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비극의 무대가 되었던 산호초의 섬 괌도(島). 1975년 1월 26일, 이 섬에서 SGI는 발족했으며, ‘세계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역사적인 이 회의는 멀리 아프리카,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 등 세계 51개국 1개 지역 158명의 대표가 참석했고, 그 가운데 SGI의 발족과 이케다 SGI회장의 취임이 결정되었다. 이날 취임식에서 이케다 SGI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이 회의는 작은 회의일지도 모릅니다. 또 각국에서는 이름도 없는 민중의 모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수백 년 후에는 오늘의 이 회합이 역사에 찬연히 빛나고 여러분들의 이름은 인류 역사상에는 물론, 불법 광선유포의 역사에도 엄연히 각인되어 가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어쨌든 지평선 저편에 대성인 불법의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부디 자신만의 꽃을 피우려는 마음이 아니라 전세계에 평화라는 묘법의 씨앗을 뿌려 그 존귀한 일생을 마무리해 주세요.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호소했던 것이다. 이렇게 SGI의 스크럼 속에서 세계의 동지가 전진할 것을 맹세한 1월 26일은 SGI가족의 ‘원점의 날’로서 이후 ‘SGI의 날’로 제정되었다.
SGI는 니치렌대성인의 불법을 바탕으로 평화, 문화, 교육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그를 위한 각종 활동을 위해 필요한 연계, 조정을 꾀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특히 지난 95년에는 SGI발족 20주년을 기념하여 ‘SGI헌장’을 새롭게 발표하고, SGI이념과 행동규범을 더욱 뚜렷이 명문화했다. 여기에서는 한없는 ‘생명존엄’을 설한 니치렌대성인 불법의 인간주의 철학을 기초해 세계시민의 이념, 관용정신, 인권존중을 드높이 내걸고 인류적 과제에 함께 도전, 공헌해 갈 것을 결의했다.
지금 SGI의 벗은 이 ‘불멸의 지침’을 가슴에 새기고 각국에서 사회발전, 시민의 행복과 번영, 세계평화를 위한 활동에 매진해 가고 있고, 동시에 이 우정의 네트워크는 세계로 크게 넓혀지고 있다. SGI회장은 1983년 이후 매년 이날을 기념한 ‘평화제언’을 발표, 99년 현재 24회째에 이르고 있다. 민중 차원의 평화, 문화, 교육운동의 소중함을 호소하고 군축(軍縮)과 부전(不戰), 또 유엔 강화와 지원 등 여러 각도에서 구체적인 어필을 계속하고 있다. 이 ‘SGI의 날’을 맞을 때마다 각국의 SGI의 벗은 평화와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21C 용자가 될 것을 결의하고 있다.
대성인 성탄의 날 (2월16일)
니치렌(日蓮)대성인의 성탄은 인류사를 뒤덮은 커다란 어둠을 깨뜨리는 태양의 출현이자, 일체중생에게 있어서는 “난가치우(難可値遇)”<수량품>의 ‘부목(浮木)’과의 만남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대성인은 언제나 자신의 출생을 “해변의 전다라의 자식이니라”(어서 891쪽) “니치렌은 중앙지방, 도읍의 자도 아니며, 변두리 지방의 장군 등의 자식도 아니고 원지의 자인 백성의 자식입니다만”(어서 1332쪽)이라고 하시듯 ‘시동범부(示同凡夫)’의 모습으로 서민의 행복을 위해 태어나신 점을 거듭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南無妙法蓮華經’ 의 칠문자의 불법이 민중의 불법이라고 하는 니치렌대성인의 대확신을 알 수 있다. 민중 속에서 태어나 민중의 일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민중과 함께 나아가고, 또 무엇보다도 일체중생의 모든 고(苦)를 자기 한 사람의 고(苦)로 하시고 민중의 행복을 기원하신 대성인이셨던 것이다. 니치렌대성인은 1222년 2월 16일 아와의 고미나토(小溱)에서 태어나셨다. 그 본지(本地)는 구원원초자수용신(久遠元初自受用身)이며, 외용(外用)은 상행보살의 재탄(再誕)이었던 것이다.
보통의 인간은 자신의 높은 지위를 내세우고 싶어 한다. 하지만 대성인은 서민 출신임을 명쾌히 밝히셨는데 이는 그대로 대성인의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외형이나 사회적인 평가에 사로잡히지 않는 내실의 거대함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대성인은 평생을 묘법의 광명으로 일체중생의 무명, 번뇌의 어둠을 비추는 민중구제의 싸움에서 일보도 물러섬이 없었다. 생명의 어둠, 사회의 어둠, 말법의 어둠이 너무나도 깊고, 그 어둠에서 발산되는 무수한 마성이 법화경의 행자를 뒤덮을지라도 말이다. 대성인은 오로지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온갖 난을 참고 견디며 홍교의 파동을 일으키셨다. “후(後)의 오백세(五百歲) 중에 염부제에 광선유포”(약왕품)를 목표로 하여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가셨던 것이다.
