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행했던 독특한 부정방지법의 하나가 분경(奔競) 금지라는 법이다.‘ 분추경리(奔趨競利)’라는말의준말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이익을 다투며 분주히 뛰어다닌다는 뜻인데, 인사 청탁 내지는 엽관 운동을 하러돌아다니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분경을 금지하기 위해 인사를 맡은 담당관이 되면 바로 사헌부에서 서리를 파견하여 그 집 대문 앞에 세운다. 국왕이 직접 고위 무관을 보내 적발하게 한적도 있었다.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동성은 8촌, 이성과 처가는 6촌, 이웃집사람이었다. 이조와 병조를 담당하는 승지와 재판관도 해당되었고, 대신이나대군들의 집이 분경 금지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했으랴 싶지만, 이 법은 꽤 엄히 시행하는 법 중의 하나였다. 대낮에 경조사로 방문하는 것까지 금지해 논란이 되기도 했고, 이 법 때문에 도무지 선비들을 만날 수가 없어 면접을 못하니 인재를 찾을 수도 없고 관원의 인물됨을 파악할 수도 없다는 불평이 쉬지 않고 들려올 정도였다.
그래서 사연도 많다. 대신급 인사가 변장을 하고 들어가다가 걸려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친척이라고 거짓말을 하다가 들키거나, 어두운 밤에 선물을 싸들고 몰래 들어가다 잡힌 사람도 있다. 서리가 체포하려고 하자 고관이 데리고 간 하인을 시켜 서리를 구타하고 자신은 도망했다가 적발된 사건도 있다. 이 제도를 이용해 사헌부 서리를 사칭하는 가짜 서리들도 종종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방문객의 선물을 뺏거나 협박을 해서 한 몫 뜯어내곤 했을 것이다.
물론 적발되고도 처벌받지 않는 경우가 있다. 특히 공신, 대신, 고관들이 많이 면죄되었다. 하지만 이런 집에 출입하다가 걸려 파면되고 귀양을 간 사람도 꽤 된다. 또 이런 사건으로 걸리면‘부표과명’이라고 해서 관료 명단의 이름 옆에 표를 해 두어, 처벌이 끝나도 인사 때마다 불이익을 당하거나 다시는 관료로 천거될 수 없도록 했다.
상피법과 거주연좌제
상피법(相避法)은 아들이 과거에 응시하면 아버지가 시험관이 될 수 없고, 친인척이 한 부서나 비슷한 지역에서 함께 근무할 수 없는 제도였다. 이 법도 당시 관료들에게는 매우 힘든 규정이었다. 상피법의 적용을 받는 관직은 대단히 많았다. 아무래도 조선시대에는 관료층이 협소하고, 특히 공신·대신 가문에서는 일가 친척들이 함께 관직에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인사 이동이 한번 있으면 상피법 때문에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또 이조와 병조의 관원들은 담당 관원의 족보를 일일이 검토해 임명해야 했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관료들이 신임 관료 후보자를 천거하면 이조와 병조에서 관직별로 3명의 후보자를 뽑았다. 이때 천거자의 비중, 천거자의 수 등이 선발에 많이 감안되었다. 이렇게 후보자 3명이 상신되면 왕이 그 중 한명의 이름 옆에 붉은 색 먹으로 점을 찍었다. 이것을‘낙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관료로 된 사람이 뇌물을 많이 먹거나 횡령을 하면 천거한 사람도 처벌을 받았다. 이것을 거주연좌제(擧主連坐制)라고 한다.
이러한 제도가 얼마나 제대로 시행되었겠느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렇지 않다. 이런 법들은 의외로 엄하고 꾸준하게 시행되었다. 굳이 따지면, 하급 관원에게 더 가혹했던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엄할 때는 꽤 엄했다고 할 수 있다.
언관 제도와 팽형
이런 불공평을 완화시키기 위해 권력자들을 향해 겨누어진 창이 있다. 바로 언관 제도이다. 언관 제도는 사실은 오늘날의 언론 제도와는 많이 다르다. 언관의 최대 사명은 국왕과 고위 관료층의 부정을 견제하는 것이다. 고관들은 웬만해서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언관들의 집요한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여간해서는 처벌받지 않지만, 여차하면 잘못될 수도 있으므로 이들은 상당한 스트레스와 긴장을 받았고, 권력 남용과 탐욕을 제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요즘은 볼 수 없는 특이한 제도라면 팽형(烹刑)이 있었다. 팽형이란 문자 그대로 가마솥에 넣어 삶아 죽이는 벌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이런 끔찍한 형을 진짜로 집행한 것은 아니고 부정을 저지른 관리를 빈 가마솥에 넣었다 꺼내는 의식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간주되어 바깥 출입도 못하고, 가족 이외의 사람은 만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망신과 모욕을 주고, 사회인으로서의 자격을 정지시키는 형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의외로 이 이야기는 널리 퍼져서“그거 정말 멋있는 형벌이었다.”“요즘에도 이런 벌을 시행해야 한다.”는 말을 간혹 듣는다. 그러나 죄송스럽게도 이 벌은 공식적으로 사용된 형벌이 아니다. 일제 시기 일본인이 쓴 책에 이런 벌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진위가 의심스럽고, 있었다 해도 어쩌다 한두 번 있었던 행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공식 문서에는 이런 기록이 없고 이런 처벌을 받았다는 관원도 없다.
유일하게 팽형을 명령했던 왕은 영조였다. 영조는 당쟁을 유발했다는 죄목으로 진짜로 팽형을 선고하고 궁중에서 집행할 테니 마당에 가마솥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었고, 균역법 시행에 반대하는 신하는 팽형에 처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영조는 워낙 쇼맨십이 탁월한 임금이라 본인도 정말로 시행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다.
서양보다 우월했던 동양의 법사상
팽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안타까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서양과 비교할 때, 동양의 역사와 문화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전통이 법제와 법사상이다. 서양에서는 거의 근대까지도 온갖 잔혹한 형벌을 사용했다. 화형 같은 것은 점잖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미 전국시대에 잔혹형을 금지시켰다. 형은 국가가 맡아 집행하고, 그렇기 때문에 잔혹하고 감정적인 형은 사용해서 안된다는 것이었다. 폭군으로 알려진 진시황 때도 이 원칙은 잘 지켜졌다.
그 후로도 거열(車裂,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이는 형벌), 능지처참 같은 형이 사용되긴 했지만, 극히 예외적인경우이고 법전에서는 이런 형벌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속에 담겨져 있는 절대적인 원칙은 처벌 방법은 합리적이어야 하며 지은 죄만큼만 적절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록을 보면 일벌백계나 시범 케이스, 본보기로 가중 처벌을 내리자든가 특이한 형을 사용하자는 상소들이 눈에 띄기는 한다. 그러나 실제 통치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아주 신중하게 다루었다. 범죄를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기발한 방법이나 엄한 처벌이 아니라 법과 약속된 형벌을 공정하고 정확하고 적절하게 집행하는 것이란 사실을 우리의 선조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