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望70년 원주중 시절
이 흥 우
내가 원주중학교를 졸업하고 모교를 방문한 일은 1994년 동문체육대회에 참가하고는 가볼 기회가 없다가 2023년 4월 27일 강원수필문학회 원주탐사 일행에 편승하여 단구동 박경리문학공원을 가는 길에 차창으로 모교를 지나쳐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1955년 4월에 입학을 했다. 당시 원주에는 공립 남자 중학교가 원주중학교 뿐이었다. 480명을 모집한다고 했는데, 입학을 하고 보니 360명 6학급이었다. 그 해에 공립 학성중학교가 설립되면서 2학급 120명이 분리되어 갔다고 한다. 나는 6반에 배정되었다. 판자로 지어진 단층교실에 창문은 철망에 아스 테이지를 입힌 대용유리였다. 신기한 것은 작은 깡통을 수없이 이어 만든 골함석 지붕이었다. 창문은 선배들이 구멍을 내서 만들어놓은 낙서들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출입문은 삐딱하니 일그러져서 닫히지 않아서 수업이 끝나고는 돌멩이로 받혀주어야 닫히곤 했다.
교실 뒤에는 높지 않은 둑이 있었고 그 넘어는 바로 비행장이었다.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소음이 심했지만 누구도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쉬는 시간이면 둑에 올라가 비행기 뜨고 내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에 빠지기도 했다. 입학하고 한 달 쯤 되었을까 체육시간에 평행봉 대를 세우는 작업을 했다. 몇 명씩 조를 만들어 평행봉 지주를 묻을 구덩이를 팠다. 단구동 끝자락학교 자갈땅은 1미터도 못 팠는데 물이 나왔다. 물과 함께 석유가 나왔다. 선생님들께서도 나오셔서 석유가 둥둥 뜨는 모습을 보시고는 군부대 주둔지라 그런 거라고 하셨다.
당시 학교에는 식수로 사용할 우물이 없었다. 펌프로 물을 푸는 우물이 있기는 해도 먹지는 못하고 청소 물로 사용하였다. 먹는 물은 학교 정문 바로 곁에 거기는 개운동 이었는데 민가 울안에 바가지로 떠먹는 샘물이 있어서 그 물을 이용했다. 그 댁 주인은 얼마나 착한 분들이었던지 하루 종일 아이들이 들락거려도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가끔은 물바가지를 닦아놓으시고 아이들을 격려도 해주셨다.
1955년은 원주읍이 원주시로 승격을 하는 해였다. 선생님들 마다 수업 첫 말씀은 “이제 제군들은 시민이 되는 거다.”로 시작을 하셨다. 그 해 9월 1일자로 시로 승격하였고 중앙동 읍사무소는 시청이 되어 축하행사가 이어졌다.
1956년에는 학교 건물을 신축하면서 건축회비를 내야했다. 한 분기 교납금과 비슷한 금액이었고 건축비를 마련하느라고 모두들 꽤나 힘들어했다. 많은 부분을 야전군 사령부(후에 1군 사령부)에서 도움을 주었다. 당시 야전군 사령관 백 선 엽 대장님께서는 수시로 학교에 오셔서 학교 건축 상황을 보고 가셨다. 학교에서는 고마운 백 장군님을 만나면 인사를 올리라고 가르쳐주셨다. 시내에서 더러 장군님께 힘차게 거수경례를 올리면 장군님께서는 왕사탕을 주시기도 하면서 반겨주셨다.
시멘트벽돌 건물 12실이 완공되면서 3학년이 되어 2층 새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그 해에는 개운동 도립원주병원 부지에 원주고등학교 신축공사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2학년 때는 학교 뒤편으로 몰려나가 봉산천에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상수도 취수장에서 물놀이를 즐기기도 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
학교 정문 좌우로는 미나리 밭이 널게 있었고, 후문 쪽에는 물레방아가 하루 종일 돌면서 곡식을 찧고 있었다. 학교에서 나와 시내방향으로 가다가는 금붕어양어장이 있어서 좋은 구경거리였다. 당시에는 밀차로 흙을 실어 날라서 논을 메워서 남부시장을 짓는 등 근처에 공사장이 많아서 비포장의 좁은 길이 등하교시에는 꽉 메워지는 학생들 행렬로 장관을 이루었다.
당시엔 중앙시장도 대부분 판잣집이었는데 지붕은 깡통을 펼쳐서 이어 만든 골함석이거나 두꺼운 종이에 콜타르를 입혀 만든 루핀 지붕이었다. 그게 원인이었는지 중앙시장에 화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지붕재료를 만드는 골함석 공장과 드럼통을 오려서 냄비며 프라이팬 등을 만드는 공장, 철사로 석쇠를 만드는 집, 염색공장 들이 봉산천변을 이어가며 있었다. 나 역시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에는 석쇠도 엮고, 프라이팬도 만들고 군용차 세차도하면서 학비며 용돈을 벌기도 했는데 지금도 그 기능을 가끔씩 잘 사용하고 있다.
2025년 9월 1일이면 원주 시 승격 70주년이 되니 이제 2년 남짓 남았다. 망70이라 할만하다. 단구동 거리를 걸어보니 방향조차 가늠할 수가 없게 변하였다. 잘 짜인 시가지며 반듯한 건물과 간판들, 이게 우리나라의 발전상이며 내 기억이 바로 현대역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두면 당시 원주를 이해하는 데 깃털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박경리문학공원을 둘러보았다. 선생님의 방대한 집필에 대한 열정이 신비스러웠고, 평소에 정갈한 생활모습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었다.
첫댓글 느낌이 선연합니다. 제가 1960년 4월 입학해 12회로 졸업한 인연으로 제암 선배님의 회고에 공감이 큽니다. 잘 읽었습니다.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