결론지어 말하면 대성인의 대원(大願)은 오로지 법화홍통에 있으셨다. 또 대성인은 말법만년의 민중구제를 위해 대어본존을 건립하는 출세의 본회를 끝까지 완수하셨다. 대성인 성탄의 날을 맞으며 우리들은 이 대성인의 민중구제의 마음, 광포의 정열, 홍교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세계광포에 매진하는 존귀한 대성인 직계의 문하 SGI멤버임을 긍지로 삼아 더욱 전진해 가고자 한다.
광선유포 기념의 날 (3월16일)
“오늘 나는 청년부 제군들에게 부탁해두고 싶다. 미래는 제군들에게 맡긴다. 부탁한다. 광선유포를!” 1958년 3월 16일, 총본산에 약 6천 명의 남녀 청년부원이 모여서 도다 제2대회장, 이케다 당시 참모실장과 함께 광선유포를 맹세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날은 바로 도다회장으로부터 이케다실장을 비롯한 청년들에게 광포의 일체가 맡겨진 광선유포 기념의 날이며, 후계(後繼) 맹서의 날로 되었다. 즉 도다회장은 모든 원업을 성취하고 후사(後事)의 일체를 청년에게 맡기려고 했던 것이다.
생애 원업으로 내건 75만 세대의 절복 을 달성했으며 총본산 외호의 정성을 다한 법화본문강당도 낙경했다. 또한 때마침 3월 1일부터 한 달 동안 20만 명이 넘는 기념 총등산이 거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의 일은 전부 끝났다. 언제 죽어도 좋다. 다이사쿠, 뒤를 부탁한다”는 은사의 의연한 말은 이케다청년의 가슴 오저에 깊이 새겨졌다. 도다선생님은 전년인 1957년부터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3월 한 달 간을 총본산에 머무르고 계셨다. 단 지휘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30세의 이케다실장이 총책임자로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날 보행조차 하기 어려운 몸을 이끌고 3월 16일의 기념식전에 참석하신 도다선생님과 그의 팔을 부추기며 함께 자리한 청년회장의 깊은 사제의 모습은 실로 감동 그 자체였다. 이때 청년들 앞에 선 도다선생님은 “우리들은 종교계의 왕자이다”라고 전생명력을 짜내어 사자후하셨다.
실로 이 3월 16일의 식전을 통하여 스승이신 도다선생님의 생명과 6천 명의 청년부원의 생명이 광선유포라는 지표를 향하여 하나로 명합해서 회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광포 원정을 향해가는 우리들이 영원히 계승해야 할 중요한 정신은 도다선생님이 자신의 전생명력으로 청년들을 격려하고 광선유포의 혼을 불어 넣으셨던 일점이다. 이는 광선유포의 혼이 가득한 진정한 용자만이 인간 대 인간, 생명 대 생명의 차원으로 인재를 육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회의 혈맥은 후계의 인재가 얼마나 육성되는가이다. 3월 16일은 도다선생님으로부터 이케다선생님에게 광선유포의 바톤이 전해지는 날임과 동시에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하루하루가 영원한 ‘출발의 날’ ‘희망의 날’로서 광포를 향한 승리의 행진을 개시해 가야겠다.
도다 2대회장 서거일 (4월 2일)
‘스승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의 기어’를 맞추어 간다. 진지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행동해 간다. 거기에 힘이 솟는다. 한없는 승리의 길을 열어갈 수가 있다. 말하자면 ‘4. 2’란 바로 그 ‘사제공전(師弟共戰)’의 맹세의 날이었던 것이다. 1958년 3.16의 광포기념식전을 마치고, 광선유포의 후사(後事)의 일체를 이케다선생님을 비롯한 청년들에게 부탁한 도다회장은 총본산 리쿄보(理境坊)에서 법화본문대강당 낙경기념 총등산의 지휘를 계속하셨다. 전시하의 옥중생활로 건강을 해친 데다 전후의 학회재건 후에도 홀로 일어서시어 광포의 개척에 무리를 거듭해 오신 탓에 체력이 매우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광포에 대한 불타는 듯한 정열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으며, 소모된 체력을 쥐어짜듯이 하나하나 기백을 담아 지휘해 갔다. 병세가 악화된 것은 3월 27일, 당시 의식을 잃을 정도로 몸이 쇠약했는데도 불구하고 총등산이 끝나기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산하지 않겠다며 총본산 외호의 결의가 강했던 도다선생님이셨다. “앞으로 2, 3일이면 끝납니다. 아무 사고도 없습니다. 안심해 주십시오. 최고간부도 잇따라 오고 있습니다”라고 이케다참모실장이 보고했던 것은 3월 29일이었다. “그런가. 내가 죽으면 안밖으로 모두, 여러가지 준동이 있을 것이다. 기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추격의 손을 늦추어서는 안된다”라고 도다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며칠 후인 4월 2일 저녁, 학회본부에서 청년부 수뇌의 연락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지금 막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비보가 아드님으로부터 전해졌다. 회장 취임으로부터 약 7년. 은사는 너무나도 짧은 생애의 막을 내렸지만 후계를 육성하고, 75만 세대의 광선유포를 달성한, 한 순간의 틈도 없었던, 하루가 1년 10년에 필적하는 대투쟁의 날들이었다.
