪽
오르는 풍경이 좋지만 신지 같이 눈앞에 바다 바위 가까운 곳은 없는 것 같다.
내 생각은 완도 한 바퀴 도는 것보다 신지가 더 넓은 것 같은데 언니들이 그것이 아니
라고 완도가 더 넓다고 하니까 나는 잘 모르겠다.
7시도 못 되어서 광주에 다녀오신 장로님이 아침 식사도 안 하셨다는데 2시 넘어서
들어왔더니 자기가 해결했다고 하셨다. 이 나이가 되니까 자유스러워진 것 같다.
신지가 그렇게 아름다운 곳인지 몰랐다. 갔다 온 게 명 사장이나 갔다 왔지, 다른 데는
별로 안 가 보았는데 오늘 월부리, 가두리, 동고리, 대평리 부장님은 길도 잘 아셔
가지고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 주셨다. 신지가 양식장을 일찍 시작해서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 목욕탕에도 오면 돈을 제일 많이 쓰고 간다는 말이 있다. 어느 날인가 어떤
할머니가 농협 있는 데서 만났는데 자기 집 며느리가 좋은 차 타고 다니면서 돈을 펑펑
쓴다고 얼마나 답답하면 생전 모른 나한테 하소연하셨다.
그때는 대출받아서 은행 돈은 안 갚고 좋은 차 좋은 집 짓고 흥청망청 쓰다가 그 뒤로
망한 집이 많았다는 뒤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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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악기 배우기
우리 나이에 얼마나 살아갈지는 모르지만 가장 무서운 게 치매라 예방하는 차원에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보고 노력을 하며 살고 있다. 머리를 써야 그런 질병이 안 온다고
하기에 기회가 있어 우쿨렐레란 악기를 배우게 되었다. 배운다고 했더니 딸이 연습용을
하나 사 보네 주었다. 처음에는 피아노보다 쉬운 것 같더니 그것도 여러 가지로 어려웠다.
수강생 중에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았다. 그래도 열심히 해보려 노력은 했다.
정도리에서 밤에 연주회에 갔었다. 동영상을 딸에게 보냈더니 너무 좋다고 그 악기로는
안된다고 고급스러운 악기를 사 보냈다. 열심히 배워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준이 있는 거라 역시 소리가 좋고 부드러웠다. 그래서 악기는 비싼 게 소리가 아름답게
남는 게 맞는 말 같다. 우리 딸이 음악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하다 결혼했다.
처음에는 너무 억울해서 너 집에다 1억 벌어주고 결혼해야지 서운했었다. 지내놓고
보니 그것도 잘했다. 저 몸에는 만 원짜리도 선뜻 안 사고 엄마, 아빠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최고로 사서 주고 신발도 편한 신으로만 옷도 너무나 나한테는 과분하게 해주고 있다.
저희 가르치면서 고생 많았다고 딸이라 여러모로 잔정이 많다. 전에는 서울에서 명절 때
학교 다니다 집에 오려면 10시간 버스를 타고 다녔다. 학교 버스가 목포까지 데려다주면
목포로 나가서 딸을 데려오기도 했다. 이번 추석은 용돈만 보내고 시집 식구들과 제주도로
비행기 타고 여행 갔다. 8월에 여수에서 만나고 와서 섭섭하지 않았다.
아들만 다녀갔다. 우리네 부모들은 다 같은 마음이다. 자식들 잘되라고 우리가 건강해야
자녀들한테도 행복을 준거하고 우리가 우리 건강을 잘 보살펴야겠습니다.
하나님 별 한 것도 없는데 어쩌다 이런 복된 딸 저희 가정에 보내주셨는지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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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선배님을 만나다
나는 어렸을 때 목포에서 태어나서 살았다. 우리는 뒷게(뒷쪽) 북항에서 살았는데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별 기억이 없다. 서부 국민학교를 다녔다. 서부 학교는 가난한
학생들이다니고 북교 국민학교는 부자들이 다니는 학교라 했다. 한 반에 가방을 메고
다니는 학생은 한 명이나 두 명, 나머지는 엄마가 만들어준 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북교 초등학교 뒤에 가면 기와집 골목이라하고 있는데 그곳은 정말 기와집들이 줄지어
있고 부자들이 사는 티가 났다 .목포 가면 그곳을 한번 가보아야겠다. 얼마나 변했을까?
