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백당 김계행의 묵계서원을 찾아서
이원걸(문학박사)
(목차)
1. 청백리의 명성과 수려한 자연 경관을 겸비한 묵계리
2. 묵계 서원의 위치와 내력
3. 서원에 배향된 인물의 행적
1) 청렴강직한 선비의 전형 보백당 김계행
2) 세종대의 청백리 응계 옥고
4. 남은 이야기
. 청백의 명성과 수려한 자연 경관을 겸비한 묵계리
길안면 소재지인 천지리에서 35번 국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6km 지점에 청백리로 명망이 높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 1431~1517)의 유적지가 있다. 당호인 「보백당」은 그의 시구인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에서 따 온 것으로, 「淸白을 보물로 삼는다」라는 의미이다.
묵계는 「서낭댕이」, 「구마이」라는 두 가지의 별칭도 갖고 있다. 「서낭댕」은 「성황당」(동신당)이 있는 마을이란 뜻과 지형이 절묘하여 신선의 터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일명 「선항당」(仙巷塘)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그리고 「구마이」는 「구만리」(九滿里)라고도 한다. 옛날에 어떤 도사가 이 마을에 아홉 가구만 살면 모두 잘 산다고 하여 「구만」(九滿)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어떤 선비가 늦게까지 국화꽃이 피는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이란 의미로, 이 마을을 「국만리」(菊晩里)리로 개칭했다고도 한다. 또한 영가지에는 이곳의 지명을 「거무역」(居無驛)으로 기록해 두었다.
그러다가 보백당 김계행이 70세 되던 해인 1500년(연산 6년)에 벼슬에서 물러 나와 우거하면서부터 이곳을 묵계(黙溪)라 칭했다고 한다. 이는 보백당이 송암폭포(松巖暴布) 위에 만휴정(晩休亭)을 짓고 정자 앞에 흘러가는 물을 보고 묵계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묵계 사후에 묵계 서원이 건립되면서부터 이 마을 전체 이름이 묵계로 불리워진 것이다.
그리고 마을 뒤에 우뚝 솟아 있는 계명산(鷄鳴山)을 중심으로 하여 마을 앞으로는 금학산(金鶴山)과 황학산(黃鶴山)이 겹겹이 마을을 에워 싸여 있다. 깊은 골짜기와 맑은 물이 조화된 묵계의 전경은 신비스럽고도 아늑하다. 이는 흡사 동양 문학상에 대두된 무릉도원을 연상케 할 만하다.
일찍이 이곳 묵계가 문한(文翰)의 마을이었음을 알려 주는 일화도 전한다.
①구한말 어느 해 무더운 여름날, 문장가라고 자부하던 영천 고을의 이랑산(李浪山)이란 선비가 글 시합에 임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②그는 청송을 지나 안동으로 가는 길에 이 마을 앞을 지나 가다가 때마침 소나기를 만나 어느집 처마 밑에 들어가 비를 피하게 되었다.
③그 자리에는 마을의 김매기 하던 농부도 함께 있었다. 그는 시 짓기를 하자며 마을 사람들에게 운자를 내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운자가 떨어지기 바쁘게 저마다 모두들 시 한 수씩 읊어 대는게 아닌가.
④영천의 선비는 흙탕물에 옷이 젖어 보잘 것 없는 시골 농사꾼의 입에서 한시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아하! 여기가 바로 문한의 곳이로구나! 산촌의 농사꾼마저 이 정도의 수준이라면 「안동」이란 곳은 과연 대단한 고장이 아니겠는가!
⑤ 그는 기가 질려 결국 거기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2.묵계 서원의 위치와 내력
묵계리에서 100m쯤 구 고갯길을 올라 가면, 왼쪽에 서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 건물은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凝溪) 옥고(玉沽 : 1382~1436)의 위패를 봉향하는 서원이다. 묵계 서원은 조선 숙종 13년인 1687년에 사림들의 발의로 창건되었다. 보백당의 위패는 그의 맑고 깨끗한 삶의 자세를 흠모하는 후대의 선비들에 의해 조선조 숙종 32년인 1706년에 묘우인 청덕사(淸德祀)에 응계와 같이 병향되었다. 보백당은 조선 초기 성종대 대사성을 역임했으며, 유저로 [보백당실기(寶白堂實紀)] 4권 2책이 있다.