특히 보신(保身)을 위해 정법정의를 왜곡하고 종교의 권위권력으로 민중을 지배하려는 종문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간파하고 엄하게 탄핵하고 온몸을 던져 싸우셨다. 악과의 싸움이 없으면 정법을 영원히 유포할 수 없다는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추격의 손을 늦추지 말라!”고 한 최후의 유언은 깊은 의미가 있으며 광선유포가 결국 사악과의 끊임없는 투쟁이라는 준엄함을 나타낸 것이다. 4월 2일을 맞아 광포를 향한 불석신명의 자세로 정의의 대도를 나아갑시다.
입종 선언의 날 (4월 28일)
니치렌대성인께서는 성수(聖壽) 32세 때인 1253년 4월 28일 정오, 아와지방(지금의 지바현)의 세이초사(淸澄寺)의 군중 앞에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라고 부르시고 입종(立宗)을 선언하셨다. 또 이와 함께 ‘염불무간(念佛無間)’ ‘선천마(禪天魔)’ ‘진언망국(眞言亡國)’ ‘율국적(律國賊)’이라는 그 유명한 4개 격언을 설하셨다. 즉 말법의 지금에는 오직 남묘호렌게쿄이외의 가르침말고는 아무도 구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믿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염불이나 선(禪) 등 그릇된 종교를 믿고 있는 데서, 사람들이 불행해지고 사회에 재난을 불러일으키는 마의 작용이 왕성하다고 하셨던 것이다. 12세 때부터 출가하여 수학을 하셨던 대성인께서는 줄곧, “불교는 석존 한 사람의 가르침에서 출발을 하였고 올바른 가르침은 하나밖에 없을텐데 어째서 여러 종파로 나뉘어져 있는 것일까. 또 어느 종파든 나라의 평화와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을텐데 불행과 재난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라는 의문을 지니고 계셨다. 더욱이 당시에는 지진이나 큰 화재, 유행병과 굶주림으로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고, 여러 종파가 난립하여 종교의 정사(正邪) 또한 판단할 수 없어 불행의 고뇌에 미혹되어 있었던 때였다.
대성인은 오랜 세월 각지의 큰 절을 찾아다니며 불교를 비롯한 일체의 경론을 독파, 이윽고 말법에는 석존의 가르침이 힘을 잃고 도리어 그릇된 가르침으로 되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묘호렌게쿄야말로 말법 유일의 정법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대성인은 대난이 다투어 일어나는 것을 각오한 채, 고향에 있는 세이초사에서 입종을 선언하셨다. 그때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니치렌(日蓮)’이라고 개명하셨다. “말법에 올바른 가르침을 넓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난이 있다”라는 이 법화경의 예언대로 대성인의 일생은 대난에 이은 대난의 연속이었다. 결코 관념의 행(行)이 아니라 현실 사회의 거친 파도 속에 뛰 어들어가 법을 설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대화를 거듭하는, 광포 확대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렇게 우리가 신심할 수 있는 것도 이 대성인의 대난과의 싸움이 있었기 때문임을 잊지말고 보은사덕의 마음으로 광포확대해 갔으면 합니다.
창가학회의 날 (5월 3일)
모든 일에는 원점이 있다. 역사에도 원점이 있듯 학회에도 원점이 있다. 학회의 원점은 바로 ‘창가학회의 날’이다. 학회는 이날을 기해 광포를 향한 전진을 개시했고 매년 5월 3일을 맞을 때마다 새로운 결의로 돌아가 커다란 비약을 거듭해 왔다. 이른바 5월 3일은 학회의 ‘설날’이며 원점의 날인 것이다. 5월 3일이 ‘창가학회의 날’로 된 연원은 1951년 바로 이날에 도다선생님이 제2대회장으로 취임하고 또 1960년 같은 날, 이케다 선생님이 제3대회장으로 취임한 것에 유래하고 있다. 도다 제2대회장 취임 당시 회원수는 전시중 군정부의 탄압에 의해 모두 퇴전한 상태여서, 불과 3천 명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도다선생님은 이 추 대식에서 75만 세대의 절복을 선언했던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75만 세대의 절복은 내손으로 하겠습니다. 만약 나의 이 염원이 살아있는 동안 달성되지 못하면 나의 장례식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유해는 시나가와의 강물에 던져주기 바랍니다”라고.
참가자 모두 75만 세대의 달성은 꿈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지만 도다선생님은 홀로 광포에 일어서서 서원의 쟁취를 위해 온힘을 다해 끝까지 싸우셨다. 그 불석신명의 실천을 통해 도다선생님의 불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동지의 가슴에 불붙어 번져나갔고, 드디어 1957년 12월, 불과 6년 반 만에 75만 세대를 달성해낸 것이다. 그리고 도다선생님이 서거하신 2년 후, 이케다선생님이 3대회장에 취임한다. “비록 젊지만 오늘부터 도다문하생을 대표하여 화의의 광선유포를 목표로 일보전진을 위한 지휘를 하겠습니다”라는 일성(一聲)후, 은사 도다회장의 7주기까지 3백만 세대의 절복 달성을 맹세한다. 이케다 제3대회장의 이 사자후에 동지는 서로 호응하여 노도와 같은 전진을 개시하였으며 이미 1962년 11월에는 3백만 세대를 달성했다. 현재 그 광포의 조류는 세계 180개국 지역에 이른다.