서부 초등학교는 갯뻘 바탕에 지어져 다리를 지나서 갔었다. 얼마 전에 해수탕에 다니시는
할머니가 딸하고 자주 오신다. 나이가 87세 되신데 건강하셨다. 나도 저 나이에 저렇게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 할머니하고 이야기하다 보니 그분이 목포
서부 초등학교 선배님이셨다. 그 학교 1회 졸업생이셨다.
옛날이어도 목포 여고까지 나오시고 훌륭한 분이셨다.
감회가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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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쓴 뿌리를 뽑자
마음속에 무거운 짐을 버리지 못하고 어렸을 때 당했던 온갖 일들을 생각하며 지금 현재를
어둡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분도 모든 면으로 잘살고 계시지만
지금의 행복을 누릴 수 없이 사신다. 연금도 나오고 자식들도 부모를 힘들게 안 하고 살 수
있는데도 감사할 줄 모르고 입만 벌리면 옛날이야기 나쁜 놈, 죽일 놈 당하고 살았던
생각만 하고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고 과거에 매여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가 그게 내 마음대로는 안된다. 신앙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나 자신이 살기 위해 애쓰고 힘써야만 될 것이다.
입으로만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는 용서가 있어야
내가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아무 죄 없이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생각하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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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집세
전에 듣던 이야기가 외국은 자기 집이 별로 없고 다 세 들어 산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떤 분이 스위스에서 살았는데 20년, 30년을 한집에서 산다고 한다.
그곳 사람들은 자기가 나가고 싶다 할 때 집세를 올려서 들어오는 사람한테 내준단다.
사는 사람한테는 집세를 안 올린단다. 아이 낳아서 교육하고 결혼시키고 할 때까지
계속 살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런 나라도 있구나! 별천지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장사만 잘되어도 집 비워 주라 하고 계약 끝나면 올려주라고 하고
전세로 주라 했다. 사글세로 바꾸고 주인 얼굴 쳐다보며 살았다. 선진국들은 원래가 잘
살아서 그런지 집이라는 것은 자기 소유물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거라
생각한단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우리나라 사람들같이 돈주머니 찰 생각은 안 한단다.
역시 선진국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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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목포시내 구경
목포 터미널에서 동생을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너무 일찍 도착해서 터미널 안에 있는
영풍 문고에 들러 책을 좀 보고 지금은 책도 보기 좋게 잘 나왔다. 옛날 소월 시집, 윤동주
시집 여러 가지가 미니로 나와 휴대하기 좋은 조그마한 책으로 나와 2권을 사서 기다리다
남동생이 터미널에 도착하고 인천에서 동생이랑 친구분이 도착해서 만났다.
삼계탕 맛있게 하는 데가 있다기에 갔더니 정말 잘해 주었다.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4접시를
먹었다. 인천에서 오신 분이 전라도는 확실히 김치나 음식이 맛있다고 하셨다.
옛날 암태도에 들어가려면 선창가에 대흥 선박에서 배를 타고 2시간 정도 가면 나무로 만든
종선이 나와서 우리를 태워 부두까지 갔었다. 이제는 압해도에서 바로 가게 되어 있었다.
천사 대교를 넘어가면 많은 섬이 있다. 어릴 때 살던 뒷께 서부초등학교가 있고 펄 바탕
이었는데 이제 가보니 상상도 안 되게 변해 버렸다. 어릴 때 다니던 서부 국민학교도 가보고
대성동에 있는 정명여중도 보고 우리가 중학교 다닐 때 몰래 영화 보러 다녔던 원진 극장
자리도 가보고 선생님께 들킬까 조마조마하던 때도 생각났다. 그때 중학교 3학년 언니
들은 시계를 차면 손수건으로 시계 있는 손목을 묶고 다녔다.
시계를 못 차고 다니게 했던 것 같다. 그때는 시계가 그렇게 귀한 때였나 보다 중앙시장 엄청
큰 시장이었는데 이제는 그곳도 잘 모르게 변해 있었다. 목포극장, 평화 극장 밑으로 내려
가면 오거리 콜롬바 빵집이 있었다. 지금도 그 빵집은 유지되고 있었다. 데모라는 뜻도
몰랐는데 2학년 때 4.19가 터져서 데모라는 뜻도 알고 우리들도 학교에서 시험 연기하라고
데모도 했다. 조그마한 일만 있으면 데모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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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안좌도 여행
안좌도는 들어서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안좌도에 들어가면 반월도와 박지도가 섬 안에 또 가볼 수 있다. 조그마한 섬들은 데크
길로 만들어 1.4km를 걸어서 운동할 수 있었다. 입장료가 5,000원인데 오천 원을 주면
상품권으로 5천 원을 주어서 그걸로 그 안에서 커피도 사고 음료수도 사 먹을 수 있었다.