응계는 조선 세종대에 사헌부 장령․안동 통판․대구 부사를 역임한 바 있다. 그의 유저로 응계실기(凝溪實紀) 3권 1책이 있다. 응계가 이 서원에 봉안된 이유는 첫째, 그가 안동 부사로 재직할 당시에 선정을 베풀어 이 고을 사람들로 추모의 정이 후세까지 남아 있어 봉안은 가능했겠지만 안동 지방에 응계의 후손이나 문인이 없는 점으로 보아 다소 설득력이 약하다.
둘째, 보백당과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 1431~1492) 사이의 교분 관계를 들 수 있다. 응계가 야은(冶隱) 길재(吉再 : 1353~1419)에게 직접 배운 문인이고, 점필재의 부친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 1389~1456) 역시 길재의 문인이다. 게다가 보백당과 점필재 사이의 교유 관계로 보아 안동 부사를 역임한 응계가 묵계 서원에 배향될만 하다 하겠다.
보백당과 점필재 관계를 정리해 보면, 보백당이 46세 되던 해인 1476년 12월에 상산(商山:지금 상주)에 들러 첫 상면하면서부터 교유가 시작되었는데, 당시, 점필재는 선산 부사를 역임할 때이다. 이러한 점 등이 응계가 묵계 서원에 배향되게 한 요인으로 작용되었으리라고 보아 무리가 없다고 본다.
그러다가 묵계 서원은 1870년에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25년에 강당 및 일부 건물을 건립하고 복향(復享)은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98년 5월 17일에 사림들에 의해 현 위치에 복원되어 위 두 분의 위패를 다시 모시게 된 것이다. 이는 현재 경상북도 지방 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속 건물로 사당은 청덕사(淸德祀), 강당은 입교당(入敎堂), 누는 읍청루(悒淸樓), 재는 극기재(克己齋)이며 문은 진덕문(進德門)이다. 또한 서원 남쪽 언덕에는 보백당의 신도비와 비각도 건립되었다.
서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마을 한가운데에 묵계 종택이 있다. 종택 내에는 보백당이라 편액한 구택(舊宅)이 있는데, 현재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제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종가에는 선생에게 내려진 교지와 유품들이 잘 보관되어 있다.
보백당을 향사(享祀)하는 묵계 서원과 그의 만년 강학소인 만휴정(晩休亭)에는 「만휴정」이란 현판 외에 보백당의 유훈인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이란 액자를 걸어 두었다. 그리고 정자에는 류도원(柳道源), 김굉(金土宏), 김도행(金道行), 정박(鄭璞), 이돈우(李敦禹) 김양근(金養根) 등의 명현 시판과 김양근의 「중수기(重修記)」도 걸려 있다. 그리고 만휴정의 소 아래 바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란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다.
3. 서원에 배향된 인물의 행적
1. 청렴 강직한 선비의 전형 보백당 김계행
보백당은 조선 초기의 정치가 혼미할 때, 양심적인 관료이며 지조와 절개가 곧았던 선비이다. 그의 본관은 안동으로, 삼태사 김선평의 후예이다. 그의 휘는 계행(係行)이며,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그는 1431년(세종 13) 2월 9일에 안동부 풍산현 불정촌(佛頂村) 본가에서 현감을 역임한 부친 삼근(三近)과 삭령감무(朔寧監務)를 역임한 전(腆)의 따님이며 모친인 김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살 무렵에 부친에게 가학으로 학문을 익혔는데, 매우 영민하여 문장을 금새 익히고 곧잘 암송하였다. 자라나면서 성질이 침착하고 과묵해서 같은 또래의 친구와 어울려도 남 달랐기 때문에 집안의 어른들은 보백당이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예견하였다. 그리고 부친은집안을 일으킬 아이라며 큰 기대를 걸었다. 10세(1440)에 비로소 글을 익히게 되었는데, 문리를 통했으며, 배운 바를 부지런히 암송하였다. 이어 열두살(1442) 무렵에는 독서를 즐겨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아 이내 문예에 있어서 크게 성취한 바가 있었다.
보백당은 14세(1444)가 되어 부친이 비안 현감의 임소로 떠나자, 부친을 모시고 비안으로 가서 그곳 향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15세(1445)에 사서(四書)를 모두 익혔으며, 16세(1446)가 되던 가을에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어 17세(1447) 되던 봄에는 생원회시에 합격하여 비안 관아에서 경사를 축하하는 잔치도 벌였다고 한다. 그해에 이천 서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었다.