그 원동력이 바로 5월 3일의 제2대, 3대회장의 서원에 있었고 또한 우리들 학회원이 이날을 맞이할 때마다 결의를 새롭게 하여 광선유포의 크나큰 마디로 삼아 전진해 왔던 것이다. 니치렌대성인 정신의 근본은 세계광선유포이며 그 광선유포 서원의 날을 ‘창가학회의 날’로 정한 의의는 대단히 깊다 하겠다. 우리들은 광선유포라는 대목적을 자각한 지용의 보살로서 공전(共戰)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자 한다.
이케다 선생님 한국방문의 날(5월 18일) 1998년 5월 18일 한국광포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이케다 선생님의 SGI한국 불교회의 첫 방문이었다. 한국광포사 30년 동안 한국의 많은 벗들이 염원하던 일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케다 선생님은 불교회 본부에 들어서자마자 만나서 무척 반갑습니다. 아주 훌륭한 회관입니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로비에는 선생님 환영합니다. 라는 내용의 일본어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이케다 선생님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곧이어 간디상의 제막식. 이 간디상은 이케다 선생님이 식자로부터 기증 받은 것이었다. 그것을 우리 불교회에 기증해 주셨고, 말씀을 통하여 평화를 위해 비폭력으로 사운 간디같이 여러분도 평화를 위해 비폭력으로 사운 간디같이 여러분도 평화를 위해 끝까지 걷는 사람이 되도록 당부했다. 잠시 뒤 드디어 한국의 멤버들과의 기념 근행회가 실시되었고, 그곳에 참석한 멤버들은 가슴이 벅차왔다. 지금가지 비디오로 밖에는 뵐 수 없었던 선생님을 뵙고 또, 같이 할 수 있었기에. 선생님은 근행에 이은 인사에서 제주도에 「한일우호연수도장」의 건립과 후쿠오카 연수도장에 「한일우호의 비」건립 그리고 지부이상간부의 이름을 일본과 미국과 창가대학에 영원히 남겨 현창할 것을 제안했고, 멤버들은 뜨거운 박수로서 대답했다. 그리고 이케다 선생님의 진심 어린 따뜻한 배려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멤버들은 기뻐했다. 그리고 결의했다. 반드시 성장한 모습으로 스승게 보답하겠다고. 그리고 그렇게 결의한대로 우리는 달려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스승과 함께 달려가야 한다. 이날 5월 18일 스승과의 빛나는 역사를 새겼던 날 우리는 이 날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잊지 않도록 행동으로서 도전해야 할 것이다. 한국 1백만 회원의 30여년만의 숙원을 이루었던 날을 기념하며....
부인부의 날 (5월 21일)
영원하여라! 5월 21일. ‘한국 부인부의 날’. 잊을 수 없는 1990년 5월 21일. 바로 이날 한국의 부인부 대표들과 스승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만남이야말로 한국 부인부의 ‘복운의 개화’를 여는 멋진 시작의 날이었다. 1990년 5월 17일, 한국의 부인부 대표 13명이 처음으로 SGI연수차 도일(渡日)하게 되었다. 이 연수회에서 일행은 이케다선생님을 예정에도 없이 성교신문사에서 만나뵙게 된 것이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부인부를 쭉 둘러보시며 “무궁화처럼 무궁하고 끈기있게 인내심 강하게 차례차례 꽃을 피워 가세요”라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부인부 대표는 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선생님, 오늘 5월 21일을 한국 부인부의 날로 정해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다. 한국 부인부와 선생님과의 만남의 의의를 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케다선생님께서는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이를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그리고 다시 “한국에는 꼭 가겠습니다”라고 단단히 약속해 주셨던 것이다. 이날을 원점으로 해마다 더욱 깊은 마디를 새기면서 부인부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지지 않고 현명하게 헤쳐 나가며 사제불이의 길을 전진해 올 수 있었다. 90년 부인부의 날 제정 이후 이케다선생님은 90년과 98년, 99년 세 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해 주셨다. 그 눈부신 역사 속에서 부인부의 제목과 투쟁, 활약은 진정 광포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로 인해 한국광포 본문의 시대도 활짝 열리게 되었다고 확신한다.