보라색 옷이나 가방, 스카프 보라색이 있으면 무조건 무료입장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바다를 연결해서 여러 가지 볼거리들을 만들었을까 가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친정엄마가 팔금에서 사셨는데 그때 학교가 팔금은 없고 안좌까지
학교에 다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가르쳤다고 하셨다.
옛날부터 그곳은 모든 면에 조금 깨어있는 섬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암태 남강이 멋진 곳이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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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자은도 여행
그날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자은도에 갔었는데 천지가 파밭이였다. 파를 심어 한 철이면 한집에 2억 정도 벌여
들인단다. 단지를 놓아서 그때그때 서울까지 차로 올라간단다. 참 좋은 시절이다.
자은도는 모래사장이 많아 해수욕장이 많다. 고운 모래사장 아름다운 바다의 풍경
리조트, 호텔, 수석공원, 조개 박물관, 분재공원도 있고 자연에서 보고 즐길 것들이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단다. 우리는 뭐 하려 그 많은 투자를 해서 연륙교를
만드는가 했더니 이제는 서울 사람들이 섬을 찾아 교통이 좋으니까 섬 여행을 즐긴
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파도가 쳐서 내려서는 구경을 못 하고
해수욕장은 여러 군데 가보고 리조트 있는 데서 내려 구경하고 사진도 찍고 자은도
구경을 마치고 암태도에 있는 친정집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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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목포 고하도 여행
목포 고하도를 어렸을 때 소풍을 그곳으로 갔었다.
그런데 이번에 목포에서 고하도에 갔는데 멋진 다리를 놓아 관광객들이 올만 했다.
용머리라는 곳이 있는데 옛날 배를 타고 가면 굴이 여러 곳에 있어서 일본 사람들이
파서 자기들이 숨으려고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을 1.5k 되는 길을 데크 길을
만들어 걸어서 용머리까지 갈 수 있게 해 놓았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승리할 때 106일간 머물면서 준비하여 전쟁에 승리하였다고 한다.
이순신 충무공 공적비도 있다. 한 번쯤은 가볼 만한 곳 어떻게 바다 위에다 그렇게
데크 길을 편하게 만들었을까?
건너에는 목포 유달산 시내가 다 보이고 경관이 너무 좋아 다리가 좀 안 좋은데도
경치에 반하여 다녀왔다. 아름다운 길 마지막 여행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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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암태도 여행
남강이라는 부두가 있어서 목포에서 배가 오면 종선(나무배)이 나가 사람들을 태워 오던
곳인데 오랜 세월이 흘러가 보니 다리가 다 연결되어서 천사 대교에 들어오면 자은도,
암태도, 팔금도, 안좌도가 연결되어서 교통이 너무 좋아져서 임 강 부두가 서울 가는
버스, 광주 가는 버스가 다 있었다. 깜짝 놀랐다. 카페에 앉아서 옛날이야기하고 오래된
사람도 만나고 세월의 무상함도 느꼈다. 암태도에 추포라는 섬 징검다리로 건너다녔던
곳인데 가보니 아스팔트로 길이 놓아져 있었다. 그곳은 산이 전부 모래였다.
해수욕장이 그 면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곳인데 경관이 아름답고 좋았다. 여름에는 피서
객들이 많이들 찾아온다고 마을도 예쁘게 꾸며 놓았다. 세월의 변화를 다시 한번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형제들하고 정말 멋진 추억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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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우리나라의 위상
50년 60년 전에 가난한 나라 하고 우리나라는 똑같은 GNP. 환경이 똑같이 못 사는 나라
셨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알아주는 나라 선진국에 들어선 나라
12위권에 들어 있는 나라가 되어 있다. 독일의 이름난 기차도 연착이 되고 고장이 나서
한 역을 지나서 사람들을 내려 준다고 한다. 독일에서 살다 온 사람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보고 깜짝 놀란단다. 이렇게 시스템이 잘되어 있는 나라가 있느냐고 버스를 타도 정확
하게 몇 시 몇분 도착 메시지가 뜨고 사는 우리들은 못 느끼고 사는 것 같다.