이어 22세가 되던 1452년에는 증광동당시(增廣東堂試)에서 제2인자로 뽑혔으나 이듬해에 부인 서씨와 사별하였다. 24세(1454) 때에는 지평(持平) 상치(尙致)의 따님인 의령(宜寧) 남씨 부인을 맞아 재취하여 26세(1456)에는 극인(克仁), 29세(1459)에는 극의(克義)를 낳았다. 보백당은 30세(1460) 무렵에 지금의 묵계인 거묵(居黙)에 생활 근거지를 삼게 되었다.
31세(1461) 가을에 동당초시(東堂初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어 32세(1462) 되던 해 봄에 귀향했다가 6월에 성주 교수로 임명되어 이듬해에 부임했다. 당시, 장조카이며 출가하여 국사(國師)가 된 학조(學祖)가 성주로 그를 찾아 왔다. 그때 목사(牧使)가 사람을 보내어 보백당을 관아로 불렀으나 그는 가지 않았다. 학조가 숙부에 대한 결례를 뉘우치고 찾아 뵈었더니, 보백당은 조카를 호되게 꾸짖는 한편 매로 다스려 피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이윽고 학조는 숙부에게 벼슬길을 주선해 볼 심산으로 의중을 떠 보자, 보백당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실제 학조 국사는 세조조에서 연산조까지 생존했던 스님으로, 불경을 국역하고 대장경을 간인(刊印) 하는 등 우리 나라 불교 문화 발전에 공헌햇으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34세(1464)에 아들 극례(克禮)가 출생했으며, 그해 12월에 부친이 병환에 들자, 그는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하는 효성을 보였다. 그러나 부친은 그의 간곡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보백당은 부친상에 애곡하며 날마다 상묘(上墓)하였다. 37세(1467)에는 부친상을 탈상하였으며, 이듬해 세종 대왕이 승하했다. 40세(1470)에 아들 극지(克智)가 태어 났다.
보백당과 점필재와의 교유는 41세(1471) 때에 비롯되는데, 점필재와 함께 주역과 근사록을 강론하면서 도의를 맺는다. 43세(1473)에는 사위 류자온(柳子溫)에게 가서 몇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 왔는데, 보백당은 사위를 유별하게 격려하며 장래를 기대했다. 그는 후일 서애의 증조부가 된다. 44세(1474)에 충주 향교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아들 극신(克信)이 태어 났다. 45세(1475)에는 아들 극인으로 하여금 묵계에 우거케 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충주 향교 교수직의 임기를 마치고 잠시 묵계에 들렀다가 풍산 사제(笥堤)의 옛집으로 갔다. 그해 12월에는 점필재가 내방을 하였다. 이어 다음 해에는 보백당이 상산으로 점필재를 심방하였다.
49세(1479) 가을에는 식년동당초시(式年東堂初試)에 합격하였으며, 이듬해 3월에는 급제하여 6품직에 올랐다. 이 당시, 점필재가 서울에 우거하던 보백당을 내방하였다. 이어 51세(1481)에는 점필재 및 성희안(成希顔 : 1461~1512)과 함께 여러날 종유하였다. 그리고 희안의 동생인 희증(希曾)과는 교분이 각별하였다.
52세(1482)에 고령현감을 제수받았는데, 외직에서 청렴하고 자애로운 선정을 베풀고, 매사를 신속히 처리하여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고령 고을에 교화가 이루어지며 기강도 세워지게 되었다. 이 당시, 점필재는 보백당에게 「몽시(夢詩)」 1수와 「증별시」 2수를 주었다.
십일월 초파일 밤 꿈에 나귀를 타고 산수 사이에서 노닐다가 지난해에 급제한 친구 김계행을 서로 만났는데, 그가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헌부 감찰로 있다가 남의 배척을 받아 파면을 당하고 성현도 찰방이 되었다네.
그리고 나서 관청에서 말하는 격(檄) 같은 방판에 그 일의 시말을 모두 기록하여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모두 읽고 나서 그 글자를 깨끗이 모두 지운 뒤에 거기에 시를 써서 주려고 했는데, 미처 다 쓰지 못한 채 꿈을 깨어 버렸다.