마키구치 초대회장 탄신일 (6월 6일)
교육은 미래를 비추는 광원이다. 인간의 혼을 해방시키고 진실을 간파하는 영지의 눈을 빛나게 해가는 원천이다. 교육의 흥륭이야말로 세계를 연결하는 희망의 가교이며 평화를 구축하는 확실한 기반이라 할 것이다. 1872년 6월 6일, 위대한 교육의 길에 전혼을 기울여 인류보편의 지혜를 개발해 가는 불법유포에 생애를 건 마키구치 초대회장이 탄생하셨다. 마키구치선생님의 인생은 오로지 민중의 행복과 사회번영을 염원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좋다. 그 뜨거운 마음은 '인생지리학'에도 '창가교육학체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마키구치선생님이 만인의 행복과 항구평화 달성에 대한 방도를 명시하신 니치렌대성인의 입정안국의 주장과 행동에 공명하여 불법세계에 들어선 것도 그 인생의 필연의 궤적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마키구치선생님은 자신에 대한 세간의 훼예포폄(毁譽褒貶)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 민중을 위해 말해야 할 것은 엄연히 주장하고 악에 대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교육을 억압하려는 권력의 개입에도 단호하게 끝까지 싸웠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셨던 선생님이셨다. 특히 마키구치선생님의 행동이 불굴의 정신, 정의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시중의 횡포한 국가 권력에 굴하지 않고 불법의 정의, 인간주의, 평화주의를 관철하시면서 옥중에서 순교하신 사실 때문이다. 민중의 행복과 세계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실천해 가는 것이야말로 대성인의 정신을 몸으로 지키는 신앙자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마키구치선생님의 위대함은 ‘후배를 자기이상으로’ ‘젊은 사람을 소중히’라는 진심어린 마음과, ‘사회 각 방면의 막힘의 근원은 전부 인재의 결핍에 귀착한다’라고 하여 ‘인재’에 일체의 초점을 맞추신 것에 있었다. 그뿐 아니라 무엇보다 마키구치선생님은 ‘청년을 원기있게’ 만드는 대지도자였고, “청년들이 올곧게 정정당당히 도리 앞에서는 조금도 가차없이 서로 논의한다는 것은 통쾌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원점은 언제나 아이들을 위해! 아동을 위해! 라는 근본의 일점에 철저한 진정한 교육자였다. 우리들도 초대회장 마키구치선생님의 뒤를 이어 ‘불굴의 사제의 길’ ‘신념의 용자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야겠다.
도다 2대회장 출옥 기념일 (7월 3일)
7월 3일은 도다 제2대회장이 출옥한 날로 전후 학회재건의 제일보를 내디딘 역사적인 날이다. 여기에는 학회의 정의와 개가(凱歌)의 증명이 각인되어 있다. 1945년 7월 3일 오후 7시. 도쿄 나가노의 도요타마 형무소의 철문이 열리고 도다 제2대회장이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출옥한다. 만 2년 동안의 옥중생활로 영양실조, 천식, 심장병, 당뇨병 등을 앓고 있었지만 출옥한 다음 날부터 도다선생님은 학회재건을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도다선생님이 출옥하시고 12년 후인 1957년 7월 3일, 75만 세대의 달성을 눈앞에 둔 바로 그때, 학회의 전진을 방해하는 책모가 이번에는 제3대회장인 이케다 청년실장에게 엄습하는 사건이 발발하였다. 이때 홋카이도에서 탄로문제의 해결에 맞서던 이케다실장은 갑작스런 소환으로 오사카로 향하게 된다. 도중에 갈아타기 위해 하네다공항에 내렸을 때, 도다회장은 “죽어서는 안된다. 다이사쿠. 혹시라도, 혹시라도 자네가 죽는 일이 생긴다면 나도 곧바로 달려가 자네 위에 엎어져 함께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깊고 숭고한 스승의 자애였다. 7월 3일 오후 7시. 오사카부경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케다선생님을 선거법 위반 용의자로 체포, 투옥시켰다. 그날은 도다선생님이 출옥했던 날과 똑같았으며 같은 시각이었던 것이다.
이 오사카사건은 그해 4월에 행해진 참의원 오사카 지방구의 보궐선거 때, 선거위반의 용의자가 나온 것에 연결하여, 당시 오사카선거의 최고책임자인 이케다선생님의 지시 아래 호별방문과 매수라는 위법행위가 이루어졌다는 혐의였다. 물론 이것은 터무니없는 권력의 획책이었고, 민중궐기의 학회 약진을 저지하려는 책동이었던 것이다. 제자를 지키려는 도다선생님과 스승을 위해 죽음마저도 각오한 이케다선생님의 권력의 마성에 굴하지 않는 장절한 투쟁의 일념은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대역전의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
7월 17일, 출소하자마자 이케다선생님은 오사카 대회에 참석하여 “최후에는 끝까지 신심을 한 사람이, 대어본존을 끝까지 수지한 사람이, 또 올바른 불법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나아갑시다”라고 당당히 외쳤다. 그리고 4년 반인 1962년 1월 25일, 사필귀정으로 무죄 판결이 내려져, 후에 이케다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출옥과 입옥의 날에 사제 있노라” “7월 3일을 잊지 않으리, 후지를 우러러보다”라고.