한 집에 신발이 몇 켤레가 있느냐고 물어본다. 우리 집도 사람은 둘이 사는데 신발은 여러
켤레가 있다. 신발이 없어 짐승들 소, 돼지, 닭들이 다니는 길을 아빠가 아들 손을 잡고 걸어
가고 있었단다. 선교사님이 그걸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파 우리나라 교회 단체에 연락해
신발을 모아 다 나누어 주었단다. 가는 곳마다 아스팔트 길에 쭉쭉 뻗어 깨끗한 도로 감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특별한 나라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나라 목숨을 바쳐
기도하며 물질 바쳐 나라를 구한 우리 민족 정신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어떤 분이 그러시대요.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특별한 분들은 별로 없는데 우리나라가 왜
이리 번창했을까? 우리나라 민족정신이 너무 투철하고 근면과 성실이 세계 어디를 가도
뛰어나며 타고난 흥과 끼가 이제는 어렵게 안 사니까 제대로 발휘하여 문화 예술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도 감사하며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신앙 안에서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가야겠다. 어렸을 때는 좋은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고 생각
할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우리나라같이 좋은 나라가 없다. 다른 나라 여행 갔다 오신 분들
이야기를 들어도 우리나라가 좋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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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자서전을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네 엄마들이 하신 말씀 내가 산 세상살이를 글로 쓴다면 책 몇 권을 써도 모자랄
거라고 하신 말씀 나이 든 엄마들은 누구나 하고 싶은 말씀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 들 중에 선택받은 우리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책 읽기를 조금 좋아하는 나였지만 이렇게 자서전이라는 글을 쓸 줄을 몰랐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다소나마 적어보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많이 못 썼지만 저는 만족합니다. 지도해주신 선생님과 회원님들의 글을
읽어보고 나 자신도 다시 생각해보고 건강에도 많은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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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이런 삶도 있을까?
사람은 약한 사람한테 강하고 강한 사람한테 약한 사람이 있다.
나는 약한 사람이기에 강한 사람하고 많은 날을 같이 지냈다. 그 친구는 나를 너무 좋아
하면서도 무엇이든 같이 하기를 원했다. 나는 싫든 좋든 내가 금전적으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므로 같이 지냈다. 마흔이 넘어서부터 10년이 넘도록 그 친구가 이사를 3번
가도록 주말은 쉬고 날마다 그 집을 다녔다. 모 신문사 띄지도 써주고 신문 오면 때맞추어
신문해주고 하루만 안 가면 눈치 주고 그래도 내가 아쉽기 때문에 다녔다.
돈이라면 엄청나게 좋아하고 이자를 받기 위해 많은 돈을 손해 보기도 했다. 나는 속이 좀
상해도 도움을 받아 남에게 실수하지 않고 신용을 지킬 수 있었기에 그것도 감사하게 생각
했다. 그 친구는 몸이 아파서 올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아무리 복이 없다고 그렇게 자식
하나도 못 가져 보고 세상 즐거운 맛도 모르고 가버렸을까? 기가 막힌다.
하나 있는 아들 자기 입에는 500원어치도 안 넣어도 아들한테는 메이커로 운동복 신발
무엇이든 먹는 것도 고급으로 그 아들을 위해서 소문나게 잘길렀다.
남들도 입양해서 잘 기르고 효도하며 낳은 자식 못지않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
아들이 서울에 살다 광주에 취직해서 왔는데 나는 아들이 내려오면 엄마 환경을 바꾸어
줄 거라 믿었는데 그것도 내 생각뿐으로 끝났다. 그 아들은 길러준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물어보고 싶다. 이 좋은 세상에 가족이 관심을 가졌다면 지금도 살아있지 않았을까
너무나 슬픈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돈은 쌓아 놓고 자신을 위해 한 푼도 못 쓰고 간 친구
무엇을 위해 그렇게 모질게 살았을까? 돈 있는 사람은 종합병원에 1억만 기부하면 죽을 때
까지. 좋은 환경에서 마지막까지 잘 모신다고 하는데 왜 그 아들은 그 많은 돈이 있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안했을까 그 남편도 똑같다. 엄마가 떠난 뒤 아내가 떠난 뒤 그 돈을 보면 어떤
생각할까 핸드폰도 없고 TV도 없고 전화도 없는 방에서 나갈 때는 문 잠그고 나가고 누구
오면 못 오게 하고 쓰레기 속에서 살다 세상을 떠난 친구를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진다.