그러나 맨 앞의 연구(聯句)만 기억이 나므로 거기에 이어 한 편을 이루는 바이다.
김계행은 나이 쉰을 넘어서 급제하였다.
(十一月初八日夜, 夢騎驢薄遊山水間, 與故人前年及第金系行相遇, 云我以司憲府監察, 爲人所排而罷爲省峴道察 訪, 用方版如官府所謂檄者. 錄其事始末以示余. 讀之, 旣揩洗其字, 題詩以贈, 未成而覺. 但記前聯, 遂足成之. 金 過五十得第).
계적비지모(桂籍非遲暮) 과거 급제 늦은 것 아니니
오대임거류(烏臺任去留) 사헌부를 떠나건 말건 상심 마오.
인언행혹니(人言行或泥) 남의 말이 진로를 좌우하기도 하지만
천차자위모(天且子爲謀) 하늘이 그대 위해 도모한 일이라네.
격상운연동(檄上雲烟動) 방판 위 글씨 살아 움직이고
려변수석유(驢邊水石幽) 나귀 곁엔 수석이 그윽하겠네.
유승다주무(猶勝茶酒務) 오히려 사헌부 직무보다 나으리니
정역가우유(程驛可優遊) 역참에서 유유자적하겠네. [몽시(夢詩)]
․다주무(茶酒務) : 사헌부 감찰들이 날마다 한 번씩 분대(分臺)에 모여 앉는 것을 다시(茶時)라고 하는데, 사헌부 감찰의 직 무를 의미.
신축년(1482년)에 내가 일찍이 꿈에 감찰 김계행과 서로 만났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데, 지난해에 내가 주상의 부름을 받들고 서울로 돌아와 두 번이나 김군과 만났지만 끝내 그 꿈 이야기를 털어 놓지 않았다.
그런데 금년 가을에 김군이 어떤 일로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고령현감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비록 그 직임이 찰방은 아니지만 내 꿈이 과연 증험(證驗)이 있다.
그래서 급기야 그 일을 말했더니, 김군 또한 웃었다. 그런 연유로 지난번의 운을 사용하여 두 수를 지어서 전별(餞別)하고자 한다.
(辛丑歲, 僕嘗記夢與金監察係行相遇事, 前年被恩命還京, 再與金君遇, 終不言夢事. 今年秋, 金君以事不容於朝. 出爲高靈縣監, 雖非程驛之任, 余之夢, 果有徵也. 遂語其事, 金君大噱, 仍用前韻賦二首, 聊以贐行云).
가야고등설(伽倻古滕薛) 가야땅은 옛날 등설과 같으니
적환승봉유(謫宦勝封留) 좌천이 중앙 관직보다 나음일세.
순궐공주흥(筍鱖供廚興) 죽순과 생선은 주방의 흥을 돋우고
계산여목모(溪山與目謀) 시냇물도 시야에 들어 오리라.
풍순맹보정(風淳甿保靜) 풍속도 순박하고 백성들 생활도 평온하며
관냉옥로유(官冷屋盧幽) 관청 업무 한가하여 주거도 그윽하겠네.
석아추정처(昔我趨庭處) 내 옛날 아버님 모시던 곳에
현가대자유(絃歌待子游) 자유의 현가 가락 흘러 나오리.
․등설(滕薛) : 춘추 시대 작은 두 소국. 지방관을 의미.
․현가대자유(絃歌待子游) : 지방관으로 선정을 베푸는 것을 비유. 공자의 제자인 자유가 무성(武城) 고을 원이 되어 예악을 가르쳐 그 고 을 사람들이 모두 거문고를 타고 시가를 읊었음.
우관비시참(郵官非是讖) 찰방 직임은 참언이 아니었고
도현족엄유(桃縣足淹留) 도현에 머물만 하여라.
정협삼도몽(正協三刀夢) 삼도의 꿈이 맞았으니
난영이경모(難營二頃謀) 이경의 토지를 경영하기 어렵다네.
부서영국촉(簿書寧局促) 문서 속에만 어찌 얽매이리
화죽갱청유(花竹更淸幽) 꽃과 대나무 맑고 그윽하다네.
