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평둘레길은 뭔가?
다 아시겠지만 둘레길이란
둘레를 걷기 좋게 조성한 길이니
은평둘레길은
은평구의 지역경계선을
걷기 좋게 조성한 길을 말한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은평구의 지역경계선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은평구는
경기도의 양주, 서울시의 마포,
서대문, 종로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은평둘레길우 이 경계선에 있는
봉산, 앵봉산, 북한산 자락, 백련산과
은평구내에 있는 이말산을 연결한
걷기 좋은 편안한 길이다.
24km, 5개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총 9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구간별 소요시간에 차이가 있으나
1구간에 대략 2시간 내외가 소요되며
구간의 들머리, 날머리에 전철역이나 버스정류장이 있어 편리하게
이용가능하다.
서울시내의 경계로 조성된
서울둘레길과
봉산, 앵봉산 구간에서 겹쳐지고
북한산의 산자락에 조성된
북한산 둘레길과 만나게 되어
은평둘레길을 걷다보면
안내표지판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 은평둘레길 2구간은
앵봉산의 능선길을 걷는 구간으로
서오릉녹지연결로에서
구파발역 2번출구까지의 3.8km이며
앵봉생태길로 명명되어 있으며
약 1시간 30분정도 소요되는데
해설을 곁드린 탐방에는
2시간에서 3시간가량의 시간이 걸린다.
둘레길 탐방의 시작은
만나는 곳의 교통 편의상 역방향인
구파발역에서 서오릉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 흥창사의 은언군 묘지유물
_ 은언군은 누구인가?
영조의 손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이복동생, 철종의 할아버지다.
_ 은언군의 묘지는 어디 있었나?
지금의 이말산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없어졌다.
왕실의 묘지였지만 없어졌다.
아마도 직접적으로 묘지를 보살필만한
후손들이 없었던 듯 하다.
_ 묘지에 있던 유물의 행방은?
은언군묘비는 합정역 절두산공원에,
은언군묘금표석은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야외에,
은언군신도비는?
원래의 내용에
다른 내용이 각인되어
이 곳 흥창사의 한켠에 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된대로
정조의 이복동생이었으나
살아생전에 궂은 풍파로 여러 고초를
겪었고 귀향지에서 죽음을 맞이히고도
죽어서는 무덤이 파헤쳐지고
위와 같이 석물들마져 뿔뿔히 흩어졌다.
그 중에도
흥창사에 있는 신도비는
비에 세겨진 내용까지 훼손되어
있다고 하니 비운의 왕족중에서도
몇손가릭에 꼽힐 정도이다.
후에 은언군의 손자인 강화도령이
철종에 올랐으나 은언군은
사후의 대접도 소홀했던 듯 하다.
* 청담사 추정터
은평뉴타운 개발시
부아산 청담사와 관련된 기와의 출토로
청담사터라 추정되는 곳이나
아직까지 정확한 위치로 인정받지는
못하는 곳이다.
절터의 규모,
북한산의 옛 이름인 부아산,
청담사가 각인된 기와의 출토 등이
화엄십찰의 하나라는
부아산 청담사로 추정하는 이유이다.
그럼
화엄십찰은 무엇인가?
조선조부터 발달한 체험중심의
선종인 조계종과는 대별되는
신라와 고려조의 숭불시대의
의상대사와 연관된 경전중심의
교종인 화엄종의 유명사찰을 말한다.
여기서 십찰이란
10개의 사찰의미보다는
많은 사찰을 의미하고 있다.
현재 있는 유명사찰로는
범어사, 해인사, 부석사,
화엄사 등이 있다.
현재는 사찰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는 곳으로는
서산 보원사지터가 있는데
그 터만으로도 큰 규모를 알 수 있다.
부아산 청담사지는
문헌으로만 전해지고
유물, 유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는데
더 정밀한 고증이 진행되야 하지만
조그만 꼬투리라도 발견된 곳이
바로 이 곳의 청담사 추정터이다.
* 서오릉은
조선왕궁의 서쪽에 있는 다섯 개의 능인
경릉, 창릉, 익릉, 명릉, 홍릉을 말한다.
(능의 이름까지 외우기는 어렵다)
현재 서오릉에는
세조의 첫째아들(덕종)_경릉,
세조의 들째아들 (예종)_창릉,
숙종_명릉,
숙종의 왕비_익릉,
세종의 며느리인 영조의 왕비_홍릉
이상 다섯 왕릉이 있으며
더하여
세자였으나 왕위에 못 오른
명종의 첫째아들의 순창원과
1970년대 이전하여 조성된 두개의 묘인
사도세자의 생모묘인 수경원과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 대빈묘가 있다.
※ 우허제 홍릉
고종과 명서황후의 능인 홍릉과는
한자어가 다른 영조의 정비의 능이다
(정성왕후)
영조의 사후 릉 조성을 위해
오른쪽으로 지우쳐 조성하였으나
영조가 현재의 동구릉에 조성되며
최초에 치우쳐진 상태로 있게 되었다.
영죄의 정비였으나 살아생전에
영조에게 지독히도 멀게 지냈다고 한다.
(사망시는 죽은 부인의 장례에도
말리는 대신들의 말도 안듣고
신하의 장례를 갔다고 한다)
그렇지만 본인의 묘는 정비의 옆에
가려했으나 손자인 정조는
영조의 능을 동구릉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