우리 주위에는 너무도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신 있을 때 자신을 위해 잘 관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는 정말 안 쓰고 싶었는데 써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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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애완견 이야기
우리 아들이 공부하다 우울증으로 몸이 아플 때가 있었다.
운동하다 걸어오는데 중도리 쪽에서 유기견 한 마리가 헤매고 있어서 검은색이라 깜장
이라 이름 지었다. 그 강아지를 키우면서 닫았던 문도 열리고 여러 가지로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예쁘게 잘 키웠는데 운동 갔다 오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 누가 데리고 가버렸다.
아들이 보도 클리라는 양몰이 강아지를 분양받자 한다. 아들 건강을 생각해서 안 한다는
말도 못 하고 나주까지 분양받으러 가서 한 마리 입양해 왔다. 대, 소변 가리기까지 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 크고 나니 너무 영리해 완도 명품 개가 되어 서울, 부산 좋은 곳마다
다 데리고 다니고 돈 조금 번 것 개한테 다 쓰고 살았다. 핸드폰 할아버지한테 갖다 주라
하면 그대로 하고 리모컨 가져오라 하면 할머니한테 가져오고 아래층에서 이층에 가서
목줄 찾아오라면 올라가서 찾아오고 너무 영리했다. 그런데 자주 아프기 때문에 돈도 많이
들고 광주 병원에 입원시켜 수액 맞고 그렇게도 좋아한 아들을 못 알아보게 되어 위급하다고
올라가니 그날 저녁 죽고 말았다. 딱 3년 살고 갔다. 우리 아들은 울고 슬픔에서 이겨내기
힘들었는데 그래도 시간이 가니까 괜찮아졌다. 치와와 아주 작은 강아지랑 같이 키웠다.
그때 아들은 슬픔에 빠져있는데 나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속으로 개를 우상으로 삼고
제일로 삼으니까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나 생각이 들었다. 검둥이가 가고 나니까 차도 깨끗
하고 집도 깨끗하고 나 생각 해서 먼저 간 것 같다. 지금도 아들은 내 마음을 모른다.
모든 것을 다 이기고 아들은 대전에서 열심히 하고 싶은 공부 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그 개 때문에 몇백만 원 들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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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들어보셨나요?
나는 몸이 안 좋으니까 목욕탕을 자주 간다.
그 안에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새로운 뉴스들이 많이 있어 우리들은 듣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어느 시골 엄마가 아들 며느리가
집에 왔다 가니까 자기 입에는 아까워 못 넣고 좋은 것만 골라 박스를 하나 보냈답니다.
그리고 올라간 뒤로 전화했어요. 아들아 물건 잘 풀어 보았느냐? 거기다 30만 원 넣었다
보태서 필요한 곳에 쓰리라 했데요. 아들이 아내한테 물었더니 박스를 버리고 왔대요
발을 동동 굴리며 나가보니 다 수거해 가버린 뒤 다른 사람은 70만 원을 넣었대요
똑같이 그런 일을 당했대요. 믿으시나요. 정말이래요 우리네 엄마들 자식 사랑 짝사랑
그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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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점점 멋져질 우리나라
우리나라가 예체능계로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잘한 줄은 몰랐다.
세계에서 러시아 다음이 우리나라란다 세계적인 상을 20년 동안 러시아가 76, 한국이
37개 우리나라가 2위란다. 영재들이 많이 나온 나라가 되고 악기뿐만 아니라 모든 면
에서 뛰어난 우리나라의 재능. 세계에서 노래방이 제일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 슬플 때도
노래, 기쁠 때도 노래와 춤 항상 따라 다닌단다. 그것은 특별한 우리나라 조상들의 DNA를
물려받아 끼가 있다는 것이다. 나라가 잘살게 되면서 우리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쳤고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우리나라는 성악, 악기 모든 수준이 외국 학생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공부해도 아무 손색이 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단다. 클래식 음악을
해도 생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단다. 나도 우리 아들딸을 서울에서
음악대학을 나왔는데 음악 레슨을 받은 선생님들은 다 이탈리아에서 10년, 15년 계시다
오신분들이다. 교수를 하려면 음악회를 200회 정도 해야 교수가 된다고 말을 들었다.
그 비용을 자비로 티켓 발매해서 무상으로 나눠 주는 것이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분
들은 학생들 개인 레슨 해주는 것이 고작이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예산을 기획사에다 주면
인재 발굴과 음악회 여러 가지 행사하는데 일본은 잘하는 사람이 없단다.