욕방유선적(欲訪儒仙跡) 유선의 자취를 찾고자 하면
야산치상유(倻山峙上遊) 가야산에 올라 유람해야 될걸세. [증별시(贈別詩)]
․삼도몽(三刀夢) : 지방관이 되었음을 의미.
․이경(二頃)의 토지 : 이백묘(二百畝묘)인 토지로 옛날 중농(中農)에 해당됨.
․유선(儒仙) : 신라 때의 최치원(崔致遠).
이후, 보백당은 53세(1483) 때에 여가를 얻어 선영에 참배하고 9월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 왔다. 54세(1484)때에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지제교(知製敎)․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에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전임되어 천재(天災)와 시폐(時弊)․인사의 불공평 등을 논하다가 권귀(權貴)들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55세(1485)에는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敎理) 및 교리(敎理)의 부름을 받았지만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제수 받아 부임하였다. 58세(1488) 때에는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제수 받았다. 59세(1489)에는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옮겨 승니(僧尼) 제도의 페지를 청원하고는 여가를 얻어 귀성(歸省)하였다. 이 당시, 연산군의 생모 윤씨 폐위가 이루어지고 조정의 의견이 양분되어 어수선하자, 보백당은 조정에서 물너 날 뜻을 확고히 정하였다.
그해 12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상중인 60세(1490년)에 아들 극지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조정에서 보백당이 상중인 것을 알지 못한 채 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 직을 임명하였다. 62세(1492)에 모친상을 탈상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지제교(知製敎)․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이내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이임되었다.
그해 4월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어 세번이나 사임해 끝내 직임이 바뀌어졌다. 이어 6월에는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와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전임되어 굳이 사양했으나 주상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 이어 9월에는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어 네번이나 사표하여 결국 교체되었다. 63세(1493)에 낙향하여 선영에 참배하고 풍산과 묵계를 오가며 한가한 생활을 하였다.
5월에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12월에 성종이 승하하여 다시 상경하였다. 65세(1495) 되던 해가 연산군 원년으로 2월에 국장(國葬)의 산역(山役)을 감독하였다. 이어 5월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여 해임되었다. 66세(1496)에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어 부득이 부임하였으며, 이듬해에 시정(時政)을 극력히 간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가납되지 않자, 사표를 내고 이내 환향하였다.
68세(1498)에는 사제의 언덕에 작은 정자를 수축하고 「보백당」이라 편액하고는 날마다 사색하며 심성을 수양하는 한편 생도들의 훈육에 전념하였다. 이 당시, 무오사화가 발발하여 보백당도 이에 연루가 되었다고 하여 어세겸(魚世謙)․성희증(成希曾)․조호문(趙好問) 등 10여인과 함께 체포되어 태형(笞刑)을 받고 석방되었다가 그해 7월에 다시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 69세(1499) 정월에는 첨중추(僉中樞)에 임명되었다. 당시 도승지 신수근(愼守勤)과 한치형(韓致亨) 등이 모의하여 보백당의 국문을 주청하였으나, 구원의 손길에 힘 입어 무사하였다. 당시 보백당은 동학들이 모두 사화에 의해 희생되어 비참한 심정을 가눌 길 없었다. 이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또한 연산군이 지난 일을 들추어 국문을 명하여, 보백당은 의금부에 5개월 동안 구금 당하였다가 방면되어 환향하였다. 이렇듯 보백당은 수년 사이에 세 차례나 국청(鞠廳)에 들어가 신문을 받는 동안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속박과 고통을 받았지만 태연자약하여 대처하여 연산군도 더 이상 가해 행위를 하지 못했다.
71세(1501)에는 묵계로 거주지를 옮겨 묵계하리 송암 폭포 위에 「만휴정」을 짓고 소요자적하였다. 76세인 1506년에 중종반정이 일어 났다. 보백당은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회한에 잠겼다. 이후, 그는 경학에 전력하여 성리를 탐구하고 사색하였다. 81세(1511)에 내외 종친들이 모여 헌수(獻壽)를 축하하였는데, 대소과에 급제한 자가 10여명이었으며, 관직에 있는 자가 70여명이나 되었다.