여자부의 날 (7월 20일)
1988년 요코하마에서 제1회 SGI세계청년연수회가 7월 18일부터 7월 21일까지 개최되었다. 전세계 50여 개국으로부터 약 4백 여 명의 청년 리더들이 참석. 여기에는 한국 대표로 남자부 6명, 여자부 5명도 함께 참가하였다. 이에 앞서 여자부는 4월 20일부터 올림픽 개최 전날인 9월 16일까지의 ‘150일 도전’을 실시, 반드시 이케다선생님과 함께하는 올림픽을 만들자고 결의하고 뜨거운 일념으로 창제해 갔다. 역사적인 7월 20일. 요코하마 항구와 푸른 바다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가나가와 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회 SGI세계청년우호대회에서 선생님은 세계의 청년들에게 “신심에 있어서는 고락(苦樂)은 표리일체(表裏一體)이며 노고 속에만이 유락은 있습니다.(중략)
신심의 목적은 중생소유락에 있고 묘법의 공덕은 절대적으로 큽니다. 신심에 힘써갈 때 자유자재로 우주를 유희하는 듯한 무량의 행복의 대경애를 쌓아 올릴 수 있습니다. 지금의 노고는 그렇게 되기 위한 단련입니다. 아무쪼록 제군은 젊은 날의 단련을 철저하게 하여 광포의 대작업에 최후까지 매진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라고 격려해 주셨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7개국에서의 축하공연이 펼쳐졌는데, 갑자기 선생님으로부터 한국 멤버에게 예정에도 없었던 노래를 부르라는 전언이 있었다. 한국 멤버는 올림픽 때 선생님을 반드시 모시고 싶다는 강한 염원을 담아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그때 선생님은 노래를 다 들으신 후, 일어서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노래 참 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반드시 가겠습니다. 수년내에 가겠습니다. 길은 열려져 있습니다. 확실히 열려져 있습니다. 올림픽 때 가려고 했습니다만, 못 가서 미안합니다. 끝나고 천천히 가겠습니다. 힘내세요!”라고. 이날 선생님과의 잊지 못할 만남을 그간의 투쟁과 함께 역사에 길이 남기기 위해 선생님께 ‘여자부의 날’로 해주실 것을 말씀드리자 쾌히 승낙해 주셨고, 이렇게 해서 ‘한국 여자부의 날’이 제정되었던 것이다. 매년 여자부는 7월 20일을 각자의 원점으로 새기면서 스승을 이 땅에 모시는 불멸의 역사를 만들자며 도전해 왔다. ‘함께 삼세를 위해, 행복을 위해, 오늘도 명랑하게’ 한국 여자부는 청춘시대의 빛나는 행복의 토대를 오늘도 만들어가고 있다.
남자부의 날 (8월 18일)
한국 남자부 대표 12명은 1986년 8월 16일부터 8월 22일까지 6박 7일 동안 SGI에서 실시한 아시아 청년부연수회에 한국을 대표하여 참가하고 있었다. 이 기간중 8월 17일에서 19일까지는 한국 광포 역사상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이케다선생님의 부름으로 가루이자와(輕井澤)의 나가노(長野)연수도장에서 직접 스승의 엄애의 지도 아래 연수를 받게 되었던, 역사적인 기간이었던 것이다.
이 연수회에서 이케다선생님은 “오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과거 원원겁으로부터의 원겸어업(願兼於業)에 의한 것이다. 참으로 불가사의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불법사관(佛法史觀)에 입각한 한국 광포에 대한 의지와 장래 이루어야 할 사명에 대해 피력해 주셨다. 또 ‘선시초(撰時抄)’를 인용, 앞으로 한국 남자부들이 해야 할 사명에 대해서도 명확히 지도해 주셨다. 그뿐 아니라 한국 남자부의 영원한 추억과 불멸의 신심의 심지를 심어주기 위해 체조, 탁구대회, 자전거 산책, 모노카 타기, 야간 불꽃놀이 등 잊을 수 없는 황금의 추억까지 새겨 주셨다.
한국 남자부는 이러한 스승과의 만남을 소중히 하고, 남자부들의 성장의 마디로 삼기 위해 8월 18일을 ‘남자부의 날’로 이케다선생님께 청원하여 제정받게 되었다. 이날을 계기로 남자부는 스승과의 원점을 다시 한번 새기며 영원한 사제의 도를 구축하는 광포후계의 리더로서의 성장을 결의할 수 있었다. 지난 98년 8월 16일. 한국의 남자부는 이케다선생님으로부터 ‘한국 남자부의 날’ 12주년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거기에서 스승은 “먼저 자기 자신부터 - 이것이 바로 ‘홀로 서는 정신’입니다. 청년시대는 단련의 시대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건설을 목표로, 모든 일체를 성장의 양식으로 삼으면서 마음껏 ‘힘’을 키워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다.
21세기 불법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된 지금 “싸우는 이상 승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싸움의 선진(先陣)은 청년이 끊는 수밖에 없다. 정의의 민중세력의 전진을 저해하려는 권력의 마성과는 생명을 걸고 싸운다. 단호히 이긴다.” 이것이야말로 초대, 2대, 3대에 걸친 역대회장의 정신이며 한국 남자부가 계승해야 할 학회의 혼이다. 홀로 서는 사자왕의 정신으로 우뚝선 광포의 인재의 성을 남자부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으로 구축해야겠다.