우리나라가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위에서부터 어른들이 작은 음악회라도 자기 돈 내고
다니는 문화가 되어야 한단다. 트로트 가수 온다고 하면 완도 사람들도 16만 원 주고
목포까지 간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금 지나면 우리나라도 좀 더 성숙한 더 멋진
나라가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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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기차여행
한 해 언젠가 인천에 사는 동생이 기차여행을 하자고 올라오라 해서 인천으로 가서
서울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동해안으로 떠났다. 우리네 사는 바다를 보는 것하고는
느낌이 달랐다. 푸른 바다에 섬 하나 없는 끝없이 넓은 바다 너무 좋았다. 남한산성도
가고 가다가 쉬어서 구경하고 양평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 있는 곳도 있었다.
동생하고 다녀온 지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7, 8년 된 것 같다. 동해안을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즐거운 시간을 지냈다. 이제는 어디 집을 떠나 돌아다닌다는 것이 힘들게만
생각되고 내 집이 제일 편하다고 느껴진다. 이러한 것들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 같다.
더 아프지 말고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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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오이농사 풍년
여러 해 되었는데 옥상에다 오이 나무 2그루를 심었다.
나무가 잘 자라니까 우리집 아저씨가 기둥을 세우고 줄을 엮어 올라가게 잘해 놓았다.
그해는 그렇게도 많이 열렸는지 한 나무에 7, 80개가 열린 것 같다. 나는 이래서 농사를
짓는가 보다 생각했다. 오이장아찌를 담고 이웃도 나누어 주고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다음 해도 심었더니 오이 농사가 안되었다. 그 뒤로는 계속 오이를 해마다 심어도 이상
하게 따 먹지를 못했다. 올해도 심었는데 실패 원인이 무엇일까?
농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왜 그 해만 그렇게 잘 열었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생각만 해도 그해 오이 농사를 생각하면 흐뭇하고 아저씨랑 그때 이야기를
종종 한다. 오이가 주렁주렁 열린 사진 한 장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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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거제도 외도여행
2011년도에 교회 친구들하고 부산 여행을 갔었다.
부산 자갈치 시장도 가고 부산 국제 시장도 가보았다. 그곳에 돌아다니다 물건을 산다고
다니던 권사님 한 분이 가방을 하나 사 왔는데 다 낡은 것을 사 와서 배꼽을 쥐고 웃던
생각도 난다. 통영시 어딘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옛날 전쟁했던 모습. 6.25 당시 그때
모습들을 생생하게 잘 꾸며 놓았다. 바다 밑으로 길이 나서 그곳도 지나가 보았다.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외도 섬 배를 타고 들어가는데 배가 들어가는 곳도 바위 속을 지나 너무
멋이 있었다. 그 깊은 곳에 자리 잡아, 그렇게 아름답게 가꾸어 놓았는지 우리가 세상에
나와서 손수 그렇게 공을 들여 들어오는 사람들 좋아하고 행복한 모습에 만족하면서
그렇게 아름답게 가꾸어 놓았을까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그 섬 주인은 그곳에서 남편과 낚시하려 자리를 잡았는데 너무 아름다워
그곳에 머무셨다. 섬 동네 몇 분이 사셨는데 도시로 나가시니까 하나씩 하나씩 산 것이
그 섬을 다 샀단다. 자기 재산을 들여서 그렇게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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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함박웃음
핸드폰을 열어 사진들을 들여다보니 웃음이 나왔다.
재작년 생일에 50주년 기념으로 남편이 팔찌 딸이 반지를 해주어서 딸도 오고 아들도
있고 손녀들도 오고 했는데 팔찌 차고 반지 끼니까 그렇게도 좋았을까 그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다. 돌아보면 살았던 세월이 싸락 싸락 할 때가 많았는데 순간순간 기쁨도
있었지만 기쁨은 순간 가버리고 힘든 날이 많았는데 다 지나니까 지금은 그것도 추억이
된다. 나만이 아닌 의리네 엄마들은 이렇게 살았겠지요. 50년을 같이 살도록 생일날
기억 안 해 준 남편들이 많겠지요. 지금 세대 같으면 이혼 도장 찍겠지요. 우리네 엄마들
잘 이기고 잘살았어요.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해준 우리네 부모님들 장하시고, 존경합니다.
행복했습니다. 사진 한 장 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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