보백당은 87세(1517)의 일기로 운명하면서 자손들에게 「청백을 가법으로 이어가고, 공근(恭謹)을 대대로 지켜가며, 효우(孝友)하며 돈목(敦睦)하라」․「교만이나 경박한 행동으로 가성(家聲)을 떨어 뜨리지 말라, 상제(喪制)는 정성과 경건을 다하고, 낭비나 허례를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는 입조한 수십년 동안 충간(忠諫)을 다했으며, 「계(啓)」․「차(箚)」․「소(疏)」 등이 많이 전해졌을 것이지만 여러 차례의 변란 과정에서 대부분 산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사후 그에게 내려진 시호(諡號)는 정헌(定獻)인데, 「순행불상왈정(純行不爽曰定), 향충납덕왈헌(嚮忠納德曰獻)」에 기인한다. 이는 「순행하여 어긋나지 않았으니 정(定)이요, 충성을 다하여 덕을 쌓았으니 헌(獻)이다」라는 의미이다. 후일, 조정으로부터 이조판서(吏曺判書) 및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으로 증직되었으며, 부조전(不祧典)의 칙령(勅令)도 내려졌다.
「상향축문(常向祝文)」은 다음과 같다.
유청백설(惟淸玉雪) 맑기는 옥과 눈 같았고
강금직시(剛金直矢) 굳세고 바르기는 곧은 화살 같도다.
조두향지(俎豆享之) 제향(祭享) 드리움이
어천만사(於千萬祀) 천만년을 이을지어다. (金世鎬)
연원정학(淵源正學) 정학의 연원이요
지려청절(砥礪淸節) 갈고 다듬었던 맑은 절개로
편몽염완(編蒙廉頑) 청렴과 굳셈을 깨우쳐 주셨으니
백세분필(百世芬苾) 백세 동안 분향 하오리이다. (金鼎均)
2. 세종대의 청백리 응계 옥고
응계의 생평과 치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응계실기 뿐이므로, 「행장」 및 「묘갈명」 등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생애와 치적을 정리하기로 한다. 「행장」에 의하면, 애당초 행적(行蹟) 1권과 응계집(凝溪集) 2권이 있었는데, 전란통에 유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일부 남은 저작인 「선악상반지도(善惡相反之圖)」 및 「음양변역성괘지도(陰陽變易成卦之圖)」 등과 후인들의 기록 등을 중심으로 실기를 작성한 것이다.
응계의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부친은 생균관 생원시 출신으로 진성감무(珍城監務)를 역임한 사미(斯美)와 모친 영산(靈山) 신씨(辛氏) 사이에서 고려말 우왕 8년인 1382년에 김해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부친 사미는 주거지를 군위로 다시 옮기게 되었다. 그의 휘는 고(沽)이며, 자는 대수(待售), 호는 응계(凝溪)이다. 응계가 태어나고 이내 부친 사미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응계는 모친에게서 알뜰한 가르침을 받았다. 모친은 그에게 부지런히 학문을 익히
도록 권장했을 뿐 아니라 응계 자신도 총명하여 문예가 조숙하였다.
이윽고 길재의 문하에 나아가 본격적인 학문을 익히게 되어 경학과 성리학에 치중하였다. 열여덟살인 1389년(공양양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어린 나이에 급제한 탓에 일시에 화제가 되었으며, 재상가에서는 서로 사위를 맞으려고 다투었다. 이어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집현전교리(集賢殿敎理) 등을 역임했다.
성균관의 교수로 재직할 때에는 제자들에게 훈육을 엄정히 하여 후학들 가운데 학문으로 성취한 자가 많았다. 이를테면,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이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인물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상을 당했다. 모친상을 마치고 응계는 벼슬길에 나갈 뜻을 접어 두고 산수 사이에서 거닐며 시를 읊고자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33세 때인 1414년에 안동부통판(安東府通判)에 임명되어 상하로 예를 다하고 엄격함을 잃지 않았다.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일일이 문건을 뒤척이지 않더라도 귀신처럼 적발해 내어 이속들과 백성들이 그의 신명한 송사척결에 탄복하여 감히 속이려고 하는 자가 없었다.
이어 외직인 대구 부사가 되어서 백성들을 어질게 대하고 만물에게 혜택이 미치도록 하였으며, 청렴결백하고 선한 목민관의 소임을 다하였다. 그런데 대구 고을 관아에는 배설(裵泄)이란 이속이 교활하고 민첩하여 이 고을에 부임해 오는 고을원을 자기 수완대로 능멸하기 일쑤였지만, 그는 응계의 어진 행적에 감화를 받았다고 술회하였다.