장년부의 날 (8월 24일)
8월 24일은 이케다선생님이 입신하신 날이다. 전후(戰後) 새로운 철학에 목말라 하던 19세의 이케다 청년은 1947년 8월 14일 밤, 친구의 권유로 도다선생님이 참석한 좌담회에 함께하게 된다. 여기서 이케다 청년은 ‘올바른 인생이란’‘진정한 애국자란’‘남묘호렌게쿄란’ ‘천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질문한다. 이에 대한 도다선생님의 진실한 답변을 듣고 열흘 후인 8월 24일 입신하게 된다. (인간혁명 ‘지용’ 중에서)
이 이케다선생님의 입신기념일이 장년부의 날로 된 것은, 1966년 3월 5일 광선유포의 총마무리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는 장년부의 사명감으로 이케다선생님에 의해 결정,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장년부는 항상 이케다선생님과 함께 세계광포에 매진해 간다는 스스로의 자각과 자세로, 조직의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자청해 왔다.
또 격투에 이은 격투를 실천한 역대회장의 사신홍법의 정신을 되살려 사제공전(師弟共戰)의 결의를 깊게 하고 있기도 하다. 확실히 장년부는 불교회의 기둥이며 사회의 기둥인 동시에 가정의 기둥이다. 그리고 사회 제일선에서 광포의 추진을 짊어지고 있는 책임세력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장년부의 존재는 참으로 중요하며, 그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다. 각부에서 사제공전에 대해 강조하고 있지만, 장년부의 입장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먼저 어서를 근본으로 어서의 정신에 입각해 이케다선생님의 지도를 배우고, 그것을 통하여 불법 그 자체를, 또 광선유포의 본연의 자세를,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삶의 자세라는 것을 철저하게 연찬하고 심화시켜가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 다음에는 배운 것들을 학회활동을 통해 현장에서 살리고 가정, 사회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옮겨가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구의의 삼업으로 어서와 SGI회장의 지도를 실천해 가는 것을 제일로 한다. 그 결과로써 광포확대의 구체적인 실증, 인간혁명의 실증, 또 직장에서의 신뢰라든가, 일가화락의 가정을 구축한다는 등의 갖가지 실증을 나타내 간다. 실증을 낸 몫만큼이 사제공전의 실질적인 성과라고 할 것이다. 장년부의 날을 맞을 때마다 광포에 전 책임감으로 솔선의 행동을 개시해갔으면 한다.
SGI한국불교회의 날 (9월 21일)
9월에는 니치렌대성인께서 ‘발적현본’하신 다쓰노구치법난(1271년 9월 12일)이 있었고, 그로부터 8년 후인 9월 21일에는 아쓰하라법난이 발생, 대성인 출세의 본회였던 대어본존 건립의 기연으로 되었다. 불법상에서 9월은 참으로 의의깊은 달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에 있어서는 기념할 만한 역사적인 달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1990년 9월 21일 전회원이 그렇게도 간절히 염원했던 스승, 이케다선생님의 내한이 드디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가까우면서도 먼 한일의 대지, 민중의 마음에 우정의 다리를 놓고자 하는 진심, 성심에서의 ‘서양회화명품전’의 개최였다. 이케다선생님께서는 한국을 위해, 한국의 민중을 위해 최대로 공헌하는 마음으로 방문하셨던 것이다. 호암갤러리에서 개최된 그 ‘서양회화명품전’은 도쿄후지미술관 콜렉션 가운데서도 최고의 명품만을 선정한 것으로, 15세기 ‘벨리니 행정관의 초상’과 17세기 폴랑드르 루벤스의 ‘콘스탄티누스의 결혼’ 등을 비롯, 엄선된 74점 모두 해외에서는 처음으로 공개되는 수작이었다. 본 전시에는 국내의 경제, 교육, 문화 분야에 종사하는 여러 내빈이 참석하였고 그 개막식에서 이케다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인사했다. “귀국은 일본 문화의 대은인입니다. 옛날부터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문화의 광채가 얼마나 선명하게 얼마나 풍요롭게 일본의 여명을 빛내주셨던가요. 우리들이 소장한 서양회화를 해외에서 공개하는 것도 부족하나마 은혜를 갚는 일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천년의 세월을 거쳐 동양과 서양의 미의 역사를 귀국에서의 이 미술전을 통해 깊이 깊이 감상해 주신다면 나는 그것을 기뻐하고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또 “인류의 보물을 공유하는 문화의 교류는 심오한 혼의 공명을 연주하면서 새로운 아침의 빛처럼 청신한 생명의 약동을 넓혀가는 것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언젠가 귀국을 방문하는 것은 나의 꿈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성심성의를 다해 ‘문화의 길’을 위해 힘써 나갈 결의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스승의 깊은 마음이 새겨진 9월 21일, 이날은 SGI한국불교회와 학회원, 모두에게 있어 잊지 못할 날로서 ‘불교회의 날’로 제정,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SGI한국불교회는 더욱 광포 본문대에 서서 황금의 사제의 역사를 한없이 넓고 깊게 펼쳐가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의 마디를 새기고 있다.