이외에 응계가 17~18세 무렵에 대구부에 응거하였을 때, 사인(舍人)이 초라한 그의 행색을 보고 능멸하였는데, 후일 그가 대구 부사로 부임하자 몇 년 동안 겁을 먹고 피해 다니다가 급기야 죄를 청하자, 응계는 순순히 용서하는 미덕을 보여 주위 사람들을 감복시켰다고 한다. 또 한번은 이웃집 아낙이 자기 남정네가 죽었다고 곡하는 소리를 듣고는 곡하는 소리에 슬픔이 담겨 있지 않다는 점에 유의하여 그녀가 사통하던 간부와 짜고 남편을 죽인 범인임을 밝혀 내기도 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 오는 응계의 짐 보따리는 책상자 뿐이었으며, 어떤 자가 응계 부인에게 삼베 한 상자를 보냈더니 부인마저 그것을 받지 않고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청렴결백한 목민관의 자세는 대구 고을의 백성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백성들은 그의 어진 행적을 기리고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송덕비를 세웠다.
일심공정(一心公淸) 한결 같이 공정하고 맑게 다스리시어
사경안강(四境安康) 온 백성들 편안히 살게 되었습니다.
오재위정(五載爲政) 다섯 해 동안 저희 고을 다스렸건만
백세난망(百世難忘) 백세가 지나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후로 응계는 입조하여 여러 차례 언관(言官)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 및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다. 당시, 그의 인품과 위모에 압도 당한 진사 한종유(韓從愈)는 다음 처럼 시를 읊었다.
수신정홀풍의름(垂紳正笏風儀凜) 바른 홀과 띠를 띠신 풍채와 위엄 늠연하시어
만조청자진숙기(滿朝靑紫盡肅忌) 만조 신료들이 모두 엄숙하며 조심하게 되었다네.
우리는 이 짧은 시구를 통해서 응계가 자신을 엄중하게 검속하는 한편 엄정하게 처신하여 조정의 대소 신료들에게 모범을 보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그는 탄핵에도 요동하지 않았으며 여러 신료들의 경외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응계를 청백리로 간파하여 크게 등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응계는 55세(1436)의 짧은 일기로 생을 마감하여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였다. 당시, 세종은 신료들에게 청백리를 천거하라고 하교하였는데, 신료들은 응계를 천거했다고 한다. 응계는 전처 소생으로 1녀가 있으며, 후취 소생으로 1남 2녀를 두었다. 「상향축문(常享祝文)」은 다음과 같다.
학수이정(學邃而精) 학문은 깊고도 정밀하셨으며
행준이결(行峻而潔) 행실은 준엄하고도 깨끗하셨습니다.
청풍아운(淸風雅韻) 맑은 풍채 아담한 운치는
백대긍식(百代矜式) 백대토록 모범이 되십니다. (金世鎬)
4. 남은 이야기
위에서 묵계 서원에 배향된 두 인물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 보았다. 보백당과 응계와 두 분 모두 당대 청백리로 조정과 향리에서 칭송을 받았던 분이다.
보백당은 조정에서 언관으로, 주상을 비롯한 대소 신료들의 정치 비리와 여러 가지 사회적 폐해를 묵인하지 않고 직언하며 개혁과 시정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평소 소신을 실천하여, 어진 목민관의 형상을 보여 주었다. 아울러 응계의 안동 통판 및 대구 부사 시절의 목민 일화는 매우 감동적이다. 이러한 행적은 앎과 생활의 일치를 보여 주는 실천 유학의 구체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고인들의 얼과 충정은 쉽사리 타협하고 현실 안주에 급급하며, 나약하고 무력한 우리에게 묵언의 교훈을 제시해 준다. 이 분들의 올곧은 생활 철학을 우리 일상 생활 지표로 설정하고 견실한 사회 건설을 위한 정신적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만휴정」 건립과 연관된 전설이다.
옛날, 고란 동리에 민씨 성을 가진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과객이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였다. 주인은 쾌히 승낙하고 길손을 맞아 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길손은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도대체 떠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럭저럭 길손이 민씨네 댁에서 식객 노릇을 하게 된 지 삼년이 지났다.
삼년이 되던 날, 비로소 길손은 짐을 꾸려 떠날 채비를 하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떠나야겠오,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소이다.”