대어본존 도현의 날 (10월 12일)
1279년 10월 12일은 니치렌대성인이 본문계단(本門戒壇)의 대어본존(大御本尊)을 도현하시고 ‘출세의 본회’를 이루신 날이다. 대어본존은 중생의 무명번뇌의 어둠이 더욱 깊은 말법만년에 걸친 일체중생의 성불을 위해 도현해 주신 대성인 생명의 당체이며, 1253년 4월 28일에 입교개종하신 지 27년 만에 완수하신 ‘출세(出世)의 어본존’인 것이다. 이 27년 동안 대성인의 생애에 평온한 날은 없었다. 대성인이 이러한 신명에 미치는 대난을 받으신 인난홍통도, 대어본존을 “말대유치한 자의 목에 걸게”(어서 254쪽)하시기 위해, 즉 말법의 “일염부제의 일체중생에게 수여”(어서 1458쪽)하시기 위한 대자대비의 행동이셨던 것이다. 다시 말해 대성인은 전인류를 구제하기 위해 대자대비로써 대어본존을 도현하신 것이다. 목적은 오로지 민중의 행복이었다.
또 한 가지 잊어서는 안될 것은 일염부제총여의 대어본존 건립의 기연으로 되었던 1279년 9월 21일의 벼베기사건을 정점으로 하는 아쓰하라법난이다. 이 법난이야말로 이름없는 민중이 권력의 부당한 탄압과 끝까지 싸워 민중개가의 불멸의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법난은 ‘종교개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닛코(日興)상인의 절복, 홍교로 천태종 류센사의 주승이었던 닛슈, 니치벤, 니치젠사(師) 등이 차례로 개종한다. 당시의 주직 대행이었던 악승 교치에게 직무를 빼앗긴 세 사람은 닛코상인과 함께 아쓰하라 고을의 농민신도에게 홍교하고 그 결과 진시로, 야고로, 야로쿠로 등 많은 사람을 입신시킨다.
한편 류센사원의 주대(主代)인 교치(行智)는 반(反) 법화세력을 결성하여 정치권과 결탁, 농민신도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279년 9월 21일 신도 20명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세법상의 죄는 하나도 없지만 교치는 죄를 날조하여 고소했다. 재판하는 것은 저 악명높은 헤이노사에몬노조. 탄압만이 목적이었다. 취조도 없이 요리쓰나의 저택에서 사사로이 형벌을 가했지만 신도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법난은 진시로 등 세 사람의 참수, 17명의 추방으로 막을 내린다. 이때 대성인은 부당한 권력의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신심을 관철했던, 사신홍법의 삼열사를 비롯한 무명의 민중의 모습에 ‘때’를 느끼시고 ‘출세의 본회’를 완수했던 것이다.
창가학회 창립기념일 (11월 18일)
1930년, 세계는 대공황이라는 혼란 속에서 불황이 거칠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 속에서 마키구치 초대회장과 도다 제2대회장의 구상에 의해 창가학회의 전신이었던 ‘창가교육학회’가 창립되었다. 1930년 11월 18일을 학회 창립의 날로 제정케 된 배경은 마키구치 초대회장의 『창가교육학체계』 제1권에 “1930년 11월 18일 발행. 발행처 창가교육학회”라고 되어 있고,창가교육학회의 이름이 세상에 발표된 최초의 날이기 때문이다.
마키구치선생님이 니치렌대성인의 불법을 만난 것은 2년 전인 192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57세의 나이로 시로가네 초등학교의 교장을 하고 있었고 얼마 후 도다선생님도 입신하셨다. 사회건설을 위한 교육개혁을 지향하고 있던 마키구치선생님은 이윽고 불법을 근간으로 한 민중구제의 행동에 본격적으로 일어서신 것이다. 1937년 가을에는 창가교육학회의 발회식이 거행되고 마키구치선생님의 홍법의 발걸음은 해마다 활발해져 갔다.
교통편이 좋지 않았던 당시는 지금처럼 비행기도 고속열차도 없었으며 기차의 딱딱한 좌석에서 장시간 흔들리면서 여행을 해야만 했다. 여비도 아주 어려운 속에서 겨우 겨우 조달하셨다고 한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랑곳 없이 어디까지나 한탄하는 벗을 위해 발걸음을 옮기셨던 것이다. 그후 국가신도로서 사상통일을 기한 군부정부는 신찰을 거부하며 전쟁의 비도를 과감히 지적한 학회에 탄압을 서슴지않았고, 1943년 7월 6일 마키구치선생님과 도다선생님을 치안유지법과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체포한다.
결국 1944년 11월 18일, 횡포한 군부세력에 굴하지 않고 최후까지 불법의 정의를 관철하신 마키구치선생님은 구치소의 병감에서 73세의 숭고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로 불가사의한 것은 순교하신 그날이 바로 창가학회가 창립된 11월 18일과 일치했던 것이다. 해마다 맞는 이 창립의 날에 다짐하고자 하는 것은, ‘창립 이래 학회가 걸어온 길은 광선유포 추진이라는 일점에 일관하여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불의 불칙의 단체인 학회야말로 니치렌대성인의 불법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들은 역대회장이 몸으로 개척해 온 광포의 대도(大道)를 나아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함과 동시에, ‘사제의 길’이라는 학회의 혼을 마음 속 깊이 새기며 창립의 날에 더한층의 성장을 맹서해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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