“제가 귀 댁에 머물다 보니, 집이 낡아 새로 지어야 할 것 같은데 보답으로 집터 하나를 잡아 드리리이다.”
민씨는 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집터를 찾던 터에 매우 반가웠다.
이에 민씨는 길손을 따라 이리저리 길지를 찾아 헤매게 되었다.
그런데 그 길손이 한곳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더니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좋은 곳이긴 하다만…….’
민씨는 얼핏 그의 말을 낚아채고는 다그쳤다.
“이곳이 명당인가요?”
길손은 씁쓸하게 의향을 밝히었다.
“예, 매우 좋은 자리이긴 합니다만요, 아무래도 민씨네 복에는 합당치 않을 것 같아서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하여간 이곳은 명당이긴 하지만요, 민씨네 댁으로는 감당치 못할 것이니, 다른 곳을 찾아 보십시다요.”
“아니오, 나는 이곳에 집을 짓겠소이다.”
민씨는 자기가 보아도 앞이 훤하게 터진 곳이 명당인 것 같아 길손의 말을 듣지 않고 끝내 고집을 부리고 말았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그는 여기에 집을 짓고 말겠다고 내심을 다져 놓고는 길손의 충고를 깔아 뭉게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야 별 도리가 없겠구만요. 주인 나리의 소원이시니 쇤네는 어쩔 도리가 없구만요.”
이후, 길손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았다.
그후 민씨가 그 터에 주초를 놓고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하루는 텁수룩하고 모양새가 이상한 길손 한 놈이 지나가면서 중얼거리는게 아닌가.
“음……. 민씨가 김씨네 집을 짓고 있구만.”
민씨는 놈이 내뱉은 말에 마음이 조금 상하긴 했지만 한쪽 귀로 흘려 보내고는 연신 집을 지었다.
사흘 뒤에 또 한 놈이 지나가며 전처럼 중얼거렸다.
“김씨집을 짓는구먼.”
이제 막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할 판인데, 또 한 놈이 지나가면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 김씨집을 세우나 보다.”
“이놈, 별난 소릴 하고 자빠졌네. 이건 분명 나 민씨네 집이여. 뭐 김씨네 집을 짓는다고? 세상에 이런 발칙한 놈을 보았나?……”
민씨는 놈의 말도 무시하고 기와를 덮고 벽을 발랐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또 한 놈이 지나가며 똑같은 말을 내뱉는게 아닌가.
“허허……. 김씨네 집을 짓느라고 수고하는구만.”
그러나 민씨는 아예 듣은 척도 않고 결국 집을 완성하여 새집으로 이사해 살았다.
그런데 새집에 살기 시작한 민씨는 차츰 가산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더니 몇 해 못 가서 폭삭 망하고 말았다. 민씨는 어쩔 도리가 없어 결국 집을 팔기로 하였다.
그러나 망한 집터인지라, 아무도 집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그 소문을 들은 김씨 문중의 어떤 하인이 보백당에게 민씨네 집을 사라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건 안될 말이다. 망해 가는 집터를 샀다가 우리집도 망하면 어쩔려고!”
하인은 주인 나리에게 간곡히 졸랐다.
“그렇지 않습니다요. 그 집은 지을 때부터 이상한 일이 많았다고 합디다. 그 집을 사면 분명 부귀가 자손만대까지 이어져 번창해질 것입니다요.”
하인은 주인에게 더욱 간곡히 애원하였다.
그래서 보백당은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하인의 그처럼 간절히 조르는 바람에 마음이 동하여 민씨네 집을 사기로 다짐하였다.
그러나 막상 집을 사기는 샀지만 혼자서 두 집을 모두 쓸 수가 없어 우선 하인더러 그 집에 들어가 살도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며칠 뒤, 보백당 집에 불이 나서 집을 몽땅 태워 버리고 말았다.
보백당은 딱하게도 숟가락 하나 건지지 못한 채 알거지 신세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연유로 보백당은 하인에게 임시로 살게 한 민씨네 집으로 옮겨 가 살게 되었다.
보백당이 새집으로 옮기고 난 뒤로는 차차 살림이 늘기 시작했고, 자손들이 번창하여 문호가 활기를 띄게 되었고 벼슬길에 오른 자도 많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